불기2560년(2017)
우안거 해재 법문
{본 법문은 현재 미안마에서 수행 중인 악가삿도(Aggasaddho) 스님의 청에 의하여 작성된 글로서 낮춤말을 높임말로 바꿔서 게재합니다}
먼저 마음의 아는 성질로서 생각해보고 접근하면 어떨까싶습니다. 이 아는, 아는 마음(vinnana/윈냐냐)의 성품, 우뻭카를 계발하는데에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의 아는 성질을 알 것 같으면 수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흰색이 왜 흰색이냐고 묻는다면 다른 색깔을 다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듯이 다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과 마음, 대상을 아는 마음은 양쪽(공간성)을 다 받아들이는 중도적 알아차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하도 우뻭카인데 모하가 나쁜 게 아니라 모하의 우뻭카, 그것의 성품을 자연적인 성품/자연의 이치로 알지 못하는 것이 허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하의 우뻭카(무명)를 지혜의 우뻭카-빠라맛타우뻭카로 계발하고 전환/회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삼마디티, 삼마상깝바요, 요니소 마나시카라입니다.
능동적, 수동적으로 접근하는 것에는 그 자체가 선형적 사고의 발상이기 때문에 세간적이고 관념적인 의도를 완전히 배제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는 성질을 계발하는 행으로서의 알아차림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 사띠행은 빠라맛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바뀌고 변화하고.. 또는 본다, 안다, 지켜본다 등등 마음의 통찰작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능동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대상에 붙여서 보는 것(작용)', 수동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대상을 떨어져서 보는 것(상태)'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여기서는 맞을 것입니다.
대상에 붙여서 보든.. 떨어져서 보든지 간에 이 둘 다 자연적인 성품이며 마음의 통찰작용(상태)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닛짜(무상), 아낫따(무아), 둑카(고)라는 것이 다 이와 같은 통찰의 싸인/시그럴로서의 통찰지혜가 생겨나는 일이자, 동시에 그 지혜가 일하는 성질(회광반조)이요, 특성인 것입니다.
수용적이며 중도적 알아차림이란 곧 자연적 성품의 자연스러운 알아차림이며 그래서 순수 위빠사나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心/見 모두 빠라맛타우뻭카.. 그 청정성을 지향하는 아주 힘 있는 지혜로운 알아차림인 것입니다.
내가 맨 처음 '수용적'이라는 말에 관심 갖고 고찰하게 계기는 미안마 수행처에서 어느 한 수행자의 질문에서입니다. "알아차림(Sati)은 능동적입니까, 수동적 입니까?"
그때부터 아무리 곰곰히 탐구하고 조사해 봐도 능동적이라고 하기에도.. 수동적이라고 하기에도 적합하지가 않았습니다. 능동적이라고 보기엔 뭔가 넘치는 것 같고.. 수동적이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뭔가 부족한 면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는 마음을 알 때의 노팅은 너무 부드러워 알아차림을 하면서도 하는 것 같지가 않고..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능동적, 수동적 단어로는 적용되지도 부합되지도 않는다(꼭 맞아 떨어지지 않음)고 생각되면서 우뻭카(Upekka)라는 성품(중도)에서 수용적이라는 언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의 성질이 너무도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순수하기에 아는 마음의 아는, 아는 성질이 그렇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라고 명명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주시하지 않음이 곧 위빠사나라고 케마왐사 스님의 심념처에서 말했듯이.. 결코 힘들이지 않고.. 힘쓰지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알아차림에 가속도(우뻭카의 성장도)를 붙여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속도가 생겨나게 되면 스스로 자연스럽게 법으로서 제 할일을 제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힘이 그런 것입니다.
우뻭카(Upekkha)의 가속도(끊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어져서 행하는)가 그런 성품이기 때문에 능동적/수동적이라는 말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능동적/수동적이라는 말은 그냥 세간적 이해 차원이지 실재적인 담마의 성품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담마는 빠라맛타적 지혜의 대상이기 때문에 세간적인 능동적/수동적을 벗어난 수용적/중도적/자연스러운/지혜로운/순수/네츄럴한 것입니다.
아는 마음(vinnāṇa)의 '아는' 성질이 곧 아주 깨끗하고, 청정하고, 순수하고, 투명하고, 네츄럴-자연적 성품이라서 세간적 표현인 능동적/수동적이라는 것을 벗어나서 아는 지혜(빠라맛타우뻭카)의 받아들임의 수용적, 중도적, 알맞음, 안정됨, 적합함을 단지 지혜로써만이 그 성질, 특성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이고, 들을려고 하지 않아도 들리고.. 저절로 자연스럽게 '아는' 성질이 곧 수용적 받아들임, 중도적 그 순수함, 알맞음, 적합함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Sati'란 아는 성질을 계발하는 즉 아는 성질 그 대로 알아차리는 일이라서 절대로 집중할 수 없으며 집중하지 않는 것, 한 대상만 줄기차게 몰입하고 애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의 가속도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것이 법으로서 일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대로 알아지는 대로 다 받아들이고(수용적) 알기만 하면 이미 대상을 아는 마음, 대상과 마음이 상호 연기관계로서 중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대상과 아는 마음이 항상 함께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알아차림에 가속도가 나서 Dhamma가 제 할 일을 할 때는 앎의 지혜가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빠라맛타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지혜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빠라맛타라는 것이 Dhamma로서의 실재,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말로 하게 되면 그 맛이 떨어집니다. 그 이치를 깨닫는데는 '아는 마음'의 아는 성질을 직접 프렉티스적으로 체험하고 이해하게 되면 너무 분명하고 명료해지기 때문입니다. 실은, 중도적, 수용적이라는 말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느 땐가 아주 오래전 쉐우민 센터에서 아침 탁발 중 아는 마음의 아는 성질에 대해서 직접 체험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탁발 대열 따라 쭉 걸어가면서 보고 알고.. 보고 알고.. 보는 마음 아는 마음, 보는 마음 아는 마음을 계속해서 노팅해 가는데 갑자기 보는 마음 하는 순간, 다음 아는 마음상태로서 전체가 꽉 차면서 모든 것이(작용하는 것)다 멈춰버린 듯, 정지(止)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느낌도 전혀 없는 듯 하였습니다. 뭐라고 형용하고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아는', 그것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미동하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잠을 자고 하루가 지났는데도 다음날까지 계속 지속되다가 오후 늦게 서야 그 상태가 서서히 풀려 정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말로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오직 체험에 의한 이해라는 사실입니다.
아는 마음의 Upekkha.. 그것이 계발된 아는 지혜로서의 성품은 너무도 깨끗하고 투명하고 순수하고 부드럽고 네츄럴해서 마치 바보, 멍청이처럼 느껴지지만 너무 부드럽고 인자하고 관용적이어서 다 받아들이고 놓아버릴 줄 아는..그런 성품입니다.
'아는' 것(앎)이 '아는' 것(앎)을 대상으로 법이 일하는 것이지, 마음을 놓아버리거나 사띠가 없는 게 결코 아닙니다. 단지 아는 마음의 아주 깨끗하고 투명하고 자연적인 성품, 네츄럴한 그 본성, 아는 지혜로서의 밝고 고귀하고 수승한 이치인 것입니다.
사두사두사두~
_(2017년 10월 4일 仲秋節 우안거 해재일에 즈음하여..사사나 스님)_
불기2560년(2017)
우안거 해재 법문
{본 법문은 현재 미안마에서 수행 중인 악가삿도(Aggasaddho) 스님의 청에 의하여 작성된 글로서 낮춤말을 높임말로 바꿔서 게재합니다}
먼저 마음의 아는 성질로서 생각해보고 접근하면 어떨까싶습니다. 이 아는, 아는 마음(vinnana/윈냐냐)의 성품, 우뻭카를 계발하는데에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의 아는 성질을 알 것 같으면 수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흰색이 왜 흰색이냐고 묻는다면 다른 색깔을 다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듯이 다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과 마음, 대상을 아는 마음은 양쪽(공간성)을 다 받아들이는 중도적 알아차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하도 우뻭카인데 모하가 나쁜 게 아니라 모하의 우뻭카, 그것의 성품을 자연적인 성품/자연의 이치로 알지 못하는 것이 허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하의 우뻭카(무명)를 지혜의 우뻭카-빠라맛타우뻭카로 계발하고 전환/회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삼마디티, 삼마상깝바요, 요니소 마나시카라입니다.
능동적, 수동적으로 접근하는 것에는 그 자체가 선형적 사고의 발상이기 때문에 세간적이고 관념적인 의도를 완전히 배제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는 성질을 계발하는 행으로서의 알아차림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 사띠행은 빠라맛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바뀌고 변화하고.. 또는 본다, 안다, 지켜본다 등등 마음의 통찰작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능동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대상에 붙여서 보는 것(작용)', 수동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대상을 떨어져서 보는 것(상태)'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여기서는 맞을 것입니다.
대상에 붙여서 보든.. 떨어져서 보든지 간에 이 둘 다 자연적인 성품이며 마음의 통찰작용(상태)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닛짜(무상), 아낫따(무아), 둑카(고)라는 것이 다 이와 같은 통찰의 싸인/시그럴로서의 통찰지혜가 생겨나는 일이자, 동시에 그 지혜가 일하는 성질(회광반조)이요, 특성인 것입니다.
수용적이며 중도적 알아차림이란 곧 자연적 성품의 자연스러운 알아차림이며 그래서 순수 위빠사나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心/見 모두 빠라맛타우뻭카.. 그 청정성을 지향하는 아주 힘 있는 지혜로운 알아차림인 것입니다.
내가 맨 처음 '수용적'이라는 말에 관심 갖고 고찰하게 계기는 미안마 수행처에서 어느 한 수행자의 질문에서입니다. "알아차림(Sati)은 능동적입니까, 수동적 입니까?"
그때부터 아무리 곰곰히 탐구하고 조사해 봐도 능동적이라고 하기에도.. 수동적이라고 하기에도 적합하지가 않았습니다. 능동적이라고 보기엔 뭔가 넘치는 것 같고.. 수동적이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뭔가 부족한 면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는 마음을 알 때의 노팅은 너무 부드러워 알아차림을 하면서도 하는 것 같지가 않고..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능동적, 수동적 단어로는 적용되지도 부합되지도 않는다(꼭 맞아 떨어지지 않음)고 생각되면서 우뻭카(Upekka)라는 성품(중도)에서 수용적이라는 언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의 성질이 너무도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순수하기에 아는 마음의 아는, 아는 성질이 그렇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라고 명명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주시하지 않음이 곧 위빠사나라고 케마왐사 스님의 심념처에서 말했듯이.. 결코 힘들이지 않고.. 힘쓰지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알아차림에 가속도(우뻭카의 성장도)를 붙여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속도가 생겨나게 되면 스스로 자연스럽게 법으로서 제 할일을 제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힘이 그런 것입니다.
우뻭카(Upekkha)의 가속도(끊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어져서 행하는)가 그런 성품이기 때문에 능동적/수동적이라는 말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능동적/수동적이라는 말은 그냥 세간적 이해 차원이지 실재적인 담마의 성품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담마는 빠라맛타적 지혜의 대상이기 때문에 세간적인 능동적/수동적을 벗어난 수용적/중도적/자연스러운/지혜로운/순수/네츄럴한 것입니다.
아는 마음(vinnāṇa)의 '아는' 성질이 곧 아주 깨끗하고, 청정하고, 순수하고, 투명하고, 네츄럴-자연적 성품이라서 세간적 표현인 능동적/수동적이라는 것을 벗어나서 아는 지혜(빠라맛타우뻭카)의 받아들임의 수용적, 중도적, 알맞음, 안정됨, 적합함을 단지 지혜로써만이 그 성질, 특성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이고, 들을려고 하지 않아도 들리고.. 저절로 자연스럽게 '아는' 성질이 곧 수용적 받아들임, 중도적 그 순수함, 알맞음, 적합함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Sati'란 아는 성질을 계발하는 즉 아는 성질 그 대로 알아차리는 일이라서 절대로 집중할 수 없으며 집중하지 않는 것, 한 대상만 줄기차게 몰입하고 애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의 가속도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것이 법으로서 일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대로 알아지는 대로 다 받아들이고(수용적) 알기만 하면 이미 대상을 아는 마음, 대상과 마음이 상호 연기관계로서 중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대상과 아는 마음이 항상 함께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알아차림에 가속도가 나서 Dhamma가 제 할 일을 할 때는 앎의 지혜가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빠라맛타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지혜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빠라맛타라는 것이 Dhamma로서의 실재,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말로 하게 되면 그 맛이 떨어집니다. 그 이치를 깨닫는데는 '아는 마음'의 아는 성질을 직접 프렉티스적으로 체험하고 이해하게 되면 너무 분명하고 명료해지기 때문입니다. 실은, 중도적, 수용적이라는 말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느 땐가 아주 오래전 쉐우민 센터에서 아침 탁발 중 아는 마음의 아는 성질에 대해서 직접 체험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탁발 대열 따라 쭉 걸어가면서 보고 알고.. 보고 알고.. 보는 마음 아는 마음, 보는 마음 아는 마음을 계속해서 노팅해 가는데 갑자기 보는 마음 하는 순간, 다음 아는 마음상태로서 전체가 꽉 차면서 모든 것이(작용하는 것)다 멈춰버린 듯, 정지(止)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느낌도 전혀 없는 듯 하였습니다. 뭐라고 형용하고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아는', 그것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미동하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잠을 자고 하루가 지났는데도 다음날까지 계속 지속되다가 오후 늦게 서야 그 상태가 서서히 풀려 정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말로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오직 체험에 의한 이해라는 사실입니다.
아는 마음의 Upekkha.. 그것이 계발된 아는 지혜로서의 성품은 너무도 깨끗하고 투명하고 순수하고 부드럽고 네츄럴해서 마치 바보, 멍청이처럼 느껴지지만 너무 부드럽고 인자하고 관용적이어서 다 받아들이고 놓아버릴 줄 아는..그런 성품입니다.
'아는' 것(앎)이 '아는' 것(앎)을 대상으로 법이 일하는 것이지, 마음을 놓아버리거나 사띠가 없는 게 결코 아닙니다. 단지 아는 마음의 아주 깨끗하고 투명하고 자연적인 성품, 네츄럴한 그 본성, 아는 지혜로서의 밝고 고귀하고 수승한 이치인 것입니다.
사두사두사두~
_(2017년 10월 4일 仲秋節 우안거 해재일에 즈음하여..사사나 스님)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