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부처님같이/ 빤냐완따 스님

관리자
2021-04-24
조회수 775

게시자 Co-Admin Mahānāma

Mahānāma Pariyatti, patipatti, pativedha

Mar 28, 2021, 12:06 AM

한국테라와다불교《빤냐완따》이사장 스님의 일요법문




우리도 부처님같이


지난 3월 24일 <임종의 시간, 몇 가지 진실을 이해한다면>을 끝으로 연재법문을 일단락 지은 다음, 한국테라와다불교가 출범(2009.10.31)한 이래 이 승이 교단 홈페이지에 어떤 글들을 올려놓았었나 한번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마음공부의 감옥>(2010.11.29>, <깨달음이란 무엇인가?>(2012.6.6), 그리고 <나를 온실밖에 두어라>(2014.7.28.) 였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3개의 법문 속에는 이 승이 체험학습을 통해 얻은 불교(불교수행)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호소력 짙은 톤으로 제시하고 있는바 꼭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기회가 된다면 좀 더 다듬어서 이곳에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의 글 <우리도 부처님같이>는 2000년대 중반쯤엔가 어느 법회 때 했던 법문으로 기억됩니다. 2017년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으로 이 승이 엮었던 문집 속에는 들어있는데 왠일인지 교단 홈피에는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왜 발표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타종교와의 비교를 통해 불교(부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방식이라 공공 매체에서의 발표를 일부러 자제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비교우위에 서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도 반하는 것일 뿐더러 수행자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 특히 테라와다 불자들은 타종교·타종파를 비난하거나 결코 비교우위에 서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때, <불설(佛說)> <비불설(非佛說> 논쟁으로 한국의 불교계가 들끓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으로 말미암아 테라와다불교의 정체성이 한국불교계에 좀 더 부각되기는 하였으나, 반면에 테라와다불교가 비하되고 기성 종단으로부터 경계심을 갖게 하는 빌미를 줌으로써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저변확산을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테라와다의 가르침만이 <불설>이며 유일한 적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테라와다 불자로서의 순수한 신념일 수 있기 때문에 테라와다불교 내부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1700년 불교전통을 자부하고 있는 한국불교를 <비불설>이라고 단언해 버리면 그 누구인들 곱게 받아들이겠습니까?

테라와다 불자들은 다양한 극단들을 지혜롭게 포용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만 적통이고 원뿌리고 정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아만이고 독선이며 무아(無我)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해·배려·인정이라는 자비에 바탕을 둔 대화를 통해서만이 테라와다가 존중되고, 이 땅에 온전히 뿌리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테라와다 불자들은 테라와다의 가르침만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됩니다. 강권하거나 비교우위에 설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불설> <비불설>을 논의코자 한다면 <불설> <비불설> 대신에 테라와다는 <불타직설> 그들에게는 <불설>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종교 속의 역사적 사건을 되짚어 봄으로써 부처님의 위대함을 한 번 더 되새겨 볼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이번만큼은 도무지 비교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교인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성직자들이여. 빨리어 경전 『디가니까야』의 16번째 경 <빠리닙바나-숫따>(완전한 열반 경)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리하여, 종교를 초월한 어느 늙으신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경지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실감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어린이, 청소년, 꽃 같은 선남선녀들, 그들은 성장통을 겪으면서 나아갑니다. 가끔은 절망의 뒤안길을 방황하면서 부모님의 속을 태우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이상형을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꼭 닮고 싶은, 한번쯤은 꼭 되어보고 싶은 이상형을 떠올리면서 미소 짓습니다.

멀리 있는 것들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 비 개인 뒤, 언덕 위에 걸린 무지개처럼 그들의 가슴은 설레고, 때론 잠 못 이루기도 하지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상형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생동감이 넘칩니다. 꿈이 있는 자의 눈망울은 하늘처럼 맑고 순수합니다.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쉽게 화내는 법이 없으며, 그에게서는 언제나 긍정의 에너지와 온기가 느껴집니다. 사람은 물질의 영양분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정신의 자양분, 즉 꿈과 이상이라고 하는 무형의 양분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성숙이 가능합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고, 어두워오는 들판에서 길을 잃고 울며 헤매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

이 승에게도 이상형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 이상형에 대해서 물어온다면, 이 승은 지체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행을 닮은 고귀한 인격체가 되는 것’ 이라고. 이 승의 가슴 속에서 항상 자비롭게 미소 짓고 계신 분은 바로 모든 천상과 인간의 위대한 스승 ‘고따마 붓다’ 즉 ‘부처님’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 승 한 사람만의 이상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출가수행자의 한결같은 이상형은 바로 그 존귀하신 ‘부처님’ 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속에 타오르던 번뇌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린 분이며, 생사윤회의 고단한 여행을 끝마친 위없는 정각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훗날,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의 뜻을 대신하여 부처님께 10가지의 별칭을 붙여드렸습니다. 이름 하여 ‘여래10호’ 라고 하지요. 즉

1. 아라항(번뇌의 불 모두 끄신, 응당 공양받을 만한 분)
2. 삼마-삼붓도(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3. 위짜짜란나 삼빤노(지혜와 덕행을 함께 갖추신 분)
4. 수가또(잘 떠나신 분)
5. 로까위두(세상의 모든 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6. 아눗따로(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위없는 스승)
7. 뿌리사담마 사아랏띠(어리석은 이들 잘 이끄시는 분)
8. 대와마눗사낭(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
9. 붓도(깨달으신 분)
10. 바가와(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이와 같은 10가지 명호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을 얼마나 우러러 존경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종교에서도 그 교조의 격을 이토록 극찬한 예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불교 경전의 기록을 통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와 같은 찬사가 결코 맹신에 의한 것이거나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인도의 역사는 가히 분쟁의 역사라 할 만큼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기원전 2천년 경부터 기원전 800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200년 동안, 아리안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인도 전역은 종교, 정치,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친 대 격변을 겪으면서 민중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출현 당시 인도는 16개 국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부처님께서는 전쟁의 폐해와 사회적 갈등의 한복판, 그 혼란한 인도사상의 중심에 혜성처럼 나타나셨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모든 존재들의 평등을 주창하며, 대자대비의 정신을 펼쳐 나갔습니다,

요즘, 종교간 화합을 위한 종교지도자 모임이 결성되거나, 종교의 바람직한 사회적 역할을 모색하기 위한 학술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극단적인 몇몇 기독교 신자에 의한 불교훼손 행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이따금씩 종교간 갈등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기독교 특성상 유일신 사상이 일부 종교지도자와 몇몇 신자들의 극단적 신념과 결부되어 나타난 현상이 아니까 추측해 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들려 드리는 이 법문을 만일 그 몇몇 훼불신자들이 들을 수만 있다면, 들어서 불교의 진면목을,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마음을 십분지 일이라도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승이 출가 전, 군 입대를 얼마 앞두고 친구로부터 성서를 몇 권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불자로서 처음에는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타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틈틈이 그 성경책을 읽어나가다가 문득 그 속에서 부처님의 생애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본격적인 건설 원년인 기원전 27년 무렵, 기독교의 발상지 이스라엘에는 제국주의의 횡포가 극에 달해 있었고, 핍박받던 백성들은 그들을 구원해줄 메시아의 출현을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전역에는 곧 구세주가 나타나 제국의 핍박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이에 불안을 느낀 로마군정은 실제로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할 무렵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신생아들을 모두 살육하는 만행을 자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메시아로 지칭되는 예수그리스도가 출현합니다. 그러나 로마군정의 핍박으로 인해 예수그리스도의 종반부 활동은 거의 은둔과 도피로 점철되었고, 드디어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하는 최후의 만찬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 비수같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베드로여, 새벽닭이 울기 전에 그대는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이윽고 로마 병사들이 만찬장을 급습했고,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토록 받들던 스승 예수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맙니다. ‘너는 나를 부인하리라!’ 이 얼마나 직선적이며, 차가운 질책입니까? 예수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후 베드로는 그 죄책감으로 인해 크나큰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훗날 뼈저린 회개를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나게 됩니다.

그 만찬장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또 하나의 중요한 예언을 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12제자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 가롯유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하며, ‘여기 너희들 중에 나를 팔아먹은 자가 있도다!’ 예수그리스도의 원망어린 목소리가 가롯유다의 와인잔 속에서 출렁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골고다 언덕에서 최후를 맞은 뒤, 스승 예수그리스도를 은화 30냥에 팔아먹었던 가롯유다는 ‘여기에 나를 팔아먹은 자가 있도다!’라는 환청에 밤낮으로 시달리다가 마침내 골고다 언덕 고목나무에 목을 맨 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제지간의 가슴 아픈 악연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정녕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가슴을 향해 그토록 차가운 언어의 화살을 꼭 날려야만 했을까요?
사제지간의 인연이야기, 이제 불교 경전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불교경전은 ‘최초공양’ 사건과 ‘최후공양’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 최초로 의미 있는 공양을 올린 사람은 ‘수자타’ 소녀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시기 직전, 고행을 하시다가 내란자 강가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계셨을 때 올린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 그 공양으로 기력을 회복하신 부처님께서는 강 건너 우루웰라 마을 보리수 아래서 마침내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 후 수자타 소녀는 그러한 인연으로 불자가 되었고, 마침내 소따빤나(성자의 4단계 과위 중에 첫 번째 단계)성자가 됩니다.

“아난다여, 수자타 청신녀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

DN:16<빠리닙바나숫따(완전한 열반 경>중에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신 지 어느덧 45년, 노령의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길을 가시던 중, 대장장이 아들 쭌다로부터 대중공양을 받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차려진 음식들을 바르게 관찰하신 다음, 그 음식들 가운데 ‘수까라맛다와’라는 카레음식 만을 골라 부처님 앞에 모아 놓도록 하신 다음 공양을 드셨습니다. 그런 얼마 후 부처님께서는 적혈의 증상과 함께 입멸의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예감하시게 됩니다. 극도의 통증감각 속에서도 부처님은 불편해하지 않으시고,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의식을 바르게 유지하시면서 그 감각을 관찰하셨습니다. 대장장이 아들 쭌다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고,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위대한 스승 부처님께서 입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쭌다야, 걱정하지 말아라. 본래 육신이라는 것은 언젠가 한 번은 멸하게 되어 있는 법. 이제 여래도 그 때가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여래에게는 그 어떤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괴로움이란 없다.”

자비로우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대장장이 아들 쭌다는 비로소 극도의 두려움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공양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입멸을 예감하시며, 조용히 시자 아난다존자를 불러 당부하시길,

“아난다야, 여래가 입멸에 든 후 장차 저 대장장이 쭌다에게 다음과 같은 비난이 있을지도 모른다. 즉,‘고따마 붓다께서는 쭌다가 올린 공양으로 인해 입멸하셨다.’이 말로 인해 쭌다는 괴로워하고 마지막 올린 공양을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때 아난다 너는 대장장이 아들 쭌다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하여라.‘음식을 보시함에 있어 큰 공덕을 가져오는 것에는 2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여래가 그것을 먹고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붓다(부처님)가 될 때이고, 또 하나는 여래가 그것을 먹고 완전한 닙바나(열반)에 들 때이니라. 이와같은 공덕에 의해 쭌다는 장차 수명이 장수하고, 좋은 태어남으로 나아가는 행위를 성취하게 될 것이며, 명성을 얻고 안락함으로 나아가는 복을 얻게 될 것이다.’아난다야! 대장장이 쭌다에 대한 바난을 이와같이 변호하고 위로하여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 주셨습니다.

“베푸는 사람에게 복은 증가하고,
자비로운 사람에겐 원망이 없네.
선한 사람 절대로 나쁜 과보 받지 않고,
마침내 탐진치 끊어져서 닙바나에 들어가리.”

DN:16<빠리닙바나숫따(완전한 열반 경>중에서


불교 경전은 이상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불전과 성서 두 기록을 통해서 사제지간에 얽힌 일화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스승을 팔아먹은 가롯유다는 결국 자살했고, 대장장이 아들 쭌다는 극도의 두려움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더욱 훌륭한 불자가 되었고, 부처님의 격려 때문에 여생을 행복하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그 어떤 성현인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뉘라서 감히 그분 부처님의 한량없는 마음그릇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사는 가히 전쟁의 역사라 할 만큼 다툼이 잦았습니다. 인간은 왜 싸울까요? 왜 그토록 원망하면서 서로를 헐뜯고 짓밟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몸·이 느낌·이 생각이 바로 ‘나(我)’요 ‘나의 것’ 이라고 하는 그릇된 견해, 즉 전도된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에고)’ ‘내것’이라고 하는 그릇된 인식은 반드시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동반합니다. ‘나’ ‘내것’이 실재한다는 착각, 즉 잘못된 견해가 ‘자아’라고 하는 환영의 틀을 만들고, 그 견고한 틀이 결국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갈등의 근본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아는 있다’ ‘자아는 항상하다’ ‘자아는 나다’ 라고 하는 그릇된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마르지 않는 담마(진리)의 푸른 샘을 발견했을 때, 거기에는 갈등하는 나도 없고 대립하는 너도 없고 오직 지혜와 자비의 샘물만이 넘쳐날 뿐입니다.

부처님은 그 누구만의 한정된 이상형이 아니라 모든 천인과 모든 인류의 이상형입니다. 과거의 인간이건 현재의 인간이건 다가올 미래의 인간이건 그 누구라도 이상형은 부처님이어야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금생에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인류 공통의 꿈이어야 합니다. 꿈이 꿈만으로 끝나지 않도록, 오늘 여기에 동참한 모든 분들 가능한 많은 선업공덕을 쌓으십시오. 선을 행하는 일이라면 지체 없이 행하십시오. 그리고 정진하십시오. 대자대비 부처님의 고귀한 가르침인 팔정도(8正道)를 실천수행함으로 말미암아 생사의 거센 물결 건너 저 언덕에 무사히 당도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불멸 2565(2021). 3.28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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