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믿음'을 위하여/ 빤냐완따 스님

관리자
2021-04-22
조회수 176

작성일 : 15-06-10 19:30 


‘올바른 믿음’ 을 위하여

 

이 세상의 언어 가운데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지닌 단어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믿음'이라 말합니다. 한자어로는 믿을 신(信), 고대 인도어(빨리어)로는 'Saddhā 삳다-' 라고 합니다. 믿음ㆍ신뢰(信賴)ㆍ신의(信義)ㆍ신조(信條) 혹은 올바른 종교적 신념(信念)은 밝고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초석이 됩니다.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믿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믿음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요, 헌신이요, 존중입니다. 천성이 착한 사람일수록 믿음의 성향이 강합니다. 마음수양이 잘 된 사람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의심이 없습니다. 결코 색안경을 끼지 않습니다. 마음은 항상 타인을 위한 연민심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건강한 믿음이 확립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요즘 '믿음'이란 말보다 의심ㆍ불신ㆍ배신ㆍ맹신 이라는 단어가 훨씬 많이 떠돕니다. 시기ㆍ질투ㆍ원망ㆍ다툼 혹은 왕따ㆍ자살ㆍ묻지마 살인 등의 사회적 병리현상은 대부분 자기자신에 대한 불신과 의심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들은 안으로는 불신하고 의심하면서, 밖으로는 쉽게 배신하고 신의를 저버립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상대방에게 배신당했다’ 생각하면서 잠 못 이루거나 ‘나는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안되’ 하면서 자포자기합니다. 자기 안에 온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무한한 능력이 잠재되어 있음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근자에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집단 IS의 잔인한 처형행각 역시 인간에 대한 의심과 불신에 바탕을 둔 극단적인 종교적 신념의 결과입니다.


믿음에는 어리석은 믿음과 지혜로운 믿음이 있습니다. 욕망에 뿌리를 둔 믿음이 있고, 순결한 믿음이 있습니다. 변절하는 믿음이 있고, 한결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즉, 삿된 믿음과 올바른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삿된 믿음을 가진 자는 마침내 스스로를 병들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올바른 믿음으로 충만되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맑히고 스스로를 온전한 행복의 길로 안내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삿된 믿음이고, 어떤 것이 올바른 믿음인가?

그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일반적인 믿음과 종교적 차원의 믿음, 더 나아가 출세간적인 구도의 믿음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일상생활의 일반적인 믿음을 보면,

"나는 당신을 첫눈에 알아보았답니다. 당신이야말로 일평생 동고동락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동반자라는 것을", "자네야말로 인생의 망망대해를 함께 해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벗이라고 나는 확신하네".

그러나 금강석같던 그 믿음도 상황에 따라 언젠가는 변하는 법. 어제의 절친이 오늘의 원적이 되고, 오늘의 원수가 내일의 동반자가 되기도 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 어떤 여건 속에서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한결같은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실로 고귀한 일이며,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선량한 성품과 고귀한 천성을 가지고 태어났거나, 높은 도덕적 수양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순결한 믿음에 기반한 우정ㆍ애정ㆍ사랑ㆍ충성ㆍ신념과 신의를 끝까지 지켜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으면서 그의 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한시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세가 기울면서 몸은 병들고 가업은 파탄나 마침내 낙향의 몸이 되었을 때 그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몇몇 식솔들마저 그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당신이 최고예요. 당신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노라”고 매달리던 그 사람도 당신이 늙고 병들고 살림살이가 궁핍해지면 소리없이 종적을 감추기도 합니다.


그들은 왜 믿음과 신의를 저버리고 하나 둘 떠나갔으며, 소리 없이 종적을 감추었는가?

세상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조건만을 따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은 상대적이고 유한하며 불안정합니다. 결코 절대적일 수 없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변하는 게 세상의 섭리입니다. 그 불안정한 조건에 초점이 맞추어진 믿음은 멀지 않아 반드시 무너지고 맙니다.

그와 같은 믿음은 사랑ㆍ희생ㆍ헌신ㆍ존경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된 또 하나의 미묘한 욕망입니다. 욕망은 밑빠진 물항아리와 같아서 채우고 또 채워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욕망에 뿌리를 둔 믿음은 매우 불안한 것이어서 항상 의심ㆍ원망ㆍ불신ㆍ배신이라고 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건강한 믿음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여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믿음으로 충만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 함께 다음과 같은 마음자세를 지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1.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원망하는 마음과 화내는 마음 대신 그 사람을 향하여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 조건을 지나치게 따지지 말 것이며,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가서 나의 입장을 내세우기 전에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3. 모름지기 내가 이롭기만을 바라지 말아야 하며, 내가 수고한 것 이상의 대가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4. 혈연이나 지연 학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나와 연고가 없는 사람을 대할 때는 마치 오랜 친구나 가까운 이웃처럼 대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5. 나의 가족만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6. 도움을 받으려하기 보다는 항상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합니다.

7.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언제나 어디서나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면 당신은 그의 늙음과 병든 모습까지도 어여삐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당신이 그의 명성과 부를 사랑했다면 또한 당신은 그의 가난과 잊혀지는 아픔 까지도 보듬어 줄 수 있는 순결한 믿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일반적인 믿음(信)은 세간살이에서만 국한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종교적 믿음을 형성하는 토대가 됩니다. 종교적 삶은 세간살이의 연장선상 위에 있는 것이며, 세상살이를 한층 밝고 건강하고 의미충만하게 한다.

공부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듯이 공부를 위한 공부, 수행을 위한 수행, 우상을 위한 우상숭배, 종교를 위한 종교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종교 안에서의 믿음이나 신념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신앙(信仰)' 이라 일컫고, 다른 하나를 우리는 '신행(信行)' 이라 부릅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종교적 신념은 ‘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전지전능한 신을 상정해놓고 그 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숭배하는 정신적 행위입니다. 신앙인들은 절대자나 교주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말씀까지 절대적으로 믿으면서 그 영적 삶의 궤적을 따라 구원의 길을 찾습니다.

신앙은 절대적인 믿음, 조건없는 믿음을 첫번째 덕목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시작도 믿음이고, 중간도 믿음이며, 마지막까지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 믿음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핵심 열쇠라고 그들은 굳게 믿습니다. 


반면에 '신행(信行)'은 불교가 표방하고 있는 믿음의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견문(見聞)ㆍ사해(思解)ㆍ수행(修行)ㆍ증득(證得)의 4단계를 통해 그 완성에 이릅니다. 

1. 불교를 처음 눈으로 보고(見) 귀로 들어(聞) 접하면서 생기는 믿음의 단계.

2. 불교교리를 공부하는 과정에 그것을 사유(思)하고 이해(解)하면서 생기는 믿음의 단계.

3. 머리로 이해한 것을 몸소 실천수행(修行)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믿음의 단계.

4. 진리를 깨달아 증득(證得)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믿음의 단계.

즉, 기초적인 ‘엷은 믿음’의 단계에서 출발하여 ‘심오한 믿음’의 경지(證)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불교 역시 종교적인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는 ‘믿음(信)’ 혹은 ‘믿는 마음’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러나 타 종교에서의 믿음과 불교에서의 믿음은 그 대상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불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믿음의 대상’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약초를 캐기 위해 노를 저어 바다 한가운데로 가아가는 일이요, 물고기를 구하기 위해 산비탈을 오르는 어리섞음을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언하건대, 불교 안에서의 믿음은 창조자나 전지전능자 혹은 그 어떤 절대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교조이신 고따마 붓다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맹목적인 희생이나 헌신, 수직적인 복종이나 숭배를 전제로 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부처님의 위대했던 삶의 행적과 그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요, 그 가르침의 분명한 이해를 통한 믿음이요, 그 가르침의 실천수행을 통한 믿음이요, 진리를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를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입니다.


불교에 대한 공부가 익어지면 익어질수록, 수행을 통한 통찰지혜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부처님과 불법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는 반면, 부처님과 불법에 대한 신심은 더욱 깊어지고 확고해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믿음은 그 어떤 절대자를 향한 종교적 신념보다 견고합니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은 그 어떤 우상숭배 보다도 경이롭고 성스러우며 숭고합니다.


기원정사를 창건하여 부처님 교단에 보시한 ‘아나타삔디까’나, 인도 대륙을 통일한 뒤에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홍포를 위해 온몸을 바쳤던 ‘아쇼카대왕’, 그리고 모든 재산을 바다처럼 넓은 동정호 한가운데에 던져버리고 가족들과 함께 산골로 들어가 불도를 닦으며 살았던 중국 당나라 때의 재가 수행자 ‘방거사’는 불교사에 있어서 ‘확고한 믿음’ ‘고귀한 믿음’의 선례를 남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많은 불자들은 아직 조상 때부터 인습적으로 내려오던 우상숭배나 기복(祈福,복을 비는 것)중심의 신앙형태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산중에 사는 스님들만의 수행의 삶이 따로 있고, 재가불자들만의 신행생활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힐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직 기도나 불공만을 통해 복을 짓거나 불보살님의 가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형태가 고령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장년 중년은 물론 청년 어린이에게 까지 자연스럽게 전승되고 있습니다. 조상님을 위한 천도법회에는 그토록 열심히 동참하면서도 정기법회에 참석해 꾸준히 법문을 듣고 불교교양대학 등을 다니면서 불자로서의 소양을 쌓는 데는 소솔하거나 아예 관심을 두려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은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 그리고 근심과 슬픔과 고통과 번민’이 소용돌이치는 이 중생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도 늘 강조하셨듯이 중생의 괴로움을 해결해주는 주체는 부처님 자신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 불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형상에 예배드리는 것은 그분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표현이며, 불법에 귀의해서 금생에는 반드시 불도를 이루겠노라는 맹세요 다짐이요 나 자인과의 약속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과연 어떤 분인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약간의 공양물과 시주금을 올려놓고 그저 빌기만 하는 것은 마치 모래를 솥에 넣고 불을 때서 밥이 되길 바라는 일이요, 씨앗도 뿌리지 않고 추수를 바라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공양물이나 보시금을 부처님 전에 직접 올리거나 종무소를 통해 기부하는 일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널리 전파시키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땅에 오래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한 공덕행이며, 윤회의 원인이 되는 정신적 물질적 집착을 내려놓기 위한 수행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공양올리고 시주한다면 그것은 고귀한 선업공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윤회하는 중생의 세계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 실천수행해야만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행을 회상하고 찬탄하면서 그 간절한 가르침을 열심히 배워 이해하고 실천수행하는 것이야말로 불자로서의 올바른 믿음을 확립하는 길입니다.


믿음이 올바르게 확립되어 있다면, 그 믿음이야말로 마음의 떼를 씻어낼 수 있는 순결한 믿음이요, 변절하지 않는 한결같은 믿음이요, 삿된 것에 결코 현혹되지 않는 올바른 믿음이요, 욕망의 뿌리를 말릴 수 있는 믿음이요, 무명을 밝히는 지혜로운 믿음이요.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 근심과 슬픔과 고통과 번민이 소용돌이치는 윤회하는 이 중생의 세계로부터 길이 벗어날 수 있는 고귀한 믿음인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의 뗏목’으로 생사윤회의

거센 물결 하루 빨리 건너기를 !

 

사-두 사-두 사~두 !

0

INFORMATION


상호명 : (사)한국테라와다불교


법인등록번호 : 135-321-0000777  이사장: 이용재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반계1길 21-33 붓다의 길따라 선원

TEL: (중부권) 031-475-9171  (남부권) 052-260-2841

            (PHONE)  010-8848-3468/010-7360-9171

E-MAIL: theravada2008@kakao.com


Copyright©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사무국ALL RIGHTS RESERVED.


CONTACT

INFORMATION


상호명 : (사)한국테라와다불교


법인등록번호 : 135-321-0000777

이사장: 이용재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반계1길 21-33 붓다의 길따라 선원




TEL: (중부권) 031-475-9171

            (남부권) 052-260-2841

           010-8848-3468/010-7360-9171

E-MAIL: theravada2008@kakao.com


Copyright©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사무국

ALL RIGHTS RESERVED.




© BYULZZI Corp. All Rights Reserved. hosting by byulz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