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온실 밖에 두어라,(2)/빤냐완따스님

관리자
2021-04-21
조회수 136

작성일 : 14-07-28 17:31 


3. 과잉 책임에서 벗어나십시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밥그릇 하나쯤은 갖고 태어납니다.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지만, 지나치게 마소처럼 고생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물질적 재산을 남기려하기 보다는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자녀가 안쓰러워 수업시간 내내 교실 창문 너머로 눈맞춤하다가 함께 하교하는 학부모는 되지 마십시오. 


4. 자녀를 대할 때 지나치게 오냐오냐 하지 마십시오. 

‘오냐’라고 하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는 자녀의 절제력과 사회적 성숙을 저해하는 무지가 내재해 있습니다. 자녀의 부당한 요청이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NO’ 하십시오. 그러나 무조건 ‘NO’만 해서는 안 됩니다. 굳이 적정비율을 말하자면 ‘NO, NO, NO’ ‘YES’ (3:1) 정도면 좋겠습니다.  


5. 자녀를 온실 밖에 두십시오. 

학교간 아이를 손수 데려온다거나, 조바심하며 기다리지 마십시오. 불안전한 사회치안 상황은 당연히 고려해야겠지만, 자녀 스스로 오게 하십시오. 강하게 키우십시오. 많은 젊은이들이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한번 실패에 좌절하곤 합니다. 실패의 쓰디쓴 잔을 마셔본 자라야 만이 자신의 실체를 이해하게 되고, 성공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발목을 잡혀보지 않으면 벗어날 힘을 키울 수 없습니다. 9번,10번을 발목잡혀 본 자라야만이 비로소 11번째의 그 강력한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를 포함한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나를 온실 밖에 두어라!>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만의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안주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온실의 보호막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불신의식이라는 건강하지 못한 심리가 내면에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며, 대자연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생겨나서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아기가 모태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극도의 불안을 느끼듯, 인간 또한 자연환경으로부터 멀어질 때 불안의식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정신적 스트레스, 노이로제, 히스테리, 극도의 우울과 불면, 빙의 등으로 일컬어지는 정신현상은 현대사회에 만연돼 있는 심각한 질환들입니다. 


자아의식이 강할수록, 나라고 하는 허상에 대한 집착이 클수록, <두려움 의식>은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강한 자기 방어본능과 함께 공격적이 되거나 혹은 자폐의 성향을 띠게 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려움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입니다. 곪은 상처 위에 빨간 아까징끼를 발라 안아픈 듯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곪은 상처를 직접 절개하여 고름을 짜내고 소독약을 뿌리는 일입니다. 

불교에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 명확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라는 심리상태를 있는 그대로 왜곡없이 선입견없이 들려다 보는 것입니다. 명확히 들여다 봄에 의해 두려움이 허상임을 깨닫게 되고, 순간 두려움 의식은 뿌리째 뽑혀나가게 됩니다. 


수행에는 <온실수행법>과 <야생수행법>이 있습니다. ‘자력수행법’과 ‘타력수행법’이라고도 하지요. 

믿음 하나에 의지해 구원 받고자 하는 종교의 가르침이 타력수행법이라면,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시기 직전 통곡하는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섬(등불)으로 삼고, 담마(법)를 섬(등불)으로 삼을지언정 나(여래)를 의지하지 말라 하시던 그 가르침이 바로 ‘야생의 수행법’입니다. 타력수행법이 줄기와 잎이라면, 자력수행법은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온실의 보호막을 걷어내는 순간 줄기와 잎은 시들고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야생의 환경을 견뎌낸 생명체는 설혹 경엽이 강풍에 꺽이더라도 뿌리는 살아남아 그 이듬해 싱싱한 줄기와 잎, 그리고 탐스런 열매를 맺어냅니다. 


자력수행법으로 일컬어지는 불교수행 속에서도 ‘온실수행’과 ‘야생수행’ 있습니다. 정신을 특정 대상 한 곳에 집중시켜나가는 <사마타 수행>과 그 집중력을 기반으로 현상의 본질의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위빳사나 수행>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생사해탈의 결정적 단초가 되는 것은 결국 위빳사나 통찰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행주좌와(行住坐臥)·어묵동정(語默動靜) 언제 어디서나 분명히 자각하면서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인식과정의 실체를 통찰하는 생동하는 기능입니다. 마치 거친 파도에 끝끝내 침몰하지 않고 열반의 해안으로 이끄는 항해사와도 같습니다. 


사마타 수행법은 불교 이전에도 있어왔고, 불교 이후에도 중요하게 수행되어지고 있는(Sammā Samadhi, 正定) 수행요소이지만, 위빳사나 통찰지는 고따마 붓다께서 몸소 체험하시고 가르치신 불교를 특징짓는 해탈의 열쇠입니다. 사마타 수행만으로는 결코 두려움 등으로 나타나는 온갖 번뇌를 뽑아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마타 수행의 특성중의 하나가 고요함인데 그것은 고통을 잠재우거나 두려움을 한시적으로 덮어버리는 특성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 안에 들어가면 안주해 버리고 싶은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온실효과’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안에서의 사마타 행법으로서 삼매를 개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삼매(선정)의 입출이 자유자재할 때 그것을 기반으로 통찰지혜의 계발을 용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요한 행복에 안주하지 않고 오롯이 깨어서 통찰로 나아간다는 것은 스승의 바른 가르침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한 편안한 수행법을 선택하려 합니다. 수행이 무난하게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오직 믿음만을 의지하여 구원받고 싶어 하고, 불보살님에 대한 일념된 호명으로 말미암아 가피를 입고 싶어 합니다. 또한 산사에 고요히 않아 좌선삼매를 통해 마음의 평온을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법당이나 선방에 가부좌 틀고 앉아 화두나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수행의 전부라 생각하기도 하지요.  


좌선수행을 통해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거칠었던 호흡이 미세해지면서 차츰 번뇌망상이 가라앉습니다. 기쁨과 희열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면서 행복감이 찾아옵니다. 그 행복감마저 가라앉으면서 마침내 극도의 평온과 고요가 찾아옵니다. 이러기를 1년, 5년, 10년..... 좌복 위에만 앉으면 이내 일념삼매에 들곤 합니다. 그러다가 일상으로 되돌아가면 그 평온은 여지없이 깨지고 마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온실처럼 좋은 여건 속에서 좋은 느낌에 안주하며 만족해하는 수행은 현실문제에 부딪혔을 때 여지없이 그 삼매는 깨어지고 성내는 번뇌, 탐착하는 번뇌, 어리석음의 번뇌가 곧바로 일어납니다.  


많은 불자들이 삼귀의 5계를 받는 순간, 그것을 실천하려 애쓰기보다는 그것을 받아 지니기만 함으로써 ‘나는 불자다’라고 하는 관념의 온실 속에 안주해 버립니다. 가사와 삭발, 탁발 등이 수행의 중요 수단이기는 하지만, 타성에 젖은 요식행위에 머문 채 실천수행이 결여된다면 그것들은 한낱, 통찰 수행을 둘러싼 관념과 개념의 비닐보호막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수행시간을 한정해놓고 수행을 합니다. 2박3일 집중수행, 1주일 집중코스, 3개월간의 우안거, 3년 무문관 수행, 반복되는 1시간 좌선, 1시간 행선 등등.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과 일상의 삶은 둘이 아니어야 합니다. 진정한 수행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수행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고,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거나 공원을 산책하는 동안에도 순간순간의 집중을 가지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알아차려져야 합니다. 수행 따로 일상의 삶 따로인 수행은 결코 온전한 수행이 될 수 없습니다. 이같은 이분법적인 수행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서 비닐막을 겉어내는 순간 그 생명력은 사라져버립니다. 


순간순간의 집중력을 가지고 언제나 어디서나 ‘닥치는 데로 관(觀)하십시오.’ 갖은 망상으로 인해 머리는 뜨겁고, 몸과 마음은 다소 고통스러울지라도 절대 의기소침해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 험난한 마음의 여정이 어느 순간 통찰의 열쇠로 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좌선삼매에 들었을 때의 두려움 없는 행복에 만족하지 말고, 그 힘을 바탕으로 흔들리는 열차 안이나 러닝머신 위 혹은 장바구니 들고 두부나 콩나물을 고르는 동안에도 오롯이 깨어서 바르게 바라다 볼(Sammā Diṭṭhi Sammā Sati, 正見 正念)수 있는 야생의 힘을 배양해야 만이 번뇌를 뿌리 뽑고, 다시는 태어남이 없는 해탈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온실 밖으로 내보내십시오!
나 자신을 온실 밖에 두십시오!  

이 무더위가 끝나면 곧 추석명절이 다가옵니다. 부모친지 반기는 고향에 당도했을 때, 선산을 지키고 있는 나무가 어떠한 것들인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혹독한 풍상을 견뎌온, 야생의 시련을 끝끝내 이겨낸 등굽은 소나무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꽃피고 산새 지저귀는 봄날은 반기면서도
눈보라치는 생의 한겨울은
사랑할 줄 모른다네.

산다는 게 어찌
따뜻한 봄날일 수만 있겠으며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일 수가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말라.
생의 한복판,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생채기 난 마음마저 뿌리 채 뒤흔드는
저 폭풍우를!

그것들도 엄연한 우리 인생의 한 부분.
과거생에 우리가 지은 업의 결과물.

생살을 에이는 그 아픔마저도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로운 삶이야말로
건강한 삶, 지혜로운 삶,
완전한 삶이라네. 


<2014. 7. 19. 비구 빤냐완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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