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의 시간, 몇 가지 진실을 이해한다면/빤냐완따 스님

관리자
202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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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Co-Admin Mahānāma

Mahānāma Pariyatti, patipatti, pativedha

Mar 23, 2021, 10:34 PM

한국테라와다불교《빤냐완따》이사장 스님의 수요법문




임종의 시간,
몇 가지 진실을 이해한다면



겨울 혹한이 제아무리 매서워도 어김없이 봄은 옵니다. 진실입니다. 산골짜기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아래서 위로 흐르는 법이 없습니다. 진실입니다. 만남의 이면에는 헤어짐이 있고,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입니다. 만남은 헤어짐을, 젊음은 늙음을, 건강은 질병을, 그리고 태어남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모든 존재들은 소멸을 전제로 하여 세상에 나옵니다. 진실입니다.

어떤 생명은 모태에서 죽기도 하고, 태어남과 동시에 죽기도 합니다. 혹은 태아는 살고 산모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려서 죽고,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안에서 죽고, 밖에서 죽고, 온갖 사고나 질병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 그런데 그 ‘언젠가’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 그것은 진실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대육신에 대한 진실입니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흘러감은 강물의 특성입니다. 서울 한복판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고 있는 한강을 예로 들어 봅시다. 만일 누군가가 그 흐름을 멈추게 하려고 한남대교 쯤에서 교각 높이만큼 뚝을 쌓아 물의 흐름을 막는다고 가정한다면, 서울은 아마도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흘러내림을 멈춘 강은 이미 강이 아닙니다. 생성과 소멸, 변화, 흐름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거사님! 참 열심히 살아 왔습니다. 부모님을 봉양하고 가족들을 건사하고, 공직을 수행하면서 성실히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작별의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이 작별 역시 그 흐름의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요, 미리 예견된 자연한 이치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 흐름의 속성을, 자연의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떠나는 자, 남겨진 자의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그 ‘자연스러움’의 이치를 역행하려 하기 때문이며, 진실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 때는 기뻤는데 갈 때는 왜 슬퍼합니까? 올 때 기뻤으면 갈 때 또한 즐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시는 순간,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통곡했고, 온전하게 깨달은 제자들은 평정심을 유지한 채 침묵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습니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예외없이 변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커피잔은 깨어지고, 종이컵은 구겨집니다. 열흘 붉은 꽃송이가 없고, 푸르름을 자랑하던 싱싱한 나뭇잎들도 찬바람에 떨어져 나뒹굴지요. 우리들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죽 끓듯이 변덕을 부립니다. 몸뚱아리는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늙어갑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같은 자연한 이치들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내 뜻대로 되어지기만을 바란다면, 그렇게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에게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결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러한 진실. 생성과 소멸, 변화와 흐름이라는 그 ‘자연스러움’의 진실은 결코 ‘나’가 될 수 없고, ‘내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나’ 이거나 ‘내것’ 이라면, 가령 당신의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에게 ‘동전아, 동전아, 지폐가 되어라!’ 하면 지폐가 되어야 하고, ‘수표가 되어라!’ 하면 수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불쾌한 느낌이 일어났을 때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유쾌한 느낌으로 바뀌어야 하며, 근심걱정도 마음만 먹으면 일시에 사라져야 합니다. 즉, 이렇게 되라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라 하면 저렇게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이 느낌·이 생각에게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라 해도 그렇게는 결코 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것 또한 진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나’ ‘내것’ 이 아니라는 진실(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으며, 끝끝내 그것들을 ‘내것’이라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내몸·내마음·내가족·내가문·내집·내차·내강아지·내친구라고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관념·관습상의 내것, 명칭을 빌려서 임시로 존재하는 가상의 내것일 뿐, 영원한 내것, 실재의 내것, 고정불변의 내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무조건 놓아버리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내것 아닌 내것> 즉, 가상의·관념상의·임시의 <내것같은 내것> 일 뿐인 것들에 대하여 너무 안타까워하지 않고, 지나치게 경직되지 않으며, 너무 힘주어 움켜쥐지 말고, 조금은 유연하고 가볍게 여기며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그 가벼움마저도 놓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초대받지 않고 왔다가 허락도 받지않고 이땅을 떠난다.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떠나는데 거기에
무슨 슬픔 있겠는가?

‘나에게는 자식이 있다 재산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실은 나 자신도 내것이 아닌데 내 재산 내 자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오래지 않아 이 몸뚱이 땅 위에 누울 것이다.
의식마저 떠나 사라져버린 그때
나무토막보다도 쓸모없으리.
<빼따왓투>(餓鬼事)의 게송과
<담마빠다> 64, 41번송

그러나 실재로 우리는 그 ‘놓아버림의 자유’ ‘받아들임의 평온’을 누리지 못한 채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100년의 동굴 속에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듯,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아’ 라고 하는 어리석은 관념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 관념의 구렁이 한 마리를 ‘나’ 라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진실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진실을 우리가 왜곡하지 않고, 착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이 모든 것들이 이름을 빌린 가상의 존재일 뿐, 실재의 나가 아니고 영원한 나가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놓을 수 있고, 보낼 수 있고, 빌려 입은 육신의 옷 반납하고 떠날 수 있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시간, 놓아버려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손아귀 속에 움켜쥔 한 마리 새를 영원한 자유의 하늘로 날려 보낼 시간입니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이별은 결코 가슴 아픈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나의 딸, 사랑하는 나의 아빠라는 관념, 그리고 무상·고·무아의 지혜를 함께 수행했던 도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에게 당부합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사랑하십시오.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잡은 손 기꺼이 놓을 수 있도록만 사랑하십시오.

**거사님! 사랑하는 가족·친지·도반이라는 인연의 끈을 가볍게 내려놓으시고, 당신의 마지막 의식에 집중하십시오. 놓아버림·무주(無住)·무상(無相)·무아(無我)의 지혜로 어리석은 마음이 일으키고 있는 그 찰거머리 같은 한 생각, 그 ‘아집의 촛불’을 훅 불어 끄십시오. 그리고 들어가십시오. 진리의 세계로! 무주의 세계·무상의 세계·무아의 세계를 넘어 해탈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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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이야기
부처님께서는 사람 사는 세상을
이렇게 비유하셨다.

“어떤 꽃은 진흙탕 속에 묻혀 있고
어떤 꽃은 진흙탕 뚫고 올라 오고
어떤 꽃은 진흙탕 위에 활짝 핀다.”

이렇듯

욕망의 진흙탕 속에 빠져 살면서
그 진창을 못 벗어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갈망의 진흙탕 속에 살면서도
그 진창에 물들지 않는
한 송이 연꽃 같은 성자가 있다.

연꽃은 진흙탕 연못에서 피어나지만
연꽃이 꼭 연못에서만 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도 연꽃은 피어난다.

걸음을 걸을 때 무심하게 걸으면
온갖 망상에 휩싸이지만, 걸어갈 때
‘아는 마음’이 함께하면 망상이 사라진다.
번뇌망상이 사라진 자리에 연꽃이 핀다.

발을 들 때 들어올림을 알아차리고
발이 나아갈 때 나아감을 알아차리고
발이 내려갈 때 내려감을 알아차리고
발이 땅에 닿을 때 닿는 감각을 알아차리면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발바닥에 연꽃이 핀다.

빨래할 때는 빨래하는데 마음을 두고
쌀씻을 때는 쌀씻는데 마음을 두고
설거지할 때는 설거지하는데 마음을 두어라.
화날 때는 화난 마음을 알아차리고
기쁠 때는 기쁜 마음을 알아차리고
슬플 때는 슬픈 마음을 들여다 보아라.

‘알아차리는 마음’ ‘아는 마음’이 함께할 때
지혜가 생겨나고 번뇌가 사라진다.
사라진 그 자리에 연꽃이 피어난다.

천상은 마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번뇌가 사라지면 그 자리가 천상이 된다.
번뇌가 사라진 자리에 활짝 핀 연꽃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 불국정토다.

<발바닥에 핀 연꽃>전문 (2564.4.26)

*

물 위에 피는 연꽃을 수련(垂蓮)이라고 합니다.
왜 물 수(水)자를 쓰지 않고, 잠잘 수(垂)자를 썼을까?
동물들은 잠잘 때 눈을 감지만 연꽃은 해가 지면
꽃잎을 오므리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연못이나 수곽에 피는 연꽃을 수련이라 합니다.
그러나 연꽃이 꼭 물 위에서만 피는 것은 아니지요.
흙 위에서 피어나면 토련(土蓮), 즉 ‘토란’이라 하고
나뭇가지에 피어나면 목련(木蓮)이라 하지요.

목련(木蓮)은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봄꽃 중의 하나입니다.
이 승의 은사였던 고 윤강원(尹江遠)시인의
시 구절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한 잔의 슬픔 속에 갇혀 있다.
밤새도록 불면(不眠)의 피리를 불어도
시가 되지 못하는 말의 새떼들이 잠들어 있다.
불 속의 얼음, 얼음 속의 불 .....”

오면 반드시 가게 되어 있고,
피면 곧 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건만,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몸살을 앓는 중에도
이곳 산중엔 손님처럼 또 한 번의 봄이 찾아왔고
손님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운 듯 오늘도
그 찬란한 개화를 스마트폰에 담아봅니다.

코19가 전국으로 확산하던 작년 봄엔
문 없는 산문을 굳게 닫아 놓은 채
봄의 길목에 앉아 진달래며 동박나무꽃
민들레 애기똥풀 목련꽃 등을 폰에 담아서
몇몇 불자님들께 문자메시지나 카톡으로
경전 게송과 함께 보내드리곤 했었습니다.

오늘, 밴드에 올리는 이 사진들은
작년 봄에 찍어 두었던 것으로서
목련꽃이 한 송이만 피어있는 마지막 사진은
30년 전에 찍은 것입니다. (1991. 4. 19)
아무쪼록 이 사진들을 통해
꽃들의 개화 속에서 낙화의 무상함도 관하시고
코로나19로 긴장된 마음을 휴식하시기 바랍니다.

*

(오늘로서, 지난 1월 6일부터 게재하기 시작한 메시지 형식의 ‘이사장스님의 수·금·일 법문’은 일단락하고, 운영진과 의논하여 곧 그 바통을 이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딱딱한 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디, 모든 분들이 담마 따라서 고의 온전한 소멸에 이르시길 기원합니다.)


불멸 2565(2021). 3.24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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