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다와 소승불교는 다른 것/빤냐와로 삼장법사

관리자
2021-04-22
조회수 1379

우리는 삼장법사라고 하면 <서유기>에서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서역으로 떠나는 스님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삼장법사라는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리 낯선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삼장법사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이는 드뭅니다. 절밥 좀 먹었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삼장법사를 경과 율과 논, 즉 삼장을 통달한 스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태반입니다. 그러나 실제 삼장법사는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엄청난 존재입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삼장을 달달 외우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분만이 삼장법사의 칭호를 받습니다. 미얀마나 태국, 스리랑카의 수많은 스님들 가운데에 삼장법사는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 칭호를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셈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삼장법사가 한 분 계십니다. 태국에서 삼장법사로 인정받은 진용 스님(빤냐와로)이 그분이십니다. 진용 스님은 한국인 스님으로는 유일하게 삼장법사의 칭호를 받은 분입니다. 이 스님은 테라와다 태동기를 맞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엄청난 위상과 위의를 아는 사람이 적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태국에 가시면 최고의 VIP로 추앙을 받는 분입니다. 언행일치의 삶, 삼장의 가르침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진용 스님을 일단 친견하면 누구나 스님이 내뿜는 위신력에 절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위대한 한국인 테라와다 스님께서 고품격 언론을 지향하는 <미디어붓다>에 테라와다 불교의 모든 것을 직접 설명하는 글을 연재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지난 3월 담마스쿨에서 하신 법문내용으로 구성된 스님의 글은 조만간 <테라와다 불교의범 및 신행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기도 합니다. 테라와다, 티베트, 유럽, 미국 등 모든 불교에 열린 입장을 갖고 있는 <미디어붓다>를 통해 너무나 자랑스럽고 고귀하신 한국인 테라와다 삼장법사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좋은 기회에 많은 독자여러분의 열독이 뒤따르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삼장법사 진용스님(빤냐와로)의 “테라와다 이야기”

- 2. 테라와다의 가르침⓵
“테라와다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순수한, 2555년간 변형되지 않은 진리”


2. 테라와다의 가르침


(1) 테라와다


테라와다(Theravāda)의 테라(thera)는 「장로(長老), 상좌(上座)」, 와다(vāda)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으로, 테라와다를 직역하면 「장로들의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장로는 승단(saṅgha)에서 비구(bhikkhu)들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입니다. 상좌는 비구들 중에서 가장 윗자리(상좌)에 앉아 가르치는 훌륭한 사람(장로)들이라고 하는 존경의 의미로부터 생겨난 표현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3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부처님의 3번째 제자였던 마하 깟사빠(Mahā Kassapa)라고 하는 대 아라한이 부처님을 곁에서 오랫동안 모시었고 부처님이 인정하신 측근의 제자인 우빨리(Upāli), 아난다(Ānanda) 등의 약 500명 대 아라한들을 모아 결집을 실시하여 「부처님의 순수한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정리했습니다. 제1차 결집으로 불리는 회의입니다. 그 결집으로 정리된 경전에 근거하여 테라와다 불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능한 한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므로 보수적이라고 말해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테라와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상의 길은 없는 것을 체험으로부터 확신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길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삼법인, 사성제, 인연의 가르침, 8정성도와 깨달음을 이루어 해탈하기 위한 사마타와 위빳사나 명상이라고 하는 수행 방법입니다. 부처님은 해탈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집착을 없애고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테라와다의 장로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게 다만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가는 것에 자신의 모든 책임을 두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해석을 더하거나, 빼거나, 변형하거나 하는 것을 일체 거부합니다. 그리고 빨리 경전에 기록된 부처님의 길로부터 벗어나지 않게 사는 것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당시에도 그러한 장로들의 태도가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후에 테라와다로부터 멀어져 대중부로 불리는 종파를 만들었습니다. 그 대중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분파가 생기고 부처님 입멸 후 200년 정도 지나면 18개의 종파로 분열해 버렸습니다. 이것들은 정리해 부파 불교로 불리고 있습니다.


부처님 입멸 후 4~500년 정도 지나서 부파 불교를 비판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쪽이야말로 우수하다고 하는 의미를 담아 대승 불교라고 칭하고 부파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인도의 대승 불교가 소승불교라고 부르고 있던 것은 테라와다가 아닙니다. 실제로 소승으로 불리고 있던 부파 불교는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테라와다는 대승이나 소승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오랫동안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인 테라와다 불교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555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신선함과 동시에 놀라울 정도의 현대적인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보면 그 합리성과 과학적인 일로 깜짝 놀람과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현대에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납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로들이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비판을 하여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 지켜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현재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행사인 '까티나 가사축제'의 모습.)


(2) 테라와다 불교란


테라와다 불교를 우리말로 상좌 불교, 별칭으로 근본 불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불교 종파와 분명히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지만 테라와다 불교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해 나가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교가 지금까지 2천년 이상의 긴 세월동안에 여러 사람들의 해석의 차이라든지 방향 전환 등에 의해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과는 근본을 달리한 형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본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싶은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근본 불교라고 불리는 것은 그러한 의미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처음 진리를 깨달아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 확대될 만큼 설득력이 있어 시방으로 흘러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수행 방법이나 실천의 방법도 모두 부처님 스스로가 나타난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테라와다 불교를 배우는 것은 우리들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진리를 깨닫기 위해 힘쓰는 것이지, 부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우리들 독자적인 길을 걸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아 열반을 향해 생사의 괴로움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파악해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넘어 두 번 다시 윤회하지 않아도 되는 그 진리를 체험할 수 있으므로 그 길을 나타내 보이신 스승인 부처님에 대해서 당연히 존경의 마음을 가집니다. 또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으므로 이 훌륭한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멋대로의 생각을 더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가르침이 최선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과 똑같게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 나가다보니 테라와다 불교 사람들은 불교의 보수파라고 보여 지는 일도 있지만, 그만큼 부처님 가르침 이상의 길은 없다고 테라와다 불교 사람들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말씀하신 방법 말고 깨달음의 길을 여는 다른 방법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부처님의 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므로 불교라고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테라와다 불교이며,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그 길을 따라서 가면 부처님이 나타내 보이신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위해서 나타낸 길은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의 수행법이며, 거기에 이르는 길이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을 이루어 해탈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집착을 없애는 것이며,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스스로의 체험에 근거한 방법이며, 집착을 일으키는 번뇌를 지우지 않는 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없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테라와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고 새로운 경을 기록한 책을 만들거나 할 것도 없이, 다만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 나가는 것에 자신의 임무를 두므로 다른 종파와 크게 구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입멸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연 설명하기 위해서 새롭게 해석을 더해 간다고 하는 방법 속에는 물론 뛰어나고 훌륭한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테라와다 불교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러한 것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변형이 되고나면 그것을 신호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 있어 인간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말해진 방법과 가르침에 변화가 생겨 버립니다. 이제 그렇게 되면 불교라고는 부를 수 없는, 불교가 아닌 불교라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테라와다 불교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부파 불교 시대에 테라와다 불교로부터 떨어져나간 경량부라는 종파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계율이나 아비다르마 등을 특별히 소중히 하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에 기초를 두고 불교를 실천했으니까 크게 생각하면 그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 종파라고 말할 수 있지만, 현재는 경량부와 같은 부파는 어디에도 존재하고 않습니다. 부파 불교를 거쳐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것은 테라와다 불교뿐입니다.


대승 불교에서 소승불교라고 불리어지고 있던 종파는 부처님 입멸 후 200년 즈음에 인도에서 테라와다 불교로부터 나뉘어 떨어져나간 부파 불교의 각 종파로, 그러한 불교를 비판하며 대승 불교가 형성되어 갔던 역사적인 사실이 있지만, 대승 불교로부터 소승불교로 불리고 있던 부파 불교는 지금에 와서는 어떤 부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인식 부족입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처음부터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계승하여 유지해온 불교이며, 대승불교나 소승불교와는 그 성립 과정도 주장도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것입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불교 성립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봅시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테라와다 불교로부터 나뉘어 대중부라고 하는 분파가 탄생합니다. 이것이 부파 불교의 시작으로 기원 전 100년경까지 몇 개의 부파 불교가 태동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종파와 같이 조사에 의해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면서 나뉘어 나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서기 원년(부처님 입멸 후 500년)에 대승 경전이 쓰여 지기 시작해 서기 100년경까지는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등의 초기 대승 경전이 완성됩니다. 서기 200년경 용수에 의한 「중론」 「12문론」에 이어 「해심밀경」 「여래장경」 「열반경」등의 경전이 완성되고, 또 400년경 세친의 「유식 20론」이 쓰여 졌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한 것은 이 「유식 20론」전후지만, 처음부터 중국에서 쓰여 진 대승 경전을 불설의 불교로 받아들였으므로 대승 경전이 불설인지 아닌지의 논의는 거의 일어나지 않은 채 받아들여져 버린 것 같습니다. 대승 경전이 쓰여 진 것은 서기 원년부터 400년경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잘 생각해 보면 불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로는 부족하지만 그러한 경전이 불교의 가르침에 필적하고 있다고 보는 분이 일반적이어서 한국에서는 그만큼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불교 전래로부터 150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인 테라와다 불교를 다방면으로 배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부처님의 직접적인 말을 구술과 필기로 기록해서 2555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장로 비구들의 노력으로 변형이나 더해지거나 하지 않고 전하여 왔습니다. 그런 덕분으로 21세기가 시작된 오늘날에도 2555년 전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를 우리는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만큼의 세월을 빛바램 없이 이어져서 문명이 이 정도까지 발전해 온 오늘날에도 수행과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지침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이 유일무이의 진리를 말해고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증명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부처님 가르침의 훌륭한 점은 그것이 전란의 세상이든, 불황에 가라앉는 어두운 시대이든,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도, 또한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아시아 사람들이든, 어떤 인종에 있어서도, 혹은 어린 아이이든, 노인이든, 과학자이든, 학교의 선생님이든, 어떠한 직업이든지, 그런 것에 일체 상관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 누구나 곧바로 실천할 수 있다고 하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노력에 의해 기록되어 온 방법이 소중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555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배우면 항상 신선하고 감동적이며 놀라움을 체험하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일상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사회나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있습니다. 사회가 변화해도 또 사람들의 생각이 아무리 바뀌어도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진실은 한가지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진리에는 변형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문이 있다면 우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만약 변형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변형해 보세요.』라고 말하고 계시는 만큼 그 방법은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부처님은 자신의 체험으로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또는 과학의 법칙과 비교해 모순이 있다면 그것을 지적해 보십시오. 근본불교 또는 원시불교라는 표현이 조금은 낡은 인상을 주는 듯도 하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고 있는 순수한 불교이며, 2555년간 변형되지 않은 진리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사실에 자랑을 가지고 배워 주시기 바랍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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