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이해하는 것입니다/사사나 스님

관리자
202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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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5.  우안거 입재법문 



“보이는 것으로 인해 번뇌(kilesa)가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보이는 것을 통해 일어나는 번뇌를 어떻게 더 빨리 신속하게 알 수 있으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왜 자꾸 올라오는지요?”라고 어느 수행자가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참으로 많은 번뇌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이 없다면 번뇌라는 것도 알지 못하겠지요.

 

그런데 6문이 다 열려 있어서 보이는 것으로 하여금 번뇌가 일어나는데는

어떡하겠습니까?

Tejaniya Sayadaw(떼자니아 사야도) 께서는 보이는 줄 아는가?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이는 줄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라고 하는 것이며 알아야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일 뿐.. 번뇌는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6근에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번뇌는 6문을 의지해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어디에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면 그것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에 욕망은 없습니다. 욕망은 왜 일어날까요? 그것은 무엇을 보거나 들었기 때문입니다. 접촉이 있을 때 느낌이 있고, 느낌 때문에 욕망이 있습니다.”

 

미안마 삼장법사이신 Yaw Sayadaw(요 사야도)께서도 ‘우리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번뇌에서 벗어났다면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번뇌들이 사라졌는데도 수행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번뇌가 많이 일어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수행자로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이 일어나서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알아차림 또한 놓치지 않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많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 수행을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는 힘이 있기 때문에 사띠가 좋다는 의미입니다.

 

사띠가 좋다는 것은 뭐가 되었든지 일어나는 현상마다 다 대상으로 볼 줄 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일어나더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더 큰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모하(치심/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알아야만이 지혜가 생기는 것이지 모르면 지혜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알아야만 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많이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만큼 많이많이 사띠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없애려하거나 안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더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관찰(수행)하는 마음에 원하고 조절하는 마음이 들어 있을 것 같으면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괴로움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대상으로 볼 줄 아는 힘이 있다면 아무리 큰 번뇌더라도 알았다면 된 것입니다. 알면 기뻐해야 됩니다.

 

보이는 것이 번뇌라면.. 그것을 대상으로 알 것 같으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대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대상이 있어서 보는 것을 많이많이 볼 줄 안다면 아주 좋은 것입니다. 보는 일을 많이많이 해야 되기도 하고 보는 줄을 많이많이 알기도 해야 합니다.

 

실은, 수행에 있어서 번뇌처럼 관심 갖기에 좋은 대상도 없으며 분명하고 확실한 대상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잘 보이니까 찾아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보면 됩니다. 보고 알면 그만입니다. 알고 이해하면 된 것입니다. 대상으로 알면 됩니다.

 

원래 수행이라는 것이 번뇌를 보고 그것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없앤다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칫, 관찰(사띠)하는 마음조차 잃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대상으로 아는 가치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코 없앨 수 없다는 것이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없앴다는 것은 지혜로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띠로서 수행하는 마음이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일입니다. 바른 기억이란 이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상기시키고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아라한들도 닙바나를 항상 대상으로 한다고 사야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나서 지혜로서 이해하게 되면 그것이 진정 사라진 것이고 없어진 것입니다. 억누르거나 집중해서 없어지게 하는 것은 마음의 힘이 없습니다. 나(자아/아만)라는 것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해를 하게 되면 더 이상 허용하지 않고 당하지 않고 괴롭지 않습니다. 이해해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도 대상에 대해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넓고 다양합니다. 아는 지혜의 힘이 증장될수록 이해의 폭(범위)은 넓고 깊어질 것입니다.

 

주말수행에서 어느 수행자가 번뇌 때문에 힘이 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마음에 대해서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번뇌..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마음일 뿐이고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대상일 뿐이고 작용할 따름입니다.

 

그럼 일어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제 할일을 하기 위해서 일어납니다. 지혜도 제 할일을 합니다. 아는 일을 합니다. 거기에는 결코 나다, 너다, 사람이다, 중생이다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 자연적인 성품이요, 성질일 뿐입니다.

번뇌라는 것도 일어나는 성질로는 단지 마음일 뿐이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지혜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일어나는 것은 다 법이거나 자연의 이치, 둑카(dukkha)라고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을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번뇌에 대해서 보다 더 잘 아는 사람, 분명하게 아는 사람, 확실하게 이해한 사람, 그래서 번뇌를 허용하지 않고 당하지 않는 사람, 그것에서 벗어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럴 때 정말로 번뇌를 없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Yaw Sayadaw 말씀처럼 번뇌가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되고 수행자가 되는 이유라고 봅니다.

사실상, 위빠사나 대상으로서의 번뇌는 쓸모가 없는 게 아니라 관심 갖기에 충분하고 좋은 대상이자 훌륭한 수행 주제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교훈삼기에 아주 좋은 교보재이자 도반이며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이나 인생에 대해서도 이것으로부터 배워두면 아주 힘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학교가 따로 없을 듯싶습니다.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나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큰 재난을 당해야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쉐우민 큰 사야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번뇌로부터.. 둑카로부터 배우고 이해하여 교훈을 삼는 인생길이요, 삶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번뇌가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만큼 봐야할 것, 알아야 할 것, 알려지는 것이 많기 때문에 배우고 교훈 삼을 것도 많아서 보상(이익) 받을 것도 많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더욱 단단해지고 힘이 있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띠나 앎의 대상이 되면 모두 괜찮은 것들입니다.

좋은 것(善法)입니다. 괴롭지 않습니다.

평온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알아차림의 힘(보는 힘)을 기르고 계발하는데 최상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할 줄 아는 지혜나 능숙한 알아차림으로 성장하고 진보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질이 수승해질 뿐만 아니라 진짜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대상을 보는데 있어서도 관점이나 견해, 생각을 보다 유용하고 잇점이 많은 방향으로 틀어서 볼 것 같으면 기존의 수행방식이나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넓게 탐색할 수 있는 지혜로 돌려볼 수 있습니다.

 

금년도 우안거 때에는 번뇌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이해하여 둑카에 대한 진정한 힘이 증장하도록 그 몫을 다해보시길 바랍니다.

사띠와 지혜로서 마음을 깨끗히 닦고 청정하게 하는 것이 번뇌에 대해서도 둑카에 대해서도 다 이해하는 中道의 길입니다. 대상을 알아야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담마에 대한 이해력을 아주 넓게 적용시키고 활용해 볼 수 있는 안목(아는 지혜)을 의미합니다.

부디 이 길 따라 마음의 평온과 자유롭기를 기원합니다.


사두사두사두~

 

_(2017년 7월 5일 경주 마하보디선원에서 사사나 스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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