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뜨라맛잣땃따(tatramajjhattatā):중립성 (20060901)

담마마-마까
2021-08-11
조회수 50

오늘 할 부분은 스님이 중립성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중립성이란 ‘인식하는 대상에 대해서 균형 잡힌 객관적인 태도를 가지는 기능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담마빠다(法句經, Dhammapada)에 84번째 게송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스님들이 우안거를 지내는데 네란자라강-니련선하에서 지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마침 네란자라강 부근이 기근이 들어가지고 아주 사람들이 살기가 힘드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먹을 것도 없으니까 “스님들 여기서 결제 지내십시오” 초청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주변 사람들도 스님들께 탁발 올리거나 공양 올리는 것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 힘들게 그래도 서로를 채찍질해가면서 삼 개월을 지냈습니다. 삼 개월을 지내고 나서 사왓디에 있는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이렇게 이렇게 결제 지냈습니다.” 보고를 하러 갑니다. 사위성에 보고를 하러 갔는데, 다음날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 탁발을 하려고 시내를 나갔는데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공양물을 올립니다. 결제를 끝나고 갔으니까 그날은 아주 풍족하게 공양을 탁발을 했어.

 

절에서 머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태종사에 태국 스님들이 세 분 왔죠? 와있는데 일반인 한 분이 따라왔죠? 그렇게 시봉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따릅니다. 그걸 빨리어로 얘기하면 ‘깝삐야(Kappiya)’라고 얘기합니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스님들이 못하는 일들을 대신하고 또 스님들 일들을 도와주고 하는 그런 무리들을 깝삐야라 그럽니다. 대승불교에선 보통 공양주 보살이나 아니면 사무 보는 이런 분들이 깝삐야에 해당됩니다. 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

 

그날 절에서 탁발을 잘 받아와서 스님들은 좋은 음식이든 싫은 음식이든 구분하지 않고 공양을 하고 나서 남은 음식물을 내줍니다. 부처님도 탁발해오고 나서 남은 음식들은 미처 탁발을 못 나간 병든 비구들이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탁발을 못한 비구들이 갈라먹도록 하라 그럽니다. 그러고 나서도 남은 음식들은 이런 깝삐야, 사중에서 머물면서 스님들 일들을 도와주는 그런 무리들, 재가신자들이 갈라먹도록 하라 그럽니다. 그러고 나서 남은 음식들은 먹고 살기 힘든 마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래도 남은 것은 가축들에게 먹이도록 하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여러분들도 탁발을 하고 나면 스님이 전에 그런 얘기를 하기 전에는 탁발 한 음식에 대해서 욕심을 많이 부렸습니다. 괜히 와서 누가 무슨 음식을 해왔나 하고 기웃기웃하기도 하고, 또 스님들 먹고 나면 남는 음식들 서로 맛있는 거 먹을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태종사에서, 스님이 그 부분을 얘기를 해서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어쨌든 음식들이 들어오면 깝삐야들이 먹게 돼있습니다.

 

근데 세 달 동안은 그 어려울 때 잘 참고 견디면서 이 스님들을 시봉하던 무리들이 좋은 음식이 들어오니까 그냥 좋아가지고 흥분해가 날뛰는 거라. 그 모습을 보고 스님들이 부처님한테 가서 인사를 하면서 얘기를 합니다. 저 깝삐야들은 네란자라 강에서 삼 개월 동안 안거를 지낼 때 우리들을 참 잘 도와주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또 노력하고 평정심을 잃지 않았는데, 좋은 음식이 들어가고 또 기뻐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니까 통제를 못하고 저렇게 날뜁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한 얘기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불자들을 ‘사뿌리사(Sapurisa)’라고 이름 붙입니다. 사뿌리사는 불교도라고 할 것 같으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뿌리사는 착할 善(선)자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보통 처사 거사, 선비 士(사)자 써서. 선사(善士)라고 씁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전부다 사뿌리사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일반 제자들을 부를 때 사뿌리사라는 용어들을 많이 씁니다.

이 사뿌리사(sapurisa)는 모든 집착을 떠나서 자유롭게 그리고 올바르게 수행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사뿌리사라고 얘기합니다. 집착을 떠나야 되는데 지금 이 사중들은, 절에서 머물고 도와주는 이 사중들은 그렇게 좋고 나쁜 것에 대해서 집착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음식에 대해서 기뻐하고 날뛰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사뿌리사라고 하지 않는다 얘기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용어를 썼습니다. ‘산따(santa)’라고 해서 산따도 마찬가지로 착한 사람들이란 용어를 써서, ‘선사’ ‘선인’ 그렇게 얘기합니다.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는 자를 ‘산따’라고 얘기합니다. 보통 착하다 할 때만 얘기하기 때문에 사람을 가리킬 때만 쓰는 용어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뿌리사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사뿌리사는 집착을 떠나서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말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 그렇게 해서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지 않는 자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빤디따(pandita)’라 해서 여러분들도 가장 많이 들어본 용어일 겁니다. 얼마 전에도 우빤디따(U. Pandita) 스님 오셨죠? 우(U)는 존칭어고 빤디따(Pandita)라는 건 현자, 현명한 분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어떤 분을 빤디따(pandita)라고 그러냐면 즐거운 일을 만나도 괴로운 일을 만나도 거기에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자를 빤디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여기에서 쓴 게 사뿌리사하고 빤디따 입니다. 삼 개월 동안 힘들 때 수행했던 스님들은 싫은 음식 나쁜 음식들을 탁발해서 공양을 해도 거기에 대해서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습니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하는 일을 똑같이 만났습니다. 사왓디에 왔을 때 탁발이 잘됐을 때는 좋은 음식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즐겁거나 괴롭거나 하는 일을 만나도 거기에 대해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여러분들은 빤디따다. 그런데 불교도라고 하는, 사뿌리사 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거라. 집착을 떠나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수행을 해야 되는데 집착을 떠나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이 일어났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부처님의 제자라면 출자자들은 빤디따가 되고, 재가인들은 사뿌리사가 되어라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자, 여기서 오늘 할 얘기에 대한 주제가 있습니다. 따뜨라맛잣땃따(tatramajjhattatā)라고 하는 중립성, 중립성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슬퍼하거나 기뻐하지 말아라.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당황한다든지 또 잘 돼갈 때 정신을 못 차린다든지 또 슬픔에 빠졌을 때 아니면 불쾌한 감정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계속 증폭돼서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갖다가 통제하고 콘트롤 해줄 수 있는 것이 이 중립성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 더 얘기하면 사범주라고 아십니까? 자비희사의 마지막에 捨(사)자 우뻭카(upekkhā)가 이 중립성에 해당이 됩니다. 우뻭카는 뭡니까? 평온함, 평등성 그런 뜻으로 쓰입니다. 평온함이라고 하는 건 싫어하고 나쁘고 하는 것을 떠난 상태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나와 너를 떠난 상태 이런 것들을 우뻭카라고 합니다.

사무량심은 ‘브라흐마짜라위하라’, 범천들이 머무는 ‘짯따로 브라흐마짜리야’ - ‘사범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천신들이 머무는 정신 세계다 하는 뜻입니다. 실제 천신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 자신들을 얘기합니다.

 

또 일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 할 때 뭐가 나옵니까?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 삐띠(pīti) 수카(sukha) 다음에 우뻭카(upekkhā). 나오죠? 사선정에도 이 중립성이 해당됩니다.

 

아, 그런데 이 따뜨라맛짯땃따라고 하는 용어는 초기불교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아비담마에서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이 뜻과 마찬가지로 쓰였던 게 여러분들과 지금 얘기하는 이 우뻭카라는 용어로 쓰였고 따뜨라맛짯땃따하고 약간 다르지만 거의 비슷하게 쓰였습니다. 우뻭카는 사마타에서 강한 부분이고, 위빳사나에서는 조금 약한 부분입니다. 근데 따뜨라맛짯땃따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아우르는 그런 용어로써 쓰여집니다.

사선정이나 사범주라고 하는 것은 모두 사마타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위빳사나에 포함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거의 동의어로써 쓰여지다시피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크게 구분하지 않아도 관계없습니다.

 

또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는 위빳사나 수행에서 쓰여지는 용어들입니다. 그러고 나서 에깍가따로 넘어가지게 되고. 어떤 면에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아우르는 용어로써 이 중립성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여집니다.

또 여러분들 칠각지 있죠? 칠각지(七覺支, satta sambojjhaṅga)가 뭡니까? 칠각지에서도 맨 마지막에 사각지-우뻭카 부분이 나옵니다.

사띠(sati), 담마위짜야(dhammavicaya), 위리야(vīriya), 삐띠(pīti), 빳삿디(passaddhi), 사마디(samādhi) 해서 맨 마지막에 우뻭카(upekkhā)가 나오는데, 칠각지는 위빳사나와 직접적인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용어는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중요하게 쓰여지는 용업니다. 이것만 잘 조절이 돼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하는 것에 빠지지 않고,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오류들로 인해서 실수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스님이 와서 여러분들한테 주의사항을 얘기한 것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부분에 등한시했기 때문에, 사띠가 그때 당시들에 작동들을 안 했기 때문에 이 중립성을 잃어버리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일어나는 현상-경험되는 현상이 불쾌하다고 하더라도 나마와 루빠에 대한 현상관찰이 있다고 하면 그 불쾌한 감정들은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맞습니까?

나마와 루빠를 다 들먹이지 않더라도 몸에 대한 관찰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쾌한 감정들은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몸에 대한 관찰이 뭡니까? 호흡 ‘일어남’ ‘사라짐’만 사띠하고 있어도 일어나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소리, 루빠 입니다. 거기에 대한 관찰만 열심히 하고 있어도 그렇게 일어나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마와 루빠를 다 들먹이지 않더라도 루빠 하나만으로도 사띠가 있을 것 같으면 그 속에는 틀림없이 중립성은 있게 돼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이 중요하고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된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데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루빠에 대한 관찰만 하더라도 그 속에는 중립성이 있고 또한 끊임없이 사물들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인내가 있게 됩니다. 칸띠가 없으면 일어난 현상 1회에서 그쳐버리는 수가 많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화가 일어나면 화를 참았다가 지속되는 게 없으면 다시 폭발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루빠 하나를 관찰하고 있더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칸띠와 따뜨라맛짯땃따 라고 하는 것이 있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갖다가 쩨따시카(심소)의 소바나 쩨따시카(sobhana-cetasika)에 포함시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돼?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 금방 반응을 하게 됩니다.

중립성의 가장 가까운 적을 뭐라고 꼽느냐면 무지, 아윗자(avijjā)라고 합니다. 내가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것이 가까운 적이다.

좀 더 먼 적을 얘기할 것 같으면 탐욕과 욕망! 무지한 것은 무엇으로 인해서 일어납니까? 탐욕과 욕망으로 인해서 무지한 것이 일어나집니다.

더 먼 적은 갈애(taṇhā)라고 하는 탐욕과 욕망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화가 일어났을 때, 중립성이 훼손돼버렸을 때, 그러니까 사띠가 없을 때 가만히 한번 살펴보십시오. 탐욕과 욕망을 빼고 얘기할 수 있는가. 못한다는 거라. 내가 탐욕과 욕망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이 변해가는 실상을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에 그런 거라. 그래서 무지가 가까운 적이고 탐욕과 욕망이 먼 적이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중립성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사범주(四梵住), 사범주에서 이 중립성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그다음에 자나(jhāna), 제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중립성이 나옵니다. 그렇죠? 그거는 여러분들이 팔정성도 경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팔정성도 마지막 부분에 있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또 나오는 것이 칠각지 부분에서 나옵니다. 칠각지도 마찬가집니다. 법에 대해서 조사하고 관찰하는 것이 있으면 나마와 루빠를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나마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그 알아차리는 것은 루빠이다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것 같으면 칠각지 부분이 순차적으로 일어나집니다. 고요함이 일어나지고 빳삿디가 일어나지고, 그다음에 그러면서 기쁨의 현상들이 일어나지고 그다음에 행복해지고 하는 것들이 쭉 일어나지고 집중력이 생겨나면서 그것마저도 떨쳐버리고 나면 우뻭카쪽으로, 평온함으로 넘어가집니다. 칠각지가 이렇게 일어나지는 것인데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맨 처음 주안을 해야 되는 게 나마와 루빠에 대한 사띠 부분입니다.

 

자, 이렇게 봤을 때 이 중립성은 사띠를 빼고 계발할 수 있습니까? 별도로 계발할 수 있느냐? 절대 계발을 못합니다. 사띠 없이 이 중립성은 계발되어 나갈 수가 없다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찟따(citta)와 쩨따시카(cetasika)가 같이 포함이 돼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뭐로 가지고 계발을 해야 됩니까? 이 중립성은 사띠(sati)로 계발해나갑니다. 쉽게 말하면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라고 하는, 이 사념처로 계발하고 증장시켜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 여기에 보면 경전에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포기, 버려버림으로 인해서 중립성을 계발하게 되고 진전하게 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맞습니까? 일어난 사실은 사라진다는 사실, 사라진 사실은 또 조건에 인해서 일어난다는 사실,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만 알 거 같으면 ‘일어남’ 다음에 ‘사라짐’ 할 때 일어난 사실을 이미’ 포기해 버립니다. 버려버립니다. 지금 현재에서 계속적으로 살게 된다 하는 겁니다. 지금 현재에서 끊임없이 사띠가 깨어있고 알아차림이 있을 것 같으면 그걸 갖다가 우리는 ‘포기’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이 중립성은 계발되어 나가고 진전되게 되어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른 거하고는 다르게 이 중립성을 목표로 해서 계발할 필요성이 없다하는 겁니다. 사띠만 열심히 알아차릴 것 같으면 틀림없이 중립성은 일어나게 돼있고 계발되게 돼있고 또 그것이 확립돼서 더 이상 맨 처음에 스님이 얘기했듯이 좋고 싫은 것에 대해서 끄달려 들어가지지를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경전에 번뇌가 파괴된 비구는 눈과 함께 눈에 보이는 물건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기뻐하지 않는다. 번뇌가 파괴되어 버린 수행자, 눈에 보이는 대상, 좋은 것은 기뻐하게 돼있고 싫은 것은 배척할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기뻐하지를 않는다. 이런 자들을 부처님은 ‘범천과 같은 생활을 하는 자다’ 얘기합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사범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사는 자들을 수행자라고 얘기하고 그런 수행자들은 이 중립성으로 인해서 산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근데 여기서 자칫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중립성을 무감각한 것, 쉽게 말해서 좋은 것이 일어나든 싫은 것이 일어나든 무덤덤한 것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근데 그거하고는 다릅니다.

명확하게 깨어있어서 알아차렸을 때, 알아차려지는 상태에서 좋고 싫은 것들을 떠나버린 상태를 중립성이라고 얘기합니다.

누가 잠자는 사람한테 가서 아무리 나쁜 얘기를 하더라도 무감각합니다. 또 좋은 얘기 한다 해서 그걸 알아듣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무감각하다고 얘기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너무 많이 부딪쳐가지고 면역이 돼서 그걸 무감각하다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영향을 안 받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여기 정신과 의사선생님도 계시지만은 그렇게 해가지고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축적돼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거는 영향을 안 받는 게 아니라. 그거는 그때 당시에 무감각한 것뿐인 것이지 그것을 자기가 알아차려서 소화를 해내서 그것을 멀리 떠난 상태는 아니다 하는 겁니다. 이 중립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떠나버린 상태를 얘기한다 하는 겁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네 가지에 영향받는다고 그럽니다.

이익과 손해,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건강하고 잘사는 것과 비참한 것 이 네 가지 요인 그러니까 여덟 가지 요인에 세상 사람들은 영향을 받는다고 그럽니다. 그걸 갖다가 부처님도 뭐라 그러냐면 ‘이 세상의 조건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조건에 대해서 이 조건을 떠나버렸을 때를 중립성이라고 얘기한다 합니다. 이익이 돌아오든 손해가 나든, 아니면 칭찬을 받든 비난을 받든, 명예가 있든 명예가 낮아지든, 건강하든 아니면 비참하든 그런 것에 관계하지 않고 그 상황에 맞게끔 자기가 그 사실을 받아들여서 만족하게 될 때, 그런 번뇌들이 떠나게 됐을 때 이런 때를 갖다가 우리는 중립성이 확립됐다고 얘기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어쨌든 끊임없이 수행을 통해서 중립성은 확립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마만큼 사띠라고 하는 것, 사띠빳타나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서 공부들을 조금 더 열심히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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