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온(五蘊) 수행 》6 /빤냐완따 스님

관리자
202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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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맺는 말 


'나는 누구인가?' 

세상을 살면서 종종 받게 되는 질문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스스로를 향해 던져보았을, 그리고 누군가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고민해 보았을 그 철학적 의문에 대해 선 듯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초기불교를 만나기 전까지는. 고따마 붓다께서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 대신 도대체 '무엇을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보다는 '이 괴로움(불만족)은 왜 생겨나는가?' '괴로움(불만족)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 속에는 '나'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전제된 '나'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실체' 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의 정서에 맞는 종교를 선택해 귀의하거나 명상스승을 찾아 이역만리 먼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너 자신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또한 여래가 가르친 법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이 가르침은 고따마 붓다께서 대열반에 드시기 직전, 스승의 부재를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훈입니다. 위대한 스승께서는 왜 "자신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하셨을까요? 그것은 모든 진리가 외부에 있지 않고, 이역만리 먼 곳에 있지 않고, 자기 내면에 현존하는 것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의 모습이 바로 <오온현상>입니다. <오온>에 대한 현상관찰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사해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온> 밖에서는 무상의 진리를 볼 수 없고, 괴로움의 진리를 볼 수 없고, 무아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온현상> 속에서 만이 무상의 진리를 볼 수 있고, 괴로움의 진리를 볼 수 있고, 무아의 진리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6처에 법이 있습니다. 6처(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가 6경(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을 만난 때 <오온현상>이 일어납니다. <오온현상> 속에 생사윤회의 어두운 길이 있고, 궁극의 해탈ㆍ열반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인간 개개인의 존재 양상에 대해 그것은 색ㆍ수ㆍ상ㆍ행ㆍ식 <오온>의 인연화합일 뿐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5가지 집착의 다발(무더기)일 뿐,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한 순간도 머무는 바가 없고, 머무는 바 없이 변하고 소멸하는 것들은 실로 괴로운 것이며, 거기에 '나' 라고  할만한 그 어떤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꿰뚫어 아셨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 이땅에 출현하기 직전까지 인간은 <오온(五蘊)>의 실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오온>에 집착되어 끊임없는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뒤 바라나시 사슴동산에서 5제자들에게 첫 가르침을 펴시자 비로소 5제자들은 사성제의 증득과 함께 오온의 참성품을 여실히 비추어보고 모든 번뇌 소멸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때 5제자들을 아라한으로 이끈 법문이 <무아상경(無我相經)>입니다. 그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느낌은...인식은...심리현상들은...알음알이는...)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 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 것이 나의 자아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느낌이건...인식이건...심리현상들이건...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와같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色, 4대요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受, 감수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想, 지각표상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行, 의지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識, 의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게 되느니라.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하느니라. 

해탈하면 했달했다는 지혜가 있고,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알게 되느니라." 


인간 존재는 몸(물질)과 마음(정신) 2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본 것이 <오온(五蘊)>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러한 <오온>을 <오취온(五聚蘊)>이라 하며, <오온>에 집착하면 반드시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을 일컬어 <오취온고(五聚蘊苦)>라고 합니다. <오온> 자체는 큰문제가 되지 않지만 나, 나의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생동안 생사윤회를 거듭하며 고통받게 됩니다. <오온> 혹은 <오취온>은 불교수행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수행주제입니다. 불교수행은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구분해서 보는 것이고, 그 각각의 작용을 이해하는 것이며, <오온>의 현상관찰을 통해 <오온>의 참성품인 무상ㆍ고ㆍ무아의 진리를 깨달아 마침내 궁극의 해탈ㆍ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궁극의 해탈ㆍ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정도(八正道)>를 닦아야 합니다. 성스러운 8가지 닦는 길 가운데 특히 <정념(正念, 바른 알아차림)> 부분은 <오온>에 대한 현상관찰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팔정도>의 <정념 수행>을 좀더 구체화시킨 가르침이 빨리어 <대념처경(大念處經)>입니다. 이 경은 호흡ㆍ몸의자세ㆍ일상행위ㆍ신체의 32부분ㆍ4대요소 등 다양한 각도로 <색온>에 대한 관찰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느낌(受蘊)에 대한 현상관찰', '마음에 대한 현상관찰', '법에 대한 현상관찰'을 설명하고 있는데, '마음' 과 '법' 에 대한 현상관찰 안에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에 대한 관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법에 대한 현상관찰' 가운데는 여러 심리현상과 접촉인식에 대한 관찰, 그리고 <오취온(五聚蘊)>에 대한 현상관찰이 설명되어 있는데, 그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비구가 '이것이 물질(色)이고,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며,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受)이고,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며,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지각인식(想)이고, 이것이 지각인식의 일어남이며, 이것이 지각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심리현상들(行)이고, 이것이 심리현상들의 일어남이며, 이것이 심리현상들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識)이고,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며,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바르게 아느니라. 


이와같이 그는 안으로 법에 있어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고, 밖으로 법에 있어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며, 또 안팎으로 법에 있어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네. 그는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물고,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물며, 또한 법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네. '이것이 법이다' 라는 알아차림이 그에게 확립되나니 이것은 통찰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며, 바른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지내나니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비구가 <오온>이라는 법에 있어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 방법이니라." 


<팔정도>는 계(戒)ㆍ정(定)ㆍ혜(慧)를 닦는 수행입니다. 그 중심에 <정념(正念, 바른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정념>을 수행할 때는 다음의 2가지 전제를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첫번째는 무엇을 대상으로 하여 <정념>을 닦을 것인가 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오온>에 대한 바른 관찰(알아차림)입니다. 두번째는 <오온현상>에 대한 관찰은 언제 어디서 해야 하는가 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 여기' 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림하지 못하면 <오온>의 일어나는 현상을 알 수 없고, 사라지는 현상 또한 알아차림할 수 없습니다. 그로인해 <오온>의 참성품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오온>의 참성품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오온>이 일어나는 순간 <오온>을 나, 나의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하게 됩니다. 


<오온>에 대한 현상관찰은 특히 안정적인 걸음걸이 속에서 잘 관찰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걷는 수행(행선)을 할 때,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오온>의 <색온> 가운데 풍대(風大)를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의 무거움은 지대(地大), 바닥에 닿을 때의 따뜻함은 화대(火大), 발바닥의 끈적거림을 알아차림한다면 수대(水大)를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 발이 들리고 나아가고 땅에 닿을 때의 좋은 느낌ㆍ싫은 느낌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수온>, 발이 들릴 때는 '듬' 나아갈 때는 '나아감' 내려놓을 때 '내려놓음' 이라는 지각인식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상온>, 걷기 직전 걸으려는 의도나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리려는 의도를 알아차림하는 것은 <행온(行蘊)>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아는 마음이 <식온>이며, 그 아는 마음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식온>을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 


호흡을 관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의 감각이나 배의 불러오는 감각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색온>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때의 좋은 느낌ㆍ싫은 느낌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수온>을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 들숨ㆍ날숨ㆍ부름ㆍ꺼짐이라는 관념, 눈감은 상태에서 코나 배의 이미지 또는 인습적 명칭으로 들숨ㆍ날숨ㆍ부름ㆍ꺼짐을 지각인식하는 것은 <상온>, 공기를 들이키려는 의도나 굽은 허리를 곧게 펴려는 의도는 <행온>, 그리고 (이 모두를) 아는 마음은 <식온>이며, 그 아는 마음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식온>을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행선ㆍ좌선 도중에 이것은 색온이요, 수온이요, 상온이요, 행온이요, 식온이요 (혹은 이것이 부름이요, 꺼짐이요, 들숨이요, 날숨이요) 하면서 알아차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온>이라는 개념(관념, 산냐)에 빠진 것이 됩니다. 무슨 <온>이라는 관념없이 매 순간순간 물질적 감각이나 정신적 느낌ㆍ심리현상ㆍ의식 등을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림하는 것이 <오온현상>에 대한 바른 관찰입니다. 


이제 <오온수행>에 대한 설명을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본래 <오온수행>이란 명칭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수행자로 하여금 <오온>에 대한 현상관찰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부득이 제목을 <오온수행>이라 정해놓고 긴 시간동안 설명해 보았습니다. <오온>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기 위해 <한국 빠알리어 성전협회>역주 <초기불전연구원>역주의 빨리어 경전을 비교적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오온>과 관련된 기존의 자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실수행에 도움될 수 있도록 스승님들의 가르침과 이 승이 직적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하여 가능한 쉽고 명확하게 정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삭혀내지 못했거나 덜 익힌 부분, 무리한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미흡한 글이지만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 글을 통해 불교를 좀더 바르게 이해하게 되고, 이것을 실수행에 활용함으로서 고통의 온전한 소멸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오온>에 대한 교설을 담고 있는 빨리어 경 몇 개를 소개하면서 <오온수행> 법문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와나 수도원에 머무실 적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을 위하여 짐과 짐꾼과 짐을 짊어지고 내려놓는 것에 대해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하여라. 내가 설하겠노라.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이라고 부르는가? 다섯 가지 집착다발을 짐이라고 하느니라.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이니라.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짐이라고 하느니라.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꾼이라고 부르는가? 사람을 짐꾼이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은 이름, 이와 같은 성씨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짐꾼이라고 하느니라.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재생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에서 환희하는 갈애이니라. 그것은 바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니라.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하는가?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되고 포기되고 방기되어 집착 없이 해탈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짐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며

세상의 짐꾼은 사람이니

짐을 짊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며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안락이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

다른 짐을 짊어지지 않나니,

갈애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욕심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네.” 


                                                 [S22:22] <Bhāra-sutta(짐의 경)>



"비구들이여, 

철저하게 알아야 할 법들과 통달한 지혜를 설하리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철저하게 알아야 할 법들인가?

비구들이여, 물질(色)은 철저하게 알아야 할 법이니라.

느낌(受)은 철저하게 알아야 할 법이니라.

인식(想, 지각)은 철저하게 알아야 할 법이니라.

심리현상들(行, 형성)은 철저하게 알아야 할 법이니라.

알음알이(識, 의식)는 철저하게 알아야 할 법이니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통달한 지혜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의 멸진ㆍ성냄의 멸진ㆍ어리석음의 멸진이니라.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통달한 지혜라 하느니라." 


                                      [S22:23] <Pariññā-sutta(통달한 지혜 경)>



"비구들이여,

물질을 (느낌을... 인식을... 심리현상들을... 알음알이를...)

알지 못하고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탐욕이 빛바래지 못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없느니라." 


"비구들이여,

물질을 (느낌을... 인식을... 심리현상들을... 알음알이를...)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고 탐욕이 빛바래고 

제거하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있느니라."


                            [S22:24] <Abhijāna-sutta(최상의 지혜로 앎 경)>



"비구들이여,

만일 내가 이와같이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聚蘊]의 달콤함을 달콤함이라고 위험함을 위험함이라고 벗어남을 벗어남이라고 있는 그대로 최상의 지혜로 알지 못하였다면,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ㆍ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 내 스스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결코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이와같이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聚蘊]의 달콤함을 달콤함이라고 위험함을 위험함이라고 벗어남을 벗어남이라고 있는 그대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기때문에,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ㆍ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 내 스스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결코 천명하였느니라." 


"그리고 내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며, 이제 더 이상의 태어남[再生]은 없노라.'는 지(知)와 견(見)이 일어났느니라." 


                                             [S22:26] <Assāda-sutta(달콤함 경)>



               * 


  불멸 2565(6). 9.  .

  천림산 기슭에서 

  자애와 함께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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