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서 시봉한 사람이 아난다 존자입니다. 무려 25년간이나 부처님을 시봉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법을 설해서 그분들이 부처님 제자로서 교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또 부처님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깨달음을 이루었던 분이 꼰단야 존자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시봉했던 분 중에서 제일 먼저 시봉했던 분이 꼰단야 존자입니다. 자기 스승에 대해서 극진한 예우를 갖추었던 분으로 경전상으로 많이 나와 있지만, 대표적인 분이 꼰단야 존자와 아싸지 존자, 또 사리불 존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들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법을 전해준 분에 대한 존경심은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했습니다.
심지어 사리불 존자 같은 경우는 아싸지로 인해서 부처님 법을 접하게 되었으니, 항상 잠들기 전에 아싸지 존자가 계신 곳을 향해 세 번 절했고, 또한 누울 때에도 머리 쪽은 항상 아싸지 존자가 북쪽에 있으면 북쪽에 두고 남쪽에 있으면 남쪽에 둘 정도였습니다.
그에 버금가게 맨 먼저 깨달음을 이루었던 이 꼰단야 존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꼰단야 존자와 부처님과의 나이 차는 거의 40년이 넘어갑니다. 부처님 나이 서른 여섯 때, 이 꼰단야 존자가 부처님을 시봉하게 되었습니다. 싣달타 태자가 태어났을 때, 이 싣달타 태자가 후에 출가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것이라고 예언했던 분이 바로 꼰단야 존자입니다. 그때 다른 분들은 싣달타 태자가 출가할 수도 있고 전륜성왕이 될 수 있다고 얘기했는데, 오직 꼰단야 존자만이 하나의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출가해서 깨달음을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분이니 나이 차가 굉장히 많이 납니다.
어쨌든 부처님을 6년 간 모시고 함께 수행을 잘 하다가 부처님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었으니 얼마나 부처님의 은혜가 고마웠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부처님 옆에 있으면서 부처님 수발을 듭니다. 그렇지만 이미 70이 넘은 분이었고, 육체가 늙으면 어쩌지 못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부처님 시봉을 한다 해도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내가 이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는데, 그 법을 즐기면서 고요하게 좀 있고 싶구나’ 하는 생각도 일어나고, 또 한편으로는 ‘부처님을 열심히 시봉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일어나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브라흐마나[= 뿐나 빤따니뿟따]라는 스님이 부처님으로 인해 출가를 합니다.
출가를 했을 때, 브라흐마나를 가르친 스승이 바로 꼰단야 존자입니다. 부처님 법에 대해서 가르쳐서 깨달음으로 이루게 만들었던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브라흐마나가 부처님 시봉을 맡게 하고 당신께서는 정진하다가 얼마 안 가서 열반에 드십니다.
아무튼 브라흐마나가 두 번째로 부처님을 시봉하게 되었는데, 부처님께서 당신의 고향 까삘라 왕궁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불교 교단에 출가합니다. 그때 아난다 존자 주변에는 6명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6명의 친구, 아누룻다를 비롯해서 난다 등은 왕자 출신이었지만, 특별한 분으로 왕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로 천민 계급에 속했던 우발리 존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곱 분이 한꺼번에 같이 출가합니다. 그런데 아난다 존자는 출가하면서 누구를 의지하느냐 하면 바로 브라흐마나 존자를 의지해서 부처님 법을 전해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에게 가장 큰 스승은 물론 부처님이지만, 자기를 법으로서 이끌어주었던 브라흐마나 존자를 가장 존중하는 분 중의 하나였습니다.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십 공덕, 열 가지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해서 그에 따라 살아가신 분이 브라흐마나 존자입니다. 아난다 존자가 진리에 대해서 배웠던 분이 이분입니다. 또 결정적일때 아난다 존자를 법으로서 이끌어준 분이 브라흐마나 존자입니다. 말하자면 와뚜부다라는 전계사(傳戒師)인 셈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남방에서는 누가 계를 설해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법으로 이끌어준 스승이 누구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네 스승이 누구냐?’를 물을 때 우리는 자기 은사 스님을 스승이라 하는 데 비해, 남방에서는 은사 스님을 스승이라 얘기하지 않고 법으로 이끌어준 분을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법은사를 더욱 크게 여기는 형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난다 존자도 그런 상태였습니다.
브라흐마나 존자를 존경한 아난다 존자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크게 세 번 울었습니다.
처음으로는 업의 소중함을 알고, 업에 대해서 좋고 나쁨을 가려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그런 상태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을 ‘닷사야나’라고 하는데 ‘알아차린다, 흐름을 본다, 진리에 나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나라는 것은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이해하게 되는 이 아난다 존자가 크게 눈물을 흘립니다.
두 번째 눈물을 흘릴 때는 부처님의 양모인 고따미 부인이 출가를 해서 비구니 교단을 잘 이끌어가다 열반에 들었을 때, 자기와는 특별한 관계가 없는 분이었지만 한날 한시에 태어난 자신의 아들 난다에게 젖을 물리는 것이 아니고 배다른 아들, 자기 언니가 낳았던 싣달타 태자에게 젖을 먹이고 키웁니다. 그리고 가장 애지중지하게 키웠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잘 성장할 수 있게끔 이끌었던 분이고, 또 부처님으로 인해 출가를 해서 비구니 교단을 잘 이끌었던 분입니다. 그런 분의 공덕을 생각해서 아난다 존자가 가장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슬피 울었던 때는 부처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을 때, ‘아, 이젠 이 세상에는 큰 스승이 없구나. 나는 누구를 의지하여 살 것인가?’ 해서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물론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아난다에게도 누누이 ‘법과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거라’ 하고 했지만 아난다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슬픔이 남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부처님 같은 스승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지처를 잃었다는 생각에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동남아시아에 여행을 가다 보면 부처님의 열반상, 우리 여기도 열반상이 있지요? 열반상과 그냥 휴식을 취하는 상하고는 발끝으로 구분을 합니다. 말하자면 발이 가지런히 있느냐, 아니면 좀 엇갈리게 있느냐로 열반상과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으로 구분합니다. 열반상 머리 쪽에 보면 한 스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슬프게 울고 있든지 아니면 한 쪽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게 아난다 존자입니다.
어쨌든 아난다 존자는 그렇게 크게 세 번을 울었는데, 맨 처음 아난다 존자가 크게 슬피 울 때는 ‘닷사야나’의 지혜를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크게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어느 때 부처님과 여행을 다니다가 아난다 존자가 회상을 하게 됩니다.
‘아, 나하고 같이 출가했던 스님들은 모두 다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런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부처님, 참 좋은 도반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는 진리의 길에서 진리의 반을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그러십니다.
“아난다 존자야, 좋은 도반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데 전부이니라. 나라고 하는 좋은 도반을 너희들이 얻었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룰 수 있고, 또한 팔정성도로 나아가게 되어 바른 삶을 살아가지 않느냐?
그러니 좋은 도반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팔정성도에 맞게끔 살아가게 되는 것이요 또 팔정성도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니 헛된 길로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좋은 도반들이 모이지 않느냐?
그러니 당연히 좋은 도반을 가까이 두고 있다는 것은 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도반이라는 말을 ‘깔르야나’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애경>이라고 할 때, 자비, 그다음에 친애, 사랑, 친구 이런 뜻들이 좋은 도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을 선지식이라고 풀이합니다. 선지식이라는 용어보다는 도반이라는 용어가 훨씬 친근감이 듭니다.
선지식은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쓰는 용어이지만, 도반이란 것은 서로간 깨달은 진리를 나누고 또 이끌어가는 관계, 평등한 관계로서 수행해 나가는 것이 도반이라고 합니다.
나는 가능하면 선지식이라는 용어를 안 쓰고 도반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부처님도 좋은 도반이었고, 좋은 선지식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도 같은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좋은 도반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생활을 해나가는데도 내가 도움을 받은 분들이나 아니면 좋은 친구들이 나의 좋은 도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변에서는 과연 얼마만큼 좋은 도반이 있습니까?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아난다 존자는 참 슬펐습니다. ‘내 주위에는 좋은 도반이 있는데 진정 나는 무엇인가? 그들은 도의 길에 올라가고 있는데 나는 아직 이 자리에 있나?’
이렇게 생각하니 참 슬펐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들었고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존자가 겨우 그 자리밖에 안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부처님께 말도 못 하고 물러나 버립니다.
그래서 숲속으로 가서 고요하게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아, 내가 부처님을 곁에서 시봉하고 따르고 있지만, 이게 무언가?’
아난다 존자가 무슨 큰 뜻을 가지고 출가한 것은 아닙니다. 큰형님이라고 하는 부처님, 부처님이 좋아서 출가했거든요. 세속에 있을 때도 존경할 만한 큰형님이고, 그 큰형님이 출가해 가지고 깨달음을 얻었으니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고 싶어서 출가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니 시봉하면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부처님은 좋은 도반 얘기를 하면서 자기를 크게 질책했거든요. 여태까지 한 번도 아난다가 한 얘기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도반 얘기가 나왔을 때는 은연중에 아난다를 질책하는 것 같아 서러운 생각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숲에서 고요히 생각하기를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련다, 내가 이렇게 생활하다가 뭐 하겠냐’ 하지만 세속으로 돌아가려니 부처님이 걸린다 말입니다.
가고 나면 부처님을 누가 시봉하느냐, 그렇다고 부처님 곁에 다시 가려 해도 부끄러워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염없이 슬퍼지는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의 그런 모습을 법은사이신 브라흐마 존자가 보게 됩니다.
“아난다 존자여, 무얼 그리 슬퍼하십니까? 무엇이 당신을 아프게 하였습니까?”
아난다 존자가 스승에게 이러쿵저러쿵해서 내가 슬픕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아난다 존자님께서 슬퍼하는 것은 나와 남을 비교하는 것으로 인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내가 조금 더 남보다 나아지고 싶고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은 생각 때문에 그렇지 못한 자기 현실을 보고 슬퍼지는 것 아닙니까?”
아난다 존자가 가만히 들어보니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 도반들을 생각 안 했으면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신 적이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왼발 오른발 천천히 옮겨도 몸 하나 까닥 안 하고 잘 떼었다가 놓는데, 나는 어떻게 된 게 발을 들기만 하면 몸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만 같거든요. 자꾸 남을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곁눈질 하면서, 걸어가면서 곁눈질로 그럴 따라가는 겁니다. 그러니 수행은 수행대로 안 되고 폼만 잡는 것입니다. 폼은 그럴듯하게 바꿔질지 모르지만 그게 자기 수행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수행했을 것 같으면 자기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알아차림으로 인해 마음이 집중이 되어 있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걸어가지는 것을 보고, 내가 그 위치가 못 될 것 같으면 나는 조금 빨리 걸어가야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자신에게 맞는 걸음걸이를 떼어놓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남들이 한 시간 반, 두 시간 앉아서 정진하고 있는 걸 가지고 억지로 내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자율적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비교하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다른 예로 ‘남들은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하게 힘들어하면서 살아가야 되는가?’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남들이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 행복이 내 것이 될 수 있는가? 내가 힘들어 살아간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길 수 있는 것인가요? 못하는 것입니다. 못하는 걸 왜 그렇게 자꾸 ‘비교하는가?’는 말입니다.
아난다 존자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괜히 비교해보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슬픔이 넘쳐나고, 그런 비교하는 마음은 ‘나’라고 하는 집착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비교를 해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때 브라흐마나 존자가 말합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만약 당신의 얼굴을 맑고 깨끗한 물에 비추어 봤을 때 그 물 속에 존자의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또 거울을 들여다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거울이나 깨끗한 물이 아난다 존자는 아닐 것입니다.”
거울이나 물 속에 비친 그 그림자, 그것이 아난다 존자입니까?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거울이나 물이라는 조건으로 인해서 만들어졌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거울 가까이 가든, 물 가까이 가든지 하는 조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물이나 거울 속에 내 그림자가 비추어진 것뿐입니다. 그 조건이 사라지면 내 모습은 거기에 비쳐지지 않게 됩니다. 그림자가 내 것이 될 수 없고, 거울이나 물이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아난다라고 부르는 명칭 자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한국에서는 ‘아난다’라고 하지 않고 ‘아난’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난’이라고 부르든, ‘아난다’라고 부르든 그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실체적인 아난다와 관계가 없ㅅ브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난다야, 그런 이야기하지 말아라’ 했을 때, 당신이 당신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을 것 같으면 그 소리가 아난다 존자에게는 질책처럼 들리지만 나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지 않을 것 같으면 그게 왜 질책이 됩니까? 하등 질책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현상을 정확하게 보라는 부처님 말씀이지 않습니까? 아난다 존자가 팔정성도를 따라서 걸어갈 것 같으면 아난다 존자 주변에는 그에 따른 좋은 도반이 모입니다. 또 그런 도반으로 인해서 당신도 팔정성도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깨달음이 나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얼 가지고 내가 지금 이런 상태밖에 안 되었다는 슬픔을, 마음을 내고 또 내가 바른 길을 걸어가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가집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거울 속이나 물 속에 비친 아난다 존자가 내가 아니듯이, 조건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은 조건 따라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난다 존자가 말합니다.
“없습니다. 항상 변해 나가고 있죠.”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변해가는 것에는, 누구든지 태어나면 생로병사를 겪고 죽어야 되고, 내가 불행하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변해가면서 행복으로 연결되고, 역시 행복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불행으로 연결되고 그렇게 끊임없이 변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인위적으로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것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반복되어져야 되는 것, 이것 참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만족해서 살 겁니까?”
“아닙니다, 존자님. 나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출가해서 그 길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불만족스런 것입니다. 변해나가는 자체는 우리가 만족스럽다고 해서 정착하고 안주할 수 없는 것이고 항상 불만족스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해나가고 불만족스런 곳에서 어떤 것을 잡아서 아난다 존자라 얘기할 수 있고, 아난다 존자의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이든 변해나가게 되어 있는데 아난다 존자는 안 변해 나갑니까? 변해나가는 어떤 것을 잡아서 내 것이라 해서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입니까?
부처님한테 꾸지람을 들었을 때의 그 슬픈 마음을 아난다 존자라 할 겁니까? 아니면 지금 내 이야기를 듣고 환희심이 나서 기쁜 마음이 깃든 것을 아난다 존자라 할 것입니까? 그렇게 아난다 존자의 느낌이 변해나가듯이 몸도 변해나가게 되어 있고 모든 것이 변해가게 되어 있는 것인데, 어떤 것을 잡아서 아난다 존자라 해서 그것에 집착하여 슬픈 마음을 일으키겠습니까? 그렇게 끝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아난다 존자는 ‘아, 이것이구나. 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이런 일상적인 것에 도가 있는 것이구나. 내가 왜 여태까지 부처님을 옆에서 모시면서 이것을 몰랐던가. 큰스승을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하고 자책감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로 인해 ‘닷사야나’, 지혜롭게 진리를 이해하는 상태로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난다 존자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려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또한 집착하고 비교하는 마음이 일었을 때 슬퍼했고, 또 그러한 진리를, 닷사야나를 알았을 때, ‘왜 내가 진작 알지 못했을까’ 하는 기쁜 마음으로 해서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수행을 계속해 나갈 것 같으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판단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남이 어떻게 하든 비교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내 일만 챙겨나가십시오. 내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그에 맞게끔 몸과 마음을 조절해 나가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서 시봉한 사람이 아난다 존자입니다. 무려 25년간이나 부처님을 시봉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법을 설해서 그분들이 부처님 제자로서 교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또 부처님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깨달음을 이루었던 분이 꼰단야 존자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시봉했던 분 중에서 제일 먼저 시봉했던 분이 꼰단야 존자입니다. 자기 스승에 대해서 극진한 예우를 갖추었던 분으로 경전상으로 많이 나와 있지만, 대표적인 분이 꼰단야 존자와 아싸지 존자, 또 사리불 존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들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법을 전해준 분에 대한 존경심은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했습니다.
심지어 사리불 존자 같은 경우는 아싸지로 인해서 부처님 법을 접하게 되었으니, 항상 잠들기 전에 아싸지 존자가 계신 곳을 향해 세 번 절했고, 또한 누울 때에도 머리 쪽은 항상 아싸지 존자가 북쪽에 있으면 북쪽에 두고 남쪽에 있으면 남쪽에 둘 정도였습니다.
그에 버금가게 맨 먼저 깨달음을 이루었던 이 꼰단야 존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꼰단야 존자와 부처님과의 나이 차는 거의 40년이 넘어갑니다. 부처님 나이 서른 여섯 때, 이 꼰단야 존자가 부처님을 시봉하게 되었습니다. 싣달타 태자가 태어났을 때, 이 싣달타 태자가 후에 출가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것이라고 예언했던 분이 바로 꼰단야 존자입니다. 그때 다른 분들은 싣달타 태자가 출가할 수도 있고 전륜성왕이 될 수 있다고 얘기했는데, 오직 꼰단야 존자만이 하나의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출가해서 깨달음을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분이니 나이 차가 굉장히 많이 납니다.
어쨌든 부처님을 6년 간 모시고 함께 수행을 잘 하다가 부처님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었으니 얼마나 부처님의 은혜가 고마웠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부처님 옆에 있으면서 부처님 수발을 듭니다. 그렇지만 이미 70이 넘은 분이었고, 육체가 늙으면 어쩌지 못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부처님 시봉을 한다 해도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내가 이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는데, 그 법을 즐기면서 고요하게 좀 있고 싶구나’ 하는 생각도 일어나고, 또 한편으로는 ‘부처님을 열심히 시봉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일어나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브라흐마나[= 뿐나 빤따니뿟따]라는 스님이 부처님으로 인해 출가를 합니다.
출가를 했을 때, 브라흐마나를 가르친 스승이 바로 꼰단야 존자입니다. 부처님 법에 대해서 가르쳐서 깨달음으로 이루게 만들었던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브라흐마나가 부처님 시봉을 맡게 하고 당신께서는 정진하다가 얼마 안 가서 열반에 드십니다.
아무튼 브라흐마나가 두 번째로 부처님을 시봉하게 되었는데, 부처님께서 당신의 고향 까삘라 왕궁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불교 교단에 출가합니다. 그때 아난다 존자 주변에는 6명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6명의 친구, 아누룻다를 비롯해서 난다 등은 왕자 출신이었지만, 특별한 분으로 왕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로 천민 계급에 속했던 우발리 존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곱 분이 한꺼번에 같이 출가합니다. 그런데 아난다 존자는 출가하면서 누구를 의지하느냐 하면 바로 브라흐마나 존자를 의지해서 부처님 법을 전해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에게 가장 큰 스승은 물론 부처님이지만, 자기를 법으로서 이끌어주었던 브라흐마나 존자를 가장 존중하는 분 중의 하나였습니다.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십 공덕, 열 가지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해서 그에 따라 살아가신 분이 브라흐마나 존자입니다. 아난다 존자가 진리에 대해서 배웠던 분이 이분입니다. 또 결정적일때 아난다 존자를 법으로서 이끌어준 분이 브라흐마나 존자입니다. 말하자면 와뚜부다라는 전계사(傳戒師)인 셈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남방에서는 누가 계를 설해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법으로 이끌어준 스승이 누구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네 스승이 누구냐?’를 물을 때 우리는 자기 은사 스님을 스승이라 하는 데 비해, 남방에서는 은사 스님을 스승이라 얘기하지 않고 법으로 이끌어준 분을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법은사를 더욱 크게 여기는 형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난다 존자도 그런 상태였습니다.
브라흐마나 존자를 존경한 아난다 존자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크게 세 번 울었습니다.
처음으로는 업의 소중함을 알고, 업에 대해서 좋고 나쁨을 가려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그런 상태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을 ‘닷사야나’라고 하는데 ‘알아차린다, 흐름을 본다, 진리에 나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나라는 것은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이해하게 되는 이 아난다 존자가 크게 눈물을 흘립니다.
두 번째 눈물을 흘릴 때는 부처님의 양모인 고따미 부인이 출가를 해서 비구니 교단을 잘 이끌어가다 열반에 들었을 때, 자기와는 특별한 관계가 없는 분이었지만 한날 한시에 태어난 자신의 아들 난다에게 젖을 물리는 것이 아니고 배다른 아들, 자기 언니가 낳았던 싣달타 태자에게 젖을 먹이고 키웁니다. 그리고 가장 애지중지하게 키웠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잘 성장할 수 있게끔 이끌었던 분이고, 또 부처님으로 인해 출가를 해서 비구니 교단을 잘 이끌었던 분입니다. 그런 분의 공덕을 생각해서 아난다 존자가 가장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슬피 울었던 때는 부처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을 때, ‘아, 이젠 이 세상에는 큰 스승이 없구나. 나는 누구를 의지하여 살 것인가?’ 해서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물론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아난다에게도 누누이 ‘법과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거라’ 하고 했지만 아난다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슬픔이 남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부처님 같은 스승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지처를 잃었다는 생각에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동남아시아에 여행을 가다 보면 부처님의 열반상, 우리 여기도 열반상이 있지요? 열반상과 그냥 휴식을 취하는 상하고는 발끝으로 구분을 합니다. 말하자면 발이 가지런히 있느냐, 아니면 좀 엇갈리게 있느냐로 열반상과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으로 구분합니다. 열반상 머리 쪽에 보면 한 스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슬프게 울고 있든지 아니면 한 쪽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게 아난다 존자입니다.
어쨌든 아난다 존자는 그렇게 크게 세 번을 울었는데, 맨 처음 아난다 존자가 크게 슬피 울 때는 ‘닷사야나’의 지혜를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크게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어느 때 부처님과 여행을 다니다가 아난다 존자가 회상을 하게 됩니다.
‘아, 나하고 같이 출가했던 스님들은 모두 다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런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부처님, 참 좋은 도반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는 진리의 길에서 진리의 반을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그러십니다.
“아난다 존자야, 좋은 도반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데 전부이니라. 나라고 하는 좋은 도반을 너희들이 얻었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룰 수 있고, 또한 팔정성도로 나아가게 되어 바른 삶을 살아가지 않느냐?
그러니 좋은 도반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팔정성도에 맞게끔 살아가게 되는 것이요 또 팔정성도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니 헛된 길로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좋은 도반들이 모이지 않느냐?
그러니 당연히 좋은 도반을 가까이 두고 있다는 것은 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도반이라는 말을 ‘깔르야나’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애경>이라고 할 때, 자비, 그다음에 친애, 사랑, 친구 이런 뜻들이 좋은 도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을 선지식이라고 풀이합니다. 선지식이라는 용어보다는 도반이라는 용어가 훨씬 친근감이 듭니다.
선지식은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쓰는 용어이지만, 도반이란 것은 서로간 깨달은 진리를 나누고 또 이끌어가는 관계, 평등한 관계로서 수행해 나가는 것이 도반이라고 합니다.
나는 가능하면 선지식이라는 용어를 안 쓰고 도반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부처님도 좋은 도반이었고, 좋은 선지식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도 같은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좋은 도반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생활을 해나가는데도 내가 도움을 받은 분들이나 아니면 좋은 친구들이 나의 좋은 도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변에서는 과연 얼마만큼 좋은 도반이 있습니까?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아난다 존자는 참 슬펐습니다. ‘내 주위에는 좋은 도반이 있는데 진정 나는 무엇인가? 그들은 도의 길에 올라가고 있는데 나는 아직 이 자리에 있나?’
이렇게 생각하니 참 슬펐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들었고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존자가 겨우 그 자리밖에 안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부처님께 말도 못 하고 물러나 버립니다.
그래서 숲속으로 가서 고요하게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아, 내가 부처님을 곁에서 시봉하고 따르고 있지만, 이게 무언가?’
아난다 존자가 무슨 큰 뜻을 가지고 출가한 것은 아닙니다. 큰형님이라고 하는 부처님, 부처님이 좋아서 출가했거든요. 세속에 있을 때도 존경할 만한 큰형님이고, 그 큰형님이 출가해 가지고 깨달음을 얻었으니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고 싶어서 출가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니 시봉하면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부처님은 좋은 도반 얘기를 하면서 자기를 크게 질책했거든요. 여태까지 한 번도 아난다가 한 얘기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도반 얘기가 나왔을 때는 은연중에 아난다를 질책하는 것 같아 서러운 생각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숲에서 고요히 생각하기를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련다, 내가 이렇게 생활하다가 뭐 하겠냐’ 하지만 세속으로 돌아가려니 부처님이 걸린다 말입니다.
가고 나면 부처님을 누가 시봉하느냐, 그렇다고 부처님 곁에 다시 가려 해도 부끄러워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염없이 슬퍼지는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의 그런 모습을 법은사이신 브라흐마 존자가 보게 됩니다.
“아난다 존자여, 무얼 그리 슬퍼하십니까? 무엇이 당신을 아프게 하였습니까?”
아난다 존자가 스승에게 이러쿵저러쿵해서 내가 슬픕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아난다 존자님께서 슬퍼하는 것은 나와 남을 비교하는 것으로 인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내가 조금 더 남보다 나아지고 싶고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은 생각 때문에 그렇지 못한 자기 현실을 보고 슬퍼지는 것 아닙니까?”
아난다 존자가 가만히 들어보니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 도반들을 생각 안 했으면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신 적이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왼발 오른발 천천히 옮겨도 몸 하나 까닥 안 하고 잘 떼었다가 놓는데, 나는 어떻게 된 게 발을 들기만 하면 몸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만 같거든요. 자꾸 남을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곁눈질 하면서, 걸어가면서 곁눈질로 그럴 따라가는 겁니다. 그러니 수행은 수행대로 안 되고 폼만 잡는 것입니다. 폼은 그럴듯하게 바꿔질지 모르지만 그게 자기 수행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수행했을 것 같으면 자기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알아차림으로 인해 마음이 집중이 되어 있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걸어가지는 것을 보고, 내가 그 위치가 못 될 것 같으면 나는 조금 빨리 걸어가야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자신에게 맞는 걸음걸이를 떼어놓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남들이 한 시간 반, 두 시간 앉아서 정진하고 있는 걸 가지고 억지로 내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자율적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비교하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다른 예로 ‘남들은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하게 힘들어하면서 살아가야 되는가?’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남들이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 행복이 내 것이 될 수 있는가? 내가 힘들어 살아간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길 수 있는 것인가요? 못하는 것입니다. 못하는 걸 왜 그렇게 자꾸 ‘비교하는가?’는 말입니다.
아난다 존자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괜히 비교해보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슬픔이 넘쳐나고, 그런 비교하는 마음은 ‘나’라고 하는 집착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비교를 해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때 브라흐마나 존자가 말합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만약 당신의 얼굴을 맑고 깨끗한 물에 비추어 봤을 때 그 물 속에 존자의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또 거울을 들여다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거울이나 깨끗한 물이 아난다 존자는 아닐 것입니다.”
거울이나 물 속에 비친 그 그림자, 그것이 아난다 존자입니까?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거울이나 물이라는 조건으로 인해서 만들어졌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거울 가까이 가든, 물 가까이 가든지 하는 조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물이나 거울 속에 내 그림자가 비추어진 것뿐입니다. 그 조건이 사라지면 내 모습은 거기에 비쳐지지 않게 됩니다. 그림자가 내 것이 될 수 없고, 거울이나 물이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아난다라고 부르는 명칭 자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한국에서는 ‘아난다’라고 하지 않고 ‘아난’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난’이라고 부르든, ‘아난다’라고 부르든 그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실체적인 아난다와 관계가 없ㅅ브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난다야, 그런 이야기하지 말아라’ 했을 때, 당신이 당신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을 것 같으면 그 소리가 아난다 존자에게는 질책처럼 들리지만 나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지 않을 것 같으면 그게 왜 질책이 됩니까? 하등 질책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현상을 정확하게 보라는 부처님 말씀이지 않습니까? 아난다 존자가 팔정성도를 따라서 걸어갈 것 같으면 아난다 존자 주변에는 그에 따른 좋은 도반이 모입니다. 또 그런 도반으로 인해서 당신도 팔정성도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깨달음이 나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얼 가지고 내가 지금 이런 상태밖에 안 되었다는 슬픔을, 마음을 내고 또 내가 바른 길을 걸어가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가집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거울 속이나 물 속에 비친 아난다 존자가 내가 아니듯이, 조건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은 조건 따라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난다 존자가 말합니다.
“없습니다. 항상 변해 나가고 있죠.”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변해가는 것에는, 누구든지 태어나면 생로병사를 겪고 죽어야 되고, 내가 불행하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변해가면서 행복으로 연결되고, 역시 행복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불행으로 연결되고 그렇게 끊임없이 변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인위적으로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것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반복되어져야 되는 것, 이것 참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만족해서 살 겁니까?”
“아닙니다, 존자님. 나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출가해서 그 길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불만족스런 것입니다. 변해나가는 자체는 우리가 만족스럽다고 해서 정착하고 안주할 수 없는 것이고 항상 불만족스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해나가고 불만족스런 곳에서 어떤 것을 잡아서 아난다 존자라 얘기할 수 있고, 아난다 존자의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이든 변해나가게 되어 있는데 아난다 존자는 안 변해 나갑니까? 변해나가는 어떤 것을 잡아서 내 것이라 해서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입니까?
부처님한테 꾸지람을 들었을 때의 그 슬픈 마음을 아난다 존자라 할 겁니까? 아니면 지금 내 이야기를 듣고 환희심이 나서 기쁜 마음이 깃든 것을 아난다 존자라 할 것입니까? 그렇게 아난다 존자의 느낌이 변해나가듯이 몸도 변해나가게 되어 있고 모든 것이 변해가게 되어 있는 것인데, 어떤 것을 잡아서 아난다 존자라 해서 그것에 집착하여 슬픈 마음을 일으키겠습니까? 그렇게 끝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아난다 존자는 ‘아, 이것이구나. 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이런 일상적인 것에 도가 있는 것이구나. 내가 왜 여태까지 부처님을 옆에서 모시면서 이것을 몰랐던가. 큰스승을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하고 자책감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로 인해 ‘닷사야나’, 지혜롭게 진리를 이해하는 상태로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난다 존자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려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또한 집착하고 비교하는 마음이 일었을 때 슬퍼했고, 또 그러한 진리를, 닷사야나를 알았을 때, ‘왜 내가 진작 알지 못했을까’ 하는 기쁜 마음으로 해서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수행을 계속해 나갈 것 같으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판단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남이 어떻게 하든 비교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내 일만 챙겨나가십시오. 내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그에 맞게끔 몸과 마음을 조절해 나가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