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aggatā (에-깍가따- : 심경일성 心境一性) (20070316)

담마마-마까
202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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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깍가따를 설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집중이라고 하는 에깍가따(ekaggatā) 하고 사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을 어떻게 조화롭게 만들 것이냐 하는 것이 주 포인트가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집중만 키우고 집중만 알 것 같으면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알라라 깔라마나 웃따까 라마뿟따와 같은 경우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 집중을 배우는 것은 마음에서 어떤 경우도 집중이 없으면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집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될 뿐 아니라 이런 집중이 사띠하고 어떻게 조화롭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젭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명 부분은 거기에 치중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이.

 

교재를 한번 보십시오. ekaggatā (에-깍가따- : 심경일성 心境一性) ‘인식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기능’이다 그렇게 풀이를 해놔 놨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되어서 대상에 확고하게 고정이 되는 것들을 에깍가따 라고 얘기합니다. 마음이 방황하면, 마음이 어떤 것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켜서 방황하게 되면 항상 마음은 확고하게 고정되지 못합니다. 의심을 하는 것 때문에. 그러면 이곳 저곳으로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산만하게 되고 고요하게 마음이 안정돼있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심은 에깍가따의 반대작용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또 산만하면 마음은 고요하게 고정돼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산만함도 마찬가지로 에깍가따의 반대작용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에깍가따(ekaggatā), 스님은 ‘심경일성(心境一性)’이라고 풀이를 해놨습니다. 집중하는 기능입니다.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기능인데 집중할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제거를 해야 되는 것들이 반대적인 작용, 의심이나 산만함 이런 것들을 제거를 해야 됩니다.

 

보통 수행에 집중하는데 다섯 가지 장애가 있다고 그러죠? 그 다섯 가지 장애를 먼저 제거를 해야지만 집중을 더 원활하게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 부분은 조금 있다가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집중은 어떤 것이냐면, 여기 초가 있으니까 초심지를 한번 보십시오. 문이 닫혀져 있으니까 바람이 없죠? 지금 곤로가 있으니까, 이 난로 옛날에는 곤로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이 파장으로 인해서 미세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이 촛불이 흔들리죠? 근데 저게 없이 꽉 막힌 상태에서 촛불을 켜면 초심지는 어떻게 되겠어요?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쭈욱 그대로 솟아있죠? 산소가 다 탈 때까지는. 산소가 다 탈 때가 되면 산소가 공급이 안 되니까 깜빡깜빡깜빡하면서 움직이기도 합니다. 근데 그 공급이 계속되는 상태라고 할 것 같으면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초심지는 그대로 쭈우욱 올라와집니다. 움직이지 않고 한곳으로 쭉 모여 있는 형태로써 있습니다. 에깍가따라고 하는 것이 이거하고 똑 마찬가집니다.

 

물질적인 것도 이렇게 고정이 될 수 있고 마음도,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보통 손가락이 끝을 가리키고 요걸 갖다가 한번 보십시오. 이걸 집중해서 보라 하면 집중력이 강한 사람은 이걸 일 분 정도는 쭈욱 고정돼서 볼 수 있겠죠? 집중력이 약한 사람은 그리 못하죠? 한끝에 마음을 갖다가 딱 고정을 시키는 거라. 이것이 에깍가따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근데 보통 어떻게 합니까? 이 끝을 바라보라고 할 것 같으면 요 끝을 대부분 안 보죠? 그게 인제 집중이라는 개념을 잘못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 보라엄마와 마찬가지로 요 끝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요걸 보든지 안 그러면 이걸 보든지 이렇게 보는 것을 집중이라고 보통 착각들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게 집중은 아닙니다이.

 

자, 한번 더 밑으로 내려가 봅시다. ‘집중이 없으면 인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집중은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에는 항상 일어나지게 됩니다. 집중이 없이 인식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음이 어떤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언제든지 집중은 일어나게끔 돼 있습니다. 근데 그 집중을 어떻게 더 키워나갈 것이냐, 그리고 바른 집중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자, 그러면 부처님은 어떤 걸 집중이라고 하는가 봅시다.

우리 절에 고양이 있죠? 고양이가 저기에 먹잇감이 있다. 이걸 찬찬히 쳐다봅니다. 그것도 집중이죠? 보라엄마가 요리할 때 요리를 집중하지 않으면 요리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것저것 만들더라도. 또 지선이 수학문제 풀 때, 거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수학문제는 풀 수가 없습니다. 이런 걸 통상적으로 다 집중이라고 얘기합니다.

근데 문제가 뭐냐, 고양이가 먹이를 먹을라고 할 때는 뭐가 생겨납니까? 탐욕이, 탐심이 생겨나죠. 요리 만들 때는 어떻게 합니까? 마음을 거기에만 집중해서 요리하는 사람 있습니까? 보라아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생각도 할 끼고, 오만 화도 다 냈다가 그렇게 합니다. 근데도 큰 불편 없이 요리는 해나가죠.

그건 집중을 해서 요리를 해나가는 것은 사실은 아니고 습관적으로 배워온 길을 이렇게 쭉쭉쭉쭉 해나가는 거라. 지선이가 수학문제 풀 때도 꼭 마찬가지, 요걸 내가 시험을 잘 쳐야지. 엄마를 위해서든 아빠를 위해서든 이렇게 마음을 먹고 시험을 치게 됩니다. 그것도 집중은 집중인데 사실은 바른 집중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집중이라고 절대 얘기하지 않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탐·진·치라고 하는 요 세 가지가 없는 상태만을 집중이라고 합니다. 수행을 하니까 수행에서 한번 봅시다. 대상에 대해서 지혜롭게 나마와 루빠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나간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알아차릴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나마와 루빠를 아는 것은 집중을 하기 때문에 알아나갑니다. 근데 나마와 루빠를 정확하게 알아나갈 것 같으면 실재가 드러날 뿐 아니라 집중력이 더더욱 커지게 되죠.

이런 것들을 부처님이 집중이라고 하는데 보통 그렇게 수행을 하다 보면 사실은 그게 잘 안되죠.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보통 머리 아프다고들 합니다. 너무 집중해가지고. 어떤 경우에는 공부 열심히 해가지고 머리 아파 죽겠다고 합니다. 안 그러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든지. 안 그러면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데 몸이 긴장되어있는 느낌을 받는다든지 이러죠? 이건 어떻게 돼요? 집중이 바른 집중이 아니니까 긴장이 되고, 짜증들도 일어날 수 있고, 걱정들도 일어나게 되고, 그럴 경우 그게 도가 지나치니까 머리 아프게 되고 두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집중은 바른 집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에깍가따를 보통 수행에서는 뭐라고 표현을 하느냐면 사마디(samādhi)라고 표현을 합니다. 같은 용어로써 써집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집중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른 사마디여야만이 그것을 에깍가따라고 하는 것이지 딧티(diṭṭhi)일 것 같으면 안되겠죠? 바른 견해를 가지지 않고 또 바른 집중이 아닐 것 같으면 그것은 에깍가따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른 집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들이 해당이 되겠습니까? 마음에서. 어쨌든 집중은 마음하고 결합합니다. 어떤 마음하고 결합해야 만이 바른 집중이 됩니까? 꾸살라 찟따입니다. 꾸살라 찟따하고 결합된 것만이 에깍가따 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틀린 것이 돼버립니다. 틀린 집중이라 합니다. 그래서 밋차 사마디(miccha samādhi), 밋차 에깍가따(miccha ekaggatā) 그렇게 얘길 하고 꾸살라 찟따와 결합된 소바나 에깍가따 같은 경우에는 삼마 사마디(samma samādhi), 삼마 에깍가따(samma ekaggatā) 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이 삼마(samma)이고 바른 집중이라고 그럽니다.

 

자, 그러면 집중이 대충 어떤 것이다 하는 건 이해가 됐고, 집중이 뭡니까? 바른 것이 될 수 있는 것, 바른 것이 아니면 그건 집중이 아니다 하고 쳐버려야 됩니다. 그럼 집중은 또 뭡니까?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초점을 딱 맞추는 것. 하나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다음에 또 하는 건 뭡니까? 이 집중이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띠하고 결합하지 않으면 그것은 집중이 아닙니다. 집중만으로써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혜를 계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은 지혜를 계발해서 닙바나를 얻기 위한 것인데 사띠와 결합하지 않은 에깍가따라고 하는 것, 아니면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집중을 계발할 때는 반드시 이 세 가지를 유념해야 됩니다.

바른 것이어야 되고, 하나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다음에 사띠와 함께하는 것이어야 만이 바른 집중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에깍가따 집중하는 자는 진리를 보고 체험한다 하고 얘기하는 거라. 무조건 집중한다고 진리를 보고 체험할 수는 없거든요. 근데 이런 조건이 전제되어야 만이 진리를 보고 진리를 알게 된다는 의밉니다.

 

자, 아까 조금 전에 얘기했는데 집중을 손가락 끝을 가리키면 손가락 끝을 안 보고 요걸 보든지 아니면 이걸 보든지 한다고. 쉽게 말하면 일반적으로 집중한다고 하는 것은 뭉뚱그려서 보게 돼있는 거라. 안 그런 것 같죠?

여러분들 교재 한번 보십시오. 교재 한번 읽어보십시오. 집중해서 보고 있는지 한번 봅시다. 책 읽을 때 어떻게 합니까? 누가 정확하게 한 단어 한 단어씩 읽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요? 그렇게 읽고 있습니까? 물론 읽으니까 뭐 ‘에사 바가와또 사와까 상고’ 이렇게는 읽습니다. 모르는 단어 읽을 때는 조금 (천천히 읽는) 그게 가능하죠?

그 밑에 거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분들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인 상가이니’ 이렇게 아는 단어들 한글을 읽을 때는 보통 ‘이 분 들 은 부 처 님 의 제 자 들 인’ 이렇게 읽는 사람 있습니까? 그냥 ‘이분들은 부처님의’ 한 문장 한 단어 요렇게 쭉 같이 읽어버리죠? 안 그러면 이렇게 쭉 보면 이 문장 전체를 슬며시 가져와 버립니다.

 

근데 나중에는 기억에 보면 그렇게 가져온 거는 삼 초도 안가. 순간적인 집중력이 강한 사람들은 기억력이 안 좋다고 그럽니다. 군데 순간적인 집중력은 안 강하다 하더라도 둔한 사람들은 기억력이 오래간다고 그럽니다. 바로 이겁니다 순간적인 집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걸 전체를 한 단어 한 단어 읽는 게 아니고 전체를 확 가져 오거든. 머릿속에. 그러니까 내일 시험친다고 할 것 같으면 벼락치기 할 때 그렇게 했을 때는 내일 시험칠 수가 있습니다. 내일 시험치고 나면 모레되면 몰라. 근데 늦지만 이걸 꾸준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씩 하나씩 하는 사람들은 내일 시험은 잘 못 칠 수가 있어. 근데 그거는 오래도록 가진다는 거라.

그래서 집중력을 좀 키워줄 필요가 있습니다이. 그런 사람들은 그게 잘못됐다고 집어줘야 됩니다.

 

그래서 연속하는 순간순간 마음을 갖다가 명확하게 대상에 맞춰주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은 순간순간 급격하게 아주 빠르게 일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집니다. 그럼 그 빠르게 일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데 집중력을 갖다가 더욱 끊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쩔 수 없이 알아차림을 이어주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 집중력은 딱 고정이 돼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고정돼버리니까 요걸 갖다가 전체를 폭 읽어버리는 거라. 이걸 하나씩 ‘에 사 바 가 와 또’ 이렇게 안 읽는다는 거라. 그냥 쭉 같이 읽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사띠와 결합된 집중력을 키우도록 해줘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자,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이런 집중력을 계발할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집중력을 계발할려면, 처음엔 집중이 잘 안되죠? 그러면 집중할 수 있는 대상들을 갖다가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야 됩니다. 아까 얘기했죠? 집중은 어떤 것이 집중이라고 했습니까? 탐·진·치가 없는 것이 집중입니다. 그러면 집중을 할려면 일단 탐·진·치가 없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만이 바르게 집중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집중을 계발하는 맨 처음 포인트도 이런 장애들을 갖다가 내 마음속에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 내가 지금 탐심(貪心)이 있는가 없는가, 진심(嗔心)이 있는가 없는가 확인하고 나서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지, 확인도 안 하고 수행을 할 것 같으면 어떤 경우는 용쓴다고 그럽니다. 용쓴다고. 용쓰다가 지 풀에 지쳐가지고 푹 고꾸라져버린다고.

 

그래서 수행하기 전에 보통 어떻게 합니까? ‘멧따 가타(metta gāthā)’ 자애심을 방출하라 합니다. 그렇죠? 자애심을 방출하라 하는 건 뭐 때문에 그럽니까? 마음에서 탐·진·치를 대처할 만한 작용들을 해주는 거라. 그랬으니까 사랑이라든지 보시라든지 아니면 뭐 꾸살라, 꾸살라 마음하고 결합이 되도록 만들어주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자애심을 계발하든지, 그다음에 해야 될 것이 뭡니까? 대상을 찾아야 되겠죠. 대상이 없으면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에다가 마음을, 초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마음이 현재의 대상에 초점이 맞춰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속에서 집착하고 걱정하고 하는 것들을 떨쳐버려야 됩니다.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게 바로 마음의 장애를 확인하는 첫 번째 일입니다. 마음의 장애 없이 대상에 집중할 것 같으면 수월하게 집중을 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집중만이 바른 집중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바른 집중만이 위리야(vīriya) 노력의 힘을 배가시켜 주고, 잘되니까 당연히 노력을 더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안정감이 있게 되고 또 아, 이것 참 잘되는구나 해서 자신감도 갖춰지게 되고 이렇게 뒤따라와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할려면 우선 마음의 상태를 가장 먼저 정확하게 자신이 파악을 해야 됩니다.

 

수행하기 전에 딱 앉아서 맨 처음 하는 것들이 멧따바와나를 단 일 분이라도 하고 수행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상에 마음을 묶어두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절을 하죠?

절을 할 때 ‘내림’‘내림’‘내림’‘내림’ ‘닿음’‘닿음’‘닿음’‘닿음’ ‘덮음’‘덮음’‘덮음’‘덮음’ 그다음에 왼손 ‘내림’‘내림’‘내림’‘내림’ 그다음에 ‘닿음’‘닿음’‘닿음’‘닿음’ ‘덮음’‘덮음’‘덮음’‘덮음’ ‘구부림’‘구부림’‘구부림’‘구부림’ 이렇게 하면서 마음을 대상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라고 그러죠. 그래서 여러분들 절하러 나갈 때도 절하는 법 이렇게 세밀하게 스님이 표시를 해줬죠? 그냥 절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이. 대상에다가 마음을 일치시키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일치됨과 동시에 알아차림도 같이 계발되어 나갑니다. 집중력도 당연히 생겨나는 거고. 이렇게 할 경우에 우리는 집착하고 걱정하는 것들을 일차적으로 덜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해서 만약에 수행을 한다고 해봅시다. 집중이 깊어 가면 깊어 갈수록 마음은 주대상에 머물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코끝에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을 관찰하고 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데 마음이 딱 고정되어 있단 말입니다. 마음은 한 점, 요 삼각점이라고 했죠? 삼각점 한 점에 딱 고정돼있습니다. 그런데 그길 따라서 똑 바이올린 키를 켜듯이 숨은 왔다 갔다 하는 거죠? 근데 마음은 딱 한 점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지금 진행이 돼나갑니다.

그렇게 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다른 대상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소리가 들리든, 아니면 냄새가 나든, 아니면 대상이 보이든 크게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는 거라.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뿐아니라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집중력이 강하기 때문에 이 대상 자체를 다 놓아버립니다. 그래서 그 대상에 대해서 흥미를 점차적으로 잃어갑니다. 그렇게 하나의 대상만 오롯하게 하다 보면 어떻게 돼요?

 

숨이라는 것은 점점 미세해집니다. 점점 미세해지다가 거의 숨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그런 경우들이 있죠?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숨이 딱 멎은 것 같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땐 어떻게 돼요? 코끝에 마음은 가있기 때문에 대상은 멎은 것 같이 돼버리지만 마음은 그 흔적에 딱 머무르게 됩니다. 숨이 왔다갔다 하는 흔적에 딱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마음속에서 그걸 갖다가 니밋따라고 그럽니다. 니밋따가 생겼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꼭 안개 같은 것이 왔다 갔다 느껴지기도 하고, 마음으로 느끼는 겁니다이. 대상으로써 안개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고, 부드럽게 뭐가 만져주는 느낌 감촉들이 느껴지기도 하고, 안 그러면 빛 같은 것이 환하게 하얗게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게 어떤 거냐 하면 니밋따의 현상들입니다.

 

대상은 미세해져가지고 없어졌지만은 대상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서 다른 작용들로써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런 경우들 가끔씩 있습니까? 여러분들 잘하는 ‘석가모니불’ 같은 경우 ‘석가모니불’‘석가모니불’‘석가모니불’ 하다 보면 나중에는 석가모니불이 없습니다. 내가 석가모니불을 염송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에는 자동적으로 석가모니불을 하고 있습니다. 다들 그런 경우들 있죠? 입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이미 석가모니불에 딱 고정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석가모니불이 훤하게 내 앞에 나타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게 바로 니밋따의 현상들입니다. 똑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내가 부처님 봤다’ 이러지. 안 그러면 뭐 뭘 얻었다 그러더라? 어디 가서 ‘성불 봤다’ 그러는데 나는 처음에 무슨 얘긴가 했어. 그건 니밋따 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대상에 고정되어 있으면 반드시 나타나는 게 이 니밋따 들입니다.

그래서 니밋따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어느 누가 석가모니불 봤다고 해서 석가모니불을 집에까지 가져오는 사람 없죠? 거기서 놓아버리고 오죠? 순간적으로 탁 나타나지죠. 그리고 다른 니밋따도 마찬가집니다. 따뜻한 빛이라든지 부드러운 감촉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거라.

 

그러면 그것을 계속 사람들이 집중을 하면 되는데, 이 마음이라는 게 요상해가지고 거기서 환희심이 나갖고 “우와” 이래버리니까 거기서 딱 끝나버리는 거라.

그럴 때 그대로 관찰하고 있을 거 같으면 이 니밋따도 변한다는 걸 압니다. 니밋따도 틀림없이 변해나갑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부처님이 왔다갔다, 작아지기도 하고 커지기도 하고 이렇게 바뀌어나가고 안 그러면 부처님이 휘익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휙 가기도 하고 대상이 마음에서 자꾸 변해나갑니다. 그걸 알게 되는 거라. 그 변하는 걸 알 것 같으면 사실은 이 니밋따에 집착을 안 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돼요? 마음은 뭔가를 찾게 됩니다.

 

그때 생겨나는 게 뭐냐 하면 위딱까 입니다.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 삐띠(pīti), 수카(sukha), 에깍가따(ekaggatā) 그렇게 얘기하죠? 대상은 없어졌지만 마음 자체로 향할려는 생각, 이것이 위딱까(vitakka)입니다. 위딱까가 반드시 짧게 탈칵 일어납니다.

수행은 사실은 이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 대상으로 향하는 생각들이 탁깍 일어나는 것이 짧을 경우에는 아주 순간에 일어나지고,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요게 조금 더 길어집니다. 그렇게 대상을 향할려는 마음들이 생각들이, 이게 계속 쭈욱 향할려고 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걸 지속시켜주지 않으면 이거는 없어져 버립니다.

 

지속시켜주는 것이 반드시 따라옵니다. 그게 뭐냐하면 위짜라(vicāra)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이 대상을 향하려는 마음을 고찰하는 것들 이것이 바로 위짜라입니다. 그래서 다시 대상이 나타나집니다. 호흡이 다시 나타나지고, 아니면 내가 석가모니불 하고 있었다면 석가모니불이 다시 찾게 되고 이렇게 나타나집니다. 그런데 그전에 호흡을 관찰했을 때하고, 이 위딱까하고 위짜라가 뭔지를 알고 관찰했을 때는 천지간에 차이가 납니다.

그전에는 대상을 향하고 있을 때는 어떤 경우에는 강하게 노력을 해야 만이 가능합니다. 근데 인제는 그렇게 강하게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대상에 마음이 딱 붙잡혀가 있는 상태가 됩니다. 대상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같이 나가집니다. 그전에는 대상이 여기 있으면 마음을 갖다가 자꾸 갖다 붙였거든. 마음에다 갖다 붙이다보니까 요놈의 대상이 홀라당 사라져버렸거든.

그러니까 마음 자체가 대상이 돼버리는 거라. 마음 자체가 대상이 됐다가 이 마음 자체도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 대상이 나타나집니다. 그전에는 대상에 마음을 갖다 붙였지만, 지금은 똑같이 마음을 갖다 붙이는 건데 수월하게 갖다 붙이는 거라. 그래서 대상과 마음이 하나로 꼭 합쳐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치된다고 할 거 같으면 뭐가 생겨났겠습니까? 바로 기쁨(pīti)이 생겨납니다. 기쁨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생겨납니다. 그게 진정이 되고 나면 수카(sukha)가 생겨나지고, 그게 진정이 되고 나면 생겨나는 것이 뭐냐 하면 에깍가따(ekaggatā) 입니다. 앞에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네 가지가 집중을 깊게 해줍니다. 집중을 깊게 해주는 역할들을 해주고, 에깍가따가 포함된 이 다섯 가지가 하나의 묶음으로써, 단일체로써 함께 기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내가 집중을 잘했다 아니면 사마디에 들었다 안 들었다 어떻게 표현을 하느냐면, 이 다섯 가지가 같이 기능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가지고 표현들을 합니다.

이게 멍하니 자욱하게 있었는데 시간은 두 시간이나 홀라당 지나가 버렸다. 내가 참 두 시간 동안 집중 열심히 하고 나왔다고, 누가 그런 경우들이 있죠? 내가 손가락은 안 가리키겠는데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망상피우다 나온 거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에깍가따가 뭔지도 모르면서, 에깍가따가 나타날 때는 마음과 대상이 꼭 송곳에 딱깍딱깍 하듯이 나타나집니다.

 

근데 그것도 모르면서 난 집중했다 하는 거라. 집중했다고. 그런데 그런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 앉아있는 사람들의 몸을 보면 몸이 막 지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집중이 돼있는데 왜 이렇게 몸이 움직여? 마음이 대상에 고정되어 있는데 고놈의 마음이 요도 왔다가 저도 갔다가 하면 그거는 집중이 아니지.

그리고 뭐 다리가 저린다고 하기도 하고, 안 그러면 어떤 경우는 어떤 말들까지 하느냐면,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그런 얘기들을 하는 거라. 다음부터는 그런 얘기하면 안됩니다이.

 

쉽게 말하면 완전하게 집중했다고 하는 것은 절대 동적인 것이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있었다든지, 또 고요하게 아무것도 없이 지나갔다든지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집중을 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 다섯 개가 같이 일어나는데 대상에 집중을 하는 것이 있을 뿐아니라 어떤 것에도 치우지지 않게 됩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이라든지 즐거운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치우치지 않고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시켜 주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다른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 그 대상 자체가 일어나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 그래서 그런 다른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지지 않는데,

단지 뭐가 있느냐? 접촉(phassa), 그다음에 느낌(vedanā), 그다음에 지각작용(saññā), 의지력(cetanā), 그다음에 생명현상(jīvitindriya) 이런 것들이 있는 줄을 압니다. 접촉도 있고, 느낌도 있습니다. 지각작용도 있고, 또 내가 의지에 인해서 의지력이 일어나지기도 하고, 또 내가 살아있다는 생명현상들도 반드시 있습니다.

근데 이것이 없는 상태라고 할 것 같으면, 쉽게 말하면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거는 거짓말입니다. 어쨌든 이것이 집중입니다. 완전하게 집중한다.

 

보통 이런 집중들이 계발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머물러 버립니다. 문제가 뭐냐면 거기에 머물러 버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버립니다. 왜 그러냐면 이런 느낌들이 너무 크거든. 그런 느낌들이 일어나야 되는데 아무 느낌이 없다는 것은 그것은 아니라는 거라. 아주 평화로운 느낌들이 굉장히 큽니다. 꼭 산더미 같이 이렇게 느껴집니다. 이때까지 그런 체험들을 안 해봤으니까 그게 얼마나 좋으냐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 머물러버린다는 거라.

 

부처님과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여러 선사들 알라라 깔라마나 웃따까 라마뿟따의 차이점이 바로 요거라. 탐·진·치라는 것을 눌러버린 상태에서 있었던 것이냐 아니면 탐·진·치가 이런 것인 걸 알고 그걸 깨부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냐 그 차이점이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다른 스승들은 여기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에 머물러버립니다.

부처님은 아무리 머물러봐야 깨어나고 나와 보니까 똑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 이게 아니다 그래서 다시 길을 찾게 되는 거라. 그래서 찾은 것이 뭐냐 하면 이 집중의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복합적으로 나타나야 만이 이것을 부술 수 있다. 그것이 지혜를 계발하는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자나(jhāna)라고 하는 것, 지금 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자나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일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 까지 얘기를 할 겁니다. 언젠가 한번 한 적이 있죠? 지금은 일선정 까지 얘기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이. 근데 위빳사나는 일선정까지만 해도 충분합니다.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래서 관계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삼매에 들려고 노력하지 마라. 삼매에 드는 것보다 사띠를 자꾸 계발하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어쨌든 이런 것들이 어떤 면에서는 카니까 삼매(khaṇika-samādhi)에 해당이 됩니다. 다른 말로는 예비삼매라고도 하고 빠리깜마 사마디(parikamma-samādhi)라고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게 계발되고 나면 우빠짜라 사마디(Upacara-samādhi), 그다음에 더 넘어가서 압빠나 사마디(Appanā-samādhi) 이런 식으로 넘어가집니다. 그 부분은 언젠가 설명을 다시 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반드시 사띠와 사마디, 안 그러면 사띠와 에깍가따가 같이 작용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수행을 딱 시작할라고 하는데,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되면 좋은데 안정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집중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병 생깁니다.

그때는 사띠만 자꾸, 알아차림만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쉽게 말하면 악의가 있다든지, 들뜸이 있다든지, 의심이 든다든지, 금방 잠에 푹 떨어지는 혼침이 있다든지 이런 다섯 가지 장애들, 아니면 열 가지 미세한 장애들 그런 것이 마음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때는 집중을 먼저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때는 사띠만 자꾸 계발시켜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근데 수행할려고 탁 앉았는데 마음이 쉽게 그런 장애들을 물리치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럴 것 같으면 집중을 바로 해도 됩니다. 대상에.

 

그 집중이라는 것은 대상에 꼭 붙잡아둬도 되고, 아니면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따라서 집중, 집중력을 계속 늘려나가도 되고 그거는 관계없습니다. 그때는 집중을 쭉 해줘도 어쨌든 사띠와 연결돼집니다. 근데 그렇지 않고 마음에 산란함이 많고 집중이 안 되고 마음의 안정이 안 되고 할 것 같으면 집중을 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는 대상에 먼저 집중을 할려고 하지 말고 사띠만 자꾸 계발을 시키도록 그렇게 해주는 것이 수행의 포인틉니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집중은 반드시 동시 작용적으로 하도록 노력하라 하는 얘기입니다.

 

어릴 때 여러분들 종이 태워먹기 많이 해봤죠? 이 종이 위에 돋보기 이렇게 놔놔 놓고 햇볕가지고 태워먹죠?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이 햇볕을 모아주죠? 그게 집중하는 겁니다. 집중해야만이 이 종이에 구멍이 납니다. 집중하는 것이 요놈의 돋보기가 흔들려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집중된 그 위치가 벗어나버릴 것 같으면 못 태우죠? 여도 조금 그슬려먹고 여도 조금 그슬려먹고 그리 돼죠? 그게 뭐냐 하면 집중과 사띠 이 두 가지가 돼야 만이 이것을 태워먹을 수가 있습니다.

 

단 주의해야 될 것은 설령 내가 깊은 집중을 얻지 못한다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띠만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합니다. 사띠만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나중엔 사띠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집중할려고 하면 사띠가 없으면 집중할 수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집중은 키워집니다.

근데 집중만 해가지고는 사띠가 없어도 무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띠만 해도 무방하다는 것은 사띠만 하더라도 집중력은 키워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설령 내가 집중해서 삼매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두지 마라. 삼매를 목적으로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사띠를 목적으로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어떨 때는 집중이 잘될 때가 있을 것이고, 어떨 때는 사띠가 잘될 때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자꾸 반복하다 보면 두 가지가 다 동시에 키워집니다. 가령 집중을 할려고 하는데 마음이 방황을 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관찰하라 그랬습니까? 방황하는 마음을 갖다가 관찰하라 그러죠? 방황하는 마음만 알아차려주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렇게만 해도 집중력은 커집니다.

그걸 일부러 집중할려고 이렇게 용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방황하는 마음도 사띠로써 집중력을 키워주게 되고 또 그렇게 사띠를 하므로 인해서 실재적인 현상들을 더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에 집중력이 더욱더 날카로워지게 돼있습니다.

 

자, 이런 집중은 가장 작게는 생활에 굉장한 도움을 줍니다. 그렇죠? 그래서 행복한 생활을 해나가려고 할 것 같으면 집중력을 키워라. 집중력을 키우면 ‘아, 이거 나쁜 집중은 부처님이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러면 나쁜 집중은 안 하겠죠? 나쁜 집중 안 하면 어떻게 돼요? 당연히 좋은 방향으로 돌아오겠지.

그래서 바람직한 생활을 해나가는 데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해당이 됩니다. 공부를 한다든지 요리를 만든다든지 차 운전을 한다든지 뭐 어떤 것을 한다든지 모든 것에 다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집중력을 반드시 키워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이 집중은 또 어떤 때에 효과가 있느냐 하면 사마타 바와나! 사마타 바와나와 위빳사나 바와나가 있다고 그랬죠? 사마타 바와나를 할 때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빛에 대해서 집중하고 집중력을 키워줄 때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왜 사마타 바와나와 위빳사나 바와나 두 개로 나눠놨을까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판단을 해야 됩니다. 하나가 틀렸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서로 보완적인 관계입니다이. 그러니까 바와나입니다.

그래서 이 사마타 바와나에서도 길러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또 건전한 생활을 해나가면 이 집중력은 키워집니다. 그다음에 위빳사나 수행을 했을 경우에도 반드시 집중력이 키워지죠? 어떻게 해서 키워집니까? 사띠로 인해가지고 실재적인 성품이 드러나지게 될 때 아낫따 때문에, 아낫따.

 

그래서 알아차림과 집중하는 것이 동시작용으로 해야 그래야만이 바른 이해가 되어 나간다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집중 에깍가따로 인해서 말과 행동과 생각이 고요해지고 안정을 얻도록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산만한 사람들은 산만한 행동들이나 산만한 말들이나 마음들이 자꾸 고쳐져서 고요하게 가라앉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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