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tanā ( 쩨-따나-:의지 思 ) 2. (20070309)

담마마-마까
2021-09-02
조회수 55

저번 시간까지 한 것이 ‘심소로서의 쩨-따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힘입니다. 그러나 쩨-따나-는 모든 마음에 일어나니까, 거대한 힘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거기까지 했죠?

 

그다음에 오늘 부분 해봅시다.

‘눈을 뜨면 자동적으로 무엇인가가 보입니다.’ 교재 보십시요이. 그렇게 스님이 적어 놨습니다.

 

저번 시간에 스님이 설명을 하면서 몸으로 일으키는 의지력, 말로 일으키는 의지력, 또 정신으로 일으키는 의지력, 이런 의지력의 결과로 일어나는 행위, 이 행위로 인해서 우리는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하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까지 했죠?

 

부처님은 관찰해야 되는 것을 여러 가지를 얘기를 해놨습니다. 몸을 관찰하라. 느낌을 관찰하라. 마음을 관찰하라. 그다음에 법을 관찰하라. 이런 관찰할 대상을 여러 가지로 해놨습니다. 그중에 이 의도도 이 쩨따나도 경전에는 물론 상카라(saṅkhāra)라고 돼있습니다. 상카라(saṅkhāra)하고 쩨따나(cetanā)하고는 같은 의미입니다이.

이 쩨따나도 관찰할 중요한 대상이다 하는 얘기를 해놨습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와 있냐 하면 마음에 대한 관찰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은 마음을 관찰한다 할 것 같으면 이 쩨따나를 관찰한다 하는 것하고 꼭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 쩨따시까 부분이 끝나고 나면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마음에 대한 관찰을 들어가겠습니다.

저번에 몸에 대한 관찰, 느낌에 대한 관찰을 끝내고 나서,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하기 전에 이 마음에 대한 것들을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이 아비담마 중에서 쩨따시까, 찟따 부분을 해준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것이 마음에 대한 관찰을 들어갈 겁니다. 마음에 대한 관찰을 끝나고 나면 또 루빠에 대한 것들을 여러분들한테, 아비담마에서 나오는 루빠 부분을 설명하고 나서 다음에 법에 대한 관찰을 해서 마무리를 지을 겁니다.

내가 그 부분까지 다 여러분들한테 해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렇죠? 내가 떠날 수도 있고, 여러분들이 안 나올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건 차후의 일이고 지금은 그런 생각 하지 말고 지금은 하나씩 하나씩이라도 바르게 알아나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번 시간에 이어서 쩨따나 부분을 가지고 얘기 해보겠습니다.

 

의도는 어느 때라도 있다고 그랬습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런 사람 있죠? ‘아, 나 아무것도 하기 싫다’ 하면서 누워있는 사람 있죠? 안 그러면 다리 쭉 뻗어갖고 벽에 기대가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해도 어쨌든 의도는 있죠? 쩨따나는 있습니다. 내가 뭘 움직일 때만 쩨따나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것에 쩨따나가 있습니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해서 자기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죠?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단지 자기가 뭔가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뿐이라. 그럴 것 같으면 이왕 할 것 같으면 알면서 하는 게 더 좋지. 하기 싫은 것도 ‘하기 싫구나’ 하고 아는 것도 큰 도움이 되는 거라. 그래서 우리와 항상 함께 따라다니는 것이 이 쩨따나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행하고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들은 모든 것이 마음의 연속 같이 보이지만은 어떤 면에서는 쩨따나의 연속입니다. 원인·결과로써 이어지는 쩨따나로 인해서 다른 것이 결합돼서 일어나지기도 하고, 결합하지 않고 일어나지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그럼 부처님도 쩨따나가 있었겠습니까?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있겠죠? 의도라는 건 다른 면에서 얘기할 것 같으면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부처님도 살아계셨으니까 의도는 있었겠죠. 근데 의도는 있었는데 우리하고는 조금 다르죠? 우리는 뭔 의도를 내고 나면 뭔가 좋고 싫은 것이 탁 눈에 들어오죠? 근데 부처님은 그렇지는 않죠? 그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어쨌든 상카라가 쩨따나니까 쩨따나에는 상카라가 있는데 결합하지 않는 것! 우리는 결합을 하는 거고.

 

그걸 쉽게 얘기하면 총에다가 총알을 여놓고 빵 쏘면 요놈의 총알이 단단한 걸로 결합이 돼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지속적으로 날아갑니다. 목표물까지. 근데 빈 탄창 여놔 놓고 빈 공간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보면 먼지라고 하는 것이 결합이 됩니다. 결합은 되지만 그것을 땅 쏴도 뭐 날아가는 게 없죠? 부처님과 일반 범부와의 차이는 똑같은 쩨따나이지만 결합돼 있느냐 결합돼있지 않느냐 그 차이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결합되지 않는 쩨따나를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수행을 하고 있는 거죠? 부처님 법문을 스님을 통해서 듣고 있는 것도.

 

자, 그래서 우리는 ‘인식해 보려고 할 경우에도 상당한 쩨-따나-가 일어납니다. 「서고 싶다」라고 생각하자마자 서는 경우는 쩨-따나-가 강하게’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수록 쩨-따나-가 강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스님이 적어놨습니다.

 

수행 초기에 한번 봅시다. 다리를 구부린다고 하자. ‘다리를 구부리고자 함’이라고 하는 것을 관찰하기가 쉬워요, 아니면 실제적으로 구부러진 상태를 관찰하기가 쉬워요? 구부러진 상태를 관찰하기가 쉽죠? 그럼 수행 초기에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의도는 내가 알아차리지를 잘 못하고 있다는 거죠? 이 쩨따나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니까 그냥 걸어갈 때도 그냥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들고 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이렇게 관찰하라 그럽니다.

 

근데 조금 더 수행하다 보면 스님이 어떻게 합니까? ‘들고자 함’ 하고 나서 들어라 그러죠? 그거는 왜 그렇습니까? 의도를 알아차리라 하는 겁니다. 근데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여러분들 경행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먼저 마음으로 의도를 냅니다. 마음으로 ‘들고자 함’ 하고 나서 그다음 듭니다. 그것도 맞기는 맞습니다만 일단은 행위가 지속이 되는 상태에서는 의도를 관찰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어떤 때 그럼 의도를 관찰하기가 쉬워집니까? 멈춰있을 때, 그리고 멈추고자 할 때, 멈추기 직전이나 아니면 시작하기 직전이나 이럴 때는 의도를 관찰하기가 수월해집니다. 그렇죠? 그래서 경행을 할 때도 맨 처음에 어떻게 합니까? ‘들고자 함’ 하고 나서 들고, 들고 나서 마지막에 ‘멈추고자 함’하고 나서 딱 멈추죠? 발을.

그런데 중간에 어떻게 합니까? ‘들고자 함’해서 들고, ‘나아가고자 함’하고 나서 나아가고, ‘내리고자 함’해서 내리고 이렇게 합니까? 그렇게는 안 하죠? 그렇게는 안 가르쳤죠 스님이.

나중에 면밀하게 그것을 서른여섯 가지로 구분할 때는 다 일일이 구분을 합니다. 통상적으로는 맨 처음에 의도를 관찰하고 행위를 하는 것을 쭉 연결하고, 행위가 끝날 때 돼서 행위가 끝난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행위를 끝내라 하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스님이 여기에 적어 놓았듯이 ‘몸을 움직일수록 쩨-따나-는 강하지는 않다.’ 하는 얘기는 바로 그런 얘깁니다. 쩨따나가 강하고 강하지 않고는,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강하고 강하지 않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알아차리기가 용이할 때는 그것이 강하게 와 닿을 것이고, 알아차리는 것이 용이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거는 강하게 와 닿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쩨따나를 수행의 큰 대상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포인트가 ‘움직임이 연속될 때는 쩨따나를 관찰할려고 노력하지 말아라.’ ‘단지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나, 움직임이 시작될 때나, 움직임이 끝날 때는 반드시 쩨따나를 먼저 관찰하도록 하라’ 하는 것이 수행의 맨 처음 포인트입니다.

사람이 계속 움직일 수도 없고, 계속 멈추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거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수행에서 쩨따나가 참 중요한 관찰대상이다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에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움직일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물질적인 현상이 훨씬 뚜렷하고 분명하게 와 닿습니다. 그럼 그걸 관찰해야 됩니다. 그걸 관찰하다가 관찰이 잘 되어나갈 때는 자동적으로 의도들이 드러나 집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순관이다. 왜 그러냐면 관찰이 잘 돼나간다는 것은 일단 내가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대상에 집중하고 있으면 그에 따라서 정신적인 현상들도 따라서 강해집니다. 집중이 잘되기 때문에.

그러면 의도라 하는 건 뭡니까? 물질적인 현상은 아니죠?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그럼 정신적인 현상은 반드시 세분화시켜서 알게 됩니다. 아, 이게 의도구나 하는 걸 처음엔 어렴풋하게 압니다. 근데 조금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 이게 의도구나 하는 걸 갖다가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아, 이게 의도가 앞서가지고 행위가, 물질적인 현상이 따라오게 되는구나 하고 원인·결과를 자동적으로 알게 됩니다.

 

근데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지금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물질적인 걸 먼저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의 가장 기본적이 포인트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배라고 그래요? 스님이?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라. 왜 그렇겠습니까? 의도를 관찰하기도 쉬울 뿐아니라 물질적인 현상도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가장 수행의 기본 포인트는 배라고 하는 거라. 배를 관찰을 잘할 거 같으면 의도를 더불어서 알게끔 돼있습니다.

(수행자 질문)

그거는 맞습니다. 그거는 물질적인 현상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알아라 하는 것이고 하나의 행위에. 그런데 지금 의도하고는 관계없이 얘기하는 겁니다. 의도는 또 하나의 행위입니다. 정신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그 행위가 끝나고 나야 물질적인 행위가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행위도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고, 물질적인 행위도 마찬가지로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거라. 구분해서 나중에는 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의도를 관찰하는 것들이 중요하냐 하면 만약에 의도 지 혼자서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릴 것 같으면 사실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지 혼자 뭐 왔다갔다 하는 거야 뭐 어쩌겠어. 근데 이놈의 의도라는 게 참 묘하게도 다른 거하고 결합합니다. 아까 총알을 얘기한 것처럼 결합을 해버립니다. 도사나 로바 하고 결합이 돼버립니다. 오히려 모하(moha) 하고는 잘 결합을 안 합니다. 그거는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합을 잘 안 합니다. 도사(dosa)하고 로바(lobha)하고 결합을 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반작용들이 자꾸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이 성을 낸다든지 화를 낸다든지 욕심을 가진다든지 이렇게 자꾸 되기 때문에, 마음이 시원하게 식고 차분해지고 고요해지는 반대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그러면 의도를 알아차릴 것 같으면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의도를 관찰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기도 한 겁니다.

 

한번 계속해봅시다.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쩨-따나-인 것입니다.

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업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숨을 곳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수행할 때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은 뭡니까? 실재적인 것이죠? 관념적인 것이나 개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수행할 때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은, 개념이나 관념으로 빠지는 것들을 중지를 해야 됩니다. 그 관념이나 개념을 분해해버릴 것 같으면 그쪽으로 빠지지는 않습니다. 그 분해하는 역할을 도와주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쩨따나 부분입니다.

부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마음에 나타나는 아주 기본적인 쩨따나와 그다음에 매순간 우리가 짓게 되는 업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라 그럽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업이 쩨따나라고 그랬습니다. 그렇죠? 부처님은 그래서 업은 쩨따나라고 했는데, 또 다른 경전에는 쩨따나와 업을 볼 수 있도록 하라 그럽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그러면 어떨 때는 같은 것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같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그 밑에 부분에 보면 ‘쩨-따나-에는 업이 되는 쩨-따나-와 업이 되지 않는 쩨-따나-가 있습니다.’

업이 되는 쩨따나도 있고, 업이 되지 않는 쩨따나도 있다 하는 얘기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 딴하(taṇhā)가 탁 붙어버리면 업이 돼버리겠죠? 딴하가 붙지 않으면 업은 되지 않습니다. 아까 총알의 비유와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수행들을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내가 좀 편안해지고 싶어서, 아니면 내가 스트레스가 많으니까 스트레스를 잠재울려고 수행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우리 마야님 같은 경우에는 왜 수행합니까? 평온해지기 위해서? 평온해질려면 요가만 하십시오. 그것만 해도 평온해지니까. 안됩니까? 원장님 같은 경우는 왜 수행합니까? 지혜로워질려고? 그것도 일리는 있는데 그것도 맞는 얘기는 아닙니다. 책만 봐도 지혜로워집니다. 완전하게 지혜로워지지 않아서 그렇지.

 

수행하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게 괴로운 겁니다. 괴로움 이놈을 탁 뿌사뿔라고 수행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요걸 갖다가 탁 끊느냐, 생각도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몸도 끊임없이 변해가는 거고, 그걸 한번 끊어보고 싶다는 거라. 그걸 뭐 크게 얘기하면 윤회의 사슬을 끊는다고 하겠지만 어쨌든 이 고통의 뿌리를 내가 한번 끊어보겠다 하는 것 때문에 수행을 하는 겁니다. 물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가지고 그것을 없앨려고 하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런 것들이라. 그러면 탁 끊는 것도 연습을 해야 끊습니다. 칼질도 자꾸 연습을 해야 되는 거지.

 

의도는 뭡니까? 내가 아까 의도는 언제 관찰하라 그랬습니까? 멈춰있을 때나 시작하기 직전이나 끝나기 직전에 멈추는 그때. 늘 내가 관찰하는 것들을 자꾸 알아차려야만이 고통을 끝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자꾸 그런 의도를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법회 다 끝났다. 끝나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음, 집에 갑니다. 팽하니 갑니다. 조금 전에 스님이 의도를 관찰하라 그랬는데 언제 들었냐는 듯이 내가 가고자 하는 마음을 관찰하기도 전에 이미 벌써 일어나서 저까지 갔어. 그렇죠? 그런 행위들은 여러분들이 말하는 업을 끊는다든지 윤회의 고리를 끊는 행위들은 아니죠?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법문을 듣다가, 멈춰있다가, 행동을 하기 직전에는 반드시 의도를 먼저 관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의도를 관찰하면 적어도 팽하고 일어나고 가지는 않는다는 거라. 천천히 내가 행하는 행위들을 관찰을 해나갈 수가 있다 하는 거라.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은 업에서 도망칠 순 없지만 업을 끊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을 끊는 방법의 첫머리가 바로 이 의도를 관찰하는 방법들이라는 것만은 아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그 밑으로 갑시다이.

‘쩨-따나-는 일으키는 것만으로 일어나서 사라져버리고 행위가 그다음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강한 쩨-따나-는 마음에 에너지로 축적되기 때문에 딴하하고 결합하든지 아니면 좋은 방향으로 쩨따나가 길러지든지 하게 된다. 의도를 알아차리면 그것은 강한 쩨따나가 돼서 마음에 축적돼버립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수행을 하는 데도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뿌리를 끊는데도 도움을 주게 돼있는데 딴하하고 결합이 돼버리면 반대방향으로 돼버리겠죠? 근데 강하지 않는 쩨따나는 지 혼자서 스르르 일어났다가 지 혼자서 스르르 사라져버립니다.’

 

부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면, 경책하는 경웁니다. 수행 안 하고 게을러졌다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든지 그러면 이 게송을 떠올려라 하고 그럽니다.

밤과 낮은 총알처럼 지나가고 있다.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가 하고 생각하라. 하는 겁니다.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들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가? 진짜 총알처럼 지나갑니다. 앞으로 여러분들 남은 생애도 그렇게 총알 같이 지나갑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도 의도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모든 일들이 사실은 행해집니다.

 

이 말은 경책하는 부분이지만 여러분들이 여기에 앉아가지고 법문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법문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있죠? 반드시 의도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집중할려고 하는 의도가 있을 뿐아니라 집중력을 유지할려고 하는 의도도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 유지하는 것으로 인해서 이 법문이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판단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의도가 그래서 법문이 내 마음에 끼치는 영향들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단순히 내가 무엇을 행할 때 처음 시작 부분만 일어나는 것이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모든 것에 일어나집니다. 들을려고 해도 마찬가지고 유지할려고 해도 마찬가지고, 그것을 다시 되새김질할 때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에 이렇게 의도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하고 생각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지로 의도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먹어야 만이 공부를 할려는 하는 마음들이 자꾸 생겨납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눈이 앞에 있는 대상을 볼 때 처음에 어떻게 합니까? 대상을 보고 그다음에 그 대상을 내 눈으로 받아들이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받아들이고 ‘아, 이게 뭔가’ 하고 조사를 하죠? 그러고 나서 ‘아, 이게 무엇이다’ 하고 결정을 합니다. 결정을 하고 나면 그다음 일어나는 것들이 뭐냐 하면 의도가 일어납니다. 의도가 일어나는데 그때 의도는 절대 강하지 않는 의도입니다.

이때가 수행의 포인트입니다. 그게 강해져버릴 것 같으면 저건 남자, 저건 여자 이미 그렇게 됐다면 강하게 다른 것들이 결합돼버린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정이 되고 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이 두드러지지 않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약한 쩨따나가 반드시 일어나집니다. 그러면 그 약한 쩨따나가 일어날 때 아, 이 의도를 알아차릴 것 같으면 ‘남자다, 여자다’ 하는 그다음으로 넘어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대상을 볼 때는 대상만 봐라.’ 그 얘기는 뭡니까? 대상에 대해서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마라. ‘이게 뭐다, 니다, 내다, 아니면 싫다, 좋다’ 하는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마라. 일으키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이 알아차리려는 의도에서 그것을 마음으로 알기만 할 것 같으면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하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마(nāma)와 루빠(rūpa)입니다. 이게 물질적인 것이다. 이것이 정신적인 것이다 하는 것만 알아만 차려도 두드러지지 않는 의도에서 끝나버립니다.

 

한번 봅시다. 자, 가만히 눈감고, 스님이 법문하고 있을 동안에 여러분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보십시오.

여러분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 스님 입에 가 있을 수도 있고, 자신의 귀에 가 있을 수도 있고 마음을 찾아보는데 참 찾기 힘들죠? 찾기 힘듭니다. 마음이.

근데 우리는 보통 그 마음이 어디 있는가 하고 알 때는 어떻게 해서 압니까? 내가 지각하든지 느낌으로 알든지 그다음에 되새김질해가지고 아는 것이 됩니다. 수·상·식(受想識) 이것으로 사실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압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아프다. 아픈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알려고 하더라도 아픈 느낌들이 있기 때문에 아, 이게 내가 마음이 아프다 하고 아는 거라. 의도도 어떤 면에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알 것 같으면 적어도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알음알이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수·상·행·식(受想行識)으로만 알더라도. 근데 인제 그게 조금 더 발전을 해버리면 어떻게 돼요? 알음알이가 생겨버리죠? 그래서 수행은 반드시 빠라맛타(paramattha) 실재적인 것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라. 절대 개념(paññatti)으로 넘어가 버릴 것 같으면 거기서 중단을 해버리는 거라.

내가 보는 대상에 대해서, 그 보는 대상이 ‘여자다, 남자다’ 하고 판별이 돼버린다든지, 그것이 ‘좋다 싫다’하는 생각이 일어나버리면 거기서 중단이 돼버립니다. 이미 그것은 수행의 진도를 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중단을 하고 즉시 다른 대상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스님의 소리를 들으면서 ‘아, 스님 소리 좋다’ ‘법문 잘한다’ 이래버리면 이미 틀려버린 거라. 그러면 거기 집중하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계속 딴하(taṇhā) 키우고 있는 거라. 자기는 알아차린다고 하고 있으면서도 딴하만 키우고 있는 상태라. 지금 스님의 소리가 그냥 소리로만 탁탁탁탁 귀로 와 치는 단계가 될 것 같으면 그거는 성공한 겁니다. 그렇지 않고 귀를 탁탁 치더라도 그 의미를 명확히 이해만 하는 단계라도 그거는 또 성공한 단계입니다. 근데 그 이상 넘어가면 안됩니다. 그 모든 과정에 바로 이 의도가 있습니다.

 

자, 그래서 여러분들은 결코 수행을 할 때 관념적이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물론 관념에 싸여있으면 어떤 면에서는 좀 평온하기도 하고 또 고요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 혼자 생각에 폭 빠져갖고 정신없이 나가고 있으면 참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근데 어떻게 됩니까? 결국에는 나중에는 이놈의 욕망하고 타협을 해야 됩니다. 내가 여기서 그만둘까 말까 타협하지 않으면, 어떤 면에서는 여기 우리 의사선생님한테 가야되는 거라.

그러니까 어쨌든 관념적인 것들을 자꾸 배제하려고 노력들을 하고 나마와 루빠로만 자꾸 보도록 마음을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멈추고자 하는 의도, 놓고자 하는 의도 이런 것들을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 의도가 나에게 익숙해져있든 아니면 익숙하지 않고 의도를 명확하게 알지를 못하든 그것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질 때까지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모든 행위는 의도와 마찬가지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의도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행할려고 하는 의도를 알지 못하고 그런 노력들을 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그런 노력들보다는, 지금 현재 경험되는 것들만 자꾸 취할려고 한다는 거라. 탐욕과 성냄이라고 하는 것들만 자꾸 취할려고 하는 거라. 그래서 그런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일어나는 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자꾸 의도를 알려고 노력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의도로써 자극, 격려하여 몸과 말과 마음이라는 문으로 업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행위가 일어나기 위한 기초가 되는 행위를 업이라고 말합니다.’ 하고 스님이 적어놨습니다.

행위의 기초가 되는 것이 의도다. 물질적인 의도는 어떤 겁니까? 내가 살아있는 자체가 물질적인 의도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물질적인 것에서는 의도가 일어납니다. 그럼 살아있다는 것은 곧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호흡을 하지 않으면 그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물질적인 의도는 관찰하기에 가장 용이한 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고 호흡에 있습니다.

 

그다음에 말,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나옵니까?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이렇게 말했다 해놓고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또는 판단하고 그것을 스스로 평가를 해가지고 조합을 하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 한마디는 할지 모르죠. 생각해가지고. 그다음에 ‘아’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버’ 할 줄 알아야 되고 그다음에 ‘지’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평가해야 됩니다. ‘아’ 했구나 평가를 해야 되고, ‘버’ 했다고 평가를 해야 되고, ‘지’ 했다고 평가를 해야 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과 이런 평가가 있어야 만이 말을 해집니다. 그럼 말하는 것의 의도를 관찰할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생각! 생각을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정신적인 의도는 어떤 겁니까? 마음으로 뭘 자꾸 생각하는 것, 그건 어떻게 압니까? 쉽게 말하면 내 이놈의 감정이 왔다리갔다리 하는가 안 하는가?

감정이라는 게 뭡니까? 느낌입니다. 이 느낌이 나에게 어떻게 와 닿는가 하는 것을 열심히 알아차리면 정신적인 의도를 관찰할 수 있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느낌과 생각과 그리고 호흡 이 세 개만 명확하게 알고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의도는 충분히 강하게 키울 수가 있고, 나쁜 방향으로 아꾸살라로 빠지는 것들을 방어를 해나갈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호흡에 집중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생각은 호흡으로 향해야 됩니다. 그렇죠? 그리고 호흡을 향해서 호흡이 지금 원활하게 되고 있는가 아닌가를 스스로 평가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호흡을 하면서 어떤 느낌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압니다. 싫은 느낌이 일어나는지, 아니면 팽창된 느낌이 일어나는지, 아니면 수축하는 느낌이 일어나는지 이런 것들을 알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호흡을 하나 관찰하는 데에 이미 조금 전에 얘기한 의도를 전부 관찰할 수 있는 근거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라.

 

자, 인제 이러면 여러분들이 의도에 대해서는 대충 여러분들이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내 지금 의도가 어떻게 됐나 볼 수 있을려고 할 것 같으면 탁 그 순간에 내 호흡의 상태를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럼 금방 압니다. 내가 지금 내 호흡 상태만 보더라도 내 의도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차릴 수가 있고, 뒤집어서 얘기하면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떻는가 하는 것도 알아차릴 수가 있다는 거라.

여기 수행 잘하시는 분들이 죽기 한 세 달 전에 내가 언제 죽을게 하고 예언을 한다고 그러죠? 어떻게 예언하는지 압니까?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호흡의 상태를 관찰해가지고 내 지금 현재의 마음의 상태와 몸의 상태를 명확하게 판단을 해내기 때문에 요놈이 요렇게 요렇게 돼가지고 언제 되면 딱 끝나겠구나 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나 삼 개월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에 있는 큰스님들은 내가 언제 열반에 들 것이다 하고 예언을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렇게는 못해도 죽는 순간에 꼴까닥 하고 숨넘어가는 순간은 알아야 될 거 아니라. 그래야 적어도 나쁜 데는 빠지지 않을 거니까.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이 쩨따나를 끊임없이 알아차려나가도록 하고 자꾸 강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에 보면 ‘이처럼 심소를 이해하는 것은, 마음을 바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증장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고 돼 있습니다. 반드시 마음들을 강하게 키우도록 노력들을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자, 여기서 오늘 끝내고 다음 시간에 에깍가따-심경일성 부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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