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ññā ( 산냐-:지각 想 ) (20070223)

담마마-마까
2021-09-02
조회수 115

(수행자 질문)

조금 전에 그것도 산냐 입니다. 기억을 했는데 조건이 달라진 상태에서 그걸 다시 기억을 못한 거거든. 그렇죠? 그래서 산냐가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라는 건 알겠죠?

보통 우리가 과거의 기억들을 이렇게 보면 옛날에 어떤 걸 기억을 해놨던 것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지금 기억하는 것이 옛날에 것 기억을 거의 비슷하게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을 십년 후에 기억을 하면 또 비슷하단 말입니다. 또 이십 년 뒤에 해도 비슷하고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영속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합니다. 조금 전에 우리 마야님 같이 까먹어버리거든. 이게 영속할 것 같으면 절대 까먹어서는 안되는 거라. 기억을 하고 갔으면 반드시 그 기억을 되살려야 되는데 까먹어버린단 말이라.

 

산냐도 정신적인 부분이죠? 물질적인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도 영원한 건 없죠? 영원한 게 없죠?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산냐도 거기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보통 문제가 고놈의 것이 내것이다 하는 생각이나 영원할 것이다 하는 생각 때문에 뭔가 자꾸 뒤틀어져버린다는 거라. ‘내가 기억하는 것이 정확하다’ ‘똑맞다’ 요런 생각을 가지니까 뭣이 자꾸 충돌이 생기는 거라. 그렇죠? 자기가 기억하는 것이 잘못 기억할 수도 있거든. 쉽게 말하면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코 만지면 어떻게 되고, 다리 만지면 어떻게 되고, 자기가 인식한 것은 그것뿐이라. 근데 그게 전체라고 판단을 하고 그것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면 큰 오산이라는 거지.

 

자, 오늘 산냐 부분 들어가 봅시다. 프린트물 봅시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산냐 부분입니다. 거기에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죠?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접한 정보를 구별하는 기능이 산냐다’ 하고 얘길 해놨습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기억하는 것들, 그다음에 인식하는 것들, 그다음에 주의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산냐의 영역에 다 들어가집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기억이나 인정하는 것이나 주의하는 것은 다릅니다. 근데 대부분 산냐의 뭉텅이에 들어가 집니다.

또 수행에서 산냐를 받아들이는 것하고 일반적인 ‘쩨따시까’라 할 때의 산냐는 또 다릅니다. 단순히 수행에서의 산냐는 뭉뚱그려지는 산냐입니다.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마음으로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탁 아는 것, 그 자체만을 얘기합니다 수행에서는. 그래야 거기서 사띠로 전환을 시켜나가기 때문에.

 

근데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산냐는 전체를 다 포괄합니다. 꾸살라든 아꾸살라든 어쨌든 전체를 다 포괄하는 형식으로써 산냐를 설명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전체에 대한 것을 얘기를 하고 나서 수행에서의 산냐 부분에 들어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이.

 

그래서 이 산냐를 정의 내릴 때 보통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사띠(sati), 그다음에 빤냐(paññā), 그다음에 사마타(samatha) 이런 부분하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써 설명해나갑니다. 근데 분명하게 여러분들은 사띠하고 산냐하고는 다른 것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거든요. 그렇죠? 어쨌든 산냐는 꾸살라(kusala)이든 아꾸살라(akusala)이든 다 일어나지는데 사띠는 안 그렇죠? 꾸살라에서만 일어나지죠? 이렇게 물론 구분은 해나갑니다.

구분은 해나가는데 사마타 부분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니밋따(nimitta)가 생기기 전에 산냐는 니밋따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는 산냐 부분이 되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사마타하고 니밋따 하고는 또 다릅니다. 근데 어떻게 보면 뭉뚱그려서 얘기들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한번 봅시다.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 그 대상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마음속에는 약간의 기능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산냐-(지각작용)입니다.’

간단하게 얘기해서 밖에 대상을 몸에 있는 감각기관이 탁 받아들였단 말입니다. 받아들여서 그러면 이게 뭔고 해서 주의를 할 거 아닙니까? 주의를 딱 하고 나서 그걸 딱 보고 나면 ‘음, 무엇이네’하고 이름을 탁 붙이는 것, 이게 바로 산냐라는 거라.

자, 여러분들이 여기 있다가 스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눈에 스님이 톡 맺혀버리죠? 처음 최초에 맺힐 때는 그게 스님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멀리서 봤을 때 스님이 긴가민가했는데 가까이 가보니까 ‘어, 스님 맞네’ 쉽게 말해서 저 저쪽에서 스님인지 아닌지 구분 못 하는 상태로써 이렇게 대상과 부딪쳤다는 얘깁니다. 받아들였다는 얘깁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주의해서 딱 보니까 ‘아, 스님이구나’ 해서 그다음엔 어떻게 해요? “스님” 하고 부릅니다. 이름을 탁 붙여버립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전체적으로 산냐의 작용들입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산냐의 작용이고, 인식하는 것도 산냐의 작용이고, 또 그러고 나서 ‘스님’ 하고 이름 붙이는 것도 산냐의 작용이라. 이런 게 몽땅 뭉뚱그려진 것을 산냐라고 그럽니다.

 

그리하더라도 여기에 산냐 지 혼자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찟따(citta) 없이 지 혼자서 설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찟따와 같이 일어났다가 찟따와 같이 사라집니다. 처음에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도 찟따가 같이 일어났었고, 찟따가 사라지고 나서 그다음에 인식하는 것도 찟따와 같이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리고, 이름 붙이는 것도 찟따와 같이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그렇죠?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 겁니다이. 그래서 찟따가 없이 지 혼자서는 절대 활개 칠 수 없는 것이 이 산냐입니다.

 

사실은 수행에서는 맨 처음 부분만 잡아서 합니다. 대상을 그냥 아는 것, 그리고 인식하는 단계, 그걸 산냐로써 구분을 합니다. 그 이후에, 쉽게 말하면 저 멀리서 봤을 때 대상을 그냥 아는 것, 스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은 어쨌든 대상이 눈에 탁 잡히는 것 이것만 수행대상으로 삼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요게 이렇게 자꾸 발전이 돼나가면서 거기에 뭐가 자꾸 끼여들거든. 뭐가 자꾸 끼어드는 거라. 그렇죠? 도사(dosa)도 끼여들고 라가(rāga)도 끼여들고 딧티(diṭṭhi)도 끼여들고 막 끼어드는 거라.

그 이전에 수행을 해야 만이 이걸 잠재워 줄 수가 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만 수행대상으로 잡습니다. 어쨌든 간에 그런 것은 전체로써 산냐로써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보통 공부가 좀 잘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면 이 전체로써 뭉뚱그려서 산냐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습니다. 명확하게 스님인지 알고 있어도 스님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욕망이나 아니면 다른 싫어하는 마음이나 이런 것들이 생겨나가지 않도록 방어를 해나간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수들은 통나무들이 탁탁탁탁 오면 딱 보면 압니다. 이게 무슨 나무인지, 이게 참나문지 전나문지 무슨 나무인지, 우리는 일일이 꼼꼼하게 보고 결도 봐야 되고 이리하는데 이 사람들은 보면 바로 아는 거라. 보면 바로 그게 전나무, 무슨 나무 해가지고 착착착착 기록해버리는 거라.

수행들이 잘되는 사람들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근에 우리는 그걸 꼼꼼히 살펴보고 전나무를 쓸 거 같으면 이미 오만 망상들이 다 떠오르고 거기에 개념들이 다 포함돼 갖고 전나무라 써지게 되는 거라. 요건 내꺼다 하면서 전나무를 쓰기도 하고, 뭐 이거는 어떻다 하는 식으로 전나무를 쓰기도 하고.

그래서 인제 수행을 잘 하게 되면 전체적인 산냐를 인식을 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산냐를 계발시켜 나가야 되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게 잘못 계발시켜 놓으면 이게 낭패를 만나는 게 이 산냐이고, 느낌은 크게 낭패를 볼 부분은 잘 안 생깁니다. 근데 이 산냐 부분은 잘못 계발시켜 놓으면 크게 낭패를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자, 한번 계속해 봅시다이.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산냐를 어떻게 받아들이라고 하느냐면, 어린아이에게 설이 지났으니까 세배했으니까 스님이 세뱃돈을 천원을 탁 줬단 말이라. 그러면 돈에 대해서 관념이 없는 어린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이게 돈인지 뭔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그냥 종이쪼가리일 뿐입니다. 그냥 이걸 찢어버릴 수도 있고, 흘려버릴 수도 있고 그러거든요.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맨 처음 단계가 여러분들이 인식하는 산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찟따라는 건 어떤 경우냐 하면 어른일 경우 천원을 주면 요게 돈이다 하는 건 알고 있거든. 돈하고 종이하고는 분명하게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이걸 찢어버리면 안 되는 거고, 그리고 요게 유용하게 쓰인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게 인제 어른들이 인식하는 산냐 찟따 부분입니다.

 

근데 인제 조금 더 넘어가버리면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이 돈을 보고 이 돈이 얼마만큼 효용의 가치가 있는가를 압니다. 그래서 이걸 환전했을 때 어떻게 쓰여지고 이 돈이 얼마만큼 유용하게 쓰여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그리 알더라도 이 돈은 있을 때 나의 것이지 나에게서 떠나버리면 나의 돈이 아니라는 사실도 또한 알게 됩니다. 이것은 어떤 것이냐면 빤냐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산냐를 보는 것이라고 해서 빤냐 부분에 포함된 산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산냐를 과연 어디까지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스스로가 점검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되도록 이 산냐 부분을 빤냐와 연관된 산냐로써 이해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찟따와 연관된 산냐로써는 받아들여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근데 산냐도 마찬가지로 찟따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리는 거라. 그러죠? 찟따와 함께 일어나지고 찟따와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을 갖다가 알고, 산냐는 결코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 하는 거라.

 

그래야만이 이 산냐는 매번 태동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인식할 때마다 매번 태동이 되는 게 이 산냐입니다. 이 산냐가 없으면 여러분들이 어떤 것도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인식할 때마다 새로운 산냐가 계속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마음과 같이. 마음도 그마만큼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는 거고, 지금 계속 보고 있는 것 같이 보이죠? 그렇지만 끊임없이 이 산냐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근데 그걸 갖다가 그냥 다 뭉뚱그려서 보이는 것이라고 이해할 거 같으면 어린애가 돈 만지는 것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적어도 빤냐까지는 안 가더라도 찟따와 같이 일어나는 산냐라는 사실은 알아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여러분들이 법문을 들을 때 법문이 명확하게 들려주도록 해주는 것도 끊임없이 이 산냐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사실을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이해가고 기억하고 저장하고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가능하게끔 해주는 겁니다.

 

자, 거기 밑으로 한번 봅시다. 인제는 산냐가 어떤 것이다 하는 것은 이해를 했을 겁니다. 그래서 밑에 보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인식한다고 하는 것이므로, 생명에 있어 산냐-는 매우 중요한 기능입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밑으로는 산냐를 계발하는 방법들입니다. 연필 두 자루 얘기를 적어놨죠? 사실은 비슷한 연필을 보면 누구든지 구별을 못합니다. 근데 그걸 자세하게 들여다보아야 만이 겨우 두 개를 구분합니다. 그래서 그 두 개를 보여줄 땐 이게 1번의 것이다. 이게 2번의 것이다 했던 걸 갖다가 명확하게 기억을 해서 끄집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그것이 산냐를 강화시켜 주는 방법에 들어가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여러분들 금방 집중을 탁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스님 목소리만 들렸죠? 다른 소리 잘 안 들렸죠? 인식 안 하면 소리는 안 들립니다. 쉽게 말하면 산냐가 작용을 안 하면 절대 알지 못합니다. 그렇죠? 아무리 밖에서 소리가 들리고 하더라도 스님 소리 외에는 안 들립니다. 인식하는 대상을 스님에게 향해있기 때문에. 그럼 산냐도 하나의 대상, 하나의 대상만 반드시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귀로는 하나의 소리밖에 못 듣듯이 산냐도 하나의 대상이 끝나야만이 다음 대상이 일어나지고 사라지는 것이지 두 개가 동시에 일어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산냐를 강화시켜주는 방법도 꼭 이와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특히 올여름에는 스님이 그 청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번에도 경주스님 왔을 때도 그 스님 제자이기도 했고 그래서 오래전부터 아, 이거는 해야 되겠다 하고 생각을 해왔고 해서 올여름에는 그걸 계획을 하고 있거든. 중점적으로 해줘야 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인 거라. 어떻게 하면 니가 공부를 잘 할 것이냐 이런 것을 하는 게 아니고 공부 그거는 못해도 됩니다. 못해도 되는데 산냐가 일어나는 것들이 꾸살라 산냐가 일어나도록 할 것이냐 아꾸살라 산냐가 일어나도록 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쁜 산냐만 계속 계발시켜나가면 나쁜 짓만 하게 됩니다. 좋은 걸 계발시켜주면 좋은 걸 기억하고 좋은 걸 계속 계발시켜나가고 그쪽으로 성향들이 흘러가집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해볼까 하고 생각을 해보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돈이 좀 생기면 일단 할 겁니다.

캠프의 성향도 여러 가지 다양하게 해야 되겠죠. 내가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고 내가 담당하지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못하는 부분들은 다른 분들 초청해가지고 누가 너무 레크레이션 위주 말고 좋은 부분들을 담당할 수 있는 분들을 얘기를 해주면 특히 요가 같은 경우나 아니면 다른 부분들도 얘기를 같이 해가지고 그걸 얼마만큼 기본 테마에서 맞춰지느냐 하는 문제이고, 그래서 아, 이렇게 수행해나가고 알아차려나가는 것이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것만 깨우쳐 주더라도 아마 그 캠프는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중에 여러분들 얘기들은 다 캠프 보내야 돼이. 왜 대답들이 없어? 애들 다 없나? 다 큰사람들인가? 그럼 이웃집에 사람들 애들 데리고 오든지.

 

자, 밑에 봅시다. ‘산냐-는 훈련에 의해 날카롭고 강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는 부분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산냐는 꾸살라만 인지하고 인식하는 빤냐하고는 다릅니다. 산냐는 선이든 악이든 다 기억을 하게끔 되고 취사하게끔 돼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지금 밤이란 말입니다. 옛날에 태종사에도 밤이 되면 귀신을 굉장히 많이 봤다고 그럽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사람 있습니다. ‘아, 막 귀신봤다’고 이럽니다. 그러죠? 그런 소리 들어봤죠?

저도 그런 경험들을 사실 했거든요. 그건 옛날 옛날에 출가하기 전에,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고, 지금 생각하니까 참 우스운 얘기들이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옛날 기억을 들여다보면 촌에 사는 사람들 나무를 들여다보면 귀신으로 착각을 합니다. 특히나 밤 같은 때, 여러분들은 그 마을에 살았으면 저게 귀신이 아니고 나무다 하는 건 아는데 외지 사람들이 가면 으스스하기도 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귀신으로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게 뭡니까? 산냐도, 착각해가지고 기억한다는 것도, 잘못된 산냐들이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들이나 기억들이 그래서 믿을 것이 사실은 못 되는 거라. 근데 그걸 진짜라고 생각하고 절대 귀신 봤다. 난 절대 귀신 봤다. 이래버리면 싸우지도 못하고 할 말이 없는 거라.

 

적어도 여러분들은 이 산냐를 배웠다고 할 것 같으면 아, 그거는 아니었다. 그때 귀신으로 봤을 수도 있지만 이미 그 기억은 잘못될 수도 있다 하는 거라. 그리고 그게 만약에 잘못되든 잘못되지 않든 그건 그때의 산냐일 뿐인 것이지 지금의 산냐는 아닙니다. 그거는 분명히 다른 산냐 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바꿀 수 있으면 바꾸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은 스님이 절대 ‘난 뭘 봤다, 뭐 우쨌다’ 이런 얘기를 안 하는 거라. 할 수가 없는 거지. 여러분들도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이.

(수행자 질문)

그게 뭐냐면 잘못된 견해들에 빠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들이 그게 진짜인 줄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까 이 산냐라고 하는 것이 더 강해져버리는 거라. 바뀌지를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거라.

(수행자 질문)

예, 물론 여러 육도윤회에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꼭 착각이라고만 얘기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전혀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인간이 제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그것이 나에게 나쁜 행위를 저지른다든지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백프로 확신을 합니다. 오히려 내가 “요놈” 하고 잡아서 조종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아예 애초부터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게 귀신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세계에 있는 대상이든 그것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인간 몸 받고 태어난 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천상세계보다 더 좋은 게 인간세계입니다이. 천상세계보다도 더 좋은 게 인간이라. 자꾸 옆으로 빠진다이.

 

그래서 그런 산냐가 나쁜 쪽의 산냐가 강해지지 않도록, 그러면서 삿다(saddhā)와 딧티(diṭṭhi)가, 잘못된 삿다와 잘못된 딧티가 산냐하고 결합이 돼가지고 아주 내가 개념화된 것들, 아니면 인식한 것들, 기억한 것들이 강하게 뿌리를 내려버리면 힘들어져 버립니다. 그렇게 돼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같은 것이라고 계속 착각을 해버립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보십시오. 여기 스님 보면 똑같은 스님이라고 착각해버립니다. 이 스님은 시도 때도 없이 바뀝니다. 생각도 바뀌고 몸도 바뀌어나갑니다. 이해는 하지만은 어떻게? 똑같은 스님으로만 보여지는 거라. 그게 이때까지 여러분들에게 길들여져 와졌기 때문에. 그마만큼 잘못되어 있는 산냐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사고들이나 생각들을 안 바꾸죠? 그렇지만 이 산냐를 배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 그것도 바뀌어야 되는 것들, 바뀌는 것들이다’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밑에 ‘「망상, 개념」이라고 말해지는 인식 개념이 일어나 마음대로 개념을 만들어 버립니다.’ ‘개념, 지식, 기억 등은 모두 산냐-의 덩어리입니다.’

산냐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착각하는 원인이 되는 것도 이 산냐고, 잘못된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이 산냐고, 잘못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이 산냐일 뿐입니다.

근데 보통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어서 옛날에 내가 누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그걸 기억을 한단 말입니다. 그것도 산냐입니다. 기억을 이렇게 하면 흐뭇해합니다. ‘아, 좋았지 그때가’ 이럽니다. 근데 사실은 산냐를 아는 사람이면 그렇게해서는 안 되죠?

그거는 어떻게 된 겁니까? 욕망하고 결합된 산냐죠? 욕망하고 결합된 산냐가 계속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끊임없이 자꾸 이어나가는 거라.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래서 실재적인 성품을 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산냐라고 하는 것은 찟따와 함께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또 나쁜 걸 볼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증오심이 결합되죠. 배척할려고 하는 것.

여러분들 가장 싫어하는 게 똥입니다. 똥. 근데 제주도 돼지는 가장 좋아하는 게 뭡니까? 이 똥입니다. 똥. 똑같은 똥인데도 누구는 좋아하게 되고, 누구는 싫어하게 됩니다.

 

경전에는 그래서 ‘가장 진저리가 쳐지는 배설물이라고 하는 것은 벌레와 구더기에게는 아주 맛있는 음식일 뿐이다.’ 하는 얘기를 산냐로써 비유를 해놨습니다. 신체가 죽고 나면 부패합니다. 근데 티벳 같은 경우는 산에다가 잘라가 던지든 아니면 부셔가지고 반죽을 해가 던지든 아니면 그냥 그대로 던지든 던져버립니다. 조장(鳥葬)을 하죠? 우리는 그걸 보면 어떻게 합니까? 피가 튀고 막 썩어 문드러진 걸 보면 ‘어휴’ 이러고 보면서 피할라고 그럽니다. 근데도 독수리 같은 놈들한테는 어떻게 보입니까? 아이고 왠 이렇게 스페셜 풋(special food)이 왔는가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뿍갈라(puggala), 뿍갈라들은 이 산냐를 접할 때는 반드시 괴로운 것으로 받아들여라. 여러분들은 뿍갈라 입니까? 뿍갈라는 ‘장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산냐를 접할 때는 반드시 괴로운 것이고, 무상한 것이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라고 받아들여라 하는 사실로써 받아들여야 된다 하는 거라. 그래야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수행의 대상은 이 무상・고・무아 산냐일 때 아닛짜 산냐, 아낫따 산냐, 둑카 산냐 일뿐입니다. 다른 산냐는 수행의 대상이 절대 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마타 수행을 한다 그러면 어느 대상을, 부처님을 예로 들어봅시다. ‘부처님’ 하면서 탁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산냐가 계속 일어나는 거죠? 인식하고 인지하는 그런 것. 그렇게 해서 기억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수행의 대상으로써 산냐일 뿐입니다. 정신적인 산냐입니다. 물질적인 감각적인 대상으로써의 산냐하고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인지대상으로써의 산냐를 자꾸 계발을 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렇게 할려면?

그 부처님을 마음 깊이 해가지고 마음속에 꽉 찬단 말입니다. 그럴 때 보통 어떻게 합니까? ‘아 이게 니밋따구나’ 하는 생각을 탁 일으킵니다. 그것도 산냐입니다. 니밋따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으로 인해서 니밋따가 형성이 돼버립니다. 계발시켜 나가야 하는 산냐는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정신적인 대상으로써의 산냐, 이해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계발시켜나가야 만이, 왜? 변하니까! 사마타도 분명하게 변해나갑니다. 그리고 니밋따도 틀림없이 변해나갑니다. 냐나(ñāṇa)를 계발해도 냐나도 일어났다가 틀림없이 변해나갑니다.

 

(수행자 질문)

도움이 됩니다. 단지 산냐를 계발할 때 그것도 찟따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찟따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상태로써의 산냐를 얘기합니다. 그걸 얘기하는 것이 위빳사나만 가지고 얘기할 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이. 그거는 전혀 안 맞는데 어쨌든 얘기하는 것은 산냐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형상, 정신적인 특성으로써 받아들여야 만이 무상·고·무아를 점차적으로 계발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 물질적인 대상으로써의 산냐는 둑카라는 생각, 괴로움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봐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것이 고정관념으로 존재를 하지 않게 되고 변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리해도 이해하기를 물질적인, 관념적인 인식 자체를 고(苦)로써 봐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 자체가 굳어져버립니다. 굳어져버리면 개념 자체를 바꿀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산냐를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마지막에 써놨던 것

 

‘거기에는 「무엇인가 변함없는 것」 「 나」 「영혼」 등은 없습니다. 다만 멈추는 일 없이 생멸을 반복해, 흘러가는 산냐-라고 하는 마음의 기능이 있을 뿐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 나, 영혼이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해서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반복일 뿐이다 하는 거라. 산냐도 꼭 마찬가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반복일 뿐이다. 마음의 기능만이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자, 오늘 산냐 부분을 했고 내일은 쩨따나(cetanā) 부분, 쩨따나 부분은 좀 많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마 지금 계획으로는 두 번 정도는 해야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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