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danā ( 웨-다나-:느낌 受 ) (20070215)

담마마-마까
2021-08-29
조회수 618

자, 시작하겠습니다.

저번 시간까지 팟사에 대한 걸 했습니다. 저번 시간에도 강조를 했듯이 팟사에 대한 관찰만으로도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웨다나(vedanā) 부분을 하는데 웨다나 부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근데 12연기에서 웨다나 부분으로 넘어가 버리게 하면 안됩니다이. 그래서 오늘 부분까지는 꼭 마음 깊이 잘 들어야 되는 그런 부분입니다.

 

팟사(phassa)를 수행하는 방법, 저번 시간에 대충 얘기를 했습니다. 같이 한번 해봅시다. 팟사가 어떤 건지 어떻게 수행하는 건지 한번 봅시다. 수행할 때 어떻게 합니까? 여기 고요히 앉아서 수행한다 치자. 그럼 마음을 한곳에 둘려고 하죠? 대상에다가!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이던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붙잡아 둘려고 합니다. 저번 시간에 뽓틸라 스님의 예를 들면서 다섯 가지 문은 다 닫아버리고 하나의 문만 열어두라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근데 실질적으로 수행하다 보면 소리도 들리고, 냄새도 맡아지고, 생각도 일어나고 여러 가지 다 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근데 그 두 개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죠? 소리 들리면서 동시에 냄새 맡을 수는 없죠? 그것은 분명한 거란 말입니다. 그럼 하나씩 하나씩 관찰해나가면 될 거란 말입니다.


어쨌든 마음은 한 곳에 두어야 되는 것이 수행의 기본입니다. 이 웨다나 수행방법도 마찬가지고 팟사 수행방법도 똑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마음을 한곳에 둘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벗어날 거 같으면 자꾸 끄잡아 와야 되는 거고, 벗어나면 끄잡아 오고 끄잡아 오고 자꾸 그렇게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한곳에 두었다. 가장 주대상이 배니까 배에다 두고 있습니다. 배를 관찰하는데 자연스러운 거를 관찰하라 그러죠? 외부적으로 들리는 것은 자연스럽게 들리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맡아지는 거고.

근데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보통 보면 자연스럽게 안 하고 부자연스럽게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만 조심을 하면 팟사는 금방 알 수가 있고 팟사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항상 자연적인, 자연스런 호흡을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마음을 한곳에 붙잡아둘려고 할 거 같으면 맨 먼저 일어나는 것들이 사마디 부분입니다. 대상에 몰입할려고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로 인해서 부작용들도 일어나지만 어쨌든 대상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사마타가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마디가 어느 정도 계발이 되고 나면 팟사를 이해하기가 조금 수월해지는 부분은 있습니다. 틀림없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습니다. 이해하기가.

 

어쨌든 마음을 이렇게 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한번 해보십시오. 호흡을, 눈을 감고 조용하게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한번 해보십시오. 배가 불룩해지고 홀쭉해지고 하는 그런 거를 알 수 있겠죠? 그래서 단단해지고, 또 줄어드는 것 같고 이런 것들이 있을 거라. 그게 보통 나타나는 모양적인 성품들입니다. 참성품은 아니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런 모양들입니다.

그리하더라도 거기에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설령 그게 불룩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아, 스님이 모양이나 형태를 관찰하지 말고 느낌을 관찰하라 그랬지’ 이런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말고 우선은 받아들이십시오. 지금 현재 내한테 그렇게 느껴지는 걸, 내한테 그렇게 와 닿는 걸 어떡할 거라? 그러니 일단은 배가 불룩하고 홀쭉해지는 느낌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렇게 하다 보면 틀림없이 그것이 변해갑니다. 좀 따뜻하게 느껴진다든지 딱딱하게 느껴진다든지 아니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이런 것으로 틀림없이 변해나갈 거라. 그런 것들이 나타나면 이미 팟사를 여러분들이 경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는 아마 밖에 노지에서 수행하고 있으면 모기나 파리가 탁 닿으면 탁 와 닿는 걸 알아차립니다. 또 이 안에 있으니까 이 안에 열기가 있습니다. 열기가 가까이 있으면 열기가 탁 와 닿는 것들도 느껴집니다. 무슨 냄새가 나면 냄새가 와서 탁 와 닿는 것들이 느껴집니다.

그리하더라도 이것이 지나고 나면 저것이 온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 이미 사마디가 계발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는 그런 부분들을 알아차려나가는 거라.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만 알아나가게 되면 이미 여러분들은 팟사를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르게 됩니다.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조건만 맞아지면 일어나집니다. 조건만 맞아지면 또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처음에 수행이 안 되니까 마음을 끄잡아 들일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고, 수행이 안 되니까 다섯 가지 문을 막아버리고 하나의 문만 열어놔 놓고 하라고 하는 것이고, 근데 수행이 잘 돼나가면 다 열어놔도 괜찮습니다. 다 열어놔도 어차피 하나의 문만 통해서 알 수 있게끔 돼있는 겁니다. 그것이 팟사입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오늘은 웨다나(vedanā:느낌 受) 부분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팟사를 하더라도 처음에는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이 아주 천천히 와 닿습니다. 근데 나중에는 사마디가 깊어지고 대상에 더욱더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그것이 아주 빠르게 일어나집니다. 금방 일어났다 금방 사라지고 와 닿는 것도 금방 와서 탁 와 닿고 그것이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알아차려 나갑니다.

이 웨다나도 꼭 마찬가집니다.

여기서 웨다나라고 하는 것은 느낌이라고 스님이 풀이를 해놔 놨습니다. 웨데띠(vedeti) 라고 하는 것이 ‘알다’ ‘느끼다’ 하는 것들입니다.

 

그 밑에 보면 스님이 그 부분에 대한 걸 적어놨죠?

‘yaṁ vedeti taṁ sañjānāti(양 웨-데-띠 땅 산자-나-띠). 그가 느낀 것, 그것만, 그것 하나만 그는 안다.’

느끼는 그것만 자기가 아는 것이지 다른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해서 ‘안다’ ‘느낀다’ 하는 것들이 이 웨다나 부분입니다. 느낀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 만약에 느낌이 없으면 알 수 있겠습니까?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느낌을 통해서 일어나지게 돼있는 것이지 느낌 없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정신적인 느낌이든 아니면 육체적인 느낌이든 어떤 것이든 이 느낌을 통해서 알아차리고 또 알아나가게 되고 또 경험하게 되고, 쉽게 얘기하면 살아가지는 형태들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 느낌도 마음이 강렬하게 반응을 하면 강렬한 분노가 생긴다 하고 그랬습니다.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아버리면 역반응이 생긴다는 거죠? 근데 강하게 와 닿지 않고 살짝 와 닿아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크게 반응을 안 하죠? 누가 만약에 그냥 일상적인 얘기들로 이렇게 한다 할 것 같으면 내 마음에서 별 영향들을 안 받습니다. 일상 대화할 때는 보통 그렇게 하죠?

근데 누가 즐거운 얘기를 확 한다든지 할 것 같으면 강하게 와 닿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또 강하게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아니면 누가 안 좋은 소릴하든지 고통스러운 얘기를 한다든지 하면 그것도 강하게 와 닿기 때문에 마음이 강렬하게 반응을 합니다.

 

근데 일차적으로 수행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강렬하게 와 닿는 느낌들을 가지고 수행을 해야 되겠죠? 평상적으로 와 닿는 이런 것들은 사실은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차피 수행의 대상입니다. 안 그러면 모하(moha) 어리석음에 빠져서 머물르게 돼버리니까.

 

그래서 보통 수행을 지도할 때 강하게 와 닿는 느낌들을 수행대상으로써 보고의 대상으로 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뭐가 강하게 일어났는가?

여러분들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수행할 때, 보고할 때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맨 먼저 뭘 알아차렸는가 부터 먼저 물어보죠? 그렇게 안합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고할 때, ‘나는 앉아서 좌선할 때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알아차리니까 뭐 우찌우찌 되드라’ 하고 얘기를 한단 말입니다. 그럼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동안에 다른 느낌은 없었습니까? 틀림없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눈치를 못챈 것뿐인 것이지. 그렇지만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 수행의 대상이고 또 점검받아야 할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어쨌든 이런 강한 느낌들로 인해서 역반응들이 일어나게 되니까 번뇌들이 일어나게 돼있는 것입니다. 근데 강하지 않는 느낌이라 하더라도 번뇌는 일어나죠? 어차피 이런 모든 느낌들은 통제를 안 하면 번뇌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은 번뇌를 완전하게 소멸하신 분이라고 그렇게 얘기들을 하죠. 그럼 여러분들이 부처님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느낌을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느낌을 알아차려서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게끔 만들어버리면, 번뇌를 제거한다고 그러죠? 그럴 거 같으면 여러분들도 부처님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알아차리는 수행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근데 아직도 보니까 의식에 너무 끄달리는 분들이 있어요. 일단 여기 이 시간에 법문을 듣고 이리 하려면 수행하는 시간은 자기 혼자만의 시간입니다. 대중들이 다 모였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수행하지 않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님이 아무리 여기서 자세하게 구구절절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걸 수행해서 체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오늘 보니까 들어올 때 저 저쪽에 예불하고 법문만 들을라고 들어오더라고. 그러면 안 돼. 뭐라 하는 거 아닙니다이.

그거는 핑계일 뿐입니다. 다리를 펴고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끄달려 들어가게 되거든요. 그거는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좋아하고 끄달려 들어갈 거 같으면 뭐 하러 수행해? 그냥 그대로 있지. 그걸 바꿀려고 여러분들이 여기서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고 하는 거라. 자, 괜히 여담으로 흘렀네.

그래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은 그거로 인해서 일어나는 반작용들, 더 큰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 느낌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되고 관찰을 해야 됩니다.

 

이 느낌들은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들이 있죠? 그거는 이해하겠습니까? 근데 왜 이 웨다나를 심소부분에 여놨습니까? 아비담마에서 심소부분에 들어있죠? 왜 그래놨습니까? 모르겠죠? 아비담마니까 그래 놨습니다. 아비담마니까.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마음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영역에서는 몸과 마음의 영역에 다 들어갑니다. 그건 좀 있다가 설명이 돼나갈 겁니다.

어쨌든 느낌을 관찰하는 것은 몸과 마음에 대한 것들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해나갑니다.

이거는 몸의 현상이고, 이거는 마음의 현상이고 이로 인해서 이렇게 일어나는 구나 하는 걸 갖다가 느낌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느낌에 대한 관찰들을 해나가는 거라.

 

그다음에 십이연기에 보면

팟사 빳짜야 웨다나 phassa paccayā vedanā

웨다나 빳짜야 딴하 vedanāpaccayā taṇhā

딴하 빳짜야 우빠다낭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접촉으로 인해서 느낌이 일어나지고, 느낌으로 인해서 딴하(taṇhā) 갈애가 생겨나지고, 또 딴하로 인해서 우빠다나(upādāna) 집착이 생겨나진다. 갈애와 집착을 끊기 위한 전제조건이 바로 이 웨다나 부분이라는 거라. 왜 갈애와 집착을 끊어야 되는가?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얘기하죠? 고(苦)가 있음을 알고, 고의 원인이 갈애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을 알고, 그래서 그것을 탁 끊어버리니까 닙바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해야 된다. 바르게 수행하는 방법은 이런 것이다 하고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느낌에 대한 관찰이라는 거라. 이런 이유로 여러분들은 웨다나에 대한 것들은 반드시 알 수 있도록 해나가야 됩니다.

 

느낌은 언제 일어납니까? (...) 조금 전에 얘기했잖아. 접촉이 원인이 돼서 일어나는 게 이 웨다납니다. 마찬가지로 접촉이 없으면 절대 웨다나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접촉 부분만 수행해나가고 접촉만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우리는 그렇게 못해나가죠? 어떤 느낌들을 받아나갑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경험으로 축적돼있기 때문에.

갓난 애기들, 이제 막 태어난 애기들은 크게 괴로운 느낌이나 즐거운 느낌이 없습니다. 경험이 아직 축적되지 않았으니까. 그냥 단순한 접촉들만 있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근데 우리는 어떻게 돼? 이마만큼 이미 살아왔단 말이라. 그럼 어쩔 수 없이 접촉(느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의식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성숙한 사람들은 수행해나갈 때 느낌을 관찰하라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지고 조금 더 세밀하게 수행해 나갈 거 같으면 나중에는 팟사만 가지고 수행해 나갑니다. 그거 저번에 스님이 설명을 했죠? 스님법문 들을 때 알아차림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은 느낌으로써 알아차려나가는 것이고, 그냥 말소리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으로 계속 들릴 것 같으면 그건 팟사로 수행을 하는 겁니다. 전혀 내용을 모르는 상태. 인제 이해하겠습니까?

 

자, 그럼 봅시다. 이 느낌은 서로 독립적인 것입니다. 절대 섞여서 나타날 수가 없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한 느낌이 일어나고 나서 그다음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지 앞선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그다음 느낌이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항상 개별적인 느낌들로 각각 생성과 변화와 소멸을 갖다가 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뭉뚱그려서 같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누가 죽었다. 내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깜짝 놀라겠죠. 그리고 슬퍼지죠. 눈물 펑펑 흘립니다. 그건 내 몸이 아파서 슬픈 겁니까? 고통스러운 겁니까? 아니죠? 정신적인 슬픔이고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다리를 이렇게 벌써 몇 분 지나고 있으니까 꼬부리고 있으면 고통스럽습니다. 그 고통은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겁니다. 육체적인 고통이죠? 근데 단지 우리는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이걸 인식하면서 ‘아이고 아프다’하고 정신까지도 아파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슬픔으로 인해서 몸이 또 아파지게 되는 거고. 이런 관계들을 띠고 있는 것뿐인 것이지 몸도 아프고 정신도 아프고 같이 아프다는 건 없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을 보면 다 죽겠다고 그럽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다 아프다고. 절대 그런 법은 없습니다이. 왜 도솔님 웃어 싸? 그런 적이 있었나?

 

그렇게 같이 아프다는 건 뭐냐면 그 느낌이 발전돼가지고 내가 자각하고 하는 것이 관념화됐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됐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같이 아픈 것으로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이미 그때는 받을 거는 다 받아버렸어. 총을 두방 세방 이미 빵빵 다 맞아버렸다고.

그래서 처음 일어나는 느낌의 첫 단계에서 사띠를 통해서 관찰하라고 하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일어나는 사실을 그대로 관찰을 해서 알아차리면 발전되어나가는 것을 끊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웨다나와 딴하와 중간에는 반드시 개입돼야 되는 것이 뭡니까? 사띠(sati)

입니다. 사띠가 있으면 딴하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고, 사띠가 없으면 딴하로 넘어가져서 여러분들 아는 관념적인 것 빠빤짜(papañca), 빠빤짜 산냐 상카라 해가지고 망상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들로 넘어가져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부처님 자신을 표현할 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알고 집착하지 않는 자다’ 하고 그럽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그대로를 갖다가 알아만 차려서 그걸 집착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벗어나버렸다. 해탈한 자다. 그것을 뭐라 그러느냐 하면 여래(如來) 부처님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실천이 가능한가 하면 느낌이 항상 있는 법이 있습니까? 없죠. 즐거운 사람 항상 즐거운 법이 있어요? 도솔님은 그렇겠다. 안 그래? 괴로운 게 있는 모양이네? 거봐. 아무리 즐거웁게 살려고 해도 괴로움은 어차피 있게 돼있습니다. 괴로운 것도 마찬가지고 항상 있는 법은 없습니다. 변해나가게 돼있습니다.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변하기 때문에 관찰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자, 밑에 한번 봅시다. ‘「그」가 안 것은 「그가 느낀 것」뿐이며, 실제 밖의 세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느낌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죠? 주관적인 겁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겁니다. 그래서 내 느낌을 남과 같이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적인 느낌이기 때문에 그것을 스스로 노력으로 인해서 다스려 나갈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자, 느낌에는, 몸과 마음의 관계로써 얘기해 봅시다.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이 있고,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이 있죠? 정신적으로 즐거운 게 있고 정신적으로 괴로운 게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덤덤한 것, 현상적인 것 이런 걸 보통 크게 다섯 개로 나눕니다. 통상적으로 수행의 대상으로 잡을 때는 다섯 개로 나눠집니다.

보통 아홉 개로 나누기도 하고, 두 개로 나누기도 하고 세 개로 나누기도 하고 각각 경전마다 다릅니다. 어쨌든 다 취합을 해보면 이 범주에 다 포함이 됩니다.

 

수행에서는 보통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무덤덤한 느낌 이 세 가지를 수행의 대상으로써 해나갑니다. 그 속에는 몸과 마음이 다 포함이 돼있기 때문에.

자, 그러면 경전에는 어떻게 나와 있느냐 하면은 ‘즐거운 느낌은 괴로움으로 보라’ ‘괴로운 느낌은 화살같이 보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들은 무상으로 보라’

이거 전에 언제 스님이 한번 했죠? 기억납니까? 어떻게 보라고 그러디?

즐거운 느낌을 어떻게 관찰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으로써 보라고 그러겠어? 그렇지. 변하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도 결국에는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라. 그럼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보라는 거라.

(수행자 질문)

정신적으로 괴로우면 다시 또 고통을 받죠.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오더라도 육체적인 괴로움을 또 받게 되는 거고, 보통 보면 하나만 일어나면 좋은 데 요놈으로 인해서 요런 게 자꾸 일어나니까 그래서 그걸 갖다가 화살같이 보라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화살을 두 번 맞지마라 하는 얘기들을 하는 거라.

또 그마만큼 괴로운 느낌은 빠르기 때문에 화살을 맞습니다. 아주 빠르게 일어나지고 빠르게 사라지기 때문에.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들은 왜 무상으로 보라고 할까?

아까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 평상적으로 한 번 보십시오. 별반 느낌이 없으면 어떻게 지내는가. 맹하게 지냅니다.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상이 없는 것처럼 맹하게 지냅니다. 그러니까 시간만 헛되이 보내는 거라. 차라리 괴로우면 괴로움을 떨치기 위해서 즐거움을 찾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또 즐거우면 더 즐겁기 위해서 탐닉을 하는 것도 있고 어쨌든 그것은 하나의 대상 대상을 자꾸 연결해 나가는 거라.

이놈의 무덤덤한 거는 고마 아무것도 없이 맹하게 지내버리는 거라. 그래서 통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할 때 알아차리는 것이 떨어지는 것이 그래서 그런 거라.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지 않으면 그 맹한 부분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버리는 거라 어리석게. 내가 지금 뭘 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지나가버리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무상으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자, 그러면 느낌을 관찰하는 방법을 한번 봅시다.

가장 어려운 거, 즐거운 거는 ‘아니다. 이거, 이거는 부처님이 괴로운 것이라 그랬지 하면서 금방 회전할 수 있는데, 이놈의 괴로운 거가 일어나면 참 잘 안되죠? 그래서 괴로운 느낌을 극복만 해내도 수행의 반을 완성했다고 그럽니다. 그마만큼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기가 힘이 듭니다.

 

자, 먼저 여러분들이 성품으로 한번 봅시다.

육체적인 고통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그런 괴로움들이 일어난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아이고, 괴롭다’ 이러고 맙니까? (수행자 대답)

물론 알아차려야지. 알아차리니까 어쨌든 괴로운 걸 아는 거지. 그것이 사띠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어쨌든 느낌으로 괴로운 것을 받았으면 벗어날려고 합니까? 보통 보면 그럽니다. 벗어날려고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어떻게 합니까? 회피할려고 그러죠? 벗어나 버릴려고 합니다. 없는 것처럼, 쉽게 말하면 딴짓거리 한다는 거라. 그러죠? 그 두 가지는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괴로운 것들을 회피를 할려고 할 것 같으면 뭐가 생겨납니까? 아, 이러면 괴로워 죽겠다 제거해 버릴려고 한다. 그러면 뭐가 생겨납니까? 성냄입니다. 성냄이 생겨납니다. 그럼 그걸 회피할려고 하면 뭐가 생겨납니까? 회피할려는 욕구가, 욕망이 일어나지면 회피가 안됩니다. 그럼 회피하면 욕구가 생겨나고, 그걸 때려 부셔버리려 하면 ‘에이,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보자’ 하고 싸울라고 할 것 같으면 성냄이 생겨납니다.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거라?

 

괴로운 걸 어떻게 보아라는 거라? 그래서 괴로움(괴로운 느낌)을 극복하는 방법이 괴로움이 일어났을 때, 괴로운 느낌입니다이. 느낌은 무상하다고 그랬습니다 스님이 분명히. 이게 진짜 무상한가 아닌가 참 성품을 알려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요시, 한번 해보자’ 이리 하지 말고.

그래서 보통 보면 앉아서 칸띠가 닙바나로 인도한다 하니까 진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지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이렇게들 하거든. 물론 그렇게 관찰할 거 같으면 관찰할 때마다 괴로움이 증가합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서서히 감퇴하죠? 왜 감퇴해집니까? ‘지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하고 처음 먹었을 때는 분명히 증가를 했습니다.

근데 증가되니까 어떻게 돼? 마음은 이미 ‘지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하는 것이 아니라 요 증가하는 것에 마음이 끌려들어가 버립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품을 보고도,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그것이 사라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괴로움을 관찰하고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상의 성품을 거기서 찾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조금 전에 다리를 예로 들었으니까,

이거 괴로운 거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이 먼저 여기에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죠. 그러면 괴로운 사실이 있다 하는 걸 알고, 알고 나면 요놈의 괴로움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대처를 해나갈 거 아니라. 괴로움이 이만큼 있는데 ‘음, 괴롭구만’ 이래버리면 이게 극복은 안된다는 거라. 요게 분명하게 얼마나 있는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인지 아니면 이제 찜매 일어났다 마는 건지 이걸 알아야 찜매 인제 일어날 거 같으면 오는 걸 톡 쳐버리면 쉽게 말하면 없어져버리거든. 신경이 안 쓰여져. 그래서 작게 일어나는 느낌들은 무시를 해보라 하는 게 그래서 그런 겁니다. 알아만 차리면 이미 그거는 없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알아차려도 안 없어지더라도 더 큰 대상이 나타나면 그리 옮겨버리면 이거는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버립니다. 요놈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가를 갖다가 먼저 판단을 해야 됩니다.

 

판단이 되었을 때, 정도를 판단을 한 상태에서 명칭을 부여해주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작은 괴로움이 일어날 거 같으면 ‘고통’ ‘고통’ ‘고통’ ‘괴로움’ ‘괴로움’ ‘괴로움’ 이렇게 관찰해나가면 됩니다.

근데 덩어리가 클 때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덩어리가 클 때는 그 나름대로의 현상에 명칭을 부여해야 됩니다. 다리가 고통스러울 때는, 한참 고통스러울 때는 어떻게 됩니까? 쑤시죠. 안 그러면 애립니다. 그러면 당연히 명칭도 ‘쑤심’이라고 해야 되고 아리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고통’ ‘고통’ ‘고통’ 해갖고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괴로움의 정도를 먼저 파악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에 맞게끔 명칭을 부여해주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틀림없이 쑤심이라는 것도 일어났다가 사라졌다가 일어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사실을 압니다. 그걸 알아야 만이 괴로움을 완전하게 극복을 해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이 통증이라는 것이 벌떡벌떡 벌떡벌떡 이렇게 일어나질 거라. 그럼 벌떡벌떡 일어나진다는 거는 역으로 얘기하면 통증과 통증 사이에는 분명히 중지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중지가 없으면 벌떡벌떡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예를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바람이 저쪽에서 나에게 와 닿는 게 그냥 시원하게 와 닿을 거 같으면 그냥 스무스하게 간질이듯이 이렇게 느껴집니다. 저쪽에 바람이 불었다 꺼졌다 하면서 이렇게 착착착착 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내 뺨을 때리듯이 이렇게 착칵착칵착칵 이렇게 바람이 와 닿습니다.

쑤신다고 하는 자체는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중지’ ‘중지’ ‘중지’가 계속적으로 있어왔다는 거라. 그러면 그 ‘중지’를 볼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이 괴로움을 완전하게 극복해낼 수가 있고 이러한 괴로움이 너무나 빨리 일어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도저히 콘트롤이 안 될 정도로 빨리 온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그게 바로 화살과 같이 오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을 관찰할 때는 화살과 같이 보라 하는 거라. 그렇게 해야 만이 두 번째 화살을 안 맞는 거라.

한 살(화살), 두 살(화살), 세 살(화살)

 

자, 그다음에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는 것.

즐거운 거는 왜 관찰하라고 합니까? 좋은데, 좋은데 왜 관찰하라고 그래? 그렇습니다. 탐욕입니다. 좋으면 더 그냥 가질려고 하거든. 그것이 분명히 나쁜 걸 알거든. 근데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돼? (수행자 대답) 그럴 거 같으면 얼마나 좋겠노.

느낌은 자기의 느낌입니다. 절대 남의 느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도솔님이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세 살 짓도 해 쌌고 우스갯소리도 해 쌌고 이렇게 합니다. 그거는 자기 혼자의 느낌을 증폭을 시켰든 어쨌든 간에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도솔님이 했던 느낌하고 내 느낌하고 똑같다고 누구도 얘기 못 합니다. 그렇죠.

(수행자 질문)

그렇죠. 느낌을 공유하기는 하죠. 근데 비슷한 패턴들로 이렇게 해왔기 때문에 공유하는 것이고, 내가 지금 마음이 괴로워 죽겠는데 누가 세 살 짓 한다 해가 내가 즐거워합니까? 그렇지만 어쨌든 괴로운 것 보다는 즐거운 것이 나으니까, 차라리 인상 찌뿌리고 있는 것보다는 도솔님 같은 분이 있으면서 세 살 짓이라도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생활을 좀 건강하게 만들고 그렇게 합니다. 도솔님 내가 뭐라 하는 거 아닙니다이.

그렇지만은 어쨌든 자신도 마찬가지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는 것은 탐욕이 일어난다고 하는 거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그 탐욕을 제거할려고 해야 만이 진정한 즐거움들을 알게 됩니다.

 

즐거움에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관찰하는 것이 좋은가 하면, 육체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즐거움을 구분할려고 자꾸 노력들을 하십시오. 육체적인 즐거움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즐거움이 왔든, 아니면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인해서 정신적으로 즐거워지든 그리하더라도 하나로써 끝내도록 자꾸 만들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즐거움도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도 즐거움과 즐거움 그 사이에는 중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다른 대상이 팍 끼여들면 금방 마음은 바뀌어 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중지를 시키고 분리를 시켜보면 참 허망하게 보입니다. 그런 즐거움들이라는 자체가.

 

가끔씩 인도의 라즈니쉬 입니까? 라즈니쉬가 있는데 라즈니쉬가 도입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어떤 것이 있느냐면 성적인 접촉에 의해서 해탈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그 속에서 허망함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써 쓰여집니다. 그걸 좋아가지고 즐기라고 하는 게 아니고. 그 사실을 알아차려나가면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을 분리를 해나가고, 즐거움이 연속된 것 같지만 즐거움의 사이에는 중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참 그것이 허망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패턴들을 써나간다고 스님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수행에서 알아차림이 없고 육체와 정신적인 문제를 분리를 해서 관찰해나가지 않으면 거기서 계속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즐거운 것들을 괴로움으로 알아라 하는 이유가 그런 것들입니다.

왜 괴롭겠습니까? 허망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라. 즐거운 것도 참 이렇게 허망하고 허무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우뻭카,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것, 애매모호 한 것.

통상적으로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느낌입니다. 사실은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은 일생 중에 한 10%나 될까? 그것도 안 될 겁니다. 그렇죠?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일상적인 생활할 때 뭐 그리 그렇게 기쁘고 그렇게 괴로운 게 얼마나 되는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이 우뻭카 상탭니다. 그마만큼 어리석게 살아왔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이 태어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이 우뻭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되기 때문에 관찰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무상으로 관찰하라 그러죠?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이 법문을 하면 여기 입술이 달싹달싹하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법문을 합니다. 그러면 이 달싹달싹하는 것도 하나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관찰하는 마음도 거기에 맞춰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육체적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있자, 정신적인 것도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분리가 됩니까? 틀림없이 그렇게 돼나갈 겁니다. 그러면 하나의 사라짐으로 인해서 마음의 사라짐도 있게 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미 우뻭카 상태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게 돼버립니다.

 

통상적인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서 관찰이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대상을 알아차려라 하는 겁니다. 그 대상을 알아차려라 하는 것은 이것이 나마고 이것이 루빠다 하면서 현상들을 알아차려나가라 하는 거라. 그러죠? 이게 육체적인 현상이고 이것이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이라고.

통상적인 수행이 이 범주에 다 포함이 됩니다. 그럴 거 같으면 적어도 이 어리석음은 일어나지 않게끔 돼 있다. 그래서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명확하게 볼 때까지, 그래서 그 대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때까지 그것이 육체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뒤따라서 와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구분하고 알아차려나가고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도록 자꾸 사띠를 해라.

 

이리 해야만이 웨다나로 부터 생기는 무수한 속박을 없앨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그렇게 체험해야 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것이 이 두 번째 웨다나에 대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웨다나에 대한 느낌들은 반드시 자꾸 알아차려 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여기 있는 스님이 수행할 때 뭘 알아차리라고 그럽니까? 느낌을 자꾸 알아차리라고 그러죠? 느낌 안에는 신·수·심·법이 다 들어있습니다. 가장 또 알아차리기가 쉽고, 또 가장 대상에 일치시켜 주기가 쉬운 것이 이 느낌입니다.

 

자, 오늘은 느낌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고, 다음 시간에는 산냐(saññā)-:지각, 상(想) 부분에 대한 것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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