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Co-Admin 
Mahānāma Pariyatti, patipatti, pativedha
Mar 18, 2021, 10:02 PM
한국테라와다불교《빤냐완따》이사장 스님의 금요법문
어느 거사님께 드리는 글 <2>
(지난번에 마무리하지 못했던 ‘사띠’ 와 ‘칠각지’에 대한 보충 설명)
한때 부처님께서, 극심한 열병에 걸려 누워 있는 목갈라나 존자를 병문안하시어 <깨달음의 요인경>(칠각지경)을 설해주신 적이 있는데, 이 경을 듣고 바르게 이해한 목갈라나 존자가 병마로부터 벗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빨리어 원문의 전반부를 옮겨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Bojjhaṅga sutta
(깨달음의 요인경)
Saṁsāre saṁsārantānaṁ, sabbadukkhavināsane,
satta dhamme ca bojjhaṅge, mārasenā pamaddane.
Bujjhitvā ye cime sattā, tibhavā muttakuttamā,
ajātimajarābyādhiṁ, amataṁ nibbhayaṁ gatā.
Evamādiguṇūpetaṁ, anekaguṇasaṅgahaṁ,
osadhañ ca imaṁ mantaṁ, bojjhaṅgañ ca bhaṇāma he.
① Bojjhaṅgo satisaṅkhāto, dhammānaṁ vicayo tathā,
viriyaṁ pīti passaddhi, bojjhaṅgā ca tathāpare.
② Samādhupekkhā bojjhaṅgā, satte te sabbadassinā,
muninā sammadakkhātā, bhāvitā bahulīkatā.
③ Saṁvattanti abhiññāya, nibbānāya ca bodhiyā,
etena saccavajjena, sotthi te hotu sabbadā.
④ Sattime, moggallāna, bojjhaṅgā mayā sammadakkhātā,
bhāvitā bahulīkatā,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ṁvattanti.
깨달음의 7가지 요인이란 담마는,
윤회하는 세계에서 윤회하는 존재들의,
모든 괴로움 파괴하고,
마라의 군대를 패배시킬 것이라네.
이러한 7가지 담마를 깨달아
3가지 존재로부터 해방된 최상의 성자들은
태어남도 늙음도 병듦도 없고,
죽음도 두려움도 없게 된다네.
이러한 공덕 갖추고 있고,
많은 공덕 포함하고 있는,
약초나 진언(眞言)같은,
깨달음의 요인경을 독송합니다.
① 깨달음의 요인들은
알아차림의 조건과 담마의 조사,
노력과 희열과 고요함, 그리고
잇달아서 다른 깨달음의 요인들도 있나니.
② 그것은 마음집중과 평정이라는 깨달음의 요인
이러한 7가지는 모든 것을 보여 주신 분,
깨달음을 이루신 분께서 바르게 설하였고,
열심히 수행하며 많이 닦은 것이라네.
③ 이것들은 완전한 앎을 통찰케 하고,
닙바나와 바른 깨달음 성취케 하니
이와 같은 진실 말함으로써,
항상 행복이 가득하기를!
④ 목갈라나여! 여기 7가지
깨달음의 요인들을 나는 바르게 설하였고,
열심히 수행하면서 원만히 닦은 것이며,
완전한 앎, 그리고 바른 깨달음과
닙바나로 인도하는 것이라네.
...................
37조도품(助道品, 완전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37가지 수행요소)은 불교수행법의 총체입니다. 37조도품 중에서 ‘칠각지’(七覺支)는 단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사띠’[①sati, 念覺支]가 밀밀해지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온갖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그 현상(법)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②dhammavicaya, 擇法(택법)覺支]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면, 난생처음 경험하는 현상에 대해서 ‘어 이게 무어지? 아 그거로구나! 이것이 몸이요 물질이요 마음이로구나! 이것이 둑카요 둑카가 이렇게 생겨나는구나! 지나친 노력으로 내가 들떠있구나! 혼침에 빠져서 대상을 놓치고 있구나! 혹은 법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 심오한 사유 등등.
이 보장가(bojjhaṅga, 覺支, 깨달음의 요인)로 인해 법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면서 수행자는 신심·결정심과 함께 가일층 분발노력하게 됩니다[③viriya, 精進(정진)覺支]. 마침내 인위적인 노력이 아닌 자연스러운 노력, 힘들이지 않는 노력, 최적의 노력, 바른 노력이 저절로(자동적으로) 생겨나면서 마침내 온갖 희열[④pīti, 喜(희)覺支]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드디어 삐띠가 가라앉고 평온[⑤passaddhi, 輕安(경안)覺支]이 찾아옵니다. 마침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 일념삼매[⑥samādhi, 定(정)覺支]의 상태가 되면서 생멸현상에 대한 분별심이 사라진 평정[⑦upekkhā, 捨(사)覺支]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지난번에 거사님께서 말씀했듯이 칠각지 가운데 뒤의 4요소 희열·고요·일념·평정은 수행의 결과물로 나타난 요소들이고, 앞의 3요소, 즉 알아차림·법의 조사·노력은 인위적인 요소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실제로 경험해보면 이 3요소 역시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나 저절로 작용하는 지극히 자연스런 요소들입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사띠(잊지않음, 놓치지않음, 주의주시, 마음챙김, 알아차림)에 대해 ‘사띠는 대상에 인위적(의도적)으로 의식을 두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바른 사띠’가 되면 인위적인 의도는 사라집니다. 사띠의 중요한 특성중 하나가 ‘수동성’ ‘비능동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띠는 마음챙김·알아차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음챙김·알아차림 ‘되어져야’ 진정한 사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초기에는 ‘마음챙김’해야 하고 ‘알아차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차츰 수행의 장애들이 제거되고 선정력이 생겨나면서 대상이 마음거울에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때 비로소 ‘바른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진정한 사띠’가 시작됩니다.
사띠는 벽에 걸린 거울과 같아 대상을 찾아가서 비추지는 못합니다. 사물이 거울 위를 스쳐지나가는 순간에만 비출 수 있습니다. 마치 성문의 성지기가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만 주시·기억·인지할 뿐 성 안팎을 찾아다니며 주시·기억·인지하지 않는 것처럼. 즉, 마음거울에 대상이 자연스럽게 비춰질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사띠·바른 사띠가 됩니다. 숲속의 고요한 연못에 사슴이 다녀가면 사슴이, 새가 날아가면 새가, 구름이 지나가면 구름이 비춰질 뿐입니다.
사띠의 기능은 단순합니다. 입체적이지 않고 차라리 평면적이며, 살아서 움직인다기보다는 차라리 정적인 활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거울이나 연못은 스스로에게 비춰진 것이 사슴·새·구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사띠만으로는 한 마리 새가 연못 위를 날아갈 때 날개죽지를 퍼덕거리거나 하얀 깃털 떨구는 것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띠는 오직 비추는 기능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띠에는 대상을 아는 인지적 기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띠의 주된 번역어로 일컬어지는 ‘알아차림’ 의 의미 속에는, 마음거울에 비추어진 것이 사슴·새·구름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뜻은 이름·개념으로서의 사슴·새·구름이 아니라 비추어진 그 대상의 특성, 즉 물질(움직임·무게감·열감···)비물질·원인결과·무상고무아 등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입체적인 본질적 앎의 상태가 되며, 정적(수동적)이 아닌 살아서 움직이는 활성(깨어있는)상태가 됩니다.
즉, ‘입체적 활성상태’의 의미 속에는 사띠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지혜’(올바른 앎, 삼빠잔나)와 ‘노력’(바른 노력, 삼마 와야모)의 기능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근거를 <8정도경, 막가 위방가 숫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빅쿠들이여! <바른 사띠>란 무엇인가?
빅쿠들이여! 여기 빅쿠가,
몸에 있어 몸을 관찰하면서,
[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사띠]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느낌에 있어 느낌을 관찰하면서,
[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사띠]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마음에 있어 마음을 관찰하면서,
[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사띠]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법에 있어 법을 관찰하면서,
[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사띠]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빅쿠들이여! 이런 것을 <바른 사띠>라 한다.
이와같이 <8정도경>에서는 ‘기억·잊지않음·주의주시·놓치지않음’의 의미를 지닌 ‘사띠’라는 용어를 독립적으로 쓰지 않고, 노력(아-따-삐-)과 올바른 앎(삼빠자-노-)에 의한 사띠(Sati) 즉, 노력(아-따-삐-)과 올바른 앎(삼빠자-노-)이 함께 작용할 때 진정한 의미의 ‘바른 사띠(삼마사띠)’가 된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로 한국에서 ‘사띠’의 번역어 중 하나로 통용되고 있는 ‘알아차림’은 엄밀히 말해 순수한 의미로서의 ‘사띠’에 대한 한글 번역어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친히 설하신 <8정도경>의 ‘삼마 사띠’에 근거할 때는 비교적 적절한 번역용어가 아닐까 사료됩니다. 사띠는 그 용례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고 있는데,
사마타(집중)수행에서는
‘잊지않음, 기억, 주의, 주시,
머물기, 지킴’ 등으로 쓰이고 있고,
위빳사나(통찰)수행에서는
‘알아차림, 자각, 깨어있음,
마음챙김’ 등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가령, 사마타 수행의 하나인 부처님의 공덕을 회상하는 ‘붓다눗사띠’에 있어서는 기억·잊지않음·주의·머물기 등의 의미로는 적합하지만, 사념처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알아차림·자각 등과 같은 의미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사띠’같은 확장성이 큰 특별한 용어는 가능한 번역하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 사용하면서 상황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의 사띠 번역용어는 주로 37조도품(사념처, 5근, 칠각지, 8정도···)의 통찰수행과 관련하여 ‘알아차림’ ‘마음챙김’ ‘마음지킴’ 정도로 구분해 쓰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몇몇 학자들은 저마다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수동적 주의집중’ ‘주시’ ‘새김’ 등으로 번역해 쓰고 있습니다.
이 승은 지금까지 줄곧 <8정도경>에 근거하여 ‘알아차림’이라는 용어를 써오고 있습니다만, 현재 ‘마음챙김’이 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알아차림’이 ‘마음챙김’ 보다는 좀 더 명확한 의미전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일상에서 쓰이는 보통명사인데 반하여, ‘마음챙김’은 ‘마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고유명사로서 불교수행의 상징성이 함의된 유용한 용어라고 사료됩니다.
스리랑카의 수행스승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은 ‘사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띠는 거울속에 비춰진 왜곡 없는 반영이다.
사띠는 그 대상을 판단하지 않는다.
사띠는 치우침 없는 주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뿐 개념화하지 않는다.
사띠는 비 자기중심적이고,
이 순간의 자각이며, 변화에 대한 앎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불멸 2565(2021). 3.19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
한국 테라와다불교 상가라자(승정)
<뿐냐산또 도성(道成) 마하테라>
존경하는 <뿐냐산또 도성(道成) 마하테라>께서는 1924(갑자)년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 관봉리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습니다. 부친 청해이씨 이병률, 모친 밀양박씨, 형님 이상호, 큰스님 속명은 양덕군의 ‘양’자를 따서 이양호.
평소 성품이 올곧으면서도 자애로우셨던 스님께서는 6.25 동란의 참상을 통해 생의 덧없음을 절감하고 출가를 결심, 1955년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시던 황해도 태생의 <석암스님>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예닐곱 차례에 걸친 간청에도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석암스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못 이기시고 수계제자로 받아들여 <지월스님>을 은사로 삼게 한 뒤 <도성(道成)>이란 법명과 함께 사미계를 줍니다. 스님께서는 훗날 <영공(英空)>이란 법호까지 얻음으로서 국내에서는 <영공 큰스님> 혹은 <도성 큰스님>으로 불려 지게 됩니다.
그 후 <석암스님>과 <지월스님>의 지도 아래 참선수행을 하면서 전통강원의 사교(四敎)과정까지 수료한 뒤, 불국사·불영사·상원사·정암사·김용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 정진하셨고, 드디어 1967년 은사 <지월스님>을 모시고 합천 해인사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당시 해인사는 쇠락할 대로 쇠락해 있었고, <효봉선사>(상가라자 큰스님의 5촌 당숙으로서, 쇠락한 선풍(禪風)을 진작시켜 한국 근대불교를 반석위에 올려놓으신 대표적인 선지식)께서 이룩해 놓으셨던 ‘가야총림’의 위용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은사 <지월스님>을 모시고 해인사 총무 소임에 이어 주지 소임까지 맡으면서 보디삿다의 정신으로 도량을 정비하고 무너진 승풍을 진작시키는 등 해인사를 ‘해인총림’의 반석위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일찍이 테라와다불교의 소중함을 간파하시고 1973년 태국 방콕의 ‘왓벤자 마보핏 사원’의 대강백이셨던 <프라 담마딧티소폰 마하테라>로부터 한국 최초의 테라와다 비구계를 받습니다. 이를 계기로 하여 훗날 일생동안 이 땅에 테라와다불교를 홍포하는데 헌신하게 됩니다.
1977년 해인사 주지소임을 내려놓고 은사 <지월스님>의 유훈에 따라 부산 영도에 근본불교 수행도량 ‘태종사(太宗寺)’를 창건합니다. 이후 지속된 스리랑카·태국·미얀마 승단과의 교류는 이땅에 테라와다불교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3년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기증 받음과 동시에 부처님의 해탈 보리수로부터 이식해온 어린 보리수 1그루를 태종사 경내에 식재함으로서 태종사는 해동 최초의 보리수 이식도량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1989년 <아마라야노스님>과 함께 미얀마의 위빳사나 스승인 <우빤디따 사야도>와 <우자틸라 사야도>를 국내로 초청, 출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1달 반 동안의 위빳사나 수행법회를 개최함으로써 위빳사나 수행법을 한국에 소개함과 동시에 테라와다불교에 대한 첫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90년부터 해남 대둔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아마라야노스님>과 함께 위빳사나 수행결사를 하셨고,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행자들이 훗날 미얀마 등지로 건너가서 테라와다 비구계를 받고 위빳사나 수행을 직접 체험을 하고 돌아오는데, 그것이 결국 ‘한국테라와다불교’ 출범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1997년 태국에서 수행 중이던 테라와다 상좌 <아짠 진용 빤냐와로 스님>을 불러들여 태종사 주지 소임을 맡긴 다음 테라와다 상가를 만들게 하였고, 그해 음력 6월보름~9월보름까지 3개월간의 우기안거를 통해 포살의식을 비롯한 각종 상가깜마(상가의례)를 행함으로써, 그동안 위빳사나 수행으로만 인식돼오던 남방불교가 마침내 온전한 테라와다불교의 궤도에 오르는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2003년에는 이와 같은 일련의 공로를 인정받아 스리랑카 <이바야사카라 대승정>으로부터 최고영예의 성자상을 수여 받았고, 같은 해 스리랑카 상가로부터 <삼마 사사나 조띠가 마하테라>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게 됩니니다.
2006년에는 태국 ‘담마까야’에서 주관하는 ‘마카부차데이(초전법륜일)’ 국제행사에 국빈으로 초청되어 한국 테라와다불교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으며, 2008년에는 태종사 경내에서 한국·스리랑카 수교 3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양국간의 우호를 한층 돈독히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올해 9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이에게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따듯한 미소로서 감로의 법문을 들려주고 계시며, 단 하루도 빨리어 조석예불을 거르지 않으신 채 한국 불교계의 최고 어른으로서 한국테라와다불교 승단을 이끌고 계십니다.
<불멸 2565년(2021,신축년) 3월 19일>











1

1

1

1

1
게시자 Co-Admin
Mahānāma Pariyatti, patipatti, pativedha
Mar 18, 2021, 10:02 PM
한국테라와다불교《빤냐완따》이사장 스님의 금요법문
어느 거사님께 드리는 글 <2>
(지난번에 마무리하지 못했던 ‘사띠’ 와 ‘칠각지’에 대한 보충 설명)
한때 부처님께서, 극심한 열병에 걸려 누워 있는 목갈라나 존자를 병문안하시어 <깨달음의 요인경>(칠각지경)을 설해주신 적이 있는데, 이 경을 듣고 바르게 이해한 목갈라나 존자가 병마로부터 벗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빨리어 원문의 전반부를 옮겨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Bojjhaṅga sutta
(깨달음의 요인경)
Saṁsāre saṁsārantānaṁ, sabbadukkhavināsane,
satta dhamme ca bojjhaṅge, mārasenā pamaddane.
Bujjhitvā ye cime sattā, tibhavā muttakuttamā,
ajātimajarābyādhiṁ, amataṁ nibbhayaṁ gatā.
Evamādiguṇūpetaṁ, anekaguṇasaṅgahaṁ,
osadhañ ca imaṁ mantaṁ, bojjhaṅgañ ca bhaṇāma he.
① Bojjhaṅgo satisaṅkhāto, dhammānaṁ vicayo tathā,
viriyaṁ pīti passaddhi, bojjhaṅgā ca tathāpare.
② Samādhupekkhā bojjhaṅgā, satte te sabbadassinā,
muninā sammadakkhātā, bhāvitā bahulīkatā.
③ Saṁvattanti abhiññāya, nibbānāya ca bodhiyā,
etena saccavajjena, sotthi te hotu sabbadā.
④ Sattime, moggallāna, bojjhaṅgā mayā sammadakkhātā,
bhāvitā bahulīkatā,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ṁvattanti.
깨달음의 7가지 요인이란 담마는,
윤회하는 세계에서 윤회하는 존재들의,
모든 괴로움 파괴하고,
마라의 군대를 패배시킬 것이라네.
이러한 7가지 담마를 깨달아
3가지 존재로부터 해방된 최상의 성자들은
태어남도 늙음도 병듦도 없고,
죽음도 두려움도 없게 된다네.
이러한 공덕 갖추고 있고,
많은 공덕 포함하고 있는,
약초나 진언(眞言)같은,
깨달음의 요인경을 독송합니다.
① 깨달음의 요인들은
알아차림의 조건과 담마의 조사,
노력과 희열과 고요함, 그리고
잇달아서 다른 깨달음의 요인들도 있나니.
② 그것은 마음집중과 평정이라는 깨달음의 요인
이러한 7가지는 모든 것을 보여 주신 분,
깨달음을 이루신 분께서 바르게 설하였고,
열심히 수행하며 많이 닦은 것이라네.
③ 이것들은 완전한 앎을 통찰케 하고,
닙바나와 바른 깨달음 성취케 하니
이와 같은 진실 말함으로써,
항상 행복이 가득하기를!
④ 목갈라나여! 여기 7가지
깨달음의 요인들을 나는 바르게 설하였고,
열심히 수행하면서 원만히 닦은 것이며,
완전한 앎, 그리고 바른 깨달음과
닙바나로 인도하는 것이라네.
...................
37조도품(助道品, 완전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37가지 수행요소)은 불교수행법의 총체입니다. 37조도품 중에서 ‘칠각지’(七覺支)는 단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사띠’[①sati, 念覺支]가 밀밀해지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온갖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그 현상(법)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②dhammavicaya, 擇法(택법)覺支]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면, 난생처음 경험하는 현상에 대해서 ‘어 이게 무어지? 아 그거로구나! 이것이 몸이요 물질이요 마음이로구나! 이것이 둑카요 둑카가 이렇게 생겨나는구나! 지나친 노력으로 내가 들떠있구나! 혼침에 빠져서 대상을 놓치고 있구나! 혹은 법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 심오한 사유 등등.
이 보장가(bojjhaṅga, 覺支, 깨달음의 요인)로 인해 법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면서 수행자는 신심·결정심과 함께 가일층 분발노력하게 됩니다[③viriya, 精進(정진)覺支]. 마침내 인위적인 노력이 아닌 자연스러운 노력, 힘들이지 않는 노력, 최적의 노력, 바른 노력이 저절로(자동적으로) 생겨나면서 마침내 온갖 희열[④pīti, 喜(희)覺支]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드디어 삐띠가 가라앉고 평온[⑤passaddhi, 輕安(경안)覺支]이 찾아옵니다. 마침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 일념삼매[⑥samādhi, 定(정)覺支]의 상태가 되면서 생멸현상에 대한 분별심이 사라진 평정[⑦upekkhā, 捨(사)覺支]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지난번에 거사님께서 말씀했듯이 칠각지 가운데 뒤의 4요소 희열·고요·일념·평정은 수행의 결과물로 나타난 요소들이고, 앞의 3요소, 즉 알아차림·법의 조사·노력은 인위적인 요소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실제로 경험해보면 이 3요소 역시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나 저절로 작용하는 지극히 자연스런 요소들입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사띠(잊지않음, 놓치지않음, 주의주시, 마음챙김, 알아차림)에 대해 ‘사띠는 대상에 인위적(의도적)으로 의식을 두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바른 사띠’가 되면 인위적인 의도는 사라집니다. 사띠의 중요한 특성중 하나가 ‘수동성’ ‘비능동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띠는 마음챙김·알아차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음챙김·알아차림 ‘되어져야’ 진정한 사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초기에는 ‘마음챙김’해야 하고 ‘알아차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차츰 수행의 장애들이 제거되고 선정력이 생겨나면서 대상이 마음거울에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때 비로소 ‘바른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진정한 사띠’가 시작됩니다.
사띠는 벽에 걸린 거울과 같아 대상을 찾아가서 비추지는 못합니다. 사물이 거울 위를 스쳐지나가는 순간에만 비출 수 있습니다. 마치 성문의 성지기가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만 주시·기억·인지할 뿐 성 안팎을 찾아다니며 주시·기억·인지하지 않는 것처럼. 즉, 마음거울에 대상이 자연스럽게 비춰질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사띠·바른 사띠가 됩니다. 숲속의 고요한 연못에 사슴이 다녀가면 사슴이, 새가 날아가면 새가, 구름이 지나가면 구름이 비춰질 뿐입니다.
사띠의 기능은 단순합니다. 입체적이지 않고 차라리 평면적이며, 살아서 움직인다기보다는 차라리 정적인 활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거울이나 연못은 스스로에게 비춰진 것이 사슴·새·구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사띠만으로는 한 마리 새가 연못 위를 날아갈 때 날개죽지를 퍼덕거리거나 하얀 깃털 떨구는 것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띠는 오직 비추는 기능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띠에는 대상을 아는 인지적 기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띠의 주된 번역어로 일컬어지는 ‘알아차림’ 의 의미 속에는, 마음거울에 비추어진 것이 사슴·새·구름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뜻은 이름·개념으로서의 사슴·새·구름이 아니라 비추어진 그 대상의 특성, 즉 물질(움직임·무게감·열감···)비물질·원인결과·무상고무아 등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입체적인 본질적 앎의 상태가 되며, 정적(수동적)이 아닌 살아서 움직이는 활성(깨어있는)상태가 됩니다.
즉, ‘입체적 활성상태’의 의미 속에는 사띠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지혜’(올바른 앎, 삼빠잔나)와 ‘노력’(바른 노력, 삼마 와야모)의 기능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근거를 <8정도경, 막가 위방가 숫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빅쿠들이여! <바른 사띠>란 무엇인가?
빅쿠들이여! 여기 빅쿠가,
몸에 있어 몸을 관찰하면서,
[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사띠]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느낌에 있어 느낌을 관찰하면서,
[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사띠]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마음에 있어 마음을 관찰하면서,
[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사띠]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법에 있어 법을 관찰하면서,
[노력과 올바른 앎에 의한 사띠]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빅쿠들이여! 이런 것을 <바른 사띠>라 한다.
이와같이 <8정도경>에서는 ‘기억·잊지않음·주의주시·놓치지않음’의 의미를 지닌 ‘사띠’라는 용어를 독립적으로 쓰지 않고, 노력(아-따-삐-)과 올바른 앎(삼빠자-노-)에 의한 사띠(Sati) 즉, 노력(아-따-삐-)과 올바른 앎(삼빠자-노-)이 함께 작용할 때 진정한 의미의 ‘바른 사띠(삼마사띠)’가 된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로 한국에서 ‘사띠’의 번역어 중 하나로 통용되고 있는 ‘알아차림’은 엄밀히 말해 순수한 의미로서의 ‘사띠’에 대한 한글 번역어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친히 설하신 <8정도경>의 ‘삼마 사띠’에 근거할 때는 비교적 적절한 번역용어가 아닐까 사료됩니다. 사띠는 그 용례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고 있는데,
사마타(집중)수행에서는
‘잊지않음, 기억, 주의, 주시,
머물기, 지킴’ 등으로 쓰이고 있고,
위빳사나(통찰)수행에서는
‘알아차림, 자각, 깨어있음,
마음챙김’ 등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가령, 사마타 수행의 하나인 부처님의 공덕을 회상하는 ‘붓다눗사띠’에 있어서는 기억·잊지않음·주의·머물기 등의 의미로는 적합하지만, 사념처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알아차림·자각 등과 같은 의미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사띠’같은 확장성이 큰 특별한 용어는 가능한 번역하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 사용하면서 상황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의 사띠 번역용어는 주로 37조도품(사념처, 5근, 칠각지, 8정도···)의 통찰수행과 관련하여 ‘알아차림’ ‘마음챙김’ ‘마음지킴’ 정도로 구분해 쓰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몇몇 학자들은 저마다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수동적 주의집중’ ‘주시’ ‘새김’ 등으로 번역해 쓰고 있습니다.
이 승은 지금까지 줄곧 <8정도경>에 근거하여 ‘알아차림’이라는 용어를 써오고 있습니다만, 현재 ‘마음챙김’이 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알아차림’이 ‘마음챙김’ 보다는 좀 더 명확한 의미전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일상에서 쓰이는 보통명사인데 반하여, ‘마음챙김’은 ‘마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고유명사로서 불교수행의 상징성이 함의된 유용한 용어라고 사료됩니다.
스리랑카의 수행스승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은 ‘사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띠는 거울속에 비춰진 왜곡 없는 반영이다.
사띠는 그 대상을 판단하지 않는다.
사띠는 치우침 없는 주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뿐 개념화하지 않는다.
사띠는 비 자기중심적이고,
이 순간의 자각이며, 변화에 대한 앎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불멸 2565(2021). 3.19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
한국 테라와다불교 상가라자(승정)
<뿐냐산또 도성(道成) 마하테라>
존경하는 <뿐냐산또 도성(道成) 마하테라>께서는 1924(갑자)년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 관봉리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습니다. 부친 청해이씨 이병률, 모친 밀양박씨, 형님 이상호, 큰스님 속명은 양덕군의 ‘양’자를 따서 이양호.
평소 성품이 올곧으면서도 자애로우셨던 스님께서는 6.25 동란의 참상을 통해 생의 덧없음을 절감하고 출가를 결심, 1955년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시던 황해도 태생의 <석암스님>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예닐곱 차례에 걸친 간청에도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석암스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못 이기시고 수계제자로 받아들여 <지월스님>을 은사로 삼게 한 뒤 <도성(道成)>이란 법명과 함께 사미계를 줍니다. 스님께서는 훗날 <영공(英空)>이란 법호까지 얻음으로서 국내에서는 <영공 큰스님> 혹은 <도성 큰스님>으로 불려 지게 됩니다.
그 후 <석암스님>과 <지월스님>의 지도 아래 참선수행을 하면서 전통강원의 사교(四敎)과정까지 수료한 뒤, 불국사·불영사·상원사·정암사·김용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 정진하셨고, 드디어 1967년 은사 <지월스님>을 모시고 합천 해인사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당시 해인사는 쇠락할 대로 쇠락해 있었고, <효봉선사>(상가라자 큰스님의 5촌 당숙으로서, 쇠락한 선풍(禪風)을 진작시켜 한국 근대불교를 반석위에 올려놓으신 대표적인 선지식)께서 이룩해 놓으셨던 ‘가야총림’의 위용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은사 <지월스님>을 모시고 해인사 총무 소임에 이어 주지 소임까지 맡으면서 보디삿다의 정신으로 도량을 정비하고 무너진 승풍을 진작시키는 등 해인사를 ‘해인총림’의 반석위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일찍이 테라와다불교의 소중함을 간파하시고 1973년 태국 방콕의 ‘왓벤자 마보핏 사원’의 대강백이셨던 <프라 담마딧티소폰 마하테라>로부터 한국 최초의 테라와다 비구계를 받습니다. 이를 계기로 하여 훗날 일생동안 이 땅에 테라와다불교를 홍포하는데 헌신하게 됩니다.
1977년 해인사 주지소임을 내려놓고 은사 <지월스님>의 유훈에 따라 부산 영도에 근본불교 수행도량 ‘태종사(太宗寺)’를 창건합니다. 이후 지속된 스리랑카·태국·미얀마 승단과의 교류는 이땅에 테라와다불교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3년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기증 받음과 동시에 부처님의 해탈 보리수로부터 이식해온 어린 보리수 1그루를 태종사 경내에 식재함으로서 태종사는 해동 최초의 보리수 이식도량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1989년 <아마라야노스님>과 함께 미얀마의 위빳사나 스승인 <우빤디따 사야도>와 <우자틸라 사야도>를 국내로 초청, 출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1달 반 동안의 위빳사나 수행법회를 개최함으로써 위빳사나 수행법을 한국에 소개함과 동시에 테라와다불교에 대한 첫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90년부터 해남 대둔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아마라야노스님>과 함께 위빳사나 수행결사를 하셨고,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행자들이 훗날 미얀마 등지로 건너가서 테라와다 비구계를 받고 위빳사나 수행을 직접 체험을 하고 돌아오는데, 그것이 결국 ‘한국테라와다불교’ 출범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1997년 태국에서 수행 중이던 테라와다 상좌 <아짠 진용 빤냐와로 스님>을 불러들여 태종사 주지 소임을 맡긴 다음 테라와다 상가를 만들게 하였고, 그해 음력 6월보름~9월보름까지 3개월간의 우기안거를 통해 포살의식을 비롯한 각종 상가깜마(상가의례)를 행함으로써, 그동안 위빳사나 수행으로만 인식돼오던 남방불교가 마침내 온전한 테라와다불교의 궤도에 오르는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2003년에는 이와 같은 일련의 공로를 인정받아 스리랑카 <이바야사카라 대승정>으로부터 최고영예의 성자상을 수여 받았고, 같은 해 스리랑카 상가로부터 <삼마 사사나 조띠가 마하테라>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게 됩니니다.
2006년에는 태국 ‘담마까야’에서 주관하는 ‘마카부차데이(초전법륜일)’ 국제행사에 국빈으로 초청되어 한국 테라와다불교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으며, 2008년에는 태종사 경내에서 한국·스리랑카 수교 3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양국간의 우호를 한층 돈독히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올해 9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이에게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따듯한 미소로서 감로의 법문을 들려주고 계시며, 단 하루도 빨리어 조석예불을 거르지 않으신 채 한국 불교계의 최고 어른으로서 한국테라와다불교 승단을 이끌고 계십니다.
<불멸 2565년(2021,신축년) 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