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로 가는 여정 (20260726) / 케마짜라 스님

관리자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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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로 가는 여정  (20260726 담마와나 선원 안거 입제 법회)


 

명상수행을 통해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바는 해탈인데, 해탈을 심해탈(citta-vimutti), 혜해탈(paññā-vimutti), 양면해탈(ubhobhāga-vimutti)로 나누기도 합니다. 심해탈은 탐욕이 제거되어서 마음이 번뇌로부터 해방된 상태이고, 혜해탈은 무지(avijja)의 소멸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가 갖추어진 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해탈은 마음의 자유와 지혜의 완성이 통합된 상태로 이해되며, 이러한 구분은 서로 다른 해탈을 가리키기보다 열반의 성취를 마음과 지혜라는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본 것이므로, 우리가 여기서 구태여 해탈을 구분해서 따질 필요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해탈을 무상해탈(無相解脫, animitta-vimokkha), 무원해탈(無願解脫, appaṇihita-vimokkha), 공해탈(空解脫, suññatā-vimokkha)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는 해탈을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ā),)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집착(Upādāna)에서 벗어남


해탈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통찰하여, 우리 마음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taṇhā)와 모든 집착(upādāna)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집착을 이해해야 하는데, 집착의 대상은 매우 다양하고, 미세하며 오랫동안 습관처럼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집착을 욕취(欲取, kāmupādāna), 견취(見取, diṭṭhupādāna), 계금취(戒禁取, sīlabbatupādāna), 아취(我取, attavādupādāna)의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욕취(欲取, kāmupādāna)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감각적 대상에 대한 탐착을 말하는데, 재산이나 명예, 권력, 사람, 소유물뿐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둘째, 견취(見取, diṭṭhupādāna)는 자기 생각과 견해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집착하는 것이고, 무지(avijjā)로 인해 우리는 수많은 선입견과 편견, 잘못된 견해를 만들고, 이를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집착이 갈등과 괴로움의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셋째, 계금취(戒禁取, sīlabbatupādāna)는 의례나 계율, 전통과 관습 자체를 해탈의 절대적인 수단으로 믿고 집착하는 태도입니다. 종교적 의식이든 세속적인 관습이든 그 본래의 의미를 잊은 채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미신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 아취(我取, attavādupādāna)는 '나'와 '내 것'이라는 자아의식에 대한 집착인데, 이것은 모든 집착 가운데 가장 깊고 근본적인 것으로, ‘나’와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있는 한 괴로움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분류에 포함되는 집착의 대상들을 관찰하고, 집착에서 오는 고통과 괴로움을 보고,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나”나 “내 것”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기심을 버림으로써 모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다섯 가지 장애(五蓋)–감각적 욕망, 적의, 나태와 혼침, 들뜸과 회한, 회의–도 극복해야 하고, 모든 번뇌의 원인인 탐욕(lobha)·성냄(dosa)·어리석음(moha)도 버림으로써,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 만족스럽고 불만족스러운 기분과 모든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고, 집착이 사라지면 괴로움의 근거가 사라지게 되어 드디어 해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닛짜(Anicca, 無常)에 대한 숙고

 

명상수행의 근본적인 원칙은 수행의 대상을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내부적 현상을 바르게 이해하면, 그 통찰은 자연스럽게 외부 세계를 이해하는 바탕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명상의 대상을 몸(kāya), 느낌(vedanā), 마음(citta), 법(dhamma)이라고 하는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 四念處)에 두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아닛짜(무상)의 현상을 관찰합니다.

 

까야(kāya, 몸)의 아닛짜


호흡명상(Ānāpānasati)을 하면 먼저 까야에 해당하는 호흡과 몸의 변화하는 현상을 관찰하게 되는데, 호흡은 길고 짧아지기도 하고, 강하고 약해지기도 하며, 거칠었다가 부드러워지는 등 끊임없이 변하고, 호흡이 몸에 미치는 영향 또한 순간순간 달라집니다. 명상이 깊어질수록 거친 호흡은 점차 고요해지지만, 그 고요함마저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한 현상이고 아닛짜임을 알게 됩니다.


웨다나(vedanā, 느낌)의 아닛짜


명상이 깊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삐띠(pīti, 환희)와 수카(sukha, 행복감)와 같은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러나 이러한 느낌도 생겨나고 머물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현상이고, 느낌이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 역시 무상하다는 것을 관찰합니다.


찟따(citta, 마음)의 아닛짜


다음으로 마음을 관찰하면 마음 역시 한 순간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마음이 무상(anicca)할 뿐 아니라, 그 변화하는 마음에는 만족할 수 없는 두카(dukkha)가 있으며, 모두가 우리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에 아낫따(anattā)의 특성도 자각하게 됩니다.

 

순냐따(suññatā,空), 따타따(tathatā,如如함), 이다빳짜야따(idappaccayatā,條件性)


무상을 깊이 관찰하면 모든 상카라(현상)에는 고정된 자아가 비어 있다는 순냐따(空)를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모든 현상은 '그저 그러한 것'이라는 따타따(如如함)의 진리를 체득하게 되며, 더 나아가 모든 것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이다빳짜야따(idappaccayatā, 조건성)의 이치를 자각하게 됩니다. 이들 진리의 자각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무상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그것이 두카와 아낫따, 다시 공과 여여함, 그리고 조건성에 대한 이해로 확장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볼 때, 우리는 무상을 완전하게, 그리고 가장 심오하게 본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상카라의 무상을 완전히 자각하는 방법입니다.

 

상카라(saṅkhāra)의 특성


상카라(saṅkhāra)라는 단어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조건 지어진 모든 현상이며, 둘째는 다른 것을 조건 짓는 작용이고, 셋째는 조건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인연과 조건에 의해 성립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모두 아닛짜(무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건 지어진 대상만이 아니라, 조건 짓는 작용과 조건이 형성되는 과정까지 함께 관찰해야 하며, 이렇게 세 가지 측면을 모두 보는 것이 무상을 가장 심오하고, 완전하게 자각하는 방법입니다. 무상(아니짜)를 이 모든 특징들을 통해서 보지 않고, 무상 자체만으로 보는 것은 특별한 것이 못됩니다. 무상에 대한 이해가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카(불만족스러움), 아나따(무아), 순냐따(공), 이다빠짜야따(조건성)를 아울러야 합니다.

 

무상에 대한 완전한 이해


이와 관련된 언급이 빠알리 경전에 나오는데, 붓다께서는 당시에 아라까(araka)라는 스승이 무상에 대해 자주 가르쳤지만, 더 나아가서 두카와 아나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흥미 있는 것은 붓다 재세시에 그리스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라는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붓다께서는 아라까가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서 그곳에서 무상 또는 흐름에 대해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헤라클리투스의 주된 가르침은 그리스어로 panta rhei (빤따 레이) “만물은 흐른다. 또는 모두 것은 유동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헤라클리투스는 단지 무상만을 가르치고 그의 통찰은 두카, 아나따, 순냐따, 따타따, 이다빠짜야따 까지 포함하도록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때, 그곳에서 또 다른 붓다가 나타날 뻔했습니다. 핵심적인 것은 아닛짜(무상) 만을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아닛짜를 통해 두카, 아나따, 순냐따, 따타따, 이다빠자야따까지 이해의 고리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위라가(Virāga, 離欲·집착의 사라짐)에 대한 숙고


다음은, 아닛짜(anicca,무상)의 자각으로 우빠다나(upādāna,집착)을 해소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아닛짜의 자각을 통해 우리가 두카(불만족스러움)와 아나따(무아) 마저 보게 되면, 우리는 집착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을 깨닫고, 우리가 집착해 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 염오심(nibbidā)을 일으키게 됩니다. 염오심(nibbidā)은 자연스럽게 위라가(離欲)로 향하게 됩니다. 위라가(virāga)는 사라짐 또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위라가는 vi(떠남, 벗어남)와 rāga(탐착, 집착)가 결합된 단어이며, 탐착이 사라지고 마음이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뜻합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아닛짜(anicca,무상), 두카(dukkha,고), 아낫따(anattā,무아), 순냐따(suññatā,공), 따타따(tathatā,如如함), 이다빳짜야따(idappaccayatā, 조건성)의 빛에 비추어 봄으로써 집착이 녹아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때 집착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즉 모든 상카라에 대해서 평정한 마음이 되었을 때, 집착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위라가(사라짐)를 실현하고 집착의 사라짐을 체득하게 됩니다.

이 집착의 사라짐의 결과는 평정한 마음의, 집착을 떠난 고요함으로서, 예를 들면, 우리가 한때 집착했던 것들에 대한 사랑스런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과거나 현재, 또는 불쾌했던 대상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고, 우리가 한때 무서워했던 것들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두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점차 공포감은 줄어들고, 이것은 증오나 시기, 질투, 걱정, 불안, 과거에 대한 미련, 등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각각은 마음이 고요하고 조용해질 수 있을 때까지 작아지고, 줄어듭니다. 명상 수행에서 “고요히 묵언하라”는 의미는 단순히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든 움켜쥐거나, 매달리지 않고, 어떤 것도 “나”나 “내 것”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마음은 진정한 고요를 회복하고, 위라가를 통해 해탈을 향한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니로다(Nirodha, 滅·소멸)에 대한 숙고


우리는 명상을 통해서 집착의 사라짐과, 집착이 없어진 상태를 다양한 시각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의 소멸, 이기심의 소멸, 탐욕(lobha)·성냄(dosa)·어리석음(moha)의 소멸, 모든 괴로운 경험의 소멸, 이 모든 것이 집착의 소멸로부터 일어납니다. 소멸을 말할 때, 우리는 두카를 끝내는 것이 담마 수행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카의 다른 양상들을 관찰하고, 어떻게 그것들이 소멸될 수 있는지 봅니다.

 

첫째는 생(生)·노(老)·병(病)·사(死)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끝냄으로써,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다시는 우리의 마음을 두렵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 가지 유형의 끝냄이고,

둘째는 슬픔, 비탄, 한탄, 절망, 비애, 고통, 좌절, 우울과 같은 여러 가지 두카의 증상과 조건들의 끝냄입니다. 이러한 모든 두카의 증상들이 소멸합니다.

셋째는, 우리의 희망과 원함, 끌리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두카이고,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두카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두카인데, 두카의 이런 양상들도 또한 소멸합니다.

네 번째로, 오온(五蘊) 중의 하나에 매달리고, 오온을 “자신” 또는 “자신에 속하는 것”, “나” 또는 “내 것”으로 움켜쥐는 것이 두카입니다. 마음이 습관적으로 집착하는 이 오온(五蘊)은 몸(rūpa), 느낌(vedanā), 인식(saññā), 생각(saṅkhāra), 식(viññāṇa)인데, 이것들이 모든 두카의 총합이고, 삶의 짐들입니다.

 

위라가(사라짐)의 완전한 실현은, 네 가지 양상의 두카의 소멸을 모두 포함해야 합니다. 생,로,병,사의 두려움을 끝내고, 고통, 슬픔, 비애, 절망 같은 두카의 증상들을 끝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원함과 욕망을 끝내야 하며, 끝으로 오온 중 어느 하나라도 “자신”이라고 보는 견해를 끝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두카의 양상이 끝났을 때, 두카가 끝난 것이고, 우리는 이 중요한 실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집착의 끝냄과 사라짐, 소멸을 통해서 집착의 부존재 또는 공(空)을 자각하게 됩니다. 명상이 깊어지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어느 양상에 대해서도 집착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더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nibbana(열반)의 풍미를 마시고, 맛보고, 맛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니로다(nirodha)와 닙바나(nibbana)는 동의어로서, 우리는 두 단어를 상호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집착의 소멸을 숙고하는 것은 열반을 숙고하는 것이 됩니다.

 

빠띠니삭가(Paṭinissagga, 버림·놓아버림)에 대한 숙고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 16단계에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빠띠니삭가누빠시(paṭinissaggānupassī)는 '버림과 놓아버림을 관찰하는 수행'이며, 우리가 한때 집착했던 것, 그 모든 것을 돌려줌과 되던져버림에 대해 숙고하는 것으로서, 빠띠니삭가(paṭinissagga)라는 단어는 짜가(cāga), 보삭가(vossagga)와 함께 포기함, 관대함, 놓아버림, 던져버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단계를 설명하는 간단한 비유가 있습니다.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도둑이었습니다. 항상 우리는 자연적으로 존재하고, 자연에 속하는 것, 상카라(saṅkhāra)라고 부르는 것들을 훔쳐 왔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약탈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소유물로 가졌습니다. 우리는 도둑일 뿐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두카로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집착과 도둑질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고, 단계적 명상을 통해서 사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 관찰하게 됨으로써, 마음은 집착에서 벗어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도둑임을 끝내고, 모든 것을 본래 주인인 자연에게 돌려줍니다. 모든 것은 자연에 속합니다. 다시는 어떤 것도 “나”나 “내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가 우리의 목표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다음의 예도 유사한 점을 보여줍니다. 과거에 우리는 어리석게도 돌덩이처럼 무거운 것들을 집어 들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것들은 ‘내 자존심', '내 고집', '미련', '불안', ’남과 비교하는 질투‘,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 것들인데, 우리는 어디를 가든, 그것들을 끌고 다녔으며,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두카를 겪어야 했습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이렇게 지나갔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그런 문제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현명하지 못한 짓인가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배낭 속에 들어있는 이 돌덩이들이 얼마나 짐스러운 것인가를 깨닫고, 그냥 던져버립니다. 이 짐들이 없으면, 우리는 가볍고, 우리의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전에는 어리석음 때문에 삶 자체도 짐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 자연적인 상카라에 매달리고, 어딜 가든 가지고 다녀서, 우리 자신을 엄청나게 무겁게 눌렀습니다만,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던져버립니다.


빠띠니삭가(paṭinissagga)에 대한 숙고는 삶의 모든 짐들을 던져버리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짐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던져버려야 합니다. 전에 우리는 이 짐들의 무게 아래 살았고, 그 무게가 우리를 압박했습니다. 이것을 “세상 아래 산다.”라거나 “세상에 빠져 산다.”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를 세상 아래 가둔 짐들을 던져버릴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부상하게 되고, 세상 위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 되고, 이것이 자유와 웰빙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의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아래서 사는 것”은 로끼야(lokiya, 세간)이고, “세상 위에 사는 것”은 로꾸따라(lokuttara, 출세간)입니다. 분명하고 완벽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바보가 될 때마다 무거운 것들을 집어서 삶의 짐으로 쌓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 짐들이 우리에게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을 던져버리게 되고, 이제 우리에게는 어떤 짐도 없습니다. 세상 아래 사는 것과 세상 위에 사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것이 해탈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면, 우리는 모든 짐들을 놓아버리게 되거나, 우리 자신을 그 짐들 아래로부터 꺼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놓아버린다.”라고 하건, “짐들을 놓아버린다.”라고 하건, 같은 의미가 됩니다. “놓아버리기”가 있고, 그 결과는 해탈입니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부르든, 해방 또는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획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삶을 낭비하지 않았고, 인간으로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인 담마를 발견한 기회를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 四念處) 수행

 

명상 수행의 대상은 자연이며, 자연의 네 가지 양상인 kaya(신), vedana(수), citta(심), dhamma(법)과, 이 네 가지 양상에 나타난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자연이며 순수하고, 단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성(dhamma-jāti)을 이해해야 하는데, 자연성은 자연의 법칙이며, 동시에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연과 그 법칙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살아있는 존재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을 우리의 최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자연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자연법칙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할 때, 우리의 삶은 조화와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1. 까야(kāya, 몸)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삶에 있어서 몸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몸은 마음을 위한 토대이고, 삶에 이익이 되도록 마음과 함께, 자신을 유지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준비된 몸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호흡을 조절하는 기술을 통해, 필요에 따라 까야(몸)를 통제하는 방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호흡을 조절하는 방법을 알면 많은 이익이 있는데, 첫째, 기분과 감정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 우리는 긴 호흡으로 화를 놓아버릴 수가 있습니다. 긴 호흡으로 화는 사라지게 되고, 걱정이 되거나, 복잡한 생각이 일어날 때, 걱정을 밀어내기 위해 더욱 긴 호흡을 합니다. 혹은 긴 호흡을 통해서 일련의 생각의 흐름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있는데, 긴 호흡이 원하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을 씻어내고, 더욱 질서 있고 정상적인 생각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까야(몸)에는 몸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몸을 조절하는 호흡이 포함되고, 이들은 또한 마음(찟따)으로 연결됩니다. 단지 건강의 측면에서도 호흡을 더 잘 알아야 하는데, 제대로 호흡하는 방법을 알면 건강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몸, 몸과 관련된 모든 것 –호흡, 감정, 건강– 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2. 웨다나(vedanā, 느낌)


느낌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면, 느낌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에게 느낌이 가장 중요하며, 느낌이 제멋대로 우리를 빙글빙글 돌게 만듭니다. 더욱 나아가서, 느낌은 전체 세계를 돌립니다. 느낌을 따라가면 인생이 빙글빙글 돌지만, 느낌을 바라보게 되면 인생이 똑바로 보입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어떤 느낌이든지, 우리가 모든 종류의 행위를 하도록 사주합니다. 모두가 즐거운 느낌을 뒤쫓고, 즐겁지 못한 느낌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므로, 그에 따라 느낌(vedana)은 전체 세계를 빙빙 돌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있는 느낌이 모든 새롭고, 이상한 발명품과, 인류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창조물의 원인입니다. 예술과 문화, 기술은 느낌을 위해서 발견되고, 생산되고, 느낌은 우리가 느낌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그러한 거대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느낌(웨다나)이 욕망의 원인이며, 느낌으로부터 원하는 마음이 나오고, 우리는 느낌을 따라갑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욕망에 따라 행위하고, 그에 따라 모든 종류의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돈을 추구하는 것조차도 느낌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것은 감각적인 것이거나, 또는 단지 편안하기를 원하는 일상적인 느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를 지배하는 것들을 알아야 하는데, 웨다나(느낌)는 엄청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낌을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느낌의 변덕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두카입니다. 우리는 무명(아윗자)에 갇혀서, 바르지 못한 웨다나(느낌)을 따라서 행동하게 됩니다. 동물들도 또한 느낌에 따라 이끌리고 강제되는데, 동물들의 모든 행위는, 단지 그들이 원하는 느낌을 찾고, 사냥하고, 뒤쫓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들이 원하는 느낌을 찾고, 사냥합니다. 웨다나는 모든 종류의 행위와 찾기의 원인이 되고, 모든 종류의 노력과 수고를 강제합니다. 사실상 그것들은 가장 심오한 방법으로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 독재자가 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느낌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통제할 수 없으면, 우리는 웨다나의 노예가 됩니다.

 

두 가지 종류의 웨다나가 있는데, 무명(avijjā)에 의해 조건 지어진 어리석은 느낌과, 바른 지식(vijjā)에 의해 조건 지어진 지혜로운 느낌입니다. 팟싸(감각적인 접촉)이 일어나는 순간에 우리가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느낌이 일어나고, 팟싸(촉)가 일어나는 순간에 우리가 현명하고 지혜롭다면, 지혜로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어리석은 느낌은 무지한 욕망 또는 갈애(taṇhā)를 일으키고, 지혜로운 느낌은 올바른 욕망, 즉 바른 방법으로 원하도록 이끌고, 그것은 지혜로운 느낌이 됩니다. 우리는 웨다나가 항상 지혜로운 느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느낌은 딴하(taṇhā), 즉 갈애를 일으키고, 지성적이지 못한 욕구를 뒤쫓도록 만듭니다. 갈애는 지혜로운 원함과 욕구마저 어리석은 욕망으로 바꿀 수도 있고, 어리석은 딴하(갈애)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거듭거듭 돌게 만들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갈애가 남아 있는 한, 그 모든 것에는 끝이 없고, 끝없이 오가고, 끝없는 발명과 조작, 사치스러운 삶을 위한 끝없는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웨다나(느낌)을 통제하는 이익은 엄청난 것이므로, 갈애가 어리석은 욕망과 원함을 휘젓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웨다나(느낌)에 관심을 두도록 해야 합니다.

 

3. 찟따(citta, 마음)


마음은 그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데, 생각하는 경우에는 찟따(citta), 대상을 인식하고, 느끼고, 경험하고, 아는 경우에는 마노(mano), 감각문에서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아는 기본적인 의식을 윈냐나(viññāṇa)라고 부릅니다. 찟따(마음)이 바르게 작동하면, 좋은 결과가 따르지만, 찟따가 바르게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통제하에 두어야 합니다. 마음을 통제한다는 것은, 마음을 억지로 조종한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탐(lobha)·진(dosa)·치(moha)와 감각적 욕망으로 물들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르게 길들이지 않으면, 마음은 바르지 못할 것이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세상이 존재하고, 마음이 없다면, 세상이 없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상의 지혜입니다.


4. 담마(dhamma, 법)


“나”를 구성하는 것과 “나”와 관련된 모든 것에는,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진리를 모르거나, 바르지 않게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은 바르지 못하게 되고, 이것은 문제를 만들고, 두카(괴로움)로 이끌 것입니다. 그런 지혜는 두 영역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형성된 것(상카라), 원인과 조건을 가진 것들과, 그와 반대로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 주제는 형이상학적인 용어인 “phenomenal(현상적)”과 “noumenal(본체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누머날(본체의)은 현상적인 것의 반대이며, 원리상, 둘은 하나의 쌍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현상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형성된 것이고, 무상(아니짜)의 진리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누머널(본체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형성된 것이 아니고, 아니짜(무상)가 아니라 니짜(항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상의 진리를 잘 알게 될 때까지 모든 것의 무상(아니짜)함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무상을 넘어서 항상(닛짜)하고, 닙바나(열반)라고 부르는 본체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진실-형성된 것과 형성되지 않은 것-을 이해하는 것이 극도로 중요하고, 이것이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담마 수행은 이 두 가지 진실을 알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바다와 파도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 생각, 사건들은 모두가 ’상카라(파도)‘입니다. 바람이 불면(조건) 일어나고, 바람이 멎으면(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고, 파도는 매 순간 모양이 변합니다(무상). 파도 밑의 거대한 바다는 어떨까요? 파도가 아무리 거세게 쳐도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 고요합니다. 파도에 집착하면 파도가 칠 때마다 울고 웃겠지만, 우리가 '바다'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어떤 파도가 와도 평온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란 파도(상카라)만 보며 헐떡이던 우리가, 사실은 파도 밑에 거대한 바다(열반)가 있음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명상 수행과 연기법(paṭicca-samuppāda)


명상 수행의 또 다른 혜택은 우리가 연기법(paṭicca-samuppāda)의 원리에 따라 수행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연기법의 이론은 매우 복잡하고 길지만, 연기법을 실제에 적용하는 것은 절묘하게 단순합니다. 실제에 있어 연기법은 촉(phassa)이 일어나는 순간에 사띠(sati,알아차림)를 두는 것이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팟싸(감각의 접촉)은 내부의 감각기관과 그에 상응하는 외부의 감각 객체, 적절한 알음알이(윈냐나)가 만나는 것인데, 단순히, 팟싸(촉)가 일어나는 순간에 사띠(알아차림)를 가짐으로써 연기법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조건 지어진 연기가 진행되기 전에 사띠(알아차림)가 촉이 일어나는 순간,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팟싸(촉)가 되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띠(알아차림)가 있다면, 그 촉(팟싸)은 무지한 느낌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고, 무지한 느낌이 어리석은 갈애(딴하)로 이끌지 않고, 바로 그 촉(팟싸)에서 모든 것이 멈출 것입니다. 또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의 핵심은 두카(괴로움)가 무지한 욕망(딴하)으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갈애(딴하)가 있다면, 틀림없이 두카(괴로움)가 있게 되므로, 사띠를 사용해서 갈애(딴하)를 멈추게 하고 잘라내면 거기에 두카(괴로움)는 없습니다. 이것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수행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입니다.

 

담마의 네 동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담마의 네 동지”라고 부르는 것을 얻게 되는데, 그 담마의 네 동지는 사띠(sati), 빤냐(paññā), 삼빠잔냐(sampajañña), 사마디(samādhi)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담마의 네 동지는 우리가 모든 위협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과 함께, 우리는 두카(괴로움)를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명상처 안이나 밖이든, 가정생활이든, 우리는 살아가는데 이 네 동지들을 이용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사띠(알아차림)을 가져야 합니다. 감각대상이 촉을 만들 때, 거기에 사띠가 있어서, 빤냐(지혜)를 불러옵니다. 빤냐가 도착하면, 빤냐는 상황에 따라 요구되는 지혜의 구체적인 적용인 삼빠잔냐(작용하는 지혜)로 전환됩니다. 그러면 사마디(집중)의 힘이 삼빠잔냐에 더해져서, 이들 네 동지들과 함께, 우리는 눈, 귀, 코, 혀, 몸과 마음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대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네 담마의 동지들은 능가할 수 없는 “수호천사”들이며, 신이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돌보고 보호합니다. 수행을 통해서, 담마의 네 동지들이 힘을 얻습니다.

 

망갈라숫따(Maṅgala Sutta,축복경)는 “아세-와나짜 발라낭, 빤디따난짜 세-와나(asevanā ca bālānaṃ, paṇḍitānañca sevanā)”하고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와 어울리지 말고, 지혜로운 자와 함께 하라는 뜻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은 물론 자만(māna), 시기(issā), 인색(macchariya)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탐, 진, 치, 자만심, 시기 질투, 인색함을 쓸어내고, 우리의 수호천사들인 담마의 네 동지, 사띠, 빤냐, 삼빠잔냐, 사마디를 확실하게 맞아들이면 축복과 해탈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 끝 -



* 본 법문 내용은 태국의 고승이신 아잔 붓다다사 스님의 가르침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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