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빳사나 수행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일곱 단계
기본 : 붓다의 실천심리학(수마나사라 스님)
부언 설명 : 아짠 빤냐와로 스님
(1) 계청정(戒淸淨, sīlavisuddhi) (제1청정)
◉ 수행의 시작점인 계청정 ◉
청정의 첫 번째는 계청정입니다. 계율·도덕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청정으로의 길(道)이 시작됩니다. 계율이라는 용어를 들은 것만으로도 처음부터 벽이 너무 높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율의 벽이 「높다」든가, 「낮다」고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주관입니다. 청정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맨 먼저 이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합니다. 계율·도덕이란 「어떻게 일상을 보내야 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감정에 지배되어 살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충동은 탐(貪)·진(瞋)·치(痴)입니다. 누구나 제멋대로, 거들먹거리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공격이 두렵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제멋대로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목적이 있다고 합시다. 공부해서 지식인이 되든가, 사회로 진출해서 일을 하든가, 스포츠맨이 되든가, 등입니다. 그 목적을 설정한 시점에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학교에 입학했다면 교칙을 지키고, 학생에 어울리는 생활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제멋대로나 건방짐은 통하지 않습니다. 회사에 입사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포츠맨이 되고자 하는 경우에도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놀아나며 생활한다면,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일상(日常)을 살아갈 것인가는 속세간적인 목적이든, 불교의 목적이든, 동일합니다. 그렇더라도 속세간과 다른 점은 있습니다.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온전히 교칙을 지키며 학생답게 생활하고 있어도 머리에 지식이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식사를 하고 운동으로 신체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어도 스포츠맨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불도의 경우는 도덕적인 생활방식이 기본조건입니다. 도덕적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지혜가 나타나고, 마음도 어느 정도 청정하게 됩니다. 도덕만으로 일체가 끝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도덕을 지킴으로써 감각적인 욕구(欲), 성냄(怒), 무지(無知)의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는 생활방식이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일반인의 마음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깨끗한 생활방식이 되어있습니다.
◉ 계청정(戒淸淨)의 분류 ◉
수지자(守持者)를 해탈하게 하는 계율의 항목에 의한 방호계(행위-정어와 정업에 대한 방호), 감각기관(根)의 방호 계(안, 이, 비, 설, 신, 의의 감각 기관에 대한 방호), 생계의 청정계(계율에 맞은 올바른 생활), 자구(資具)에 의지하는 계(음식, 주거, 의복, 약이라고 하는 4개의 필수품의 사용에 대한 관찰), 이상의 4가지 청정계(淸淨戒)를 계청정(戒淸淨)이라 합니다.
계청정은 수행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원에서는 거주하는 수행자들에게 선원의 규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규칙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계를 올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도, 사마디(삼매)를 얻기 위해서도, 선한 마음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도, 수행자의 알아차림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원에 거주하는 모든 분들은 자신의 신분에 맞는 최소한의 계를 지키는 것이 요구됩니다.
◉ 해탈에 불가결한 계율 ◉
계율이란 어떤 종교를 신앙할 경우에 지켜야 할 규칙이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는 해탈을 지향하는 가르침입니다.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규칙이 불교의 계율입니다. 해탈은 마음의 성장과 지혜의 개발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계율은 심리학적인 규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격향상을 목표로 계율을 지킵니다.
보통의 생명은 누구나 감정의 충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정의 근본은 무지(無知)와 갈애(渴愛)이다. 탐(貪), 진(瞋), 치(痴)로 나누기도 하고 1천5백 가지 번뇌(煩惱)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번뇌가 우리를 지배, 관리하고 있습니다. 번뇌의 종류에 의지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를 합니다. 그러므로 기분대로 살아가는 삶은 위험합니다. 어떤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감정에 지배되면 이성이 작동하지 못합니다. 감각적 욕구(欲), 성냄(怒), 질투 등의 감정이 솟구쳐 오르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악한 행위를 합니다.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뛰어난 지식인일지라도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솟구쳐 오르는 감정은 생각이나 타인의 설득으로 수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해탈에 이른 사람들은 감정(1천5백 번뇌)를 근절했습니다. 불교의 계율은 번뇌를 부수는 과정의 첫걸음입니다.
불교의 계율은 심리학적 실천방법이지 결코 종교적 관습, 의식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성냄이 솟구쳐 올랐다고 합시다. 그 감정이 마음과 몸을 지배합니다. 성냄이 사람에게 말을 시킵니다. 그때, 성실한 사회인으로서 말해서는 안 될 말을 뱉어버립니다. 또한 성냄이 행위를 시킵니다. 그때, 성실한 사회인으로서 행동해서는 안 되는 나쁜 행위를 저질러버립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율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악한 말을 하고 싶지만 하지 않기로 합니다. 자기를 제어합니다. 악한 말은 망어(妄語 거짓말), 조악어(粗惡語 난폭한 말), 이간어(離間語 소문내기), 기어(綺語 쓸데없는 말, 입발림 말) 등 4종류입니다.
감각적 욕구(欲)의 감정이 솟구쳐 오를 때도 성냄과 마찬가지로 자기제어를 합니다. 이것이 계율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실한 사회인으로서, 품격이 있는 인간으로서 살아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지의 감정이 솟구쳐 오르면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감정은 무지이므로 당연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선은 감각적 욕구(欲)와 성냄(怒)의 감정에 따르지 않도록 살아 봅니다. 그러면 무지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머리가 혼란한 상태에 빠졌을 때, 판단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 무엇에도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무지에 지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냉정한 기분이 회복될 때까지 묵묵히 있으면 됩니다. 품격을 추궁당하는 과오는 범하지 않고 마무리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마음상태(정신상태)를 체크하면서 삶의 방식을 제어하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삶입니다. 계율은 탐(貪), 진(瞋), 치(痴)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것으로 해탈에 이르는 도(道)가 출발합니다. 자신의 통제된 삶의 방식이 감정을 방해하면 감정이 약해져 갑니다. 이것이 불교심리학적인 계율의 설명이고 실천방법입니다.
◉ 계율항목의 존재 의의 ◉
계율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체크하는 능력을 누구나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율·규칙을 하나하나 항목으로 설정해서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면, 「살생하지 말라」라는 항목이 설정되어 있는데도, 어떤 사람에게 성냄이 솟구쳐 올랐다고 하자. 자신의 성난 감정을 알아차리지 않은 채, 상대만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살의(殺意)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규칙을 지켜야 하므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 멈춥니다. 그래서 솟구쳐 올랐던 성냄은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그 사람이 성냄에 의한 살의(殺意)가 아니라, 상대에게 모욕(侮辱)을 주고 싶다는 의지가 생겨났다고 하자. 이 경우는 「남에게 모욕(侮辱)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대응합니다. 그 사람이 그 규칙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죄를 범하지 않고 끝납니다. 품격은 지켜집니다.
이 절차를 생각하면 항목으로 만든 계율은 꽤나 귀찮은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탐, 진, 치의 감정이 솟아오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그에 맞는 계율의 항목을 설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끝없는 작업이 됩니다. 계율의 항목은 증가해 갑니다. 그 많은 규칙을 지키기는커녕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항목계율의 단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출가계율은 이와 같은 절차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음의 문제는 계율항목은 누가 설정하는가입니다. 누구에게 그 권리가 있을까요? 해탈을 목표로 하는 불교의 경우,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감정을 부수기 위해 계율항목을 설정하므로 감정을 죄다 부수어버린 사람은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계율항목을 정해줄 권리가 있습니다.
불교의 경우는 부처님에게 독점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이 된 성자일지라도 처음은 부처님의 제자이다. 지혜를 완성하여 번뇌를 근절한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항목은 불평 없이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비구가 부처님에게 반론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오염되기 때문에 행하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율을 지키지 않아도(범해도), 자신의 마음은 오염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일화가 실린 경전에서는 명확하게 기재하고 있지 않으나, 이 비구는 성행위의 금지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진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욕 없이 성행위가 가능할 수 없다」라고 부처님께서는 그 이론(異論)을 기각하셨습니다.
커다란 계율항목이 아닌 세세한 계율항목의 경우, 예를 들면 「뛰어서는 안 된다」 등은 마음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형편에 따라 세세한 계율을 무시하면 스승이신 부처님을 무시한, 모독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해탈의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을 반드시 지키게 되어있습니다.
기타 종교에서도 항목으로 정한 계율이 있습니다. 엄밀히 계율항목의 수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10계 등의 계율을 단언적으로 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종교가들은 마음대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서 규칙을 만듭니다.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종교조직의 조화가 흐트러져서 새로운 종파(分派)를 만듭니다.
사회도 계율항목을 정해두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이든 간에 그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정부도 법률이라는 계율항목을 정합니다. 또한 가족마다 가족의 규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학교에는 교칙이, 사회에는 사칙이 있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지위가 위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규칙은 사회의 질서와 번영을 기하기 위하여 정해진 것입니다. 이들의 규칙의 수도 무수합니다. 모두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어느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법률과 규칙을 준수하면서 그럭저럭 무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무수한 규칙을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라는 하나의 항목으로 훌륭하게 귀결됩니다. 현대적 언어로 환언하면 「마음의 번뇌를 부채질해서는 안 된다」 입니다.
◉ 계율은 부처님의 해결책 ◉
경전을 읽으면 부처님께서 마지못해 계율항목을 정하셨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계율항목이 없었던 시기에는 많은 제자들이 해탈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계율항목이 있으나 오히려 해탈에 이른 제자들의 수는 소수로 감소하였다」고 푸념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항목을 정하실 때마다 계율의 목적을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계속 되풀이해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단지 한 항목입니다. 계율의 목적은 번뇌가 적의를 드러내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이해해 두면 무수한 계율항목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붓다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에 「여래(如來)가 열반에 든 후, 사소한 계율을 무시해도 좋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로서는 사소한 계율이란 무엇인지를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기준은 없는 것입니다. 불제자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율을 위반(犯)하는 것도, 설하시지 않은 계율을 설정하는 것도, 붓다의 가르침을 쇠퇴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석가모니께서 충고하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계율의 개량(改良)도 하지 말고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항목을 앞으로도 모두 지켜야 한다.」고 이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 재가자의 계율 ◉
재가자의 계율을 어떨까요? 재가의 불교도도 해탈을 목표로 합니다. 불교를 실천해야 합니다. 게다가 동시에 재가생활도 영위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계율은 5항목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5계입니다. 수행실천을 하는 경우는 수행 중이므로 일단 재가생활을 중지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는 8계나 10계를 지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 품격이 있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정을 제어하고 있으므로 훌륭한 선(善)의 행위를 하게 됩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수행실천을 하지 않는 불교도도 재가계율을 지키는 노력을 합니다.
재가자의 계율이란 성실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종교적 특별한 행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계율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공경은 하지만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됩니다. 요컨대 지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번뇌의 현상입니다. 생명은 자신의 감정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감정대로 사는 것을 반사회적인 행동이 된다고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사회적인 생활방식을 취하면 이 세계에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인격자에게는 계율이 필요 없다 ◉
부처님께서 계율의 항목을 정하신 것은 깨달음을 이룬지 20년이 경과한 이후부터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55세였습니다. 그때까지는 계율의 항목이 하나도 없는 채로 불교가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렇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해탈에 이르렀습니다. 출가 해탈자는 말할 것도 없고 깨달음에 이른 재가 해탈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 현상도 이해해 두면 좋겠습니다. 초창기에 부처님을 만났던 분들은 모두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들이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그다지 알려져있지 않았고, 게다가 그 내용도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부처님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최초의 제자들은 불제자가 되기 전부터 출가자였습니다. 그분들이 속해 있던 종교조직의 행의작법(行儀作法 예의범절) 등도 이미 몸에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의바르게 하라. 살생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라. 부정한 행위를 하지 말라.」 등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생활방편으로 출가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정신을 청정히 하는 데에 흥미가 없었으므로 부처님을 찾아뵙지도 않았습니다.
이 상황으로부터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규칙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사회의 질서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생명에 폐를 끼치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있는 오염을 문제 삼고 있다면, 해탈에 이르는 첫걸음인 계율의 단계는 합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출가계율은 4종류 ◉
출가자의 경우에는 5계, 8계 등의 계율이 아닙니다. 전면적으로 마음의 감정을 공격해야 하므로 계율의 항목은 방대합니다. 그러나 그 방대한 항목은 4종류로 분류할 수 있으므로 지키는 데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습니다.
출가계율 ① pātimokkha-saṃvara-sīla 「완전하게 방호(防護)하는 계」
첫 번째는 pātimokkha-saṃvara-sīla(빠-띠목카 상와라 실-라)이다. Pātimokkha는 「완전하게 방호(防護 : 위험 따위를 지켜 보호함)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계율 항목을 지키면 수행자가 해탈에 이를 때까지 완전하게 방호(防護)해 줍니다. 번뇌가 이빨을 드러내어 마음을 오염시키고 수행을 중단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빨리 율장의 비구계 227항목의 계율이 pātimokkha-saṃvara–sīla가 됩니다. 출가하면 출가자에게 맨 먼저 pātimokkha-saṃvara-sīla를 지키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재가자는 그것을 배워도 지식이 증가할 뿐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출가계율 ② indriya-saṃvara-sīla 「6근을 제어하는 계」
두 번째는 indriya-saṃvara-sīla(인드리야 상와라 실-라)라고 합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는 6근(根)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보더라도 마음속에서 욕구(欲)와 성냄(怒)이 생겨나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소리를 듣더라도 마음속에서 욕구와 성냄이 생겨나지 않게, 혼란하지 않게 안내합니다. 밥을 먹더라도 그 맛으로 욕구나 성냄이 생겨나지 않게 안내합니다. 마음의 안정을 지킵니다. 그런 계율입니다.
이 6근의 제어는 수행실천에 매진하는 재가자들도 어느 정도 주의해야 할 영역입니다. 수행 중에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마음이 흔들려 버리면, 유혹당하면, 수행을 중단할 처지가 됩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으로 들어오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이라는 정보에 의해 마음은 매우 간단히 욕구나 성냄을 일으키고 맙니다. 감정이 이빨을 드러내게 됩니다. 재가자들도 해탈을 목표로 해서 수행하는 경우는 수행 중에 이 계율을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아차림의 실천을 하고 있다면 자연히 이 계율을 지키게 됩니다.
출가계율 ③ ājīva-pārisuddhi-sīla 「생활 청정의 계」
세 번째는 ājīva-pārisuddhi-sīla(아-지-와 빠-리숫디 실-라)입니다. 「생활의 청정이라는 계」라고 번역합니다. 생활과 관계있는 계율입니다. 생활에 의해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오염되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설명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해 봅시다. 재가자들은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일로 죄를 짓게 된다면, 법률을 위반하게 된다면, 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가 된다면, 간단히 말해서 「악행을 해서 돈을 벌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약을 판매하는 행위, 무기를 밀수하여 판매하는 행위, 엉터리 약을 요란하게 선전하며 판매하는 행위 등입니다.
그럼 출가자의 일은 무엇인가? 출가자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을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행위입니다. 해탈을 목적으로 출가했다면 삶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의 목적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해탈에 이르기까지 살아있어야 합니다. 죽음은 해탈이 아닙니다. 죽기 전에 번뇌를 근절하여 해탈에 이르러야 합니다. 해탈을 목적으로 출가한 사람은 그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살아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고 싶다는 생존욕은 아닙니다. 단지 삶에 부응하지 않고 살아있어야 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입을 옷가지와 먹을 음식물이 필요합니다. 재가자는 그것들을 일을 해서 얻습니다. 그에 반해 일을 하지 않는 출가자는 재가자의 보시(布施)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나 보시에의 의존이 일을 하는 것보다 간단하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파괴를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삶은 다른 생명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입니다. 이것도 피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과 다른 생명에 대한 파괴행위·해코지가 됩니다. 그러나 출가자는 이 모순으로부터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탁발(托鉢)을 나가서 이미 조리한 남은 음식물을 얻는다면 그 출가자가 먹은 분량만큼은 자연파괴를 하지 않게 됩니다. 나무 아래나 빈집에서 밤을 보낸다면 주거를 만들기 위해 자연을 파괴할 필요가 없습니다. 버려진 헌 옷을 주워서 기워 입으면 자연을 파괴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병이 나면 송아지의 오줌을 받아서 마시면 약을 조합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출가자의 기본입니다.
「반드시 이런 식으로 사시오」라는 강제는 아닙니다. 그래서는 불도(佛道)의 중도(中道)가 무너지고 극단적인 도(道)라고 일컫는 고행(苦行)의 도(道)가 됩니다. 어디까지나 기본입니다. 출가자는 이 기본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만약 재가신자가 자신들의 덕을 쌓기 위해, 또한 출가자의 수행에 협력하기 위해 요리를 해서 보시하게 되면, 그것은 자애를 근거로 해서 받습니다. 재가자가 의복을 마련해 드린다면, 자애를 근거로 해서 받습니다. 살 곳을 마련해 준다면, 혹은 병에 걸렸을 때 약을 준다면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행위에 의해서 재가자는 높은 덕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받을 때 출가자는 무집착의 자애로 행해야 합니다. 자애의 마음 없이 「다행이다. 좋은 것을 받았다.」라는 마음이 되면 마음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번뇌가 으르렁거리며 그것으로 생계를 세우게 되면 오염된 생활방식이 됩니다.
율장에는 그에 대한 많은 계율항목이 있습니다. 보시를 목적으로 설법하는 행위, 보시를 받기 위해 기도하는 행위, 자신이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과장해서 신자(信者)의 마음을 끄는 행위, 재가자 간의 심부름을 해주는 행위 등은 금지입니다. 요컨대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나에게 보시가 들어오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금지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출가비구들이 괴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가의 불교도들도 이성이 있는 훌륭한 분들입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품격이 있는 생활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재가자들은 출가자가 고생을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기분 좋게, 또한 편히 수행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출가자가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를 가르치는 전도활동을 마음 가벼이 할 수 있도록 인색하지 않게 협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출가자는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항상 무집착의 마음으로 보시를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애의 마음이 결여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복(裕福)한 신자들이 있다. 그 덕택으로 유복한 생활이 가능하다」라는 마음이 되면 ājīva-pārisuddhi-sīla를 파(破)한 것이 됩니다. 항상 무집착의 정진을 유지해야 합니다. 결국 보시에 의지해서 생활하든, 재가자가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든, 양쪽 모두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출가계율 ④ paccaya-sannissita-sīla 「자구(資具)에 의지하는 계」
네 번째는 paccaya-sannissita-sīla(빳짜야 산닛시따 실-라)입니다. 「자구(資具)에 의지(依支)하는 계」로 번역되고 있으나 「자구(資具)에 관한 계」라고 이해해 둡시다. 자구(資具)란 의(衣), 식(食), 주(住), 약(藥)과 관계가 있습니다. 재가자, 출가자를 불문하고 연명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4가지입니다. 속세간에서는 자구(資具)를 얻는 행위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음식문화는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폭 넓습니다. 옷이나 액세서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거도 화려한 건축문화에 이르기까지 폭주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의 발전에서도 전문가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폭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욕구(欲)는 채워지지 않는다.」에 있습니다. 모두가 욕구(欲)를 충족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이 마르면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해집니다. 그러므로 끝없는 자연파괴, 생명파괴의 생활방식이 되어버립니다.
속세간은 「살고 싶다」는 생존욕의 충동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출가자는 이 올가미에 걸리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살고 싶다는 생존욕을 끊고 해탈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채울 수 없는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어리석은 노력을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資具(자구)에 대하여 최저의 기준을 마음에 철저하게 입력하는 것입니다. 이 최저 기준은 앞에서 논한 ājīva-pārisuddhi- sīla를 해설할 때에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저의 기준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의, 식, 주, 약을 필요로 하는 의미도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출가자는 식사하는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출가자 누구나 암기하는 경전문구가 있습니다. 「체력을 증진하기 위함이 아니다. 식욕에 부응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름다워지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공복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함이다. 수행에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
의복을 입을 때마다 염송해야 하는 경전문구가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모기·곤충·파리·바람·햇빛 등에 닿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 이 옷을 입습니다.」
의자, 침대, 거주처 등을 사용할 때에 염하는 문장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단지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라는 항목을 「기후변동의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라는 문장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먹는 음식물이나 입는 옷 등은 매우 간단히 번뇌를 자극합니다. 자칫 부주의하면 잠자고 있는 번뇌가 이빨을 드러내고 폭주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자구(資具)를 사용할 때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저기준의 문장을 마음속으로 염송합니다.
이 계율은 재가자에게는 관계없습니다. 출가자가 염송하는 경전문구를 읊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해 두면 생활로 인해 날마다 일어나는 스트레스가 없어지게 됩니다. 재가생활의 기준에 넘치는 여분의 것을 취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으면, 경쟁이 격렬한 이 세계에서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계청정의 완성 ◉
계청정의 경우, 재가자들은 5계, 8계, 10계 등을 배우면 충분합니다. 출가자는 4종류의 계율을 지킵니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불문하고 계율을 지키는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킨다고 해서 번뇌가 근절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지 않는, 도덕을 경시하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생활방식은 짐승의 생활방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번뇌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계율을 지킵니다. 마음을 청정하기 유지하기 위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율을 지킵니다. 때때로 이빨을 드러내고자 하는 번뇌를 그때그때 틀어막아 제압하기 위해 계율을 지킵니다.
마음에 번뇌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계를 지키는 것(持戒)은 초심자에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천해 보면 마음이 안정되어 갑니다. 도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생활방식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평온하게 되면 계청정은 완성됩니다.
해탈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주의하며 살고 있어도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밤낮으로「참회(懺悔)」를 합니다. 그날에 잘못을 범하든, 범하지 않던 상관없습니다. 부주의로 어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버릇이 되도록 참회를 하는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110
◈ 위빳사나 수행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일곱 단계
기본 : 붓다의 실천심리학(수마나사라 스님)
부언 설명 : 아짠 빤냐와로 스님
(1) 계청정(戒淸淨, sīlavisuddhi) (제1청정)
◉ 수행의 시작점인 계청정 ◉
청정의 첫 번째는 계청정입니다. 계율·도덕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청정으로의 길(道)이 시작됩니다. 계율이라는 용어를 들은 것만으로도 처음부터 벽이 너무 높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율의 벽이 「높다」든가, 「낮다」고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주관입니다. 청정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맨 먼저 이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합니다. 계율·도덕이란 「어떻게 일상을 보내야 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감정에 지배되어 살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충동은 탐(貪)·진(瞋)·치(痴)입니다. 누구나 제멋대로, 거들먹거리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공격이 두렵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제멋대로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목적이 있다고 합시다. 공부해서 지식인이 되든가, 사회로 진출해서 일을 하든가, 스포츠맨이 되든가, 등입니다. 그 목적을 설정한 시점에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학교에 입학했다면 교칙을 지키고, 학생에 어울리는 생활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제멋대로나 건방짐은 통하지 않습니다. 회사에 입사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포츠맨이 되고자 하는 경우에도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놀아나며 생활한다면,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일상(日常)을 살아갈 것인가는 속세간적인 목적이든, 불교의 목적이든, 동일합니다. 그렇더라도 속세간과 다른 점은 있습니다.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온전히 교칙을 지키며 학생답게 생활하고 있어도 머리에 지식이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식사를 하고 운동으로 신체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어도 스포츠맨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불도의 경우는 도덕적인 생활방식이 기본조건입니다. 도덕적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지혜가 나타나고, 마음도 어느 정도 청정하게 됩니다. 도덕만으로 일체가 끝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도덕을 지킴으로써 감각적인 욕구(欲), 성냄(怒), 무지(無知)의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는 생활방식이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일반인의 마음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깨끗한 생활방식이 되어있습니다.
◉ 계청정(戒淸淨)의 분류 ◉
수지자(守持者)를 해탈하게 하는 계율의 항목에 의한 방호계(행위-정어와 정업에 대한 방호), 감각기관(根)의 방호 계(안, 이, 비, 설, 신, 의의 감각 기관에 대한 방호), 생계의 청정계(계율에 맞은 올바른 생활), 자구(資具)에 의지하는 계(음식, 주거, 의복, 약이라고 하는 4개의 필수품의 사용에 대한 관찰), 이상의 4가지 청정계(淸淨戒)를 계청정(戒淸淨)이라 합니다.
계청정은 수행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원에서는 거주하는 수행자들에게 선원의 규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규칙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계를 올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도, 사마디(삼매)를 얻기 위해서도, 선한 마음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도, 수행자의 알아차림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원에 거주하는 모든 분들은 자신의 신분에 맞는 최소한의 계를 지키는 것이 요구됩니다.
◉ 해탈에 불가결한 계율 ◉
계율이란 어떤 종교를 신앙할 경우에 지켜야 할 규칙이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는 해탈을 지향하는 가르침입니다.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규칙이 불교의 계율입니다. 해탈은 마음의 성장과 지혜의 개발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계율은 심리학적인 규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격향상을 목표로 계율을 지킵니다.
보통의 생명은 누구나 감정의 충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정의 근본은 무지(無知)와 갈애(渴愛)이다. 탐(貪), 진(瞋), 치(痴)로 나누기도 하고 1천5백 가지 번뇌(煩惱)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번뇌가 우리를 지배, 관리하고 있습니다. 번뇌의 종류에 의지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를 합니다. 그러므로 기분대로 살아가는 삶은 위험합니다. 어떤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감정에 지배되면 이성이 작동하지 못합니다. 감각적 욕구(欲), 성냄(怒), 질투 등의 감정이 솟구쳐 오르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악한 행위를 합니다.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뛰어난 지식인일지라도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솟구쳐 오르는 감정은 생각이나 타인의 설득으로 수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해탈에 이른 사람들은 감정(1천5백 번뇌)를 근절했습니다. 불교의 계율은 번뇌를 부수는 과정의 첫걸음입니다.
불교의 계율은 심리학적 실천방법이지 결코 종교적 관습, 의식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성냄이 솟구쳐 올랐다고 합시다. 그 감정이 마음과 몸을 지배합니다. 성냄이 사람에게 말을 시킵니다. 그때, 성실한 사회인으로서 말해서는 안 될 말을 뱉어버립니다. 또한 성냄이 행위를 시킵니다. 그때, 성실한 사회인으로서 행동해서는 안 되는 나쁜 행위를 저질러버립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율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악한 말을 하고 싶지만 하지 않기로 합니다. 자기를 제어합니다. 악한 말은 망어(妄語 거짓말), 조악어(粗惡語 난폭한 말), 이간어(離間語 소문내기), 기어(綺語 쓸데없는 말, 입발림 말) 등 4종류입니다.
감각적 욕구(欲)의 감정이 솟구쳐 오를 때도 성냄과 마찬가지로 자기제어를 합니다. 이것이 계율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실한 사회인으로서, 품격이 있는 인간으로서 살아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지의 감정이 솟구쳐 오르면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감정은 무지이므로 당연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선은 감각적 욕구(欲)와 성냄(怒)의 감정에 따르지 않도록 살아 봅니다. 그러면 무지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머리가 혼란한 상태에 빠졌을 때, 판단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 무엇에도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무지에 지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냉정한 기분이 회복될 때까지 묵묵히 있으면 됩니다. 품격을 추궁당하는 과오는 범하지 않고 마무리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마음상태(정신상태)를 체크하면서 삶의 방식을 제어하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삶입니다. 계율은 탐(貪), 진(瞋), 치(痴)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것으로 해탈에 이르는 도(道)가 출발합니다. 자신의 통제된 삶의 방식이 감정을 방해하면 감정이 약해져 갑니다. 이것이 불교심리학적인 계율의 설명이고 실천방법입니다.
◉ 계율항목의 존재 의의 ◉
계율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체크하는 능력을 누구나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율·규칙을 하나하나 항목으로 설정해서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면, 「살생하지 말라」라는 항목이 설정되어 있는데도, 어떤 사람에게 성냄이 솟구쳐 올랐다고 하자. 자신의 성난 감정을 알아차리지 않은 채, 상대만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살의(殺意)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규칙을 지켜야 하므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 멈춥니다. 그래서 솟구쳐 올랐던 성냄은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그 사람이 성냄에 의한 살의(殺意)가 아니라, 상대에게 모욕(侮辱)을 주고 싶다는 의지가 생겨났다고 하자. 이 경우는 「남에게 모욕(侮辱)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대응합니다. 그 사람이 그 규칙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죄를 범하지 않고 끝납니다. 품격은 지켜집니다.
이 절차를 생각하면 항목으로 만든 계율은 꽤나 귀찮은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탐, 진, 치의 감정이 솟아오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그에 맞는 계율의 항목을 설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끝없는 작업이 됩니다. 계율의 항목은 증가해 갑니다. 그 많은 규칙을 지키기는커녕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항목계율의 단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출가계율은 이와 같은 절차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음의 문제는 계율항목은 누가 설정하는가입니다. 누구에게 그 권리가 있을까요? 해탈을 목표로 하는 불교의 경우,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감정을 부수기 위해 계율항목을 설정하므로 감정을 죄다 부수어버린 사람은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계율항목을 정해줄 권리가 있습니다.
불교의 경우는 부처님에게 독점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이 된 성자일지라도 처음은 부처님의 제자이다. 지혜를 완성하여 번뇌를 근절한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항목은 불평 없이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비구가 부처님에게 반론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오염되기 때문에 행하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율을 지키지 않아도(범해도), 자신의 마음은 오염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일화가 실린 경전에서는 명확하게 기재하고 있지 않으나, 이 비구는 성행위의 금지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진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욕 없이 성행위가 가능할 수 없다」라고 부처님께서는 그 이론(異論)을 기각하셨습니다.
커다란 계율항목이 아닌 세세한 계율항목의 경우, 예를 들면 「뛰어서는 안 된다」 등은 마음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형편에 따라 세세한 계율을 무시하면 스승이신 부처님을 무시한, 모독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해탈의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을 반드시 지키게 되어있습니다.
기타 종교에서도 항목으로 정한 계율이 있습니다. 엄밀히 계율항목의 수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10계 등의 계율을 단언적으로 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종교가들은 마음대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서 규칙을 만듭니다.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종교조직의 조화가 흐트러져서 새로운 종파(分派)를 만듭니다.
사회도 계율항목을 정해두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이든 간에 그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정부도 법률이라는 계율항목을 정합니다. 또한 가족마다 가족의 규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학교에는 교칙이, 사회에는 사칙이 있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지위가 위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규칙은 사회의 질서와 번영을 기하기 위하여 정해진 것입니다. 이들의 규칙의 수도 무수합니다. 모두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어느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법률과 규칙을 준수하면서 그럭저럭 무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무수한 규칙을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라는 하나의 항목으로 훌륭하게 귀결됩니다. 현대적 언어로 환언하면 「마음의 번뇌를 부채질해서는 안 된다」 입니다.
◉ 계율은 부처님의 해결책 ◉
경전을 읽으면 부처님께서 마지못해 계율항목을 정하셨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계율항목이 없었던 시기에는 많은 제자들이 해탈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계율항목이 있으나 오히려 해탈에 이른 제자들의 수는 소수로 감소하였다」고 푸념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항목을 정하실 때마다 계율의 목적을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계속 되풀이해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단지 한 항목입니다. 계율의 목적은 번뇌가 적의를 드러내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이해해 두면 무수한 계율항목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붓다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에 「여래(如來)가 열반에 든 후, 사소한 계율을 무시해도 좋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로서는 사소한 계율이란 무엇인지를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기준은 없는 것입니다. 불제자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율을 위반(犯)하는 것도, 설하시지 않은 계율을 설정하는 것도, 붓다의 가르침을 쇠퇴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석가모니께서 충고하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계율의 개량(改良)도 하지 말고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항목을 앞으로도 모두 지켜야 한다.」고 이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 재가자의 계율 ◉
재가자의 계율을 어떨까요? 재가의 불교도도 해탈을 목표로 합니다. 불교를 실천해야 합니다. 게다가 동시에 재가생활도 영위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계율은 5항목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5계입니다. 수행실천을 하는 경우는 수행 중이므로 일단 재가생활을 중지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는 8계나 10계를 지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 품격이 있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정을 제어하고 있으므로 훌륭한 선(善)의 행위를 하게 됩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수행실천을 하지 않는 불교도도 재가계율을 지키는 노력을 합니다.
재가자의 계율이란 성실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종교적 특별한 행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계율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공경은 하지만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됩니다. 요컨대 지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번뇌의 현상입니다. 생명은 자신의 감정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감정대로 사는 것을 반사회적인 행동이 된다고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사회적인 생활방식을 취하면 이 세계에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인격자에게는 계율이 필요 없다 ◉
부처님께서 계율의 항목을 정하신 것은 깨달음을 이룬지 20년이 경과한 이후부터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55세였습니다. 그때까지는 계율의 항목이 하나도 없는 채로 불교가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렇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해탈에 이르렀습니다. 출가 해탈자는 말할 것도 없고 깨달음에 이른 재가 해탈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 현상도 이해해 두면 좋겠습니다. 초창기에 부처님을 만났던 분들은 모두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들이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그다지 알려져있지 않았고, 게다가 그 내용도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부처님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최초의 제자들은 불제자가 되기 전부터 출가자였습니다. 그분들이 속해 있던 종교조직의 행의작법(行儀作法 예의범절) 등도 이미 몸에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의바르게 하라. 살생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라. 부정한 행위를 하지 말라.」 등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생활방편으로 출가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정신을 청정히 하는 데에 흥미가 없었으므로 부처님을 찾아뵙지도 않았습니다.
이 상황으로부터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규칙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사회의 질서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생명에 폐를 끼치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있는 오염을 문제 삼고 있다면, 해탈에 이르는 첫걸음인 계율의 단계는 합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출가계율은 4종류 ◉
출가자의 경우에는 5계, 8계 등의 계율이 아닙니다. 전면적으로 마음의 감정을 공격해야 하므로 계율의 항목은 방대합니다. 그러나 그 방대한 항목은 4종류로 분류할 수 있으므로 지키는 데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습니다.
출가계율 ① pātimokkha-saṃvara-sīla 「완전하게 방호(防護)하는 계」
첫 번째는 pātimokkha-saṃvara-sīla(빠-띠목카 상와라 실-라)이다. Pātimokkha는 「완전하게 방호(防護 : 위험 따위를 지켜 보호함)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계율 항목을 지키면 수행자가 해탈에 이를 때까지 완전하게 방호(防護)해 줍니다. 번뇌가 이빨을 드러내어 마음을 오염시키고 수행을 중단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빨리 율장의 비구계 227항목의 계율이 pātimokkha-saṃvara–sīla가 됩니다. 출가하면 출가자에게 맨 먼저 pātimokkha-saṃvara-sīla를 지키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재가자는 그것을 배워도 지식이 증가할 뿐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출가계율 ② indriya-saṃvara-sīla 「6근을 제어하는 계」
두 번째는 indriya-saṃvara-sīla(인드리야 상와라 실-라)라고 합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는 6근(根)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보더라도 마음속에서 욕구(欲)와 성냄(怒)이 생겨나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소리를 듣더라도 마음속에서 욕구와 성냄이 생겨나지 않게, 혼란하지 않게 안내합니다. 밥을 먹더라도 그 맛으로 욕구나 성냄이 생겨나지 않게 안내합니다. 마음의 안정을 지킵니다. 그런 계율입니다.
이 6근의 제어는 수행실천에 매진하는 재가자들도 어느 정도 주의해야 할 영역입니다. 수행 중에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마음이 흔들려 버리면, 유혹당하면, 수행을 중단할 처지가 됩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으로 들어오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이라는 정보에 의해 마음은 매우 간단히 욕구나 성냄을 일으키고 맙니다. 감정이 이빨을 드러내게 됩니다. 재가자들도 해탈을 목표로 해서 수행하는 경우는 수행 중에 이 계율을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아차림의 실천을 하고 있다면 자연히 이 계율을 지키게 됩니다.
출가계율 ③ ājīva-pārisuddhi-sīla 「생활 청정의 계」
세 번째는 ājīva-pārisuddhi-sīla(아-지-와 빠-리숫디 실-라)입니다. 「생활의 청정이라는 계」라고 번역합니다. 생활과 관계있는 계율입니다. 생활에 의해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오염되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설명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해 봅시다. 재가자들은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일로 죄를 짓게 된다면, 법률을 위반하게 된다면, 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가 된다면, 간단히 말해서 「악행을 해서 돈을 벌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약을 판매하는 행위, 무기를 밀수하여 판매하는 행위, 엉터리 약을 요란하게 선전하며 판매하는 행위 등입니다.
그럼 출가자의 일은 무엇인가? 출가자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을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행위입니다. 해탈을 목적으로 출가했다면 삶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의 목적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해탈에 이르기까지 살아있어야 합니다. 죽음은 해탈이 아닙니다. 죽기 전에 번뇌를 근절하여 해탈에 이르러야 합니다. 해탈을 목적으로 출가한 사람은 그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살아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고 싶다는 생존욕은 아닙니다. 단지 삶에 부응하지 않고 살아있어야 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입을 옷가지와 먹을 음식물이 필요합니다. 재가자는 그것들을 일을 해서 얻습니다. 그에 반해 일을 하지 않는 출가자는 재가자의 보시(布施)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나 보시에의 의존이 일을 하는 것보다 간단하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파괴를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삶은 다른 생명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입니다. 이것도 피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과 다른 생명에 대한 파괴행위·해코지가 됩니다. 그러나 출가자는 이 모순으로부터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탁발(托鉢)을 나가서 이미 조리한 남은 음식물을 얻는다면 그 출가자가 먹은 분량만큼은 자연파괴를 하지 않게 됩니다. 나무 아래나 빈집에서 밤을 보낸다면 주거를 만들기 위해 자연을 파괴할 필요가 없습니다. 버려진 헌 옷을 주워서 기워 입으면 자연을 파괴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병이 나면 송아지의 오줌을 받아서 마시면 약을 조합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출가자의 기본입니다.
「반드시 이런 식으로 사시오」라는 강제는 아닙니다. 그래서는 불도(佛道)의 중도(中道)가 무너지고 극단적인 도(道)라고 일컫는 고행(苦行)의 도(道)가 됩니다. 어디까지나 기본입니다. 출가자는 이 기본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만약 재가신자가 자신들의 덕을 쌓기 위해, 또한 출가자의 수행에 협력하기 위해 요리를 해서 보시하게 되면, 그것은 자애를 근거로 해서 받습니다. 재가자가 의복을 마련해 드린다면, 자애를 근거로 해서 받습니다. 살 곳을 마련해 준다면, 혹은 병에 걸렸을 때 약을 준다면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행위에 의해서 재가자는 높은 덕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받을 때 출가자는 무집착의 자애로 행해야 합니다. 자애의 마음 없이 「다행이다. 좋은 것을 받았다.」라는 마음이 되면 마음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번뇌가 으르렁거리며 그것으로 생계를 세우게 되면 오염된 생활방식이 됩니다.
율장에는 그에 대한 많은 계율항목이 있습니다. 보시를 목적으로 설법하는 행위, 보시를 받기 위해 기도하는 행위, 자신이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과장해서 신자(信者)의 마음을 끄는 행위, 재가자 간의 심부름을 해주는 행위 등은 금지입니다. 요컨대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나에게 보시가 들어오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금지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출가비구들이 괴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가의 불교도들도 이성이 있는 훌륭한 분들입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품격이 있는 생활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재가자들은 출가자가 고생을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기분 좋게, 또한 편히 수행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출가자가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를 가르치는 전도활동을 마음 가벼이 할 수 있도록 인색하지 않게 협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출가자는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항상 무집착의 마음으로 보시를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애의 마음이 결여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복(裕福)한 신자들이 있다. 그 덕택으로 유복한 생활이 가능하다」라는 마음이 되면 ājīva-pārisuddhi-sīla를 파(破)한 것이 됩니다. 항상 무집착의 정진을 유지해야 합니다. 결국 보시에 의지해서 생활하든, 재가자가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든, 양쪽 모두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출가계율 ④ paccaya-sannissita-sīla 「자구(資具)에 의지하는 계」
네 번째는 paccaya-sannissita-sīla(빳짜야 산닛시따 실-라)입니다. 「자구(資具)에 의지(依支)하는 계」로 번역되고 있으나 「자구(資具)에 관한 계」라고 이해해 둡시다. 자구(資具)란 의(衣), 식(食), 주(住), 약(藥)과 관계가 있습니다. 재가자, 출가자를 불문하고 연명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4가지입니다. 속세간에서는 자구(資具)를 얻는 행위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음식문화는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폭 넓습니다. 옷이나 액세서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거도 화려한 건축문화에 이르기까지 폭주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의 발전에서도 전문가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폭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욕구(欲)는 채워지지 않는다.」에 있습니다. 모두가 욕구(欲)를 충족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이 마르면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해집니다. 그러므로 끝없는 자연파괴, 생명파괴의 생활방식이 되어버립니다.
속세간은 「살고 싶다」는 생존욕의 충동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출가자는 이 올가미에 걸리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살고 싶다는 생존욕을 끊고 해탈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채울 수 없는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어리석은 노력을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資具(자구)에 대하여 최저의 기준을 마음에 철저하게 입력하는 것입니다. 이 최저 기준은 앞에서 논한 ājīva-pārisuddhi- sīla를 해설할 때에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저의 기준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의, 식, 주, 약을 필요로 하는 의미도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출가자는 식사하는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출가자 누구나 암기하는 경전문구가 있습니다. 「체력을 증진하기 위함이 아니다. 식욕에 부응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름다워지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공복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함이다. 수행에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
의복을 입을 때마다 염송해야 하는 경전문구가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모기·곤충·파리·바람·햇빛 등에 닿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 이 옷을 입습니다.」
의자, 침대, 거주처 등을 사용할 때에 염하는 문장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단지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라는 항목을 「기후변동의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라는 문장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먹는 음식물이나 입는 옷 등은 매우 간단히 번뇌를 자극합니다. 자칫 부주의하면 잠자고 있는 번뇌가 이빨을 드러내고 폭주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자구(資具)를 사용할 때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저기준의 문장을 마음속으로 염송합니다.
이 계율은 재가자에게는 관계없습니다. 출가자가 염송하는 경전문구를 읊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해 두면 생활로 인해 날마다 일어나는 스트레스가 없어지게 됩니다. 재가생활의 기준에 넘치는 여분의 것을 취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으면, 경쟁이 격렬한 이 세계에서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계청정의 완성 ◉
계청정의 경우, 재가자들은 5계, 8계, 10계 등을 배우면 충분합니다. 출가자는 4종류의 계율을 지킵니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불문하고 계율을 지키는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킨다고 해서 번뇌가 근절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지 않는, 도덕을 경시하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생활방식은 짐승의 생활방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번뇌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계율을 지킵니다. 마음을 청정하기 유지하기 위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율을 지킵니다. 때때로 이빨을 드러내고자 하는 번뇌를 그때그때 틀어막아 제압하기 위해 계율을 지킵니다.
마음에 번뇌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계를 지키는 것(持戒)은 초심자에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천해 보면 마음이 안정되어 갑니다. 도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생활방식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평온하게 되면 계청정은 완성됩니다.
해탈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주의하며 살고 있어도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밤낮으로「참회(懺悔)」를 합니다. 그날에 잘못을 범하든, 범하지 않던 상관없습니다. 부주의로 어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버릇이 되도록 참회를 하는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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