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완전한 고요로 인도된다

사깜마
2024-10-20
조회수 80

◈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완전한 고요로 인도된다.

(인오선원 개원기념법회 법문교재 20240331)

 

◎ 수행하는 자에게는 지혜가 나타난다.

 

사람은 계획을 세워 자신의 의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대상으로부터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삶의 방법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생존욕구와 두려움에 강요당해 힘든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해결책으로서, 몸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도록 추천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불교의 수행입니다. 「수행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수행을 실천하면 색성향미촉법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상황이 변해갑니다.

 

비유하면, 사람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 사람은 강위에 떠있는 뗏목을 찾아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어쩔 수 없이 흐르게 되고 있던 상황이 조금 바뀝니다. 자신이 살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생명은 윤회라고 하는 급류에 휩쓸려 흐르고 있습니다. 수행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떠있는 뗏목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뗏목에 매달렸다고 해도 아직 완벽히 안전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냈을 뿐입니다. 살기를 기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뗏목과 손발을 잘 사용해 언덕에 잘 도착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정진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담마빠다에 jhāya bhikkhu mā pamādo(자-야 빅쿠 마- 빠마-도-)라는 빨리어가 있습니다.

수행을 나타내는 말은 Jhāna(자-나) 입니다. Jhāna(자-나)는 선정이라고 번역됩니다. 동사로써 사용하는 경우는 「선정을 만드세요」라고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이 게의 경우는 「수행을 실천해주세요」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사마타 명상으로 선정을 만드세요」라고 이해하면 의미가 다릅니다.

 

「비구들이여! 수행해 주세요. 방일하게 빠지는 것을 그만두세요.」라는 의미입니다.

 

비유를 사용하면, 「뗏목에 매달리세요. 그리고 손발을 능숙하게 사용해서 뗏목을 언덕에 도달하도록 이끄세요」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비록 뗏목을 붙잡았다고 해도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방일한 상태로 있다면 급류에 휩쓸리게 되어 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실천하는 것을 시작해도 방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빠뜨릴 수 없습니다.

 

다음 게송의 의미를 이해해 봅시다.

Natthi jhānaṁ apaññassa(낫티 자-낭 아빤냣사)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는 수행은 없다.

지혜가 없다면, 수행 방법을 찾아내는 일도, 실천하는 일도 할 수 없습니다. 

paññā natthi ajhāyato(빤냐- 낫티 아자-야또-) 수행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나타나지 않는다.

 

수행을 실천하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수행을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급류의 상황을 파악한다는 것은 지혜인 것입니다. 뗏목을 언덕 기슭까지 이끈다는 것은 수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paññā(빤냐-)와 jhāna(자-나)를 동시에 사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Yamhi jhānañca paññā ca(얌히 자-난짜 빤냐-)

지혜와 실천이 양쪽 모두 있는 사람은,

sa ve nibbānasantike(사 웨- 닙바-나산띠께-)

확실히 열반에 가깝다.

 

뗏목의 비유를 보면 의미는 명백합니다. 급류가 얼마나 긴 것인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뗏목을 붙잡았다면 어느 정도 그 공포감·불안감은 사라집니다. 안전한 언덕까지 뗏목을 붙잡고 헤엄칠 뿐입니다. 수행의 실천을 시작한 사람이 그 실천을 항상 지혜와 연결해 두면, 열반·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 수행을 실천하는 곳인 선원의 의미

 

수행을 실천하는 수행자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를 선택합니다. 속세와 관련되지 않는 조용한 장소를 불교 용어로 suññāgāra(순냐-가-라) 공한처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없는 고독한 장소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속적인 삶을 하는 환경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함께 수행을 실천하는 동료라면, 몇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는 현재의 여러분을 생각해도 상황은 같습니다. 가족이 시끄럽게 말하고 있을 때, 이것저것 여러 가지 것이 요구되고 있을 때, 모두 자신에게 무언가 일거리를 주고 있을 때는 수행하기 참으로 힘듭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만듭니다. 그 상황은 suññāgāra(순냐-가-라) 공한처가 됩니다.

 

이 말을 물리적인 의미로 이해해서 오해받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불교의 세계에서 숲에 거주하는 출가자를 성실한 수행자로 생각하고, 마을에 거주하는 출가자는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가 불교도들도 일부러 숲을 찾아가는 예도 있습니다. 해탈은 환경이나 형태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도시에 살고 있어도 간단하게 suññāgāra(순냐-가-라) 공한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일상적인 번거로움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 윤회를 느끼지 않는 사람

 

다시 급류의 이야기입니다.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알고 있다면, 최대의 공포감·불안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럼, 뗏목을 잡았다고 합시다. 기분은 어떻게 될까요? 「겨우 살았다」라는 기분이 됩니다.

윤회하고 있는 모든 생명은 윤회라는 급류에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하다, 가족이 있어 행복하다, 건강하니 행복하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 등등의 「행복을 찾아서 급류를 즐깁니다. 윤회의 위기를 느끼지 않습니다. 느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상태에 대해서 불교의 세계에서는 「게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차가운 물을 넣은 솥이 있습니다. 그 안에 게를 던져 넣습니다. 잡혀서 무서워하던 게는 곧 안심합니다. 솥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솥 아래에서는 불이 피워지고 있습니다. 게의 안도감은 물이 따뜻해질 때까지입니다. 속세의 유혹에 빠져 아무 주저함도 없이 사는 사람을 불교의 세계에서는 「솥 안에서 노는 게의 여유」라고 말합니다.

 

◎ 인간계를 넘는 기쁨

 

급류의 무서움을 느낀 사람은 뗏목을 잡는 순간 평온함을 느낍니다. 좋았다, 구해졌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맛있는 밥을 먹을 수가 있어서 좋겠다고 하는 기다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훨씬 높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Suññāgāraṁ pavitthassa(순냐-가-랑 빠윗탓사) 공한처에 들어가,

santacittassa bhikkhuno(산따찟땃사 빅쿠노-) 마음을 온화하게 한 비구(수행자)가,

sammā dammaṁ vipassato(삼마- 담망 위빳사또-) 올바르게 현상을 관찰할 때,

amānusī rati hoti(아마-누시- 라띠 호띠) 인간의 레벨을 넘는 기쁨이 일어난다.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던 사람이 뗏목을 잡은 것만이 아니라, 상황을 파악하면서 손발을 요령 있게 움직여, 언덕으로 나아갑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기쁨에 흘러넘칩니다. 이 비유와 같이 수행을 올바르게 걷는 사람은 인간계를 넘은 기쁨을 느낍니다. 위빳사나 실천은 잘 진행된다면 더 이상의 기쁨이 없는 수행이 됩니다. 고행은 전혀 없습니다.

 

◎ 생멸지와 기쁨의 관계

 

인간계를 넘은 기쁨이란 무엇인지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수행 실천을 시작한 사람은 모든 행위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합니다. 부처님 제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이해합니다. 

자신은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5온입니다. 5온을 그대로 관찰해 봅니다. 그렇다면 5온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발견합니다. 순간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5개의 흐름입니다.

색온(신체)의 생멸이 관찰되어 집니다. 꽤 빨리 생멸하고 있다고 발견합니다.

다음에 수상행식의 생멸도 관찰되어 집니다. 그때는 관찰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마음이 생멸하고 있다고 발견합니다.

 

5온의 생멸의 흐름을 발견하면 더욱더 마음이 기쁨을 느낍니다. 좋았다, 좋았다고, 만족을 느낍니다. 그럼, 생멸을 볼 수 있을 때 왜 만족할까요? 왜 기뻐할까요?

급류와 뗏목의 비유로 생각해 보세요. 급류의 상태를 알면 알수록, 몸을 지키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급류는 최대의 위기일지 모르지만, 자신은 노력하고 있다, 확실히 언덕에 잘 도착할 수 있다는 기쁨을 느낍니다. 좋았다고 하는 만족을 느낍니다. 불교 용어로 말한다면 (5온의) 생멸지가 나타났을 때입니다.

 

부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Khandhānaṁ udayabbayaṁ(칸다-낭 우다얍바양) 5온의 생멸을

yato yato sammasati(야또- 야또- 삼마사띠) 바르게 사띠(관찰) 할 때마다,

labhatī pītipāmojjaṁ(라바띠- 삐띠-빠-못장)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amataṁ taṁ vijānataṁ(아마땅 땅 위자-나땅) 열반·불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수행은 즉시 결과를 가져온다.

 

보통 사람들은 수행은 예견되지 않을 만큼의 긴 시간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탈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실천의 방법도 잘 몰라서, 옛 불교도들은 실천을 멈추고 믿거나 빌거나 의지하거나 하는 불교를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노력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변질은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초심자는 우선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이란 무엇인가(5온),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안이비설신의에 색성향미촉법이 접촉해 일어나는 인식의 흐름)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 정도의 이해도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행 실천하는 의욕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실천해 보니 생멸지가 나타납니다. 인간계를 넘은 기쁨과 안심감이 있습니다. 여기가 수행의 종착점은 아닙니다. 생멸지가 나타나면 본격적인 수행(열반에 이를 뿐인 일방통행의 길)에 들어간 것이 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해탈에 이릅니다.

 

법의 특색에 akāliko(아깔-리꼬-)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시대에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sandiṭṭhiko(산딧티꼬-) 눈앞에서 결과가 나타난다는 의미의 말도 있습니다. 곧바로 해탈에 이르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 수행의 출발점이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던 사람이 뗏목을 잡고 흐름의 상황을 파악하면서, 손발로 요령 있게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언덕에 드디어 도착하겠지요. 그러나 떠내려가고 있던 사람에게 있어서는 뗏목을 잡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노력의 출발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Pātimokkhe ca saṁvaro(빠-띠목케- 짜 상와로-) 빠띠목카에 의해 경고하고,

(빠띠목카는 출가의 계율입니다. 재가자는 실라(계) 입니다.)

indriyagutti(인드리야굿띠) 감각기관을 지킨다.

(만약 안이비설신을 내버려 두면 무엇이 접촉하여 일어나는지, 어떻게 마음이 흐트러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색성향미촉이 접촉해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한다.)

santuṭṭhi(산뚯티) 지족 한다.

(사람의 요구에는 한정이 없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정도로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idha paññassa bhikkhuno(이다 빤냣사 빅쿠노-)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진 비구(수행자)의 지혜는.

tatrāyamādi bhavati(따뜨라-야마-디 바와띠) 수행의 출발점이다.

 

수행을 실천 시작하기 전에, 계율을 지키는 도덕적인 인간이 되라, 오근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 지족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궁극의 행복에 달하는 그리 길지 않은 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수행자)들이여! 수행하십시요, 방일에 빠지는 것을 그만두십시오.(jhaya bhikkhu ma pamado(자야 빅쿠 마 빠마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은 「오욕에 의해 마음이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mate kamagune bhamassu cittaṁ(마떼- 까마구네- 바맛수 찟땅))」라고도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욕에 따라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맛보고 싶은 것 다 맛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 다 생각하면 수행은 언제 합니까? 그런 것은 스스로 판단해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해서 한 행위인데, 그 결과는 고민과 괴로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비유로서 새빨갛게 불타고 있는 철 구슬을 기꺼이 삼키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삼키면 다음 결과(내장이 타 죽음에 이르는 괴로움을 느끼는 것)는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불교를 배우기 시작하면 지혜도 마음의 침착함도 함께 나타납니다. 불교를 배워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면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배운 것만으로서 인격 향상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을 초월한 정신상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천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수행자는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 지혜와 동시에 자아의식이 멀어진다.

 

부처님께서는 "자! 수행을 시작합시다. 먼저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오근(五根)을 방호(防護)하고, 분수를 알아라. 도덕을 잘 지켜라. 그것이 시작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다 보면 "자신"이라는 마음은 없어져 버립니다.

예를 들어, "다리가 아프다"라는 마음은 "감각이 있는 몸(물체)에 딱딱하게 느껴지면 통증이 생긴다."라는 발견으로 바뀝니다. 자신이라는 주관적인 마음이 엷어지고 갈수록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혜의 수준을 올리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자기가 있다"라는 실감이 엷어져 가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실감이 있는 한 관찰은 주관적입니다.

이 실감이 엷어져서 "모든 현상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감각에 대해서 적당하게 대충 파악하여 '나'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라고 관찰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뚜렷하고 명확한 경험으로서 있다면 예류과의 문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마음이 속세간의 차원을 깨뜨려 버린다면 예류과에 도달한 것이 됩니다. 그 경험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의 수행자는 그대로 자세를 바꾸지 않고 계속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사이에 성공합니다.

 

수행자가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한 상태에서 "나는 예류과에 도달하게 된 것일까? 깨달은 것일까?"라는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올바르게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문으로 마음이 고민하는 경우는 어딘가에서 수행 방식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류과 등의 단어는 일반인에게 이해받기 위한 라벨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행자에게 수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자아"라는 착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깨달았다"라는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호한 정신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디까지 맑게 되어 있느냐고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또 어느 정도 더러움(번뇌)이 남아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스승에게 수행의 상황을 보고할 때는 "이러한 변화가 있고, 이러한 발견이 있고, 마음은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예류과가 됐다"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와 스승이 함께 조사한 부분에서 유신견(有身見)이 없어졌다고 발견하면, 동시에 계금취견(戒禁取見)도, 의견(疑見)도 없어진 것이 됩니다. 수행이 어느 정도 성장하여 가면, 계금취견과 의견은 거의 기능하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옳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의 착각만은 엄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 착각이 깨어져 버리면 세 가지의 속박이 사라진 것이 됩니다. 

수행자에게도, 스승에게도 "예류과"라는 단어는 그냥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점검하는 것은 마음의 내용입니다. 마음의 때(번뇌)입니다.

사람이 예류과에 이르렀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깨끗하게 됐다고 생각했다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라는 실감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수행에 성공한 순간은 그 실감이 없었는데, 수행이 끝나면 자기가 있다고 하는 실감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아의 착각은 아닙니다.

자기가 있다는 실감이 있는 경우는 가벼운 분노가 생겨나거나, 가벼운 욕심이 생겨나거나, 더 성장하고 싶다는 기분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수행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 수행자의 불안은 선우가 해결책

 

수행하는 사람이 예류과에 도달해도 아직 멀었다고 알기에 당연히 불안에 빠지는 일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과정을 파악한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선우와 사귀십시요(mitte bhajassu kalyāṇe(밋떼 바잣수 깔르야-네-))"

 

본래의 선우는 부처님 자신입니다. 부처님과 사귄다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을 부처님이 직접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듯한 경의를 갖고 읽는 것, 이해하는 것입니다. 

읽는 자신이 신기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주문에 따라 맞춘 조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을 거듭 읽어 보아도 읽고 있을 때의 마음 고민에 대해서 딱 맞는 힌트가 보입니다.

 

부처님 다음의 선우는 경험 있는 스승입니다.

스승은 자기 능력 범위에서 진지하게 지도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돕는 것도 수행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습니다. 바른 스승은 자신이 경험한 범위에서 자신이 실천한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잘되지 않으면 다른 스승을 찾도록 도와줍니다.

 

결국 선우란 자신보다 뛰어난 인간으로 키워주는 자신을 걱정하는 존재입니다. 선우와 사귀어 보면 자신이 갈수록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선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 선우의 조건

 

먼저 "suddhājīve(숫다-지-웨-) 보다 깨끗한 삶"입니다. 이것은 선우를 고를 때에 필요한 조건입니다.

의심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겸손하고 검소하게 자아를 내세우지 않고 밝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에게 그와 같은 성격이 발견되면 선우의 조건이 됩니다.

 

다음 단어는 "atandite(아딴디떼-) 흔들리지 않는다" 입니다.

흥분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되지 않고 언제든지 침착하게 산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과장하지 않고,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는 성격입니다. 선우를 고를 때는 그것도 조사하여야 합니다. 그 정도의 체크는 일반인도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단어는 "patisanthāravuttassa(빠띠산타-라웃땃사) 화기애애(친절)하게 있다" 입니다. 의미는 간단합니다.

친절이란 유연성을 갖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 등을 가르친다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바꾸려고 합니다. 완고하게 되지 않습니다. 자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유연성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침에 대한 태도입니다. 지금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하고, 새로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유지합니다.

또 하나는 생활의 일입니다.

검소함을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원하거나, 비싼 옷을 원하거나, 사치한 보금자리를 원하거나 하여서는 안 됩니다. 갖추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유연하게 대응합니다.

 

다음 단어는 "ācārakusalosiyā(아-짜-라꾸살로-시야-) 예의범절을 지킨다" 입니다.

살아가면서 하는 신구의 행위가 올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단어는 "pāmojjabahulo(빠-못자바훌로-) 큰 기쁨을 느낀다" 입니다.

"큰 기쁨을 느껴라."라고 훈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불교를 공부한 것을 좋아합니다. 수행할 의욕이 생겼다는 것을 기뻐합니다. 수행할 시간을 만든 것을 기뻐합니다. 스승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합니다.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기뻐합니다. 수행이 잘 안될 때는 청소나 집안일을 합니다. 그것도 기뻐합니다. 마음이 약간이라도 안정되면 그것을 기뻐합니다. 

 

결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기쁨으로써 인식하라"라는 것입니다.

"수행을 성공시키고 싶으면 기쁨이 많은 인간이 돼라."라는 훈계는 절대적입니다.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합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낙관주의자가 돼라." 입니다.

 

간단한 방법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위대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간단하므로 불안이나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조건만 지키면 수행자는 고통을 극복합니다.

 

모든 괴로움을 딛고 해탈에 이르는 길은 기쁨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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