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마 경청 (20140509)_2014년 5월 9일, 정기법회 법문
"듣는 법은 왜 배워야 합니까?"
우리가 이 세계에서 담마를 들을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불교와 먼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불교 국가에서도 담마라는 진귀한 보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그들은 시간이 없거나 좋아하는 일이 아니거나 혹은 담마를 이해할 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해하고 있다 해도, 실행을 잘하지 않습니다. 설령 실행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길에서 헤매고 있기에 깨달음을 얻는 이는 드뭅니다.
그러나 담마를 바른 방법으로 듣기 시작하면 우리는 해탈에 이르는 길로 출발할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를 갖게 됩니다.
보통 법문을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마음속에 아주 일부분만 그 법문의 주제에 대해 집중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늘 동요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 속으로 여행을 하기도 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에 떨기도 하며, 바깥의 온갖 종류의 형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유리창을 응시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그들 주위 사람들이나 스님을 그저 빤히 쳐다보기도 합니다.
주의력을 갖고 경청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45분 정도 다른 곳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법문을 꾸준히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정신이 잘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담마를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은 담마가 그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혼자서도 담마의 실질적인 의미를 관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귀담아듣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해 3종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특성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보도록 봅시다.
첫 번째 부류로써 우둔한 사람들은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지성은 매우 제한되어 있는 반면에 근거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은 강합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재치와 지혜를 엎질러진 지혜라고 합니다.
왜 그들의 지혜가 엎어진 지혜인가? 그것은 과거의 악한 행위나 욕망이 그들의 우둔한 마음과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경전에서는 항아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둔한 사람은 사원에 앉아는 있지만 법문 시작부분에 전혀 유의하지 않고 끝부분에도 유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법문의 시작과 중간과 끝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항아리가 엎어졌을 때, 물은 곧바로 흘러나와서 항아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처럼 단지 사원에 들락거리기만 할뿐이다.〃
이러한 사람을 '엎어진 지혜를 가진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청취력이나 기억력이 없고 우둔한 사람일지라도, 단지 법문을 흘려들었더라도 망상이라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될 좋은 조언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 약을 먹음으로써 망상의 병으로부터 벗어날 때 그는 더 이상 뒤집혀진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게 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으로서 분산된 지혜를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산만한 기질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나비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서 많은 것들에 일시적인 흥미를 가지지만, 바로 잊어버리고 배운 것들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사실들을 서로 연관시키지도 못합니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분산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원에 부지런히 다니는 사람 중에서 일부의 경우 법문 시작부터 중간 그리고 끝까지 그 법문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마치 무릎팍에 참깨, 쌀, 사탕과자, 대추열매와 같은 많은 종류의 음식 더미가 쌓여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모두 쏟아져버리듯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더 이상 그 법문에 주의력을 기울이지 못한다.〃심지어는 승려들 중에서도 분산된 지혜를 가진 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분산된 지혜를 가진 사람들도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붓다의 마음훈련법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성격을 바꾸어서 세 번째 부류의 사람(포괄적인 지혜를 가진 자)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포괄적인 지혜를 지녀 잘 훈련된 마음을 소유한 자는 어떤 사실들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필요하게 되면 그것들을 곧바로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앞의 두 부류의 사람들에 비해서 정신적인 더러움이 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지혜는 잘 확립되어 있어서 다음 단계의 지혜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포괄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스님들에게 담마를 듣기위해 사원에 부지런히 다니는 사람 중의 일부는 법문이 시작할 때부터 주의력을 기울이고, 중간부에도 주의력이 유지되고, 마지막까지도 주의력을 잃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에도 마음속에 법문의 시작과 끝까지의 내용을 마음에 담고 있다.
마치 항아리가 올바로 세워져 있을 때 물이 담겨지면 쏟아지지 않듯이 포괄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다.〃
붓다가 그러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잘 집중되어 있고 투명하여 담마의 가르침대로 담마를 수행할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고통(dukkha)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만이 스승이 가리켜준 방향을 진정으로 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붓다가 보여준 깨달음의 길의 마지막까지 실제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바라문이 위대한 스승과 위대한 가르침이 있다면 모든 제자들이 닙바나에 도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붓다에게 질문하자, 붓다는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왜 그렇습니까?"라고 바라문이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그에게 미소를 짓는 것으로 답변하고는, 바라문에게 가까운 마을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바라문은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그에게 그곳 방향을 가리킬 수 있냐고 묻자, 브라만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을까지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겠지요. 일부는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붓다의 지혜 있는 답변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담마를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빠져서 닙바나에 이르는 도중에 길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담마로부터 유익한 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담마의 입장에서 보면 일반적인 보통의 세속인들은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어집니다. 반면에 좋은 가르침을 수행하여서 자신을 개발함으로써 스스로가 진리를 보는 사람은 그들 자신과 세계를 유익하게 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경청자, 성스러운 제자(아리야사-와까, ariyasāvaka)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일부 불교인들 사이에서는 '붓다의 긴 혀가 모든 곳에 담마를 가르치고 있다'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담마를 듣기 위한 사원에만 담마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담마는 항상 주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과 정신적 현상 또한 담마이기에 붓다의 긴 혀가 가르치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담마를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담마를 듣고 그대로 행동한다면, 진실로 그는 성스런 경청자가 될 것이고, 어떤 곳에서든지 성스러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스러운 경청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세 개의 함정은 꼭 있게 됩니다.
"담마를 경청할 때는 음악을 듣는 사슴과 같아야 합니다.
담마에 대해 생각할 때는 북극에 사는 양털을 깎는 사람과 같아야 합니다.
담마를 살아있는 경험으로 만들 때에는 술 취한 사람과 같아야 합니다.
담마의 정당성을 확립하려 할 때에는 배고파 풀을 뜯는 들소와 같아야 합니다.
담마의 열매를 얻게 될 때는 구름에서 솟아나는 태양과 같아야 합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처음 셋은 세 가지의 지혜와 관계가 있는 반면에, 나머지 둘은 깨달음의 성취를 묘사하고 이 깨달음의 열매에 따르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사슴은 인도 악기인 류트(lute) 또는 비나(vina)와 같은 음악소리에 의해 인도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냥꾼이 쏜 화살에 놀랐을 때에도 소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담마를 경청하는 것에 사용되는 훌륭한 비유가 됩니다.
담마가 가르쳐질 때에는 다른 잡음이나 혹은 육체적 감각이 맹렬히 공격해옴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하는 사슴과 같아야 합니다.
즉 잡념이나 육체적 감각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경청에 집중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감각의 화살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게 되어 담마의 문장들로부터 최고의 유익함을 유도해 내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기억 속에 저장하게 될 것입니다.
직접 양털을 깎아본 경험이 없겠지만, 사진이나 텔레비전에서 양털 깎는 작업을 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그때 털 깎는 작업을 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그때 털 깎는 이의 아주 정교한 손놀림과 기계와 양을 동시에 완벽히 쥐어 잡기 위한 집중된 노력은 경탄할 만합니다.
담마를 숙고할 때나 그것에 비추어 볼 때에도 꼭 이와 같습니다. 이것 역시 완벽한 집중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매우 높은 기술입니다.
이런 기술 없이 담마에 대한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면, 숙련되지 못한 양털깎이가 양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잘못된 견해를 소유한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집중이 담마를 진실로 이해하도록 이끌어준다면 최고로 가치 있는 황금 양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털깎이와 담마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기를 바라는 사람 모두에게 집중은 필요합니다.
직관적 지혜 개발을 묘사하는 데는 술 취한 사람에 대한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적합한 비유가 아닌 것 같지만, 술 취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자신을 잊은 채로 모든 종류의 걱정과 두려움에서부터 해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작은 자아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는 것에 대한 확실성에 압도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향상을 향한 지혜를 찾고 있는 사람의 경험과 비슷한 것입니다.
책을 읽거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대신에 그가 직접 지혜를 찾아 나섭니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던 그 무엇보다 더 실재적이고 생동감 있는 경험이 됩니다. 그는 이러한 지혜에 침잠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알코올 같은 것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혜에 의해 깨어있음으로 해서 자아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담마를 향한 마음의 개발에 의해 형성되는 지혜를 더 깊게 경험함으로써 붓다의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순간 깨달음의 문을 열어젖혀 업과 윤회와 같은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은 배고픈 들소가 풀을 뜯는 것에 비유됩니다. 닙바나의 길이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담마로 전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척박한 곳에서 서식하는 동물이 풍부한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들소가 풀을 뜯는 것처럼 확실하게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순간, 최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기회를 반드시 이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담마의 열매를 보게 될 때를 비유하는 것으로 구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닙바나 즉, 의심이 완전히 사라져 진리를 취득하는 순간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과정을 끝까지 잘 마친 사람에게는 불투명한 것, 엷은 막이나 정신적 감성적 흠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구름을 태양 위를 가린 얼룩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음속의 탐욕, 증오, 망상과 같은 것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태양은 구름 사이로 하늘을 환히 비추어 주듯이 마음속의 구름이 벗겨지면 청정함과 지혜가 마음을 비추어 줍니다. 이러한 성취가 있을 때 좋은 목적으로 담마를 들어온 진정한 경청자가 되는 것입니다.
엎질러진 지혜, 분산된 지혜 또는 포괄적 지혜와 같은 지혜를 가진 부류 중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든지 담마에 관한 세 번째 부류에 속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은,
"포괄적인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비구가 설법하는 곳에 찾아가서는 그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듣는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담마의 법을 움켜지고 잘 간수한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담마를 제대로 잘 따라가는 정법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고통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로서 담마를 경청하기 위해 사원에 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보통 그들이 단정히 앉은 상태로 조용하고 엄숙하게 앉아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깊은 몰입의 표정으로 눈을 감고 앉아 있습니다.
그러한 깊은 몰입이야말로 담마를 받아들이는데 합당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불교 어디에서나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담마는 값진 것입니다.
"담마를 설하는 스승은 제자들에게 올바른 경청법, 부정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유익한 기술을 습득하는 법, 그리고 그 가르침을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법 등을 가르친다.
반면에 제자들은 그 가르침이 잊혀지지 않도록 명심하는 동시에 존경의 합장을 올리며 들어야 하고, 가슴속 깊이 간직하여 그것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건성으로 듣는다면, 담마를 단지 들었다는 것 외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담마를 전혀 듣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성실한 불교인은 담마를 주의 깊게 들음으로 해서 항상 많은 열매를 얻어왔습니다.
붓다와 그의 위대한 제자 앞에 앉아서 헌신적이고 관대한 마음으로 지고한 설법을 경청한 후 도덕적 행위와 실천 수행으로 결국에는 불교 특유의 지혜(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그리고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는 사람의 예는 경전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담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자에게 선물하는 지고한 설법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머지않아 반드시 고요와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고, 또한 강한 집중력이 개발되었을 때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 일어나는 담마를 직접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담마를 보게 되는 심오한 통찰을 담마의 눈(法眼)이라고 불리어집니다. 이것은 담마의 본질을 직접적이고 완벽하게 이해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욱 나아가 궁극적 자유를 경험하는 아라한의 첫 번째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승이나 그의 성스런 제자들이 비구들에게 담마를 가르칠 때 가르침이 주어지는 방식에 따라 훌륭한 경청자는 그 내용의 뜻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숨겨진 뜻도 알게 된다.
그러면 행복이 그에게 생기게 되고, 따라서 그에게는 행복과 기쁨이 넘치게 된다.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고, 그의 몸은 고요해지며, 고요 속에서 청정해진다. 따라서 그의 마음속에는 축복이 넘쳐흐르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바로 담마를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에서부터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만이 고통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229
* 담마 경청 (20140509)_2014년 5월 9일, 정기법회 법문
"듣는 법은 왜 배워야 합니까?"
우리가 이 세계에서 담마를 들을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불교와 먼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불교 국가에서도 담마라는 진귀한 보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그들은 시간이 없거나 좋아하는 일이 아니거나 혹은 담마를 이해할 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해하고 있다 해도, 실행을 잘하지 않습니다. 설령 실행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길에서 헤매고 있기에 깨달음을 얻는 이는 드뭅니다.
그러나 담마를 바른 방법으로 듣기 시작하면 우리는 해탈에 이르는 길로 출발할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를 갖게 됩니다.
보통 법문을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마음속에 아주 일부분만 그 법문의 주제에 대해 집중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늘 동요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 속으로 여행을 하기도 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에 떨기도 하며, 바깥의 온갖 종류의 형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유리창을 응시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그들 주위 사람들이나 스님을 그저 빤히 쳐다보기도 합니다.
주의력을 갖고 경청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45분 정도 다른 곳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법문을 꾸준히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정신이 잘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담마를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은 담마가 그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혼자서도 담마의 실질적인 의미를 관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귀담아듣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해 3종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특성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보도록 봅시다.
첫 번째 부류로써 우둔한 사람들은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지성은 매우 제한되어 있는 반면에 근거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은 강합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재치와 지혜를 엎질러진 지혜라고 합니다.
왜 그들의 지혜가 엎어진 지혜인가? 그것은 과거의 악한 행위나 욕망이 그들의 우둔한 마음과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경전에서는 항아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둔한 사람은 사원에 앉아는 있지만 법문 시작부분에 전혀 유의하지 않고 끝부분에도 유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법문의 시작과 중간과 끝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항아리가 엎어졌을 때, 물은 곧바로 흘러나와서 항아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처럼 단지 사원에 들락거리기만 할뿐이다.〃
이러한 사람을 '엎어진 지혜를 가진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청취력이나 기억력이 없고 우둔한 사람일지라도, 단지 법문을 흘려들었더라도 망상이라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될 좋은 조언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 약을 먹음으로써 망상의 병으로부터 벗어날 때 그는 더 이상 뒤집혀진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게 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으로서 분산된 지혜를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산만한 기질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나비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서 많은 것들에 일시적인 흥미를 가지지만, 바로 잊어버리고 배운 것들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사실들을 서로 연관시키지도 못합니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분산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원에 부지런히 다니는 사람 중에서 일부의 경우 법문 시작부터 중간 그리고 끝까지 그 법문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마치 무릎팍에 참깨, 쌀, 사탕과자, 대추열매와 같은 많은 종류의 음식 더미가 쌓여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모두 쏟아져버리듯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더 이상 그 법문에 주의력을 기울이지 못한다.〃심지어는 승려들 중에서도 분산된 지혜를 가진 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분산된 지혜를 가진 사람들도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붓다의 마음훈련법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성격을 바꾸어서 세 번째 부류의 사람(포괄적인 지혜를 가진 자)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포괄적인 지혜를 지녀 잘 훈련된 마음을 소유한 자는 어떤 사실들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필요하게 되면 그것들을 곧바로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앞의 두 부류의 사람들에 비해서 정신적인 더러움이 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지혜는 잘 확립되어 있어서 다음 단계의 지혜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포괄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스님들에게 담마를 듣기위해 사원에 부지런히 다니는 사람 중의 일부는 법문이 시작할 때부터 주의력을 기울이고, 중간부에도 주의력이 유지되고, 마지막까지도 주의력을 잃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에도 마음속에 법문의 시작과 끝까지의 내용을 마음에 담고 있다.
마치 항아리가 올바로 세워져 있을 때 물이 담겨지면 쏟아지지 않듯이 포괄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다.〃
붓다가 그러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잘 집중되어 있고 투명하여 담마의 가르침대로 담마를 수행할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고통(dukkha)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만이 스승이 가리켜준 방향을 진정으로 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붓다가 보여준 깨달음의 길의 마지막까지 실제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바라문이 위대한 스승과 위대한 가르침이 있다면 모든 제자들이 닙바나에 도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붓다에게 질문하자, 붓다는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왜 그렇습니까?"라고 바라문이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그에게 미소를 짓는 것으로 답변하고는, 바라문에게 가까운 마을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바라문은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그에게 그곳 방향을 가리킬 수 있냐고 묻자, 브라만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을까지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겠지요. 일부는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붓다의 지혜 있는 답변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담마를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빠져서 닙바나에 이르는 도중에 길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담마로부터 유익한 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담마의 입장에서 보면 일반적인 보통의 세속인들은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어집니다. 반면에 좋은 가르침을 수행하여서 자신을 개발함으로써 스스로가 진리를 보는 사람은 그들 자신과 세계를 유익하게 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경청자, 성스러운 제자(아리야사-와까, ariyasāvaka)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일부 불교인들 사이에서는 '붓다의 긴 혀가 모든 곳에 담마를 가르치고 있다'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담마를 듣기 위한 사원에만 담마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담마는 항상 주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과 정신적 현상 또한 담마이기에 붓다의 긴 혀가 가르치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담마를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담마를 듣고 그대로 행동한다면, 진실로 그는 성스런 경청자가 될 것이고, 어떤 곳에서든지 성스러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스러운 경청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세 개의 함정은 꼭 있게 됩니다.
"담마를 경청할 때는 음악을 듣는 사슴과 같아야 합니다.
담마에 대해 생각할 때는 북극에 사는 양털을 깎는 사람과 같아야 합니다.
담마를 살아있는 경험으로 만들 때에는 술 취한 사람과 같아야 합니다.
담마의 정당성을 확립하려 할 때에는 배고파 풀을 뜯는 들소와 같아야 합니다.
담마의 열매를 얻게 될 때는 구름에서 솟아나는 태양과 같아야 합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처음 셋은 세 가지의 지혜와 관계가 있는 반면에, 나머지 둘은 깨달음의 성취를 묘사하고 이 깨달음의 열매에 따르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사슴은 인도 악기인 류트(lute) 또는 비나(vina)와 같은 음악소리에 의해 인도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냥꾼이 쏜 화살에 놀랐을 때에도 소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담마를 경청하는 것에 사용되는 훌륭한 비유가 됩니다.
담마가 가르쳐질 때에는 다른 잡음이나 혹은 육체적 감각이 맹렬히 공격해옴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하는 사슴과 같아야 합니다.
즉 잡념이나 육체적 감각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경청에 집중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감각의 화살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게 되어 담마의 문장들로부터 최고의 유익함을 유도해 내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기억 속에 저장하게 될 것입니다.
직접 양털을 깎아본 경험이 없겠지만, 사진이나 텔레비전에서 양털 깎는 작업을 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그때 털 깎는 작업을 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그때 털 깎는 이의 아주 정교한 손놀림과 기계와 양을 동시에 완벽히 쥐어 잡기 위한 집중된 노력은 경탄할 만합니다.
담마를 숙고할 때나 그것에 비추어 볼 때에도 꼭 이와 같습니다. 이것 역시 완벽한 집중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매우 높은 기술입니다.
이런 기술 없이 담마에 대한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면, 숙련되지 못한 양털깎이가 양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잘못된 견해를 소유한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집중이 담마를 진실로 이해하도록 이끌어준다면 최고로 가치 있는 황금 양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털깎이와 담마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기를 바라는 사람 모두에게 집중은 필요합니다.
직관적 지혜 개발을 묘사하는 데는 술 취한 사람에 대한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적합한 비유가 아닌 것 같지만, 술 취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자신을 잊은 채로 모든 종류의 걱정과 두려움에서부터 해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작은 자아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는 것에 대한 확실성에 압도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향상을 향한 지혜를 찾고 있는 사람의 경험과 비슷한 것입니다.
책을 읽거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대신에 그가 직접 지혜를 찾아 나섭니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던 그 무엇보다 더 실재적이고 생동감 있는 경험이 됩니다. 그는 이러한 지혜에 침잠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알코올 같은 것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혜에 의해 깨어있음으로 해서 자아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담마를 향한 마음의 개발에 의해 형성되는 지혜를 더 깊게 경험함으로써 붓다의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순간 깨달음의 문을 열어젖혀 업과 윤회와 같은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은 배고픈 들소가 풀을 뜯는 것에 비유됩니다. 닙바나의 길이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담마로 전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척박한 곳에서 서식하는 동물이 풍부한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들소가 풀을 뜯는 것처럼 확실하게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순간, 최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기회를 반드시 이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담마의 열매를 보게 될 때를 비유하는 것으로 구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닙바나 즉, 의심이 완전히 사라져 진리를 취득하는 순간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과정을 끝까지 잘 마친 사람에게는 불투명한 것, 엷은 막이나 정신적 감성적 흠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구름을 태양 위를 가린 얼룩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음속의 탐욕, 증오, 망상과 같은 것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태양은 구름 사이로 하늘을 환히 비추어 주듯이 마음속의 구름이 벗겨지면 청정함과 지혜가 마음을 비추어 줍니다. 이러한 성취가 있을 때 좋은 목적으로 담마를 들어온 진정한 경청자가 되는 것입니다.
엎질러진 지혜, 분산된 지혜 또는 포괄적 지혜와 같은 지혜를 가진 부류 중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든지 담마에 관한 세 번째 부류에 속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은,
"포괄적인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비구가 설법하는 곳에 찾아가서는 그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듣는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담마의 법을 움켜지고 잘 간수한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담마를 제대로 잘 따라가는 정법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고통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로서 담마를 경청하기 위해 사원에 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보통 그들이 단정히 앉은 상태로 조용하고 엄숙하게 앉아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깊은 몰입의 표정으로 눈을 감고 앉아 있습니다.
그러한 깊은 몰입이야말로 담마를 받아들이는데 합당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불교 어디에서나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담마는 값진 것입니다.
"담마를 설하는 스승은 제자들에게 올바른 경청법, 부정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유익한 기술을 습득하는 법, 그리고 그 가르침을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법 등을 가르친다.
반면에 제자들은 그 가르침이 잊혀지지 않도록 명심하는 동시에 존경의 합장을 올리며 들어야 하고, 가슴속 깊이 간직하여 그것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건성으로 듣는다면, 담마를 단지 들었다는 것 외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담마를 전혀 듣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성실한 불교인은 담마를 주의 깊게 들음으로 해서 항상 많은 열매를 얻어왔습니다.
붓다와 그의 위대한 제자 앞에 앉아서 헌신적이고 관대한 마음으로 지고한 설법을 경청한 후 도덕적 행위와 실천 수행으로 결국에는 불교 특유의 지혜(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그리고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는 사람의 예는 경전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담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자에게 선물하는 지고한 설법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머지않아 반드시 고요와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고, 또한 강한 집중력이 개발되었을 때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 일어나는 담마를 직접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담마를 보게 되는 심오한 통찰을 담마의 눈(法眼)이라고 불리어집니다. 이것은 담마의 본질을 직접적이고 완벽하게 이해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욱 나아가 궁극적 자유를 경험하는 아라한의 첫 번째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승이나 그의 성스런 제자들이 비구들에게 담마를 가르칠 때 가르침이 주어지는 방식에 따라 훌륭한 경청자는 그 내용의 뜻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숨겨진 뜻도 알게 된다.
그러면 행복이 그에게 생기게 되고, 따라서 그에게는 행복과 기쁨이 넘치게 된다.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고, 그의 몸은 고요해지며, 고요 속에서 청정해진다. 따라서 그의 마음속에는 축복이 넘쳐흐르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바로 담마를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에서부터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만이 고통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