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전에 TV에서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노인을 버렸다고 합니다.
노인을 어떤 장소까지 차로 데리고 가서 슬쩍 버리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가혹한 일입니다.
노인을 버린 몇 명과 인터뷰를 하는데 아버지를 버린 딸이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그런 일이 있는데 당다히 인터뷰까지 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딸은 나름대로 변명이 있었습니다만, 매우 고집불통인 아버지를 수발들 수가 없어서 버린 곳이 마침 개를 버리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좋으냐, 나쁘냐’보다도 인생은 그렇게 허무한 것입니다. 오래 살고 싶다고 버텨도 오래 살아 무엇이 행복합니까? 자식한테 버림받는 등 얼마나 한심한 일일까요?
이래서는 서로가 고통스러울 뿐이지 않겠습니까?
자식으로서도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이것 역시 큰 고통입니다.
큰 빌딩을 소유하고 있던 부자집이 3대째가 되자 매우 작은 집으로 변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주들은 세금도 못 내면서 잘 먹고 잘 쓸려고만 듭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런 재산과 집을 장만하였을까요?
세상은 지식을 습득하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어보아도 결국 의미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붓는 것은 분명히 말하거니와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신체는 식물과 마찬가지로 놓아두면 잘 자랍니다. 어째서 놓아두지 않습니까?
식물도 함부로 만지고 굴리면 망가져 버립니다. 적당히 놓아두면 잘 자랍니다. 신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저것 하는 것을 보면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쓸데없는 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 무명(無明)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신이라고 하는 부분이 식물과 다릅니다. 모처럼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그 정신을 성장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괴로워하기도 하고 고생을 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정신적 기능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도둑맞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키운 것은 결코 도둑맞지 않습니다. 재산이나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덕성과 인품과 정신적인 것은 누구도 훔쳐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찌 되었건 다시 태어나든 아니든, 그런 것에 관계없이 정신을 키우는 것이 올바른 삶입니다.
청정한 마음, 풍부한 정신, 완전한 마음집중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신체만을 부양하는 삶이란 너무나 수준 낮은 삶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모두들 말합니다만, 마음의 기능은 우리들의 신체로부터 매우 넓게 퍼져 갑니다.
어떤 사람이 화를 내고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은 곧 눈치를 채게 됩니다. 눈치를 챌 뿐만 아니라 옆 사람의 분노의 영향이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몇 달씩 목욕하지 않은 매우 지저분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곳에서 조금 떨어지면 별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잔뜩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의 영향은 조금 떨어지는 정도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성냄의 영향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그토록 강렬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라는 것은 중요하기에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치사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탐심이라는 마음, 상대방을 망가뜨려야지 하는 성냄이라는 마음, 올바름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는 어리석음이라는 마음이 있는 반면에 자비희사(慈悲喜捨)라고 하는 무량한 착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라고 하는 마음자리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이것을 넓혀 나가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일체지(一切智)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하면 대단한 지혜인 것처럼 느낄지도 모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곧 그 특성을 알 수 있는 힘이니까요.
수행은 이 지혜의 힘을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사띠의 명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띠’라는 것은 ‘염(念)’이라고 하는 한자를 씁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말하면 ‘알아차림’입니다. 어떤 현상, 어떤 마음작용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차린다’ 하는 것은 동물에도 반드시 있습니다. 추울 때는 춥다고 알아차리고 더울 때는 덥다고 알아차린다. 그런 것은 누구나 일상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란 능력이 없으면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속에 사띠는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은 그 ‘알아차림’이라는 기능을 발판으로 하여 점점 정밀하고 자세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넓혀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될수록, 마음속의 선한 마음자리가 성장해 갑니다. 선한 마음자리가 성장하면 할수록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소멸해 갑니다.
그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가 모두 사라진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에 이르면 이제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이르면 저절로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팔리어 중에 ‘앗따히 앗따노 낫티’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인데, 자신을 도와줄, 의지할 만한 존재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노력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여야 합니다.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
요전에 TV에서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노인을 버렸다고 합니다.
노인을 어떤 장소까지 차로 데리고 가서 슬쩍 버리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가혹한 일입니다.
노인을 버린 몇 명과 인터뷰를 하는데 아버지를 버린 딸이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그런 일이 있는데 당다히 인터뷰까지 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딸은 나름대로 변명이 있었습니다만, 매우 고집불통인 아버지를 수발들 수가 없어서 버린 곳이 마침 개를 버리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좋으냐, 나쁘냐’보다도 인생은 그렇게 허무한 것입니다. 오래 살고 싶다고 버텨도 오래 살아 무엇이 행복합니까? 자식한테 버림받는 등 얼마나 한심한 일일까요?
이래서는 서로가 고통스러울 뿐이지 않겠습니까?
자식으로서도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이것 역시 큰 고통입니다.
큰 빌딩을 소유하고 있던 부자집이 3대째가 되자 매우 작은 집으로 변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주들은 세금도 못 내면서 잘 먹고 잘 쓸려고만 듭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런 재산과 집을 장만하였을까요?
세상은 지식을 습득하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어보아도 결국 의미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붓는 것은 분명히 말하거니와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신체는 식물과 마찬가지로 놓아두면 잘 자랍니다. 어째서 놓아두지 않습니까?
식물도 함부로 만지고 굴리면 망가져 버립니다. 적당히 놓아두면 잘 자랍니다. 신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저것 하는 것을 보면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쓸데없는 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 무명(無明)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신이라고 하는 부분이 식물과 다릅니다. 모처럼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그 정신을 성장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괴로워하기도 하고 고생을 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정신적 기능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도둑맞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키운 것은 결코 도둑맞지 않습니다. 재산이나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덕성과 인품과 정신적인 것은 누구도 훔쳐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찌 되었건 다시 태어나든 아니든, 그런 것에 관계없이 정신을 키우는 것이 올바른 삶입니다.
청정한 마음, 풍부한 정신, 완전한 마음집중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신체만을 부양하는 삶이란 너무나 수준 낮은 삶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모두들 말합니다만, 마음의 기능은 우리들의 신체로부터 매우 넓게 퍼져 갑니다.
어떤 사람이 화를 내고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은 곧 눈치를 채게 됩니다. 눈치를 챌 뿐만 아니라 옆 사람의 분노의 영향이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몇 달씩 목욕하지 않은 매우 지저분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곳에서 조금 떨어지면 별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잔뜩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의 영향은 조금 떨어지는 정도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성냄의 영향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그토록 강렬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라는 것은 중요하기에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치사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탐심이라는 마음, 상대방을 망가뜨려야지 하는 성냄이라는 마음, 올바름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는 어리석음이라는 마음이 있는 반면에 자비희사(慈悲喜捨)라고 하는 무량한 착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라고 하는 마음자리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이것을 넓혀 나가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일체지(一切智)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하면 대단한 지혜인 것처럼 느낄지도 모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곧 그 특성을 알 수 있는 힘이니까요.
수행은 이 지혜의 힘을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사띠의 명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띠’라는 것은 ‘염(念)’이라고 하는 한자를 씁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말하면 ‘알아차림’입니다. 어떤 현상, 어떤 마음작용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차린다’ 하는 것은 동물에도 반드시 있습니다. 추울 때는 춥다고 알아차리고 더울 때는 덥다고 알아차린다. 그런 것은 누구나 일상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란 능력이 없으면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속에 사띠는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은 그 ‘알아차림’이라는 기능을 발판으로 하여 점점 정밀하고 자세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넓혀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될수록, 마음속의 선한 마음자리가 성장해 갑니다. 선한 마음자리가 성장하면 할수록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소멸해 갑니다.
그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가 모두 사라진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에 이르면 이제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이르면 저절로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팔리어 중에 ‘앗따히 앗따노 낫티’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인데, 자신을 도와줄, 의지할 만한 존재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노력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여야 합니다.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