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권위

사깜마
2024-10-17
조회수 110

* 붓다의 권위 (20220514. 붓다의 날)

 

확신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부처님의 덕(德)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불기 2565년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삼보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붓다의 날은 부처님의 덕을 기리며 웨삭 축제를 보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어떤 생명들도 여래의 덕과 능력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붓다에 대해서 사색하는 것은 불가능한 항목 중에 하나로 꼽았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인격이기 때문에 붓다를 신뢰합시다.”라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써 붓다의 덕과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교도가 매일 소리내어 읽는 “Iitipi so bhagavā arahaṁ sammāsambuddho... buddho bhagavā ti. 실로 자신이 지혜를 가지고 있고, 세상을 잘 아는 뛰어난 지식에 의해 완전히 깨우쳐진 자이며, 법을 가르치는데 숙련되어 신과 인간들을 훈련시킨 위대한 자이다.” 라는 경문에서는 붓다의 아홉 가지 덕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공부하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입니다. 이 아홉 가지 덕도 다른 어떤 생명에게도 유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붓다라는 것은 일체의 생명 가운데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붓다가 위대한 분이라는 것은 단순한 신앙적인 구절이 아닙니다.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붓다를 연구하여 보면 누구든지 존경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사자후(師子吼)의 이유

 

이번 붓다의 날은 중부경전 12. 대사자후경(大師子吼經)에서 "아홉 가지 덕" 이외의 붓다의 능력을 하나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짯따-리마-니 사-리뿟따, 따타-가땃사 웨ㅡ사랏자-니. 예-히 웨-사랏제-히 

사만나-가또- 따타-가또-, 아-사방 타-낭 빠띠자-나-띠, 빠리사-수 

시-하나-당 나다띠, 브라흐마짝깡 빠왓떼-띠.

Cattārimāni, sāriputta, tathāgatassa vesārajjāni. yehi vesārajjehi 

samannāgato tatthāgato, āsabhaṁ ṭhānaṁ paṭjānāti, parisāsu 

sīhanādaṁ nadati, brahmacakkaṁ pavatteti.

 

“사리뿟따여, 여래에게는 네 가지 권위가 있다. 네 가지 권위가 있기 때문에 여래는 우왕(牛王)의 지위를 자칭하며, 여러 모임의 대중에게 사자후를 하여 청정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이대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단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웨ㅡ사랏자-(vesārajjā)

“권위”라는 것은 어떤 학문, 기술 등에서 1위를 한다면 "oo 분야의 권위자"라는 것입니다. 그 분야에 대하여 그분의 견해가 최종적인 견해가 되는 것입니다. 정설(定說)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사방 타-낭 빠띠자-나-띠,(āsabhaṁ ṭhānaṁ paṭjānāti,)

“우왕의 지위를 자칭하며”라는 것은 문학적인 구절입니다. 소[우(牛)]라는 단어는 위대한, 존귀한, 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 경우는 소[우(牛)]가 아니라 우왕(牛王)인 것입니다.

 

다음은, 빠리사-수 시-하나-당 나다띠,(parisāsu sīhanādaṁ nadati,)

“여러 모임의 대중에게 사자후를 하여”라는 것은 여래는 어떤 모임에 들어가도 사자처럼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사자후처럼 강한 소리는 다른 맹수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붓다의 말을 억누르고 이론(異論)을 세우는 것은 어떤 생명에게도 불가능합니다.

 

이어서, 브라흐마짝깡 빠왓떼-띠.(brahmacakkaṁ pavatteti.)

“청정한 법의 수레바퀴”라는 것은 법률 · 헌법 등 누구나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모두를 관리하는 정해진 길을 가는 수레바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법률에도, 헌법에도, 인도 문화적으로는 법륜(法輪)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법이라는 단어는 불교에서는 법률 이외, 진리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법륜이라는 개념은 붓다가 설한 진리(가르침)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청정한 수레바퀴입니다. 이 경우에는 담마짝까[dhammacakka (法輪)]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권위라는 것은 생명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진리라는 말에는 생명은 상관이 없습니다. 과학적 사실, 객관적 사실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 중 최고지위 차원은 범천(梵天)입니다. 지금 석가모니 부처님은 권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최고지위 차원의 생명인 범(梵)이라는 단어를 써서 브라흐마짝까[brahmacakka (梵輪)] 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붓다의 권위는 최고 지위로써 있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권위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것은 그중 하나입니다.

 

• 불도(佛道)

 

붓다의 존재가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은 붓다가 법을 설하였기 때문입니다. 불법은 시대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를 않습니다. 어떠한 시대에서도, 인류의 일체 지식의 선두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가르침에는 잘못이 있다, 보충해야 할 점이 있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라고 까지 설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이 설하여진지 거의 2천6백 년이 지난 지금도 불설(佛說)에 도전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특색은 불도(佛道)입니다. 마음을 완전하게 맑게 하는, 인격을 완성하는, 해탈에 이르는, 일체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이 불도인 것입니다. 가르침이 이론이라면 불도는 실천방법입니다. 부처님이 고마운 것은 실천방법을 설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불도를 실천하여 행복에 이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불도는 항상 개방되어 있는 것입니다.

 

• 확신이 약하다

 

불도를 실천하면 인격이 향상된다, 번민 괴로움이 없어진다. 마음의 더러움이 없게 된다, 해탈에 이른다, 등등을 반복해서 말해도 현대인의 믿음은 약한 것입니다. 감정에 젖어 속세간의 일에 도전하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불도 실천에 대하여 큰 흥미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속세간적인 삶으로써 정신적으로 지치면 불도 쪽으로도 눈을 돌리지만 진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회구조에도 큰 문제가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다른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습니다. 얼마 안 되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하는 사람의 하루를 낭비시키려 합니다. 비록 초등학생이라도 공부에 그 아이의 하루 전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산다, 자유롭게 생각한다, 자유롭게 판단할 여유는 없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같은 흐름입니다. 인간이 살기 어려운 복잡한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사회조직이라는 저인망에 걸려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도는 행복의 길잡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기다리고 있지만, 그물에 걸려있는 사람들은 “그 길이 고맙다”라는 데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써 현대인의 믿음이 약하다고 하는 것은 어쩔 수없는 현상입니다.

 

• 깨달을 수 있는 자격

 

불교도들조차도 “깨달을 리 없겠지요.”라는 심정으로 있는 것입니다. 깨달을 리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불도를 걷고 있는 것일까요? 전통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일반인은 일상적인 의식의례를 행하고, 사회가 요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인은 일상의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을 뿐이고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십시오”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를 지키는 사람들도, 어떤 종파의 불교도도, 해탈·깨달음은 자신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 있는 관할 밖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람은 깨달을 수 없는 것일까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처님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입니다. 당연히 불교가 말하는 진리는 인간의 이해능력 범위를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해탈·열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단어조차도 인류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솔직한 사람이 와서 내가 지도했다고 칩니다. 오전에 지도를 받으면, 오후가 되면 해탈에 도달하여 있을 것입니다.”라고. 그러니까 사람이 솔직하게 있으면 깨달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한 사람은 지금까지 악의 길을 걷고 있어도, 감정에 젖어 생활하고 있어도, 불도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인격의 결점도 다 없게 되어 갑니다. 인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논리적으로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누구나 솔직한 사람일까요? 솔직한 사람은 드문 것입니다. 솔직하다는 것은 추호도 속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의 결점을 숨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장점을 화려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쁜 경우가 되면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장점까지 있는 것처럼 사회에 널리 퍼뜨리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속마음과 겉마음”이라는 두 단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 겉으로 내세우는 것이 사회 상식입니다. 사람은 속마음과 겉마음이 있는 것이 올바른 생활방식이라고 생각하므로 그렇게 쉽게 솔직하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되는 것은 두려운 것입니다. 

 

이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생각한 것을 아무거나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TPO[time, place, occasion= 때와 장소와 경우에 따라 복장이나 행위·말씨 등을 다르게 하는 일]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 충분합니다. 요컨대 속마음과 겉마음이라는 두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다른 생명에 대한 자애 때문이라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상황을 인정하는 솔직함이야말로 불도를 걷는 사람에게 궁극의 안온을 주는 것입니다.

 

이 자격에 또 하나 더 넣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뭔가 하려고 한다면, 그 일을 해내는 성격도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완성시키는 성격이 필요합니다. 말을 바꾸면 쉽게 포기하는 성격은 안 됩니다. 그 포인트를 의욕, 정진 등의 단어로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성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위빳사나 실천을 통하여 행위를 완성하는 만족감을 경험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솔직한 인간이 되는 것은 개개인의 숙제입니다.

 

• 붓다의 제4 권위

 

권위의 1, 2, 3에 대하여 이번에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붓다의 날 축제에 맞추어 권위 제4의 설명을 하겠습니다. 붓다의 말을 구절마다 끊어서 해설하겠습니다. 빨리어 순서에 따라서 설명하겠습니다. 

 

얏사 코- 빠나 떼- 앗타-야 담모- 데-시또-.

Yassa kho pana te atthāya dhammo desito,

“목적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설법을 하였다면”

 

설법의 목적은 일체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궁극의 안온, 즉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괴로움이라고 설한 부처님은 그 괴로움의 일체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법을 한 것입니다.

 

소- 나 니이야-띠 딱까랏사 삼마 둑칵카야-야-띠.

So na niyyāti takkarassa sammā dukkhakkhayāyā'ti.

“가르침대로 올바르게 실천하여 보아도 완전하게 괴로움을 극복한다고 하는 목적에 이르지 않는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붓다는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그대로 실천하여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은 될 수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따뜨라 와따 망 사마노- 와- 브라-흐마노- 와- 데-오- 와- 마-로 - 와- 

브라흐마- 와- 꼬-찌 와- 로-까스밍 사하담메-나 빠띠꼬-뎃사띠-띠 

니밋따메-땅, 사-리뿟따, 나 사마누빳사-미.

Tatra vata maṁ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devo vā māro vā 

brahmā vā koci vā lokasmiṁ sahadhammena paṭicodessatīti 

nimittametaṁ, sāriputta, na samanupassāmi.

"그래서 사리뿟따야, 사문, 브라만, 신들, 마라, 범천, 그 밖의 생명 어느 누구도 나에게 합법적으로 이론(異論)을 세울만한 기척조차 없는 것이다."

 

요컨대 불도에 대해서 이론을 세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정적이고, 선입견에 의해서 붓다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적당한 마음으로 “불도는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이 없는 것을 속이기 위해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이론을 내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성적인 지식인의 방식이 아닌 것입니다. 이론을 세운다면 나름대로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론을 입증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 용어를 사용하면, 사하담메-나(sahadhammena) "합법적"입니다. 합법적으로 이론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결과는 확실하다

 

이 세상에서 100%의 결과가 확률로써 나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비행기를 타고 떠납니다. 사고가 적은 것으로 치면 비행기는 첫 번째가 됩니다. 하지만 비행기는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100% 확실성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의사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 약을 먹으면, 이 수술을 받으면 당신은 100%로 낫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찾아보면 100%의 확실성을 갖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늘을 향해 돌을 던지면 땅에 떨어진다(까마귀가 도중에 가져가지 않는다면). 날이 밝으면 해가 뜬다. 등등.

 

불교가 진리로써 말하는 것은 100% 확실합니다. 예를 들어, 사는 것은 괴로움이다. 모든 현상은 무상(無常)하다, 현상에는 절대 변하지 않는 실체(나)가 없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등의 가르침입니다. 100%가 아닌 경우는 그것을 명확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령 사람의 신구의(身口意)로써 악행위를 한다면 그가 그 길을 바꾸지 않는 한 그대로 간다면 사후에 불행에 빠진다. 이 말에는 조건을 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길을 바꾸는 것으로써 장차 얻을 수 있는 결과를 바꾸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악인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불도(실천)는 100%의 확률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도를 해 봤지만 행복에 도달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렇게 우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솔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속이고 있습니다. 즉, 올바른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탓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의 성격 문제인 것입니다. 솔직한 인간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숙제입니다. 제자가 숙제를 안 하는 것은 스승의 잘못이 아닙니다.

 

• 확신을 가집시다

 

불도의 모든 것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불도는 결코 애매모호한 길이 아닌 것입니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는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절대신(絶對神)을 신앙하면 사후 영원한 천국에 태어난다고 말하는 이야기는 애매모호합니다. 먼저 입증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죽은 사람은 영원한 천국으로 갈지도 모르고,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반의 이야기입니다. 붓다는 반반의 말은 다 버립니다. 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이 있는 길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비행기의 엔진에 큰 문제가 발견되었지만, 운을 하늘에 맡기고 비행하는 것으로 했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그 비행기를 탈 것인가요? 무사히 목적지에 착륙할 가능성도 있고, 추락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그 비행기를 취소하여야 합니다. 인생은 반반으로 도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친김에 기억해 두십시오. 속세간에서 우리가 흔히 행하고 있는 도전에는 반반의 기회조차 없는 것입니다. 

 

• 붓다는 위대하다

 

이렇게 100%의 확률로써 진리를 말씀하신 유일한 분이 붓다입니다. 100%의 확률로써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을 말씀하신 유일한 분이 붓다입니다. 붓다에 비견되는 생명은 인간, 신들, 마라, 범천이라는 생명의 모든 차원 안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지구에 빛을 주는 태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손전등 빛으로는 태양을 이길 수 없는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인격자인 붓다의 제자들입니다.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100%의 확실성 있는 길을 부지런히 실천하여야 합니다. 불교도는 자신의 삶에 대해 주저없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붓다에 대하여, 가르침에 대하여, 팔정도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 절대적인 권위로 말하다

 

에-따마항 사-리뿟따, 니밋땅 아사마누빳산또- 케-맙빳또- 아바얍빳또- 웨-사-랏잡빳또- 위하라-미.

Etamahaṁ sāriputta, nimittaṁ asamanupassanto khemappatto abhayappatto vesārajjappatto viharāmi.

합법적으로 이론(異論)을 세울 수 있다는 기척조차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안온의 경지에 이르렀다. (불안하게 되어버리는 원인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에 불안하게 될 가능성조차 없다.) 무외(無畏)의 경지에 이르렀다. (부처에게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생길 곳이 없다. 마음속에 “위험하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불도에 있어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행복을 목표로 한다면

 

참된 행복을 추구한다면, 부처님이 “그만두십시오”라고 말씀하신 항목을 변명하지 말고 절대로 그만 두어야 합니다. “실행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신 항목을 변명하지 말고 꼭 실행해보아야 합니다. 도(道) · 비도(非道)는 붓다가 다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신앙을 추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 이성적인 사람에게는 붓다의 설하신 가르침이 맞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철저히 조사할 자유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불교라는 것은 미신 맹신을 단언적으로 물리치고, 이성에 입각한 삿다(saddhā, 확신)을 추천하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틴생 · 성도 · 반열반이라는 3대 성스러운 일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 기념일을 축제로만 끝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인 붓다는 얼마나 덕이 있는 분일까요”라고 되새겨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달에는 붓다의 가르침의 수많은 덕 중에서 붓다의 권위 넷째 항목을 염두에 두고 관찰하여 봅시다. 이 명상에 의해서 여러분에게 행복이 찾아오기를 서원합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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