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8강. 신념처- 아나빠나 사띠 : 위빳사나 수행의 과정 (20110416)

담마마-마까
2021-06-07
조회수 738

https://youtu.be/mSrjmJQ7G8Y

       

8강. 신념처- 아나빠나 사띠- 위빳사나 수행의 과정 (20110416)

       

보통 수행을 시작하면 알아지는 단계들이 있습니다.

보통 하다가 보면 맨 먼저 알아지는 진리가 뭐냐면 '둑카(dukkha)' 부분입니다. '아! 불만족스럽다' 변해가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해서 맨 먼저 알아지는 것이 그것이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공통적으로 '둑카(dukkha)'라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게 첫 시작 단추죠! 둑카에 대해서 알지를 못하면 둑카의 소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사실은 둑카와 둑카의 소멸에 대해서 얘기를 한 것이지 다른 것을 얘기한게 아닙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들을 얘기 한 거죠. 그래서 수행을 시작하면 맨 처음 하는 것이 이 둑카에 대한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1)

 

그다음에 이해가 되는 것들이 뭐냐면 둑카가 이해되고 나면 '아! 내가 조금 더 공부를 해봐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솟습니다.

그걸 보통 '삿다(saddh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아! 이 길 따라 내가 더 수행을 해봐야 되겠다.' 그런 '확신'들이 들어서 이길 따라서 줄곧 나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들어갑니다. (2)

 

그렇게 '삿다'가 들고나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들이 보통 '빠못짜(pāmojja)'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보통 그걸 '희열'이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모든 일에 하는 일들이 좋아! 못생긴 사람을 봐도 얼굴을 히죽히죽하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도 항상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한 것처럼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걸 '빠못짜'라고 그럽니다. (3)

 

그런 상태가 좀 지나고 나면 보통 '삐띠(pīti)'라 해서 인제는 그런 희열하고는 다르게 '기쁨'의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어떨 때는 그 기쁨을 주체를 못 할 정도가 되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4)

 

그러다가 이게 조금 지나고 나면 '빳삿디(passaddhi)'라 해가지고 조금 '평온'해집니다. 기쁨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하면서 대상을 대하더라도 조금 더 평온하게 대하게 됩니다. 그리해도 마음에는 그런 기쁨이나 행복감들은 가득한 상태에서 좀 평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감정의 폭이 많이 줄어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크게 슬퍼하지도 않고 이런 상태가 됩니다. 그걸 '빳삿디의 상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5)

 

그 상태가 지나고 나면 그다음에는 '몸이 행복을 경험'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걸 '수카(sukha)'라고 그럽니다. 항상 평온하고 항상 행복한 상태. 몸도 그럴 뿐 아니라 마음도 그렇게 됩니다. 그럴 때는 몸을 보면 들뜨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호흡도 아주 부드럽고 미세해져 있지 거친 호흡들이 없습니다. 그렇게 거칠고 하는 것들을 피하게 되어버리게 되죠. 그런 상태에까지 들어갑니다. (6)

 

그러다가 어느 계기가 되면 '사마-디(samādhi)' 쪽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 오롯이 '집중'을 하게끔 이렇게 됩니다. 가끔씩 '선정'에 들기도 하고 그렇게 하죠. (7)

 

그 상태가 지나고 나면 오늘 배워야 될 부분들 '야타부따'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단계' (8)

 

이 앞의 일곱 개 단계는 여러분들이 호흡을 관찰하면서 똑같은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덟째부터 '야타-부-따 냐-나닷사나(yathābhūta ñāṇadassana)'라고 그러죠! 한자로 '여실지견' 그렇게 얘기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는 상태' 대상을 보더라도 마음은 고요하고 또 몰입돼가지고 삼매에 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대상이 실재하는 성품들을 인제는 보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 밑에 쭉 세 번째 '위빳사나-(vipassanā)' 라고 해가지고 a. b. c. d. 해가지고 열 개를 쭉 적어놓은 그 과정입니다. 대부분 세 묶음 세 묶음 식으로 분류가 되게끔 됩니다.

 

대충 그런 과정들을 겪게 되는 데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변해가게 돼있고 그것이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려고 자꾸 하게 됩니다. 멀리 벗어나려고. 똥이 여러분들이 더럽다는 사실을 인지를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것으로부터 피합니다. 그걸 보통 '닙비다(nibbidā)'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기서부터 그것이 더럽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9)

 

그러고 나서 인식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게 '위라-가(virāga)'라 해서 그곳에서부터 벗어나버립니다. 다시는 그 주위로는 안 가려고 그럽니다. 그렇게 되니까 항상 마음은 그런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돼있습니다. (10)

 

그래서 마음이 항상 청정한 상태, '위뭇띠(vimutti)'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11)

 

그러고 나면 '냐-나(ñāṇa)'들이 더욱 계발이 되는 거죠.

'아-사왁카야(āsavakkhaya)'라 해서 번뇌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소멸시키는 단계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12)

 

보통 이런 과정들을 수행을 하다 보면 겪게 됩니다.

 

여기서 '야타-부-따(yathābhūta)'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것이 있는 그대로의 성품입니까? 실재하는 성품입니까?

실재하는 성품은 변하게 돼있습니다. 실재하는 성품은 둑카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성품은 '아낫따'라고 하는 성품을 가지게됩니다. 그러니까 삼법인의 성품을 갖다가 가지고 있는 게 실재하는 성품입니다.

 

사마디에 이르러가지고는 실재하는 성품을 도저히 알 방법이 없습니다. 사마디는 하나의 대상에 머물러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때문에 그 사마타 수행으로는 이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사마타가 깊어질 수는 있겠죠.  

 

그래서 "야타부따의 과정부터는 위빳사나(vipassanā)의 과정이다" 하고 보통 얘기들을 하게끔 되는 겁니다.

그래서 똑같이 호흡을 관찰하더라도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것만 오로지 관찰하는 게 아니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더라도 들이쉴 때 움직임이 변하는 것, 내쉴 때 움직임이 변하는 것, 또 들이쉴 때 갖가지 느낌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그 느낌이 변화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렇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사마타 수행할 때는 그렇게 안 했죠!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만 합니다. 어떤 대상이 나타나도 그걸 무시해버리고 호흡을 하고 있으면 호흡을 '들이쉼' '내쉼' 하고 그것만 명칭 붙여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는 호흡도 이렇게 변화되는 것들과 무상한 것들을 알아차릴 뿐 아니라 마음이 호흡에만 가있지 않고 다른데 가 있을 거 같으면 그 대상을 또 알아차려야 됩니다. 마음에 생각이 일어났으면 그 생각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다리에 통증이 있으면 다리에 통증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리하더라도 생각이든지 다리를 관찰할 때도 똑같이 삼법인의 특성으로써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라. 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성품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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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방법 10가지 ] 

 

a. iti ajjhatta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이띠 앗잣당 와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

 

첫 번째,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안으로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러니까 머문다는 겁니다.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라 그것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져서 관찰을 하라하는 겁니다. 앞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왔다는 건데, 쉽게 말하면 앞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사마타 수행방법으로 해왔든 위빳사나 수행방법으로 해왔든 어쨌든 그런 방법으로 쭉 해왔던 것에 이어가지고 이제부터는 이렇게 관찰을 하라는 겁니다.

 

호흡이 길면 길다고 알고 호흡이 짧으면 짧다고 알고 호흡의 전체적인 것들을 갖다가 분명하게 알려고 하고 또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상카라' 작용들을 쉬도록 만들어서 호흡을 하고 이런 과정들을 겪어왔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인제는 그렇게 하는데 '안으로 관찰을 하라' 합니다. 마음을 밖에 두지 마라라는 겁니다. 안으로 둔다고 하는 것은, 관찰하는 것은 마음으로 관찰을 합니다. 그러니까 호흡을 관찰할 때 마음이 그 호흡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을 마음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관찰을 하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관찰을 하느냐는 거라 그걸. 무상·고·무아로써!

아! 이렇게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은 변하는구나. 그래서 영원한 것이 아니구나. 들이쉬고 나면 반드시 내쉬어야 되는구나.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항상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내가 들이쉬기만 계속하고 내쉬기는 안 하겠다 한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알아차리라. 

쉽게 말하면 이 호흡이라고 하는 것, 몸으로 인해 짓고 있는 이 호흡이라고 하는 것은 '나가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영혼이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관찰을 하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호흡을 할 때 거친 호흡은 실제적으론 이렇게 관찰을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미세해지고 안정된 호흡이면 반드시 이제는 이렇게 관찰을 해야 됩니다.

거친 호흡이면 그냥 호흡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것만 알면 됩니다. 그러면 크게 마음이 거기에서 다른 데로 벗어나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호흡이 안정되어 버리면 마음은 쉽게 벗어나버립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방식으로 들이쉴 때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고 내쉴 때 '사라짐' 하고만 알아차린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마음이 거기에 가만히 붙잡혀있지 못합니다. 호흡은 더욱더 미세해지기 때문에 호흡을 알아차리기조차도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당연히 벗어나게 됩니다. 다른 것들로 이동을 하게끔 되죠.

 

이때 관찰할 때는 '사대 요소로써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호흡이 안정되고 미세해지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에서 호흡의 요소 중에서 부드럽고 딱딱하고 열이 나고 차갑고 하는 그런 요소들로써 알아차리는 것이 이해하기가 수월하다는 겁니다. 뜨겁다고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 뜨거움이 항상 있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나는 뜨거워서 못 견딥니다. 차갑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차갑다는 것이 항상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차가워서 못 견딥니다.

여러분이 불 속에 있을 때, 그 더운 열기가 가만히 그대로 유지가 된다고 할 때 여러분은 못 견딥니다. 차가운 물 속에 가서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우리는 뜨거운 불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나오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있다고 생각을 안 하는 거고, 차가운 물에 들어가더라도 다시 거기서 빠져나오기 때문에 항상 차갑다고는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때 차갑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뜨거움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뜨거움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은 알고 있게 됩니다. 차가움을 알 때도 차가움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변하지 않을 거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 요소를 관찰하고 있으면서 그것 때문에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대요소를 관찰을 하라 하는 겁니다. 변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그다음에 또 관찰을 해야 되는 게 뭐냐면 '사대 요소에 대해서 일어나는 마음'이 있습니다. 뜨겁다 할 것 같으면 뜨거움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시원하다 할 거 같으면 시원한 것들을 붙잡으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부드럽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부드러운 요소에 머물려고 합니다.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사대 요소로 인해서 일어나는 욕망,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 그 욕망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대 요소에 대해서 관찰을 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첫 번째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안으로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몸, 호흡하는 몸, 그 호흡을 알아차릴 때 사대 요소로써 알아차리라.

그 사대 요소도 변화되는 성품, 둑카의 성품,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성품으로써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런 성품으로써 알아차리게 될 때 그런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 탐․진․치를 소멸하는 방향으로 알아차려 나가라.

이게 첫 번째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어떻게 합니까? 호흡 관찰할 때? 숨을 들이쉴 때 팽창하는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그 팽창하는 것이 항상 똑같은 것으로 팽창하는 것이 아니고, 팽창하는 것이 점점 더 팽창하는지, 아니면 팽창하다가 다시 멈추는 건지, 이렇게 변화되는 것으로 알아차려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b. 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바힛다- 와-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밖으로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라.' 라고 얘기합니다. 밖에 것들을 알아차려라는 겁니다.

수행은 어떻게 해야됩니까? 자기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거죠! 그럼 밖에 걸 어떻게 알아차릴 거라? 어떻게 알아차려야 될까? 주석가에 따라서 이것을 해석하는 방법이 갖가지입니다.

 

어느 스님이 수행을 해나가다가 수행이 안 돼서 '아! 이제 좀 쉬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들어가지고 처마 밖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걸 이렇게 봤어요. 물방울이 떨어지면 어떻게 돼요? 천천히 쭈욱 떨어집니다. 그럼 가속도가 붙어가지고 마지막에 가서는 바닥에 딱 떨어지면서 이게 착 퍼져나갑니다. 그러고 또 다른 것이 그렇게 떨어져서 퍼져나가고 그 모습을 그대로 보고 알아차려서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이루게 됩니다. 밖의 요소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요소들로써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는 요소들로써도 내가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라는 얘기입니다.  

 

그것뿐 아니라 누군가가, 경전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그럽니다.

"톱으로 너의 몸을 누군가가 절단을 한다 하더라도 네가 만약에 분노를 일으키면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누가 나를 탁 베었단 말이라 밖에서. 그렇게 베었는데도 그것으로 인해서 분노를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그럼 분노를 안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밖에 요소들로 인해서 내가 관찰을 뭘로 해야 돼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로써 관찰'을 해야 됩니다. 이만큼 베었을 때 관찰하는 것, 요만큼 베었을 때 관찰하는 것, 그리고 거기서 피가 나왔을 때 관찰하는 것, 갖가지 다 다릅니다.

그리하더라도 어떤 상황 조건이라도 거기서 분노를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그대로 따라가면서 있는 그대로 관찰을 하라는 거라. 그래서 스님들이 자살을 할 때 마지막 자살의 순간에 깨달음을 이룬 게 밖의 요소로 인해서, 관찰은 실제적으로는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관찰을 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 대상은 바뀌지만. 이게 뭐냐면 '밖으로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걸 잘못 해석해버리면 추론적으로 돼버립니다. '내가 호흡을 이렇게 하고 있듯이 너도 이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또 아니면 다르게 해석을 할 것 같으면 표면적인 것들, '마음에서 현상을 알아차리려면 물질적인 마음이 먼저 일어나지고 그 표면적인 것으로 인해서 실재하는 안으로 정신적인 마음이 일어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인 수행하고는 관계없죠.

 

그래서 밖이라고 하는 것은 밖의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일으키는 몸과 마음을 관찰대상으로 할 것. 이것이 '밖으로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무리 밖이라고 하더라도 내 마음이 직접적으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밖의 대상이지만은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을 하라. 그것이 물질적인 현상을 일으켰을 때 그 물질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하는 겁니다. 톱으로 베이는 것은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나집니다. '밖의 대상으로 인해서 내 몸의 물질적인 현상을 그대로 알아차려나가라'

 

우리 몸의 사대 요소는 밖의 사대 요소에 포함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죽고 나면 어떻게 된다고 그래요? 몸이 사대로 흩어져버린다고 그러죠. 몸이 물질적인 것 중에서 물의 성분은 땅으로 흡수되고 불의 성분은 또 불의 성분대로 날아가고, 이렇게 해서 생물이 아닌 것 무생물의 사대 요소에 이 몸도 흡수돼버린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안의 요소는 밖의 요소의 지배를 받는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밖의 요소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무생물의 요소들을 관찰대상으로 할 경우에 얘기를 한다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마음으로 무상하고 변하는 것들로써 알아차려라 하는 것들입니다.

이게 인제 '밖으로'의 의미입니다.

 

c. ajjhatta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앗잣따바힛다- 와-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라.' 머물러라 하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날 때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을까?

'나', '너', 이런 '견해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물건, 나의 것이라고 할 때는 '갈애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나의 영혼, 나라는 하는 것이 존재한다 이렇게 할 때는 자만, 내가 숭고하다, 내가 존재한다, 내가 높다 하는 '자만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집착들로부터 벗어나게 되라고 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그걸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라'

 

'나'라고 하는 사대 요소는 밖의 사대 요소에 종속되게 되어있다. '아쩻다나 바와'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나라고 하는 것은 참 어찌 보면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무상한 것이다, 부정한 것이다 하고 자꾸 알아차려라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이게 첫 번째의 세 가지를 얘기를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밖을 대상으로 해서 관찰하기는 참 힘이 듭니다.

부지런히 수행을 한 사람이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때리는 것으로 인해서 그것을 관찰대상으로 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러면 초보 수행자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밖의 대상을 수행대상으로 삼으면 안 돼!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 수행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것들로 먼저 수행대상을 삼도록 자꾸 하라. 그리해도 나중에는 밖을 수행대상으로 하게 됩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에도 누군가가 부처님에게 힐난하더라도 부처님은 그것에 대해서 요동을 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렇게 밖의 것도 내 수행대상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여러분들이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실제로는 여러분들에게 대상이 되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거보다 밖의 것들이 더 훨씬 많죠! 그 밖의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많이 변하고 힘들어지기도 하고 기뻐지기도 하고 그리합니다. 그래서 이 수행에서는 안과 밖을 다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라 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하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d. Samud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ṁ viharati.

사무다야담마-누빳시- 와 -까-야스밍 위하라띠.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사무다야 담마'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라.'

그러니까 일부러 일으킬 필요는 없죠! 그런데 일어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 태어났으면 어쩔 수 없이 밥을 먹어야 되는 거고 또 잠을 자야 되는 거고 이렇게 계속적으로 뭔가가 만들어지게끔 됩니다. 그걸 '일어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거는 뭐가 있습니까? 여기서 몸이라고 하는 거는 호흡입니다. 호흡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뭐가 있어요? 일으키게 하는 요소들.

먼저 몸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만이 호흡을 하게끔 됩니다. 몸이 없으면 호흡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 사람들은 호흡하기 위해서는 콧구멍이 있어야 됩니다. 물론 수행이 깊어지면 콧구멍으로 말고 이 몸으로도 호흡을 합니다. 일정 시간 동안은.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콧구멍이 있어야 호흡을 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필요한 게 호흡을 하려면 마음도 있어야 됩니다. 몸이 있고 콧구멍이 있다 해도 의식이 빠져나가버리면 호흡은 멈춰져있지 호흡을 안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어야됩니다.

호흡이 일어나게 하는 요소들은 이 세 가지들이라는 거라. 이 세 가지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라하고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또 달리 얘기를 하면 호흡이 일어났으면 호흡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라는 거라. 매순간 호흡을 합니다. 그럼 호흡은 일어나게끔 돼있습니다. 그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호흡했으면 호흡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발을 떼었으면 발을 떼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시작을 할 때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마음이 고요해지고 집중이 이루어지면 호흡의 시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호흡으로 인해가지고 물질적으로 일어나는 호흡으로 인해서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압니다. 호흡을 하니까 당연히 우리는 수·상·행·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인과관계들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그래서 물질적인 것이 일어날 때는 물질적인 것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고, 정신적인 것이 일어났을 때는 정신적인 것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누가 나에게 뭐라 한다. 꾸짖는 말이 있다. 그럼 그건 어떻게 해? 이 귀의 접촉 청각의 접촉이 그다음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 청각의 접촉이 일어나면 그걸로 인해서 꾸짖는 소리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괴로운 느낌은 정신적인 느낌입니다.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 꾸짖는 것은 물질적인 현상이라는 거라. 그래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는 거라. 일어났으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될 때는 그렇게 된다는 거라.

 

그럼 이걸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소멸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느낌이 무상하다고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그 느낌이 무상하다고 알 것 같으면 그걸 붙잡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정신적으로 일어난 괴로운 느낌도 무상하다고 알고 놓아버리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지 않게끔 되는 거라. 상대방이 물질적으로 꾸짖는 것도 그게 무상한 것인 줄 알 것 같으면 물질적으로 계속 꾸짖는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을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일어난 현상은 어떤 것이든지 조건성을 띄게 돼 있다는 거라. 조건지어진다는 거라. 꾸짖는 소리도 나의 청각이 없을 거 같으면, 이런 조건이 없을 거 같으면 나에게 괴로운 느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연기의 법칙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것이 일어났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나는 것이고, 저것이 일어났기 때문에 또 다른 이것이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소멸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놓치지 않고 관찰 수행을 하면서 지내라. 그런 뜻이 됩니다.

 

e. vaya 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ṁ viharati.

와야 담마-누빳시- 와- 까-야스밍 위하라띠.

 

그다음에, '와야담마'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라.'

마찬가지로 사라지게 하는 요소는 몸이 부서져버리든지 아니면 콧구멍이 제 역할을 못하든지 아니면 마음의 기능이 정지를 하든지 그럴 것 같으면 호흡은 사라집니다. 그런 것들이 그 요소가 된다는 거라. 호흡을 들이쉬었으면 내쉬어야 됩니다. 내쉬는 그게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거라. 요소는 요소대로, 현상은 현상대로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사라지는 걸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될까? 언젠가 스님이 한번 이 부분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멈춤'을 알아라. 사라짐을 분명하게 이해하려고 할 것 같으면 멈춤을 알아라.

호흡이 시작돼서 끝나는 것을 알고 나면 끝나면 반드시 멈춘다는 거라. 그래서 그 끝나고 나서의 '멈춤'을 알아라. 이게 '사라짐'이라는 거라. 멈추었을 때는 대상이 없어져버립니다. 수행이 깊어지든, 그렇게 깊지 않고 일반적으로 수행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지.

 

왜 사라짐을 관찰하라고 했을까? 그냥 일어남만 관찰하라 그러지 부처님은 사라짐을 왜 관찰하라 그랬을까? 그것으로부터 떠나라는 거라.

집착하고 하는 것들로부터 떠나라는 거라. 떠나기 가장 좋은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노·병·사(老病死)입니다. 늙음에 대해서 관찰하고, 병든 것에 대해서 관찰하고, 죽음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떠나려고 할 때는 아까 뭐라 그랬어요? 그것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됩니다. 죽은 사람 모습 한번 봐봐.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으로부터 떠난다는 거라. 이것이 번뇌라는 것들을 알 거 같으면, 그래서 그 번뇌가 싫다는 걸 알 거 같으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염리(厭離) 상웨가(saṁvega)' 사라짐을 관찰해야 경우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라.

멈춤을 알게 됐을 때 사라짐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f. samudaya vaya 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ṁ viharati.

사무다야 와야 담마-누빳시- 와- 까-야스밍 위하라띠.

 

그다음에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도록 하라.'

 

이렇게 세 가지씩 해서 두 묶음이 일어났습니다.

 

g. 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앗띠 까-요띠 와- 빠낫사 사띠 빳쭈빳티따 호띠.

 

그다음에는 뭐냐면, '그는 연이어서 오직 몸이 있다라고 알아차림을 확립하게 되고.' 그렇게 돼있습니다.

몸이 있다. 그러니까 호흡만이 있다는 뜻입니다. 호흡만 있는 것이지 '내가 숨 쉬고 있다'라고 알아차리면 안 된다는 거라. 아낫따(anattā)로 알아차리라는 거라. 무아로써. 나, 자아라고 하는 그런 것들로써 알아차리지 말고, 오직 몸만 있다는 거라. 호흡만 있다는 거라. 그 호흡은 누가 만드는 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명령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어떤 절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호흡만이 있다고 알아차려라는 거라. 조건 따라서 일어나고 조건 따라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라. 그게 연이어서 오직 몸이 있다 라고 알아차림을 확립하라 하는 겁니다.

 

순차적인 거죠! 앞에 거하고. 앞에 것들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관찰을 하게 되고, 일어나는 현상과 사라지는 현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되면, 당연히 나의 몸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그냥 호흡만 있다. 나라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몸이 있다라고만 알아차린다는 거라. 무아라고 알아차리게 되고.

그게 '연이어서 오직 몸이 있다 라고 알아차림을 확립하라.'

 

h.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야-와데와 냐-나맛따-야 빠띳사띠맛따-야.

 

그렇게 하면, '이와 같이 하면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더 높은 지혜의 단계와 이해의 단계까지 도달하게 된다.'

현재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대상을 그 순간, 일어난 순간에 알아차려야만이 올바른 지혜가 일어납니다. '부땅 부따또 빳사띠(bhūtaṁ bhūtato passati)' 그렇게 얘기합니다.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 만이 지혜가 일어난다는 거라. 스스로 노력해서 그것을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걸 보통 불교에서는 '냐나(ñāṇa)'를 세 가지로 얘기를 합니다.

한문으로 얘기를 하면 '문소성(sutamaya ñāṇa)'이라고 해서 들어서 아는 지혜, 경전을 읽든지 법문을 듣든지 해서 들어서 아는 지혜.

그다음에 '사소성' 그렇게 얘기합니다. 생각해서 아, 이것은 이러니까 저것은 저럴 것이다 하고 '찐따마야냐나(cintāmaya ñāṇa)' 라고 합니다. 생각해서 일어나는 지혜. 이 두 가지는 굳이 수행 안 해도 일어날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바와나마야 냐나(bhāvanāmaya ñāṇa)'라는 것은, 실천해서 그것을 깨달아가지고 일어나는 지혜(수소성)는, 내가 반드시 현재 지금 일어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 일어나는 순간순간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지혜라는 거라.

 

그래서 이 지혜를 보통 16단계로 구분을 해놓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지혜들로부터 해서, 쭉 나아가서 상카루뻭카 냐나에서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을 가지는 지혜로부터해서, 나중에는 도와 과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서 내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구나 하고 알게 되는 지혜로까지, 전체 16단계로 그렇게 나아가게 된다는 거라. 단계적으로 자꾸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그걸 어떻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지금을 대상으로 했을 때!

현재 분명한 대상, 분명하게 일어난 것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것을 놓치지 않고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이어나가면 지혜는 일어난다. 그게 '이와 같이 알아차림으로 계속 알아차려나가면 더 높은 지혜의 단계와 이해의 단계까지 도달한다' 하는 뜻입니다.

 

i.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아닛시또 짜 위하라띠 나 짜 낀찌 로께 우빠-디야띠.

 

그다음에 있는 것이 뭐냐면, '의존하지 않고 머무르고, 어떠한 물질적 정신적 세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의존하지 않고 머물러라. 의지하지 말고 살아가라.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아따노 로꼬 아나빗사로(Atano loko anabhissaro)' 그럽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누가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게 있어요? 내 재물이 날 지켜줄 거라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를 지켜줄 거라? 어떤 것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거라.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우린 자꾸 의존한다는 거라. 의존하지 말고 머물러라는 거라.

 

대상도 마찬가집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더라도 그 대상에 의존하면 안됩니다.

주대상이 호흡이니까 호흡만을 의존할 것 같으면 다른 대상은 놓쳐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마음이 이미 다른 대상으로 가 있는데. 지금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게 주 대상이라는 거라. 그걸 자꾸 호흡만이 주 대상이라고 생각할 것같으면 호흡에 의존해버리는 거라. 그러면 현재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의존하지 말고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에 머물도록 하라. 생각이 일어났으면 생각에 머물러서 알아차리는 것이고, 느낌이 일어났으면 느낌에 머물러서 알아차리도록 하라. 이 세상 것 어느 것도 의존하고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없듯이 수행의 대상도 마찬가집니다.

동일하게 수행의 대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대상은 바뀌어나갑니다. 호흡이 주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조금 전에 들이쉰 호흡하고 지금 들이쉰 호흡하고는 대상이 이미 다른 대상입니다. 머무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라.

 

그다음에 것이, 어떠한 물질적 정신적 세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게 의존하지 않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무상·고·무아로써 알아차려 나가게 되면 수행이 깊어지기 때문에 어떠한 물질적인 현상 정신적인 현상은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라고 안다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여기서 세상이라는 것은 '오온'입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느낌에도 집착하지 않고, 인식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지각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형성되는 형성력에도 집착하지 않는 거고, 물질적인 호흡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들어왔으면 나가게, 자연스럽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만 알아차려나가게 된다는 거라.

이렇게 '오온', 여기서는 '세상'이라고 돼있습니다. 그 오온의 집착으로부터, 집착하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열반의 길인 거고, 그 오온에 집착해서 속박되어져 있는 것이 범부중생의 삶이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속박하는 것은 누가 속박합니까? 나 자신이 붙들어 매는 겁니다. 나는 왜 이리 계속 윤회를 하는가? 윤회를 누가 뭐 붙잡아 두어가지고 윤회를 하나? 자기 스스로 속박을 하고 있는데, 뭔가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속박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나무기둥에 1m의 밧줄로써 소를 매 두면 그 소는 1m 거리내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2m 거리가 미치는 줄에다가 매어놓은 소는 2m 범위내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10m의 줄로 매어놓은 소는 10m의 거리 내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거라. 그 줄, 속박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마음대로 다니게 된다는 거라.

 

묶어두는 줄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만드는 속박이라는 거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현상, 오온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바로 속박이라는 거라.

그렇게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바로 열반의 길이고 열반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거라.

 

j. Evampi kho,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에왐삐 코 빅카웨 빅쿠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

 

그래서 마지막에, '빅쿠들이여 이와 같이 확실히 비구는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라' 하고 얘기 합니다. 확실하게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라는 거라.

 

어느 노스님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참 여기 스님 앞에 있는 거 같은 경탁 위를 막 이래 뒤져쌌거든. 제자가 “스님 뭐를 찾고 있습니까?” 열쇠 찾고 있다는 거라. “우리 노스님이 눈이 잘 안 보여서 못 찾는 거 아이가” 해가지고 제자들이 열심히 찾아줍니다. 여기도 들여다보고 저기도 들여다보고 하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라. 없는 거라. 스님 여기 열쇠 없다는 거라. 그때 노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을 찾아라"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눈에 보이는 장소만 찾는다는 거라. 여기 없으면 또 저쪽에 가서 찾고, 눈에 보이는 장소를 찾는다는 거라. 그런데 행복은 눈에 보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마음에 있는 것이지. 그럼 자기 마음을 찾을 거 같으면 행복해진다는 거라. 그런데 자꾸 눈에 보이는 대상만 자꾸 찾는다는 거라.

노스님이 그럽니다. 절대 그렇게 해가지고는 열쇠를 못 찾는다는 거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 같으면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할 것 같으면 자기의 마음을 찾아라는 거라.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가지고 그걸 찾으라는 거라.

그럼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거라.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진다는 거라.

 

수행은 그와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대상이 되는 것이지 다른 것들이 대상이 된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지 그것은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것이 밖의 대상일 뿐이지. 그 밖의 대상도 수행대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행은 내 몸과 마음으로 하는 거라. 수행은 그래서 부지런히 해야 됩니다. 자꾸 게을러지려고 하고 이것으로 됐다고 할 것 같으면 안 됩니다. 부지런히 자꾸 노력해서 이 길을 가겠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appamādena sampādethā'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라.'

부처님이 마지막 열반하시면서도 그 얘기를 한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이제 오늘로써 첫 번째 부분이 끝이 났습니다. 몸의 호흡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건. 부지런히 해야 됩니다. 배웠으면 배운 대로 그대로 부지런히 해야지 다르게 자꾸 나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 방법으로 부지런히 자꾸 하라는 거라.

 

“왜 이리 나는 진척이 없습니까?” 부지런히 안해서 그런 거라.

수행은 여러분들 자신이 하는 것이고 여러분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수행의 대상이다하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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