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출식념경』과 위빠사나 수행의 일반적 관계
반테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
위빠사나 수행의 요체
위빠사나 수행은, 윤회를 지속시키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 가운데서, 무상, 고, 무아를 개념 없이 직접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수행자들은 괴로움에서의 해탈과, 그 해탈에 대한 지견(..見)을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과거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들은 모두 몸에 대한 마음챙김 수행(신념처)을 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그분들은 이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ANi:43, 45; SN:1627 (비구보디역); MN:956ff (비구보디역)
과거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분들은 모두 사념처 수행의 길을 갔습니다. 현재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 또한, 모두 사념처 수행의 길을 가야합니다. 우리가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ati) 수행을 하거나 몸에 대한 마음챙김(kāyagatāsati) 수행을 하거나 사념처(cattāro satipaṭṭhāna) 수행을 하거나, 우리는 사념처 전체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수행을 하지 않고 우리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이 가르침의 힘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위해 몸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몸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란 몸의 구조, 무기질, 화학적 체질, 그리고 몸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적 요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만 비로소 알게 됩니다. 현대 기술과 과학은 몸에 대해 놀랄만한 정보를 제공해 왔습니다.
심리학, 철학, 심지어 신비주의까지도, 몸에 대한 많은 지식을 제공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영적인 수련은 밖에서 해답을 얻도록 우리를 이끌어 왔습니다. 기술, 철학, 심리학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몸에 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술과학이 보다 발전된 나라에서는 먹는 것이 비만으로 연결되어,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과학자들은 전화기 전신기, 하이텍 무기, 정보 통신기, 스포츠 기구, 운동 기구등등, 이를 기술적으로 더 발전시키기 위해, 시간을 온통 쏟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구들을 배워서 사용하느라 아주 바쁩니다. 새 기구가 시장에 나오고, 그것을 사서 배우느라 한 이주 애쓰는 동안, 완전히 배우기도 전에, 더빠르고, 부품이 더 많고, 더 발전된 기구가 시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또 새것을 삽니다. 때로 새기구는 기계병균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계병균을 제거하는 방법을 배우느라 애쓰는 동안, 더좋고 발전된 기구가 시장에 나옵니다. 새기구가 가진 문제점에 짜증이 나고, 더 빠르게 잘 하고 싶은 욕망에, 사람들은 또 새물건을 삽니다. 소비자 보다 항상 앞서가는 새 물건에 보조를 맞추기가 힘듭니다. 이것이 항상 변하는 상카라, 업행의 원리입니다.
경쟁은 사방에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습니다. 건강한 몸이 건강하지 않게 됩니다. 몸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갑자기, 위궤양, 암, 당뇨, 고혈압,두통, 위장병, 콩팥, 심장병 등으로 자신이 아프고 늙었음을 깨닫습니다. 급히 몸을 고쳐보려고 하나 이미 너무 늦어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단 20분을 조용히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심히 긴장되고, 불안합니다. 십 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르고 서두르고 서두릅니다. 그런데 몸을 성찰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우리 몸을 상하게 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건강하지 않은 정신적, 육체적 습관(akusalasīla)과 더불어 시작합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몸은 마음 없이 활동할 수 없습니다. 몸이 하는활동은 눈에 잘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이 하는 활동 즉 걷는 행위, 말하는 행위, 먹는 행위, 글쓰는 행위, 읽는 행위, 노는 행위,서있는 행위, 그밖의 많은 신체적 행위, 언행, 정신적행위를, 우리는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입출식념경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은, 몸 성찰의 첫 번째입니다. 붓다께서는 이를 일컬어 “몸 가운데의 하나의 몸, 즉 들숨과 날숨”이라 하셨습니다. (MN #118, Ānāpānasati Sutta, 비구 보디역. 945ff)
그러므로, 호흡은 나머지 다섯 가지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내내 숨을 쉬어오고 있지만, 호흡에 완전히 집중하기 전에는, 실제로 호흡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호흡 에 집중할 때, 모든 것에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모든현상(법)은 마음집중에서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입출식념경』의 구조를 보면, 내용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분이 똑같이 네 쌍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명료하고 외우기가 쉽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경 전체를 외우고, 외운대로 수행을 해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한곳에 좌정하고 마음을 첫번째 단계에 집중한 후 몇 분이지났을 때, 일선정에 들었다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됩니다.
네 단계의 각각 마지막에는, 염각지가 자리잡을 만큼 강한 염식(깨어있는 마음)이확립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계속 깨어있는 마음을 닦을 때, 칠각지의 다른 요소들이 점진적으로 닦아집니다. 칠각지를 닦고자 하는 수행자는 다른 수행에 눈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순간순간은, 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정도라 할지라도, 염각지를 닦고 있는 순간입니다.
『대념처경』은, 칠각지를 닦을 수 있는 기회를 스물 한번 제공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모두 호흡 성찰에서 시작합니다. 대념처경의 경우 수행에관한 세부적인 지침을 모두 제공하고 있는 반면, 입출식념경은 구체적인 수행지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모든 세부적인 지침은 주석서에 나와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몸의 성찰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느낌의 성찰에 관한 것이고, 세 번째 단계는 마음성찰, 네 번째 단계는 마음의 대상인 법에 관한 것입니다.
입출식념경이 구체적인 수행지침을 제공하지 않는 이유는, 이 경이 장로제자들에게 설해졌었기 때문이라 보여 집니다. 그들 가운데는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 계를 받은 승려들을 가르쳤습니다. 교수를 맡지않은 승려들은 44가지 수행주제중의 하나에 집중하여 수행을 했습니다:
1) 4정근 2) 4신족 3) 5근 4) 5력 5) 7각지 6) 8정도 7) 4 무량심 8) 부정관 9) 무상의관찰 10) 호흡에 대한 챙김.
장부의『 대념처경』이나 중부의『 염처경』이 설해졌던 승려들의 지위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새로 계를 받은 승려들이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런 관계로 붓다께서는 이 경전에서 보다 자세하고 실제적인 지침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경 - 『 입출식념경』, 『 염처경』,『 대념처경』은 모두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에서 시작합니다.
『 염처경』 이나 『 대념처경』 의 가르침은 방석 위에 앉았을 때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활동에도 적용되는 반면, 『 입출식념경』의수행은 주로 방석에 앉아서하는 수행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붓다께서는 수행자에게 조용한 곳, 숲이나 묘지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곳은 소음이 적고, 인간의 흔적에서 벗어나고, 인간을 만나지 않고, 홀로 수행하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appasaddāni, appanigghosāni, vijanavatāni, manussarāhaseyyakāni, paṭisallanasaruppāni) 붓다께서 언급하시는 수행처를 보면, 항상 고요한 곳입니다.
그 다음, 결가부좌를 하고, 깨어있는 마음을 앞에 확립해야 합니다. “ 앞”이란 공간적으로 앞을 말하거나, 얼굴 앞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 앞”이란 현재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순간의 현재수행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킴을 말합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마음집중을 하여, 현재 순간에서 깨어있는마음을 확립해야 합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것은 현재 없고, 미래에 일어날 것도 현재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일어나는 것이 여기 이곳에 있습니다. 현재는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현재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살 수 없습니다. 미래에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이순간, 여기, 이시간에 사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일어날 때는, 기억이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합니다.
“ 과거의 기억이지금 일어나고 있다. 지금 순간에 집중하여 기억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자.”
수행을 시작할 때, 마음을 호흡에 완전히 집중시키고 시작합니다. 호흡은 항상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빠사나수행의 대상으로 적합합니다. 또한선정수행을 하는데도 호흡은 좋은 대상이 됩니다.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부터 몸에 대한 마음챙김이 시작되는 것은, 호흡은 항상, 되풀이하여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흡은, 태어나는 순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지속됩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현상입니다. 마음은 어느 때나 호흡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살아있는 생명의 공통점입니다. 호흡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물질적대상입니다. 종교적, 지역적, 인종적으로 특성이 없습니다. 호흡은 쉽게 움직입니다. 호흡은 우리의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 몸의 어느 한 기관도 호흡없이 작동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호흡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숨을 쉬어야 합니다. 우리가 숨을 들이쉬면, 공기 속의 산소는 허파의 혈액세포로 들어가고, 산소가 없는 공기는날숨으로나옵니다. 이렇게 하여 깨끗해진 피는, 우리몸 수억의 세포를 돌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줍니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비타민 광물질 등 온갖 영양소를 지닌 음식을 먹지만, 호흡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먼저, 숨을 들이쉬고 호흡을 지켜보십시오. 호흡이 와닿는 곳을 찾으십시오.
코끝일 수도 있고, 콧구멍 가장자리일 수도 있고, 입술위, 또는두눈사이에 있는 콧구멍 안일 수도 있습니다. 코의 생김새에 따라 호흡이 와 닿는 곳이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숨을 들이쉴 때, 우리는 호흡의 시작을 콧구멍 부위에서 느끼고, 중간을 가슴에서 느끼고, 단전에서 그 마지막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숨을 내쉴 때는, 그 시작을 단전에서, 중간을 가슴에서, 끝을 코끝에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마음으로 완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호흡이 와 닿는 곳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호흡에 완전히 집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마음을 집중할 때, 우리 내면의 모든 현상이 일어납니다. (Manasikārasambhavā sabbe dhammā , AN IV. 339).
들숨과 날숨의 시작, 중간, 끝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이 시작과 중간과 끝을 주시하는 것이 우리의 집중을 흩트리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호흡은 들어오고 나가는데, 마음은 들숨과 날숨의 시작, 중간, 끝, 그리고 호흡의 멈춤을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들숨, 날숨의 시작, 중간, 끝, 그리고 정지를 주시하고자 하는 관심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자연스럽게 콧구멍이나 윗입술, 두눈사이의 콧구멍속 등 호흡이 와닿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가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관찰함을 놓아 버려야하는 때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원래 호흡이 와닿은 곳에 그저 머물러야 합니다. 만약에 마음이 평상시처럼 헤매면, 호흡이 와 닿는 당처로 마음을 가져와서 머물게합니다.
목이 뻣뻣한 사람이 그네 타는 아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머리를 돌릴 수 없기때문에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있습니다. 그네가 바로 코앞에오면, 그네를 밉니다. 그네는 한쪽으로만 움직입니다. 그네가 코앞으로 돌아오면, 반대쪽으로 가도록 다시 밉니다. 마찬가지로, 가슴까지 호흡을 따라가지 말고, 콧구멍 밖으로 따라가지 마십시오. 마음이 돌아다닐 때마다 마음을 호흡으로 가져와서 머물게 하십시오. 마음이 돌아다니는 한, 마음이 당처에 머물때까지, 되풀이 하십시오.
그리하면, 마침내, 우리는 마음이 당처에 머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마음이 집중하고 있는 점을 지나가는 호흡을 봅니다. 호흡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보게됩니다.
마음이 집중하고 있는 점을 지나가는 호흡의 아주 미세한 부분들은 점점 선명하게 됩니다. 호흡은 점점 가늘게 되고, 그 움직임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집중하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하고도 즐거운 느낌일뿐입니다. 우리의 미세한 호흡은 이제 강한 느낌으로 대체 되었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우리는 호흡의 느낌을 경험합니다. 호흡이 변할 때 느낌도변합니다. 우리는 변하는 호흡과 변하는 느낌을 인식합니다.
“ 이것이 호흡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인식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 [업]행입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호흡을 주시할 때, 바로 이 의도가 행이며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호흡과 느낌과 인식이 변할 때 또한 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알아봅니다. 알아보는 행위가, 즉 의식입니다. 호흡, 느낌, 인식, 생각이 변할때, 의식 또한 변합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온이라 불려지는 호흡,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을 성찰하게 됩니다. 이모든 것이 호흡을 시작함으로써 일어납니다.
호흡 속에는 또한 지수화풍 사대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호흡이 코 부위에 닿을 때, 또는호흡으로하여 몸이 팽창하거나 수축할 때, 우리는 흙의 요소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호흡의 촉촉함, 건조함을 통해 물의 요소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호흡의 따뜻함, 시원함이 불의 요소 입니다. 호흡이 들어가고 나갈 때, 우리는 공기의 요소를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수행을 하게되면, 우리는 사념처의 네 가지 대상뿐 아니라 오온 모두를 성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호흡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호흡과 독립하여 따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들숨을 쉬고 날숨을 쉴 때 오온의 나머지 네요소도 호흡과 함께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호흡하지 않을 때가 없으며, 오온의 나머지 네 요소가 멈추는 순간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항상 일어납니다. 호흡이 항상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호흡에 관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할 때면 언제라도 호흡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호흡 때문에 수행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호흡은 항상 사용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만 하면됩니다.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 소리안에서 변화를 경험합니다. 귀청을 울리는 어떤 소리라도, 주의를 기울이면, 이 소리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냄새, 맛, 감촉은 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때까지는,그 변화를 알지 못합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감촉에 의해 일어나는 느낌도 마찬가지로 변화합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감촉에 의해 일어나는 어떠한 인식도 마찬가지로 변화합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감촉에 의해 일어나는 어떠한 의식도 마찬가지로 변화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때, 호흡, 호흡의 느낌, 호흡의인식, 호흡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도, 호흡을 의식함이 변화하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변화합니다.
어떻게 수행의 향상을 알 수 있는가?
어떤 수행에 있어서나, 어떻게 수행의 진전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 자신의 수행으로부터 옵니다. 마음이 깨어있을 때, 수행에 진전을 가져왔음을 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깨어있는 정도만큼, 그만큼 수행이 진전을 가져온 것입니다. 마음이 이전보다 오래 깨어있을 때, 우리는 수행이 이전보다 더 진전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마음이 항상 깨어있다면,우리는깨어있는마음이 완성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무상과 고와 무아의 성찰은 항상 깨어있는 마음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이자 목표는, 오온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과 혜안을 얻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염각지
위빠사나수행이란 탐심, 진심, 치심 없이 현상의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호흡,느낌, 인식, 생각, 주의집중, 의도, 의식은, 우리가 무상에 대한 앎을 얻기 위한 도구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변화를 멈추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변화를 멈출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괴로움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멈출 수 있는 힘이 약간이라도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이 변화를 멈출 수 있는 아무것도찾을 수 없기에, 우리는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호흡과 느낌, 인식, 의도, 의식으로부터 얻는 깨달음이며, 지혜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좌복에 앉아서나, 좌복을 떠나서나, 항상 깨어있는 마음과 같이 합니다. 그리고 걸을때, 서있을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먹을 때, 마실 때, 옷을 입을 때, 대소변을 볼 때, 생각할 때, 굽힐 때, 뻗칠 때, 달릴 때, 글을 쓸 때, 읽을 때, 어떤 활동을 할 때나 침묵을 지킬 때나,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의 무상을 성찰합니다.
택법각지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을 가지고서, 깨어있는 마음 그자체를, 그리고 그마음의 대상들을 보다 선명하게 관찰하게 됩니다.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질문을합니다. “ 이 앉은 자세는변하지 않는가? 이 선 자세는변하지 않는가? 이 말하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누운 자세는 변하지 않는가? 이 먹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마시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옷 입는 행위는변하지 않는가? 이 소변보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대변 보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생각하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굽히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뻗치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달리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글쓰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읽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침묵은 변하지 않는가?”하고 질문합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가지로 “아니다” 입니다. “ 다음 번의 앉은 자세, 선 자세, 말하는 행위, 누운 자세, 먹는 행위, 마시는 행위, 옷입는 행위, 소변보는 행위, 대변보는 행위, 생각하는 행위, 굽히는 행위, 뻗치는 행위, 달리는 행위, 글쓰는 행위, 읽는 행위는변하지 않는가?” “다음 번의 모든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다음 번의 침묵은 변하지 않는가? 대답은 역시 “아니다” 입니다.
또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 이 마음속 어느 곳에서, 느낌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이 있는 이 몸속 어느 곳에서 영원한 것을 찾을 수 있는가?” 대답은 또한번 “아무 곳에도 없다”가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 “ 무엇이 괴로움인가? 무엇이 괴로움의 원인인가?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인가?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인가?
어떻게 오취온이 괴로움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오온에 집착하면 어떻게 되는가?”
내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나는 평화에 관한 나의 생각을 좋아합니다. 온 세상이 평화롭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내 마음을 거슬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천가지 문제들이 있고, 수만의 정치적 견해, 무수한 부정부패가 이 세상에 있습니다. 범죄는 계속 늘어나고, 인종차별이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온 세상에 가난이 널려있으며, 세상에는위선자가 더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을 지키지 않습니다. 살생, 도적질, 사음, 거짓말, 이간질,욕설, 구설, 음주, 음주운전으로 인한 살인, 난폭한 운전으로 인한 살인, 마약매매, 총 매매, 전쟁... 이 생각들이 마음에 들어오면, 마음이 아주 불편해집니다.
이 모든 것들이 평화를 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내가 가진 소망에 거슬려서 일어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내가 평화라는 내 생각, 내 의견에 집착해 있을 때, 나는 괴로워합니다. 평화에 관한 내 생각과 견해는 나의 업(상카라)입니다. 나는 나를 아주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인식이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틀렸다고 봅니다. 그런데 내가 즐기는 느낌은 변합니다. 나의 맑은 의식은 흐려집니다. 이것이오온입니다. 내가 나의 몸, 느낌, 인식, 생각,관념, 의식에 집착했을 때, 이들이 변하면 나는 아주 불행해집니다. 이 괴로움의 현상을 보면서, 택법각지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납니다. 지금 수행하리라는 마음과 더불어 정진력이 일어납니다.
정진각지
법을 관찰하는 힘이 생기면, 열심히 무언가 영원한 것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이 열정은 영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을 밀어냅니다. 이 열정은, 깨어있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고, 성찰력을 날카롭게 하고, 이리하여 얻은 결과를 튼튼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깨어있는 마음과 성찰력으로 몸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의 무상,고,무아를 볼 때, 피곤하지 않습니다. 호흡의 미세한 분자의 변화를 보는데 피곤하지 않습니다.
희각지
끊이지 않는 정진의 힘으로 현상을 더 깊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경험 가운데서 진리가 펼쳐지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순간순간이 새로운 순간입니다. 순간순간이 상쾌한 순간입니다. 순간순간이 우리에게 새로운 지혜와 새로운 이해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보게되고, 이전에 얻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얻게됩니다.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봅니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물로 시원하게 씻은 듯 시원하고 편안하고 기쁘고 행복한 정신상태가 옵니다.
호흡이 처음으로 감지되었던 당처에서 고요하고 시원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 느낌은 곧 코부근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얼굴로 옮겨지고, 눈 및 눈썹, 이마, 머리 한가운데, 머리 뒤쪽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아무 것도 애써서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느낌을 경험할 뿐입니다. 그 후 목과 어깨 그리고 가슴부분에서 미세한 떨림을 경험합니다.
미세한 떨림과 거의 동시에, 상체의 전부가 확장되고 수축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인식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의식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변화만을 경험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두 순간 계속해서 머물게 할 수가 없습니다. 기쁜 느낌이라고 느낄 때, 마음이 그 쪽으로 향합니다. 마음이 도착하기 전에, 느낌은 변합니다. 마음은 표현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기쁜 느낌을 잡으려고 마음이 아무리 질주해도, 마음이 미치기 전에 그 느낌은 변합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꿈과도 같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의 작은 경험들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것들은 번갯불과도 같습니다. 아니,그보다 더 빠릅니다. 우리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경험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보자.” 그런 생각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일어나고 성숙에 달하고, 사라집니다.
때로 마음은 경험의 시작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 또는 성숙을 볼 수가 없습니다. 때로,우리는 중간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 끝을 경험할 수가 있지만 시작과 중간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빨리 변하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면 더더욱 좋습니다.
무상의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되면, 몸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앎과 지혜를 얻기 위해 존재한다는 지혜, 지견을 얻게 됩니다.
오온은 이 밖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오로지 그 목표를 위해 있을 뿐입니다.
낮동안 내내 밤동안 내내, 아니, 깨어있는 시간 내내 무상을 경험합니다. 수행이 이에 도달했을 때, 우리의 호흡이 세상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같이 느낍니다. 작은 개미에서 코끼리에 이르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 작은 물고기에서 큰고래에 이르기까지, 아주 작은 벌레에서 커다란 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호흡에 맞추어 숨쉬고 있음을 느낍니다.
사무량심(四梵住)의 수행
이때 우리는 모든 중생을 위한 무한한 자비를 느끼고, 우리의 마음은, 그들이 모두 평화와 조화속에서 살기를, 자연히 빌게됩니다. 한 생각이 자연히 마음에 일어날 것입니다 : “모든 중생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모든 종교가 화목속에 존재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흑색, 흰색, 홍색, 황색, 갈색, 가난한 자, 부자, 넉넉한 자, 굶주리는 자, 남녀노소 모두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기를! 땅 위에 있거나 물 속에 있거나 공중에 있거나 동서남북 위 아래에 있는 모든 생물이 평화롭게 화목하게 살기를! 모든 대립, 모든 전쟁, 모든 경쟁, 모든 미움이 평화롭게, 우호적으로, 화목하게 해결되기를! 모든 정치인들이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현명하고 자비로운 동의를 할 수 있기를! 아무도 타인을 해하지 말기를! 모든 인종의대립, 종교대립, 종족대립, 직장에서의 갈등, 국내의 갈등, 대외적 갈등이 평화와 화목속에서 끝나기를!”
이러한 생각들이 마음에 떠오를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차게 되고, 자애와 자비가 조화되어 가슴이 고동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자애로 깨어있는 마음과, 모든 중생을 향한 자비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무엇이나 감사하고, 타인이 기뻐하는 것을 무엇이나 감사하게 됨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고마워합니다.
경안각지
이 평온하고 시원하고 신선한 기쁨은 몸과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하고 평화롭게 합니다. 마음이 평온하고 시원하고 신선할 때, 고요, 적정을 느끼고, 보다 더 평화롭게 됩니다. 우리는 만족합니다. 화의 열기, 화의 불덩어리는 가라앉습니다. 탐심의 열기, 탐심의 불덩어리가가라앉습니다. 혼동의 열기, 혼동의 불덩어리가 가라앉습니다. 슬픔, 고통, 괴로움, 한탄, 절망이 가라앉습니다. 질투, 두려움, 긴장, 불안, 걱정이 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다. 위태롭지 않고 안전하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목표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 단계에서 일시적인 평화와행복을 얻습니다.
정각지
그 결과 우리는 삼매를 얻습니다. 이것이 일선정의 경험입니다. 자애의 생각, 자비의 생각, 그리고 아낌없는 마음, 탐심의 소멸이 우리 마음에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탐심, 진심, 졸림, 불안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수행이나수행법에 대한 의심, 삼보에 대한 의심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른 집중입니다. 바른 집중은 깨어있는 마음의 염력에 의해 지탱됩니다.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며, 이제 그 깨어있는 마음이 더 청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을 바탕으로, 애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경험한 후 선정삼매를 얻었기 때문에, 이 아름답고 평화롭고 기쁨이 넘치는 선정삼매에 집착하려고 하지않습니다. 정념을 바탕으로 얻은 집중은 어떤 탐심이건 일어나는 것을 떨쳐버립니다. 정념과 정정은 탐심의 정지를 위해 함께 일합니다. 선정삼매 가운데서도 우리는 계속하여 무상의 경험에 일념집중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무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더 깊고 선명합니다. 선정삼매를 얻기 전에 우리가 경험한 무상은, 거칠고 얕은 정도였습니다. 이제 보다 깊은 집중과 보다 깊은 성찰력으로 우리의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이 무상을 뚫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깊은 삼매를 갖기 이전에 얻는 삼매는 순간적인 삼매입니다. 이것은 집중의 강도와 날카로움, 선명함이 부족하여 지속되지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다 힘 있고 보다 강한 염력과 집중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마음의 힘이고 삼매의 힘이다. (satibala, samādhibala)
깨어있는 마음은 강한 집중력을 만날 때 더 강해집니다. 이 두 힘을 구비했을때, 더 깊이 무상을 뚫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상뿐 아니라, 무상한 모든 것은 만족할 수 없는 것임을 봅니다.
모든 즐거운 경험은 마음이 이에 미치기 전에 변해버리므로, 이 즐거운 경험에 머물려 하는 마음이, 계속 머물지 못하게 되어 피곤해집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 마음은 지칩니다. 처음의 열의가 식기 시작합니다. 이 때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까지도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권태가 옵니다. 권태를 지켜보는 동안,권태조차도 변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 권태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때 마음은,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멈추게 할만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몸과 마음에는 이를 지배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납니다. 특정한 원인과 조건이 있을 때, 특정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특정한 원인과 조건이 사라질 때, 그 특정한 현상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권태가 일어났을 때, 모든 미세한 원인과 조건에 관해 계속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수만의 현상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데 휩쓸릴 것입니다.
이는 권태를 제거하려는 목적을 위해서는 전혀 비현실적이고 불필요합니다. 삼보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수행정진을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서, 이 단계에서 충분합니다.
현상의 이러한 특성을 본 후, 우리는 몸,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의 어느부분에도 영원한 실체나 영혼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를 알 때, 붓다담마 그리고 붓다와 그의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성인이 된 성도의 제자들에 대한 확고한 신심이 일어납니다. 삼보에 대한 의심이 마음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생 이전에 전생이 있고, 그분이 수행한 길을 따라가서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한 해탈을 얻은 분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확고한 신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의식이나 형식을 지킨다 해도괴로움에서의 해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확신, 신심의 힘, 무아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함께,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의 무상함에 주의 집중하며, 나아갑니다. 과거에 몸이 경험한 것, 마음이 경험한 것은 모두 변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미래에 몸이 경험하는 것, 마음이 경험하는 것은 예외 없이 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경험은 일어나서 남김없이 사라집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형체,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은 원인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고, 조건으로하여 사라집니다.
현생 후에 다음생이 있고, 현생 이전에 전생이 있음을 알게 될 때, 지금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서 마찬가지로 슬픔 한탄 통증, 괴로움 그리고 절망을 거듭한다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않은 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수가 있고, 괴로움이 끔찍한 3악도에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남이 가져오는 위험을 볼 것입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보증이 없기 때문에, 짐승이나 아귀로 태어날 위험이 있습니다. 윤회 전체에 대해 실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하기를 바랍니다. 결코 다시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평정각지
오온이 모두 무상,고,무아임을 본 후, 모든 현상에 대한 평정심이 일어납니다.
마음은, 모든행위를- 선업, 불선업, 색계나 무색계, 신행, 구행, 의행이건, 모두평정심으로 봅니다. 이 때 우리의 마음에는 정념을 보다 더 강력하게 닦고자 하는 필요성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상태가 될 때, 바른 견해, 바른의도, 바른말, 바른행위, 바른생업, 바른정진, 바른마음챙김, 바른삼매를 향한 깊은 성찰이 일어납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다음의 둘 중의 하나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계속하여 다음 단계의 선정수행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1선정에 머물면서 위빠사나수행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는 장애가 이미 제거되었고, 1선정을 얻은 상태입니다. 1선정에서는 자비희사의 마음과 환희심, 행복이 모두 강하게 존재합니다. 우리의 집중이 이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황홀한 마음상태로하여 몸과 마음이 환희와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마음상태로 인하여, 일선정에 집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깨어있는 마음, 집중, 아낌없는 마음, 진정한사랑, 자비, 기쁨, 평정심, 그리고 생각이 탐심을 배척합니다. 특히 가까이 있는 적인 탐심과 멀리 있는 적인 진심을 극복했기 때문에, 그리고 바른 집중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마음상태에서 탐심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듣고 냄새맡고 느끼고 맛을 봅니다.
선정의 단계는 단계마다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1선정에 흥미를 잃게 되면, 이는 자연적으로 2선정으로 옮겨집니다. 이 곳에는 아낌없는 마음, 사랑, 자비심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2선정에서는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이 훨씬 깊게 자리잡습니다. 삼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몸과 마음이 환희심과 행복으로 가득 찹니다. 마치 생수가 계속 솟아나오는 호수처럼, 환희심이 계속 시원하게 솟아납니다. 때때로 가벼운 빗방울이 부드럽게 내려서 호수 위에 있는 작은 티끌을 말끔히 씻어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계속 새로운 환희심으로 시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상태에서,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 삼매, 집중의 힘을, 몸과 마음의 삼법인을 보는데 집중시킵니다. 모든 훌륭한 생각과 느낌들이 끊임없이 아주 미세하게 변화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염력과 삼매가 이전보다 훨씬 깊기때문에, 현상을 보는 성찰도 훨씬 미세하고 날카롭습니다.
더 높은 선정으로 나아가면, 사선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평정심이 있어서 깨어있는 마음이 청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맑고, 희고, 티없고, 특성을 벗어나고, 부드럽고, 유연하고, 한결같고, 확고한 마음으로, 깨어있는 마음을 닦으십시오. 여기서, 청정한 마음을 사성제의 성찰쪽으로 향하게 할 때, 8정도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선명해집니다. 괴로움의 진리, 무상, 무아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보다 낮은 선정에 있으면서 아직 깨침의 상태를 경험하지 못한 수행자는, 이제 의심을 제거하고 수다원을 얻습니다.
1선정에서 위빠사나수행을 계속하여 사성제의 진리를 깨칠 수도 있습니다. 1선정에서 위빠사나수행을 하는 것과 4선정에서 위빠사나를 하는 것의 차이는, 1선정에서 바로 위빠사나로 전향할 경우, 수다원을 얻는데 보다 긴 시간이 걸린다는점입니다. 아견을 제거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입니다. 4선정은 맑고, 희고, 티없고, 특성을 벗어나고, 부드럽고, 유연하고, 한결같고, 확고합니다. 4선정에서의 깨어있는 마음은 평정심에 의해 청정합니다. 1선정에서는 이것이약합니다.
수행이 되지 않은 마음이 무아와 고를 들으면 성을 냅니다. 평정심을 결여한 채 괴로움을 통찰하게 되면, 마음은 감정적으로 대응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공감해주는 것을 듣고 싶어 합니다. 행복이란 괴로움을 수행하지 않고는 오지않는 법칙을 모르고, 괴로움보다는 행복을 듣고 싶어합니다. 한 가지를 사면, 좋건 싫건, 다른 한 가지가 딸려 옵니다. 청정하게 깨어있는 마음과 평정심을 가지고 4선정에 들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괴로움, 무아, 무상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갑자기 아무 느낌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인식할 수없으면, 이는 바른 선정이 아니거나, 잠이 들어 깨어있는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수행자는 수면의 황홀감을 경험합니다. 이는 깊이 잠든 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싸구려 선정입니다. 이런 선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두려워합니다. 수행자가 이를 이해하면,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바른 선정을 얻었을 때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마음, 아낌없는마음, 자애로운 생각, 자비로운 생각이 함께 합니다. 이것들을 일컬어 선업을 가져오는 생각(kusala vitakka), 선업을 가져오는 사고(kusala vicāra)라고 합니다. 불선업을 가져오는 생각(akusala vitakka)과 불선업을 가져오는 사고(akusala vicāra)는 바른 선정의 마음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아주 즐거운 곳이지만, 우리는 이런 생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머물면서 깨어있는 마음을 닦을 수가 있습니다. 주의집중, 깨어있는 마음, 삼매가 함께 힘을 합치면, 선정요소들의 무상 고 무아를 봅니다. 선정요소는 생각이 아니고, 몸과 마음 속에 일어나는 미분자의 움직임입니다. 마음은 이 움직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정에 들어 있을때, 집중한 마음은 즐거운 느낌(subha), 행복(sukha), 불변성(nicca), 아(atta)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서, 즐겁지 않은 느낌(asubha), 괴로움(dukkha), 무상(anicca),무아(anatta), 갈애(taṇha), 아상(mana), 잘못된 견해(diṭṭhi)를 다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뚜렷하게 봅니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청정과 지혜를 강조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집중한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samāhitaṁ cittaṁ yathābhūthaṁ pājanāti)”
여기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악수를 합니다.(samatha vipassanā). 이것을 구존 또는 쌍련(yuganaddha)이라 합니다. 이때, 우리의 온몸과 온 마음은, 마치 설탕과 우유가 물과 섞인 것처럼, 환희와 행복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성인의 깨달음에 들어감
수다원의 길
이 단계에서 우리는 수다원에 듭니다. 아무것도 머무는 것이 없음을 봅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이때 우리는 무상을 깊이 뚫고 들어갈 수 있고,아견의 울짱을 부수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깨어있는 마음과 집중이 손을 잡고 법에 순응합니다. 의식과 의례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될 때 수다원의 길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출세간의 팔성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팔성도에 들어 있고, 수다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붓다의 여덟 부류의 성스러운 제자가 됩니다. (aṭṭhapurisapuggalā). 여기서부터, 중부경의 142품, 공양경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신도들이 올리는 공양을 받을 자격이 생깁니다. (Dakkhiṇāvibhanga Sutta, 비구 보디역 1102ff)
이 때부터 우리는 보다 더 확고한 신심으로 끊임없이 정진하고, 삼보에 대한 의심을 극복합니다. 붓다의 가르침과 승가의 승려들, 그리고 연기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의심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것으로서 성도에 들어선 자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확고한 신심과 깊은 성찰로 팔성도를 닦으며 계속 수행할 때, 무아라는 관념이 사라져버리고, 수다원의 과를 얻게 됩니다.
사다함의 길
이제 우리는 호흡 하나 하나에서, 미세한 하나의 움직임에서, 오온 전체를 봅니다. 몸과 마음이, 오온 전체의 활동 없이는 어느 하나도 의도한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오온이란 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의도적인 활동에 개입하기 때문에, 오온의 작은 미분자들이, 일순간도 머물지않고, 항상 유동하고 있음을 봅니다. 계속 출세간의 8성도를 닦으며, 그리하여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보다 선명하게 볼 때, 탐심의 거친 부분들이 사라집니다. 이때 사다함의 성도에 들어갑니다. 계속 8성도를 계속 닦으며,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보다 더 선명하게 볼 때, 진심의 거친부분들이 사라집니다. 이때 사다함의 과를 얻습니다.더 힘을 내어, 용기를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보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우리는 출세간의 8성도를 닦아 나아갑니다.
아나함의 길
성찰의 과정에서 어느 한 순간,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애가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이 아나함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1선정에서 얻었던 자비희사가 완성되는 순간이 오면, 진심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때 아나함의 과를 얻습니다. 보다 더 열심히, 보다 더 확고한 마음으로, 보다 더 깨어있는 마음으로 8성도를 계속 닦을 때, 우리는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보다 더선명하게, 가장 깊숙이 봅니다.
아라한의 길
색계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면서 아라한의 길에 들어섭니다. 계속 정진하며 출세간의 8성도를 닦고, 무색계에 대한 욕심이 사라질 때, 아만과 불안이 마음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라한의 길에 들어 있습니다. 마침내 나를 존재하게 하는(ahaṁkāra) 마지막 습기와 사성제에 대한 무명이 사라지고, 우리는 아라한이라고 불리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때, 완전히 깨달은 아라한의 마음에 생각이 떠오릅니다 :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성스러운 삶을 살았다.해야 할 것을 다했다. 더 이상 할 것은 없다.”
(번역 : 최숙희)
『입출식념경』과 위빠사나 수행의 일반적 관계
반테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
위빠사나 수행의 요체
위빠사나 수행은, 윤회를 지속시키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 가운데서, 무상, 고, 무아를 개념 없이 직접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수행자들은 괴로움에서의 해탈과, 그 해탈에 대한 지견(..見)을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과거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들은 모두 몸에 대한 마음챙김 수행(신념처)을 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그분들은 이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ANi:43, 45; SN:1627 (비구보디역); MN:956ff (비구보디역)
과거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분들은 모두 사념처 수행의 길을 갔습니다. 현재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 또한, 모두 사념처 수행의 길을 가야합니다. 우리가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ati) 수행을 하거나 몸에 대한 마음챙김(kāyagatāsati) 수행을 하거나 사념처(cattāro satipaṭṭhāna) 수행을 하거나, 우리는 사념처 전체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수행을 하지 않고 우리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이 가르침의 힘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위해 몸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몸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란 몸의 구조, 무기질, 화학적 체질, 그리고 몸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적 요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만 비로소 알게 됩니다. 현대 기술과 과학은 몸에 대해 놀랄만한 정보를 제공해 왔습니다.
심리학, 철학, 심지어 신비주의까지도, 몸에 대한 많은 지식을 제공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영적인 수련은 밖에서 해답을 얻도록 우리를 이끌어 왔습니다. 기술, 철학, 심리학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몸에 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술과학이 보다 발전된 나라에서는 먹는 것이 비만으로 연결되어,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과학자들은 전화기 전신기, 하이텍 무기, 정보 통신기, 스포츠 기구, 운동 기구등등, 이를 기술적으로 더 발전시키기 위해, 시간을 온통 쏟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구들을 배워서 사용하느라 아주 바쁩니다. 새 기구가 시장에 나오고, 그것을 사서 배우느라 한 이주 애쓰는 동안, 완전히 배우기도 전에, 더빠르고, 부품이 더 많고, 더 발전된 기구가 시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또 새것을 삽니다. 때로 새기구는 기계병균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계병균을 제거하는 방법을 배우느라 애쓰는 동안, 더좋고 발전된 기구가 시장에 나옵니다. 새기구가 가진 문제점에 짜증이 나고, 더 빠르게 잘 하고 싶은 욕망에, 사람들은 또 새물건을 삽니다. 소비자 보다 항상 앞서가는 새 물건에 보조를 맞추기가 힘듭니다. 이것이 항상 변하는 상카라, 업행의 원리입니다.
경쟁은 사방에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습니다. 건강한 몸이 건강하지 않게 됩니다. 몸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갑자기, 위궤양, 암, 당뇨, 고혈압,두통, 위장병, 콩팥, 심장병 등으로 자신이 아프고 늙었음을 깨닫습니다. 급히 몸을 고쳐보려고 하나 이미 너무 늦어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단 20분을 조용히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심히 긴장되고, 불안합니다. 십 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르고 서두르고 서두릅니다. 그런데 몸을 성찰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우리 몸을 상하게 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건강하지 않은 정신적, 육체적 습관(akusalasīla)과 더불어 시작합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몸은 마음 없이 활동할 수 없습니다. 몸이 하는활동은 눈에 잘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이 하는 활동 즉 걷는 행위, 말하는 행위, 먹는 행위, 글쓰는 행위, 읽는 행위, 노는 행위,서있는 행위, 그밖의 많은 신체적 행위, 언행, 정신적행위를, 우리는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입출식념경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은, 몸 성찰의 첫 번째입니다. 붓다께서는 이를 일컬어 “몸 가운데의 하나의 몸, 즉 들숨과 날숨”이라 하셨습니다. (MN #118, Ānāpānasati Sutta, 비구 보디역. 945ff)
그러므로, 호흡은 나머지 다섯 가지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내내 숨을 쉬어오고 있지만, 호흡에 완전히 집중하기 전에는, 실제로 호흡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호흡 에 집중할 때, 모든 것에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모든현상(법)은 마음집중에서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입출식념경』의 구조를 보면, 내용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분이 똑같이 네 쌍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명료하고 외우기가 쉽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경 전체를 외우고, 외운대로 수행을 해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한곳에 좌정하고 마음을 첫번째 단계에 집중한 후 몇 분이지났을 때, 일선정에 들었다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됩니다.
네 단계의 각각 마지막에는, 염각지가 자리잡을 만큼 강한 염식(깨어있는 마음)이확립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계속 깨어있는 마음을 닦을 때, 칠각지의 다른 요소들이 점진적으로 닦아집니다. 칠각지를 닦고자 하는 수행자는 다른 수행에 눈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순간순간은, 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정도라 할지라도, 염각지를 닦고 있는 순간입니다.
『대념처경』은, 칠각지를 닦을 수 있는 기회를 스물 한번 제공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모두 호흡 성찰에서 시작합니다. 대념처경의 경우 수행에관한 세부적인 지침을 모두 제공하고 있는 반면, 입출식념경은 구체적인 수행지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모든 세부적인 지침은 주석서에 나와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몸의 성찰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느낌의 성찰에 관한 것이고, 세 번째 단계는 마음성찰, 네 번째 단계는 마음의 대상인 법에 관한 것입니다.
입출식념경이 구체적인 수행지침을 제공하지 않는 이유는, 이 경이 장로제자들에게 설해졌었기 때문이라 보여 집니다. 그들 가운데는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 계를 받은 승려들을 가르쳤습니다. 교수를 맡지않은 승려들은 44가지 수행주제중의 하나에 집중하여 수행을 했습니다:
1) 4정근 2) 4신족 3) 5근 4) 5력 5) 7각지 6) 8정도 7) 4 무량심 8) 부정관 9) 무상의관찰 10) 호흡에 대한 챙김.
장부의『 대념처경』이나 중부의『 염처경』이 설해졌던 승려들의 지위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새로 계를 받은 승려들이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런 관계로 붓다께서는 이 경전에서 보다 자세하고 실제적인 지침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경 - 『 입출식념경』, 『 염처경』,『 대념처경』은 모두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에서 시작합니다.
『 염처경』 이나 『 대념처경』 의 가르침은 방석 위에 앉았을 때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활동에도 적용되는 반면, 『 입출식념경』의수행은 주로 방석에 앉아서하는 수행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붓다께서는 수행자에게 조용한 곳, 숲이나 묘지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곳은 소음이 적고, 인간의 흔적에서 벗어나고, 인간을 만나지 않고, 홀로 수행하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appasaddāni, appanigghosāni, vijanavatāni, manussarāhaseyyakāni, paṭisallanasaruppāni) 붓다께서 언급하시는 수행처를 보면, 항상 고요한 곳입니다.
그 다음, 결가부좌를 하고, 깨어있는 마음을 앞에 확립해야 합니다. “ 앞”이란 공간적으로 앞을 말하거나, 얼굴 앞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 앞”이란 현재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순간의 현재수행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킴을 말합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마음집중을 하여, 현재 순간에서 깨어있는마음을 확립해야 합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것은 현재 없고, 미래에 일어날 것도 현재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일어나는 것이 여기 이곳에 있습니다. 현재는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현재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살 수 없습니다. 미래에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이순간, 여기, 이시간에 사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일어날 때는, 기억이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합니다.
“ 과거의 기억이지금 일어나고 있다. 지금 순간에 집중하여 기억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자.”
수행을 시작할 때, 마음을 호흡에 완전히 집중시키고 시작합니다. 호흡은 항상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빠사나수행의 대상으로 적합합니다. 또한선정수행을 하는데도 호흡은 좋은 대상이 됩니다.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부터 몸에 대한 마음챙김이 시작되는 것은, 호흡은 항상, 되풀이하여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흡은, 태어나는 순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지속됩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현상입니다. 마음은 어느 때나 호흡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살아있는 생명의 공통점입니다. 호흡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물질적대상입니다. 종교적, 지역적, 인종적으로 특성이 없습니다. 호흡은 쉽게 움직입니다. 호흡은 우리의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 몸의 어느 한 기관도 호흡없이 작동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호흡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숨을 쉬어야 합니다. 우리가 숨을 들이쉬면, 공기 속의 산소는 허파의 혈액세포로 들어가고, 산소가 없는 공기는날숨으로나옵니다. 이렇게 하여 깨끗해진 피는, 우리몸 수억의 세포를 돌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줍니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비타민 광물질 등 온갖 영양소를 지닌 음식을 먹지만, 호흡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먼저, 숨을 들이쉬고 호흡을 지켜보십시오. 호흡이 와닿는 곳을 찾으십시오.
코끝일 수도 있고, 콧구멍 가장자리일 수도 있고, 입술위, 또는두눈사이에 있는 콧구멍 안일 수도 있습니다. 코의 생김새에 따라 호흡이 와 닿는 곳이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숨을 들이쉴 때, 우리는 호흡의 시작을 콧구멍 부위에서 느끼고, 중간을 가슴에서 느끼고, 단전에서 그 마지막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숨을 내쉴 때는, 그 시작을 단전에서, 중간을 가슴에서, 끝을 코끝에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마음으로 완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호흡이 와 닿는 곳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호흡에 완전히 집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마음을 집중할 때, 우리 내면의 모든 현상이 일어납니다. (Manasikārasambhavā sabbe dhammā , AN IV. 339).
들숨과 날숨의 시작, 중간, 끝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이 시작과 중간과 끝을 주시하는 것이 우리의 집중을 흩트리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호흡은 들어오고 나가는데, 마음은 들숨과 날숨의 시작, 중간, 끝, 그리고 호흡의 멈춤을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들숨, 날숨의 시작, 중간, 끝, 그리고 정지를 주시하고자 하는 관심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자연스럽게 콧구멍이나 윗입술, 두눈사이의 콧구멍속 등 호흡이 와닿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가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관찰함을 놓아 버려야하는 때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원래 호흡이 와닿은 곳에 그저 머물러야 합니다. 만약에 마음이 평상시처럼 헤매면, 호흡이 와 닿는 당처로 마음을 가져와서 머물게합니다.
목이 뻣뻣한 사람이 그네 타는 아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머리를 돌릴 수 없기때문에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있습니다. 그네가 바로 코앞에오면, 그네를 밉니다. 그네는 한쪽으로만 움직입니다. 그네가 코앞으로 돌아오면, 반대쪽으로 가도록 다시 밉니다. 마찬가지로, 가슴까지 호흡을 따라가지 말고, 콧구멍 밖으로 따라가지 마십시오. 마음이 돌아다닐 때마다 마음을 호흡으로 가져와서 머물게 하십시오. 마음이 돌아다니는 한, 마음이 당처에 머물때까지, 되풀이 하십시오.
그리하면, 마침내, 우리는 마음이 당처에 머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마음이 집중하고 있는 점을 지나가는 호흡을 봅니다. 호흡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보게됩니다.
마음이 집중하고 있는 점을 지나가는 호흡의 아주 미세한 부분들은 점점 선명하게 됩니다. 호흡은 점점 가늘게 되고, 그 움직임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집중하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하고도 즐거운 느낌일뿐입니다. 우리의 미세한 호흡은 이제 강한 느낌으로 대체 되었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우리는 호흡의 느낌을 경험합니다. 호흡이 변할 때 느낌도변합니다. 우리는 변하는 호흡과 변하는 느낌을 인식합니다.
“ 이것이 호흡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인식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 [업]행입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호흡을 주시할 때, 바로 이 의도가 행이며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호흡과 느낌과 인식이 변할 때 또한 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알아봅니다. 알아보는 행위가, 즉 의식입니다. 호흡, 느낌, 인식, 생각이 변할때, 의식 또한 변합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온이라 불려지는 호흡,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을 성찰하게 됩니다. 이모든 것이 호흡을 시작함으로써 일어납니다.
호흡 속에는 또한 지수화풍 사대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호흡이 코 부위에 닿을 때, 또는호흡으로하여 몸이 팽창하거나 수축할 때, 우리는 흙의 요소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호흡의 촉촉함, 건조함을 통해 물의 요소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호흡의 따뜻함, 시원함이 불의 요소 입니다. 호흡이 들어가고 나갈 때, 우리는 공기의 요소를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수행을 하게되면, 우리는 사념처의 네 가지 대상뿐 아니라 오온 모두를 성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호흡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호흡과 독립하여 따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들숨을 쉬고 날숨을 쉴 때 오온의 나머지 네요소도 호흡과 함께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호흡하지 않을 때가 없으며, 오온의 나머지 네 요소가 멈추는 순간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항상 일어납니다. 호흡이 항상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호흡에 관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할 때면 언제라도 호흡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호흡 때문에 수행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호흡은 항상 사용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만 하면됩니다.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 소리안에서 변화를 경험합니다. 귀청을 울리는 어떤 소리라도, 주의를 기울이면, 이 소리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냄새, 맛, 감촉은 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때까지는,그 변화를 알지 못합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감촉에 의해 일어나는 느낌도 마찬가지로 변화합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감촉에 의해 일어나는 어떠한 인식도 마찬가지로 변화합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감촉에 의해 일어나는 어떠한 의식도 마찬가지로 변화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때, 호흡, 호흡의 느낌, 호흡의인식, 호흡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도, 호흡을 의식함이 변화하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변화합니다.
어떻게 수행의 향상을 알 수 있는가?
어떤 수행에 있어서나, 어떻게 수행의 진전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 자신의 수행으로부터 옵니다. 마음이 깨어있을 때, 수행에 진전을 가져왔음을 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깨어있는 정도만큼, 그만큼 수행이 진전을 가져온 것입니다. 마음이 이전보다 오래 깨어있을 때, 우리는 수행이 이전보다 더 진전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마음이 항상 깨어있다면,우리는깨어있는마음이 완성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무상과 고와 무아의 성찰은 항상 깨어있는 마음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이자 목표는, 오온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과 혜안을 얻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염각지
위빠사나수행이란 탐심, 진심, 치심 없이 현상의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호흡,느낌, 인식, 생각, 주의집중, 의도, 의식은, 우리가 무상에 대한 앎을 얻기 위한 도구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변화를 멈추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변화를 멈출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괴로움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멈출 수 있는 힘이 약간이라도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이 변화를 멈출 수 있는 아무것도찾을 수 없기에, 우리는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호흡과 느낌, 인식, 의도, 의식으로부터 얻는 깨달음이며, 지혜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좌복에 앉아서나, 좌복을 떠나서나, 항상 깨어있는 마음과 같이 합니다. 그리고 걸을때, 서있을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먹을 때, 마실 때, 옷을 입을 때, 대소변을 볼 때, 생각할 때, 굽힐 때, 뻗칠 때, 달릴 때, 글을 쓸 때, 읽을 때, 어떤 활동을 할 때나 침묵을 지킬 때나,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의 무상을 성찰합니다.
택법각지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을 가지고서, 깨어있는 마음 그자체를, 그리고 그마음의 대상들을 보다 선명하게 관찰하게 됩니다.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질문을합니다. “ 이 앉은 자세는변하지 않는가? 이 선 자세는변하지 않는가? 이 말하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누운 자세는 변하지 않는가? 이 먹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마시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옷 입는 행위는변하지 않는가? 이 소변보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대변 보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생각하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굽히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뻗치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달리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글쓰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읽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이 침묵은 변하지 않는가?”하고 질문합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가지로 “아니다” 입니다. “ 다음 번의 앉은 자세, 선 자세, 말하는 행위, 누운 자세, 먹는 행위, 마시는 행위, 옷입는 행위, 소변보는 행위, 대변보는 행위, 생각하는 행위, 굽히는 행위, 뻗치는 행위, 달리는 행위, 글쓰는 행위, 읽는 행위는변하지 않는가?” “다음 번의 모든 행위는 변하지 않는가? 다음 번의 침묵은 변하지 않는가? 대답은 역시 “아니다” 입니다.
또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 이 마음속 어느 곳에서, 느낌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이 있는 이 몸속 어느 곳에서 영원한 것을 찾을 수 있는가?” 대답은 또한번 “아무 곳에도 없다”가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 “ 무엇이 괴로움인가? 무엇이 괴로움의 원인인가?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인가?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인가?
어떻게 오취온이 괴로움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오온에 집착하면 어떻게 되는가?”
내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나는 평화에 관한 나의 생각을 좋아합니다. 온 세상이 평화롭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내 마음을 거슬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천가지 문제들이 있고, 수만의 정치적 견해, 무수한 부정부패가 이 세상에 있습니다. 범죄는 계속 늘어나고, 인종차별이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온 세상에 가난이 널려있으며, 세상에는위선자가 더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을 지키지 않습니다. 살생, 도적질, 사음, 거짓말, 이간질,욕설, 구설, 음주, 음주운전으로 인한 살인, 난폭한 운전으로 인한 살인, 마약매매, 총 매매, 전쟁... 이 생각들이 마음에 들어오면, 마음이 아주 불편해집니다.
이 모든 것들이 평화를 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내가 가진 소망에 거슬려서 일어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내가 평화라는 내 생각, 내 의견에 집착해 있을 때, 나는 괴로워합니다. 평화에 관한 내 생각과 견해는 나의 업(상카라)입니다. 나는 나를 아주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인식이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틀렸다고 봅니다. 그런데 내가 즐기는 느낌은 변합니다. 나의 맑은 의식은 흐려집니다. 이것이오온입니다. 내가 나의 몸, 느낌, 인식, 생각,관념, 의식에 집착했을 때, 이들이 변하면 나는 아주 불행해집니다. 이 괴로움의 현상을 보면서, 택법각지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납니다. 지금 수행하리라는 마음과 더불어 정진력이 일어납니다.
정진각지
법을 관찰하는 힘이 생기면, 열심히 무언가 영원한 것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이 열정은 영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을 밀어냅니다. 이 열정은, 깨어있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고, 성찰력을 날카롭게 하고, 이리하여 얻은 결과를 튼튼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깨어있는 마음과 성찰력으로 몸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의 무상,고,무아를 볼 때, 피곤하지 않습니다. 호흡의 미세한 분자의 변화를 보는데 피곤하지 않습니다.
희각지
끊이지 않는 정진의 힘으로 현상을 더 깊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경험 가운데서 진리가 펼쳐지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순간순간이 새로운 순간입니다. 순간순간이 상쾌한 순간입니다. 순간순간이 우리에게 새로운 지혜와 새로운 이해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보게되고, 이전에 얻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얻게됩니다.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봅니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물로 시원하게 씻은 듯 시원하고 편안하고 기쁘고 행복한 정신상태가 옵니다.
호흡이 처음으로 감지되었던 당처에서 고요하고 시원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 느낌은 곧 코부근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얼굴로 옮겨지고, 눈 및 눈썹, 이마, 머리 한가운데, 머리 뒤쪽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아무 것도 애써서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느낌을 경험할 뿐입니다. 그 후 목과 어깨 그리고 가슴부분에서 미세한 떨림을 경험합니다.
미세한 떨림과 거의 동시에, 상체의 전부가 확장되고 수축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인식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의식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변화만을 경험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두 순간 계속해서 머물게 할 수가 없습니다. 기쁜 느낌이라고 느낄 때, 마음이 그 쪽으로 향합니다. 마음이 도착하기 전에, 느낌은 변합니다. 마음은 표현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기쁜 느낌을 잡으려고 마음이 아무리 질주해도, 마음이 미치기 전에 그 느낌은 변합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꿈과도 같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의 작은 경험들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것들은 번갯불과도 같습니다. 아니,그보다 더 빠릅니다. 우리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경험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보자.” 그런 생각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일어나고 성숙에 달하고, 사라집니다.
때로 마음은 경험의 시작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 또는 성숙을 볼 수가 없습니다. 때로,우리는 중간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 끝을 경험할 수가 있지만 시작과 중간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빨리 변하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면 더더욱 좋습니다.
무상의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되면, 몸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앎과 지혜를 얻기 위해 존재한다는 지혜, 지견을 얻게 됩니다.
오온은 이 밖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오로지 그 목표를 위해 있을 뿐입니다.
낮동안 내내 밤동안 내내, 아니, 깨어있는 시간 내내 무상을 경험합니다. 수행이 이에 도달했을 때, 우리의 호흡이 세상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같이 느낍니다. 작은 개미에서 코끼리에 이르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 작은 물고기에서 큰고래에 이르기까지, 아주 작은 벌레에서 커다란 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호흡에 맞추어 숨쉬고 있음을 느낍니다.
사무량심(四梵住)의 수행
이때 우리는 모든 중생을 위한 무한한 자비를 느끼고, 우리의 마음은, 그들이 모두 평화와 조화속에서 살기를, 자연히 빌게됩니다. 한 생각이 자연히 마음에 일어날 것입니다 : “모든 중생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모든 종교가 화목속에 존재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흑색, 흰색, 홍색, 황색, 갈색, 가난한 자, 부자, 넉넉한 자, 굶주리는 자, 남녀노소 모두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기를! 땅 위에 있거나 물 속에 있거나 공중에 있거나 동서남북 위 아래에 있는 모든 생물이 평화롭게 화목하게 살기를! 모든 대립, 모든 전쟁, 모든 경쟁, 모든 미움이 평화롭게, 우호적으로, 화목하게 해결되기를! 모든 정치인들이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현명하고 자비로운 동의를 할 수 있기를! 아무도 타인을 해하지 말기를! 모든 인종의대립, 종교대립, 종족대립, 직장에서의 갈등, 국내의 갈등, 대외적 갈등이 평화와 화목속에서 끝나기를!”
이러한 생각들이 마음에 떠오를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차게 되고, 자애와 자비가 조화되어 가슴이 고동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자애로 깨어있는 마음과, 모든 중생을 향한 자비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무엇이나 감사하고, 타인이 기뻐하는 것을 무엇이나 감사하게 됨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고마워합니다.
경안각지
이 평온하고 시원하고 신선한 기쁨은 몸과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하고 평화롭게 합니다. 마음이 평온하고 시원하고 신선할 때, 고요, 적정을 느끼고, 보다 더 평화롭게 됩니다. 우리는 만족합니다. 화의 열기, 화의 불덩어리는 가라앉습니다. 탐심의 열기, 탐심의 불덩어리가가라앉습니다. 혼동의 열기, 혼동의 불덩어리가 가라앉습니다. 슬픔, 고통, 괴로움, 한탄, 절망이 가라앉습니다. 질투, 두려움, 긴장, 불안, 걱정이 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다. 위태롭지 않고 안전하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목표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 단계에서 일시적인 평화와행복을 얻습니다.
정각지
그 결과 우리는 삼매를 얻습니다. 이것이 일선정의 경험입니다. 자애의 생각, 자비의 생각, 그리고 아낌없는 마음, 탐심의 소멸이 우리 마음에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탐심, 진심, 졸림, 불안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수행이나수행법에 대한 의심, 삼보에 대한 의심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른 집중입니다. 바른 집중은 깨어있는 마음의 염력에 의해 지탱됩니다.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며, 이제 그 깨어있는 마음이 더 청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을 바탕으로, 애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경험한 후 선정삼매를 얻었기 때문에, 이 아름답고 평화롭고 기쁨이 넘치는 선정삼매에 집착하려고 하지않습니다. 정념을 바탕으로 얻은 집중은 어떤 탐심이건 일어나는 것을 떨쳐버립니다. 정념과 정정은 탐심의 정지를 위해 함께 일합니다. 선정삼매 가운데서도 우리는 계속하여 무상의 경험에 일념집중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무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더 깊고 선명합니다. 선정삼매를 얻기 전에 우리가 경험한 무상은, 거칠고 얕은 정도였습니다. 이제 보다 깊은 집중과 보다 깊은 성찰력으로 우리의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이 무상을 뚫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깊은 삼매를 갖기 이전에 얻는 삼매는 순간적인 삼매입니다. 이것은 집중의 강도와 날카로움, 선명함이 부족하여 지속되지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다 힘 있고 보다 강한 염력과 집중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마음의 힘이고 삼매의 힘이다. (satibala, samādhibala)
깨어있는 마음은 강한 집중력을 만날 때 더 강해집니다. 이 두 힘을 구비했을때, 더 깊이 무상을 뚫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상뿐 아니라, 무상한 모든 것은 만족할 수 없는 것임을 봅니다.
모든 즐거운 경험은 마음이 이에 미치기 전에 변해버리므로, 이 즐거운 경험에 머물려 하는 마음이, 계속 머물지 못하게 되어 피곤해집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 마음은 지칩니다. 처음의 열의가 식기 시작합니다. 이 때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까지도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권태가 옵니다. 권태를 지켜보는 동안,권태조차도 변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 권태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때 마음은,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멈추게 할만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몸과 마음에는 이를 지배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납니다. 특정한 원인과 조건이 있을 때, 특정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특정한 원인과 조건이 사라질 때, 그 특정한 현상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권태가 일어났을 때, 모든 미세한 원인과 조건에 관해 계속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수만의 현상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데 휩쓸릴 것입니다.
이는 권태를 제거하려는 목적을 위해서는 전혀 비현실적이고 불필요합니다. 삼보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수행정진을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서, 이 단계에서 충분합니다.
현상의 이러한 특성을 본 후, 우리는 몸,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의 어느부분에도 영원한 실체나 영혼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를 알 때, 붓다담마 그리고 붓다와 그의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성인이 된 성도의 제자들에 대한 확고한 신심이 일어납니다. 삼보에 대한 의심이 마음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생 이전에 전생이 있고, 그분이 수행한 길을 따라가서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한 해탈을 얻은 분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확고한 신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의식이나 형식을 지킨다 해도괴로움에서의 해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확신, 신심의 힘, 무아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함께,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의 무상함에 주의 집중하며, 나아갑니다. 과거에 몸이 경험한 것, 마음이 경험한 것은 모두 변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미래에 몸이 경험하는 것, 마음이 경험하는 것은 예외 없이 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경험은 일어나서 남김없이 사라집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형체, 느낌, 인식, 생각, 의식은 원인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고, 조건으로하여 사라집니다.
현생 후에 다음생이 있고, 현생 이전에 전생이 있음을 알게 될 때, 지금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서 마찬가지로 슬픔 한탄 통증, 괴로움 그리고 절망을 거듭한다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않은 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수가 있고, 괴로움이 끔찍한 3악도에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남이 가져오는 위험을 볼 것입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보증이 없기 때문에, 짐승이나 아귀로 태어날 위험이 있습니다. 윤회 전체에 대해 실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하기를 바랍니다. 결코 다시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평정각지
오온이 모두 무상,고,무아임을 본 후, 모든 현상에 대한 평정심이 일어납니다.
마음은, 모든행위를- 선업, 불선업, 색계나 무색계, 신행, 구행, 의행이건, 모두평정심으로 봅니다. 이 때 우리의 마음에는 정념을 보다 더 강력하게 닦고자 하는 필요성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상태가 될 때, 바른 견해, 바른의도, 바른말, 바른행위, 바른생업, 바른정진, 바른마음챙김, 바른삼매를 향한 깊은 성찰이 일어납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다음의 둘 중의 하나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계속하여 다음 단계의 선정수행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1선정에 머물면서 위빠사나수행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는 장애가 이미 제거되었고, 1선정을 얻은 상태입니다. 1선정에서는 자비희사의 마음과 환희심, 행복이 모두 강하게 존재합니다. 우리의 집중이 이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황홀한 마음상태로하여 몸과 마음이 환희와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마음상태로 인하여, 일선정에 집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깨어있는 마음, 집중, 아낌없는 마음, 진정한사랑, 자비, 기쁨, 평정심, 그리고 생각이 탐심을 배척합니다. 특히 가까이 있는 적인 탐심과 멀리 있는 적인 진심을 극복했기 때문에, 그리고 바른 집중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마음상태에서 탐심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듣고 냄새맡고 느끼고 맛을 봅니다.
선정의 단계는 단계마다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1선정에 흥미를 잃게 되면, 이는 자연적으로 2선정으로 옮겨집니다. 이 곳에는 아낌없는 마음, 사랑, 자비심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2선정에서는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이 훨씬 깊게 자리잡습니다. 삼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몸과 마음이 환희심과 행복으로 가득 찹니다. 마치 생수가 계속 솟아나오는 호수처럼, 환희심이 계속 시원하게 솟아납니다. 때때로 가벼운 빗방울이 부드럽게 내려서 호수 위에 있는 작은 티끌을 말끔히 씻어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계속 새로운 환희심으로 시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상태에서,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 삼매, 집중의 힘을, 몸과 마음의 삼법인을 보는데 집중시킵니다. 모든 훌륭한 생각과 느낌들이 끊임없이 아주 미세하게 변화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염력과 삼매가 이전보다 훨씬 깊기때문에, 현상을 보는 성찰도 훨씬 미세하고 날카롭습니다.
더 높은 선정으로 나아가면, 사선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평정심이 있어서 깨어있는 마음이 청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맑고, 희고, 티없고, 특성을 벗어나고, 부드럽고, 유연하고, 한결같고, 확고한 마음으로, 깨어있는 마음을 닦으십시오. 여기서, 청정한 마음을 사성제의 성찰쪽으로 향하게 할 때, 8정도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선명해집니다. 괴로움의 진리, 무상, 무아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보다 낮은 선정에 있으면서 아직 깨침의 상태를 경험하지 못한 수행자는, 이제 의심을 제거하고 수다원을 얻습니다.
1선정에서 위빠사나수행을 계속하여 사성제의 진리를 깨칠 수도 있습니다. 1선정에서 위빠사나수행을 하는 것과 4선정에서 위빠사나를 하는 것의 차이는, 1선정에서 바로 위빠사나로 전향할 경우, 수다원을 얻는데 보다 긴 시간이 걸린다는점입니다. 아견을 제거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입니다. 4선정은 맑고, 희고, 티없고, 특성을 벗어나고, 부드럽고, 유연하고, 한결같고, 확고합니다. 4선정에서의 깨어있는 마음은 평정심에 의해 청정합니다. 1선정에서는 이것이약합니다.
수행이 되지 않은 마음이 무아와 고를 들으면 성을 냅니다. 평정심을 결여한 채 괴로움을 통찰하게 되면, 마음은 감정적으로 대응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공감해주는 것을 듣고 싶어 합니다. 행복이란 괴로움을 수행하지 않고는 오지않는 법칙을 모르고, 괴로움보다는 행복을 듣고 싶어합니다. 한 가지를 사면, 좋건 싫건, 다른 한 가지가 딸려 옵니다. 청정하게 깨어있는 마음과 평정심을 가지고 4선정에 들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괴로움, 무아, 무상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갑자기 아무 느낌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인식할 수없으면, 이는 바른 선정이 아니거나, 잠이 들어 깨어있는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수행자는 수면의 황홀감을 경험합니다. 이는 깊이 잠든 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싸구려 선정입니다. 이런 선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두려워합니다. 수행자가 이를 이해하면,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바른 선정을 얻었을 때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마음, 아낌없는마음, 자애로운 생각, 자비로운 생각이 함께 합니다. 이것들을 일컬어 선업을 가져오는 생각(kusala vitakka), 선업을 가져오는 사고(kusala vicāra)라고 합니다. 불선업을 가져오는 생각(akusala vitakka)과 불선업을 가져오는 사고(akusala vicāra)는 바른 선정의 마음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아주 즐거운 곳이지만, 우리는 이런 생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머물면서 깨어있는 마음을 닦을 수가 있습니다. 주의집중, 깨어있는 마음, 삼매가 함께 힘을 합치면, 선정요소들의 무상 고 무아를 봅니다. 선정요소는 생각이 아니고, 몸과 마음 속에 일어나는 미분자의 움직임입니다. 마음은 이 움직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정에 들어 있을때, 집중한 마음은 즐거운 느낌(subha), 행복(sukha), 불변성(nicca), 아(atta)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서, 즐겁지 않은 느낌(asubha), 괴로움(dukkha), 무상(anicca),무아(anatta), 갈애(taṇha), 아상(mana), 잘못된 견해(diṭṭhi)를 다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뚜렷하게 봅니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청정과 지혜를 강조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집중한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samāhitaṁ cittaṁ yathābhūthaṁ pājanāti)”
여기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악수를 합니다.(samatha vipassanā). 이것을 구존 또는 쌍련(yuganaddha)이라 합니다. 이때, 우리의 온몸과 온 마음은, 마치 설탕과 우유가 물과 섞인 것처럼, 환희와 행복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성인의 깨달음에 들어감
수다원의 길
이 단계에서 우리는 수다원에 듭니다. 아무것도 머무는 것이 없음을 봅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이때 우리는 무상을 깊이 뚫고 들어갈 수 있고,아견의 울짱을 부수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깨어있는 마음과 집중이 손을 잡고 법에 순응합니다. 의식과 의례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될 때 수다원의 길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출세간의 팔성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팔성도에 들어 있고, 수다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붓다의 여덟 부류의 성스러운 제자가 됩니다. (aṭṭhapurisapuggalā). 여기서부터, 중부경의 142품, 공양경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신도들이 올리는 공양을 받을 자격이 생깁니다. (Dakkhiṇāvibhanga Sutta, 비구 보디역 1102ff)
이 때부터 우리는 보다 더 확고한 신심으로 끊임없이 정진하고, 삼보에 대한 의심을 극복합니다. 붓다의 가르침과 승가의 승려들, 그리고 연기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의심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것으로서 성도에 들어선 자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확고한 신심과 깊은 성찰로 팔성도를 닦으며 계속 수행할 때, 무아라는 관념이 사라져버리고, 수다원의 과를 얻게 됩니다.
사다함의 길
이제 우리는 호흡 하나 하나에서, 미세한 하나의 움직임에서, 오온 전체를 봅니다. 몸과 마음이, 오온 전체의 활동 없이는 어느 하나도 의도한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오온이란 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의도적인 활동에 개입하기 때문에, 오온의 작은 미분자들이, 일순간도 머물지않고, 항상 유동하고 있음을 봅니다. 계속 출세간의 8성도를 닦으며, 그리하여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보다 선명하게 볼 때, 탐심의 거친 부분들이 사라집니다. 이때 사다함의 성도에 들어갑니다. 계속 8성도를 계속 닦으며,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보다 더 선명하게 볼 때, 진심의 거친부분들이 사라집니다. 이때 사다함의 과를 얻습니다.더 힘을 내어, 용기를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보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우리는 출세간의 8성도를 닦아 나아갑니다.
아나함의 길
성찰의 과정에서 어느 한 순간,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애가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이 아나함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1선정에서 얻었던 자비희사가 완성되는 순간이 오면, 진심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때 아나함의 과를 얻습니다. 보다 더 열심히, 보다 더 확고한 마음으로, 보다 더 깨어있는 마음으로 8성도를 계속 닦을 때, 우리는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보다 더선명하게, 가장 깊숙이 봅니다.
아라한의 길
색계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면서 아라한의 길에 들어섭니다. 계속 정진하며 출세간의 8성도를 닦고, 무색계에 대한 욕심이 사라질 때, 아만과 불안이 마음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라한의 길에 들어 있습니다. 마침내 나를 존재하게 하는(ahaṁkāra) 마지막 습기와 사성제에 대한 무명이 사라지고, 우리는 아라한이라고 불리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때, 완전히 깨달은 아라한의 마음에 생각이 떠오릅니다 :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성스러운 삶을 살았다.해야 할 것을 다했다. 더 이상 할 것은 없다.”
(번역 : 최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