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aṅgika magga)에 대해 (20080522) -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녹취

담마마-마까
2021-07-05
조회수 670

https://youtu.be/quvR4Et--5I


1.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aṅgika magga)에 대해 (20080522)

 

저번 시간까지 7각지에 대한 얘기가 다 끝났고,

이 시간부터는 '아리야 앗탕기까 막가(Ariya aṭṭaṅgika magga)' 해가지고 팔성도 · 팔지성도 · 팔정도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팔정도가 뭔지 아는 사람 누가 한번 얘기해봐요. (수행자 대답)

저번 시간에 나눠준 프린트물은 안 가져왔어요?

 

8정도는 우리가 현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나가는데 여덟 가지 으뜸가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생활이 되도록 해나가는 길입니다. 어차피 이생에서 목숨을 받아 태어났으면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성스러운 길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방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을 부처님이 여덟 가지로 나눠놓은 것인데, 통상적으로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경·율·론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경·율·론을 조금 더 풀어서 얘기를 하면 이 팔정도가 됩니다. 경·율·론이 팔정도에 안 들어가는 것이 없고, 팔정도가 삼장에 속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8가지 항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정견'입니다.

그래서 정견을 '뿝방가마(pubbangamā)'라고 합니다. 정견이 선행되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정견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7가지 길의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없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 길이 유용하게 쓰일 수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정도로 이 정견(正見)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 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른 견해라는 것을 확인해서 내가 '아, 이것이 바른 견해구나!' 하고 알면 참 좋은데 대부분 처음에는 그렇게 잘 안되거든요. 조사·확인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와 닿는 것이 개념상으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개념상으로 진리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은 아, 스님이 얘기를 했는데 이것이 바른 견해이고, 이것이 둑카이고, 이것이 무상함이고, 하는 것들에 대한 견해를 가지는 것. 그리고 이것이 사성제이고, 이것이 연기이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견해를 가지는 것. 이런 것들이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삿짜눌루미까 삼마딧티' 그렇게 얘기합니다.

 

삼마딧티(sammā diṭṭhi) 정견에는 그래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삿짜빠띠웨다 삼마딧티(Sacca paṭivedha sammā diṭṭhi)'라 해가지고 통찰해가지고 자기 스스로 확인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경우를 얘기하는데,

그전에 선행되는 것들이 뭐냐 하면 개념상으로 진리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먼저 확립을 해야 됩니다. 그리 해야만이 삼보라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려고 하는 열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아, 내가 이제는 노력해서 공부해야 되겠다, 또 스스로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진리를 통찰하게 되는 바른 견해가 또 생겨나기도 합니다.

 

대부분 학교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선생님이 가르쳐주죠! 가르쳐줘가지고 “1+2=3이다” 하고 배운다는 거라. 그렇게 배워가지고 아는 것들을 '삿짜눌루미까 삼마딧티'라고 보시면 됩니다.

1+2=3 이다 하고 이제 이해를 했는데, 그것을 실제로 내가 물건을 하나 가져오고 또 두 개를 가져와 더해보니까 '내 눈으로 확인을 한 게 틀림없이 3개이다'하고 내가 알게 되는 것! 그렇게 되었을 때는 누가 “1+2=4다” 하고 얘길 했을 때 그건 틀렸다고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거라. 왜? 이제는 내가 직접 물건을 가지고 내 눈으로 확인을 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삿짜빠띠웨다 삼마딧티' 그렇게 얘기합니다.

 

정견을 가지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요긴하게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고 부처님 말씀을 자꾸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내가 조사 확인하는 바른 견해를 가지려고 할 거 같으면 교육을 통해서 정확하게 개념상으로라도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됩니다.

 

그 선행되는 작업을 보통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가 '삼학'이라고 얘기를 하죠!

세 가지 배울 것이다 해서 '계·정·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계·정·혜 삼학에 대해서 훈련하고 또 수련하는 것.

 

누가 사리불 존자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정견, 정견 하는데 어떤 것이 정견입니까?"하고 얘기합니다.

사리불 존자가 뭐라고 대답을 하느냐면 "살아있는 존재를 죽이는 것은 나쁜 겁니까, 좋은 겁니까?" 그러니까 "유해(有害)하냐, 무해(無害)하냐?"

"유해(有害)합니다."

"누가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것은 역시 유해하다.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들은 그것도 유해하다. 거짓말하는 것도 유해하다. 그다음에 악의가 있는 말을 하는 것도 유해하다. 남에 대해서 욕설하는 것도 해로운 것이다. 이간질하는 것도 해로운 것이다. 욕심부리는 것도 해로운 것이다. 악한 마음을 가지는 것도 해로운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해로운 것이다 라고 안 할 사람이 있느냐"는 거라. 없다는 거라. 그건 누구든지 해로운 것이다 라고 안다는 거라.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견해를 가지는 것, 그것은 해로운 것이다!"

거짓말 안 하는 견해를 가지는 것은, 그것은 바른 견해라는 거라.

 

그러면 그 해로운 것은 뿌리가 뭐냐? 죽이고, 훔치고, 거짓말하고, 욕설하고, 악한 마음을 품고, 이간질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의 뿌리는 뭐냐는 거라.

탐·진·치라는 거라. 그래서 탐욕도 해로운 것의 뿌리이고, 미워하고 화내는 것도 해로운 것의 뿌리이고, 기만하는 것 어리석은 것도 해로운 것의 뿌리이다.

'이것이 해로운 것의 뿌리이다' 라고 분명하게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이 해로운 것의 근본 뿌리라고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은 바른 견해이고, '이것은 근본 뿌리가 아니다' 라고 잘못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은 틀린 견해라는 거라.

 

이렇게 스스로가 이해하게 되므로 해서 진실한 담마(dhamma)에 이르게 되는 이것이 처음에는 선행조건이 되어야 됩니다.

이렇게 스스로가 '아, 이것은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인가? 이익이 있는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하고 먼저 견해를 세워야 되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뿌리가 되어가지고 이렇게 해로운 것이 되고, 이로운 것이 되느냐? '아, 탐욕이 근본 뿌리구나! 또 화내는 것이 근본 뿌리구나! 또 어리석은 것이 근본 뿌리구나!'하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조금씩 더 깊이 있게 들어가집니다.

 

그렇게 해서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제는 이로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해코지 안 하고, 아까 얘기한 해로운 것의 반대되는 것! 누가 주지 않으면 가지지 않고, 남 해치지 않고, 그리고 자기가 감각적인 즐거움을 누리려고 나쁜 행위들을 하고 하는 것을 안 하고, 그다음 바른말 하고, 악의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를 가지고 말을 하게 되고, 이렇게 반대되는 것들을 자꾸

'아, 이것이 유익한 것이다! 하고 알게 되고. 이런 유익한 것은 탐욕이 없고, 또 화내는 것이 없고, 지혜로운 것이 뿌리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더욱더 증장시키려고 노력을 하게 되고.

그렇게 '먼저 이해하게 되는 것이 바른 견해의 시작이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씩 더 나아가게 됩니다.

 

태어날 때 갓난 애기들은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이 있다는 거라. 나이 드는 것은 나이를 먹어 보니까 틀림없이 고통이 있다는 거라. 병이 들었으면 또 고통스럽다는 거라. 죽음도 고통이 있다는 거라. 생노병사에는 항상 이렇게 고통이 따른다는 거라. 그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라. 고통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 고통이 있는데 고통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고통을 없애려고 노력을 한다는 거라. 고통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라는 거라. 고통이 있으면 고통이 있구나 하고 분명하게 먼저 알아라는 거라. 알고 나서 그 고통에 대해서 대처를 해야 되는 것이지, 없애려고 해가지고는 그거 없앤다고 해서 다시 또 안 나타나지나? 다시 또 나타나진다는 거라. 일단은 사물의 실상에 대해서 받아들이라는 거라.

이렇게 먼저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을 바른 견해라고 한다는 거라.

 

슬픔도 있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인 고통이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고통이 있고,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고통이 있고, 그리고 싫은 것들 계속 접해야 되니까, 원수하고 만나야 되고,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야 되고, 고통이 있다는 거라.

이런 모든 '오온'이라고 하는 것. 내 이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전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통이 있다는 거라.

'이것을 부처님이 고(苦)라고 했구나' 하고 이해한다는 거라.

 

그러면 '고(苦)의 원인'이 뭐냐? 하고 또 이해를 하게 된다는 거라.

원인이 왜 그렇겠어요? 아무리 나이 먹으면 고통이 있게 되어있고, 병이 들면 고통이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병을 병으로써 받아들이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고통은 없는 거라.

원하기 때문에, 집착하기 때문에, 달라붙기 때문에 고통이 오는 거라.

원하고 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쪽으로 바뀌길 원하고 바라기 때문에, 싫은 것들은 좋은 것으로 바뀌기를 바라고, 좋은 것들은 변하게 되어있는 것인데도 영원하기를 바라고, 이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를 바꾸기를 바라는 거라. 그리고 그런 즐거움이나 절망이라고 하는 것들을 또한 즐기게 되는 것들, 이런 것으로 인해서 고통의 원인이 있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거라.

그걸 욕애(慾愛 kāma-taṇhā), 유애(有愛 bhava taṇhā), 무유애(無有愛 vibhava taṇhā)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고통(苦)의 중지' 고(苦)가 있으면 고통이 완전히 끝날 때가 있을 것이 아니냐는 거라.

끝나버리는 것, 남음이 없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포기해 버리게 될 때 끝나는 거라. 뭘 포기해야 되겠어요? 병을 포기해야 되겠어요? 출생을 포기해야 되겠어요? 죽음을 포기해야 되는 거라? 그것은 아니죠!

그 고통의 원인을 포기해 버리라는 거라.

갈망하고, 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항상 하기를 바라고 하는 이런 것들을 포기해 버린다는 거라. 그렇게 포기해버리고 나면 고통의 중지되고 고통이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리고 그런 '고통이 중지된 곳으로 이끄는 길이 있구나!' 여덟 가지 길!

바른 견해로부터 해서 바른 집중하고 이런 것들로 인해서 '아, 그러한 길로 나아가는구나! 바른 생활을 해라. 부처님이 말한 바른 생활들을 이렇게 해나가니까 나쁜 것 하지 않고, 또 도움 되는 것들 자꾸 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마음도 편안해지고 점점 더 그렇게 집착하고 하는 것들도 떨어져 나가고 하는구나!' 그것이 바로 '길(道)'이라는 거라.

'여덟 가지 길', 점차 적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거라.

 

이런 사성제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른 견해입니다.

그다음에 연기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깟짜야나가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올바른 견해, 바른 견해, 바른 견해 그렇게 얘기하는데, 무엇을 바른 견해라고 합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이 세상은 두 가지를 의지한다는 거라. "있다, 없다" 있다, 없다는 거라. 그 외에는 의지 안 한다는 거라. 그런데 누군가가 있다고 할 거 같으면 한쪽에서는 틀림없이 없다 하게 될 것이고, 또 없다고 할 거 같으면 또 한쪽은 있다 하고. 그래서 '있다'와 '없다' 이 두 가지만 의지한다는 거라.

이게 잘못됐다는 거라.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데, 어쨌든 사람들은 그것을 흑백으로만 딱 구분해 버린다는 거라.

 

일어나는 것을 바르게 관찰해서 알면 일어나는 것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없다'는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는 거라. 사라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사라지는 것은 있다는 거라. '없다'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거라. 그래서 '있다, 없다'로 편가르고 그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거라.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되어있고, 사라졌으면 다시 일어나게 되어있고, 있으면 없어지게 되고, 없으면 있어지게 되어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알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 안 한다는 거라.

일어났으면 영원히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없어지면 영원히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거라. 그래서 '있다, 없다'에 빠져버린다는 거라.

 

이것은 그러한 자기의 생각에 집착하고 그런 견해에 끄달려 들어가 버린다는 거라. 독단적인 신념에 묶여 버린다 하는 거라. 그런 독단적인 편견들, 또 마음에서 일으키는 고집들, 그리고 집착하고 견해에 끌려들어가는 것들, 그런 것들로 인해서 '나'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난다고 하는 거라.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일어났으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기 때문에, '있다, 없다'에 끄달려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라.

이런 것들을 바른 견해라고 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모든 것은 있다, 삽방 아티(Sabbam atthī)'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라는 거라. '모든 것은 없다(Sabbaṁ natthī)' 그것도 하나의 극단이라는 겁니다.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고, 고행에 빠지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라는 거라. 그래서 그 중간 '맛제나 담마(majjhena dhamma), 중간에 의해서 법을 바라보아라, 진리를 바라보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일어난 것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죠! 사라진 것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거라. 연이어서 변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뭐라고 그럽니까?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라 그러죠!

'요니소마나시까라!' 쭉 따라가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아는 것들!

그래서 정견이 생기려고 할 거 같으면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데,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이렇게 변하는 현상들을 보게 되는 것! 그런 것들이 정견이 생겨나는 조건이 되게 되어있다 하는 거라.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사성제의 진리를 알고, 12연기에 대해서 알고 또 어떤 것이 중도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고 하는 것들을 정견이라고 그럽니다.

 

지금 시간이 되었으니까, 밑에 '삼마딧티 정견' 부분은 다음 시간에 진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은 그 정견에 대한 것을 개념상으로 먼저 알아야 됩니다. 알고 나서 실천을 통해서 점점 알도록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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