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6강. 신념처(身念處, kāyānupassanā): 아-나-빠-나사띠 (20110319)

담마마-마까
2021-06-07
조회수 1026

https://youtu.be/t_YcNJIA1wE


6강. 신념처(身念處, kāyānupassanā)- 아나빠나 사띠 (20110319)

 

··· 그리고 기존의 회원들은 새로 오신 분들에게 기본적인 습이 익히도록 해주십시요. 절하는 법부터 해서 기본적으로 익혀야 될 습의들을 조금 얘기들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가끔씩 다른데 수행지도를 가면 그런 걸 많이 느낍니다.

어떤 경우든지 스님이 그 법회에 가서 그법회를 주재할 경우에는 삼보예경을 먼저 합니다. 그러고나서 여러분하고 똑같이 삼귀의 오계를 주거든.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꿇어앉아서 삼보예경을 하는 법이 없어요. 그냥 양반다리도 탁 앉아있어요. 안해봤다는 거라. 그러니까 스님이 삼귀의 오계를 줄 때도 꼭 마찬가지라. 그러니까 그걸 몰라서 그러는 거라. 안해봤으니까.

그런 패턴들이 되다보니까 스님에게 필요한 거는 싸악 하고, 어느정도 수행을 익히고 나면 그 스님을 욕하는 거라. 참 잘못된 버릇들이 들어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도 앗사지를 인연으로 해서 출가를 했고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물론 앗사지 스님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닙니다. 도의 길에 들게는 했지만 부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그 수행법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됐는데, 그래도 자기를 이 바른 길에 들게 했던 앗사지 존자한테 항상 아침 저녁으로 열반에 들 때까지 그쪽을 향해서 인사를 했거든. 아침에 딱 일어나면 맨처음 하는게 앗사지 스님이 있는 쪽을 향해서 삼배를 하고 일과 시작하고, 마지막 잠자리에 들 때도 삼배를 하고 잠자리에 들고, 그렇게 했거든. 그게 사실은 바른 겁니다.

 

왜 그러냐하면 한국에 지금 수행이 들어온 것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있다 보니까, 특히 위빳사나 수행이라 하더라도 태국방법이나 스리랑카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버마의 몇가지 방법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마타 수행법에 대해서는 또 터부시하게 되고, 수행에서도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불교 전반적인 것으로 봤을 때는 더 한쪽으로 치우치게 돼있습니다.

배워야 될 것들을 배워야 되는 것들이 부족하고, 그다음에 습의를 익혀야 될 것들도 부족하고, 여러 가지 형식이나 의례들에 대한 것도 부족하고, 이런 여러 가지가 좀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수행자들의 성향들을 보면 좀 한쪽으로 많이 치우쳐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 선원은 적어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나는 봅니다. 쭉 따라서 해왔고 했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쳐지는 것은 조금 방지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좋든 싫든 여기오면 여기 방식대로 따라야 됩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맞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니까 너무 거부감을 가지지 말고 쭉 따라오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할 거 한번 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수행법 중에 몸에 대한 관찰 중에서 맨 첫 번째에 해당이 되는 거죠.

'까-야-누빳사나-' 중에서도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ati)' 부분에 대한 겁니다. '출입식념(出入息念)'이라는 거죠. 이건 따로 하나의 경전으로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물론 '까야누빳사나(kāyagatāsatisutta)'라 해서 '염신경'이라는 경전도 따로 하나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신경'이나 아니면 '아나빠나 사띠 숫따'나 이런 내용들도 다 참조를 해가지고 설명을 할 테니까 꼭 여기 '마하 사띠빳타-나(Mahā-satipaṭṭhāna)'나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에 있는 내용만은 아니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참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나-빠-나 사띠(입출식념)』

 

a. dīghaṁ vā assasanto 'dīghaṁ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ṁ vā passasanto 'dīgh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디-강 와- 앗사산또- 디-강 앗사사-미-띠 빠자-나-띠,

디-강 와- 빳사산또- 디-강 빳사사-미-띠 빠자-나-띠

 

b. rassaṁ vā assasanto 'rassaṁ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ṁ vā passasanto 'rass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랏상 와- 앗사산또- 랏상 앗사사-미-띠 빠자-나-띠,

랏상 와- 빳사산또- 랏상 빳사사-미-띠 빠자-나-띠

 

c. 'sabbakāyapaṭisaṁ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ṁ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삽바까-야빠띠상웨-디- 앗사싯사-미-띠 식카띠

삽바까-야빠띠상웨-디- 빳사싯사-미-띠 식카띠

 

d.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passasissāmī'ti sikkhati.

빳삼바양 까-야상카-랑 앗사싯사-미-띠 식카띠

빳삼바양 까-야상카-랑 빳사싯사-미-띠 식카띠

 

a.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라고 그는 분명하게 알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길게 숨을 내쉰다.'라고 그는 분명하게 안다.

 

b. 짧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라고 그는 분명하게 알고, 짧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짧게 숨을 내쉰다.'라고 그는 분명하게 안다.

 

c. '전체적인 호흡과정을 명확하게 알면서 들이쉴 것이다.'라고 노력하고,

'전체적인 호흡과정을 명확하게 알면서 내쉴 것이다.'라고 노력한다.

 

d. '호흡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다.'라고 노력하고,

'호흡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다.'라고 노력한다.

 

맨 첫머리에 있는 거는 어느 경전에도 다 있습니다.

보통 호흡에 대해서 관찰한다 할 것 같으면 그 아나빠나 사띠는 사마타 수행입니까, 위빳사나 수행입니까? 예? 둘 다입니까? 언젠가 스님이 설명을 한번 했죠. 호흡을 어떻게 관찰하는가에 따라 위빳사나 수행이 되기도 하고, 사마타 수행이 되기도 합니다. 그 두 가지를 다 겸해서 얘기를 할테니까 자기에게 맞는 거만 받아들이려고 하지 말고 두루 알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맨 처음에 보면 이 단락이 구성되어 있는 게 16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내준 거는 a. b. c. d. 네 개죠! 그다음에는 또 e. f. g. h. 해가지고 이렇게 네 개가 되고, 그다음 또 네 개가 되고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몸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도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것이 있고, 몸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있고,

몸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있고, 몸에서 담마를 관찰하는 것이 있고.

그렇게 네 개씩 항목이니까 16개가 되게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좀 이해하기가 좀 수월하겠죠!

 

그래서 뒤에 나오는 것, 지금 오늘 해준 것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것 내용하고 문맥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똑같은데 수행하는 방법은 확연하게 다릅니다.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것하고, 몸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은 다르죠! 방법이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문장만 가지고 이해를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이해를 하기가 좀 힘이 듭니다. 그런 부분을 중점적으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a. b. 부분입니다.

a. dīghaṁ vā assasanto 'dīghaṁ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ṁ vā passasanto 'dīgh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b. rassaṁ vā assasanto 'rassaṁ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ṁ vā passasanto 'rass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쭉 스님이 풀어서 다 설명을 해놔 놨습니다.  일인칭 단수, 삼인칭 단수, 현재형 이런 식으로 전부다 설명을 해놨기 때문에 빨리어 문장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크게 의문을 가질 것은 없습니다. 아마 그럴거라고 봅니다. 물론 의문이 나면 질문을 하십시요.

 

a.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라고 그는 분명하게 알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길게 숨을 내쉰다.'라고 그는 분명하게 안다.

b. 짧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라고 그는 분명하게 알고, 짧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짧게 숨을 내쉰다.'라고 그는 분명하게 안다.

 

이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입니다.

길게 들이쉬고 길게 내쉬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

짧게 들이쉬고 짧게 내쉬면서 분명하게 아는 것. 그렇게 해서 쌍으로 되어 있는 것이 두 가지가 됩니다.

숨을 들이쉬는 것이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다. 어떨 때 깁니까? 또 어떨 때 짧아? 숨이. 어떨 때 길어요? (대답) 그렇죠. 잠잘 때 길어지고, 또 어떨 때 그럼 짧아져요? 화가 날 때, 또 운동할 때, 또 마음이 급할 때, 누가 내 것 뺏어가는가 하고 그럴 때도 짧아질거고.

여러분들 이제 긴 거하고 짧은 거는 분명하게 알죠!

 

그럼 수행에서 긴 거하고 짧은 거는 아는가 하는 거라. 거기에 분명히 '짧게 숨을 내쉬면 나는 짧게 숨을 내쉰다'라고 분명하게 알아라 했거든.

그런데 왜 우리는 호흡을 이렇게 관찰해야 될까?

그거 하기 전에 호흡을 관찰할 때 어떤 식으로 관찰을 해요?

그걸 주석서에 비유를 해놓은 게 있습니다. 여기 아기가 있단 말이라. 저놈을 재워야 엄마가 여기서 스님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할 건데 안 자고 있으면 어떻게 돼? 내가 온 마음이 거기 가 있어야 돼. 그럼 이놈이 뭘 하는지에 따라서 마음이 다 따라가야 되거든. 그러면 쟤가 하는 것을 계속 뒤쫓아 가야 돼, 마음이. 그런데 쟤가 만약 탁 자버린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 내 마음이 거기 쫓아갈 필요가 없죠? 가끔씩 한번 뒤돌아보면 됩니다. 그렇죠!

 

호흡을 관찰할 때도 이렇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좇아가면서 관찰하는 방법하고, 딱 주시해가지고 한 곳에 멈춰서가지고 오는 것만 알아차리는 것. 그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그럽니다.

애기를 시소(요람)를 태울 때 보통 보면 시소를 탁 밀고 나서 딴짓해도 됩니다. 어쨌든 시소 그 곽 안에 들어있으니까. 가까이 오면 또 한 번 손으로 툭 밀어주면 돼. 가까이 오기만 하면 내가 그것만 밀어주면 돼. 그래서 크게 힘이 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지 않고 애기가 거기에 누워있질 않고 서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밀어줄 땐 밀어주더라도 마음은 항상 거기 따라가야 됩니다, 애기를. 그러니까 굉장히 바빠지죠, 그렇게 애기를 보면 힘이 들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숨을 알아차리는 것도 숨을 따라 가버릴 것 같으면 굉장히 힘이 든다는 거라. 그런데 숨을 따라가지 않고 가만히 오는 것만 알 거 같으면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라.

 

가끔씩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스님, 좌선만 하면 머리가 아파 죽겠습니다. 막 상기가 됩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거 왜 그럴까? 따라다녀서 그렇죠.

“그런데 스님, 나는 앉아서 수행만 하면 졸립니다.” 그거는 왜 그럴까?

따라가지는 않았는데 오는 것조차도 몰랐다는 거라. 오는 걸 알 것 같으면 자기한테 와서 툭 건드리면 아픈데 아픈 걸 알게 되면 내가 잘 수가 없는데 모르니까 자는 거라. 오는 거조차도 몰랐다는 거라.

대상을 완전하게 놓쳤을 경우, 대상을 같이 따라가 주는 경우, 이럴 경우에는 잠에 떨어지든지 아니면 수행하고 나도 개운하지가 않고 무겁고 그렇게 되는 거라.

 

처음에 스님이 태국에서 수행을 배울 때, 마하시 방법으로 배웠습니다.

태국 남쪽에 보면 '위벡 아솜'이라고 하는 '촘부리'라고 하는데 명상센터가 있는데 거기서는 마하시 스님의 직계제자 '아짠 아사바'라고 하는 스님이 가르쳤으니까 거기서 처음 배웠죠. 그러다가 어느 정도 공부가 되고 나니까 이제 이 스승 저 스승을 막 찾아다니는 거라. 한 번은 저기 남쪽에 '붓다다사' 스님이 유명하다 해가지고 그 스님 밑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갔어요.

 

거기 들어갔는데 거기는 호흡을 어떻게 가르치냐면,

옛날에 우리 태종사에서 수행을 할 때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었어요.

숨을 '흐~~읍  후~우~~  흐~~읍  후~우~~' 이렇게 쉬는 거라. 그리고 또 짧게 '흡  후  흡  후' 이렇게 쉬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죽겠는 거야. 굉장히 수행에 방해 되고.

아니나 다를까 태국의 붓다다사 스님한테 가니까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거야. 처음에 굉장히 의아했거든요. 왜 이렇게 수행을 의도적으로 수행을 하게끔 하는건지. 나중에 그러고나서 스님은 ‘아, 이건 아니다’ 해가지고 나와버렸어요.

지금 같아서는 '아! 그 방법도 좋은 방법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을 텐데.

 

왜 그러냐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호흡을 좇아갑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코끝에서 관찰한다, 배를 관찰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보면 호흡을 좇아갑니다. 안 그런 거 같죠? 실제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보통 호흡은 빠릅니다. 일상적인 호흡은. 평상시 때 관찰하지 않고 그냥 일반적으로 하는 호흡은 대부분이 빠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항상 뭔가를 취하려고 하고, 뭔가를 원하게 돼있고, 또 배척하려고 하는 그런 탐, 진, 치가 있기 때문에, 탐·진·치가 있는 상태에서 호흡은 정상적인 호흡보다 항상 빠르게 됩니다. 그게 일반적인 거거든.

 

그런데 호흡을 수행하려고 탁 앉으면 어떻게 돼요? 호흡이 느려집니다.

당연히 느려집니다. 탐·진·치 없이 수행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리려고 하는데 대상을 명확하게만 알아차릴 거 같으면 탐·진·치가 없이 알아차리게 되는데, 그렇게 하려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대부분이 보면 대상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호흡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호흡이 정상적인 거보다도 늦게 되는거라.

 

그래서 우리 스승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 항상, 그때 당시에는 성냥개비였어요, 성냥개비를 손에 쥐어가지고 호흡 한번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성냥개비 하나 톡 떨어트리고, 또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성냥개비 하나 톡 떨어뜨리고, 그래서 일 분에 성냥개비 몇 개가 떨어뜨리는지를 한번 보라는 거라. 아침에 한번 체크 하고, 점심때 하고, 저녁때 또 체크하고, 일주일 내내 그거만 하라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해보니까 많은 차이가 나는 거라. 어떨 때는 일 분에 다섯 개까지 차이가 나. 보통 일 분에 열여섯 열일곱 번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나이 따라 틀립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다섯 개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들도 있는 거라. 호흡은 절대 일정할 수가 없는 거라. 그 짧은 일 분이지만.

 

그런데 대부분이 보면 보통 내가 쉬는 숨, 그러니까 내가 의식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누가 와서, 쉽게 말하면 내가 뭐 다른 일을 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잠을 자고 있다든지 이럴 때 와서 호흡을 체크했을 때보다도 호흡하는 것이 느려. 느리더라고. 그래서 ‘아, 내가 호흡을 하려고 할 것 같으면 느려지는구나.’

그걸 처음엔 이유를 몰랐거든. 왜 그러냐면 대상을 따라가기 때문에 느려지는 거라. 실제로는 여러분들이 그걸 바르게 알려면 지금 하는 호흡, 여러분들은 바르다고 생각하는 호흡보다도 조금 빠른 템포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호흡이다 하는 거라.

 

어쨌든 붓다다사 스님 같은 경우는 그랬거든.

어차피 따라가니깐, 이 따라가는 것을 어떻게 하면, 쉽게 말하면 한 곳에 딱 매복해서 그걸 알아차리느냐, 그거를 바꿔주는 방법을 연구를 한 거라.

그러니까 호흡을 하는데 들이쉴 때 의도적으로 길게 들이쉬라는 거라. 그러면 딱 멈추게 해. 그러고 나면 당연히 호흡을 내쉬게끔 되니까 그럼 내쉴 때 길게 내쉬게끔 하고, 그러고 나서 딱 멈추게 하고.

길게 하도록 하고 그다음엔 짧게 하도록 하고, 이걸 계속 반복하게 하는 거라. 그러다 그게 어느 정도 되면 마음이 의도적인 호흡에 따라서 따라가지게 되는 거라. 따라가지게 되니까 어느 정도는 대상하고 일치가 되거든.

 

그러고 나면 그다음엔 뭘 하느냐면 숨을 들이쉴 때 이걸 쪼개는 거라.

길게 들이쉬더라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세게 하고,

내쉴 때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고, 어떨 때는 열까지 세게 하고.

짧게 할 때도 이걸 다섯에 하는데 짧게 할 때는 '하나,둘,셋,넷,다섯' 이라는 걸 빠른 템포로 해주는 거라. '하나,둘,셋,넷,다섯' 그럴 거 같으면 어쨌든 내가 그 동안까지 쉬고 딱 멈춰야되는 거라. 그러고나서 '하나,둘,셋,넷,다섯' 할 때 내뱉도록 하고.

그러니까 짧게 하는 호흡이든 길게 하는 호흡이든 그 호흡을 이렇게 따라가게끔 하더라고. 그러면서 호흡하는 걸 컨트롤하게끔 만들어 주더라고.

 

컨트롤이 가능해지니까 어떻게 됐냐면 그다음부터는 이 호흡을 길들이기가 쉬워지는 거라. 경전에 보면 그런 구절들이 나옵니다. '마음은 굉장히 길들지 않아서 야생의 망아지와 같다.' 그런 야생의 망아지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말뚝에다가 고삐를 매 가지고 묶어놔야 된다는 거라. 묶어놔야 만이 요게 다른 데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서만 있게 되는 거라.

그러다가 지칠 거 같으면 온순해지게 된다는 거라. 호흡도 그렇게 길들이라 하는 부분이거든. 그걸 딱 가져와가지고 이 붓다다사 스님이 응용을 하더라고.

 

호흡을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1차적인 목적이 그것에 있습니다.

1. 마음을 대상에 묶어두기 위해서.

대상은 호흡이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또 아니면 다른 것이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대상에다 마음을 먼저 묶어둬야 됩니다. 묶어두지 않을 거 같으면 항상 벗어난다는 거라. 묶어두기 위한 훈련들을 그런 방법을 쓰기도 하더라고.

 

여러분들도 가끔씩 그렇게 하죠!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쉽니다. 아니면 숨을 딱 멈추고. 5초만 멈췄다가 다시 또 쉬고, 이렇게 할 것 같으면 화는 많이 누그러들죠! 누가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 하더라도 즉시 내가 말을 할 것 같으면 말이 떨려서 나옵니다. 호흡이 가빠지기 때문에. 그럴 거 같으면 어떻게 해요? 떨리지 않고 평상시대로 말을 할 것 같으면 숨을 멈추든지 숨을 길게 해가지고 호흡을 정상적으로 하고 나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 저 사람이 지금 긴장을 해있는 게 아니다, 아니면 마음의 상처를 받은 상태가 아닌 상태에서 말을 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대부분이 보면 긴장한 상태에서 얘기하게 된다는 거라.

 

일차적인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마음을 대상에다가 묶어두라.

호흡을 알아차릴 때 일차적인 관건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지 호흡이란 대상에다가 마음을 묶어두도록 자꾸 훈련해야 됩니다.

그게 조금 전에 스님이 설명했듯이 붓다다사 스님의 방법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하든지 그거는 여러분들 자유입니다. 그 방법은 아주 다양하게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그 '천태지관법' 같은 데는 '수식상수지관' 해가지고 '수식'이 맨 먼저 나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는 거라.

 

2. 그다음에 두 번째 해야 되는 것은 뭐냐면 왜 호흡에다가 여러분들이 알아차릴려고 그럽니까? 호흡을 하면 어떤 이익이 있기 때문에?

지금 행복해지기 위한 겁니다!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데 상기가 자꾸 된다든지 아니면 자꾸 게을러진다든지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이익이 없다는 거라. 호흡을 관찰하면 할수록 내가 자꾸 깨어있게 되고 항상 마음에서 기쁘고 행복한 마음들이 자꾸 퍼져나가야 된다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호흡을 관찰한다는 거라.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호흡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한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게 가장 관찰하기가 쉬운 거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호흡밖에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서 조건 따라서 일어나는 것들이 있지만은 호흡이라고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내가 의식하든 안 하든 어쨌든 계속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 대념처경 맨 처음에도 호흡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맨 첫머리에 나오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 경에서는 앞에 한번 보십시오,

'숨을 길게 내쉬고 짧게 내쉬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라' 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그렇죠! 그러면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는 것을 알고, 짧게 들이쉴 때는 짧게 들이쉰다는 것을 알고,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쉰다는 것을 알고, 짧게 내쉴 때는 짧게 내쉰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호흡은 어떤 경우든지 동일한 것은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없습니다.

반드시 다르게 돼있습니다. 왜 그럴까? 왜 각각 달라질까? 호흡이 지 혼자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없으면 호흡을 할 수 있습니까?

죽은 사람하고 여러분들 차이가 뭡니까?  

마음이 있는 거하고 없는 거 차이죠!

두 번째는 감각이 있는 거하고 없는 거 차이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것은 마음이 존재를 하는가 하고 안 하는가 하는 그겁니다.

죽은 사람은 그래서 호흡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마음이 조건 지어지기 때문에 호흡을 하게끔 됩니다.

마음이 만약에 예를 들어서 호흡 하지마 할 거 같으면 호흡 안 합니다. 일정한 시간 동안 호흡을 안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지마 한다고 해서 계속 안 할 수는 없죠?

호흡은 무엇에 조건 지어져 있습니까 또? 이 몸에 조건 지어져 있죠!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해야 된다는 거라. 몸에 또 조건 지어져 있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하지마! 한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라.

이 몸이 살기 위해선 호흡도 해야 돼.

몸과 마음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게 사실은 호흡이라는 거라.

 

그러면 마음에 의해서 조건 지어지는 것이 호흡이라 할 것 같으면 마음이 똑같은 마음은 아니죠? 좋은 마음도 있고 싫은 마음도 있고 여러 가지 마음이 있다는 거라. 시시때때로 찰나마다 바뀌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 따라서 호흡도 조건 지어진다는 거라. 그래서 호흡은 절대로 동일할 수가 없다는 거라. 아무리 내가 좋은 상태를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 똑같은 것을 다시 경험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호흡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지금의 호흡이 어떤 호흡인가, 긴 호흡인가 짧은 호흡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건지어지게 하기위해서 마음도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그러면 내가 예를 들어서 호흡만 관찰하고 있을 거 같으면 좋은데 불현듯 화가 일어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호흡으로써 그 화를 다스릴 수도 있겠죠. 호흡을 길게 해가지고 화가 일어나는 것을 억제하고 멀리하게끔 만들어주는 거라. 그래서 짧은 호흡과 긴 호흡의 장단점을 분명하게 파악을 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짧게 호흡을 자꾸 할 것 같으면 오래 호흡 못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 거 같으면 되도록이면 짧은 호흡을 안 하려고 하겠죠. 부드럽고 긴 호흡을 하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호흡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아는 능력들을 가지도록 하라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렇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까 애기의 예를 들듯이 쫓아다니면 안 됩니다. 한 곳에 가만히 딱 멈춰서 거기서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코끝을 볼 때는 여기, 여기에 딱 마음을 멈춰서 가지고 여기를 통해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니까 숨을 따라갈 필요가 없죠! 배를 할 때도 마찬가지 배의 한 지점에다가 마음을 두고 거기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들만 알아차리면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해야만이 피곤하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왜 코끝을 안 하고 배를 할까?

긴 호흡 짧은 호흡을 알아차릴 때 왜 대부분 배를 하게 될까?

코끝을 해본 사람들은 어떤 결과들을 가져오게 돼요?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코끝의 한 지점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작습니다. 배라고 하는 것은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것은 큽니다. 그런데 똑같은 시간 동안 코끝을 통해서 그러니까 3.3초면 3.3초 동안 들이쉬고 내쉬고 합니다. 그 똑같은 3.3초 동안 배도 불러오고 꺼지고 하게 되는 거라. 어떤 게 예리해질까? 여기(코끝)가 더 예리하겠죠.

여기가 더 예리하기 때문에 초보자들이 하기에는 금방 알아차리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대상에다가 마음을 붙이기가 쉬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발전이 없는 거는, 물론 수행을 안 해서 그렇기도 하겠죠. 그렇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뭐냐면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가 없다(힘들다)는 것이 단점입니다.

 

그래서 코끝을 관찰하는 경우에는 대부분이 보면 위빳사나 수행 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사마타 수행을 할 경우에는 이것을 합니다. 아주 예리하거든. 포인트가 작아야만이 사마타 수행을 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포인트가 많고 넓을 거 같으면 마음이 흩어지기 쉽기 때문에 사마타 수행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여기(코끝)를 할 경우에는 대부분이 사마타 수행하기가 쉬워진다는 얘기라. 그런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코끝보다는 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것이 나에게 맞고 이것은 틀리다, 이것이 틀리고 이것이 맞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각자 개인마다 다릅니다. 그런 것들을 유념해서 알아차려 주는 것이 좋습니다.

 

자! 그다음에 그렇게 해서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에 따라서 길고 짧은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하나를 예를 들어봅시다. 배를 가지고 한다.

처음에 스님이 배를 가지고 수행할 때 어떻게 하라고 그랬어요?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에 따라서 불러올 때는 '일어남'하고 알아차리고, 배가 꺼질 때는 '사라짐'하고 알아차리라"고 했습니다.

"명칭을 붙이지 말고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불러올 때 불러오는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배가 꺼질 때 배가 꺼지는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러오는 것과 꺼지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게 되고 나면 뭘 하라 그랬어요?

"배가 불러올 때 불러와서 멈추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라" 하고 그랬습니다.

"불러오는 시작과 중간과 끝남을 분명하게 알고, 배가 꺼질 때 배가 꺼지는 시작과 중간과 끝남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 그랬습니다.

그렇게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맞죠!

 

호흡을 할 경우에는 먼저 분명하게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에 머물러서!

그래서 하나에 머물러서 대상이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의 그 상태를 분명히,

이게 들이쉴 때의 상태인지 내쉴 때의 상태인지 분명하게 이 지점에서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면 뭘 해야 될까?

들이쉴 때 시작하는 부분과 중간과 끝남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내쉴 때도 시작과 중간과 끝남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왜 이렇게 구분을 하게 될까? 그게 뭐냐면 바로 이 c 부분입니다.  

 

c. 'sabbakāya paṭisaṁ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 paṭisaṁ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c. '전체적인 호흡 과정을 명확하게 알면서 들이쉴 것이다.'라고 노력하고,

'전체적인 호흡 과정을 명확하게 알면서 내쉴 것이다.'라고 노력한다.

 

'삽바 까-야 빠띠상웨-디 앗사싯사-미-띠 식카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아까 1번 할 때는 '빠자나띠'라고 했습니다. '분명하게 알아라' 그랬는데 인제는 '식카띠'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노력하라'는 겁니다. 그냥 아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부터는 보면 전부 아까는 '앗사사미'라고 돼있는데 인제는 어떻게 됐냐 하면 '앗사싯사-미'라고 돼있습니다. 미래형이 돼있습니다.

'나는 숨을 들이쉰다'가 아니고 '나는 숨을 들이쉴 것이다'라고 알아차리라고 라고 분명히 돼있습니다. 이 차이가 납니다.

 

왜 이래 놨을까? 물론 앞에 부분 '전체적인 호흡을 명확하게 안다' '숨을 들이쉬면서 숨을 내쉬면서' 이 차이는 있죠. 그거는 둘째 치고,

왜 '숨을 들이쉰다고 명확하게 알아라'가 아니고 '숨을 들이쉴 것이다 라고 노력하라'고 했을까?

부지런히 노력하라는 거라. 앞에 거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아도 되는데 이제부터는 진짜 수행 쪽에 들어가는 거라. 수행은 반복하는 겁니다.

반복할 경우에는 노력하라는 단어를 쓰게 되는 거라. 그리고 그마만큼 노력을 해서 대상에 머물러 있으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을 단단하게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수행할 때 어떻게 합니까? 맨 처음에,

'내가 이 한 시간 동안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마음을 먹고 좌선에 들어가죠! 그렇게 마음먹고 좌선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한 시간을 지킵니다. 그리고 수행이 다른 때보다도 잘될 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그냥 툭 좌선하고 앉아버리면 대부분 못 견딥니다. 많이 해본 사람이 아니면. 그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빨리어 단어에서도 분명하게 그것을 구분해준다는 거라. 미래형으로 그렇게 써주고 있는 거라. 그래서 '숨을 들이쉴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고 반복해서 훈련을 하라는 거라.

 

어떻게? 그게 뭐냐면 '전체적인 호흡을 명확하게 알면서' '삽바 까-야'

문자 그대로 하면 '삽바 까야' 라고 하는 것은 '모든 몸' '온몸'이 됩니다.

온몸을 '빠띠상웨디' 해서 보통 그걸 '경험한다'라고 풀이들을 많이 하는데,

스님은 그것보다도 단어의 의미 자체를 분명하게 해서 '명확하게 알면서'라고 풀이를 했습니다. 그 설명을 밑에다 다 해놔놨습니다.

 

'삽바 까-야' 이걸 왜 '전체적인 호흡'이라고 했을까?

거기에 보면 '까-야'가 수행에서 쓰일 때는 첫 번째 '앗사사 빳사사'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 '앗사사 빳사사 까-야' 라는 겁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을 의미하는 경우.

그다음에 두 번째는 '몸', 이 몸은 뭐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물질로 이루어져 있죠! 물질은 뭡니까? 지수화풍(地水火風) 입니다.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몸'이란 뜻으로써 '루-빠 까-야' 물질로 만들어진 몸이란 뜻으로써의 의미가 있고.  

세 번째가 뭐냐면 몸은 마음의 영향을 받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이 몸이라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정신적인 현상들의 모임'으로써의 '까-야'입니다. 수상행식(受想行識)이죠. 수·상·행·식 네 가지 모임으로써의 이 정신적인 것이 물질, 몸을 구성하게 되고 호흡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정신적인 모임으로써의 '까-야'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얘기는 뭐냐면 호흡은 마음의 영향을 받게 돼 있다는 거라. 몸도 마음의 영향을 받게 돼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모임으로써의 의미.

그래서 '까-야'라고 하는 것은 덩어리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있다는 하나의 의미가 있고, 또 호흡이라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그냥 물질적인 것 소위 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서 수행하는 방법이 확연하게 달라져 버립니다.

호흡으로 해석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될까? 사마타 수행도 할 수 있고 위빳사나 수행도 할 수 있습니다. 호흡 자체만 관찰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사마타 수행을 하게 됩니다. 변화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호흡에서 사대 요소로써 관찰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변화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끔 됩니다.

 

호흡으로써 풀어서 쓰는 분들은 대부분이 보면 사마타 수행이 밑바탕이 된 위빳사나 수행을 가르치는 스승들은 대부분은 보면 이걸 '호흡'이라고 풀어씁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 필요 없다 그냥 순수한 위빳사나만 하면 된다 하고 가르치는 스승들은 보면 몸으로써 풀어씁니다. 그래서 '온몸으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왜? 몸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우리가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호흡의 움직임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호흡에서 일어나는 가볍고 무겁고 움직이고 하는 지수화풍이라는 사대 요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고 판단하는 거라.

그래서 사대 요소에 대해서 알아차리게 되고, 호흡만 그렇게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모든 것들 몸에서 느껴지는 것이든지, 생각이든지 모든 것들을 사대요소의 변화로써 알아차리는 것들. 그래서 이 '까야'라는 것을 '온몸'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꼭 호흡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사마타의 요소들은 전혀 없어져버립니다. 위빳사나 수행 쪽만 할 경우에는 그렇게 돼버립니다.

 

그다음에 '정신적인 현상들의 모임'으로써의 '까-야'로 얘기할 때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얘기할 때. 몸과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얘기 할 때는 이 모임으로써 얘기를 합니다.

대부분 보면 '아비담마'나 이런 데는 '덩어리'라고 표현들을 많이 하죠! '모임체' '모임'이라는 의미로써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얘기할 때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에 대한 것들을 구분해가지고 얘기하고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서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관계성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는 '모임'으로써 '그룹'으로써 얘기를 하게끔 됩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석서에는 이 '까야'를 어떻게 봤느냐면 '호흡'으로 봅니다.

지금 호흡으로 보지 않는 스승들 같은 경우에는 어떤 계통이 있냐면

고엥카 같은 경우에는 '몸'으로 봅니다. 대표적인 분이죠!

그렇지 않을 경우엔 대부분은 '호흡'으로 봅니다.

여기 이 문장에서 얘기할 때 '까야'를 '호흡'으로 봅니다.

그런데 호흡으로 보는데 경우가 다르죠.

 

마하시 스님 같은 경우는 호흡이라도 여기(코끝)의 호흡이 아니고 배의 호흡을 지칭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스승들은 순륜 스님 같은 경우는 여기가 아니고 여기(코끝)를 합니다. 그래서 이걸 통해서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이걸 통해서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이걸(배) 통해서는 사마타 수행보다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가 용이하니까 위빳사나 쪽으로 많이 치우치게 되고. 이걸(코끝) 통해서는 사마타 수행이 용이하니까 사마타 수행을 하는 쪽으로 많이 가르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파욱 스님 같은 경우에는 아예 호흡 자체에서 위빳사나 요소는 아예 빼버리고 사마타 요소만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것들을 가르칠 때 사마타적인 수행방법으로써의 호흡법만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스승마다 조금 달라집니다. 그런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스님은 여기서 봤을 때는 '호흡'으로 풀어서 썼습니다.

그래서 '삽바 까-야'라고 할 것 같으면 '호흡의 전체 과정' 처음과 중간과 끝' 모두를 얘기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빠띠상웨디'라고 하는 것은 '명확하게 알다'라는 그런 의밉니다.

 

그래서 호흡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라는 거라. 호흡을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쉬는 시작부터 해가지고 마지막 끝날 때까지를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는 거라. 그마만큼 마음을 대상에다가 많이 기울여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호흡이 자연스럽지 않으면 안 되겠죠. 자연스럽게 하더라도 마음을 그 대상에 기울이려고 하는 마음들이 굉장히 강해져야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이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 대상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고찰해나가야 됩니다.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시작하는 부분을 분명하게 알고 쭉 유지가 되어나가서 끝나는데까지를 알게끔 됩니다.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렇게 하려면 '위딱까' '위짜라'는 자동적으로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호흡의 전체 과정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지금 현재 호흡하고 있는 것만 알아차리겠다 하고 마음먹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시작하는 부분을 모릅니다. 그래서 대부분 시작하고 나서 한참 지나고 나서야 호흡하는 줄을 압니다. 그리고 끝날 때도 어떻게 끝나는지를 잘 모릅니다.

끝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분명히 멈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멈춰야 만이 다음 것이 시작이 됩니다. 멈추는 걸 모르는 거라.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은 알죠. 그래서 '사띠'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도록 되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호흡의 과정을 명확하게 알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다. 숨을 내쉴 것이다 라고 수행자는 노력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d.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passasissāmī'ti sikkhati.

d. '호흡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다.'라고 노력하고,

'호흡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다.'라고 노력한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빳삼바양 까-야상카-랑 앗사싯사-미-띠 식카띠'

'호흡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다, 숨을 내쉴 것이다 라고 수행자는 노력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고요히 하고' 이것은 크게 여러분들이 설명이 필요할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완전하게 알았을 거 같으면 대상에 완전하게 밀착된 상태입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밀착되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호흡이 자동적으로, 마음이 고요해지면 어떻게 돼요? 호흡이 느려지고, 호흡이 섬세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고요하게 가라앉힌다는 것은 호흡을 가라앉히는 것을 얘기합니다. 호흡이 고요하게 가라앉도록 자꾸 만들어라 하는 거라.

언제까지 그렇게 만드느냐는 '까야 상카라'

누가 상카라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

 

가끔씩 스님들 수행하는 얘기들을 이렇게 들어볼 때가 있습니다.

들어보면 그런 얘기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진짜 그것에 대해서 내가 무서움을 느꼈다 하는 거라. 다시는 그거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는 거라. 진절머리가 났다는 거라. 진절머리가 나서 거기서부터 완전히 떠나버렸다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을 많이 듣습니다.

예를 들어, 애인이 디게 애를 먹였단 말이라. 그래가지고 내 곁을 떠나갔어. 저 애인을 나는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거라. 진절머리가 나버렸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되겠어? 그 애인이 혹시 주변에 나타나더라도 안 갈려고 그래. 다시는 그쪽으로 안 갈려고 그러는 거라. 거기 있다고 누가 얘기할 것 같으면 내가 돌아갔으면 돌아갔지 그리 안 가는 거라. 진절머리가 나버렸다는 거라.

 

'상카라'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다 하는 거라. '까야 상카라', 몸에서 형성된 조건 지어진 것들, 상카라를 그렇게 봐라 하는 거라. 진절머리 나도록!

그럼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몸과 마음이 일치되는 상태까지 됐습니다.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부분을 알았는 데다가, 길면 길다고 알고 짧으면 짧다고 알고 했다가, 그러고 나서 호흡 시작되는 부분과 중간과 끝을 분명하게 알아서 멈춤을 알게 되고, 그래서 면밀하게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관계를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몸이 있고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몸과 마음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끔 되고 나면,

 

그다음에 와지는 것이 뭐냐면 '방가냐나'입니다.

아무리 알아차리려고 해도 계속적으로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거라. 대상 자체가. 호흡을 아무리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려고 해도. 들이쉴 때도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알아차림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들이쉬는 것도 시작과 중간 부분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끝나는 부분만 자꾸 보이는 거라. 끝나는 부분만 계속,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여러분들 그냥 '들이쉼' 하고 하나의 들이쉼에서 사라짐만 마지막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이 '들이쉼' 중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사라지는 것만 계속적으로 보이는 거라. 이게 쉽게 말하면 '들이쉼' 하는 하나의 단계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사라지는 것이 처음에는 다섯 등분으로 이렇게 보여진다는 거라.

 

사라진다는 것은 뭐냐면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물에다가 돌을 톡 던지면 어떻게 돼요? 처음에 들어갈 때는 갈 때만 보이지 이게 그냥 그대로 사라져 버립니다. 물 안으로 들어가면 모릅니다. 실제적으로는 그런데 이 돌은 어떻게 돼요? 물 표면에 닿자마자 서서히 가라앉게끔 됩니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이기엔 어떻게 돼요? 그냥 탁 부딪치는만 보이는 거라.

사라짐이 느껴질 때는 그렇게 다가옵니다.

하나의 호흡을 들이쉬는 동안에 사라짐이 다섯 번 탁탁탁탁 나타난다, 또 호흡을 내 쉴 동안에 다섯 번 탁탁탁탁 나타난다, 그러다가 이게 점점 더 많아지는 거라. 사라지는 것이 열 번씩 됐다가 스무 번씩 됐다가 계속적으로 너무나 빠르게 이렇게 진행이 되어나가게 됩니다.

사실은 명확하게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변하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못 따라가는 것뿐이라는 거라. 실제로는. 그래서 단지 하나의 현상에서 끊임없이 사라짐만 보이는 것뿐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수행을 하면서 그런 경험을 해봤을 수도 있습니다.

가끔씩 문답을 하면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 호흡을 알아차리면 호흡이 파도치듯이 착착착착 와서 부딪칩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게 뭐냐면 '방가냐나' 입니다. 그런데 몰라. 그게 방가냐나인지를.

숨을 들이쉬는데 들이쉬는 게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파도가 와서 탁 부딪치고 부딪치고 부딪치고 하듯이 계속적으로 착착착착 이렇게 몇 차례 와서 부딪칩니다 하는 얘기를 하는데, 그게 바로 '방가냐나' 라는 거라.

 

또 수행을 하다가 보면 그런 현상들을 느낍니다.

이게 점점 더 그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까 겁이 나는 거라. 가끔씩 여러분들 그런 것도 있죠? 하는데 ‘어! 내가 이렇게 수행하다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방가냐나'가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죽는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런 거라.

그런데 내가 명쾌하게 깨어있지를 못하니까 계속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보지 못하고 '나'라고 하는 관념이 강하니까 어떻게 돼요? '어, 이러다 내가 죽는 거 아닌가?' 하고만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가끔씩 수행하다 그런 것들은 경험들을 할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안 죽습니다.

 

어쨌든 이 '방가냐나'가 탁 오고 나면 그다음에 하는 것이 뭐냐면 이게 무너지는 현상을 볼 거 같으면 두려워집니다. 겁이 난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이 대상 자체가 무너지는 것으로부터 내가 피하려고 합니다.

얼마전에 쓰나미 났을 때 일본에서도 그랬죠! 내가 빠르다고 할 거 같으면 쓰나미가 저기서 탁 닥쳐온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보고 피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당장 내가 죽을 것 같이 무섭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피해 달아나야 됩니다. 직접 저기서 붕괴돼가지고 무너지는 것을 보는데 그걸 안 피할 수는 없습니다.

 

현상들에서 계속적으로 붕괴돼서 사라지고 소멸되는 것들을 볼 거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피하게 돼있습니다. 그것이 내한테 직접 닥쳐오기 때문에.

이걸 뭐라고 하냐면 '상카라를 봤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까-야 상카-라'라는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에서 일어나는 상카라를 보라 하는 거라. 호흡을 관찰하면 그런 현상을 분명히 본다는 거라. 실제로는 그 상카라는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계속적으로 진행이 돼나갑니다. 그건 다음 시간에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상카라를 보도록 하라는 거라.

그걸 '호흡작용'이라고 스님이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호흡작용! 그 호흡작용을 고요하게 만들어라는 거라. 고요하게 만들어서 나는 숨을 들이쉴 것이다, 나는 숨을 내쉴 것이다 라고 노력하라 하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 이 호흡작용에 대한 것들을 좀 더 상세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호흡작용은 아마 아직은 여러분들이 잘 이해가 안 됐을 거라고 봅니다. 거기에 있는 설명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까-야 상카-라'에서 그것은 상카라의 세 가지가 있는데  

1. 몸의 상카라, 까야 상카라는 출입식을 말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말하고,

2. 입의 상카라라고 하는 것은 '위딱까'와 '위짜라'를 말한다.

3. 마음의 상카라라고 하는 것은 '산냐'와 '웨다나', 지각과 느낌을 말한다 하는 것들을 얘기했다.

이 상카라에 무너지는 것들을 보고 나면, 지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가면 사선정에까지 올라가집니다.

다음 시간에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더 자세하게 해줄 겁니다.

 

1선정과 2선정에서 뭐가 떨어져 나갑니까? (위딱까와 위짜라) 말이 먼저 떨어져 나가죠. 그다음에 4선정에 가서는 뭐가 떨어져 나갑니까? 까야 상카라, 호흡. 그래서 호흡도 멈춰버리고 미세해져서, 그런데 실제로는 완전히 멈춘 건 아니죠? 그리고 체온도 떨어지고 이런 작용들이 일어납니다. 그게 '까야 상카라'입니다. 완전하게 '까야 상카라'가 되는 상태, 4선정이 될 때는.

그러고 나면 멸진정에 들어가지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상카라의 작용에 대한 걸 차차 해나가겠습니다. 오늘은 무너지는 성품의 상카라 첫째 부분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더 나아가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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