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5강. 수행의 기본 패턴(핵심) - 앞 법문 총정리 (20110305)

담마마-마까
2021-06-01
조회수 762

https://youtu.be/4GuWjQ3DtEg


5강. 수행의 기본 패턴(핵심) - 앞 법문 총정리 (20110305)

 

오늘 이 시간에는 저번에 배웠던 것들을 총정리하는 시간들을 좀 가지겠습니다. 이때까지 네 번 정도 했나? 그렇죠! 그 한 것들을 잘 기억에 떠올려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실제 수행에서 적용하는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게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ātāpī sampajāno satimā)' 라고 하는 세 구절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문장을 가지고 설명을 하다 보면 그 문장만 탁 해석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수행에서 연결을 시키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특별한 날 맞아가지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알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보통 사람들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맞죠! 눈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욕망이 일어나죠. 그렇죠!

그래서 눈을 감아버리면 딴하(taṇhā)라고 하는 욕망·갈애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모든 요기들이 하는 방법이 그러한 방법들입니다. 몸을 통해서 욕망이 일어나니까 몸을 단련을 합니다. 조금 더 나은 조건들을 위해서.

또 이런 수행처에 오면 수행하는 사람들은 저기 앞에 보이듯이 원숭이 같이 눈을 감아버리고, 귀도 막아버리고, 코도 막아버리고 이렇게 수행을 하곤 합니다. 그것이 맞는 것처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욕망이 일어나는 원인은 부처님은 느낌-웨다나(vēdanā)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죠! '살라-야따나 빳짜야- 딴하-(salāyatana paccayā tanhā)'라고 얘기한 것이 아니고, '웨-다나- 빳짜야- 딴하-(vēdanā paccayā tanhā)'라고 얘기했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장소로 인해서 딴하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인해서 딴하·욕망·갈망·갈애들이 일어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인제 12연기의 고리죠! 그 부분에 대한 얘기들을 먼저하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느낌이 원인이 돼서 갈망이 일어나는데 느낌이 어떠하기에 갈망이 일어날까?

느낌은 여러분들 보통 어떤 느낌들이 있습니까? 좋은 느낌, 싫은 느낌, 무덤덤한 느낌, 정신적인 느낌 중에 기쁜 느낌들, 그다음에 괴로운 느낌들 그런 것들이 있을 거란 말이라.

그런 느낌으로 인해서 욕망이 일어난다는 거는 느낌에 뭐가 붙기 때문에 그럴까? 느낌을 느낌으로만 알아차리면 즐거우면 즐거운 느낌이다 하고만 알아차리면 그게 갈망이 되지 않는데 뭐가 붙어요?

'나'라고 하는 것이 붙죠! '나'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들, 내가 그 느낌의 주인이 된 듯한 그런 생각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즐거운 느낌이 내거니까 조금 더 가질려고 하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 내 거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이렇게 하게 됩니다. 그 '나'라고 하는 것이 느낌에서 플러스가 되면 갈애가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장소가 절대 갈애를 일으키지 못하죠!

여섯 가지 감각장소는 뭐를 일으킵니까? 접촉만 일으키는 것뿐이죠!

감각장소 눈이 있다, 눈이라는 감각장소는 밖에 있는 형태라든지 이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보겠다는 마음, 눈으로 보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면 거기서 접촉이 탁 일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감각장소, 눈이라는 감각장소는 본다고 하는 접촉 밖에는 일으키지 못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것은 접촉이 갈애가 되는 것은 아니죠!

 

단지 그 접촉으로 인해서 뭐가 일어납니까?

접촉으로 인해서 느낌이 일어나죠!

뭐가 탁 여러분들의 손에 탁 접촉이 일어나면 접촉에서 뭔가가 느껴집니다. 그럼 그 느낌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데 이 느낌을 갖다가 느낌으로써 '아, 이런 느낌이 있다'고만 알면 되는데 우리는 보통 이 느낌에서 '나'라고 하는 것이 결합이 되니까 거기서 인제 욕망이 돼버리는 거라.

생을 지속하는 근본 원인이 되는 것들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인제 보통 12연기에서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것들입니다.

 

실제적으로는 눈을 감을 필요도 없고 또 귀를 막을 필요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 수는 없죠? 그럼 왜 눈을 감도록 하고 귀를 막도록 하는가? 수행 장소에 가면 왜 저래 놨겠어요? 보면서 들을 수는 없죠!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죠! 여러분들이 지금 스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스님이 말하는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착각하는 것뿐이죠! 보고 듣고 한다고.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면 보는 순간에는 듣지를 못합니다.

듣는 순간에도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법문들을 때 스님 볼려고 하지 말고 듣기만 하라고 그럽니다. 눈을 감고 있든 뜨고 있든! 그래서 법문 들을 때는 그걸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눈을 살포시 감고 법문 듣는 데만 집중하라 하고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저기에는 눈을 감고 코를 막고 해놨습니다. 저기 원숭이 그림들을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는 열려 있습니다. 그렇죠! 눈과 코를 막고 있으면 귀를 안 막고 있을 거고, 귀와 입을 막고 있을 거 같으면 눈은 안 막고 있다는 거라. 하나씩 하나씩 하라는 겁니다.

 

그게 느낌이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마음을 연결해주는 통로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 느낌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느낌이 어떤 느낌들입니까? 느낌은 정신적인 겁니까, 육체적인 겁니까? 정신적인 거죠!

실제 아픔이라고 하는 육체적인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아는 것은 정신적으로 그것을 느끼는 겁니다. 그렇죠! 그럼 정신적으로 그걸 알고 신체에 자극이 가해지면, 일어나면 정신적으로 아는데 우리가 바로 그것만으로 알아버리면 괜찮은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반응을 하죠! 정신적인 반응을 합니다. 정신적인 반응도 정신적인 느낌이죠! 싫다하는 느낌을 가진다든지 좋다하는 느낌을 가진다든지 정신적인 반응을 합니다.

 

그러면 정신적인 반응도 우리가 알아차릴 때는 어떻게 해요?

'아, 내가 싫다고 느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고, '좋다고 느꼈다'고 알아차리고. 그렇게 알아차려 지는 거라. 쉽게 말하면 느낌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그건 육체적인 느낌이지만, 그 육체적인 느낌은 정신적인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아주 단순합니다.

 

또한 육체적인 느낌이든 아니면 생각이나 변하는 것이든 그런 것들이 대상이 있었으면 그것을 정신적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싫다는 느낌이라든지 좋다는 느낌들도 그건 정신적인 느낌이라는 거라.

그런 정신적인 느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또 그런 느낌이 있다고 알아차리는 것도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거라. 이렇게 분간해 볼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느낌은 절대 마음의 작용이 없으면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육체적인 아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으로 그게 아프다고 느끼기 전에는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살아가는 것은 느낌으로 안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느낌이 없으면 모릅니다. 아무리 아픈 것이 있어도 내가 그걸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마취제를 놔버리면 내가 못 느낍니다.

 

수행에서 맨 처음 해야 되는 것이 이와 같이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 볼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이게 육체적인 것이고 이것이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있다는 거라. 그걸 먼저 여러분들이 최고 먼저 해야됩니다 수행에서는.

육체적인 거와 정신적인 현상들을 가만히 보면 그 현상들은 빠른 속도로 변해 나갑니다. 육체적인 아픔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항상 그 아픈 거 그대로 있는 거는 아니죠? 실제로 여러분들 한번 통증들을 보십시오. 떼떼떼 하고 쑤시기도 했다가, 묵직하게 다가오기도 했다가, 이것이 또 다른 것으로 변하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단지 그것을 정신적인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거죠.

 

알아차려 보니까 그렇게 변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빨리 이 현상들, 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더 깊이 알아차리면 순간순간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집니다, 변하고 있는 속도가.

빨라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차가 이렇게 훅 훅 훅 지나가는 속도가 너무나 빠를 때는 어떻게 알아차려 집니까? 차가 오는지를 모릅니다. 단지 내 앞에서 이게 그냥 탁 탁 사라지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차가 빨리 훅훅 지나갈 때는 그렇게밖에 안보입니다.

 

알아차리는 속도가 그마만큼 빠를 거 같으면 이것은 사라지는 것만 알 뿐입니다. 사라지는 것조차도 모르면 어떻게 돼요? 연속해버리는 것처럼 착각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차는 빨리 여러 대의 차들이 지나갈 거 같으면 차가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어디까지 오고 하는 거를 전혀 모릅니다. 단지 내 눈앞에서 하나의 차가 훅 사라지고 훅 사라지고 훅 사라지고 하는 것밖에 모른다는 거라.

변화의 속도가 빠를 경우에는 이렇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걸 보통 '방가냐나(bhaṇga ñāna)'라고 그럽니다. '소멸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내가 보고 알았다'하는 겁니다. 그러한 상태가 됐을 때 다시는 내가 육체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 헷갈려하지 않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느낌이 일어나는 것들을 감정과 동일시하지는 않습니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들은 그냥 정신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정신적인 현상은 그걸 느끼는 거 하고는 틀립니다. 그래서 그거하고 같이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같은 것으로 생각해버리면 어떻게 돼요?

정신적인 현상과 정신적으로 느끼는 것들을 같이 생각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동일하게 생각할 거 같으면 영속하게 돼버립니다. 자동차가 변화되는 걸 모를 거 같으면 그냥 쭉 연결되는 것으로 보는 거 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꾸 수행에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구분하고, 더 나아가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자꾸 보도록 하라 하고 얘기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 집착하고 벗어나려고 하는 이 번뇌들은 어디서 옵니까? 느낌으로 오게됩니다. 여러분들 감각기관이 원인이 아니라 느낌이 원인입니다. 느낌으로 인해서 그런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걸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됩니다. 그래야 수행의 기초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느낌의 일어남을 알고, 느낌의 소멸을 분명하게 보는 자는 해탈에 이른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은 몸에 속하는 것이고, 느낌이라는 것은 정신에 속합니다.

단지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들을 갖다가 몸에 있는 것들을 내가 정신적으로 느끼는 것뿐입니다. 그걸 분명하게 먼저 인식하도록 해야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삽베 담마 웨다나 사모사라나(sabbe dhammā vedanā samosaraṇā)'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모든 정신적인 작용들이 경험하는 것은 느낌과 분리할 수가 없고 느낌에 속해 있다.'

모든 것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들, 모든 것들은 느낌과 분리 할 수 없다 하는 거라. 알고 느끼고 냄새 맡고 모든 것들은 느낌이라는 거라 느낌!

쉽게 말하면 신념처를 한다. 몸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있다.

그래서 호흡을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안다. 이걸 뭐로써 안다고? 느낌으로 안다는 거라. 또 정신적인 것들,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났다. 이걸 뭐로 안다고? 느낌으로 안다는 거라.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리고 정신적인 현상들이든 그런 것들은 느낌으로 안다는 거라.

 

그래서 느낌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할 거 같으면 수행하기가 굉장히 수월해집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바로 안 됩니까? 왜 안돼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래서 처음 수행할 때는 그걸 알기 위해서 만약에 몸을 관찰하고 있다, 그러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이 움직임을 먼저 보라 하고 그럽니다. 그러죠!

그래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움직임을 그냥 보는 거라. 가만히 보면 배가 볼록 불러와지고 쏙 꺼지고 하는 것들을 안다는 거라. 그럼 불러와지는 것은 불러와진다고 아는 거고 꺼질 때는 꺼진다고 아는 거라. 그 움직임을 먼저 보라는 거라. 불러와 질 때 이걸 꺼진다고 알지는 않죠! 그걸 먼저 하라는 거라.

 

그런데 그 움직임을 안다는 거는 엄밀하게 얘기하면 위빳사나는 아니죠!

왜 위빳사나는 아닙니까? 움직인다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여기서 배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움직인다고 내가 알아차릴 때는 그건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단지 내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배가 불러온다고 알아차리는 것을 다른 데 갈 거 같으면 꺼진다고 알아차릴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가 멧따(mettā)를, 우리는 멧따라고 할 것 같으면 '자애'로써 알아차리는 것이지만, 다른 데가서는 멧따를 '카인드니스(kindness)'라고 알아차린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은 자애라고 알아차리든 카인드니스라고 알아차리든 아니면 자비라고 알아차리든 그거는 개념인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은 어떤 경우든지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그렇게만 계속 알아차리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뭐가 실제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까?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나는 느낌들, 배가 꺼질 때 일어나는 느낌들, 이것들이 실재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배가 불러올 때 처음에는 알아차리기 힘드니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구분할 수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일어나는 거하고 사라지는 거 하고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일어나는 것들이 완전하게 멈춰야 만이 사라지는 것이 새로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구분할 수 있게 되고 나면 그다음에 해라 하는 것이 그렇게 일어날 때 일어나는 느낌들이 뭔가를 알아차리라는 거라. 배가 꺼질 때 꺼지는 느낌들이 뭔가를 알아차리라는 거라.

배가 일어날 때 어떤 느낌들이 있습니까? 각각의 느낌들은 다릅니다. 여기 있는 태집님은 배가 일어날 때 거기에 팽창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고, 여기 있는 분은 배가 일어날 때 그것이 볼록하는 느낌일 수도 있고 각각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배가 일어날 때 한쪽에서 그냥, 전체가 다 팽창하는 것이 아니고 한쪽만 볼록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고 다 다르다는 거라.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그거는 실재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럼 그걸 보라는 거라. 그 느낌을.

 

왜 앞에서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릴 때는 전체가 다 동일했는데, 느낌을 알아차리면 왜 이렇게 다 다릅니까?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들은 움직이는 것이고 변하는 거기 때문에 각각 알아차리는 것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누구든지 아까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는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남'하고 알아차릴 때는 내가 '일어남'하고 알아차릴 때는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일어남'하고 알아차린다는 거라.

그런데 그 느낌으로 알아차릴 때는 느낌이 다 다르다는 거라. 그러면 그 느낌들이 각각이 다르면 개인에게 느껴지는 느낌들도 변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팽창하는 느낌들도 점점 더 팽창해지기도 하고, 점점 더 가벼워지기도 하고, 점점 더 무거워지기도 하고 이렇게 느낌들이 계속 변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걸 알아차리는 것이 실제적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게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앉아서 수행을 할 때 맨 처음 할 때는 육체적인 현상의 움직임을 먼저 보라.

코끝이든 배든 실제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육체적인 현상, 거기에서 그 육체적인 현상의 움직임을 보라는 거라. 배가 불러오면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고, 배가 꺼지면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고, 그렇게 먼저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렇게 알아차림이 되면 마음이 그 실제 육체적인 현상에 가서 달라붙어서 알아차려 나간다는 거라. 알아차려 나가는데 알아차림을 지속해 나갈려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들이 끝나고 나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갖다가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거기에 계속적으로 마음이 붙어있게 된다는 거라.

 

그것이 되고 나면 그다음 해야 되는 것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보라. 사라질 때 사라지는 느낌들을 보라.

그다음에는 그 느낌이 변하고 있는 것을 보라하고 얘기합니다.

 

경행을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면서, 발을 들어 올린다고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들어 올려진 게 끝나고 나서야 발이 나아가는 움직임이 있어 나아간다고 알아차리고, 그것이 끝나야 만이 내려놓는다고 알아차리는 거라.

그 움직임을 먼저 보라는 거라. 움직임이 분명하게 구분되도록 하라는 거라.

그렇게 알아차리고 나서는 그다음에 발을 들어 올릴 때, 들어 올릴 때 어떤 느낌들이 있는가? 아! 가벼운 느낌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나아갈 때는 또 움직이는 느낌이 있구나, 가벼운 느낌이 있구나, 또 내려놓을 때는 무거운 느낌이 있구나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러고 나면 느낌들도 발을 들어 올릴 때 아! 가벼운 느낌이 똑같은 게 아니고 가벼운 것이 점점 더 증가하는구나, 가벼움이 점점 더 많아지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려 나가라는 거라. 내려놓을 때도 무거운 것이 똑같은 게 아니고 무거운 것이 점점 더 증가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것이 수행의 기본 패턴입니다. 몸에 대해서 알아차릴 때는 이와 같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면 참 좋은데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알아차리질 못할까?

대부분 하면 움직일 때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사이에 마음이 그대로 가서 달라붙지를 못합니다. 대부분 달아나버립니다. 호흡을 관찰할 때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그것을 느낌을 관찰하고 있든지 아니면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든지 간에 달아나버린다는 거라. 왜 그럴까?

 

그래서 부처님이 대념처경 맨 처음에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ātāpī sampajāno satimā)'라고 하는 게송을 얘기하게 되는 겁니다.

아따삐(ātāpī)가 뭐라고 했습니까? 끊임없이 반복하고 어쨌든 불굴의 노력을 하라는 거죠! 열심히 노력하라는 겁니다.

사띠마(satimā)는 뭐라고 했어요? '알아차림을 지녀라'

 

여러분들 조금 전에 뭘 했습니까? 오계를 받았죠! 오계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받아 지니는 거죠! 그러면 받아 지닌다는 것은 뭘 얘기합니까?

오계 중 만약에 거짓말하지 않겠다. 가슴에 새겨두고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자꾸 노력하는 거죠! 그런데 거짓말은 말을 할 때만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항상 적용이 되는 건 아니죠? 그렇죠! 그럼 말을 할 때 그걸 잊어버리지 않고 있으면 내가 말을 할 때 아, 내가 지금 바른말 하는가, 거짓말 하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거짓말할 거 같으면 딱 안 해버리고 바른말을 하게끔 되는 거라.

아따삐와 사띠마가 결합이 되면 그와 같은 작용을 합니다.

여기에, 방에 스팀을 넣어가지고 뜨뜻하다. 그럴 거 같으면 여기에는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을 조건이 안 됩니다. 그렇죠! 지속적으로 계속 따뜻하기 때문에 차가운 것이 있을 수가 없어. 그런데 이게 지속적으로 따뜻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이것은 금방 차가워져버리기도 하고 또 보일러를 넣으면 따뜻해지기도 하고 이런다는 거라.

 

아따삐하고 사띠(sati)하고 결합이 되도록 반드시 하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사띠는 금방 또 달아난다는 거라. 금방 달아난다는 거라. 가장 좋은 방법은 지속적으로 보일러 불을 여놓는 것이 최고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기름 아낄려면 여러분 올 때가 되면 보일러 여놓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있을 때는 따뜻합니다.

사띠(sati)를 지니고 있을 때는 알아차리는데 사띠를 지니지 않으면, 쉽게 말하면 계속적으로 사띠를 지닐려고 하는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망상피우게 된다는 거라. 달아나버린다는 거라.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삼빠자나(sampajāna)라는 건 그러면 뭘 얘기할까?

왜 아따삐하고 사띠하고 삼빠자나를 같이 넣어놨을까?

지속적으로 알면 뭐 할 건데? 여기 방이 아무리 지속적으로 따뜻해도, 따뜻한 것으로써 뭘 만들어줄 수 있어요? 뭘 만들어줄 수 있느냐는 거라. 따뜻하다고는 알겠지 여러분들이. 그런데 그 따뜻한 것으로써 뭘 해줘야 돼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병이 있을 거 같으면 병을 고쳐줘야 되는 것이고, 또 내가 다른 어떤 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있을 거 같으면 그 괴로운 것들을 벗어나게끔 해줘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따뜻하기만 할 거 같으면 큰 이익은 없어요.

 

사띠만 있을 경우에는 사띠가 지속적으로 계속 지속이 되면서 그 사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할 거 같으면 큰 이익은 없다는 거라. 알아차림만 있어가지고 뭐 할 건데? 그 알아차림 속에서 분명하게 '아! 이게 무상한 성품이구나. 이것이 괴로움의 성품이구나. 이것이 무아라는 성품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만이 다시는 내가 항상하다고 알지를 않는 거고, 내가 그것을 만족하다고 알지를 않는 거고, 그 속에서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알지를 않게끔 된다는 거라.

그 특성들을 알게 해주는 것이 뭐냐면 바로 '삼빠자나'라고 보면 됩니다.

 

'지속적으로 알아차려 나간다.' 예를 들어봅시다.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린다. 그 속에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마디 수행을 할 때 코끝에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그 움직임만. 들이쉴 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쉴 때 내쉰다고 알아차립니다. 배가 불러오면 배가 불러온다고 알아차리고 배가 꺼지면 꺼진다고만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이것만 지속적으로 하게끔 합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라든지 변화라는 건 아예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할 수 있는 것은 뭡니까? 삼매입니다.

삼매의 성취만 할 수가 있습니다.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변하지 않으니까. 지속적으로 그걸 알아차리고 있다. 알아차림만 있으면 어떻게 돼요? 그 성품을 모른다는 거라.

 

변하는 성품, 고의 성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성품, 그 고유한 성질들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사띠뿐 아니라 삼빠자나가 필요하다는 거라.

그게 '아따삐 사띠마 삼빠자노(ātāpī satimā sampajāno)'라고 설한 이유입니다.

 

여러분들이 호흡을 할 때 먼저 앉아서 좌선수행을 한다. 그럼 맨 처음에 알아차릴 거는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그렇죠! 호흡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 호흡을 알아차릴 때 그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리고, 그다음에 그 변화되는 것들을 느낌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러면은 여러 가지 움직일 때는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이 천천히 경행 할 때는 그 움직임도 알 수가 있고,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도 알 수가 있고, 그 느낌이 변화되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천천히 하지 않을 때는?

빨리빨리 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어떤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은 대부분 사람들은 그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죠! 단지 알 수 있는 거는 그 움직임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평상시에 여러분들의 수행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는 모든 다른 움직일 때는 뭐로써 알아차려야 됩니까? 움직임으로써 알아차려야 됩니다.

내가 가고 있으면 가고 있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리고 내가 핸들을 돌리고 있으면 핸들을 돌리고 있다고만 알아차려야 됩니다. 단지 그 알아차리는 것이 그것으로 한정돼서는 안 되죠! 왜 그렇습니까? 핸들을 돌릴 때는 전방도 봐야 되고 옆에 차가 오는 것도 봐야됩니다. 그럼 핸들을 돌리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 그것이 끝나고 나면 전방을 본다는 또 다른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옆에 거를 또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이어나가줘야 됩니다.

 

왜? 그마만큼 우리는 알아차릴 대상이 많이 있습니다.

많이 있을 땐 어떻게 해줘야 돼요? 수행이 안 되어있을 때는 그걸 느낌의 변화로써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거라. 그러면은 단순히 움직임으로 알아차려 주라는 거라.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 사마타 수행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그것으로 해서 도움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 대신에 삼법인의 특성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해탈에 이르기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이런 수행처에 왔을 때는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천천히 하라!'

걸어갈 때는 천천히 하면서 움직임뿐 아니라 느낌의 변화까지 알려고 하라는 거라. 앉아서 좌선할 때는 호흡의 속도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3.3초인가 넘어 됩니다. 굉장히 느린 편입니다. 다른 것들 빨리 움직이는 것에 비하면 이거는 느립니다. 그 느린 것에는 반드시 그 속에서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가 있다 하는 거라. 분명하게 그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모으고만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알아차리기가 수월하다는 거라.

 

그래서 시간나면 자꾸 좌선을 하라 하는 거라. 시간만 나면 경행을 하면서 천천히 경행을 하라 하는 거라.

물론 너무 천천히 해도 안 되겠죠. 그리고 호흡도 너무 천천히 해도 안 되겠죠. 자연스럽게, 호흡은 자연스럽게 해야 됩니다. 경행하는 것은 일상적인 걷는 것보다는 조금만 더 천천히!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충분히 그 변화되는 것들, 느낌이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실제 수행에서 대상이 나타났을 때,

그 대상은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은 가장 두드러진 것만 알아차립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만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 가장 두드러진 것에는 마음을 내가 일치시키기가 수월합니다. 두드러진 거를 알아차리지 않을 거 같으면 마음은 이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쪽으로 자꾸 뺏겨버린다는 거라.

 

내가 지금 다리가 아파가지고 있는데,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그럼 이 호흡이 관찰됩니까? 잘 안됩니다! 이미 마음은 이쪽으로 뺏기고 있다는 거라. 반도 안 되는 마음을 여기에다 두고 있으니 어떻게 돼요? 이게 안 알아차려지는 거라. 그럼 일차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대상, 통증이 있으면 통증이라고 하는 가장 두드러진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겁니다.

 

앉아있으니까 가장 두드러진 대상이 뭡니까? 호흡입니다.

그래서 호흡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거라. 걷고 있을 때는 가장 두드러진 것은 걷는 것들입니다. 그럼 걸음에다가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갑니다. 거기에다가 딱 달라붙게끔 만드는 것, 그걸 '아누빳사나-(anupassanā 隨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가장 두드러진 대상에다가 마음을 두도록 하라.

 

여러분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스님 법문할 때는 어떤 것이 가장 두드러진 겁니까? 듣는 거죠! 그러면 듣는 데다 마음을 두라는 거라. 보는 데다 마음을 두지 말고, 호흡에다가 마음을 두지 말고, 듣는 것에다 마음을 두라는 거라.

 

듣는 데다가 마음을 두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뭡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스님 법문을 들을려면 어떤 것이 필요합니까? 귀에다가 마음을 두는데 그걸 끊임없이 들어야 됩니다. 들을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듣고자 하지 않을 거 같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럼 법문을 듣겠다는 마음을 계속적으로 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토막토막 끊어져 버립니다. 전체가 들리는 게 아닙니다. 그럼 내가 끊임없이 그걸 들을려고 하는 마음을 내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리라고 하는 나에게 들리는 것들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자꾸 내야 됩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면 '아-따-삐-(ātāpī)'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따삐는, 완전하게 아따삐가 될려면 어떻게 돼야 되겠어요?

끊어져버리면 안 되겠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알아차리겠다는 마음을 끊임없이 내지 않을 거 같으면, 금방 지금 내가 뭘 하는지를 모릅니다. 신발을 벗을 때 아! 내가 신발을 벗는다는 마음을 끊임없이 알아차릴려는 마음을 내줬는데 신발을 벗고 나서 잠깐 동안 그것을 알아차리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벗은 줄 모르고 들어와 버린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수행자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경우든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야 됩니다. 그 마음을 내지 않으면 그 순간에 알아차림은 끊어져 버립니다. 마음이 활발하게 움직여야 되고, 대상을 따라서 끊임없이 좇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아따삐(ātāpī)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열정적으로 움직여주는 그런 마음들을 뜻하게 됩니다.

 

단지 그 아따삐가 있을 때 주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뭐겠어요?

들뜨는 것! 들떠버리면 어떻게 되요? 대상을 놓쳐버립니다. 들떠버리면 내가 불안하게 됩니다. 들떠버리면 괴로움을 낳게 됩니다. 끊임없이 그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힘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들뜨지 않게끔 해야 됩니다.

 

들뜨지 않을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평상시 여러분들이 마음을 내는 것들을 동일하게 자꾸 만들도록 해야 됩니다.

연경이 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들을 작게 내. 그러면 금방 그런 알아차리는 힘들이 떨어져서 알아차리지를 못해. 그러면 금방 침체돼버려. '아! 내가 수행이 안 된다.' 알아차릴려는 마음이 그런 아따삐가 강하면 어떻게 돼요? 수행하면 금방 상기가 돼버려! 열이 훅 올라와버려. 과해도 안 되고 약해도 안 되는 거라.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내줘야 되겠어요?

 

여러분들 오계 지킬 때 오계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갖다가 항상 지니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지니고 있어요? 어떻게 지닙니까? 대상을 볼 때마다 '아! 이게 오계에 저촉이 되나 안 되나' 이렇게 압니까? 그렇게 아는 건 아니죠!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어떻게 돼요? 오계에 벗어나는 것들이면 안 할려고 합니다. 그게 아따삐가 계속적으로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받아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오계를 지키는 것들을 내가 만약에 '아! 이것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그때 강하게 탁 낼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눈치(?)로 들어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오계를 바르게 지키는 게 아닙니다.

 

오계는 어떻게 돼요? 내가 오계가 뭔가를 알아가지고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있을 때 아! 이것은 해로운 것이다, 이것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자동적으로 안 합니다. 그리고 이게 선한 일들이다, 선한 결과들을 가져온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더욱더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편차가 거의 없습니다. 나쁜 거를 하든 좋은 걸 하든 마음의 변화는 거의 없습니다.

그게 적정을 유지한 '아따삐'입니다.

 

사띠를 할 때는 어떻게 그럼 사띠로 적정하게 유지시켜 줄까?

아까 얘기했듯이 강하게 사띠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상기가 돼버리고, 그냥 대충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금방 대상을 놓쳐버려서 침체돼버린다는 거라. 어떻게 해야 될까? '사띠를 놓치면 나는 곧 죽는다'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분명하게 얘기했습니다. "알아차림이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알아차림을 지니고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특히 여러분들은 수행자라고 할 거 같으면 알아차림을 놓쳐버리면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거라. 그 마음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알아차린다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내가 평균적으로 팔십 년을 산다. 그럼 지금부터 사는 시간이 만약에 삼십 년이다. 그럼 삼십 년을 올곧게 그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삼십 년 중에 일 년만 살 것이냐? 다 알아차림 없이 놓쳐버렸을 거 같으면 앞으로 삼십 년을 살아도 일 년밖에 못 사는 거라. 그래선 안 된다는 거라.

삼십 년이 만약에 남았다 그러면 삼십 년을 그대로 살아야 된다는 거라. 모든 것들을 내가 알아차리겠다는 마음을 분명하게 내라는 거라. 그 마음으로 인해서 대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라. 그게 적정을 맞추는 겁니다.

 

즉, 여러분들은 수행하는 자고 부처님 말씀대로 깨어있고 알아차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산다는 생각을 항상 지녀야 된다는 거라. 그러면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을 먹고 하는데 항상 조심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게 '아따삐'라고 그럽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힘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들을 합니다.

사띠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해나갈려면 그런 힘을 계속 불어넣어 주지 않으면 마음은 금방 번뇌에 점령당해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됩니다.

실제로 이 방을 덥히는데 또는 이 불을 켜놓는 데는 크게 힘을 들여서는 안 됩니다. 쉽게 말하면 스위치만 꽂아놓으면 전기는 자동적으로 들어가지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지 이걸 자꾸 내가 이 필라멘트 플러스 마이너스를 주듯이 자꾸 갖다가 붙일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러면 힘이 들어버린다는 거라.

 

마음을 항상 그렇게 먹으십시오. '나는 항상 알아차림을 지니고 살아가겠다.' 어느 때라도 그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하라는 거라.

그것이 '적정한 아따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사띠가 잘 안된다. 그거는 곧 이 아따삐가 식어버린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따삐가 식어버리면 당연히 알아차림도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자꾸 깜빡깜빡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다 보면 아! 내가 수행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다가 끊임없이 일으키지를 못한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자꾸 내가 일으켜줘야 돼!

'아! 나는 지금 수행자다! 나는 부처님 제자다! 알아차림 없이 살아가는 것은 죽음과 같다!' 그런 생각을 자꾸 일으켜줘야 되는 거라. 그러면은 대상을 보면 그걸 또 알아차려 나가는 거라. 그래서 지속해 나갑니다.

 

번뇌의 침입으로부터 막아주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이 아따삐입니다.

아따삐가 있으면 당연히 여러분들은 어디에 집중을 할려고 하든지, 무엇을 알아차릴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집중하는 쪽으로 기울면 사마디 수행으로 인해서 삼매를 계발하게 되는 거고.

알아차림을 계속적으로 지속하면서 '삼빠자나(sampajāna)'로 넘어가면 사물의 특성에 대해서 깊이 있게 더 알게끔 되는 거고.

그래서 아따삐 부분을 여러분들이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걸 아따삐가 있는 상태에서 사띠가 지속돼 나가는 것을 '사띠마(satimā)'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충분하게 알아차린다.' 충분하게 내가 그것을,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려 나간다.

 

어떤 것이 충분합니까?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진행되는 걸 알고, 사라지는 걸 분명하게 알 때!

배를 관찰하면,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남' 할 때, 일어나는 시작을 알고 일어나는 중의 상태를 알고 일어남이 끝나는 것을 알고. 그러고 나서 배가 꺼질 때를 '사라짐'이라고 할 때, 사라짐의 시작을 알고 사라짐이 진행되는 걸 알고 사라짐이 끝나는 걸 알 때. 이것이 계속될 때는 사띠(sati)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든 아니면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든.

배가 불러오는 데 팽창하는 느낌이 있다, 팽창하는 느낌의 시작을 알고 진행되는 걸 알고 팽창이 마지막 끝나서 딱 멈추는 걸 알고. 그다음에 배가 꺼질 때, 수축할 때 수축하는 시작을 알고 진행되는 걸 알고 수축이 끝나는 부분을 딱 알 때.

 

그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 그것이 움직임이든, 느낌이든, 아니면 움직임이 변화든 느낌이 변화든지 그것의 시작과 진행되는 것과 끝나는 것을 알게 될 때를 이걸 '사띠마-(satimā)'라고 합니다. '사띠(sati)가 있다'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사띠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수행할려는 마음 '아따삐'를 반드시 가져라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설한 담마(dhamma)는 분명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수행을 하면서 뭘 갖추게 됩니까? 수행을 하니까 어떻게 해요?

행복하다 하는 거라, 수행하니까! 또 수행하면 뭐가 갖춰집니까?

안정된다는 거라.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는 거라.

또 수행하면 뭐가 됩니까? 번뇌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게 되는 거라.

수행을 해나가면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지게 됩니다.

 

수행하는데 행복하지 않고 힘들어 죽겠다. 수행하는데 수행할 때 온갖 번뇌들로 인해서 머리가 아프다. 또 수행할 때 내가 고요하게 안정돼가지고 평화로운 게 아니고 더 힘들다. 그럴 거 같으면 뭐가 부족한 겁니까? 아따삐하고 사띠마라고 하는 것이 부족하다는 거라. 그것이 없어져 버렸다는 거라. 아따삐하고 사띠마만 있을 거 같으면 반드시 이 세 개는 갖춰진다는 거라.

이 세 가지 갖춰지는 것들은 스스로 만드는 것들입니다.

 

스스로 얻어야 되는 것이고, 스스로 갖춰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지녀나가야 됩니다.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시작과 중간과 끝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알아차림! 이걸 갖추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수행에서 얻어지는 조건, 갖춰야 되는 조건 세 가지들을 갖추게 됩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다른 번뇌로부터 나를 보호하게 되고, 마음이 안정되게 되고, 또한 내가 행복하게 되나간다는 거라. 그것만 해도 큰 이익이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것보다 더 큰 이익을 바라죠! 어떤 이익을 바랍니까? 해탈을 바랍니다. 열반(nibbāna)을 바란다는 거라.

그러면 거기에서 더 필요한 것이 바로 삼빠자나(sampajāna) 라고 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거라. 강한 알아차림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얘기했지만 움직임을 알 경우에는 삼빠자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느낌의 변화를 알아야 됩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빳타나(Patthana)」라고 하는 데에 '몸의 감각으로 인해서 위빳사나가 일어나고, 도가 일어나고, 지혜가 일어나서, 열반의 성취가 일어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마타 수행으로써는 지혜가 일어나지 않고 열반의 성취가 힘들다 라는 얘깁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육 년 고행을 할 때 자기를 도와줬던 '알라마 깔라마' 하고 '웃따까 라마뿟따'에게 이 법을 가르쳐 줄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못 가르쳐 줬습니까?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죠. 이미 돌아가셔가 만약에 인간으로 태어났다 할 거 같으면 부처님이 가르쳐줄 수가 있겠지. 테라와다에서는 죽음과 동시에 그 즉시 그다음 몸을 받게 된다고 그럽니다. 부처님이 육 년 동안 지났으면 여섯 살짜리가 돼 있든지 할 거 아니라. 그런데 그분들이 어디에 태어났어요? 무색계에 태어났죠! 천상세계에 태어났습니다.

천상세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몸으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운 세계입니다. 쉽게 말하면 웨다나(vedanā, 느낌)를 경험할 수가 없는 세계라는 거라.

'알라마 깔라마'나 '웃따까 라마뿟따' 같은 경우는 이미 선정에서는 대가들입니다. 딱 부족한 게 뭡니까? 뭐가 부족해요? 무상, 고, 무아의 성품들을 통찰하는 것들이 부족해서 열반에 못 이르렀던 거라.

 

그런데 열반에 이를려고 할 거 같으면 무상, 고, 무아의 웨다나(vēdanā)를 알아야 되는데 무색계에서는 웨다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무색계에 가가지고 법을 설할 수 없어서 그걸 설할 수 없는 게 아니고, 무색계에서는 이미 그게 조건이 안 된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천상세계에, 범천세계에 태어나는 것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훨씬 이익이다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브라흐마천 무색계에 태어나도 웨다나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걸 아주 행복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때 빨리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삼빠자나라고 해서, 느낌에서 느낌의 변화를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삼법인의 특성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삼법인의 특성이 드러났을 때는 그 사띠에서 삼빠자나가 이루어지는 상태입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아따삐 사띠마 삼빠자나'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느낌을 어떻게 알아차리는 게 좋을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차리는 게 좋아요?

즐거운 것이 있으면 어떻게 알아차리는 게 좋을까? 즐거움 속에서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야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즐거운 것이 있으면 즐거운 것이 사라지고 나면 괴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죠! 그렇게 알아차려도 되지만 즐거운 것속에는 그 즐거운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는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려야 됩니다.

일례로 그걸 바보웃음이라고 그럽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 그냥 웃는 것. 안 웃고 싶은데 억지로 웃을 경우에 어떻게 돼요?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거 유지할려면. 즐거움이라고 하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다는 겁니다.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마만큼 힘든 괴로움들이 있어야 만이 그걸 유지해나갑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그 즐거운 곳에서 괴로움을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뭐로 알아차리라고 그랬어요?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으로 알아차려라' 경전에는 그렇게 적어놨습니다.

 

그러면 괴로운 것은 어떻게 알아차려야 됩니까?

'괴로운 느낌은 화살같이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했죠? 화살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뾰족하게 생겼습니다. 가시같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콕콕콕콕 찌르면 어떻게 돼요? 굉장히 아프죠. 괴로운 느낌은 그와 같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여러분들 여기에 다리를 이렇게 하고 있으면 다리가 괴롭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걸 어떻게 처음에 이게 괴로운 느낌인 줄 어떻게 압니까? 바늘로 콕 콕 콕 콕 찌르듯이 아파옵니다. 괴로운 느낌은 그렇게 알아차려야 만이 괴로운 느낌으로 인해서 사로잡히질 않습니다. 콕 콕 할 땐 어떻게 됩니까?

변합니다. 혹 아파오기도 하고 안 아파오기도 합니다. 괴로운 느낌이 변한다는 사실을 모를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항상 괴로움은, 괴로운 느낌은 상주(常住)한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괴로운 느낌이 변한다고 알아차려야 만이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잠이 옵니다. 잠이 오는 걸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콕콕콕콕 바늘로 여기를, 눈꺼풀을 찌르듯이 아파오는 것이, 통증이 쑤시고 쑤시고 쑤시고 하는 것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 잠이 오는 걸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또 무거운 느낌이 옵니다. 그럼 무거운 느낌이 항상 똑같이 오는 게 아니고 점점 더 무거워 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점점 더 무거워 온다고 느끼지 못하면, 똑같은 무거움이라고 느껴버리면 그냥 잠에 툭 떨어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괴로운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가시같이, 화살같이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야 만이 괴로운 느낌이 내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는 거라. 내 것이 아니라고 할 거 같으면 괴로운 걸 누가 가지고 있으려고 할 거라? 싫은 걸, 여러분들 지것도 아닌데 누가 가져있을라고 그래요? 버려버린다는 거라.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들은 어떻게 알아차리라고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들은 무상으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수행에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들은 어떤 겁니까?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대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일어나집니다. 그러면 변화되는 것으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열반에 이르른 사람들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습니다. 열반에 이르른 사람들은 항상 대상을 알아차릴 때 뭐로 알아차립니까? 무상으로서 알아차립니다. 변하는 것으로서 알아차린다는 거라. 게으름에 빠졌을 때는 반드시 무상으로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아! 변하는구나. 끊임없이 내 마음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게으름에서는 게으름이 계속 지속돼버리게 됩니다.

그게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들입니다.

 

대략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아따삐 사띠마 삼빠자나'를 통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수행을 할 때에는 처음에는 움직임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움직임을 완전하게 파악되도록 하십시오. 시작되는 것과 진행되는 것과 끝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느낌에 대해서 알도록 하십시오.

일어나는 각각의 느낌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고, 그 느낌의 변화들을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이렇게 수행에서 자기에게 맞는 단계들을 자꾸 밟아나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제는 '아따삐 사띠마 삼빠자나'는 이해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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