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6xq_jEg7dKc
◈ 칠각지(七正覺支, satta sambojjhaṅga) (20160416. 한국테라와다 정기법회. 서울)
1. 염정각지(念正覺支, sati-sambojjhanga)
-나를 알아차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수행할 때 일어나는 다섯 가지 장애가 뭐 뭐가 있어요?
대충 뭔지 알죠? 수행할 때 그런 거 안 일어났으면 좋겠죠?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기 선이 가운데 딱 있으면 선의 요쪽 반대가 다섯 가지 장애, 선의 요쪽 반대가 칠각지라고 보면 됩니다. 칠각지가 잘 개발되어지면 되어질수록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멀어지는 거고, 다섯 가지 장애가 자꾸 일어나면 날수록 칠각지로부터 또 멀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지금 현재 내가 칠각지가 잘 개발돼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본인이 잘 압니다. 본인이! 장애가 안 일어나고 그것으로부터 관계없이 잘 수행을 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칠각지는 저절로 유지를 해나가고 있는 겁니다. 잘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완성은 안 됐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들을 어느 때 요놈을 탁 꺼내갖고 유용하게 쓸 것인지, 아니면 요놈을 꺼내가지고 유용하게 쓸 것인지 그것만 잡아주면 됩니다.
그것을 칠각지의 균형을 잡는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서 수행하는데 막 혼란스럽고 자꾸 잡념만 많이 일어난다. 그러면 칠각지 중에 어떤 놈을 탁 끄집어내가지고 그걸 이용하니까 이것이 잠들어버린다든지, 그와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칠각지는 일곱 개죠? 맨 위에 가 뭡니까? 사띠 삼보장가입니다.
나머지 것은 여섯 개죠! 여섯 개인데 공통적인 것이 있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가 공통되고, 그다음에 다섯 여섯 일곱 번째가 공통되고, 그러면 사띠를 빼고 나면 칠각지는 딱 두 부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간단하죠? 칠각지!
일곱 개 다 이해할 필요 없이 요거 두 부류만 이해하고 나면 칠각지는 딱 잡혀버리게 됩니다. 그대신에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두 부류 중에 이쪽 부류든 요쪽 부류든 골고루 다 작용을 해야 되는 거고, 또 완전하게 작용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럼 칠각지가 이해하기가 좀 수월할 겁니다.
하나 질문해볼게요? 칠각지의 빨리어 이름이 뭐라고 돼 있죠?
satta(삿따)는 칠(七)이라고 치자. sam(삼)은 뭔지 알죠? 바를 정(正)자 여기서는 '완전하다'는 의미로써 쓰여집니다.
그다음에 bojjhaṅgā(봇장가)는 bojjha(봇자) 하고 aṅga(앙가)죠! 앙가는 부분을 뜻할 거고, 봇자는 bodhi(보디)-'깨달음을 개발하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이게 '봇자'입니다. 그럼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는 요인인데, 그 요인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 sam(삼)-완전해야 됩니다. 완전하지 않으면 칠각지가 완전하게 개발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가 됩니다.
칠각지 부분은 경전에서 보면 알아차림이 없으면, 사띠를 얘기하는 겁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알아차림이 없다고 내가 알고, 알아차림이 개발됐으면 알아차림이 개발됐다고 내가 분명하게 안다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이 자기가 알아차림이 없다고 알까? 알아요? 왜 몰라? 대부분 언제 알아요? 지나고 나서 알죠! 마찬가집니다.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이 없으면, 알아차림이 없는 것들이 지나고 나서, 알아차림이 있을 때 '어, 내가 그 앞에는 알아차림이 없었네' 하고 분명하게 압니다. 그거는 해야 될 거 아니라.
손을 베이면 손을 베일 때는 자기가 뭣도 모르고 탁 베여놓고 아프니까 '아야!' 하면서 손 베인 것을 압니다. 그땐 이미 늦었죠? 이미 손이 베이고 났으니. 그래도 그렇게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요 손가락을 붕대로 감질 못합니다. 베인 줄을 모를 것 같으면 지가 그냥 계속 피를 철철 흘리고 계속 그 나쁜 상태로 안좋은 상태로 끌려들어가버리게 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림이 없었으면 알아차림이 없었다고 알도록은 해야 되는 거지 그것조차도 안 할 것 같으면 그거는 그냥 살 필요가 없어. 그냥 편안하게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냥 살면 되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이 계속 있으면 좋지만 알아차림이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없는지는 빨리 알아차려야 돼. 그게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나는 손해라. 그럴 수 있는 마음이 자꾸 돼야 됩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 사띠를 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것이 그겁니다. 내가 사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아야 돼. 사띠가 없으면서도 사띠가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든지 아니면 사띠가 완전하지도 않은데 사띠인 것으로 착각해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사띠 삼보장가가 첫 번째 부분인데, 사띠는 어떤 것이 사띠일까?
경전에는 뭐라고 됐느냐면 사념처 신·수·심·법 사념처를 분명하게 수행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사띠 삼보장가를 개발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비난할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괜히 오해하지 마십시오.
심념처 하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봐요. 마음에 대해서 알아차리기는 잘한다, 그런데 지는 뭐 움직이기도 해야 될 거고 뭔가 다른 것들도 해야 될 건데, 그러면 움직이면서 심념처를 합니까? 지금 가능합니까? (수행자 대답)
그거는 그 이후의 일이고, 먼저 움직이면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알아져요? 그것은 심념처에 해당이 안 되는 거죠? 그거는 신념처에 해당이 되는 거죠.
그런데 신념처를 할 줄 모른다고 할 거 같으면 움직일 때 움직이는 것은 알지 못하고 움직일 때 일어나는 마음만, 그 이후의 심념처만 하게 됩니다. 그렇죠?
그럼 사념처가 완전한 거라,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난 대상을 놓쳐버리는 거라. 쉽게 말하면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가 있고 나서,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가 있게 되는 거라. 이런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럼 알아차림이 없는 것을 분명하게 다시 아는 것은 있었지만은,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가 있는 경우가 돼버리는 거라. 이해하기 조금 어렵습니까?
마찬가지로 몸에 대해 알아차림(신념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배가 불러오고 하든지, 코끝에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하고 있다.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동안에 그것만 하고 가만히 있을 거 같으면 좋은데, 그것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움직일 때는 움직여야 되는 거고, 뭔가 생각할 때는 생각해야 되는 거고, 그리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데, 마지막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그건 잘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다가도 생각이 일어났으면 나중에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상태가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럼 그것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모를 거 같으면,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생각이 일어난 줄을 모르고 지나치고 나서, 그 뒤에 일어난 것을 알게 되는 거라.
왜 사띠 삼보장가의 맨 첫머리에 사념처를 완전하게 개발해야만이 사띠 삼보장가가 개발이 된다 하고 얘기를 하느냐면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의 수행법만 가지고 그것만 쭉 계속한다? 여러분들은 몸과 마음을 지닌 상태에서는 그거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언어적으로나 가능하지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 4가지 수행법들을 잘 수행하고 있는 상태가 돼야만이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연결돼나갑니다. 사띠가.
그게 여러분들이 사띠를 해야 될 때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마라톤 하는 사람들, 마라톤 할 때 옆에서 보조 맞춰주는 사람을 뭐라고 그래요? 페이스 메이커지! 같이 뛰어주는 사람. 페이스 메이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해가지고 쭈욱 해줘야만이 진짜 경기하는 사람이 지치지도 않고,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대에 거기에 들어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페이스 메이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럽니다.
페이스 메이커가 잘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 사람(마라토너)하고 일정하게 호흡을 맞춰서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해줘야 됩니다. 그럴러면 어떻게 해야 돼? 이 사람이 여기 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했다는 것은 알아야 될 거 아니라. 지가 뒤쳐졌으면 뒤쳐졌다는 것을 알고 빨리 갔으면 빨리 갔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걸 수행에서는 뭐라 그래요? 그게 사띠입니다!
사띠는 대상하고 떨어져가지고 대상에서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내가 먼지 가까운지 적당한지. 그런데 거리를 적당하게 유지된다고만 해가지고 골인되는 것은 아니잖아? 어떻게 해주어야 돼요? 나도 끊임없이 저 사람하고 같이 뛰어줘야 됩니다.
그럼 이 역할은 누가 하게 될까? 삼빠자나 입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사띠 삼빠자나' 하고 같이 붙여쓰게 됩니다. 같이 뛰어줘야 됩니다. 알아차린다고 해가지고 끝난 것이 아니고, 그 알아차린 것들로 인해서 균등하게 유지가 돼 있을 거 같으면, 알아차림과 같이 속도를 유지해가지고 뛰어줘야 되는 거라. 끊임없이 그것들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거라.
• 사띠 삼보장가를 개발하기 위해서 (경전에 나와 있는 방법)
여기서 문제 하나 낼게요. 사띠 삼보장가가 되기 위해서 맨 첫 번째 해야 될 것이 뭘까? 그걸 개발하기 위해서 첫 번째 해야 하는 것이?
대상을 완전하게 알려고 한다든지 이렇게 해서는 안 돼!
그냥 대상은 적당하게 유지만 시켜줘놓고 대상에서 사띠가 사라지지 않게끔만 해주면 되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이 첫 번째 해야 되는 것들이라.
무슨 대상이 무상·고·무아다. 알아차리기만 할 거 같으면 이게 무상한 성품으로 확 보이고, 뭐 어쩌고... 그걸 왜 하고 있느냐는 거라.
지금 해야 되는 것은 그냥 대상을 유지해주면서, 대상에서 알아차림이 사라지지 않도록만 끊임없이 해주면 돼. 그러면 첫 번째를 하게 되는 거라.
단지 사라졌으면 '어, 사띠가 사라졌네' 하고 알고 다시 돌아오면 돼라. 그것을 안 하고 자꾸 딴 것들을 할려고 그러는 거라.
심념처 한다, 아니면 수념처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대부분 뭘 하느냐면 대상은 놓쳐버리고 그때 마음의 상태만 자꾸 볼려고 그러고 대상은 놓쳐버리고. 대상은 요만큼 가고 있는데 같이 따라가면서 그 마음의 상태를 봐야되는데, 안 따라가고 지금 여기서 마음의 상태만 보고 나중에 뒤쫓아 갈려고 그런다는 거라.
일어난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대상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걸 안 해버리면 안 돼.
그리고 수념처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걸 무상한 성품으로, 변하는 것으로만 자꾸 볼려고 그럽니다. 변하는 것이 안 보이는데 볼려고 하니까 어떻게 돼요? 대상은 이미 저만큼 가 있는 상태라.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라.
사띠와 삼빠자나만 유지하도록만 해주면 됩니다.
그래서 아까 마라토너 옆에서 페이스 메이커 같은 역할만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정하게 대상을 유지시켜주면서, 그러면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계속 알아차림이 있도록만 해주는 것, 그걸 끊임없이 해나가는 것, 그렇게 해야만이 내가 지금 저 사람을 봤을 때 저 사람이 지쳐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고 이해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드러나집니다. 그럼 저 사람이 늦다 할 거 같으면 “야, 너 빨리 좀 뛰어”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거고, 아니면 지가 좀 앞장서가서 그 사람이 따라올 수 있게끔 만들어 줄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로 수행을 할 때 유지를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번째,
참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스님이 공부를 할 때는 수행을 할려니까 참 수행이 잘 안돼요. 왜 그럴까? 지금 현재 빨리어 배울게 있고 태국어 배울 게 있고 공부 진도 따라가기 바빠. 그게 사실은 수행인데, 그게 수행이라고 생각 안 하거든. 우선 그거 급하니까 그거 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 수행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수행하고는 조금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근데 실제로는 내가 지금 현재 책보고 있고 뭔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그게 다 수행이고 사띠의 대상인데, 그렇게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에. 그거는 그렇게 안됩니다. 공부할 때는 그냥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러고 나서 수행할 때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여러분들이 그러면 수행을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공부 안 해야 되지. 공부 안 해야 나머지 시간을 수행을 할 거 아니라? 여러분들 수행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해야 돼요? 안 봐야 돼. 이걸 안 봐야만이 내가 그나마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지할 거 다하고 “누구야” 하고 부르면 “오냐” 하고 나갔다가 언제 수행할 거라? 못해!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적어도 사띠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방해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자꾸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상을 단순화시켜야 됩니다. 그 사람은 실제 내가 수행해야 될 대상이 아니잖아. 그렇죠!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입니다. 그 사람이 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수행하는 것은 그 화로 인해서 일어난 내 마음인 것이지, 그래서 내 마음이 대상인 것이지 그 사람이 화를 일으킨 것이 대상이 아닙니다.
외부적인 대상은 처음엔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 관심 밖의 대상입니다. 수행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나에게 수행을 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자꾸 방해되는 것들로 끄달려 들어가? 사람에게 끄달려 들어가고 아니면 외부적인 것들에 끄달려 들어가고. 그걸 최대한 줄여야 되는 거라.
사람도 수행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멀리해야 될 뿐 아니라,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만약에 내가 자극을 자꾸 받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자극받을 수 있는 것들로부터도 벗어나야 되는 거라. 마음을 그것들은 밖의 대상이라고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내 대상은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성냄이 일어나고 욕심이 일어났으면 그것이 내 대상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 저 밖의 것, 그걸 일으킨 것들이 대상이라고 생각해선 안 되는 거라. 빨리 마음을 그렇게 바꿔줘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인 것과 대상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라.
대상이 아닌 것들은 안 볼 사람은 안 봐버리고, 그리고 관계하지 않아야 될 대상은 관계하지 않아야 되는 거라. 그걸 빨리 해야만이 적어도 그래도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거 같으면 자연스럽게 뭔가를 알게끔 됩니다. 마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뭔가를 알아차릴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두 번째 부분입니다. 내 대상은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대상이 아닌 것은 떨어뜨려 놓아야 됩니다.
사띠가 잘 되게 하기 위한 요인들을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수행처에 가면 수행이 좀 잘됩니다. 왜 그래? 다른 사람들이 다 수행을 하기 때문에 나도 더불어서 같이 하게 됩니다. 또는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거 같으면 뭔가 이익이 있습니다. 수행에 대한 것이든 뭐든 간에 나에게 이익이 있다는 거라. 그럼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거 같으면 자꾸 수행을 하는 방향으로 유도를 하지, 다른 방향으로 유도를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떡하나? 맨날 수행처에 와서 집중수행 할 수도 없고, 그런 사람 옆에 있는다 해가지고 이사를 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돼?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이나 아니면 수행처에 있는 것처럼 하게 될까?
여러분들 집을 수행처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가족들을 선우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 거라.
그 사람이 뭔가를 하더라도 나에게 도움 주는 것만 생각하고 그 속에서 뭔가 도움을 받을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싫은 것만 자꾸 보이고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나에게는 아까 두 번째와 같이 해당이 되는 거라.
적과 아군은 누가 만든다고? 내가 만드는 거라. 그러면 이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인 거라. 이 사람이 선우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내가 문제라는 거라. 내가 선우로 만들어버리면 저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우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집에 있으면서 그리고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 모든 것들에서 수행대상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아니면 책을 보면 책을 보는 대로, 모든 것이 집중수행 하듯이 스물네 시간을 그렇게 쓴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잠잘 때를 빼고. 집중수행처 가면 그렇게 합니다.
그럼 나도 마찬가지로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잠자는 것 빼고 모든 시간을 집중수행 한다고 생각을 하라는 거라. 그것이 세 번째 부분입니다.
생활 자체를 수행할려고 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나의 선우로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사띠하는 것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습관 들이는 부분인데, 여러분들 사띠하는 시간이 많아요, 사띠 안 하는 시간이 많아요? (수행자 대답: 안 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음, 잘났다! (ㅎㅎㅎ)
모든 것들은 사띠의 대상이라고 그랬는데 신·수·심·법 몸과 마음입니다.
나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몸과 마음에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이 사띠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자꾸 놓친다는 거라. 적어도 "놓치는 것이 귀찮고 싫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면은 그걸 안 할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공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부 꼴등 하는 것이 죽기보다도 싫다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또 시험치면 또 꼴등 비슷하게 됩니다. 그거 그냥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공부 잘하는 애들은 만약에 일등 하다가도 2등으로 떨어졌다 그러면 그게 죽기보다도 싫은 거라. 그러면 어떻게 하든 지간에 일등을 할려고 그럽니다.
사띠 안 하는 것이 좋습니까? 만날 그것으로 인해 실수하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것이 싫은 생각을 일으켜야 됩니다.
사띠를 습관화 할려고 생각할 거 같으면, 사띠 안 하는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들이 얼마나 나에게 마이너스 요인인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자꾸 깨우쳐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할려고 합니다.
사띠하는 것을 습관을 자꾸 들여야 됩니다. 놓쳤으면 '아, 놓쳤어. 어떡하냐' 이렇게 하지 말고 놓쳤다고 알고, 나는 지금 할 것은 딱 하나뿐입니다. 사띠하는 것! 그냥 사띠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냥 사띠하고 사띠하고 사띠하고 계속 연결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게 습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놓치면 진짜 내가 죽을 짓을 저지른 것처럼 생각을 일으켜야만이 그다음부터는 사띠를 놓치는 것들이 줄어들어 갑니다.
지금 네 가지 얘기를 했습니다.
그 네 가지를 적어도 할 거 같으면 사띠 삼보장가는 무르익어가게 됩니다.
• 사띠를 할 때 사띠가 잘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방법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것은, 사띠는 어떤 걸까?
'음, 내 마음이 뭘 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리는 것? 아니면 걷고 있으면 걷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 아니면 호흡하고 있으면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사띠일까?
사띠라, 아니라? 사띠이기는 사띠라도 수행에서는 그걸 사띠라고 얘길 안 합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그런 개념보다는 사띠를 했을 때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이 돼야 됩니다! 분명하게 그것이 인식이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띠를 했을 때 자연스런 현상으로 바뀌는 것이 그다음 상태로써 보여져야 됩니다! 그것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보여지든, 아니면 마음이 바뀌는 것으로 보여지든. 적어도 그런 걸 사띠라고 하지, 뭐 그냥 '알고 있네' 그거는 애들 태어나자마자 아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띠라고 하는 것은 내가 개발시켜주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것들은 사띠라고 하기 보다는 그냥 아는 겁니다. 대상을 아는 것과 사띠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사띠하게 될까? 사띠는 온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됩니다.
하나의 대상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온 전심전력을 기울인다고 해야만이 그것을 겨우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게 변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지, 그냥 어설프게 했다가는 한 시간 내내 하고 있는데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십 분 전에 하는 거나 이십 분 전에 하는 거나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똑같애.
그거 아는 거 그냥 계속 해가지고 편안할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수행에서 진척이 있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전심전력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사띠의 성질은 표면적이지 않다. 대상에 깊숙히 파고 들어간다." 그게 사띠의 성질입니다. 표면적으로 똑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그속에 깊숙히 들어가 보면 그것은 반드시 변하게 돼있고 깊숙히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들어간 상태를 자기 자신이 압니다. 그거 인식하지 못할 거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사띠를 그냥 가짜 사띠를 하려고 하지 말고 진짜 내가 사띠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해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두 번째,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면, 여기에 물잔이 있습니다. 시계를 여기다 톡 빠뜨린다고 해봅시다. 그럼 이 시계가 뜰까? 안 뜨죠? 시계는 깊숙히 이 바닥까지 탁 닿습니다.
대상에 사띠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사띠는 어디에 닿아있을까? 바닥에 닿아있습니다. 바닥에 닿아있으면 이 위에서 출렁거리더라도 바닥에 있는 것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띠가 잘 되어있을 거 같으면 어떠한 것이든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에 마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흔들렸다 그러면 이거(시계)는 깊이 못 들어가 있는 겁니다. 대상에.
지금 사띠를 잘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외부적인 대상, 그리고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안으로의 대상들,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 지금 마음이 동요를 하고 있는가, 아닌가?
밥을 먹고 있는데 밥을 먹고 있는 것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다. 그럴 거 같으면 동요를 안 하고 있는 겁니다. 가끔 그러다가 먹었는데 '음, 맛있어' 이래버렸다. 그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동요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맛보고 있는 건데 맛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맛있게 느껴지는 거라. 대상으로 인해서 동요를 해버리면 어떠한 경우든지 '좋다 싫다' 하는 것으로써 개념으로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수행을 할 경우에는, '좋다, 싫다' 하는 것이 일어나버릴 것 같으면 딱 거기서 중단을 해버려야 됩니다. 중단해버리고 마음이 편안하게 돼있는지 좋고 싫은 것들에 끄달려 들어갔는지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대상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흔들리는 상태에서는 조절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사띠를 할 때는 대상에 대해서 깊이있게 해야 될 뿐 아니라, 어떠한 대상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그리할려면 평상시에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됩니다. 평상시에 생활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할려고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들을 보면 그럴 때가 있어요. 스님들이 그래도 그런 마음을 가지기 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거라. 지 아버지가 죽었다 해도 안가요. 마음은 들끓고 있어도. 가면 괜히 다른 스님들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서? 아니면 의연한 채 한다고? 이미 제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요. 한번은 흔들릴지라도 것으로 인해서 그 간 것으로 인해서 또 다른 흔들림이 있는걸 방어를 해주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잖아.
계를 잘 지킬 것 같으면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되는 것은 거의 반 이상은 잡아버립니다.
만날 여기서 오계 받고 나서 그냥 까먹어버립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했는데 똑 남의 흠집내는 소리만 하게 되는 거고, 뭘 죽이지마라 했는데 가다 보면 집에 가서 뭐하나 탁 잡아 죽이고. 계를 지키면 마음이 동요되는 것들은 어느 정도는 가라앉히게 됩니다. 그게 그렇게 가라앉아 져야지만 그다음에는 마음이 동요될 때 동요되는 것을 아는 것이지, 그 반 정도라도 잡아주지 못할 거 같으면 마음이 동요할 때는 동요하는 것조차도 모르게 됩니다. 그냥 끄달려 들어가 버립니다. 이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사띠-알아차릴 때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일어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는 것을 놓쳐버리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설혹 그 뒤에 것들을 다 놓쳐버리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어난 것들은 분명하게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말을 한다. 말을 할 때 말하는 처음에 말하는 때 그것들은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오늘은 내가 말하는 처음 시작 부분을 분명히 알고 말을 했으니까 그것으로 족했다 할 정도가 돼야 됩니다. 그뒤에는 뭐 그냥 감정에 빠져갖고 미주알 고주알 하더라도, 처음에는 그래도 내가 평온한 마음으로 저 사람에게 뭔가 도와줄려고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해야되겠다 마음먹고 말을 시작을 할 줄은 알아야 된다는 거라. 단추를 못 끼울 거 같으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생겨나는 것들 처음은 반드시 잡을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할 때도 코의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들이쉬는 처음에 들이쉬는 줄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대부분 어떻게 하느냐면 숨이 처음에 여기에서 쉬어졌다. 그런데 마음은 이 처음을 물라. 한참 쉬고 나서 들이쉬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그마만큼 늦어. 마음이 깨어있지 못하니까! 시작을 못 잡아내니까 당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사띠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처음 시작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걸 해야만이 나중에 끝나는 걸 알게 됩니다. 끝나는 것을 알아야만이 그다음에 뭐가 일어나는지를 아는 거라.
마음이 먼저 일어나는 건지, 뭔가 또 다른 것들이 시작되는 것들이 탁 일어날 거 같으면 금방 잡아져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걸 놓치지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처음에 일어나는 것들, 처음에 생겨나는 것들은 반드시 알아차릴려고 하라.
대부분 보면 처음에 하는 것들이 거의 연속돼있든지 아니면 좀 깁니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그 상태를 즐기면서 나아갈려고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어떠한 경우든지 처음 하는 것들, 처음 시작되는 것들, 호흡의 처음, 들이쉬는 것의 처음, 내쉬는 것의 처음, 그다음에 뭔가 손을 뻗친다면 손을 뻗칠 때의 처음 하는 것, 뭐든지 처음 하는 것들은 반드시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들이 나중에는 수행할 때는 굉장히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처음이 잘되면 그다음 마음은 사띠가 또렷해질 거 같으면 삼빠자나는 따라와집니다. 처음을 잘 할 거 같으면 나중에는 그 전체를 쭉 다 사띠삼빠자나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유념해서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칠각지 처음 사띠 삼보장가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보통 염각지라고 하는데 "염정각지" 입니다. 정확하게 할 거 같으면.
4페이지에 보면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때까지 다른 것들에 많이 시달려왔잖아. 다른 것 가지고 시간 다 보냈는데, 인제는 자기 거 좀 챙기며 살아야 안 되겠어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사띠 삼보장가는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떡하나? 칠각지 얘기할 때 얘기했죠? 사띠 삼보장가가 돼야만이 그다음 택법각지가 된다고. 그거는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은 사띠 삼보장가만 돼서 유지돼나갈 거 같으면 그다음 부분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택법각지이고, 노력하는 각지이고, 희각지이고 이런 식으로 넘어가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몰라 놔 놓으면 사띠를 그냥 아는 것이 사띠라고 생각할 거 같으면, 완전하게 될 때까지 계속 닦지 못할 거 같으면, 택법각지를 자기가 만들어냅니다.
택법이라고 할 거 같으면 자기가 대상을 선택한다고 생각합니다. '어, 이것은 뭐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뭣이구나' 하고 자꾸 지가 머리를 굴리는 거라. 전혀 택법은 그런 게 아닙니다. 택법은 그런 것들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자연스럽게 사띠로 인해서 분별돼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분별돼 나가는 것들을 택법각지라고 하는 것이지, 내가 마음을 굴려가지고 마음을 내가지고 '이것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전혀 택법각지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고, 택법각지 부분에서는 조금 설명할 부분은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제대로 좀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https://youtu.be/6xq_jEg7dKc
◈ 칠각지(七正覺支, satta sambojjhaṅga) (20160416. 한국테라와다 정기법회. 서울)
1. 염정각지(念正覺支, sati-sambojjhanga)
-나를 알아차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수행할 때 일어나는 다섯 가지 장애가 뭐 뭐가 있어요?
대충 뭔지 알죠? 수행할 때 그런 거 안 일어났으면 좋겠죠?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기 선이 가운데 딱 있으면 선의 요쪽 반대가 다섯 가지 장애, 선의 요쪽 반대가 칠각지라고 보면 됩니다. 칠각지가 잘 개발되어지면 되어질수록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멀어지는 거고, 다섯 가지 장애가 자꾸 일어나면 날수록 칠각지로부터 또 멀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지금 현재 내가 칠각지가 잘 개발돼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본인이 잘 압니다. 본인이! 장애가 안 일어나고 그것으로부터 관계없이 잘 수행을 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칠각지는 저절로 유지를 해나가고 있는 겁니다. 잘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완성은 안 됐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들을 어느 때 요놈을 탁 꺼내갖고 유용하게 쓸 것인지, 아니면 요놈을 꺼내가지고 유용하게 쓸 것인지 그것만 잡아주면 됩니다.
그것을 칠각지의 균형을 잡는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서 수행하는데 막 혼란스럽고 자꾸 잡념만 많이 일어난다. 그러면 칠각지 중에 어떤 놈을 탁 끄집어내가지고 그걸 이용하니까 이것이 잠들어버린다든지, 그와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칠각지는 일곱 개죠? 맨 위에 가 뭡니까? 사띠 삼보장가입니다.
나머지 것은 여섯 개죠! 여섯 개인데 공통적인 것이 있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가 공통되고, 그다음에 다섯 여섯 일곱 번째가 공통되고, 그러면 사띠를 빼고 나면 칠각지는 딱 두 부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간단하죠? 칠각지!
일곱 개 다 이해할 필요 없이 요거 두 부류만 이해하고 나면 칠각지는 딱 잡혀버리게 됩니다. 그대신에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두 부류 중에 이쪽 부류든 요쪽 부류든 골고루 다 작용을 해야 되는 거고, 또 완전하게 작용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럼 칠각지가 이해하기가 좀 수월할 겁니다.
하나 질문해볼게요? 칠각지의 빨리어 이름이 뭐라고 돼 있죠?
satta(삿따)는 칠(七)이라고 치자. sam(삼)은 뭔지 알죠? 바를 정(正)자 여기서는 '완전하다'는 의미로써 쓰여집니다.
그다음에 bojjhaṅgā(봇장가)는 bojjha(봇자) 하고 aṅga(앙가)죠! 앙가는 부분을 뜻할 거고, 봇자는 bodhi(보디)-'깨달음을 개발하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이게 '봇자'입니다. 그럼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는 요인인데, 그 요인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 sam(삼)-완전해야 됩니다. 완전하지 않으면 칠각지가 완전하게 개발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가 됩니다.
칠각지 부분은 경전에서 보면 알아차림이 없으면, 사띠를 얘기하는 겁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알아차림이 없다고 내가 알고, 알아차림이 개발됐으면 알아차림이 개발됐다고 내가 분명하게 안다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이 자기가 알아차림이 없다고 알까? 알아요? 왜 몰라? 대부분 언제 알아요? 지나고 나서 알죠! 마찬가집니다.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이 없으면, 알아차림이 없는 것들이 지나고 나서, 알아차림이 있을 때 '어, 내가 그 앞에는 알아차림이 없었네' 하고 분명하게 압니다. 그거는 해야 될 거 아니라.
손을 베이면 손을 베일 때는 자기가 뭣도 모르고 탁 베여놓고 아프니까 '아야!' 하면서 손 베인 것을 압니다. 그땐 이미 늦었죠? 이미 손이 베이고 났으니. 그래도 그렇게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요 손가락을 붕대로 감질 못합니다. 베인 줄을 모를 것 같으면 지가 그냥 계속 피를 철철 흘리고 계속 그 나쁜 상태로 안좋은 상태로 끌려들어가버리게 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림이 없었으면 알아차림이 없었다고 알도록은 해야 되는 거지 그것조차도 안 할 것 같으면 그거는 그냥 살 필요가 없어. 그냥 편안하게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냥 살면 되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이 계속 있으면 좋지만 알아차림이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없는지는 빨리 알아차려야 돼. 그게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나는 손해라. 그럴 수 있는 마음이 자꾸 돼야 됩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 사띠를 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것이 그겁니다. 내가 사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아야 돼. 사띠가 없으면서도 사띠가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든지 아니면 사띠가 완전하지도 않은데 사띠인 것으로 착각해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사띠 삼보장가가 첫 번째 부분인데, 사띠는 어떤 것이 사띠일까?
경전에는 뭐라고 됐느냐면 사념처 신·수·심·법 사념처를 분명하게 수행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사띠 삼보장가를 개발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비난할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괜히 오해하지 마십시오.
심념처 하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봐요. 마음에 대해서 알아차리기는 잘한다, 그런데 지는 뭐 움직이기도 해야 될 거고 뭔가 다른 것들도 해야 될 건데, 그러면 움직이면서 심념처를 합니까? 지금 가능합니까? (수행자 대답)
그거는 그 이후의 일이고, 먼저 움직이면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알아져요? 그것은 심념처에 해당이 안 되는 거죠? 그거는 신념처에 해당이 되는 거죠.
그런데 신념처를 할 줄 모른다고 할 거 같으면 움직일 때 움직이는 것은 알지 못하고 움직일 때 일어나는 마음만, 그 이후의 심념처만 하게 됩니다. 그렇죠?
그럼 사념처가 완전한 거라,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난 대상을 놓쳐버리는 거라. 쉽게 말하면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가 있고 나서,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가 있게 되는 거라. 이런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럼 알아차림이 없는 것을 분명하게 다시 아는 것은 있었지만은,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가 있는 경우가 돼버리는 거라. 이해하기 조금 어렵습니까?
마찬가지로 몸에 대해 알아차림(신념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배가 불러오고 하든지, 코끝에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하고 있다.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동안에 그것만 하고 가만히 있을 거 같으면 좋은데, 그것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움직일 때는 움직여야 되는 거고, 뭔가 생각할 때는 생각해야 되는 거고, 그리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데, 마지막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그건 잘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다가도 생각이 일어났으면 나중에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상태가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럼 그것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모를 거 같으면,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생각이 일어난 줄을 모르고 지나치고 나서, 그 뒤에 일어난 것을 알게 되는 거라.
왜 사띠 삼보장가의 맨 첫머리에 사념처를 완전하게 개발해야만이 사띠 삼보장가가 개발이 된다 하고 얘기를 하느냐면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의 수행법만 가지고 그것만 쭉 계속한다? 여러분들은 몸과 마음을 지닌 상태에서는 그거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언어적으로나 가능하지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 4가지 수행법들을 잘 수행하고 있는 상태가 돼야만이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연결돼나갑니다. 사띠가.
그게 여러분들이 사띠를 해야 될 때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마라톤 하는 사람들, 마라톤 할 때 옆에서 보조 맞춰주는 사람을 뭐라고 그래요? 페이스 메이커지! 같이 뛰어주는 사람. 페이스 메이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해가지고 쭈욱 해줘야만이 진짜 경기하는 사람이 지치지도 않고,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대에 거기에 들어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페이스 메이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럽니다.
페이스 메이커가 잘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 사람(마라토너)하고 일정하게 호흡을 맞춰서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해줘야 됩니다. 그럴러면 어떻게 해야 돼? 이 사람이 여기 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했다는 것은 알아야 될 거 아니라. 지가 뒤쳐졌으면 뒤쳐졌다는 것을 알고 빨리 갔으면 빨리 갔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걸 수행에서는 뭐라 그래요? 그게 사띠입니다!
사띠는 대상하고 떨어져가지고 대상에서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내가 먼지 가까운지 적당한지. 그런데 거리를 적당하게 유지된다고만 해가지고 골인되는 것은 아니잖아? 어떻게 해주어야 돼요? 나도 끊임없이 저 사람하고 같이 뛰어줘야 됩니다.
그럼 이 역할은 누가 하게 될까? 삼빠자나 입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사띠 삼빠자나' 하고 같이 붙여쓰게 됩니다. 같이 뛰어줘야 됩니다. 알아차린다고 해가지고 끝난 것이 아니고, 그 알아차린 것들로 인해서 균등하게 유지가 돼 있을 거 같으면, 알아차림과 같이 속도를 유지해가지고 뛰어줘야 되는 거라. 끊임없이 그것들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거라.
• 사띠 삼보장가를 개발하기 위해서 (경전에 나와 있는 방법)
여기서 문제 하나 낼게요. 사띠 삼보장가가 되기 위해서 맨 첫 번째 해야 될 것이 뭘까? 그걸 개발하기 위해서 첫 번째 해야 하는 것이?
대상을 완전하게 알려고 한다든지 이렇게 해서는 안 돼!
그냥 대상은 적당하게 유지만 시켜줘놓고 대상에서 사띠가 사라지지 않게끔만 해주면 되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이 첫 번째 해야 되는 것들이라.
무슨 대상이 무상·고·무아다. 알아차리기만 할 거 같으면 이게 무상한 성품으로 확 보이고, 뭐 어쩌고... 그걸 왜 하고 있느냐는 거라.
지금 해야 되는 것은 그냥 대상을 유지해주면서, 대상에서 알아차림이 사라지지 않도록만 끊임없이 해주면 돼. 그러면 첫 번째를 하게 되는 거라.
단지 사라졌으면 '어, 사띠가 사라졌네' 하고 알고 다시 돌아오면 돼라. 그것을 안 하고 자꾸 딴 것들을 할려고 그러는 거라.
심념처 한다, 아니면 수념처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대부분 뭘 하느냐면 대상은 놓쳐버리고 그때 마음의 상태만 자꾸 볼려고 그러고 대상은 놓쳐버리고. 대상은 요만큼 가고 있는데 같이 따라가면서 그 마음의 상태를 봐야되는데, 안 따라가고 지금 여기서 마음의 상태만 보고 나중에 뒤쫓아 갈려고 그런다는 거라.
일어난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대상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걸 안 해버리면 안 돼.
그리고 수념처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걸 무상한 성품으로, 변하는 것으로만 자꾸 볼려고 그럽니다. 변하는 것이 안 보이는데 볼려고 하니까 어떻게 돼요? 대상은 이미 저만큼 가 있는 상태라.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라.
사띠와 삼빠자나만 유지하도록만 해주면 됩니다.
그래서 아까 마라토너 옆에서 페이스 메이커 같은 역할만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정하게 대상을 유지시켜주면서, 그러면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계속 알아차림이 있도록만 해주는 것, 그걸 끊임없이 해나가는 것, 그렇게 해야만이 내가 지금 저 사람을 봤을 때 저 사람이 지쳐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고 이해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드러나집니다. 그럼 저 사람이 늦다 할 거 같으면 “야, 너 빨리 좀 뛰어”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거고, 아니면 지가 좀 앞장서가서 그 사람이 따라올 수 있게끔 만들어 줄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로 수행을 할 때 유지를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번째,
참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스님이 공부를 할 때는 수행을 할려니까 참 수행이 잘 안돼요. 왜 그럴까? 지금 현재 빨리어 배울게 있고 태국어 배울 게 있고 공부 진도 따라가기 바빠. 그게 사실은 수행인데, 그게 수행이라고 생각 안 하거든. 우선 그거 급하니까 그거 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 수행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수행하고는 조금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근데 실제로는 내가 지금 현재 책보고 있고 뭔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그게 다 수행이고 사띠의 대상인데, 그렇게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에. 그거는 그렇게 안됩니다. 공부할 때는 그냥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러고 나서 수행할 때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여러분들이 그러면 수행을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공부 안 해야 되지. 공부 안 해야 나머지 시간을 수행을 할 거 아니라? 여러분들 수행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해야 돼요? 안 봐야 돼. 이걸 안 봐야만이 내가 그나마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지할 거 다하고 “누구야” 하고 부르면 “오냐” 하고 나갔다가 언제 수행할 거라? 못해!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적어도 사띠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방해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자꾸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상을 단순화시켜야 됩니다. 그 사람은 실제 내가 수행해야 될 대상이 아니잖아. 그렇죠!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입니다. 그 사람이 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수행하는 것은 그 화로 인해서 일어난 내 마음인 것이지, 그래서 내 마음이 대상인 것이지 그 사람이 화를 일으킨 것이 대상이 아닙니다.
외부적인 대상은 처음엔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 관심 밖의 대상입니다. 수행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나에게 수행을 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자꾸 방해되는 것들로 끄달려 들어가? 사람에게 끄달려 들어가고 아니면 외부적인 것들에 끄달려 들어가고. 그걸 최대한 줄여야 되는 거라.
사람도 수행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멀리해야 될 뿐 아니라,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만약에 내가 자극을 자꾸 받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자극받을 수 있는 것들로부터도 벗어나야 되는 거라. 마음을 그것들은 밖의 대상이라고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내 대상은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성냄이 일어나고 욕심이 일어났으면 그것이 내 대상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 저 밖의 것, 그걸 일으킨 것들이 대상이라고 생각해선 안 되는 거라. 빨리 마음을 그렇게 바꿔줘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인 것과 대상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라.
대상이 아닌 것들은 안 볼 사람은 안 봐버리고, 그리고 관계하지 않아야 될 대상은 관계하지 않아야 되는 거라. 그걸 빨리 해야만이 적어도 그래도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거 같으면 자연스럽게 뭔가를 알게끔 됩니다. 마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뭔가를 알아차릴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두 번째 부분입니다. 내 대상은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대상이 아닌 것은 떨어뜨려 놓아야 됩니다.
사띠가 잘 되게 하기 위한 요인들을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수행처에 가면 수행이 좀 잘됩니다. 왜 그래? 다른 사람들이 다 수행을 하기 때문에 나도 더불어서 같이 하게 됩니다. 또는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거 같으면 뭔가 이익이 있습니다. 수행에 대한 것이든 뭐든 간에 나에게 이익이 있다는 거라. 그럼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거 같으면 자꾸 수행을 하는 방향으로 유도를 하지, 다른 방향으로 유도를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떡하나? 맨날 수행처에 와서 집중수행 할 수도 없고, 그런 사람 옆에 있는다 해가지고 이사를 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돼?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이나 아니면 수행처에 있는 것처럼 하게 될까?
여러분들 집을 수행처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가족들을 선우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 거라.
그 사람이 뭔가를 하더라도 나에게 도움 주는 것만 생각하고 그 속에서 뭔가 도움을 받을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싫은 것만 자꾸 보이고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나에게는 아까 두 번째와 같이 해당이 되는 거라.
적과 아군은 누가 만든다고? 내가 만드는 거라. 그러면 이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인 거라. 이 사람이 선우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내가 문제라는 거라. 내가 선우로 만들어버리면 저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우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집에 있으면서 그리고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 모든 것들에서 수행대상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아니면 책을 보면 책을 보는 대로, 모든 것이 집중수행 하듯이 스물네 시간을 그렇게 쓴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잠잘 때를 빼고. 집중수행처 가면 그렇게 합니다.
그럼 나도 마찬가지로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잠자는 것 빼고 모든 시간을 집중수행 한다고 생각을 하라는 거라. 그것이 세 번째 부분입니다.
생활 자체를 수행할려고 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나의 선우로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사띠하는 것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습관 들이는 부분인데, 여러분들 사띠하는 시간이 많아요, 사띠 안 하는 시간이 많아요? (수행자 대답: 안 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음, 잘났다! (ㅎㅎㅎ)
모든 것들은 사띠의 대상이라고 그랬는데 신·수·심·법 몸과 마음입니다.
나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몸과 마음에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이 사띠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자꾸 놓친다는 거라. 적어도 "놓치는 것이 귀찮고 싫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면은 그걸 안 할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공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부 꼴등 하는 것이 죽기보다도 싫다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또 시험치면 또 꼴등 비슷하게 됩니다. 그거 그냥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공부 잘하는 애들은 만약에 일등 하다가도 2등으로 떨어졌다 그러면 그게 죽기보다도 싫은 거라. 그러면 어떻게 하든 지간에 일등을 할려고 그럽니다.
사띠 안 하는 것이 좋습니까? 만날 그것으로 인해 실수하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것이 싫은 생각을 일으켜야 됩니다.
사띠를 습관화 할려고 생각할 거 같으면, 사띠 안 하는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들이 얼마나 나에게 마이너스 요인인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자꾸 깨우쳐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할려고 합니다.
사띠하는 것을 습관을 자꾸 들여야 됩니다. 놓쳤으면 '아, 놓쳤어. 어떡하냐' 이렇게 하지 말고 놓쳤다고 알고, 나는 지금 할 것은 딱 하나뿐입니다. 사띠하는 것! 그냥 사띠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냥 사띠하고 사띠하고 사띠하고 계속 연결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게 습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놓치면 진짜 내가 죽을 짓을 저지른 것처럼 생각을 일으켜야만이 그다음부터는 사띠를 놓치는 것들이 줄어들어 갑니다.
지금 네 가지 얘기를 했습니다.
그 네 가지를 적어도 할 거 같으면 사띠 삼보장가는 무르익어가게 됩니다.
• 사띠를 할 때 사띠가 잘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방법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것은, 사띠는 어떤 걸까?
'음, 내 마음이 뭘 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리는 것? 아니면 걷고 있으면 걷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 아니면 호흡하고 있으면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사띠일까?
사띠라, 아니라? 사띠이기는 사띠라도 수행에서는 그걸 사띠라고 얘길 안 합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그런 개념보다는 사띠를 했을 때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이 돼야 됩니다! 분명하게 그것이 인식이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띠를 했을 때 자연스런 현상으로 바뀌는 것이 그다음 상태로써 보여져야 됩니다! 그것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보여지든, 아니면 마음이 바뀌는 것으로 보여지든. 적어도 그런 걸 사띠라고 하지, 뭐 그냥 '알고 있네' 그거는 애들 태어나자마자 아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띠라고 하는 것은 내가 개발시켜주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것들은 사띠라고 하기 보다는 그냥 아는 겁니다. 대상을 아는 것과 사띠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사띠하게 될까? 사띠는 온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됩니다.
하나의 대상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온 전심전력을 기울인다고 해야만이 그것을 겨우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게 변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지, 그냥 어설프게 했다가는 한 시간 내내 하고 있는데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십 분 전에 하는 거나 이십 분 전에 하는 거나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똑같애.
그거 아는 거 그냥 계속 해가지고 편안할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수행에서 진척이 있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전심전력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사띠의 성질은 표면적이지 않다. 대상에 깊숙히 파고 들어간다." 그게 사띠의 성질입니다. 표면적으로 똑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그속에 깊숙히 들어가 보면 그것은 반드시 변하게 돼있고 깊숙히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들어간 상태를 자기 자신이 압니다. 그거 인식하지 못할 거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사띠를 그냥 가짜 사띠를 하려고 하지 말고 진짜 내가 사띠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해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두 번째,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면, 여기에 물잔이 있습니다. 시계를 여기다 톡 빠뜨린다고 해봅시다. 그럼 이 시계가 뜰까? 안 뜨죠? 시계는 깊숙히 이 바닥까지 탁 닿습니다.
대상에 사띠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사띠는 어디에 닿아있을까? 바닥에 닿아있습니다. 바닥에 닿아있으면 이 위에서 출렁거리더라도 바닥에 있는 것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띠가 잘 되어있을 거 같으면 어떠한 것이든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에 마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흔들렸다 그러면 이거(시계)는 깊이 못 들어가 있는 겁니다. 대상에.
지금 사띠를 잘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외부적인 대상, 그리고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안으로의 대상들,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 지금 마음이 동요를 하고 있는가, 아닌가?
밥을 먹고 있는데 밥을 먹고 있는 것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다. 그럴 거 같으면 동요를 안 하고 있는 겁니다. 가끔 그러다가 먹었는데 '음, 맛있어' 이래버렸다. 그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동요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맛보고 있는 건데 맛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맛있게 느껴지는 거라. 대상으로 인해서 동요를 해버리면 어떠한 경우든지 '좋다 싫다' 하는 것으로써 개념으로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수행을 할 경우에는, '좋다, 싫다' 하는 것이 일어나버릴 것 같으면 딱 거기서 중단을 해버려야 됩니다. 중단해버리고 마음이 편안하게 돼있는지 좋고 싫은 것들에 끄달려 들어갔는지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대상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흔들리는 상태에서는 조절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사띠를 할 때는 대상에 대해서 깊이있게 해야 될 뿐 아니라, 어떠한 대상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그리할려면 평상시에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됩니다. 평상시에 생활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할려고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들을 보면 그럴 때가 있어요. 스님들이 그래도 그런 마음을 가지기 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거라. 지 아버지가 죽었다 해도 안가요. 마음은 들끓고 있어도. 가면 괜히 다른 스님들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서? 아니면 의연한 채 한다고? 이미 제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요. 한번은 흔들릴지라도 것으로 인해서 그 간 것으로 인해서 또 다른 흔들림이 있는걸 방어를 해주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잖아.
계를 잘 지킬 것 같으면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되는 것은 거의 반 이상은 잡아버립니다.
만날 여기서 오계 받고 나서 그냥 까먹어버립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했는데 똑 남의 흠집내는 소리만 하게 되는 거고, 뭘 죽이지마라 했는데 가다 보면 집에 가서 뭐하나 탁 잡아 죽이고. 계를 지키면 마음이 동요되는 것들은 어느 정도는 가라앉히게 됩니다. 그게 그렇게 가라앉아 져야지만 그다음에는 마음이 동요될 때 동요되는 것을 아는 것이지, 그 반 정도라도 잡아주지 못할 거 같으면 마음이 동요할 때는 동요하는 것조차도 모르게 됩니다. 그냥 끄달려 들어가 버립니다. 이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사띠-알아차릴 때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일어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는 것을 놓쳐버리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설혹 그 뒤에 것들을 다 놓쳐버리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어난 것들은 분명하게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말을 한다. 말을 할 때 말하는 처음에 말하는 때 그것들은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오늘은 내가 말하는 처음 시작 부분을 분명히 알고 말을 했으니까 그것으로 족했다 할 정도가 돼야 됩니다. 그뒤에는 뭐 그냥 감정에 빠져갖고 미주알 고주알 하더라도, 처음에는 그래도 내가 평온한 마음으로 저 사람에게 뭔가 도와줄려고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해야되겠다 마음먹고 말을 시작을 할 줄은 알아야 된다는 거라. 단추를 못 끼울 거 같으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생겨나는 것들 처음은 반드시 잡을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할 때도 코의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들이쉬는 처음에 들이쉬는 줄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대부분 어떻게 하느냐면 숨이 처음에 여기에서 쉬어졌다. 그런데 마음은 이 처음을 물라. 한참 쉬고 나서 들이쉬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그마만큼 늦어. 마음이 깨어있지 못하니까! 시작을 못 잡아내니까 당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사띠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처음 시작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걸 해야만이 나중에 끝나는 걸 알게 됩니다. 끝나는 것을 알아야만이 그다음에 뭐가 일어나는지를 아는 거라.
마음이 먼저 일어나는 건지, 뭔가 또 다른 것들이 시작되는 것들이 탁 일어날 거 같으면 금방 잡아져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걸 놓치지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처음에 일어나는 것들, 처음에 생겨나는 것들은 반드시 알아차릴려고 하라.
대부분 보면 처음에 하는 것들이 거의 연속돼있든지 아니면 좀 깁니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그 상태를 즐기면서 나아갈려고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어떠한 경우든지 처음 하는 것들, 처음 시작되는 것들, 호흡의 처음, 들이쉬는 것의 처음, 내쉬는 것의 처음, 그다음에 뭔가 손을 뻗친다면 손을 뻗칠 때의 처음 하는 것, 뭐든지 처음 하는 것들은 반드시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들이 나중에는 수행할 때는 굉장히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처음이 잘되면 그다음 마음은 사띠가 또렷해질 거 같으면 삼빠자나는 따라와집니다. 처음을 잘 할 거 같으면 나중에는 그 전체를 쭉 다 사띠삼빠자나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유념해서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칠각지 처음 사띠 삼보장가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보통 염각지라고 하는데 "염정각지" 입니다. 정확하게 할 거 같으면.
4페이지에 보면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때까지 다른 것들에 많이 시달려왔잖아. 다른 것 가지고 시간 다 보냈는데, 인제는 자기 거 좀 챙기며 살아야 안 되겠어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사띠 삼보장가는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떡하나? 칠각지 얘기할 때 얘기했죠? 사띠 삼보장가가 돼야만이 그다음 택법각지가 된다고. 그거는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은 사띠 삼보장가만 돼서 유지돼나갈 거 같으면 그다음 부분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택법각지이고, 노력하는 각지이고, 희각지이고 이런 식으로 넘어가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몰라 놔 놓으면 사띠를 그냥 아는 것이 사띠라고 생각할 거 같으면, 완전하게 될 때까지 계속 닦지 못할 거 같으면, 택법각지를 자기가 만들어냅니다.
택법이라고 할 거 같으면 자기가 대상을 선택한다고 생각합니다. '어, 이것은 뭐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뭣이구나' 하고 자꾸 지가 머리를 굴리는 거라. 전혀 택법은 그런 게 아닙니다. 택법은 그런 것들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자연스럽게 사띠로 인해서 분별돼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분별돼 나가는 것들을 택법각지라고 하는 것이지, 내가 마음을 굴려가지고 마음을 내가지고 '이것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전혀 택법각지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고, 택법각지 부분에서는 조금 설명할 부분은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제대로 좀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