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 (150625. 부산)

담마마-마까
2023-03-20
조회수 170

https://youtu.be/xkm8x6CN-Ss


◈ 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 (150625. 부산)

 

오늘은 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에 대한 것을 간추려가지고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수행이 잘 진척되는 것과 잘 진척되지 않는 것들, 또는 수행을 하다가 보면 어떤 능력들이 생기는 것과 생기지 않는 것들, 이런 것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친구 둘이서 얘기를 하다가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너는 왜 부처님한테 만날 가서 법문 듣고 공양올리고 그러느냐?” 그러니까 이 친구가 “부처님은 뛰어난 분이시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다 알고 우리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말하니까 다른 친구는 “우리 스승도 그렇다. 그러니까 너도 부처님한테만 가지말고 우리 스승한테도 가서 법문 듣고 공양올리고 그렇게 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할게.” 해가지고 한번은 자기 집에,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외도들이죠. 그 사도들을 초청을 합니다.

 

초청을 하는데 그 친구가 분명히 얘기했거든.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승도 과거 현재에 대한 것들을 훤히 아는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있다고.

그래서 초청을 할 때 집에다가 구덩이를 파놔 놓고 구덩이 위에다가 나무를 걸쳐가지고, 그 사도들을 앉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올라갔을 때는 안 내려앉는데 두 사람 세 사람이 계속 그 위의 자리에 앉다 보면 결국 구덩이에 푹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구덩이 밑에다가 똥물을 놔놔놓고 또 밖에는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바나나잎을 쭉 깔아놓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은 이 위험을 알고 이 자리에 안 앉을려고 할 것이다!'

 

여러분도 혹시 그런 적이 있습니까? 순간적으로 어? 저거 좀 위험하다! 하고 느낄 것 같으면 그걸 안 하든지 안 가든지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는 수행을 통해서 길러지는 능력들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나면, 나는 다시는 급작스럽게 그런 위험으로부터 내가 죽음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탁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쭉 진행이 되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그리해도 그런 능력들은 깨달음 하고는 관계가 없는 건데, 어쨌든 미래에 일어날 것들을 어느 정도 예측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스스로 방어하는 그런 역할들을 하는 게 수행의 힘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그 스승들을 초청을 했어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뭣도 모르고 거기에 쭉 앉아있다가 거기에 나뭇가지가 꺽어지면서 떨어져서 그 밑에 있는 구덩이에 있는 똥물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그래서 허우적거리면서 나오면서 막 욕을 합니다.

사람을 초청해놔 놓고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딨느냐, 기분 나쁘다 하면서 집을 나가는데 나가면서 미끄러운 걸 발라놨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냥 거기서 또 홱가닥 넘어지고 그렇게 했거든.

 

그러면서 이 친구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너의 스승들은 아직 과거나 미래 현재를 보는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스승이 어떻게 해탈에 이르도록 인도를 하겠느냐?”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그럼 너는 그 부처님은 그런 능력이 있다는데 부처님도 그런 능력이 있는지 한번 보자.”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도 그 친구가 초대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을 좋아하는 이 다른 친구가 부처님한테 가서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사실은 내가 요렇게 해가지고 골탕을 먹였습니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내 친구가 이렇게 골탕을 먹일 것입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그것으로부터 안전하다. 그것이 어떤 수단을 써서 나를 골탕먹일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으로부터 안전하다. 설혹 만약에 나를 불구덩이에 집어넣어가지고 태워죽일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불에 타 죽지 않는다.

확신있게 얘기합니다. 그게 장애들이 없는 사람들, 장애를 완전하게 극복해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겁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정도 그런 확신들을 가지고 있을까?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거 같네? 그래도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그런 능력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능력이 극대화된 분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부처님을 초청했는데, 식사 준비도 아무것도 안 해놔 놓고 오로지 부처님을 골탕먹일 것만 했는데도 부처님이 그걸 다 아시는 거라. 설혹 부처님이 그것에 대해서 무방비한 상태로 그 사실에 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부처님을 해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뜨거운데 여놔도 그 뜨거움을 모르고 있게 되는 거라. 아무리 불이 피어오르는 곳에 가더라도 불에 타지를 않는 거라.

 

사마디에 들어버리면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또 마음이 어떤 경우든지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부처님은 그런 능력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안전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수행을 해도 그런 능력이 생겨나질 않고, 어떤 분은 생겨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이 있게 될까? 장애들에 대한 것들을 완전하게 극복을 못할 경우에는, 보통 여러분들은 '다섯 가지 장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장애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런 능력들은 생겨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장애를 극복했다 해가지고 그 능력들이 또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를 개발하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단계! 칠각지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칠각지에 대해서 완전하게 그것이 개발되야 만이 그런 능력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어떤 거 어떤 겁니까?

감각적인 욕망, 분노, 혼침·졸음, 들뜸·후회, 의심

깨달음의 단계하고는 관계 없이 일단은 먼저 그 장애들로부터 극복이 돼야만이 수행을 순조롭게 해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칠각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염각지와 택법각지 이후가 되면 이 다섯 가지 장애는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다섯 가지 장애 중에 처음에 '까마라가(kāma-rāga)'라 해가지고, '애욕'에 대한 것.

그것들의 장애가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해야 될까?

애욕과 지혜는 정반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지혜가 있으면 애욕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으면 애욕에 물듭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애욕을 억제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스님들이 왜 출가를 하고 수행할 때 왜 여러분들에게 팔계를 지키라고 그럴까?

또는 집중수행하기 위해서 모든 가정생활을 버리고 집중수행처에 들어가서 그것만 수행을 하라고 그럴까? 처음부터 애욕이 일어날 조건들을 만들지 말아라는 겁니다. 애욕을 억제해야만이 지혜가 일어나집니다. 그것을 간과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애욕에 대한 것들은,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그것들을 억제하라.

억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좋은 것들이 일어나지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을 억제해서 그것들을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살려두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분노' '브야빠다(vyāpāda)' 라고 얘기합니다.

 

이 브야빠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일반적으로 화가 난 것이 아니고 '지나친 성냄'이 일어나는 겁니다. 콘트롤이 안 되는 그런 상태를 얘기합니다.

보통 성이 나면 그것을 억제를 못하는 경우들이 있고, 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마음에서는 성냄이 계속적으로 확 올라와가지고 그걸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표출 안 하면 안 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걸 브야빠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게 더 위험할까? 분노가 더 위험할까? 애욕이 더 위험할까?

애욕은 사그라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는 뭔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는 사그라들지를 않습니다. 뭔가 돌파구가 있어야만이 그 급격한 분노는 끝나게 되는 거라. 그러니 당연히 애욕보다 분노가 훨씬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그 위험성을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평상시에 성을 잘 안 내는 성격이라 하더라도 어떤 조건이 탁 맞아떨어지면 급격하게 화가 확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은 그 성냄을 극복을 못한 거라. 그러면 뭔가를 돌파구를 찾게 되는 거라. 자기 자신을 파괴하든지 아니면 다른 걸 파괴하든지.

 

성냄은, 이 분노라고 하는 것은, 급격하게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자꾸 찾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찾아서 이해할려고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이것을 극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급격한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 분노를 상대해야 되는 대상이 뭐라? 밖에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사람들은 그 급격한 분노가 일어나면 대상을 자꾸 잘못 찾아버린다는 거라.

자기 자신과 싸워야 되는 것이지 밖의 것들과 싸워야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거라. 성내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들에 대한 인식들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승부를 봐야되는 상대는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밖에 것에서 상대방을 찾을 것 같으면 분노는 표출돼버립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서 그 분노를 상대해야 된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 분노는 사그라들어버립니다. 그마만큼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을 굉장히 사랑합니다. 자기 자신을 해치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거라.

일어나는 순간에 그것을 자꾸 찾아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애욕보다도 급격한 분노가 참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들을 만들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티나-밋다(thīna-middha)'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혼침·졸음.

 

첫 번째, 두 번째는 수행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 극복이 돼나갑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수행을 어느 정도 해도 참 극복이 안 되는 것들이라.

고요함에 빠질려고 하는 것은 '티나'입니다.

수행만 하면 조불어버리는 것은 '밋다'입니다.

왜 고요해지려고 하는지를 잊어먹는다는 거라. 무엇 때문에 고요해지는데?

뭐 그냥 불편한 거 아니면 골치 아픈 것들을 잊기 위한 거라? 그건 수행 안 해도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수행한다는 것은 그것을 잊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편안해진 상태를 즐기기 위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하고 있는 거라.

 

'일어남' '사라짐' 그냥 단순하고 좋은 거라. 그냥 그렇게 해가지고 한 시간을 보내는 거라. 그거 한 시간 보내가지고 어떤 효과들이 있었는데? 없습니다!

그냥 한 시간을 그냥 허비한 겁니다. 그 장애에 빠져있었던 거라. 돌아앉아 수행하다가 그냥 잡니다. 한 시간 지나고 나서 개운하게는 일어납니다. 잔줄 모르고 자기 자신은 선정에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장애라는 생각들을 하질 않는다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대상은, 모든 것들은 상카라의 영역에 속해있습니다.

그래서 경에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삽베 상카라 삿사따 낫티(Sabbe Saṅkhārā sassatā natthi)"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현상들은 영원하고 실체가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거라.

 

수행할 때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냥 변하지 않고 그냥 있는 법이 없는 데도 그러고 있다는 거라. 이 몸만 변해가고 이 마음이 변해가고 하는 것은 알지만,

수행할 때는 그냥 그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들도, 변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인데도, 그냥 그러고 있다는 거라.

'상카라 삿사따 낫티' 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있고 물질적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들 모두 형성된 것들입니다. 그 형성된 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거라. 그런데도 그냥 1분 전에 일어난 것과 또 1분 후에 일어난 것이 똑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것은 '티나'입니다. 장애에 빠져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대상이 변하지 않으면 거기서 딱 스톱을 해야 돼는 거라.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아, 내가 지금 수행하면서 게으름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게으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어나서 경행을 하든지 아니면 대상을 늘려주든지 해가지고, 그 대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될 때, 그럴 때만이 대상은 들이쉬고 할 때 변하는 것을 압니다. 내쉴 때 변하는 것을 아는 거라.

 

수행에서 빠지기 쉬운 게 세 번째 이 티나-밋다입니다.

반드시 모든 현상들은, 형성된 상카라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뭐라고 그러느냐면 "빠빤짜 비라따 빠자(Papañcābhiratā pajā)"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현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하는 것들."

자기가 그걸 붙들고 있기 때문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걸 빠빤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개념화돼버렸다는 겁니다. 망상을 부리고 있든지 관념화시켜서 붙잡고 있게 됩니다.

 

그것은 장애라고 분명하게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럴 때는 빨리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자신의 마음에 게으른 것들이 분명하게 있게 됩니다. '아, 그래서 내가 게으름 부리고 있구나.'

왜? 생명은 어떤 경우든지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게으름을 부리려고 하게 됩니다. 머물려고 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게으름 부리려고 하고 있구나' 하고 알고 빨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웃닷짜-꾹꿋짜(uddhacca-kukkucca)' 그렇게 얘기합니다.

 

들뜸과 후회죠. 뭔가 서두르고 있다는 거라.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들, 그리고 후회라고 하는 것은 ‘아, 또 시간 또 헛되이 보냈네’ 하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수행을 하기 전에 '아, 이 한 시간 동안은 내가 분명하게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아차리겠다!' 하고 딱 결의하고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결의하고 들어가는 습관이 없을 거 같으면 대부분 보면 이 '웃닷짜-꾹꿋짜'라고 하는 것, 들떠버리든지 아니면 시간을 보내고 나서 '아, 내가 또 시간 또 헛되게 시간 보냈네' 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거라.

 

왜 그러냐 하면 수행이 어느 정도 몸과 마음에 대한 것들을 파악을 하고 나면 대부분은 들뜹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행이 될 때까지는 항상 그런 미세한 들뜸이 있어야만이 알아차림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들떠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대상으로 인해서 꾸준하게 있지 못하고 금방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버리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계속적으로 관찰하면 좋은데 금방 뭔가 대상들이 툭 툭 튀어나옵니다. 그럼 그것 또 계속 알아차립니다. 재미는 있어요. 들떠있으면 재미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알아차려나가는데, 무상한 성품으로 알아차리지는 못하는 거라.

그것도 하나의 장애라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들떠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딱 할 때 마음을 딱 먹어야 됩니다.

 

'내가 이 시간 동안은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분명하게 보리라!'

결의하는 마음들을 강하게 가지지 않으면 들뜨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럼 들떠지면은 나중에 또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만약에 수행하다가 자꾸 들떠져서, 대상들이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거기서 알아차림을 즉각 중단하고 마음을 봐야 됩니다. '아, 내가 무상한 성품을 볼려고 했구나. 무상한 성품을 다시 분명하게 보도록 해야 되겠다!' 다시 한번 더 결의를 딱 확고하게 하고, 대상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실제로는 보면 여러 가지 다른 대상들이 일어나는 것들은 쓸모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대상에 머물러있지 못해가지고 일어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거 알면 뭐할 건데? 소리 들린다, 들리는 거 알면 뭐할 건데? 그 소리들리는 걸 알 거 같으면 그 소리 들리는 게 무상한 성품으로 알아야 될 거 아니라?

그래서 들뜸에 빠지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강한 결의가 들뜸으로부터 일정하게 자신을 보호해주게 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다섯 번째 장애가 '위찌낏차(vicikicchā)' 라고 해서 '의심하는 것'.

 

의심은 조사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들이쉬었으면 내쉬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냥 자동적으로 들이쉬어졌으니까 그냥 내쉬어지는구나 하고 알 거 같으면 의심은 일어나게 됩니다.

들이쉬었으면 '어, 들이쉬는 것으로 인해서 탁 멈춰지고, 내가 내쉴려는 마음이 일어나서 내쉬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의심은 일어나지 않는데, 그 진행 과정들을 모른다는 거라.

들이쉬는 것이 딱 멈추고 내쉴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다음에 바로 내쉬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들을 쭉 계속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의심에는 좋은 의심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수행을 해나가다가 뭔가 다른 현상이 하나 탁 일어나집니다. 그러면은 보통 사람들은 '어, 이게 뭐지?' 하고 알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새롭게 일어난 것들을 탁 알려고 했을 때, 알려고 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그것을 탁 알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분명하게 탁 알았을 때는 의심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그걸 조사를 해나가는 상태가 됐을 때 그것은 좋은 의심이 되는 겁니다.

 

사띠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새로운 현상들이 일어났으면, 그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그 새로운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보고, 그리고 마음이 자동적으로 다시 또 원래 주대상으로 탁 돌아오는 것들을 알게 됐을 때, 그거는 객관적으로 내가 쭉 따라가면서 아는 겁니다. 그럴 때 일어나는 '어! 이게 뭐지?' 하고 하는 것은 그냥 그대로 따라가주면 됩니다. 그런 것은 좋은 의심에 들어갑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아는 능력들을 키워나가는 것들입니다. 나중에 칠각지 할 때 택법각지에 해당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들은 대부분 보면 그 의심하는 것들은 버려버려야 됩니다. 현상을 내가 끝까지 따라가지 못해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마만큼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태를 분명하게 따라갔을 때 그것이 효과가 있는 겁니다.

한순간에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배가 불러왔으면 불러왔다고 알아차리고, 꺼지면 꺼졌다고 알아차리는 것, 하나로써 알아차리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대상에 마음을 붙이는 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없습니다. 명칭을 붙이는 것과 꼭 마찬가지의 경우입니다. 명칭은 실제 위빳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단지 대상에 마음을 갖다 붙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명칭을 안 붙이고 하는데도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것을 '일어남' '사라짐'으로만 계속 안다? 빨리 내가 교정을 해야 됩니다.

 

이 다섯 가지가 있을 경우에는 능력들이 100퍼센트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장애가 제거된 상태에서 수행을 하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가장 유의해야 되는 것,

고요함에 빠지려고 하지 말아라.

그리고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서 들뜰려고 하지 말아라.

수행에서 최고 주의해야 되는 것이 이 두 가지입니다.

 

고요함에 빠져버리면은 망상 피우게 됩니다.

들떠버리게 될 거 같으면 대상에 대해서 안정돼서 그것에 탁 달라붙어있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사마디를 개발할 수도 없고,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통찰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것은 항상 수행에서 주의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그게 어느 정도 해나가고 나면,

그다음에는 여러분들이 「칠각지」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쭉 진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사띠 삼보장가, 염정각지.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 사띠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띠가 알아차려지는 것들이 변하지 않는다? 그럴 것 같으면 내가 앞에 얘기한 장애에 빠져있는 거라.

알아차리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변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도 변하고 알아차리는 대상도 변합니다.

대상과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알아차림을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다고 반드시 판단해야 됩니다.

중단하고 고요하게 마음을 하고 긴장된 몸의 상태들을 풀고,

그러고 나서 다시 정 안되면 자애수행을 먼저 하고.

 

십이연기에서 느낌 이전의 것들을 끊는 방법은 사무량심의 수행입니다.

자·비·희·사라고 하는 것, 끊임없이 자비희사의 수행들을 해나가면 무명이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엷어져 버립니다.

 

그다음에 뒤의 12연기의 접촉부터 시작하는 느낌으로 해서 시작되는 나머지 단계들은 위빳사나 수행에서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으로써 끊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거기서 12연기의 고리는 끊어져버립니다. 또는 싫은 마음이 일어났으면 싫은 마음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거기서 12연기의 고리는 끊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접촉부터 그 이후의 단계는 위빳사나 수행으로써 다스려나가야 되는데,

그 무명에서부터 접촉까지의 단계는 사념처로써 다스려나가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해나갈 때 사띠가 변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딱 중단하고 해야 되는 것은 사무량심을 하는 것입니다.

자애수행이라든지, 까루나 수행이라든지, 무디까, 우뻭카 수행이라든지, 그 수행들을 지속적으로 쭉 해나가다 보면 몸도 마음도 편안하고 고요하게 착 가라앉습니다.

가라앉으면 마음은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그럴 때 다시 대상에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유지해 나갈 때는, 사띠를 할 때는 어떤 경우든지 지금의 순간을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지금의 순간이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변하는 것으로써 반드시 다가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은 수행하면서도 망상을 시작합니다.

망상을 끊는 것도 사띠인 거고, 사띠가 되지 않으면 망상은 일어나게 됩니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써 사띠를 하지 말아라. 어떤 경우든지 사띠를, 알아차림을 바르게 했을 경우에는 그것이 속도가 느리든 그렇지 않으면 아주 빠르게 변하든, 그것은 능력의 차이인 것이고 변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들이쉬는 숨을 알아차리는 마음과 내쉬는 숨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분명하게 다른 것이다. 다른 조건에 인한 것이다 하는 것은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가벼워져있으면 그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앞에 얘기한 장애가 있을 거 같으면 그렇게 알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사띠삼보장가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 몸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몸은 이런 것이고 마음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데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다음에 담마위짜야 삼보장가, 택법각지.

 

이것은 택법각지라고 할 것 같으면 사람들이 분석하는 걸 얘기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분석이 아닙니다. 이 택법각지라는 것은 뭐냐면 체험의 세계입니다.

'아, 이렇게 분명하게 알았구나' 하고 체험하는 것들을 택법각지라고 합니다

이게 호흡이 있으니까 호흡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구나. 호흡을 분명히 탁 알아차리면 '어, 내가 호흡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 '어, 내가 알았네' 하고 알 때 이걸 택법각지라고 그럽니다.

지식의 세계에서 체험의 세계로 탁 넘어가는 상태를 택법각지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걸 뭘 잘못 이해할 것 같으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일어났구나, 또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이 있구나' 하고 그걸 분석하는 것이 택법각지라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택법각지는 어떤 경우든지 체험해서 아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띠가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으면 택법각지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띠가 분명하게 이어지면 무상한 성품으로 와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 무상한 성품으로 와서 알게 됐을 때 그것을 '아, 이렇게 내가 분명하게 아는구나' 하고 아는 걸 택법각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띠가 연속해서 이어지지 않으면 택법각지는 일어나질 않습니다.

택법각지라고 하는 것은 사띠의 연속들을 분명하게 체험하는 것! 그것이 택법각지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내가 스스로 자꾸 분석할려고 하고 하는 것들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 도의 마음이 생겼다고 분명하게 아는 것! 그런 것도 택법각지에는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그거는 일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도 그러한데 내가 분석해서 원인·결과를 따진다? 그것은 그냥 사념일 뿐입니다!

 

자! 그래서 택법각지가 일어나기 위한 것이 다섯 가지 기능, 오력(五力)! 오력이 조화롭게 되어야만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거칠게 뭔가를 알려고 하는 마음과 고요하게 쉬는 마음과 또 노력하려고 하는 마음과 지혜가 일어나는 마음과 이런 것들이 조화롭게 이렇게 균형을 맞춰지는 것은 알아차림 만으로 가능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이 조화는 이루어져버립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오력의 균형이 맞춰지지도 않고, 오력의 균형이 맞춰지지 않으면 택법각지는 일어나질 않는 겁니다.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택법각지라고 하는 것, 체험하는 분석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 그것을 내가 만들어서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까지는 수행에서는 굉장히 괴롭습니다.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가끔 수행은 힘들다 괴롭다 하는 것은 여기까지의 단계를 얘기합니다.

이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괴로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행은 진척이 됩니다. 괴로움이 많으면 수행은 훨씬 더 잘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이 단계를 지나서부터는 수행은 즐겁고 행복한 것이다 하는 사실로써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니까.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 괴로움의 단계를 탁 뛰어넘어버리고 나면 아, 내가 새로운 걸 체험했다 해서 일어나는 것이 희각지라는 삐띠입니다. 아, 인제는 재미있는 거라. 수행이. 대상들이 자꾸 일어나게됩니다. 아아, 삐띠 하기 전에 위리야부터.

 

위리야 삼보장가, 정진각지

 

노력이 자동적으로 되어갑니다.

그전에는 괴롭게 열심히 해야 되는데 이제부터는 노력이 균형을 딱 맞춰서 자동적으로 착착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면 보는 걸 분명하게 알고 들리면 들리는 걸 분명하게 알고,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해나가는데 노력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그냥 알아차려나가는 상태라는 거라. 이걸 위리야 삼보장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은 어떤 경우든지 게을러지려고 하는 마음들을 이겨버리는 상태, 자기 자신을 이긴 상태가 됩니다.

 

여러분은 뭘로 가지고 여러분들 자신을 이길 수 있을까? 노력의 힘이 그냥 자동적으로 일어날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가장 좋은 것은 오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오계를 극복해서 탁 이겨나가야만이 노력의 힘들이 유지가 돼나갑니다. 그 상태가 항상 유지돼야만이 앞에 두 개가 자동적으로 일어나집니다. 대상을 알아차리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분명하게 내가 인식하게 되고, 그 상태가 어떤 대상이든 그냥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특별하게 수행하는 것 같지 않아도 그 사람은 그냥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라는 거라.

 

이때부터 수행은 재미있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칠각지라고 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앞에 두 가지입니다.

 

사띠하고 담마 위짜야! 이 두 가지가 자꾸 갖춰지도록 해야 됩니다. 이 두 가지가 갖춰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위리야까지 또는 삐띠까지! 이 부분만 자꾸 갖춰지도록 것 같으면 그다음으로는 자동적으로 넘어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들은 다섯 가지, 어떤 스님들은 네 가지, 그렇게 얘기하는데, 대부분의 스님들은 두 가지를 먼저 갖춰라 하고 얘기합니다. 두 가지만 갖추면 그다음부터는 쉽게 넘어가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의 포인트를 분명하게 잡아야 되는 것이지, 그 포인트 없이 뭐 내가 지금 기쁨이 일어났다? 그거 좋아할 것 같으면 그냥 휩쓸려 버립니다.

지금 노력하는 것들이 잘 되고 있다, 노력하는 마음이 퍼뜩 일어난다, 그리하더라도 몸은 굉장히 피곤해져버립니다.

그래서 앞에 두 개를 항상 먼저 갖출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노력이라고 하는 각지를 갖추기 위해서 경에는 열 가지를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 수행 안 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

수행하지 않는 사람 멀리하는 것. 만약에 앉아서 수행하지 않고 잡담하고 있다. 멀리 해야 됩니다. 거기 괜히 끼어들어서 낄낄거리고 놀지 말아라는 거라. 노력의 힘들을 갖다가 유지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 안 하는 사람은 자꾸 멀리 하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아, 우리 이러지 말고 수행합시다.”

 

담마에 대한 토크, 그거 많이 하면 뭐할 건데? 법에 대한 기쁨을 느낄 수는 있고 그렇지만 그거는 간접적인 것들입니다. 그것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인 거라. 수행의 힘들을 북받쳐주기 위한 것들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게 지나쳐버리면 그것은 들뜸으로 가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수행하지 않는 자들을 멀리하는 것, 그게 노력의 힘들을 유지시켜주는 비결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삐띠 삼보장가, 기쁨! 희각지.

 

각각의 수행에서 기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딱 조심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기쁨이 세간적인 기쁨인가? 아니면 출세간적인 기쁨인가?

내가 뭔가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지고 기쁨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것이 세간적인 기쁨과 흡사하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버려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세간적인 기쁨이 아니고 출세간적인 기쁨이 되어야 됩니다. 그 기쁨으로 인해서 내 자신을 내세울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아, 내가 더 공부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게 출세간적인 기쁨인 거라. 더 수행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자꾸 일어나서 그냥 그대로 기쁨을 가지고 수행을 꾸준하게 해나가야 돼지, 좋아 갖고 쫒아와 갖고 "스님 스님 나 이거 봤습니다." 출세간적인 기쁨에서 그냥 끝나버리는 거라.

그것은 삐띠삼보장가가 아닙니다.

 

삐띠가 일어났을 때 항상 주의해야 되는 것이, 세간적인 기쁨으로 바뀌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 기쁨은 어떤 경우든지 출세간적인 기쁨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삐띠가 일어났는데 그것을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출세간적인 것들로써 바꾸지를 못하고 그것으로 성공하지 못해서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더 노력할려는 마음이 없고, 기쁨이 일어났을 때 일어나고 나서 그 뒤에 마음이 '어, 내가 한참 성장했다' 성숙했다 하는 것들이 없으면 '아, 내가 이 기쁨도 세간적인 기쁨으로 집착했구나' 하고 마음먹고 탁 버려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빳삿디 삼보장가, 경안각지 그렇게 얘기합니다.

 

"고요한 마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경안 각지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어떤 상황 어떤 조건이 되더라도 편안하게 받아들여서 지금 해야 될 일을 해나가는 것, 그게 경안 각지입니다.

조건들이 각각 변하기 때문에 각각의 조건들로 나에게 다가와집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거라.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들.

 

왜 경안각지가 삐띠 다음에 있는가? 잘 생각해보십시오.

기쁨도 출세간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여서 더욱 노력하려는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삐띠를 버려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그대로 받아들여서 내가 지금 오로지 할 것은 그냥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하고 그대로 그냥 지금 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삐띠 다음에 경안각지가 일어나집니다.

일상생활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최선을 다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어떠한 조건에서도 고요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경안각지를 일러가지고 '고요한 마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진장하게 닦아야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이 탄탄하게 다져지고 그 길이 쫙 났을 때 나에게는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사마디 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고요하게 딱 머무르게 되는 것들입니다.

삼매에 머물려면 삼매에 머물고, 그렇지 않고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찰나 삼매에 머물려면 찰나 삼매에 머물러서, 그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경안각지 다음에 사마디 삼보장가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다음에 사마디 삼보장가, 정각지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시간의 개념을 망각해버리는 영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찰나삼매가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만약에 몸이 피곤하다든지 몸이 어디 아프다든지 할 것 같으면 깊은 삼매에 들 수는 있겠지. 그것은 그것의 치유를 위한 것인 것뿐인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을 망각하는 시간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거라.

 

시간의 개념을 망각하는 상태가 이 사마디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현상을,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이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거라. 필요한 부분이고 그래서 경안각지가 일어나고 나면 그다음에 하나의 대상에 완전하게 몰입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그 대상외에는 다른 대상들이 전혀 나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사마디 삼보장가는 시간의 개념을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짧게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찰나 삼매로써 바꿔라.

 

그다음에 마지막이 우뻭카 삼보장가, 평정각지.

 

깨달음에 이르는 마지막 최종관문입니다. 최종 단계!

어떠한 경우이든지 평온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상태, 그러고 나면은 바로 지혜의 단계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이게 일곱 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칠각지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쉽게 말해서 처음에 사띠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장애를 극복해야 됩니다. 장애를 극복해야만이 사띠를 지속해나갈 수가 있고, 사띠를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려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띠를 지속해나가면서 그것을 사띠한 것들을 분명하게 체험하게 될 때, 그때 나는 인제 수행이 시작되었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것이 칠각지와 다섯 가지 장애의 관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길을 따라서 반드시 나아가도록 하고, 그다음에 습관적으로 수행하려고 하는 마음들은 빨리 버려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어디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단계를 빨리 뛰어넘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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