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기쁨(무디따)을 증장시키기 위한 열한 가지 방법 중 세 가지 (20140401)

담마마-마까
2023-03-20
조회수 169

https://youtu.be/oKL0hMOAq4M


* 기쁨을 증장시키기 위한 열한 가지 방법 중 세 가지 (20140401)

 

저번 시간에 이어서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법회 끝나고 나서 밥 먹으면 맛있게 먹고 즐겁고 그럴 겁니다. 또는 보고 싶은 영화를 봐도 즐거움을 느낍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느끼는 즐거움들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죠? 그 즐거움이 변해가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고통스러운 것을 동반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것과 반대로 기쁨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감각적인 기쁨은 즐거움 하고 비슷한 용어이기 때문에 같은 묶음으로 둡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칠각지에서 말하는 기쁨을 개발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감각적인 것들의 기쁨이나 즐거움을 개발하라는 것은 아니죠?

내가 뭔가를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그 사실에 대해서 탁 알았다. 그럴 것 같으면 굉장히 기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것들은 오래도록 유지가 돼나갑니다.

 

수행을 하면서 호흡을 관찰하다 보니까 '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사실이 있네' 하면서 그것을 알았다. 그러면은 어떻게 돼요? 기쁩니다. 마음이.

그래서 어떨 때는 기쁨에 겨워가지고 "스님! 스님! 새로운 걸 알았습니다!" 하고. 그냥 그 기쁨을 관찰하면 될 건데 오히려 그걸 놓쳐버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것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들뜨기도 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것을 알았다고 했을 때 그런 기쁨들을 누리게끔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 그 기쁨들은 여러분들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칠각지에 노력에 대한 것 다음에 기쁨이 있는 이유들이 어떤 경우든지 스스로 노력해서 그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수행상에서의 기쁨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떨 때 가끔씩 스님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뒤에 것만 자꾸 알려고 합니다. 기쁨이나 수행에서 우선 도와 과에 이르는 것 이것만 자꾸 바라고, 자기 스스로는 할려고 안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에게 자꾸 의지할려고 하는 거라.

부처님한테 의지하든, 아니면 부적에 의지하든, 이런 데에다 자꾸 마음을 뺏기게 되는 거라. 그게 자기한테 실제적으로 가지고 오는 것은 크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는 하기가 싫으니까 거기다 의지를 하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변함없는 기쁨을 누릴려고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리고 그 기쁨이 자기 것이 되려고 할 것 같으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수행 열심히 안 하고, 수행의 맛을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사마타 수행이면 니밋따를 통해서 기쁨을 얻게 될 것이고, 위빳사나 수행일 거 같으면 현상의 변하는 성질을 통해서 기쁨을 얻게 될 것이고, 수행 방법의 차이인 것뿐이지 본인 스스로가 열심히 노력을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경전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부처님한테 누군가가 물어봅니다.

탁발 했는데, "부처님 탁발도 못 했는데 배 안 고픕니까?"

"나는 기쁨을 먹고 산다. 그래서 괜찮다."

 

어떤 기쁨을 먹고 삽니까?

남은 아무리 도둑질해도 나는 도둑질 안 하고 사니까, 거기에 생각이 탁 미치면 기쁜 거야. 남이 아무리 화를 내고 싸우고 하더라도 나는 화내고 싸울 일 없으니까 거기에만 생각이 미치면 나는 기쁜 거라.

여러분도 혹시 그런 거 경험해 본 적 있어요? 한참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싸우는 모습들로 인해서 나는 그 속에 싸움에 끼이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그 싸움의 원인이 된 것들로부터 멀리 벗어났다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기쁨들. 혹시 가져봤는지 모르겠어요.

또는 내가 참 아끼고 하는 건데, 이거 그냥 누군가가 필요해서 탁 줘버렸다는 거라. 탁 줘버리니까 너무 기쁜 거라. 버려버림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 그 기쁨도 오래도록 가지게 됩니다.

 


부처님은 그러거든. "나는 하지 않아야 될 것들은 하지 않고, 버려버려야 될 것들은 버려버리고, 해야 될 것들은 하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기쁨들은 훨씬 크다"는 거라.

그래서 나는 그 기쁨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탁발 못해가지고 공양 하루 굶는 것 가지고 배고픔을 느끼고 해서 내가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가끔씩 여러분들도 그렇게 돼야 되는데. 하루 굶어도 그 기쁨이 있어서 별로 배고픔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가 돼야 되는데. 그죠?

 

마음이 변화된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 그리고 그 진리를 발견한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은 굉장히 큽니다. 그냥 감각적인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얻어지는 즐거움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됩니다.

 

그리해야만이 그 기쁨을 알아야만이 그다음에 다음 단계의 수행이 향상된 단계로 넘어가지게 되고, 그다음에 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거고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런 수행에서 얻어지는 기쁨들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라.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아무리 법을 많이 들었다, 또는 아무리 내가 경전을 많이 읽고 암송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은 크질 않다는 거라.

 

자! 「기쁨을 증장시키기 위한 열한 가지 방법」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경전에는 그게 아주 구절이 짧게 되어있습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담마에 대해서 생각하고, 상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다음 자신의 계율 도덕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쭉 열한 가지를 얘기를 합니다.

 

하나씩 한번 보겠습니다.

'부처님의 덕에 대해서 생각한다.'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arahaṁ,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ṁ, Buddho, Bhagavā."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 뿌리사 담마사라티, 삿타데와 마눗사낭, 붓도, 바가와" 이렇게 합니다.

 

아홉 가지 덕 중에 대중적으로 많이 하는 것들이 뭐냐 하면 "아라항(arahaṁ)" 이라고 하는 것하고 "붓도(buddho)" 라고 하는 것들을 많이 하라고 그럽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라항"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라항"을 탁 떠올리면 번뇌가 없이 깨끗한 부처님을 떠올릴 수가 있고, 또 "붓도"라고 하는 것을 떠올릴 것 같으면 완전하게 깨달은 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을 떠올리기에는 적당한 명호다 하고 얘길 합니다.

 

그와 반면에 그것을 떠올림으로 인해가지고 번뇌가 없이 깨끗한 상태이면 '그게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렇게 되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일으킬 수가 있고, '나도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일으킬 수가 있고, 그래서 그것을 본받아서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명호를 많이 떠올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단순히 그냥 명호만 떠올리면 어떻게 될까?

뭐 아라항이면 아라항, 붓도면 붓도. "아라항 아라항 아라항 아라항" 이렇게 계속 한다든지, "붓도 붓도 붓도 붓도" 한다든지.

 

신심이 강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찰싹 그것을 믿는 사람들. 그러니까 부처님에 대해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부처님을 떠올림으로 인해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하는 명호를 계속적으로 외움으로 인해가지고 기쁨이 일어나집니다. 그거는 부처님에 대한 확신이 서 있기 때문에 그 확신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변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의 기쁨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해도, 그 명칭을 끊임없이 외우고 되새김질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그렇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할 때 믿음이 있는 분이든, 없는 분이든 이렇게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아라항이든 붓도이든 그 명호를 외우면서, 그 명호가 가지는 의미들을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더러운 방바닥을 깨끗이 닦고 나니까 깨끗해지는 현상을 봤을 때, 방바닥 닦고 나면 굉장히 기쁨이 일어납니다. 내 속에서 번뇌가 일어났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번뇌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아주 기뻐집니다.

 

가끔씩 생각이 많이 일어날 때 사람들이 경행을 합니다. 반대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생각을 일으킬려고 경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 걷는 모습들만 보면 '아, 저 사람이 지금 경행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각을, 번뇌를 일으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보여집니다. 경행하는 모습만 봐도.

그런데 생각이 많이 일어났는데 경행을 하다가 보니까 그 생각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고 깨끗하게 되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경행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 경행하는 모습들이 아주 가벼워집니다. 아주 가벼워지고 그리고 부드러워지고 하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지금 경행을 하고 있지만 경행하는데 마음을 완전하게 몰입해 있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해서 알아차리고 있을 때,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서 변화되는 모습들 보고 있으니까, 거기서 기쁨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날 겨를이 없어집니다.

그럼 생각하고는 관계없이 그 변화되는 모습들을 갖다가 현상들을 알아차리면서 계속적으로 경행을 하다 보니까 더욱더 가벼워지게 되는 거라.

 

그런데 반대로 생각을 일으키기 위해서 아니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경행하는 사람들은 경행하는 모습들을 보면 일정합니다. 경행하는 속도들도 그렇고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들도 그렇고 일정합니다. 누가 옆에서 보면 금방 경행하다가도 이리 봅니다.

또는 경행을 하는 것들이 거의 대부분 비슷한 패턴들로 해서 자기 방식대로만 돌아가지고 합니다. 그거는 경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경행을 하면서 생각을 계속 끊임없이 일으키기 때문에 발이 걷는 속도라든지 발이 어떻게 디뎌지고 하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옆에 뭐가 부딪치는 것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관계없이 생각에다가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는 거라.

그러니 그런 사람들 경행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게 가벼워 보이겠어요?

 

대상에 대해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그 변화되는 모습들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릴 때는 경행하는 모습도 그렇게 바뀌어집니다.

 

붓도라고 하는 명호를 외운다고 하더라도 붓도에 대해서 의미를 회상을 하면서, 완전하게 깨달은 분이라고 마음을 두고, 그리고 그 깨달은 분의 모습들을 마음에 두고, 그리고 나도 그렇게 깨달음을 이루어야 되겠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점차적으로 갈 것 같으면, 붓도라는 명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명호로 인해서 바뀌어지는 마음의 현상에 알아차림을 두게 됩니다.

변화되는 모습들에다가 마음을 두게 될 것 같으면 그 마음에선 틀림없이 기쁨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명호만을 가지고 알아차림을 둘 것 같으면, 그 명호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은 아주 적습니다. 그리고 아주 더디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염불을 하고 있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명호를 외우고 염불을 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알아서 의미를 파악을 해서 그 의미대로 하는 것들이 가슴에 와 닿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냥 공염불하고 있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

경행을 하면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경행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것을 하고 있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 왜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느냐는 거라.

 

적어도 수행으로 인해서 내가 기쁨을 누려가지고 아, 이게 진짜 바른 것이고 이것이 내가 가야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확신을 가질 수 있게끔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더 큰 단계로 뛰어넘어 가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생멸하는 모습들로써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 단순한 명호를 외우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 상태가 된 것을 알 것 같으면 '아, 항상 맑고 깨끗한 저 부처님은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생각이 탁 미쳐야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저 분이 아주 위대하고 훌륭한 분으로 보이게 됩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외울 때는 그와 같이 해야 됩니다.

 

단순히 "붓도 붓도 붓도" 아니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이렇게만 외울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해가지고는 많은 이익을 얻기가 힘듭니다.

어떠한 경우도 그 대상에 완전하게 몰입돼서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로 인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쁨이 있어야 자기 것이 되게 됩니다.

 

경행을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되는 거고, 좌선 수행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더라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명호와 마찬가지로 대상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 대상은 그 대상에서 집중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이 일어나든, 아니면 그 대상이 변하는 모습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든, 그 기쁨이 일어나야만이 더욱더 수행하고 더욱더 노력할려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단순히 앉아서 좌선하기 위해서, 아니면 서서 경행하는 것, 실제로는 하지도 않으면서 그거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 오히려 굉장히 산만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이익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없는 일들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 명호를 외우더라도 그 명호나 염불로 인해서 자기 자신에게 기쁨이 일어나서 더욱더 노력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중단하라는 거라.

중단하고 다른 방법으로 기쁨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해서 그것에 대해서 확신이 들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경전 하나를 보더라도 그 경전을 봄으로 인해서 그 내용들이 '아, 이것이 진리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되고 그거로 인해서 마음의 기쁨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지, 그냥 그 내용대로 외우고 있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기쁨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게 기쁨을 일으키고 기쁨을 증장시키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회상을 하고 그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켜라 하는 겁니다.

 

여기에 305 페이지에 보면 그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번뇌를 파괴하여 제거하신 유일한 분이다.

또한 우리들에게 바른 청정을 끊임없이 설하신 분이시니 부처님은 항상 존경할 가치가 있는 분이시다.

시간을 초월한 담마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두 알고 성자가 되셨고, 그 모든 현상들을 깨달아서 모든 것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수많은 공덕을 넘치게 쌓으시고 모든 중생들 가운데 가장 높은 분이 되셨으며, 수많은 방편으로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분이시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이걸 이해를 하면서, 그 부처님에 대해서 먼저 이해하는 폭들을 넓혀야 됩니다. 부처님이 바라밀을 쌓았다고 할 것 같으면 나도 바라밀을 쌓아야 되는 것이고, 내가 붓다가 되기 위해서, 내가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연민심을 지녔다고 할 것 같으면 연민심을 지니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연민심을 지니게 됐을 때 일어나는 마음들 아, 그거는 참 기쁨이라는 거라. 그 기쁨이 일어났을 때 '나보다도 더 큰 연민심을 지닌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해서 생각이 미치면, 그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훨씬 더 커지게 된다는 거라.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그 길을 닦고 그 길을 가지 않을 것 같으면, 명호를 외운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게 인제 첫 번째 부분이고,

두 번째 담마, 상가에 대한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담마도 그 담마에 대한 걸 회상을 자꾸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스스로 확인을 해봐야 됩니다. 확인해보니까 아, 이것이 맞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담마의 소중함을 알게끔 된다는 거라.

 

상가도 마찬가지라.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서 깨달음에 이르신 성자들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고, 그 성자들이 가신 길들이 '아, 참 존경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는 생각이 미칠 것 같으면, 기쁨이 일어나서 그 성자들에 대해서 존경의 마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적어도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해서 확고하게 정립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설혹 내가 침체에 빠지고, 우울함에 빠지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회상함으로 인해서 기쁨들은 언제든지 일으킬 수가 있다는 거라.

 

기쁨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가장 먼저 우리 주위에서 이렇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붓다 담마 상가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그럽니다. '수행에서 어떤 경험들을 해서 기쁨들을 일으키는 것' 그것만 자꾸 추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몇년이 가도 그런 경험을 못 하면 그냥 금방 다른 수행법으로, 아니면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자기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방법이 잘못됐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길은 분명한 것입니다. 기쁨을 일으킬려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스스로의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가질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 와서 법을 배우고 수행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 기쁨들을 얻지 못하면 수행은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에 한 시간 수행을 통해서 그 기쁨들을 느낄 수가 없을 거 같으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괜히 시간 허비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러면 기쁨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들을 다시 배워서 그 방법대로 기쁨을 일으키도록 하라는 거라.

 

기쁨을 일으키기 위한 열한 가지 방법 중에 세 가지 방법을 먼저 얘기를 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여러분들에게 힘을 주고, 얼마나 여러분들을 지탱해주는지를 자꾸 경험하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아무리 지금 못나고 아무리 가진 게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내걸 누군가가 가져가고 빼앗긴다 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은 그 기쁨으로 인해서 행복을 느끼는 법을 알게 되고, 고요함을 즐길 줄 알게 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게 됩니다.

 

먼저 세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나머지 부분들을 차례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번 시간에 이어서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법회 끝나고 나서 밥 먹으면 맛있게 먹고 즐겁고 그럴 겁니다. 또는 보고 싶은 영화를 봐도 즐거움을 느낍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느끼는 즐거움들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죠? 그 즐거움이 변해가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고통스러운 것을 동반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것과 반대로 기쁨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감각적인 기쁨은 즐거움 하고 비슷한 용어이기 때문에 같은 묶음으로 둡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칠각지에서 말하는 기쁨을 개발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감각적인 것들의 기쁨이나 즐거움을 개발하라는 것은 아니죠?

내가 뭔가를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그 사실에 대해서 탁 알았다. 그럴 것 같으면 굉장히 기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것들은 오래도록 유지가 돼나갑니다.

 

수행을 하면서 호흡을 관찰하다 보니까 '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사실이 있네' 하면서 그것을 알았다. 그러면은 어떻게 돼요? 기쁩니다. 마음이.

그래서 어떨 때는 기쁨에 겨워가지고 "스님! 스님! 새로운 걸 알았습니다!" 하고. 그냥 그 기쁨을 관찰하면 될 건데 오히려 그걸 놓쳐버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것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들뜨기도 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것을 알았다고 했을 때 그런 기쁨들을 누리게끔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 그 기쁨들은 여러분들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칠각지에 노력에 대한 것 다음에 기쁨이 있는 이유들이 어떤 경우든지 스스로 노력해서 그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수행상에서의 기쁨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떨 때 가끔씩 스님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뒤에 것만 자꾸 알려고 합니다. 기쁨이나 수행에서 우선 도와 과에 이르는 것 이것만 자꾸 바라고, 자기 스스로는 할려고 안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에게 자꾸 의지할려고 하는 거라.

부처님한테 의지하든, 아니면 부적에 의지하든, 이런 데에다 자꾸 마음을 뺏기게 되는 거라. 그게 자기한테 실제적으로 가지고 오는 것은 크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는 하기가 싫으니까 거기다 의지를 하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변함없는 기쁨을 누릴려고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리고 그 기쁨이 자기 것이 되려고 할 것 같으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수행 열심히 안 하고, 수행의 맛을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사마타 수행이면 니밋따를 통해서 기쁨을 얻게 될 것이고, 위빳사나 수행일 거 같으면 현상의 변하는 성질을 통해서 기쁨을 얻게 될 것이고, 수행 방법의 차이인 것뿐이지 본인 스스로가 열심히 노력을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경전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부처님한테 누군가가 물어봅니다.

탁발 했는데, "부처님 탁발도 못 했는데 배 안 고픕니까?"

"나는 기쁨을 먹고 산다. 그래서 괜찮다."

 

어떤 기쁨을 먹고 삽니까?

남은 아무리 도둑질해도 나는 도둑질 안 하고 사니까, 거기에 생각이 탁 미치면 기쁜 거야. 남이 아무리 화를 내고 싸우고 하더라도 나는 화내고 싸울 일 없으니까 거기에만 생각이 미치면 나는 기쁜 거라.

여러분도 혹시 그런 거 경험해 본 적 있어요? 한참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싸우는 모습들로 인해서 나는 그 속에 싸움에 끼이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그 싸움의 원인이 된 것들로부터 멀리 벗어났다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기쁨들. 혹시 가져봤는지 모르겠어요.

또는 내가 참 아끼고 하는 건데, 이거 그냥 누군가가 필요해서 탁 줘버렸다는 거라. 탁 줘버리니까 너무 기쁜 거라. 버려버림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 그 기쁨도 오래도록 가지게 됩니다.

 


부처님은 그러거든. "나는 하지 않아야 될 것들은 하지 않고, 버려버려야 될 것들은 버려버리고, 해야 될 것들은 하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기쁨들은 훨씬 크다"는 거라.

그래서 나는 그 기쁨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탁발 못해가지고 공양 하루 굶는 것 가지고 배고픔을 느끼고 해서 내가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가끔씩 여러분들도 그렇게 돼야 되는데. 하루 굶어도 그 기쁨이 있어서 별로 배고픔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가 돼야 되는데. 그죠?

 

마음이 변화된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 그리고 그 진리를 발견한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은 굉장히 큽니다. 그냥 감각적인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얻어지는 즐거움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됩니다.

 

그리해야만이 그 기쁨을 알아야만이 그다음에 다음 단계의 수행이 향상된 단계로 넘어가지게 되고, 그다음에 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거고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런 수행에서 얻어지는 기쁨들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라.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아무리 법을 많이 들었다, 또는 아무리 내가 경전을 많이 읽고 암송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은 크질 않다는 거라.

 

자! 「기쁨을 증장시키기 위한 열한 가지 방법」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경전에는 그게 아주 구절이 짧게 되어있습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담마에 대해서 생각하고, 상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다음 자신의 계율 도덕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쭉 열한 가지를 얘기를 합니다.

 

하나씩 한번 보겠습니다.

'부처님의 덕에 대해서 생각한다.'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arahaṁ,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ṁ, Buddho, Bhagavā."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 뿌리사 담마사라티, 삿타데와 마눗사낭, 붓도, 바가와" 이렇게 합니다.

 

아홉 가지 덕 중에 대중적으로 많이 하는 것들이 뭐냐 하면 "아라항(arahaṁ)" 이라고 하는 것하고 "붓도(buddho)" 라고 하는 것들을 많이 하라고 그럽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라항"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라항"을 탁 떠올리면 번뇌가 없이 깨끗한 부처님을 떠올릴 수가 있고, 또 "붓도"라고 하는 것을 떠올릴 것 같으면 완전하게 깨달은 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을 떠올리기에는 적당한 명호다 하고 얘길 합니다.

 

그와 반면에 그것을 떠올림으로 인해가지고 번뇌가 없이 깨끗한 상태이면 '그게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렇게 되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일으킬 수가 있고, '나도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일으킬 수가 있고, 그래서 그것을 본받아서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명호를 많이 떠올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단순히 그냥 명호만 떠올리면 어떻게 될까?

뭐 아라항이면 아라항, 붓도면 붓도. "아라항 아라항 아라항 아라항" 이렇게 계속 한다든지, "붓도 붓도 붓도 붓도" 한다든지.

 

신심이 강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찰싹 그것을 믿는 사람들. 그러니까 부처님에 대해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부처님을 떠올림으로 인해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하는 명호를 계속적으로 외움으로 인해가지고 기쁨이 일어나집니다. 그거는 부처님에 대한 확신이 서 있기 때문에 그 확신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변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의 기쁨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해도, 그 명칭을 끊임없이 외우고 되새김질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그렇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할 때 믿음이 있는 분이든, 없는 분이든 이렇게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아라항이든 붓도이든 그 명호를 외우면서, 그 명호가 가지는 의미들을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더러운 방바닥을 깨끗이 닦고 나니까 깨끗해지는 현상을 봤을 때, 방바닥 닦고 나면 굉장히 기쁨이 일어납니다. 내 속에서 번뇌가 일어났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번뇌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아주 기뻐집니다.

 

가끔씩 생각이 많이 일어날 때 사람들이 경행을 합니다. 반대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생각을 일으킬려고 경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 걷는 모습들만 보면 '아, 저 사람이 지금 경행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각을, 번뇌를 일으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보여집니다. 경행하는 모습만 봐도.

그런데 생각이 많이 일어났는데 경행을 하다가 보니까 그 생각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고 깨끗하게 되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경행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 경행하는 모습들이 아주 가벼워집니다. 아주 가벼워지고 그리고 부드러워지고 하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지금 경행을 하고 있지만 경행하는데 마음을 완전하게 몰입해 있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해서 알아차리고 있을 때,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서 변화되는 모습들 보고 있으니까, 거기서 기쁨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날 겨를이 없어집니다.

그럼 생각하고는 관계없이 그 변화되는 모습들을 갖다가 현상들을 알아차리면서 계속적으로 경행을 하다 보니까 더욱더 가벼워지게 되는 거라.

 

그런데 반대로 생각을 일으키기 위해서 아니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경행하는 사람들은 경행하는 모습들을 보면 일정합니다. 경행하는 속도들도 그렇고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들도 그렇고 일정합니다. 누가 옆에서 보면 금방 경행하다가도 이리 봅니다.

또는 경행을 하는 것들이 거의 대부분 비슷한 패턴들로 해서 자기 방식대로만 돌아가지고 합니다. 그거는 경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경행을 하면서 생각을 계속 끊임없이 일으키기 때문에 발이 걷는 속도라든지 발이 어떻게 디뎌지고 하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옆에 뭐가 부딪치는 것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관계없이 생각에다가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는 거라.

그러니 그런 사람들 경행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게 가벼워 보이겠어요?

 

대상에 대해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그 변화되는 모습들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릴 때는 경행하는 모습도 그렇게 바뀌어집니다.

 

붓도라고 하는 명호를 외운다고 하더라도 붓도에 대해서 의미를 회상을 하면서, 완전하게 깨달은 분이라고 마음을 두고, 그리고 그 깨달은 분의 모습들을 마음에 두고, 그리고 나도 그렇게 깨달음을 이루어야 되겠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점차적으로 갈 것 같으면, 붓도라는 명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명호로 인해서 바뀌어지는 마음의 현상에 알아차림을 두게 됩니다.

변화되는 모습들에다가 마음을 두게 될 것 같으면 그 마음에선 틀림없이 기쁨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명호만을 가지고 알아차림을 둘 것 같으면, 그 명호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은 아주 적습니다. 그리고 아주 더디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염불을 하고 있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명호를 외우고 염불을 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알아서 의미를 파악을 해서 그 의미대로 하는 것들이 가슴에 와 닿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냥 공염불하고 있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

경행을 하면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경행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것을 하고 있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 왜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느냐는 거라.

 

적어도 수행으로 인해서 내가 기쁨을 누려가지고 아, 이게 진짜 바른 것이고 이것이 내가 가야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확신을 가질 수 있게끔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더 큰 단계로 뛰어넘어 가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생멸하는 모습들로써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 단순한 명호를 외우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 상태가 된 것을 알 것 같으면 '아, 항상 맑고 깨끗한 저 부처님은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생각이 탁 미쳐야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저 분이 아주 위대하고 훌륭한 분으로 보이게 됩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외울 때는 그와 같이 해야 됩니다.

 

단순히 "붓도 붓도 붓도" 아니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이렇게만 외울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해가지고는 많은 이익을 얻기가 힘듭니다.

어떠한 경우도 그 대상에 완전하게 몰입돼서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로 인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쁨이 있어야 자기 것이 되게 됩니다.

 

경행을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되는 거고, 좌선 수행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더라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명호와 마찬가지로 대상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 대상은 그 대상에서 집중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이 일어나든, 아니면 그 대상이 변하는 모습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든, 그 기쁨이 일어나야만이 더욱더 수행하고 더욱더 노력할려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단순히 앉아서 좌선하기 위해서, 아니면 서서 경행하는 것, 실제로는 하지도 않으면서 그거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 오히려 굉장히 산만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이익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없는 일들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 명호를 외우더라도 그 명호나 염불로 인해서 자기 자신에게 기쁨이 일어나서 더욱더 노력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중단하라는 거라.

중단하고 다른 방법으로 기쁨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해서 그것에 대해서 확신이 들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경전 하나를 보더라도 그 경전을 봄으로 인해서 그 내용들이 '아, 이것이 진리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되고 그거로 인해서 마음의 기쁨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지, 그냥 그 내용대로 외우고 있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기쁨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게 기쁨을 일으키고 기쁨을 증장시키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회상을 하고 그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켜라 하는 겁니다.

 

여기에 305 페이지에 보면 그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번뇌를 파괴하여 제거하신 유일한 분이다.

또한 우리들에게 바른 청정을 끊임없이 설하신 분이시니 부처님은 항상 존경할 가치가 있는 분이시다.

시간을 초월한 담마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두 알고 성자가 되셨고, 그 모든 현상들을 깨달아서 모든 것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수많은 공덕을 넘치게 쌓으시고 모든 중생들 가운데 가장 높은 분이 되셨으며, 수많은 방편으로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분이시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이걸 이해를 하면서, 그 부처님에 대해서 먼저 이해하는 폭들을 넓혀야 됩니다. 부처님이 바라밀을 쌓았다고 할 것 같으면 나도 바라밀을 쌓아야 되는 것이고, 내가 붓다가 되기 위해서, 내가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연민심을 지녔다고 할 것 같으면 연민심을 지니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연민심을 지니게 됐을 때 일어나는 마음들 아, 그거는 참 기쁨이라는 거라. 그 기쁨이 일어났을 때 '나보다도 더 큰 연민심을 지닌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해서 생각이 미치면, 그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훨씬 더 커지게 된다는 거라.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그 길을 닦고 그 길을 가지 않을 것 같으면, 명호를 외운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게 인제 첫 번째 부분이고,

두 번째 담마, 상가에 대한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담마도 그 담마에 대한 걸 회상을 자꾸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스스로 확인을 해봐야 됩니다. 확인해보니까 아, 이것이 맞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담마의 소중함을 알게끔 된다는 거라.

 

상가도 마찬가지라.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서 깨달음에 이르신 성자들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고, 그 성자들이 가신 길들이 '아, 참 존경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는 생각이 미칠 것 같으면, 기쁨이 일어나서 그 성자들에 대해서 존경의 마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적어도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해서 확고하게 정립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설혹 내가 침체에 빠지고, 우울함에 빠지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회상함으로 인해서 기쁨들은 언제든지 일으킬 수가 있다는 거라.

 

기쁨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가장 먼저 우리 주위에서 이렇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붓다 담마 상가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그럽니다. '수행에서 어떤 경험들을 해서 기쁨들을 일으키는 것' 그것만 자꾸 추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몇년이 가도 그런 경험을 못 하면 그냥 금방 다른 수행법으로, 아니면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자기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방법이 잘못됐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길은 분명한 것입니다. 기쁨을 일으킬려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스스로의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가질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 와서 법을 배우고 수행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 기쁨들을 얻지 못하면 수행은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에 한 시간 수행을 통해서 그 기쁨들을 느낄 수가 없을 거 같으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괜히 시간 허비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러면 기쁨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들을 다시 배워서 그 방법대로 기쁨을 일으키도록 하라는 거라.

 

기쁨을 일으키기 위한 열한 가지 방법 중에 세 가지 방법을 먼저 얘기를 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여러분들에게 힘을 주고, 얼마나 여러분들을 지탱해주는지를 자꾸 경험하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아무리 지금 못나고 아무리 가진 게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내걸 누군가가 가져가고 빼앗긴다 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은 그 기쁨으로 인해서 행복을 느끼는 법을 알게 되고, 고요함을 즐길 줄 알게 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게 됩니다.

 

먼저 세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나머지 부분들을 차례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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