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대념처경 22강. 심념처5 - 위대한 마음(선정에 든 마음) (20120526) / 왜 수행하는 것인가 [대념처경] (20131223. 법문교재)

담마마-마까
2021-06-21
조회수 680

https://youtu.be/pWFVF3pNptY

 

22강. 심념처 5- 위대한 마음(선정에 든 마음) (20120526)

 

오늘은 대념처경 부분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마음이 수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마학가따 찟따(mahaggata-citta)'라고 '위대한 마음이 있을 때는 위대한 마음이 있는줄 알아라. 위대한 마음이 없을 때는 위대한 마음이 없는줄 알아라.' 그렇게 경전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어떤 게 위대한 마음일까? 주석서에는 '선정에 든 마음' 그래서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에 든 마음을 위대한 마음이다." 또 위대하지 않은 마음은 "욕계의 마음을 위대하지 않은 마음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위대한 마음과 위대하지 않은 마음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 뭐냐면

'고뜨라부(Gotrabhū)'라고 하는 겁니다. '종성(種姓)'이라고 보통 얘기를 하죠.

부처님의 성을 쓴다는 그런 뜻입니다. '성자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자'라는 그러한 뜻으로서 쓰여집니다.

그래서 '고뜨라뷰' 다음에는 위빳사나 수행하시는 분들은 '수다원'에 이르게 되고, 사마타 수행하는 분들은 '초선정'에 들어가지고 그렇게 되죠.

"초선정부터 사선까지 혹은 오선까지를 색계 선정의 마음이다." 그다음에 그 위에 또 "무색계 네 개 선정의 마음이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정에 들었으면 그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했으니까 선정에 들어도 마음을 알기는 알아야 되네? 마음을 모르고 그냥 나는 선정삼매에 이르렀다 하면서 몽롱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한 시간 동안 기분 좋게 있다가 나오면 그거는 선정 아니지!

어떤 경우든지 선정에 있을 때는 그 선정에 있는 걸 분명하게 자기가 알게 됩니다. 아, 내가 진짜 기분 좋게 있으면서 어떤 어떤 현상들이 어떻게 어떻게 일어났다, 아니면 내가 참 즐거웠는데 그 즐거워하는 동안에 어떤 어떤 현상들이 있었다 하고 분명하게 자기가 알게 되는 거죠.

 

당연히 위빳사나 수행하시는 분들은 마음의 생멸을 보는 거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분명하게 볼 것이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지 않고 사마디 수행하는 분들도 그 마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만이 가능하다 하는 그런 얘깁니다.

보통 우리들이 살아가는 마음은 욕계 마음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욕망을 지니고 있는 마음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스님을 보고 있죠? 그러면 보는 거. 또 스님 소리 들리죠? 그럼 들리는 거, 또 맛보는 거 이런 것들을 욕계의 마음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정 삼매에 들면 안 들리죠? 안 보이죠? 그렇게 됩니까? 그렇게 돼야 됩니다!

삼매에 들어가 가지고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고 하는 다섯 개의 문은 꽉 닫혀버려야 됩니다. 의문(意門), 마음의 문만 열려져 있어서 마음으로 모든 것들을 인식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 대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마음으로만 인식이 돼야 되는 것이지.

여기 우리 태집님이 여기서 이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 '그걸 눈으로 봐가지고 걸어가고 있다 하고 인식하고 있는 상태'를 '나는 선정 삼매에 들었다' 할 거 같으면 그건 거짓말이라 하겠지.

쉽게 말하면 태집님 요기서 걸어가고 있든지 아니면 걸어가고 있지 않든지 관계하지 않고, 내 마음에서 태집님 요기서 요래 요래 걸어가고 있다 하는 걸 인식을 하고 있어야 된다는 거라. 이거 눈으로 보이는 거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그게 쉽게 말하면 색계 선정의 마음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어떤 대상을 만들어야 되죠! 사마디 형성을 하기 위해서! 그 사마디 형성이 되는 대상이 있으면, 네가(연경이) 많이 하고 있지? 원을 가지고. 원을 보고 하는 게 아니죠?

원을 보고 나서 눈을 딱 감습니다.

보지 않고 마음속에서 그 흰색 원을 그대로 내가 마음으로서만 인식을 하게끔 됩니다.

마음에서 인식을 한 상태에서 인식된 그 원이 점점 더 크게 보이기도 하고 뚜렷하게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이게 색깔이 변하기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 작용들을 합니다. 그럼 그걸 그대로 아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이 원하고 내 하고 가 딱 일치가 됐을 때, 이때가 초선정에 들게 되는 그런 상태가 되는거죠.

 

어쨌든 선정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보고 시작을 하더라도 그렇게 대상을 만들었더라도 보면 안 되는 거라. 들리는 것을 시작으로 대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들리면 안 되는 거고, 냄새 맡는 거도 마찬가지고 접촉도 마찬가지고.

안이비설신을 딱 막아버린 상태에서 수행은 시작이 되게끔 됩니다. 그렇죠! 이해가 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정 수행, 사마디 수행은 올바르게 해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선정 수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예를 들어서 경행을 이렇게 하면서 선정 수행을 한다.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죠! 왜 가능하지 않아요? 걸어가려면 뭔가 보아야 걸어갈 거 아냐! 그러면은 보면서 선정 수행을 한다는 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걸어가지 않고 딱 멈춰 서서 수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걸을 수가 없기때문에. 걸어가 가지고는 선정 수행을 할 수 없기때문에.

 

그 대신에 선정 삼매에 이르기 위해서 사마디(samādhi)를, 집중력을 좀 더 강하게 해 줄수는 있죠!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이 집중하는 힘들을 키워주기 위해서 어떻게 해요? 걷더라도 그냥 일상적으로 걷는 게 아니고 눈을 감고 걷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은, 의문(意門)은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력이 강해지는 거라. 눈을 감고 걸어가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이때까지 상태와 거꾸로 돌려버리는 반대의 작용.

수행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행하고 있는 것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는 앞으로 걸어가게 돼있는 건데 앞으로 걸어 안 가고 뒤로 거꾸로 걸어가는 거라. 뒤쪽으로. 눈이 뒤쪽에 달려있지 않으니까. 그럼 어떻게 돼요? 집중력은 훨씬 더 강해지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이 집중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들을 동원하기도 하는 겁니다.

 

결국 선정 삼매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고 하는 문은 꽉 닫아버려야 만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그런 조건을 만들어야 돼.

여기 와서도 소리가 안 들리는 조건을 만들고, 또 수행을 할 때는 보이지 않는 조건을 만들고, 냄새가 없는 조건을 만들고, 그래서 수행처에는 향 같은걸 안 피웁니다.

이런 어떤 조건들을 만드는 거라. 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 딱 한 시간 동안에 내가 방해를 받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서 방문 딱 걸어 잠그고, 딱 앉아가지고 눈 감고 내가 수행을 하게 되는 거라.

이 다섯 가지를 잘 닫고 수행을 하면 사마디(samādhi)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다섯 가지를 닫을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다섯 가지를 가지고 우리는 보통 뭘 합니까?

보는 거 가지고 뭐 봤다 할 거 같으면, 그냥 ‘어, 누가 보이네’ 이렇게만 인식하질 않죠! 뭐 해요?

오늘 꽃이 왔으니까 여기 꽃이 보이죠. 꽃이라고만 인식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예쁘네’ 합니다. 그렇죠! 그 얘기는 뭡니까? 구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쁘니 추접으니 뭐 어쩌니 저쩌니 이미 구별을 하고 있어.

그것만 합니까? 그거까지만 하면 그래도 괜찮지. ‘아이, 저거 우리 집에 가갈까?’ 요 생각까지도 하게 됩니다. 욕심을 내게끔 되죠. 더러운 걸 보면 ‘아이, 저거 버려버려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할 거고. 그 보이는 것은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들리는 것은 그렇게 또 인식을 안 합니까? 냄새 맡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이비설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겁니다. 접촉되는 것도 꼭 마찬가지고. 욕계 세상은 그렇게 사는 세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다섯 가지 문을 꽉 닫으려고 할 것 같으면 안 보인다고 해가지고 안 보이는 것만 있어야 되는 게 아니고, 그러한 마음의 작용을 끊어버려야 된다는 얘기라. 그래야만 색계 선정의 마음으로 넘어갈 거 아니라.

 

그래서 색계 선정으로 넘어가고 더 넘어서 무색계선정으로 넘어가려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게 뭘 해야 되겠어요?

'욕망' '까마 찬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욕망을 가지는 걸 딱 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끊어낼 수 있어요? 안 끊어지죠! 사마디 수행해도 이게 안 끊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안 끊어지면? 억눌러놔 놓을 수밖에 없어요.

쉽게 말하면 아무리 미운 놈이라 하더라도 내가 안 보면 안 미워. 안 보도록 만들어. 그건 눌러두는 거와 마찬가지라. 그런데 언젠가는 그 미운 놈이 내가 보면 미운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억눌러 놔 있었는데 다시 튀어나오게 되어있어. 그게 사마디(samādhi)의 한계라.

 

아무리 내가 삼매수행을 해서 삼매를 자유자재로 뭐 어쩌고 저쩌고 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그런 것들이라. '까마'를 완전히 끊어낼 수는 없는 거라. 억눌려 놓는 거지.

그럼 어쨌든 간에 평상시에 행동할 때도 욕망이 잘 일어나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야 되는 거라. 아예 안보든지 보더라도 이게 안 일어날 수 있도록 눌러줘야 돼. 어, 내가 이런 마음먹으면 안 되지 하고 자꾸 마음을 먹든지 뭔 수단을 쓰든지 간에 그렇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게 인제 첫 번째입니다. 욕심부리는 것 하지 않도록 하라.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욕심부리는 거 이거 별로 중요한 부분 아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가지고 내가 조금 이익이 있을지는 몰라도 내 수행하는 데는 전혀 도움 안 된다 하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되는 거라.

'내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데는 이게 독약과 마찬가지다' 그 생각을 자꾸 해야만이 이게 어쨌든 억눌러질 거 아니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성내는 것.

보통 일상적으로 짜증내고 하는 이런 거는 그것도 성내는 부분에 해당이 되는데, 그래도 그거는 좀 봐준다고 치자. 그런데 갑자기 버러럭 성을 내는 것. 좀 뭐라 할까 강도가 강한 것 이런 것. 자기 의견하고 안 맞을 경우라든지 이럴 거 같으면 그 사람의 입장에 대한 생각은 전혀 안 합니다. 그냥 먼저 지르고부터 봅니다.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견해에 매여버릴 거 같으면 급격하게 성내는 것들이 자꾸 버릇이 돼버립니다. 이걸 주의해야 되는 거라.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부정한 것들 불의한 것들을 보면 성이 나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자기가 얼마든지 삭힐 수가 있는 것들인데, 그걸로 인해서 말로써 튀어나오고 이런 거 잘 안 합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탁 일어나는 것들은 자기도 뭔 말 한지도 모르고 퍽 튀어나옵니다. 자기도 뭘 했는지도 모르고 뭘 해나가고 있어. 이걸 줄여야 되는 거라.

사마디를 형성하려고 할 것 같으면 성내는 것들을 자꾸 줄여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을 자꾸 가지게 되면 급격하게 성내는 것들은 일어나게 됩니다. 감정의 폭을 되도록이면 이렇게 줄이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죠? 그리하더라도 줄이고 억눌러놔야 됩니다. 무슨 뭐 내가 위대한 마음이라는 사마디를 형성하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수밖에 없는데 어떡할 거라. 억눌러라.

그래서 마음에서 급격한 것이 탁 일어나려고 할 거 같으면 입술을 콱 깨물든지 아니면 자기를 한번 쥐어박든지 뭘 하든지 간에 그 감정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수행을 해나가는데 그런 것들을 다스리지 못 할 거 같으면 위빳사나는 둘째치고 사마디 조차도 할 수가 없는 거라. 그런데 무슨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그것의 생멸을 볼 수 있는 위빳사나를 할 거라!

그러면 이미 꿈 깨야 되는 것들이라. 그걸 억누르지도 못하면서 그것의 성품을 본다? 그건 꿈에서나 가능한 얘기라는 거라. 그래서 평상시에라도 그런 것들을 자꾸 억눌러 놓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게으르지 않는 것.

이건 아마 여러분도 좀 잘할 거라. 좀 게으르지 않는 거는.

어쨌든 오늘 토요법회가 있다면 부처님 오신 날 월요일까지 쉬니까, 좀 쉬면 좋지 해서 오늘은 게으름 좀 피우고 월요일 어차피 올 거니까 안 오면 돼. 이게 게으름이거든. 집에서도 그런 일은 많이 하죠! 게을러지는 것들. 그런데도 꼬박꼬박 온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게으름을 억누르고 있다는 얘기라.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해도 어쨌든 몸을 움직여가지고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하려고 하는 거라.

사마디가 형성되려면 게으름을 이렇게 자꾸 몰아내야 됩니다. 내가 약속한 부분 그리고 해야 될 부분에 대해서는 하기 싫어도 어쨌든 자꾸 하려고 해야 되는 거라. 만들어내야 돼. 안 듣고 싶어도 ‘아, 그러면 안 돼’ 그러면서 자꾸.

 

어떨 때는 힘이 들어가지고 아, 죽을 거 같애. 어제도 새벽 다섯 시 정도 돼서 도착을 했는데, 저 보살님이 여덟시 조금 넘으면 오거든. 그러니까 내가 잘 시간이 별로 없어. 그래서 ‘아, 좀 늦게 왔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늦게 와지나. 그러고 나서 보살님들이 오고 나서 “내가 좀 누워있을게” 하고 나서도 못 누워있는 거라. 누워있기가 민망한 거라. ‘아이고 중이 돼갖고 조금 안 잤다고 해갖고 드러누워 갖고 거 또..’ 몸이 많이 피곤할 경우에는 그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리해도 ‘아, 내가 견딜 때까지는 견뎌보자’ 합니다.

오늘 또 이러고 나면 또 좀 있으면 내가 김해 가야 돼. 김해 가서 김해 그 스님하고 식구들 모여 있는데 가서 내가 얘기를 또 좀 해줘야 돼. 어떨 땐 ‘아이고 부탁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그래요. 어떨 땐 몸이 좀 딸리니까. 그런데도 안 된다 소리를 못하는 거라. 안 된다 소리를. 그러니까 “그럽시다.” 속으로는 ‘에고, 스님 그런 일 좀 안 만들면 얼마나 좋노’ 이러면서도 이미 허락을 했는데 우짤끼라? 그렇다고 해서 내가 또 안 갈 수가 있나. 어쩔 수 없이 또 가야 되는 거라. 게으름을 자꾸 스스로가 방지해야 되는 거라. 약속을 했으면 어쩔 수 없이 가야 되는 거라.

 

여러분들 토요법회가 있으니까, 토요일 날 와서 수행한다 생각하니까 어쨌든 오게 되는 거라. 와서 뭐 얼마나 수행할지는 모르지만은 요만큼 하더라도 어쨌든 자기 자신한테는 이겼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자꾸 만들어져 나가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 나태하고 게으른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우선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억누르게 되는 거라. 내가 현재 삼매를 계발하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먼저 해야 되는 거라.

 

나태와 게으름에 빠질 때는 가끔씩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 참 내가 뭔가와 접촉한다는 것이 참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는 것을 자꾸 인식을 해야 됩니다.

어떨 때 가끔씩 그럴 때가 있습니다. 손을 이렇게 잡았는데도 사마디가 형성이 되어있을 때는 이게 굉장히 따갑고 굉장히 아픕니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실제로 그렇거든. 수행을 하다 보면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일상생활에서는 모든 접촉하는 것이 그렇게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그 사실을 자꾸 인식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이 고통스러운 것들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거라. 내가 게으름을 부려가지고 이 고통스러운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면은 안 되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후회하는 것.

어쨌든 간에 뭐 기분이 좋을 때는 ‘헤~’ 하고 들떠있다가 뭔가 퍽 저질러 놨는데 ‘아차’ 싶은 것들. 들뜸과 후회는 쌍으로써 일어나지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이 돼 있지 못하면 항상 들뜨게 됩니다. 들뜬 상태에서 뭔가를 할 거 같으면 분명히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도 자꾸 억눌러야 되는 거라.

 

이런 것들도 욕계의 마음에 사로잡힐 때 일어나집니다.

뭔가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하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누가 나한테 싫은 소리를, 아니면 누가 나한테 좋은 소리를 안 했을 거 같으면 내가 싫어하는 마음도 일어나지도 않고 또 들뜨는 마음도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후회할 일도 안 생길 거라.

그런데 그런 조건들을 만들어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들뜸과 후회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하려면 그런 조건들을 되도록이면 안 만들어야 되는 라.

 

쉽게 말하면 자꾸 친구 만나러 가고, 자꾸 술 먹으러 가고, 이런 조건들을 자꾸 만들다 보면 그거는 사마디 형성하는 반대쪽으로 가고 있으면서 “아, 나는 그리하더라도 수행할 때는 또 열심히 또 수행한다” 그거는 꿈에서나 할까, 안 돼!

조건 자체를 그런 식으로 만들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좋은 도반들을 자꾸 만나려고 해야 되고, 자꾸 법을 들으려고 하고, 책 그런 법문집을 자꾸 읽으려고 하고, 그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아, 내가 수행해야 되겠다'는 쪽으로 일어나서 수행을 자꾸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수행이 부처님이 한 수행과 동일하다 하는 확신을 자꾸 가져야 되는거고.

 

이런 식으로 나아가야만 그게 가능한 것이지 그 반대 방향으로 자꾸 나아가 가지고는 어떻게 사마디를 형성할 거라? 억누를 때는 억누르고, 그리고 억눌리지 않을 때는 그 욕망에 따라서 그냥 행하겠다? 그거는 있을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 의심하는 것. 내가 이래가 될까 말까 이런 것들.

그것도 욕계의 세계에 있을 때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욕계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고 하는 것을 닫아버리라. 그러면 틀림없이 또 그렇게 자꾸 억누르다 보면 색계라고 하는 선정·사마디의 상태와 점점 더 가까이 가게끔 됩니다. 닮아있게끔 됩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합니다.

삼매의 상태를 경험하기 위해서 자아를 잊은 듯이 미친 듯이 춤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그래 놔놓고 “아, 내가 삼매를 경험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요가할 경우에도 똑 마찬가지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거는 사마디의 상태가 아니고, 욕망을 가지고 사마디를 형성하려면 어떤 경우에도 형성이 안 됩니다. '사마디와 닮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욕망을 가지고 사마디를 형성하려면 사마디와 닮은 상태까지는 갈 수 있을진 몰라도 그 이상을 넘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욕망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야만이 사마디에 들어가진다 하는 겁니다.

 

오늘은 조금만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합시다.



* 왜 수행하는 것인가 [대념처경] (20131223. 법문교재)

 

수행하는 것에 의해 어떠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요?

대념처경(mahāsatipaṭṭhāna sutta)은 수행 방법을 아울러서 설한 경전입니다.

대념처경에서는 수행법을 (1)kāy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몸에 대한 관찰로 알아차림을 확립함, 신념처)

(2)vedan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느낌에 대한 관찰로 알아차림을 확립함, 수념처)

(3)citt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마음에 대한 관찰로 알아차림을 확립함, 심념처)

(4)dhamm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한 관찰로 알아차림을 확립함, 법념처)의 4종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실천하고 있는 수행법은 모두 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념처경을 부처님은 어디서 설하셨는지, 누구에게 설하셨는지 살펴보면, 「꾸루(kuru)국의 깜마사담마(kammāsadhamma)」라고 경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꾸루국의 깜마사담마」는 현재 인도 뉴델리에서 가까운 「산타나가라」라는 지방입니다. 역사적인 문헌이나 비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부처님은 뉴델리의 산타나가라 지방에서 이런 중요한 가르침을 설했을까요? 이 거리, 이 마을, 이 지방을 선택해 설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처님이 깨달으신 붓다가야도 아니고, 초전법륜을 설하신 바라나시도 아닙니다.

이 장소가 선택되었던 이유는 꾸루국의 깜마사담마는 부처님 생전에 기후가 좋고 과일이나 야채도 풍부한 지방이었습니다. 토양이 비옥해서 과수에 필요한 영양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기후도 좋고 식료품도 풍부해서 먹을거리가 충분한 꾸루국의 사람들은 신체도 마음도 건강했습니다.

뉴델리의 근처 빤쟈비 지방은 빤쟈비인이 사는 곳입니다. 그들은 키도 크고, 몸도 튼튼하며 매우 건강합니다. 이 지방은 물도 토양도 풍부한 곳이고, 사람들도 건강해 식료품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기에, 한 사람의 인간에게 필요한 2개의 힘, 즉 「체력과 지력」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체력과 지력」 2개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체력이 있기 때문에 몸이 건강하여 마음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업도 지혜도 좋았습니다.

마음이 밝고 건강한 사람이 수행한다면 법을 손에 넣기 쉽습니다. 왜 부처님이 대념처경을 이 지방에서 설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대념처경의 서문에,

 

“Ekāyano ayaṁ bhikkhave maggo sattānaṁ visuddhiyā, sokaparidevānaṁ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idaṁ cattāro satipaṭṭhānā.(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막고- 삿따-낭 위숫디야-, 소-까빠리데-와-낭 사마띡까마-야, 둑카도-마낫사-낭 앗탕가마-야, 냐-얏사 아디가마-야, 닙바-낫사 삿치끼리야-야, 야디당 짯따-로- 사띠빳타-나-.)

 

"빅쿠들이여!" 바로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들을 모두 넘어서기 위한, 괴로움과 근심들의 소멸을 위한,

정확한 도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닙바나의 실현을 위한 것이니,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이것은 사념처를 실천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 즉 수행하면 어떠한 이익이 있는지, 왜 수행하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이 됩니다.

 

① 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왜 수행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먼저 “sattānaṁ visuddhiyā(중생들의 청정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희로애락과 죽음이 있는 중생의 삶에서 번뇌를 없애어 “청정하게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즉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번뇌를 없앤다고 해도 누구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합니까? “일체 중생들의 모든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번뇌라는 것은 마음의 더러움입니다. 마음을 더럽히고, 퇴색시켜, 흐리게 하는 것이 번뇌의 성질입니다.

 

번뇌는 요약하면 탐·진·치의 3가지입니다.

갖고 싶다는 탐욕, 탐욕에 덮여 있을 때, 탐욕의 마음에 지배되고 있을 때,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탐욕과 갈망에 덮여 있을 때 맑고 깨끗한 마음의 상태는 자취를 감추어 버립니다. 순백의 마음을 더러움으로 물들여 버리는 것이 탐욕의 번뇌입니다. 탐욕 때문에 마음은 더러워져 버립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이 왜 더러워지는가 하면 진(분노)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마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온화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한창 타오르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 흉하고 추악합니다. 분노의 어둠에 덮여 있을 때에 자신의 모습을 보면 더러워져 있는 것이 분명히 보입니다.

진리를 볼 수가 없는 어리석음, 무지에도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탐, 진, 치의 3종류의 번뇌가 자신으로부터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탐욕도 있고, 분노도 있고,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이렇게 범부중생들은 각각, 탐욕도, 분노도, 무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가져도 해로운데 모두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탐욕을 지닌 사람도 엄청나고, 분노를 지닌 사람도 엄청나고, 진리를 이해할 수 없는 무지한 사람도 나의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불선한 성질이 이렇게도 많기 때문에, 불선한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ekāyano ayaṁ bhikkhave maggo sattānaṁ visuddhiyā(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막고- 삿따-낭 위숫디야-)”

ekāyano(에까야노) 오직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다른 선택사항은 없습니다.

 

번뇌를 없애고 청정하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수행하는 길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탐욕을 없애고 싶다면 수행해야 하고, 분노를 없애고 싶다면 수행해야 하고, 무지를 없애고 싶다면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하는 것으로 수행자의 탐욕은 적게 됩니다. 분노도 적게 됩니다. 무지도 적게 됩니다.

긴 시간도 필요 없습니다. 수행한 후 일주일이 지나고, 10일이 지나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집을 나왔을 때의 마음과 집으로 돌아갈 때의 마음은 같지는 않습니다. 탐욕도 줄어들었고, 분노도 줄어들었고, 무지도 줄어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맑고 깨끗하게 된 마음은 금방 또다시 더러워져 버립니다. 또 더러워졌다면 다시 수행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복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이 방법, 이 길만이 있습니다. 성인은 청정한 사람입니다. 「성인」이란 「청정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인과 반대로 범부는 더러워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더러워진 사람이 범부이고, 청정한 사람이 성인입니다. 청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마음의 더러움을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② 다음으로 “sokaparidevānaṁ samatikkamāya(소-까빠리데-와-낭 사마띡까마-야)” 「다양한 근심·슬픔과 비탄을 넘어서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속에서 근심하고 있는 것이 soka(근심, 슬픔), 눈물을 흘려 슬퍼하는 것이 parideva(비탄)입니다. 마음속의 고민으로 슬픔이 격렬해졌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슬픔으로부터 비탄이 됩니다. 슬픔도 비탄도 고민하는 것입니다.

한탄하고, 슬퍼하고, 우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수행하는가 하는 물음에 “슬픔과 비탄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근심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걱정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일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회, 가족, 건강, 공부와 매일 마주보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는 누구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슬픔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근심없이 안심하며 살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는 그의 일로 고민하고, 자신은 자신의 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말 온화할 것 같이 보이는 사람도, 그 본인은 고민하지 않는 체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연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속에서는 모두 고민하고 있습니다.

걱정하는 soka, 고민하는 soka를 없애기 위해서, 비탄하는 parideva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 시대에 산따띠 대신은 어느 전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어 국왕으로부터 칭찬받고, 왕의 영화, 왕의 행복을 7일간 누릴 권리가 부여되었습니다. 진짜 국왕 같이 그 영화를 7일간 누리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그 7일간 산따띠 대신은 주어진 권리를 마음껏 활용하며 최대한으로 누렸습니다. 7일 꼬박 먹고 마시고 즐겼습니다. 그런 그의 옆에는 그가 사랑하는 젊은 무희가 함께 있었습니다. 젊고 용모 단정하고 언행이 부드러운 무희였습니다. 산따띠 대신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젊은 무희와 7일간 넋을 잃고 즐겼지만, 7일째 되던 날 그 무희는 그의 눈앞에서 돌연 죽고 말았습니다. 건강했는데 갑자기 죽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버리면 누구든지 슬퍼질 것입니다.

 

산따띠 대신은 슬픔이 너무 깊어 어찌해도 괴로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을 찾아가 「부처님! 당신의 제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근심을 지우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근심을 지우는 법을 말해달라고 부탁받은 부처님은 그를 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길지도 않은 매우 짧은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이익으로 산따띠 대신을 범부로부터 아라한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법을 들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근심하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의 근심을 지워 없애서 아라한에 이르도록 만든 위력을 가진 부처님의 설법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Yaṁ pubbe taṁ visosehi, pacchā te māhu kiñcanaṁ. Majjhe ce no gahessasi, upasanto carissasi.”입니다.

 

“yaṁ pubbe taṁ visosehi(양 뿝베- 땅 위소-세-히)”…지난 과거의 일, 옛일에 대해 반복해서 생각하지 말게!

부처님은 근심이 왜 일어나는지, 마음속에 고민은 왜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근심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의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라고 하는 것은 이미 끝나 버린 사건입니다.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어떻게 먹고 있었는지, 어떻게 즐기고 있었는가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그것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생각하여 고민합니다. 젊은 무희와 7일간 꼬박 즐겼습니다. 7일간 꼬박 영화와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현재는 무희는 죽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해도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옛날같이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옛날같이 그렇게 살고 싶다고, 또 즐기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생각해서 근심을 일으키고 있는 산따띠 대신에게 근심을 지우기 위해서는 지난 과거의 일, 옛일에 대해 반복해서 생각하지 않도록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근심이 사라지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여러분도 기억하십시오.

지난 과거의 일, 옛일에 대해 반복해서 생각하지 않게끔.

지나가 버린 옛날, 일어나 버렸던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서 괴로워하지 않게끔.

부처님의 이 가르침은 근심을 지우는 원인으로도 되고, 닙바나(열반)에 이르는 원인으로도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의 하나입니다. 보통 범부로부터 아라한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법을 짧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수행할 경우에는 과거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나 버린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생각해도 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과거의 일을 생각하지 않도록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pacchā te māhu kiñcanaṁ(빳차- 떼- 마-후 낀짜낭)”…미래의 일, 장래를 예측해서 괴로워하지 말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미리 생각해서 마음에 고민을 일으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일어날지도 모르고,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기에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확실치 않은, 불확실한 일을 생각하고, 그것이 아득한 멀리 있는데도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러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라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미래라고 하는 것은 아직 방문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내년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내년에 무엇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다음 달에 무엇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릅니다.

아직 모르는 것을 생각해서 「다음 달이 되면 이렇게 하자」 「이러할 것이다」 「내년은 이러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일어날까」 등을 생각해서 고민하고 있으면 근심이 됩니다.

 

「산따띠 대신이여! 당신의 근심을 없애고 싶으면, 미래의 일도 생각해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무희가 죽어 버려 나는 누구와 살아야 하나! 누가 나를 지켜줄 수 있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다면 누구와 살면 좋지! 중요한 때에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산따띠 대신이여! 당신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도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majjhe ce no gahessati(맛제- 쩨- 노- 가헷사띠)”…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지금 현재 늘 알아차리게!

근심을 없애고 싶다면 생겨난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십시오. 일어나는 몸과 마음을 반복해서 빈틈없이 알아차리십시오.

지금 현재의 시간에 일어난 몸과 마음을 반복해서 몇 번이고 알아차리십시오. 즉 과거에 남아있지 마십시오. 과거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미래에 미리 가지 마십시오.

 

어디에 없으면 안 됩니까? 현재에 없으면 안 됩니다. 지금 순간이 현재입니다. 지금 방문하고 있는 시간이 현재입니다. 우리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과거는 사람도 다른 것, 상황도 다른 것입니다. 자신이 있는 것은 현재입니다. 자신이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미래일지라도 미래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이 생깁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의 행복, 몸의 행복을 확실히 서로 맞물리게 해서 근심을 완전하게 없애며 살고 싶다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반복해서 알아차리면서 현재에 살아 주십시오.

 

현재의 상황 속에 일어나고 나타나고 있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반복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리십시오.

현재의 시간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십시오.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색법(몸의 현상)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명법(마음의 현상)입니다.

 

현재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자기 자신의 신체를 관찰해보고 뜨거움이나 차가움 등의 성질을 찾아냈다면 「몸의 현상」이라고 알아차립니다. 마음의 상태를 보고 무엇인가 걱정거리를 찾아냈다면 「마음의 현상」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생각하고, 기대하는 마음은 알아차립니다. 생각하고, 알고 있는 것은 마음입니다.

반복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며 현재의 순간에 살아 있는 사람은 근심을 떠날 것입니다. 근심으로부터 떨어지고 싶다면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수행하는가 하면 근심을 없애기 위해서 합니다.

 

근심은 누구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근심을 없애 마음의 행복을 얻고 싶어 여러 가지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먹을 수 있으면 행복하게 되는가! 해서 좋은 것을 먹어도 먹을 때마다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으면, 좋은 집에 살 수 있으면 행복하게 되고, 마음이 밝아지는가 하면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근심으로부터 완전하게 떨어져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현재 일어나는 몸과 마음을 반복해서 알아차릴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산따띠 대신에게 말하신 법은 이 3가지입니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생각하지 마라.

미래를 미리 생각하지 마라.

현재에 살며 알아차림하라.

 

“evaṁ santo carissasi(에-왕 산또- 짜릿사시)”…이와 같이 실천할 수 있으면 근심은 사라지느니라!

근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근심과 비탄을 넘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탄이라고 하는 것은 울어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울고 있는 사람들 중에 울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울고 싶지는 않습니다. 운다는 것은 슬퍼져 마음이 괴로워지기 때문에 눈물이 떨어집니다. 울고 있는 사람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행복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 눈물을 지우기 위해서,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전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슬픈 사건과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을 꼽으라면 빠따짜라(Patācārā)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남편도 죽었습니다. 아이들도 죽었습니다. 하루 사이에 말입니다. 아이들과 남편도 죽어 부모님이 있는 고향을 의지해 돌아가려고 했는데 부모님, 친척, 형제자매, 전원이 죽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도 무엇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집도 불타 없어지고, 집안의 재산, 집밖의 재산 등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의지할 친척도 없고, 형제자매도 없고, 부모님도 없는, 이 슬픈 사건에 노출당한 빠따짜라는 격렬하게 비탄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괴로워했는가라고 하면 발광해서 반 미쳐버린 상태였습니다. 괴로움이 너무나 커 옷조차 걸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 큰 고민으로 나체가 되어 길 위를 달려 뛰고 울부짖으면서 빠따짜라는 부처님이 계신 곳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주위의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있을 때 그 뒤로 빠따짜라가 들어 왔습니다.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고 먼지와 땀과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인 것을 부처님이 보시고 멀리서 주의깊게 말씀하셨습니다.

 

“bhaginī satiṁ paṭilābha(바기니- 사띵 빠띨라-바!)”

사랑하는 딸 빠따짜라여! 주의 깊게 사띠를 일으켜 세우세요!

부처님의 그 한마디를 듣고 빠따짜라의 근심과 비탄은 완전하게 사라져 없어졌습니다. 근심은 진정되었습니다. 눈물도 멈추었습니다.

왜지라고 말하면 그녀는 조심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근심과 비탄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에는 사띠(알아차림)를 손 놓고 있었습니다. 부끄럽다고 하는 것도 알지 않고, 무섭다고 하는 것도 알지 않고,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알지 않고, 입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모르는 한사람의 광인이 된 빠따짜라는 다시 사띠(알아차림)를 되찾았을 때에 한사람의 선녀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울지 않습니다. 눈물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그녀에게 말한 말은 우리가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행의 요점입니다.

요점은 사띠(알아차림)입니다. ‘담마(법)의 요점은 사띠(알아차림)이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의 요점은 약속말(katikā gadi, 까띠까- 가디)입니다. 얼마나 말을 많이 해도 그 말의 요점이 되는 것은 약속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사용하고, 많은 법을 듣지만, 그 모든 법의 요점은 사띠(알아차림)의 법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 중에서 사띠(알아차림)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45년간, 45 우안거 기간 동안 매일 “appamādena sampādetha(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방일하지 말고, 가볍게 보지 말고, 사띠(알아차림)가 충만하도록 수행하십시오! 라고 하시며 사띠를 가지도록 권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여! 주의 깊게 사띠(알아차림)를 일으켜 세우세요!”

이와 같이 조심해서 알아차림을 유지한다는 것이 우리가 수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명상하고 있는,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주의 깊게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까?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며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님! 우리는 수행하고 싶지만, 많은 것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짧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어떻게 수행하면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몸과 마음을 주의 깊게 알아차리십시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몸과 마음, 이 2가지에 주의를 기울여 알아차리면 수행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몸을 토대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마음으로서 알게 됩니다.

 

지금 자신의 몸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30분, 1시간 시간이 흐르면 몸의 아래쪽에 「뜨겁다」라는 성질이 나타납니다. 바닥에 접하고 있는 부분이 뜨겁다고 하는 것은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뜨겁다고 하는 성질을 우리는 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몸」「마음」이라고 나누어 보면 그것을 가지고「남자」「여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뜨거운 성질을 우리는 「희다」「검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가볍다」「무겁다」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뜨겁다고 하는 그 성질만이 있습니다. 몸에 일어나고 있는 성질에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차가움」이 있습니다. 딱딱한, 저리는 성질 등이 있습니다. 앉는 시간이 조금 길어지면 굳어져 옵니다.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질을 우리는 「굳어지고 있는 것은 손이다」 「굳어지고 있는 것은 다리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굳어지는 성질을 두고 「나다」「너다」라고 나눌 수 없습니다. 「늙었다」「젊었다」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개인, 중생, 남자, 여자가 아니라, 개별의 성질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상태를 몸이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 마음을 주의 깊게 알아차린다는 것은 마음이 어디에 가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불선의 원인이 되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불선이라고 올바르게 알고, 선행의 원인이 되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선행이라고 올바르게 알아, 마음을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 이 두 가지를 주의 깊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근심, 비탄은 없어집니다. 왜 우리에게 근심과 비탄이 생기는가 하면, 주위의 것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잘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분 나빠지는 것,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 마음이 불행하게 되는 것, 우는 것, 걱정하는 것은 무엇에 의존하기 때문에 생기고, 주위의 것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위에 있는 생명이 있는 것이든 생명이 없는 것들을 원인으로서 우리의 근심과 비탄은 생겨 일어납니다. 고민하고 울고 걱정합니다.

 

지금 수행하고 있을 때는 주위의 것들에 의존하는 것이 없도록 알아차려야 합니다. 주위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차려 스스로 살아야 합니다. 몸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봅니다. 마음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봅니다.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주의 깊게 알아차려 수행한다면 근심과 비탄은 진정됩니다.

근심, 걱정, 슬픔, 비탄을 넘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③ “dukkh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ya(둑카도-마낫사-낭 앗탕가마-야)”

「괴로움과 근심들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몸의 괴로움, 마음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념처경을 부처님이 말하신 목적은 중생들이 몸의 괴로움도 마음의 괴로움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음도 괴로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불행한 중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이 진리, 이 수행법을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 수행하고 있는가하면 몸과 마음, 이 두 가지를 행복하게 하고 싶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괴로움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몸의 괴로움, 몸에서 일어나는 고통은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어른은 보다 명확하게 압니다. 걷는 것도 편하지는 않습니다. 무릎이 아프고, 어깨가 아프고, 등도 아픕니다. 자는 것도 괴롭고, 일어나는 것도 괴롭습니다. 앉는 것도 괴롭습니다. 무엇이 괴로운 것이냐 하면, 몸이 괴롭습니다.

 

또 하나는 마음의 괴로움입니다. 몸과 마음의 2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몸의 괴로움도 있고, 마음의 괴로움도 있습니다. 몸의 괴로움, 마음의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 당시 30명의 빅쿠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 소음으로부터 멀어진 장소에서 수행하자! 수행에 전심전력하자!」라고 결의해서 숲이나 산속에 들어가 수행했습니다. 한 곳에 두 명이 함께 하지 않고 홀로 지냈습니다. 나무아래 한사람, 숲속에 한사람, 평원에 한사람, 골짜기 아래에 한사람, 산 정상에 한사람 등, 각각 다른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수행했습니다.

한 곳에 한사람씩 자유롭게 앉아 수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사람의 빅쿠가 호랑이에게 습격당해 버렸습니다. 야밤중에 수행하고 있던 빅쿠를 호랑이가 물어 버렸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린 빅쿠는 「도와줘! 도와줘!」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다른 빅쿠들이 달려와서 호랑이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더 이상 도울 수 없었습니다.

호랑이 입에 물려있는 빅쿠에게 나머지의 빅쿠들이 멀리서 주의 깊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이제는 아무도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자신만을 의지하십시오.」

정말로 중요한 때, 우리가 큰 재난을 당했을 때에 무엇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는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말한 그대로입니다. 호랑이는 그 빅쿠의 다리부터 먹기 시작해 피부, 근육, 뼈,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먹었습니다. 이와 같이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먹히고 있는 그 빅쿠의 몸에서 생기는 괴로움은 얼마나 격렬하겠습니까? 보통 괴로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칼에 살짝 베인 것만으로도, 손톱이 벗겨진 것만으로도 아픔을 느낍니다.

호랑이에게 먹히고 있었던 빅쿠는 다리로부터 장딴지, 어깨, 배, 전신을 먹히기 직전, 죽기 직전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가 깨닫기 위해서 행한 수행은 편안한 상태에서 행한 수행입니까? 괴로움 중에서 행한 수행입니까? 격렬한 괴로움 중에서 행한 수행이었습니다.

우리가 수행하고자 할 때 1시간 정도 앉아있으면 몸이 굳어지고, 욱신욱신하고, 아프다고 해서 계속 수행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이리저리 움직여도 아픔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 「나중에 수행하자」 「나중에 노력하자」라고 말하며 단념해 버립니다.

이 빅쿠의 경우 단념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라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깨닫기 위해서 지금 수행하는 것이기에, 지금 깨달을 수 없다면 다음의 시간은 없습니다. 수행해도 죽고, 수행하지 않아도 죽습니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밖에 없다고 안 빅쿠는 혼신의 힘으로 수행했습니다. 격렬한 몸의 괴로움이 생기고 있었지만 노력해 수행한 빅쿠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고귀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실제로 몸의 괴로움에 마주하게 될 때에 최선을 다해 마주하는 법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칠지도 모릅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심한 병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그 괴로움과 마주해 해결할 수 있도록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몸에서 생겨난 몸의 괴로움, 몸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에서 생겨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괴로움과 근심 없이 몸도 마음도 행복하기를! 몸도 마음도 안락하기를! 각각 이처럼 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바라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 이 2가지의 안락을 손에 넣고 싶으면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행하는 것에 의해 우리는 행복과 안락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④ “ñāyassa adhigamāya(냐-얏사 아디가마-야)”

정확한 도의 방법을 습득하기 위해서.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스러운 도의 지혜는 올바른 닙바나(열반)의 원인이 되는 도의 길입니다.

올바른 방법, 올바른 길, 닙바나(열반)에 도달하는 좋은 방법, 좋은 길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부경전 대사자후경 중에 부처님이 사리뿟따 존자에게 「사리뿟따여! 중생이 향해가는 앞은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천상의 5곳이 있다. 사리뿟따여! 나는 그 5곳의 길과 5곳의 길에 이르는 원인의 행위를 알고 있다. 그 5곳의 길에서 해탈한 닙바나(열반)와 닙바나(열반)에 도달하는 원인의 행위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붉게 가열한 숯을 넣은 구멍과 같은 지옥에 도달하는 길

: 분뇨 구덩이와 같은 축생에 도달하는 길

: 노목과 같은 아귀에게 도달하는 길

: 어린 나무와 같은 인간에게 도달하는 길

: 누각과 같은 천상에 도달하는 길

: 그뿐만 아니라 청량한 연못과 같은 닙바나(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부처님 스스로도 알고 있듯이,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을 알리기 위해서 설법하셨습니다.

 

: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지친 여행자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쉬고 싶어 합니다. 나무 그늘을 찾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빨갛게 불타는 숯을 넣은 구멍 안에 떨어져 버리듯이, 악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선처에 가지 못하고 악처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또 다른 길은 축생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이 아니라 분뇨 구덩이에 떨어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꺼림칙하고 구토 나게 하는 생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 피로나 더위를 없애기 위해서 나무 그늘아래에서 쉬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올바른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에 잎이 떨어져버린 늙은 나무아래에 겨우 도착합니다. 크고 작은 가지도 없고, 잎은 거의 시들어 떨어지고 드문드문 뒤틀린 잎 몇 개만 있는 늙은 나무 밖에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아귀에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음식에 굶주려 음식을 찾는 아귀의 생은 시원함이 없는 고목아래에서 쉬는 것과 같습니다.

집착하는 것, 원하고 마음에 드는 것을 끊을 수가 있으면 평화롭고 온화하게 된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집착의 마음으로 죽어 아귀가 되는 사람들이 걷는 길도 부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기 위해서 휴게소를 찾아 걷고 있는 사람이 올바른 길을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가 겨우 도착한 장소는 잎이 무성한 나무가 있는 장소, 맑고 깨끗한 연못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 심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초목이 싹트고 있는 어린 나무가 있는 장소입니다. 진정한 시원함, 기분 좋음을 주는 장소가 아니라, 적당한 행복과 즐거움이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천상에서 천인의 영화와 행복, 주위 사람들에게 축복받으며 사는 것은 더위 속에서 여행하던 사람이 큰 누각에서 잠깐 쉬는 허락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천상에 도달하는 이유가 되는 선행을 실천한 사람이 걷는 길은 누각에 오르는 길입니다. 큰 누각에 오르지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가 오면 다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안정되고 견고한 행복이 아니라서, 잠시 손에 넣는 것이 허용된 천인의 생도 또한 최선의 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길도 정말로 걸어야 할 길이 아닙니다.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천상에 이르게 하는 길은 윤회의 길입니다. 괴로움이 다하지 않는 길입니다. 여러 가지 생으로 이르게 하는 선행과 악행도 부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생으로부터 해탈하고, 윤회를 멈추게 하는 닙바나의 길도 부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4념처는 닙바나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닙바나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올바른 길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맑고 깨끗한 물이 있는 연못에 도착했다면 행복합니다. 나무 그늘을 찾고 있는 사람이 큰 나무 그늘이 있는 숲에 도착했다면 행복합니다. 윤회의 여행 중에서 모든 괴로움으로 골치를 썩이고 있던 사람이 닙바나에 도착했다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완전한 안락을 줄 수가 있는 닙바나로 도달하는 길에 스스로 도착할 수 있도록, 도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정확하게 가르치고 이끌 수가 있는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닙바나에 도착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념처의 수행을 목숨 걸고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결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사념처의 길을 걷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닙바나의 원인이 되는 진리는 수행 실천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설법을 듣는 것만으로는 모릅니다. 경전을 읽는 것만으로도 모릅니다. 경전 안의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해 봐야만 명확하게 압니다. 실제로 해 본다는 것은 수행하는 것입니다.

닙바나에 이르는 원인이 되는 올바른 길을 만나기 위해서, 닙바나에 도달하는 길을 습득하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⑤ “nibbānassa sacchikiriyāya(닙바-낫사 삿치끼리야-야)”

닙바나의 실현을 위해서.

 

닙바나를 깨닫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속박, 집착을 끊어서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 수행합니다. 닙바나란 집착이 소멸된 것입니다. 집착이라고 하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으면 닙바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윤회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게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집착입니다. 자신의 집, 자신의 터전 등, 자기 주위의 것들로부터 떨어질 수 없게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집착입니다.

만약 우리가 벌판의 기둥에 얽매인 소라고 한다면, 그 소는 가고 싶은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최대한 멀리 가고 싶어도 묶어놓은 줄의 길이 만큼뿐입니다. 그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멀리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집착의 묶음을 받고 있습니다. 집착의 줄이 어느 정도의 길이이든 그 범위까지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그 밖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줄 밖의 것이 아무리 좋아도 줄을 벗어나 가질 수도 없습니다.

 

집착의 줄은 긴 편이 짧은 편보다 더 느긋하고 더 좋습니다.

그러나 줄이 없는 편이 더욱 좋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길어도 괴롭고, 짧아도 괴롭습니다. 정말로 좋은 것은 속박을 끊어, 집착의 괴로움을 모두 없애는 것입니다. 단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절의 성질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집착이 소멸한, 집착이 다한 닙바나를 깨닫기 위해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아차리도록 수행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수행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5가지입니다.

①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② 근심과 비탄을 없애기 위해서

③ 몸의 괴로움, 마음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④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⑤ 닙바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행한다면 이 5가지의 이익을 얻는다고 부처님 스스로 대념처경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수행하는 것으로 어떤 이익을 얻었는가요?

이 원인과 결과의 법을 이해해 수행한 인연으로 괴로움이 다한 평화로운 경지, 올바르고 고귀한 닙바나로 신속히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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