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6. 정각지(定覺支) : 사마디(samādhi) (20180519. 담마와나선원)

담마마-마까
2023-03-20
조회수 241

https://youtu.be/PwPdhhrPzTg


6. 정각지(定覺支) : 사마디(samādhi) (20180519. 담마와나선원)

 

담마와나 선원에선 처음이죠? (예)

오늘 원래 칠각지 부분을 계속해서 사마디 삼보장가를 할 차례입니다. 칠각지 인제 몇 개 남았어요? 사마디 하고 우뻭카 두 개 남았죠!

그때까지만 스님이 서울 올라오겠습니다. 그 이후부터 올라오라고 하면 안돼요. 인제는 선원장 스님이 계시니까 선원장 스님 모시고 해야 돼. 아쉬워도 작별을 미리 고합니다.

물론 여기 담마와나 선원에서 아마 올해는 까티나를 할 것 같은데 까티나를 할 땐 또 와서 법문을 하고 그렇게 할 거니까, 그래서 칠각지 부분까지만 스님이 하고 서울 법회는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오늘 사마디 삼보장가에 대한 걸 프린트를 해야되는데 스님이 요 근래 몸이 좀 안 좋아가지고, 사마디 삼보장가에 대한 부분은 아직 프린트를 못했어요. 그래서 못 가져오고 그대신에 사마디(samādhi)에 대한 걸 조금 알도록 하는 단계의 프린트물입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사마디에 드는 것과 위빳사나 수행으로 사마디에 드는 것에 대한 차이점에 대한 걸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나면, 칠각지 부분 사마디 삼보장가 부분을 할 때, 경안각지 다음에 어떻게 해서 사마디 삼보장가가 일어나는가 하는 것들을 이해하기가 좀 수월할 겁니다.

 

사마디(samādhi) 빨리어를 보면 마(mā)에 장음이죠!

사마디(samādhi)가 복합어죠! '삼(saṁ)'+'아-디(ādhi)'가 복합되기도 하고, '삼앙(samaṁ)'+'아-디(ādhi)'가 복합어가 되기도 합니다. 보통 그렇게 사마디를 설명할 때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스님이 설명을 합니다.

삼마 삼붓다(smamā sambuddha) 할 때 삼(sam) 들어가죠! 그건 무슨 뜻입니까? '바르다'는 뜻이죠! '올바르다'는 그런 뜻으로써 'sammā' 가 들어갑니다.

그 'sammā'와 사마디(samādhi) 할 때의 앞에 'saṁ' 이것은 비슷하게 쓰입니다.

'잘' 이란 뜻으로써 'sam' 'sa'가 들어갑니다. 'ādhl'는 둔다는 뜻이기 때문에 "대상에 마음을 잘 둔다"는 그런 뜻입니다.

 

왜 대상에 마음을 두어야 될까? 사띠할 때 대상이 있어야 사띠를 할 수 있죠!

보통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대상이 뭐가 돼요?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이 대상이 되죠? 사마타 수행에서는 하나의 대상만 합니다. 자기가 어떤 주제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그 주제만 가지고 거기에다가 마음을 둡니다.

두 가지 방법이 다 뭐 때문에 대상에다가 마음을 두라고 그래요?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끔 하고, 들뜨지 않게끔 하고, 그리고 그 대상에 집중하기 위해서 두는 겁니다.

 

그래서 '대상에 잘 둔다'고 하는 의미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마디에 들기 위해서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먼저 하나가 있습니다. 대상에 마음을 잘 두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사띠를 잘 하고 있으면 세속적인 욕망들이 안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번뇌들도 당연히 덜 일어나고 안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수행을 사마타 수행을 하든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대상에다가 마음을 잘 둘 거 같으면 일단은 그런 외부적인 것들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해서도 덜 반응하게 되고, 또 마음이 하나의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림으로 인해가지고 자기 자신은 번뇌로부터 조금 벗어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 대상에 둘 동안에는.

 

대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사마디의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항상 대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착각을 하는 게 삼매에 들었으면은 아주 좋은 상태에서 멍하게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절대 그런 법은 없습니다.

어떤 삼매, 1선정 2선정 아니면 무색계에 든다고 하더라도 대상이 있습니다. 마음의 대상이든 물질적인 대상이든. 아니면 그 마음이나 물질적인 것들이나 대상이 다 사라졌다고 할 거 같으면 사라졌다는 그 마음 자체가 대상이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마디에 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에 집중하는 훈련들이 사실은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세속적인 욕계에서 일어나는 것들, 그런 것들이 일어나서는 사마디에 들 수가 없습니다.

삼매에 들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거는 욕심이죠? 그건 욕계의 마음입니다. 그런 욕심이 있으면 삼매에 들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는 뭔가 내가 어떤 현상을 알고 싶다, 아니면 그 현상을 체험하고 싶다 하는 마음을 낸다? 아니면 내가 수행을 더 열심히 해볼려고 한다? 이런 마음들도 전부 욕계의 불선심에 속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가지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삼매에 들 수 없다는 걸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사마디(samādhi)를 얘기하는 것이 '삼앙(samaṁ)'+'아-디(ādhi)'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삼마' '사마'라고 하는 것은 '평등하다' '고르다'는 뜻입니다. 대상에 마음을 고르게 둔다 그런 뜻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고르게 둔다'는 의미는 뭐냐면 여러분들이 수행하면 반드시 필요한 게 오력이죠! 믿음부터 해가지고 지혜까지 그 '다섯 가지를 고르게 균형을 잡아야만이 사마디에 든다'는 그런 뜻입니다.

 

대상에 오력의 균형이 고르게 맞아서 딱 이게 시소 같이 균형이 잘 맞게 될 때 이때 마음은 사마디에 든다는 그런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이 강하면 불신쪽으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또 무조건 믿는 사견쪽으로 빠지기도 쉽고.

지혜가 많으면 알음알이가 자꾸 일어나서 자꾸 뭔가를 알려고 하지 올바른 지혜쪽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뭔가를 배울려고만 자꾸 합니다.

또는 정진하는 힘이 너무 커져버리면 자꾸 들뜹니다. 일상생활에서든 수행에서든 자꾸 들뜨게 됩니다.

그다음에 사마디가 너무 강하게 될 것 같으면 노력하는 힘이 균형을 못 잡아주면 나태에 빠져버립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보면 노력하는 힘과 사마디의 힘이 균형을 맞춰줘야 되는데 노력의 힘은 떨어지고 집중하는 힘만 강해진다? 그럼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멍한 상태에서 뭔가 기분 좋고 하는 그런 상태로 빠져버립니다. 사실은 나태에 빠진 형태가 됩니다.

 

보통 통상적으로 수행에서 일어나는 통증, 잡념, 졸음, 뭔가 대상에 매달리려고 하는 것들, 이 수행을 계속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하는 의심들, 또 이 수행을 통해가지고 내가 과연 아라한에 이를 수 있느냐, 아니면 교리적으로 뭔가 자기 자신이 지금 현재 체험한 상태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나 하고 비교할려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다섯 가지의 힘이 균형이 안 맞기 때문에 일어나집니다.

다섯 가지 힘이 균형만 맞으면 실제로 수행에서 이런 것들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이 다섯 가지 장애들을 몰아내는 역할들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 감각적인 욕망, 악의, 게으름과 혼침, 들뜸과 후회, 회의적인 의심)

 

적어도 사마디에 들려고 할 것 같으면 오력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오력의 균형이 맞아야만이 사마디에 들 수가 있습니다. 무조건 한 대상에 올인해가지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한다 해가지고 사마디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을 때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사마디에 쏙 빨려들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균형이 맞아야 되는 거라.

 

그래서 '삼앙(samaṁ)'+'아-디(ādhi)'라고 할 때는 고르게, 오력의 균형이 고르게, 사띠는 오력에서는 항상 있어야 됩니다. 사띠는 사띠의 힘이 지금 내가 요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할 거 같으면 사띠의 힘을 더 키워야 되는 거고, 또 더 키우는 것이 한정이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띠의 힘은 계속적으로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으로 알아차린다는 정도의 힘이 있다. 그러면 더 키워서 일어나는 성품에 지수화풍 중에 어느 요소가 강하다는 걸 아는 상태로 키우고, 또 그걸 알고 나면은 조금 더 나아가 가지고 그 지수화풍의 요소도 빨리 변하고 있구나. 따가움이 있다 그러면 그 따가움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보인다. 또 무거움이 있다 그러면 그 무거움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도 보인다고 하는 정도의 힘을 또 키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또 사띠의 힘이 더 강해지게 되면은 그것이 끊임없이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고.

그러고 나서 본인이 '아, 이러한 것들은 무상한 성품이다' 하는 것들을 탁 체험하고 나면은 빠르게 변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거라. 싫어한다든지 두려워한다든지 하는 이런 마음 없이 평온한 상태에서 이 대상을 관찰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때 사마디에 들 수가 있습니다.

빠르게 변하고 하는 상태에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새로운 걸 봤을 때는 기뻐하고 또 뛸 듯이 가벼워지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사마디에 드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사마디에 들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대상들이 잠잠해져야 됩니다. 잠잠해서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야만이 사마디에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안각지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고 나면은 마음은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자연스럽게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내가 지금 사띠의 능력에 따라서 높든 낮든 그것에 따라서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설혹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게 이미 무상한 성품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럼 그 대상으로 인해서 갈애가 생겨나지 않으면 사마디에 들 수가 있는 겁니다.

 

사마디의 기본적인 것은 두 가지가 항상 있게끔 됩니다.

일상적인 세속적인 감각적인 욕망이나 이런 것들이 있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사마디에 들지 못한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세속에서 살고 있죠?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는 세속에 있는 겁니다. 출가자도 예외가 없습니다. 자신이 그 세속을 뛰어넘는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는 세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세속적인 생각이나 세속적인 것들에 매달려 있을 경우에는 그 순간에는 사마디에 들 방법이 없다는 거라.

 

가끔씩 어느 스님들의 글들을 읽다 보면은 "욕계 선정"이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

그런데 스님은 그것을 반대합니다. "욕계 선정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욕계는 어떠한 경우든지 오욕락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소리가 들리면 들린다고 알고, 보면 본다고 알면서 그것을 '들린다' '본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보면 '누구다' 하고 알아차리고, 소리가 들리면 '누구 소리다' 아니면 '감미롭다' 아니면 '듣기 싫다' 하고 일으키는 것이 세속적인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삼매에 들 방법이 없습니다. 욕계에 있더라도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됩니다.

 

그런데 색계는 뭐라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 의존하는 세계입니다. 쉽게 말하면 물질을 가지고 알아차리더라도 그 물질에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됩니다.

음식이 있다. 그 음식을 여러분들이 먹을 때는 '맛있다, 맛없다' 하고 먹을 거 같으면 욕계 세계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더라도 그냥 알아차리면서 그것을 먹는다. 그러면 그거는 색계 세계와 마찬가집니다.

 

물질을 의존해서 살아가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방식이 물질에 의존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그거를 의존하지만, 이 몸이 있기 때문에 유지하기 위해 먹는 방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물질에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 정도로 마음이 강해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게 색계 세계입니다.

색계선정은 1선정부터 4선정까지 해가지고 초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까지 그렇게 나누어지게 됩니다. 보통 경험하는 것이 그 정도의 사마디 부분입니다.

 

무색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은 몸을 지니고 있지만, 물질에는 이미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됐는데, 색계에서는 마음에는 의존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 마음마저도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됐을 경우.

 

여기 심념처 수행하는 곳이니까 심념처 수행할 때 어떻게 알아차려요?

대상이 만약에 잠이 온다 할 것 같으면, 잠이 온다는 그 성품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잠이 온다 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을 겁니다. 잠이 온다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다시 알아차리도록 합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있지만 그 마음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마음의 작용이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상태라.

 

물질에 의존해서 먹지만 그 물질에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되듯이, 마음이 있지만 마음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세계가 있다는 거라. 무색계는 꼭 그와 같습니다.

여러분 몸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세계 자체에 욕계, 색계, 무색계가 다 존재를 하게 됩니다.

 

또 세계 자체가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누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욕계 세계이고, 그다음에 색계 천상세계도 있고, 그다음에 무색계 천상세계도 있고, 그 세계는 육도윤회에서 따로 또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 자신이 바로 욕계 색계 무색계를 다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무색계도 네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그러고 나서 여덟 가지를 합해가지고 "사마디 종류는 여덟 가지 종류가 있다" 하고 경전에서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주석서에는 거기다가 "멸진정"까지 하나를 더 더합니다.

아라한이 된 자들이 경험하는 세계. "멸진정까지 포함해가지고 9가지다" 하고 아비담마에서는 설명을 합니다. 보통 여러분들은 구차선정(九次第定) 해가지고 배우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8가지로 구분하고 어떨 때는 4가지로만 하고. 그래서 색계 4선정만 얘기를 합니다.

 

실제로 수행을 해보면 그것도 되지를 않습니다. 수행자들 입장에서는 1선정은 선정의 영역에 포함을 안 시킵니다. 2선정 3선정 4선정 안에 실제적으로 무색계 선정도 다 포함이 되는 형태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의식을 알아차리면서 그 의식이,

예를 들어봅시다. 멧따바와나를 한다. 여러분들 멧따가 가득 충만되면 어떻게 돼요? 멧따를 방출하죠! 그게 영역이 있습니까?

나중에는 한계가 없이 되어집니다. 그게 무색계의 첫 번째 영역에 속합니다. 한정이 없다는 마음조차도 나중에는 사라져버리고 나면, 그게 두 번째 영역에 속합니다.

 

쉽게 말하면 네 번째 색계 선정을 하면서 그 선정 속에서 개발되는 것들이 이 무색계 사선정에 들어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수행에서는 "아니다. 삼매는 세 가지밖에 없다" 하고 공공연하게 얘기합니다. "1선정은 삼매의 영역에 속하지 못한다. 2선정 3선정 4선정이 오히려 바른 삼매의 영역에 속한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 그런 겁니다.

교리적으로 이렇게 여러가지로 자꾸 나눌려고 하지 말고 실제 본인이 체험해가지고 아! 이게 삼매의 어느 정도에 든다 하는 걸 본인이 체험하면 됩니다.

 

물론 체험하는 것은 체험하는 당시에는 모릅니다. 다시 삼매에서 빠져나오고 나서 '아! 내가 이런 상태에 도달했었구나' 하고 이해를 하고 알게끔 되는 겁니다.

삼매에 들 때 '내가 2선정을 체험하겠다' 하고 2선정에 드는 경우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초선정부터 들어가고 나서 2선정에 들어가지게 됩니다. 만약에 3선정에 머무르겠다 하고 3선정에 있는 경우는 없고, 1선정, 2선정, 3선정으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1선정에서 2선정으로 넘어가는 힘이 있어야만이 넘어가지는 것이지, 힘이 없으면 넘어가지지 못합니다. 계단을 넘어갈 때 계단을 오르는 힘이 있어야 그다음 발자국을 뗄 수가 있습니다.

그 힘이 뭐냐면 다섯 가지가 자재하게 됐을 때 가능한 것이 그 힘입니다.

내가 선정에 들 수 있는 힘, 빠져나올 수 있는 힘,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이만큼 있을 수 있는 힘, 그다음에 어떠한 경우에 내가 그 선정으로부터 빠져나오고 다른 때는 빠져나오지 않고 그대로 선정에 있는다고 하는 힘, 이런 여러 가지가 자유롭게 됐을 때 하나의 선정에서 다음 선정으로 넘어가지는 것이지, 무조건 나는 2선정만 경험하겠다 해가지고 2선정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마타 수행에서는 이러한 선정들을 전체를 다 경험해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어떨까?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어디까지 하면 돼요? 초선정-1선정까지. 1선정 이상은 넘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왜 그럴까? 저기 사리가 있습니다. 그럼 이걸 볼려면 어떻게 해요? 내가 눈을 그쪽으로 향해야 되고 실제적으로 눈을 그쪽으로 향해서 그것을 봐야 됩니다. 아무리 향하고 있어도 눈을 감고 있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쪽을 향해야 되고 그것을 볼려는 마음이 일어나야 됩니다. 의지가 일어나야 됩니다.

그게 위딱까(vitakka 尋), 위짜라(vicāra 伺) 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이 두 개가 있어야만이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만 계속 보는 것 같으면 다른 대상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건데?

대상을 향하는 마음(尋)은 어디서 나오고,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마음(伺)은 어디서 나타날 건데? 위딱까, 위짜라인데.

2선정에서부터는 위딱까 위짜라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위빳사나 수행할 경우에는 2선정 이상을 해서는 안되는 거라. 그래서 초선정에서 끝내야 되기 때문에 초선정에서 끝낼려고 하다보니까 사마디를 본삼매까지 가면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구분을 합니다. 보통 여러분들 말하는 카니까 사마디라고 해가지고, 찰나삼매라고 얘기들 많이 하죠? 찰나삼매입니다.

그다음에 찰나삼매하고, 우빠짜라 사마디라 해가지고 근접삼매, 삼매 가까이, 삼매는 아닌데 삼매와 진배없는 상태가 되도록 만드는 것, 그건 초선정에서만 가능한 경험입니다.

쉽게 말하면 '유심유사 무심무사' 하는 얘기 들어봤습니까? 심(尋)과 사(伺)가 있는 것은 1선정입니다. 2선정은 심(尋)과 사(伺)가 없습니다. 그럼 무(無)라고 적어야 됩니다.

 

위딱까, 위짜라가 있는 상태에 있을 때만이 위빳사나 수행은 가능합니다.

그러면 대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위딱까 위짜라 없이 그걸 알 방법이 없습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려면 어떠한 경우든지 초선정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선정을 다 경험하고 나서, 그 선정에서 빠져나온 마음에서 대상을 무상·고·무아로 관찰해야 됩니다.

 

본인이 어떤 수행방법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은 물론 본인이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만 하는 사람들, 사마타 수행을 좀 해서 어느 정도 삼매를 경험하고 나서 위빳사나로 전환하는 사람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마타 필요 없이 바로 위빳사나 수행만 하는 사람들.

 

여러분들은 어떤 걸 택할 수 있을 것 같애요? 택하는 기준점들을 분명하게 경전에는 제시해놨습니다. 그걸 참고를 해서 여러분들이 선택을 해야 되는 것이지 나는 그냥 무조건 위빳사나 하겠다, 그것도 위빳사나 중에서 심념처만 하겠다? 본인한테 맞을 것 같으면 잘되는데 본인한테 안 맞을 경우에는 그건 죽었다 깨어나도 안돼. 본인의 성품에 따라서 수행방법은 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초기 때는 스님이 권하기를 되도록이면 "다해봐라"고 그럽니다.

한 몇년 간은 사마타 수행도 해보고, 위빳사나 수행 중에서도 심념처를 하든, 법념처를 하든, 수념처를 하든 뭘 하든 다 경험을 해봐라고 그럽니다. 다 경험을 해봐야만이 본인이 아, 이 방법이 맞다 하는 것이 떠오르게 됩니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 경전하고 주석서에는 설명을 쭉 해놨습니다.

사람의 유형에 따라서 수행을, 그리고 수행의 대상을 뭐로 할 것이냐는 것도 다 정해놓고 그리했는데 그건 사마타 영역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위빳사나 영역에서는 그런 것들이 잘 안 보여요. 쉽게 말하면 직접 본인이 체험을 해보고 나서, 어느 수행방법이 맞다 하는 것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게 평생 갈 것 같애요? 절대 안 그럽니다. 그게 평생 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그 수행법이 맞다는 것이지 세월이 조금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수행법들이 맞게 되는 거라.

 

그래서 처음에 초기에 할 때는 "신·수·심·법을 다해봐라" 하고 스님은 권합니다.

다해봤을 때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부분을 꾸준히 해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나면, 반드시 그다음에는 다음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심념처 수행 잘했죠! 법념처로 안 넘어갈 것 같아요? 법념처로 당연히 넘어가지게 됩니다. 법념처로 넘어가지면 또 수념처로 안 넘어갈 것 같애요? 수념처로 당연히 넘어가집니다.

 

나중에는 머리가 크고 나면은 스님이 말해도 그 말이 인젠 안 들어와. 본인에게 맞는 것은 심념처인데 '왜 이걸 하라고 하는가' 하고, 또 '이게 맞는가' 해가지고 거부반응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러면은 이미 수행은 거기서 딱 멈춘 상태에서 그대로 그냥 계속 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이면 처음에는 모든 방법을 다 알고 있는 것이 가장 바른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한 삼십 년을 할 수 있다 할 거 같으면 적어도 한 십 년은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 여러 가지든 그것을 전부 다 해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게 오히려 늦을 거 같애도 나중에는 결과가 훨씬 빠르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여기 심념처 수행하는 곳에 와서 자꾸 다른 것도 해봐라고 하니까 좀 미안키는 한데, 그리 해보는 것이 오히려 여러분들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자! 그래서 삼매의 종류는 보통 다섯 가지로 나누어 놓습니다.

그런데 그거 여러분들이 알 필요 없습니다. 이게 뭐 몰입되는 몰입삼매인지, 근접삼매인지, 아니면 찰나삼매인지 본삼매인지 뭔지 여러분들이 알 게 뭐 있어? 뭐하러 그걸 알려고 해싸?

그거는 경전 공부하는 사람들한테 맡겨두고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것은 삼매에 어떻게 하면 들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삼매에 들었을 때 이걸 어떻게 유지해나는가? 하는 것들이 중요한 부분이라.

여기 적어놓은 사마디의 설명이 삼매에 드는 과정에 대한 것들이 주가 돼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삼매에 들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삼매에 들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까? 그게 찰나삼매든 본삼매든 어떠한 경우든 관계없이, 뭐가 있어야 돼요?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대상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삼매에 들기 전이든 삼매에 들고 나서 삼매에 있든지 간에 대상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 스님 소리 듣고 있죠? 소리가 여러분들에게는 대상입니다. 그럼 적어도 소리들리는 것들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스님 멀뚱하게 자꾸 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보고 있어도 눈은 감은 상태가 되어야 됩니다. 실제적으로 눈을 감아라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눈은 감아야 됩니다. 감고 소리들리는 것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어가지고? 스님 있는 여기에다 두고 해야 됩니까?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그럼 자기 자신의 몸에서 소리 들리는 게 어디라? 귀라. 그럼 귀에다가 마음을 두어야 되는 거라. '어! 귀에서 소리가 들리네' 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귀에서 소리들리는 것은 마음이 벗어나기가 쉽습니다. 달아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귀에서 들리는 방법도 들리는데 그냥 귀에서 들리는 걸 '들림' '들림'으로 해서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귀에서 들릴 때의 느낌들, 일어나는 느낌들이 각각 다릅니다. 그 느낌들을 알아차리려고 하는 것들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소리가 들리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경우들도 있고,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이 들릴 때 마음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경우들도 있고, 자기가 신수심법 공부를 하고 알고 있으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렇게 듣게 되는 거라. 그러면 대상을 놓치지 않게 되는 거라.

 

그래서 사마디에 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놓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대상을 놓치는 법이 없어야 됩니다. 그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은 욕계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욕계에는 좋고 싫은 것들이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좋고 싫은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 적어도 그 대상을 관찰하고 있어야만이 가능합니다.

 

또 본인의 마음에 항상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참 좋은데, 대상이 바뀌어 버립니다. 소리가 들릴 때가 있고, 스님이 말을 안 하면 소리가 안 들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디로 향해야 돼요? 마음은 어디로 향해요? 그때 일어난 내 가슴의 느낌을 보든지 또 자기가 대상을 찾아야 됩니다.

그때 자칫 잘못하면 마음은 ‘어? 왜 말을 안 하시지?’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잡생각이 일어난다든지, 쉽게 말하면 불선한 마음이 탁 올라오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 불선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은 일단은 차단을 시켜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그 대상이 바뀌는 찰나에 선한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주어야 됩니다.

선한 마음이 그때 일어나지 읺으면 찰나간에 삼매에 들 수 있는 조건들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는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대상을 놓쳐서는 안되는 거고, 그리고 그 대상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

 

• 삼매에 어떻게 하면 들 수 있는가? 삼매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

1.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2. 대상이 바뀌는 찰나에도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

적어도 이 두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대상을 알아차리면은 사마디에 들기가 쉬워진다는 거라. 그게 인제 첫 부분입니다.

 

삼매는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삼매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삼매는 되도록이면 스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자주자주 들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것이 맞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삼매에 들을려고 할 거 같으면 삼매는 어떠한 경우든지 노력의 힘들과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실제적으로 수행은 노력하는 힘과 집중하는 힘이 균형이 맞느냐 안 맞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오력 다섯 가지를 얘기했지만 신심-지혜 부분 크게 수행에서 영향을 안 미칩니다.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상에 집중하는 것과 노력하는 힘' 이걸 어떻게 균형을 맞추느냐 하는 것, 이게 사실은 키포인트입니다.

 

얼마만큼 노력을 해야 될까? 열심히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한다? 그게 노력의 정답이 아닙니다. 노력의 정답은 내가 지은 거 내가 대상을 안 알아차렸으면 그거에 대한 과보는 내가 받는 거고, 대상을 알아차렸으면 그거에 대한 과보도 내가 받는 거다, 하는 것에 마음이 가 있을 때의 노력의 힘, 딱 그 정도입니다.

원인·결과에 대해서 업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것들의 결과는 내가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명심해가지고 있는 상태의 마음, 그 정도의 노력의 힘, 그게 사실은 노력과 사마디의 균형점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죠?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얘기를 할 것 같으면 아, 그 정도의 힘이구나 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 노력의 힘들을 분명히 빨리 찾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 힘으로 인해서 집중하는 힘들과 균형이 딱 맞는 지점이 딱 찾아집니다. 그것만 찾으면은 사마디에 들기는 아주 수월합니다.

 

지금 현재의 사띠의 힘이 약할 것 같으면 초선정에서 계속적으로 머물거고, 사띠의 힘이 강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나중에는 집중하는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사띠의 힘도 강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어느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집중을 할 것인가? 하는 포인트를 빨리 찾아야 된다는 겁니다. 사마디에 들기 위한 길들을 여러분들이 빨리 찾으면 사마디에 드는 것은 수월합니다.

 

지금 한번 해볼까요? 다른 것 하지 말고 코끝에만 보십시오. 인중!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가만히 그냥 관찰해보십시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들이쉬어지면 들이쉬어지는구나 하고 알고, 내쉬었으면 내쉬어지는구나 하고 알고.

그러한 상태에서는 마음이 그 대상으로부터 떠나지를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대상에 머무르게 됩니다.

 

다시 한번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들이쉬고 내쉰다고 알아차리지 말고, 들이쉴 때의 느낌과 내쉴 때의 느낌이 어떤지를 알려고 해보십시오.

그때도 마찬가지로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어서 그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기능들이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의 느낌이 다른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큰 노력 필요 없죠? 인제 눈 뜨고 한번 보십시오.

그 수행하는데 크게 내가 이걸 알아차려야 되겠다 하는 마음은 사실은 필요가 없죠?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걸 강하게 뭔가를 알아차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는 사마디에 절대 못 든다는 거라.

 

조금 전에 했듯이 그냥 편안하게 알아차리는 정도의 힘만 있을 거 같으면 그 상태로 계속 유지해주면 됩니다. 그게 앞에 얘기한 사마타의 방법으로 하든 위빳사나의 방법으로 하든 그거는 문제가 안됩니다. 그 방법을 분명하게 수행에서 자꾸 응용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할 때라든지 아니면 잠이 안 올 때라든지 아니면 내가 지금 뭔가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든지 그럴 때는 그걸 일단 놔버리고 호흡만 한번 그렇게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러면 앞에 것들이 싹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또 돌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뭘 대상으로 알아차리느냐에 따라서 본인이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또는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안 일어나기도 하고 그렇게 되는 거라. 대상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만약에 싫은 마음이 확 일어났으면 싫은 마음이 대상이 돼야 되는데, 지금의 능력에서 싫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안 될 거 같으면, 싫은 마음 놔놔 놓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라는 거라.

호흡을 알아차리든지 해가지고 그 싫은 마음이 어디갔지 하고 볼 것 같으면 아주 약해져 있든지 사라져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게 몇 번 보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싫은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게 나한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뿐 아니라 평온한 상태에서 그 싫은 마음을 관찰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싫은 마음이 그때사 변하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끔 하라.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끔 하라는 것은 안 일어나면 억지로 조금 전 같이 만들어서라도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끔 할 것 같으면 조금 전의 싫은 마음이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느낌이나 이런 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힘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는 거라.

지금의 상태에서 안 되는 걸 가지고 계속 할려고 하지 말고,

통증이 있다 그러면 그 통증을 본다 해가지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지금 통증을 볼 때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을 때는 선한 마음이 일어나질 않았는데 그게 어떻게 사라질 수가 있느냐는 거라.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끔 만들고 나서 그 통증을 봐야 된다는 거라.

 

사띠를 하더라도 사띠가 항상 고요하고 가벼운 상태에서 사띠가 돼야만이 선한 마음으로 인해서 그 사띠를 하게 되면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뭔가를 알아차리겠다는 마음이 그 사띠에 딱 결합이 되면 그 사띠는 바른 사띠가 되질 못하는 거라. 그렇게 계속 알아차려봐야 그 대상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는 더 고통스러운 것들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사마디에 대해서 이해를 할 거 같으면 그렇게 다른 부분에서도 사마디에서 빠져나왔을 때, 또는 초선정의 사마디 상태에서도 대상을 조금 전 같이 그런 식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려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사마디 삼보장가의 이익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삼매를 체험했다 하는 이것만이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두루 고요한 마음과 평온한 마음과 선한 마음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게끔 해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삼매에 들기 위한 과정들을 균형을 맞추는 것을 반드시 빨리 찾아내야 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노력의 힘이 어느 정도 되고, 집중은 어느 정도 해야만이 아, 이게 균형이 맞아나간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그릇이 있습니다. 그럼 내가 그릇을 맞추기 위해서 돌을 이렇게 탁 던진다. 이게 정확하게 겨냥을 하고 탁 던지는 힘이 맞아야만이 이게 탁 맞출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약하면 이걸 맞추기는 했는데 이 그릇을 깰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힘이 생기면 탁 던지는데 좀 더 세게 던져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세게 던지면 이 그릇은 깨지게 됩니다.

 

그 세기는 뭐로 조정하게 될까? 그건 사띠의 힘이지 노력의 힘이 아닙니다.

힘을 많이 과하게 주면 이게 깨지겠지 하지만 이게 절대 그런 법은 없습니다.

노력이라는 것은 바른 겨냥을 하고 그것에 마음을 어떻게 둘 것이냐 하는 것이 노력이지, 이것이 깨지고 안 깨지고 하는 것은 사띠의 힘입니다.

그럼 지금 현재 이걸 그냥 맞추기만 했다. 슬그머니 맞추었다 하더라도 맞추었으면 된 거라. 지금의 상태에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지금의 상태에서 내가 힘을 세게 줬다. 그러면 대상을 벗어나버리게 되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본인이 그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

경행을 한다, 다른 사람들이 굉장히 천천히 하고 있다, 왜 내가 그걸 그대로 해야 되는데? 힘이 다른데! 사띠를 알아차리는 것이 분명히 다른데, 저 사람은 경행을 하면서 느낌도 보고 변하는 무상한 것도 보고 하는데, 나는 그것을 보지를 못하고 겨우 '왼발' '오른발' 하면서 알아차리는 상태인데, 왜 그 속도를 똑같이 해야 돼? 그럴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라.

이것이 그릇이 깨지고 안 깨지고 하는 것은 사띠의 힘으로 조절되는 것이지, 노력의 힘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노력은 어떠한 경우든지 동일합니다.

그 노력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본인 것을 분명하게 찾아내야 된다는 거라.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노력의 힘과 집중하는 힘의 균형을 잡아나갈 수가 있습니다.

 

스님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을 해봤어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동원을 해봤는데 결국에는 다 안 맞아요.

그 노력의 힘을 딱 찾아낸 것이 바로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들입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마음들이 아, 이게 어느 정도의 마음이다 하는 것을 분명히 본인이 감지를 하게 됩니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때의 상태, 이게 노력의 포인트입니다.

 

그게 뭐냐면 원인·결과에 대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 내가 지금 만약에 불선한 마음을 냈다, 그럼 그 결과는 내가 그대로 받게 되는 거라. 선한 일을 했다, 선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렸다, 그럼 그 결과는 내가 그대로 받게 되는 거라. 그게 달리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받는다는 생각을 딱 가지게 될 것 같으면 노력의 포인트를 잡아나가게 됩니다.

그것은 스님 같은 경우에는 경전을 읽으면서 경전을 읽을 때 일어나는 상태를 보고 '아! 노력이 이 정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나한테는 맞구나' 하고 포인트를 잡아나갔듯이, 여러분들도 본인에게 맞게끔 노력의 포인트를 분명하게 잡아나가야 됩니다.

 

사마디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노력의 힘들이 본인이 분명하게 균형을 잡는 법을 모를 것 같으면 사마디는 여러분들에게는 해악입니다. 삼매에 들어봐야 균형이 안 맞으면은 엉뚱한 식으로 발전이 됩니다. 귀먹고 눈 버리고 합니다.

스님이 딱 그랬습니다. 지금 이쪽 귀, 이쪽 눈 거의 지금 안 들리고 안 보입니다. 노력의 힘을 모를 때 그렇게 되는 거라.

수행에서 노력과 집중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몸을 다치고 나서 알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런 실수를 범하지 말아라는 거라. 본인에게 맞는 걸 분명하게 잘 찾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마디만이 정답은 아니다. 경험해보면 좋겠지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사마디에 잘 든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꼭 나에게 무상·고·무아를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보통 3선정에서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본인은 3선정이 가장 좋을 때라고 판단들을 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해탈의 상태다. 닙바나의 상태다' 하고 판단들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3선정 밖에 안 간 건데, 4선정에도 가지도 않았는데, 거기서 몇십 년을 허송 세월을 보내요.

 

사마디가 그런 위험들도 있기 때문에, 꼭 사마디를 해야 된다 하고 얘기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여러분들에게는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 집중하는 힘들이 커지면 사띠가 증장돼있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자라고 해가지고 사마타 수행방법을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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