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과 죽음, 그 불가분의 관계
세상에는 <서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가분의 관계>라고 하지요. 동전의 양면이 그러하고, 손등과 손바닥이 그렇습니다. 안면과 뒷면, 안쪽과 바깥쪽, 물체와 그림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육신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마음이 없는 몸은 이미 살아 있는 육신이 아닙니다. 공존 혹은 공멸. 운명공동체라고나 할까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존재하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 또한 소멸한다는 연기의 법칙이 <불가분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독립적으로는 결코 존재하거나 성립할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삶과 죽음>입니다.
죽음의 상대개념이 삶(살아있음)이요, 삶(살아있음)의 반대개념이 죽음입니다. 삶의 이면에는 항상 죽음이 존재하고, 죽음으로 인해 삶 또한 현전하는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시간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가? 그렇습니다. 삶은 죽음 이후에 찾아옵니다. 다양한 시간대별의 죽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태에서 죽기도 하고, 젊어서 사고로 죽기도 하고, 천수를 누리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라는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 죽음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찰라’입니다.
2. 삶과 죽음이 한 호흡 사이에 있다.
죽음 이후 사대육신이 흔적 없이 사라지기까지는 일정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육신은 죽음의 잔영일 뿐 실재 죽음은 임종의 순간에 이미 끝나버렸고, 전생의 업을 따라 또 다음 생이 존재할 뿐입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생사가 한 호흡 사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들어온 숨 내뱉지 못한다면 생명은 이미 끝나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매 순간 생멸(생사)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오온의 모든 현상을 매 순간 순간마다 ‘생기고 사라짐’으로 관을 합니다. ‘생겨났다가 사라졌다’는 말은 ‘삶과 죽음’이 매 순간 우리의 일상 속에 현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죽음에 대한 알아차림 경·1,2>(AN8:73~74)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1)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명상>수행을 실천하고
공부 지으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으며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하게 되나니
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명상>수행을 해야 하느니라.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실로 나는 하룻밤 하루낮 밖에 살 수 없을지 모른다.
이러한 마음으로 세존의 교법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이렇게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련합니다.
(또 어떤 비구는, 실로 나는
.....하루 낮 밖에,
.....한나절 밖에,
.....한 끼 밥 먹는 시간 밖에,
.....밥을 반 쯤 먹는 시간 밖에,
.....밥을 몇 술 뜨는 시간 밖에,
.....한입 음식을 씹어 삼키는 시간 밖에.....)
비구들이여, 그러나 어떤 비구는 다음과 같이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행하느니라.
‘실로 나는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쉬는 시간 밖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을 일러
방일하지 않고,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죽음에 대한 명상>을 예리하게 닦는다고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하느니라.
‘우리는 방일하지 않고 항상 힘써 정진하리라.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죽음에 대해 거듭 숙고하는
<죽음에 대한 명상>을 예리하게 닦으리라’ 라고.
(2)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날이 지고
밤이 돌아왔을 때 이와 같이 숙고하느니라.
<내게 죽음을 가져올 여러 조건이 있다.
뱀이 나를 물지도 모른다. 혹은
전갈이 나를 물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내게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혹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르고,
비인간들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죽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내게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해야 하느니라.
<내가 이 밤에 죽게 되면 내게 장애가 될,
아직 제거되지 않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자신을 반조해서
<내가 이 밤에 죽게 되면 내게 장애가 될,
아직 제거되지 않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내게 남아 있다> 라고 알게 되면 그는
그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
강한 의욕과 노력과 관심과 불퇴전과
분명한 앎에 의한 바른 사띠를 유지하게 되느니라.
예를 들어, 옷이나 머리에 불이 붙은 자는
그 불을 끄기 위해 아주 강한 의욕과
노력과 관심과 불퇴전과 분명한 앎에 의한
바른 사띠를 유지하게 되는 것과 같느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자신을 반조해서
<내가 이 밤에 죽더라도 내게 장애가 될,
아직 제거되지 않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내게 남아 있지 않다>라고 알게 되면
그 비구는 밤낮으로 유익한 법에 가일층
공부 지으면서 희열과 환희에 머물게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명상>을 닦고
공부 지으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으며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하게 되느니라.
3.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다 보면
‘제행무상’은 고따마 붓다께서 발견하신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제행무상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삶과 죽음’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고,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 진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따로 떼어놓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삶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한 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과 얼음이 모양은 달라도 본질은 같듯, 삶은 항상 죽음을 동반하고 있으며,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연결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곧 삶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가져다 줄 육체적 고통과 존재의 소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죽음에 대한 관념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죽음을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의도적으로 갖지 않음으로써 삶과 죽음과의 간격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싫어합니다. 누구나 더 오래 살기를 바라고, 고통이 없기를 바라고, 심지어는 영생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잊고 아름답거나 즐거운 대상을 찾아 탐닉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감각적 대상에 빠져서 혹은 먹고 살기 바빠서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다 보면 언젠가는 맞게 될 혹은 곧 닥쳐오게 될 죽음을 망각하게 됩니다. 이미 곁에 와 있는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굿따까 니까야』<담마빠다>(진리의 말씀)에는 죽음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옵니다.
그대는 이제 시든 낙엽
염라대왕의 사자도 그대 곁에 와 있다.
그대는 죽음의 길목에 서 있다.
그런데 그대에게는 노자마저 없구나.
그대의 생애는 종점에 다다랐다.
그대는 이미 염라왕 앞에 와 있다.
도중에 쉴 곳도 없는데
그대에게는 노자마저 없구나.
뼈로써 성곽을 이루고
피와 살로써 포장되었다.
그 안에 늙음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자만과 위선이 웅크리고 있다.
허공중에서도 바다 한가운데서도
또는 산속 동굴에 들어갈지라도
거기 머물러 죽음에서 벗어날
그런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4.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음과 건강과 장수를 미덕으로 여기고, 늙음과 질병과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거나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늙음과 병듦을 감추고, 죽음을 회피하려 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다’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우리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삶에 대한 고귀한 성찰의 기회를 외면해버리고 맙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과연 삶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토록 부정적인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도 늙음이 고통이요, 병듦이 고통이요, 죽음이 고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식 때문에 생겨난 고통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늙음과 병듦과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그 자체에는 본래 고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거나 역행하려 할 때 고통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죽음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문제를 당당하게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삶과 죽음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진진하게 숙고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등은 고민해 보았어도 정작 죽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임종의 순간 우리는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평소에 죽음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으면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영원하다’라는 착각과 함께 온갖 욕심과 성냄으로 한 생애를 허비하다 문득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5.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
2가지의 죽음이 있습니다. 즉, 육체의 죽음과 정신의 죽음입니다. 이 2가지 죽음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죽음은 반드시 2종류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고통 없이 비교적 편안한 임종을 맞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육체적 고통은 그것이 크던 작던 누구나 그 고통의 크기만큼만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적 고통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은 임종 당사자와 유족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 여하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담마(法)를 실천하면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는다면 죽음의 순간 그 정신적 고통은 최소화 되지만, 평소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없이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죽음을 맞게 되면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정신적 고통은 크게 2가지로 나타나납니다. 하나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통한 이별의 아픔입니다. 이 아픔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으로서 임종 당사자는 물론 유족들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이와 같은 치명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초기경전 곳곳에 설해져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 때 광인(狂人)이었던 <빠따짜라 수행녀 일화>와 부처님의 겨자씨 비유를 통해 슬픔을 극복한 <끼사고따미 수행녀 일화>입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두 여인은 극한의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훗날 아라한과를 성취하여 많은 제자들을 생사해탈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빠따짜라 수행녀 일화
빠따짜라는 사왓띠성에 사는 뛰어난 외모를 지닌 대부호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몸종과 함께 멀리 집을 떠나 아이 둘을 낳아 기르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부모님을 꼭 한번 뵈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사왓띠성으로 가는 도중에 남편은 독사에 물려 죽었고,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가 두 자식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홀로 고향에 당도하고 보니 부모님마저 간밤 폭우에 휩쓸려 돌아가신 상태였습니다.
순간 빠따짜라는 정신을 놓아버린 채 사왓띠성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제따와나 수도원에 이르러 부처님을 뵙게 됩니다. 비구들이 미친 여인을 저지하려 하자 부처님께서는 ‘저 여인을 막지 말라’ 하시고는 미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셨습니다.
“빠따짜라여,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너를 보호해줄 수 있고,
인도해줄 수 있는 곳에 이르렀느니라.
헤아릴 수 없는 윤회 속에서 그대가
부모·자식·형제를 잃고 흘린 눈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에 대하여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좀더 깨어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청정한 마음으로
닙바나(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느니라.”
빠짜짜라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정신이 돌아왔고, 자신의 헝클어진 모습을 확인하고는 너무나 부끄러워 몸을 웅크린 채로 부처님의 자비로우신 음성에 정신을 집중하였습니다. 빠짜짜라는 부처님의 법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수다원과를 성취하였고, 부처님의 허락을 얻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그 뒤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침내 모든 번뇌를 여읜 아라한이 되었으며, 가족·친지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훗날 빠따짜라의 이와 같은 행을 크게 칭송하시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주셨습니다.
Yo ca vassasataṁ jive
요 짜 왓사사땅 지웨-
apassaṁ udeyabbayaṁ
아빳상 우데-얍바양
ekāhaṁ jivitaṁ seyyo
에까-항 지위땅 세-이요-
passato udayabbayaṁ.
빳사또- 우다얍바양.
오온의 생멸현상(生死)을 알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오온의 생멸현상(生死)을 깨닫고 사는
하루가 훨씬 났느니라.
(2) 끼사고따미 수행녀 일화
끼사고따미는 사왓띠성에 사는 한 재산가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젊은 재산가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에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죽은 아이 곁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다가 마침내 아기 시신을 품에 안은 채 사왓띠 시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아이를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왓띠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고따마 부처님을 찾아가면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아들을 살려 달라 애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식을 잃은 끼사고따미를 가엽게 여기시고는 자비로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여,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줌을 얻어 가지고 온다면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알려주겠노라.”
여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돌아다녀 보았지만 지금까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집은 없었습니다. 끼사고따미는 죽은 아들을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나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가정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죽은 사람의 수가 살아있는 사람의 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부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된 끼사고따미는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극한의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침내 모든 번뇌를 여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끼사고따미 테리(장노 비구니)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 주셨습니다.
Yo ca vassasataṁ jive
요 짜 왓사사땅 지웨-
apassaṁ amataṁ padaṁ
아빳상 아마땅 빠당
ekāhaṁ jivitaṁ seyyo
에까-항 지위땅 세-이요-
passato amataṁ padaṁ.
빳사또- 아마땅 빠당.
죽음을 초월하는 길을 모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단 하루라도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의 길을 알고 사는 것이 훨씬 났느니라.
6.<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은 중요한 수행!
① <죽음은 생멸의 한 현상으로서 궁극의 해탈·열반으로 가는 대자유의 문>이 될 수도 있고, ② <다음 생으로 들어가는 연결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이 결코 행복일 수는 없지만, 죽음은 반드시 괴로운 것이고 죽음은 반드시 불행한 것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죽음은 아직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③ <죽음은 누구나 한 번은 예외 없이 겪게 되는 일반적인 현상>이며, ④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통과하게 되는 관문>이며, ⑤<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길이고 통과했던 문>입니다. 어찌 보면 ⑥ <새로울 것도 낯설 것도 전혀 없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입니다. 이와 같은 6가지 인식은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없애주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제거해 줍니다.
몸과 마음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언제나 수행처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은 몸과 마음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을 떠난 수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선방(집중수행처)에서 일어나는 번뇌(탐진치)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일상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번뇌가 생겨납니다. 생겨나는 번뇌를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번뇌를 생기게 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을 제대로 알고 보면 번뇌기 소멸됩니다. 즉, 번뇌의 생성지점이 곧 번뇌의 소멸점입니다. 이렇게 알고 이해하면 이것은 바른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그대로가 수행이 되고 깨달음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는 것은 그대로가 중요한 수행입니다. 죽음은 그 자체로서 훌륭한 수행주제입니다. 죽음을 떠나서는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죽음에 대한 명상수행 없이는 결코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7.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 방법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은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생의 절박함을 인식함으로서 하루하루를 헛되게 보내지 않고 선업공덕을 쌓으며 통찰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수행의 한 방법입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자애 명상>과 마찬가지로 아침· 저녁 예불시간이나 좌선·행선을 시작하기 전에 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승의 경우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종종합니다. 반드시 정형구를 독송·암송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닥쳐올 임종의 순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새벽녘 눈을 뜨면 <아직 이렇게 살아 있구나!> <오늘이 이번 생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라고 속으로 되새깁니다. 그리고 가끔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이 사대육신 언젠가는 혹은 곧 저 한 조각 흰 구름처럼 어디론가 흩어지겠지> 하고 새김합니다. 그렇다고 <무상관>(無常觀)처럼 자주 혹은 지속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죽음관>이나 <부정관> 등은 ‘때에 따라서 적당히’ 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게 될 2가지의 정형구(1),(2)는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게송들입니다. 정형구 (2)는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행할 때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공통으로 독송하고 있는 정형구입니다. 정형구 (1)은 이 승이 실제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할 때 활용하는 정형구로서, 정형구 (2)를 좀 더 보충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여 만든 정형구입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시신이나 백골을 직접 관(觀)한다거나 혹은 그러한 영상(이미지)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곳에 홀로 혹은 여럿이 앉아 정형구를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속으로 암송하거나 소리 내어 독송함으로서 마라(죽음)가 항상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로 인해 죽음을 망각하지 않을 수 있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도록 해줍니다.
(1)
생사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라면
출가자 재가자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관(觀)을 닦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실천 수행해야 합니다.
아침마다 혹은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언제나 어디서나
죽음의 현상과 죽음의 실상에 대하여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거듭거듭 숙고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 없이는
깨달음의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죽음의 현상을 통찰하지 않고서는
생사윤회의 쳇바퀴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의 근심으로 사는 인생
백년을 살아도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은 인생
천년을 산다 한들 잘 살았다 하겠는가?
만년을 산다 한들 여한없이 살았다 하겠는가?
삶과 죽음은 한 호흡 사이에 있는 법.
들이킨 숨 못 뱉으면 그게 바로 죽음.
죽음을 목전에 둔 자여!
죽음 앞에 과연 무엇이 남을 건가?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지만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 오히려 그 죽음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최고의 축복!
생사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
모든 천상과 인간의 위대한 스승 부처님께서는
생사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들에게
죽음의 현상과 죽음의 실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상하라 이르셨나니,
(2)
바람에 의해 등불 꺼지듯
이 생명 또한 언젠가 소멸되는 것.
물질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바르게 관하라.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련하라.
삶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한 것.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을 맞는다네.
삶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난다네.
대단한 성취를 이룬 자도
이 세상에서 결국 죽듯이
나 역시 죽을 수밖에 없네.
죽음이 나에게 엄습해오고 있네.
살인마가 항상
살생의 기회를 엿보듯이
태어남은 항상 죽음과 함께
찾아온다네.
떠오른 해가
서쪽으로 지듯이
생명은 조금도 멈춤이 없이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네.
번갯불같이, 거품같이
이슬같이, 물안개같이 생명은 소멸한다네.
죽음은 원수를 쫓는 살인마처럼
멈춤이 없네.
영광된 자, 힘센 자, 공덕이 있는 자,
권력을 지닌 자, 지혜를 지닌 자, 정복자
그들 모두 죽음을 맞는다네.
하물며 나 같은 자는 말할 필요도 없네.
생명에 대한 지원 결핍과
내적인 혹은 외적인 재난으로
순간, 순간 죽어가고 있는 나는
눈 깜빡할 새 죽을 수도 있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생명은
표시도 없고, 길이도 알 수 없네.
삶은 어렵고, 제한되어 있으며
고통으로 묶여 있다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이
죽지 않을 가능성은 없네.
늙어지면 죽는 것,
이것이 살아 있는 존재의 본성이라네.
열매가 익어서 때가 되면
반드시 땅바닥에 떨어지듯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항상
죽는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네.
점토로 만들어진 옹기가
언젠가는 부서지듯
살아 있는 존재는
결국 죽어야만 한다네.
젊은이, 늙은이,
어리석은 자, 현명한 자,
이 모든 이들 죽음으로 나아간다네.
모든 이들은 결국 종말을 맞이한다네.
과거에도 그들은 죽었고
미래에도 반드시 죽을 것이며
나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런 건 내게 있어 의심할 수 없는 진리.
오래지 않아 이 몸
흙 위에 던져져 누워 있고
의식마저 사라져버릴 때
나무토막보다도 소용 없으리.
초대받지 않고 여기에 왔다가
동의도 없이 여기를 떠난다네.
여기에 온 그 때, 바로 가 버렸는데
거기에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형성되어진 것은 실로 무상한 것,
이것이 생멸의 법칙.
생기고 사라짐이 멈출 때,
그 적멸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네.
8.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의 이익
<죽음에 대한 명상>을 <죽음관>, <사수념(死隨念)>, 빨리어로 <마라나-사띠(Maraņa-sati)>라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시신이나 백골을 직접 보면서 그 부정함을 관하는 <부정관(不淨觀)>이나 신체의 장기 등 32부분을 마음속으로 시각화(이미지화)하여 거듭거듭 사띠(새김, 주시, 기억, 마음챙김, 알아차림)하는 <염의관(厭意關)>과는 사띠하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부정관>과 <염의관>이 직접적인 시각인식(관념이미지 포함)을 통해 감각적 대상에 대한 부정한 인식을 심화시켜 결국 감각적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식이라면, <죽음에 대한 명상>은 죽음과 관련된 정형구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우리가 평소에 망각하고 있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주고 생의 절박함을 깨닫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로 인해 수행자는 아무리 짧은 시간일지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생사해탈을 위해 가일층 수행에 매진하게 됩니다. 『위숫디 막가(淸淨道論)』에는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의 이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실천하면 수행자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나 사띠(알아차림)가 생겨나도록 합니다.
생에 대한 탐착을 없애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합니다.
목숨에 대해 애착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게 합니다.
선업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없애주며,
물건을 쌓아두거나 탐닉함으로 인해 생겨난
마음의 더러움과 인색함을 제거해줍니다.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는 인식을 생겨나게 하고
무상하다는 인식과 함께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는 인식을 생겨나게 하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나(자아)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생겨나게 합니다.
죽음을 거듭 생각하는 수행을 하지 않은 이들은
임종의 시간에 순간적으로 갑자기
귀신, 마라, 뱀, 강도, 살인자를 만나
고통을 당하는 이들처럼 놀라 두려움에 떨면서
당황하지만,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행한 이에게는
결코 그러한 일이 발생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차분하게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생에는 설령 닙바나(열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선처(善處)에 태어나게 됩니다.
9. 맺는 말
우리는 종종 <부고>를 받습니다. 조의금 봉투를 하나 챙겨들고 부고장에 적인 장례식장을 찾아갑니다. 향 한 개비 사루고 잔 한 잔 올리고 영정 사진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립니다. 애도를 표하며 유족들을 위로합니다. 친족이나 친구의 경우엔 장지(화장장)까지 쫓아가 몇 시간 만에 한 줌 재가 되어 나오는 육신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잠시 인생무상에 젖어듭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그 죽음은 곧 잊혀 집니다. 빠르면 하룻밤 늦어도 사흘 정도면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사라집니다. 일상은 살아있는 자들의 영역으로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발붙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습니다. 일상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스토리는 이와 같은 보편적 특성에 기반한, 살아있는 자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산 자들의 서사입니다.
산 자들의 무대인 일상의 한켠에 자판기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들이 종종 받는 <부고>는 자판기에서 빠져나오는 종이컵과도 같습니다. 일상 속에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비워지는 즉시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버려지는 1회용 종이컵과도 같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죽음에 대한 그와 같은 1회성 인식을 경계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이면에는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고, 죽음의 순간은 또 다른 삶으로 연결됩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없이는 삶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최근 화석연료 과대사용과 열대우림 파괴로 인해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1회용 컵 대신 개인용 머그컵을 권장하고 있지요. 죽음에 대한 인식은 순간적으로 구겨져 벼려지는 1회용 종이컵이 아닌, 항상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머그컵 같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머그컵처럼 가지고 다니면,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함께 삶에 대한 바른 통찰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고따마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련하도록 당부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승 역시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혹은 곧. 출가 이래 무수히 많은 임종자를 만나 보았습니다. 불려서 가기도 하고 공부를 위해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임종자의 상황과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임종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고 임종자를 도왔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고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마라(죽음)로부터 벗어나려는 죽음이 아니라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이 죽음 또한 소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임종자를 안내하고 유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생노병사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치를 거스르면 괴로움이 증폭되지만
이치를 따라가면 평안에 이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십시오. 일평생
삼보를 공경하고 공양 올리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 올리십시오.
악업도 지으셨겠지만 선업공덕 많이
쌓으셨습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이 생이 끝이 아닙니다.
반드시 좋은 곳에 태어날 것입니다.
죽음은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한 번 꼭 통과하는 문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지나갔고,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 스님도 언젠가는 반드시 혹은 곧
이 문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거사님!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시간, 놓아버려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손아귀 속에 움켜쥔 한 마리 새를
영원한 자유의 하늘로 날려 보낼 시간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이별은 결코 가슴 아픈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나의 딸, 사랑하는 나의 아빠라는 관념, 그리고
무상·고·무아의 지혜를 함께 수행했던 도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당부합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사랑하십시오.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잡은 손 기꺼이
놓을 수 있도록만 사랑하십시오.
거사님!
사랑하는 가족·친지·도반이라는 인연의 끈을
가볍게 내려놓으시고, 당신의 마지막 의식에
집중하십시오. 놓아버림·무주(無住)·무상(無相)·
무아(無我)의 지혜로 어리석은 마음이 일으키고 있는
그 찰거머리 같은 한 생각, 그 ‘아집의 촛불’을
훅 불어 끄십시오. 그리고 들어가십시오.
진리의 세계로! 무주의 세계·무상의 세계·
무아의 세계를 넘어 해탈의 세계로!
불멸 2565(2021). 5.9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빤냐완따 스님의 스승이신 인도 상가라자 라스트라팔 마하테라의 사진.
마하시 사야도의 직계제자로 1960년 당시 쇠락해가던 인도불교를 중흥시킨 존경받는 큰스님입니다. 사진속의 차량행렬은 큰스님의 운구행렬이 부다가야 마하보디 대탑을 돌아 화장장으로 향하는 장면입니다.



아래 사진은 판냐완따 스님의 절친 도반이셨던 효진스님으로 남방가사를 입고 조계종 선방(경문 봉암사 선방)에서 결재를 난 유일한 스님입니다. 입적 직전까지 미얀마에서 수행하시다가 평소 앓던 심장병이 재발하여 긴급히 한국으로 이송하였으나 끝내 입멸하셨습니다.

한국테라와다 불교 소속 경주 마하보디선원의 선원장이셨던 냐나로까 스님의 영정사진입니다.



1. 삶과 죽음, 그 불가분의 관계
세상에는 <서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가분의 관계>라고 하지요. 동전의 양면이 그러하고, 손등과 손바닥이 그렇습니다. 안면과 뒷면, 안쪽과 바깥쪽, 물체와 그림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육신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마음이 없는 몸은 이미 살아 있는 육신이 아닙니다. 공존 혹은 공멸. 운명공동체라고나 할까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존재하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 또한 소멸한다는 연기의 법칙이 <불가분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독립적으로는 결코 존재하거나 성립할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삶과 죽음>입니다.
죽음의 상대개념이 삶(살아있음)이요, 삶(살아있음)의 반대개념이 죽음입니다. 삶의 이면에는 항상 죽음이 존재하고, 죽음으로 인해 삶 또한 현전하는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시간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가? 그렇습니다. 삶은 죽음 이후에 찾아옵니다. 다양한 시간대별의 죽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태에서 죽기도 하고, 젊어서 사고로 죽기도 하고, 천수를 누리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라는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 죽음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찰라’입니다.
2. 삶과 죽음이 한 호흡 사이에 있다.
죽음 이후 사대육신이 흔적 없이 사라지기까지는 일정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육신은 죽음의 잔영일 뿐 실재 죽음은 임종의 순간에 이미 끝나버렸고, 전생의 업을 따라 또 다음 생이 존재할 뿐입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생사가 한 호흡 사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들어온 숨 내뱉지 못한다면 생명은 이미 끝나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매 순간 생멸(생사)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오온의 모든 현상을 매 순간 순간마다 ‘생기고 사라짐’으로 관을 합니다. ‘생겨났다가 사라졌다’는 말은 ‘삶과 죽음’이 매 순간 우리의 일상 속에 현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죽음에 대한 알아차림 경·1,2>(AN8:73~74)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1)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명상>수행을 실천하고
공부 지으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으며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하게 되나니
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명상>수행을 해야 하느니라.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실로 나는 하룻밤 하루낮 밖에 살 수 없을지 모른다.
이러한 마음으로 세존의 교법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이렇게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련합니다.
(또 어떤 비구는, 실로 나는
.....하루 낮 밖에,
.....한나절 밖에,
.....한 끼 밥 먹는 시간 밖에,
.....밥을 반 쯤 먹는 시간 밖에,
.....밥을 몇 술 뜨는 시간 밖에,
.....한입 음식을 씹어 삼키는 시간 밖에.....)
비구들이여, 그러나 어떤 비구는 다음과 같이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행하느니라.
‘실로 나는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쉬는 시간 밖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을 일러
방일하지 않고,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죽음에 대한 명상>을 예리하게 닦는다고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하느니라.
‘우리는 방일하지 않고 항상 힘써 정진하리라.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죽음에 대해 거듭 숙고하는
<죽음에 대한 명상>을 예리하게 닦으리라’ 라고.
(2)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날이 지고
밤이 돌아왔을 때 이와 같이 숙고하느니라.
<내게 죽음을 가져올 여러 조건이 있다.
뱀이 나를 물지도 모른다. 혹은
전갈이 나를 물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내게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혹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르고,
비인간들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죽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내게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비구들이여,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해야 하느니라.
<내가 이 밤에 죽게 되면 내게 장애가 될,
아직 제거되지 않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자신을 반조해서
<내가 이 밤에 죽게 되면 내게 장애가 될,
아직 제거되지 않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내게 남아 있다> 라고 알게 되면 그는
그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
강한 의욕과 노력과 관심과 불퇴전과
분명한 앎에 의한 바른 사띠를 유지하게 되느니라.
예를 들어, 옷이나 머리에 불이 붙은 자는
그 불을 끄기 위해 아주 강한 의욕과
노력과 관심과 불퇴전과 분명한 앎에 의한
바른 사띠를 유지하게 되는 것과 같느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자신을 반조해서
<내가 이 밤에 죽더라도 내게 장애가 될,
아직 제거되지 않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내게 남아 있지 않다>라고 알게 되면
그 비구는 밤낮으로 유익한 법에 가일층
공부 지으면서 희열과 환희에 머물게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명상>을 닦고
공부 지으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으며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하게 되느니라.
3.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다 보면
‘제행무상’은 고따마 붓다께서 발견하신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제행무상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삶과 죽음’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고,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 진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따로 떼어놓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삶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한 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과 얼음이 모양은 달라도 본질은 같듯, 삶은 항상 죽음을 동반하고 있으며,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연결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곧 삶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가져다 줄 육체적 고통과 존재의 소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죽음에 대한 관념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죽음을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의도적으로 갖지 않음으로써 삶과 죽음과의 간격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싫어합니다. 누구나 더 오래 살기를 바라고, 고통이 없기를 바라고, 심지어는 영생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잊고 아름답거나 즐거운 대상을 찾아 탐닉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감각적 대상에 빠져서 혹은 먹고 살기 바빠서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다 보면 언젠가는 맞게 될 혹은 곧 닥쳐오게 될 죽음을 망각하게 됩니다. 이미 곁에 와 있는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굿따까 니까야』<담마빠다>(진리의 말씀)에는 죽음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옵니다.
그대는 이제 시든 낙엽
염라대왕의 사자도 그대 곁에 와 있다.
그대는 죽음의 길목에 서 있다.
그런데 그대에게는 노자마저 없구나.
그대의 생애는 종점에 다다랐다.
그대는 이미 염라왕 앞에 와 있다.
도중에 쉴 곳도 없는데
그대에게는 노자마저 없구나.
뼈로써 성곽을 이루고
피와 살로써 포장되었다.
그 안에 늙음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자만과 위선이 웅크리고 있다.
허공중에서도 바다 한가운데서도
또는 산속 동굴에 들어갈지라도
거기 머물러 죽음에서 벗어날
그런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4.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음과 건강과 장수를 미덕으로 여기고, 늙음과 질병과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거나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늙음과 병듦을 감추고, 죽음을 회피하려 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다’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우리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삶에 대한 고귀한 성찰의 기회를 외면해버리고 맙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과연 삶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토록 부정적인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도 늙음이 고통이요, 병듦이 고통이요, 죽음이 고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식 때문에 생겨난 고통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늙음과 병듦과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그 자체에는 본래 고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거나 역행하려 할 때 고통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죽음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문제를 당당하게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삶과 죽음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진진하게 숙고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등은 고민해 보았어도 정작 죽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임종의 순간 우리는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평소에 죽음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으면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영원하다’라는 착각과 함께 온갖 욕심과 성냄으로 한 생애를 허비하다 문득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5.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
2가지의 죽음이 있습니다. 즉, 육체의 죽음과 정신의 죽음입니다. 이 2가지 죽음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죽음은 반드시 2종류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고통 없이 비교적 편안한 임종을 맞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육체적 고통은 그것이 크던 작던 누구나 그 고통의 크기만큼만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적 고통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은 임종 당사자와 유족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 여하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담마(法)를 실천하면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는다면 죽음의 순간 그 정신적 고통은 최소화 되지만, 평소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없이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죽음을 맞게 되면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정신적 고통은 크게 2가지로 나타나납니다. 하나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통한 이별의 아픔입니다. 이 아픔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으로서 임종 당사자는 물론 유족들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이와 같은 치명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초기경전 곳곳에 설해져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 때 광인(狂人)이었던 <빠따짜라 수행녀 일화>와 부처님의 겨자씨 비유를 통해 슬픔을 극복한 <끼사고따미 수행녀 일화>입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두 여인은 극한의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훗날 아라한과를 성취하여 많은 제자들을 생사해탈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빠따짜라 수행녀 일화
빠따짜라는 사왓띠성에 사는 뛰어난 외모를 지닌 대부호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몸종과 함께 멀리 집을 떠나 아이 둘을 낳아 기르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부모님을 꼭 한번 뵈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사왓띠성으로 가는 도중에 남편은 독사에 물려 죽었고,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가 두 자식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홀로 고향에 당도하고 보니 부모님마저 간밤 폭우에 휩쓸려 돌아가신 상태였습니다.
순간 빠따짜라는 정신을 놓아버린 채 사왓띠성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제따와나 수도원에 이르러 부처님을 뵙게 됩니다. 비구들이 미친 여인을 저지하려 하자 부처님께서는 ‘저 여인을 막지 말라’ 하시고는 미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셨습니다.
“빠따짜라여,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너를 보호해줄 수 있고,
인도해줄 수 있는 곳에 이르렀느니라.
헤아릴 수 없는 윤회 속에서 그대가
부모·자식·형제를 잃고 흘린 눈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에 대하여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좀더 깨어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청정한 마음으로
닙바나(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느니라.”
빠짜짜라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정신이 돌아왔고, 자신의 헝클어진 모습을 확인하고는 너무나 부끄러워 몸을 웅크린 채로 부처님의 자비로우신 음성에 정신을 집중하였습니다. 빠짜짜라는 부처님의 법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수다원과를 성취하였고, 부처님의 허락을 얻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그 뒤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침내 모든 번뇌를 여읜 아라한이 되었으며, 가족·친지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훗날 빠따짜라의 이와 같은 행을 크게 칭송하시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주셨습니다.
Yo ca vassasataṁ jive
요 짜 왓사사땅 지웨-
apassaṁ udeyabbayaṁ
아빳상 우데-얍바양
ekāhaṁ jivitaṁ seyyo
에까-항 지위땅 세-이요-
passato udayabbayaṁ.
빳사또- 우다얍바양.
오온의 생멸현상(生死)을 알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오온의 생멸현상(生死)을 깨닫고 사는
하루가 훨씬 났느니라.
(2) 끼사고따미 수행녀 일화
끼사고따미는 사왓띠성에 사는 한 재산가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젊은 재산가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에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죽은 아이 곁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다가 마침내 아기 시신을 품에 안은 채 사왓띠 시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아이를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왓띠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고따마 부처님을 찾아가면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아들을 살려 달라 애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식을 잃은 끼사고따미를 가엽게 여기시고는 자비로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여,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줌을 얻어 가지고 온다면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알려주겠노라.”
여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돌아다녀 보았지만 지금까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집은 없었습니다. 끼사고따미는 죽은 아들을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나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가정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죽은 사람의 수가 살아있는 사람의 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부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된 끼사고따미는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극한의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침내 모든 번뇌를 여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끼사고따미 테리(장노 비구니)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 주셨습니다.
Yo ca vassasataṁ jive
요 짜 왓사사땅 지웨-
apassaṁ amataṁ padaṁ
아빳상 아마땅 빠당
ekāhaṁ jivitaṁ seyyo
에까-항 지위땅 세-이요-
passato amataṁ padaṁ.
빳사또- 아마땅 빠당.
죽음을 초월하는 길을 모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단 하루라도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의 길을 알고 사는 것이 훨씬 났느니라.
6.<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은 중요한 수행!
① <죽음은 생멸의 한 현상으로서 궁극의 해탈·열반으로 가는 대자유의 문>이 될 수도 있고, ② <다음 생으로 들어가는 연결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이 결코 행복일 수는 없지만, 죽음은 반드시 괴로운 것이고 죽음은 반드시 불행한 것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죽음은 아직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③ <죽음은 누구나 한 번은 예외 없이 겪게 되는 일반적인 현상>이며, ④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통과하게 되는 관문>이며, ⑤<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길이고 통과했던 문>입니다. 어찌 보면 ⑥ <새로울 것도 낯설 것도 전혀 없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입니다. 이와 같은 6가지 인식은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없애주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제거해 줍니다.
몸과 마음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언제나 수행처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은 몸과 마음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을 떠난 수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선방(집중수행처)에서 일어나는 번뇌(탐진치)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일상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번뇌가 생겨납니다. 생겨나는 번뇌를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번뇌를 생기게 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을 제대로 알고 보면 번뇌기 소멸됩니다. 즉, 번뇌의 생성지점이 곧 번뇌의 소멸점입니다. 이렇게 알고 이해하면 이것은 바른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그대로가 수행이 되고 깨달음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는 것은 그대로가 중요한 수행입니다. 죽음은 그 자체로서 훌륭한 수행주제입니다. 죽음을 떠나서는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죽음에 대한 명상수행 없이는 결코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7.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 방법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은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생의 절박함을 인식함으로서 하루하루를 헛되게 보내지 않고 선업공덕을 쌓으며 통찰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수행의 한 방법입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자애 명상>과 마찬가지로 아침· 저녁 예불시간이나 좌선·행선을 시작하기 전에 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승의 경우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종종합니다. 반드시 정형구를 독송·암송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닥쳐올 임종의 순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새벽녘 눈을 뜨면 <아직 이렇게 살아 있구나!> <오늘이 이번 생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라고 속으로 되새깁니다. 그리고 가끔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이 사대육신 언젠가는 혹은 곧 저 한 조각 흰 구름처럼 어디론가 흩어지겠지> 하고 새김합니다. 그렇다고 <무상관>(無常觀)처럼 자주 혹은 지속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죽음관>이나 <부정관> 등은 ‘때에 따라서 적당히’ 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게 될 2가지의 정형구(1),(2)는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게송들입니다. 정형구 (2)는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행할 때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공통으로 독송하고 있는 정형구입니다. 정형구 (1)은 이 승이 실제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할 때 활용하는 정형구로서, 정형구 (2)를 좀 더 보충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여 만든 정형구입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시신이나 백골을 직접 관(觀)한다거나 혹은 그러한 영상(이미지)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곳에 홀로 혹은 여럿이 앉아 정형구를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속으로 암송하거나 소리 내어 독송함으로서 마라(죽음)가 항상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로 인해 죽음을 망각하지 않을 수 있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도록 해줍니다.
(1)
생사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라면
출가자 재가자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관(觀)을 닦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실천 수행해야 합니다.
아침마다 혹은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언제나 어디서나
죽음의 현상과 죽음의 실상에 대하여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거듭거듭 숙고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 없이는
깨달음의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죽음의 현상을 통찰하지 않고서는
생사윤회의 쳇바퀴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의 근심으로 사는 인생
백년을 살아도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은 인생
천년을 산다 한들 잘 살았다 하겠는가?
만년을 산다 한들 여한없이 살았다 하겠는가?
삶과 죽음은 한 호흡 사이에 있는 법.
들이킨 숨 못 뱉으면 그게 바로 죽음.
죽음을 목전에 둔 자여!
죽음 앞에 과연 무엇이 남을 건가?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지만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 오히려 그 죽음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최고의 축복!
생사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
모든 천상과 인간의 위대한 스승 부처님께서는
생사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들에게
죽음의 현상과 죽음의 실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상하라 이르셨나니,
(2)
바람에 의해 등불 꺼지듯
이 생명 또한 언젠가 소멸되는 것.
물질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바르게 관하라.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련하라.
삶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한 것.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을 맞는다네.
삶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난다네.
대단한 성취를 이룬 자도
이 세상에서 결국 죽듯이
나 역시 죽을 수밖에 없네.
죽음이 나에게 엄습해오고 있네.
살인마가 항상
살생의 기회를 엿보듯이
태어남은 항상 죽음과 함께
찾아온다네.
떠오른 해가
서쪽으로 지듯이
생명은 조금도 멈춤이 없이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네.
번갯불같이, 거품같이
이슬같이, 물안개같이 생명은 소멸한다네.
죽음은 원수를 쫓는 살인마처럼
멈춤이 없네.
영광된 자, 힘센 자, 공덕이 있는 자,
권력을 지닌 자, 지혜를 지닌 자, 정복자
그들 모두 죽음을 맞는다네.
하물며 나 같은 자는 말할 필요도 없네.
생명에 대한 지원 결핍과
내적인 혹은 외적인 재난으로
순간, 순간 죽어가고 있는 나는
눈 깜빡할 새 죽을 수도 있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생명은
표시도 없고, 길이도 알 수 없네.
삶은 어렵고, 제한되어 있으며
고통으로 묶여 있다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이
죽지 않을 가능성은 없네.
늙어지면 죽는 것,
이것이 살아 있는 존재의 본성이라네.
열매가 익어서 때가 되면
반드시 땅바닥에 떨어지듯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항상
죽는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네.
점토로 만들어진 옹기가
언젠가는 부서지듯
살아 있는 존재는
결국 죽어야만 한다네.
젊은이, 늙은이,
어리석은 자, 현명한 자,
이 모든 이들 죽음으로 나아간다네.
모든 이들은 결국 종말을 맞이한다네.
과거에도 그들은 죽었고
미래에도 반드시 죽을 것이며
나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런 건 내게 있어 의심할 수 없는 진리.
오래지 않아 이 몸
흙 위에 던져져 누워 있고
의식마저 사라져버릴 때
나무토막보다도 소용 없으리.
초대받지 않고 여기에 왔다가
동의도 없이 여기를 떠난다네.
여기에 온 그 때, 바로 가 버렸는데
거기에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형성되어진 것은 실로 무상한 것,
이것이 생멸의 법칙.
생기고 사라짐이 멈출 때,
그 적멸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네.
8.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의 이익
<죽음에 대한 명상>을 <죽음관>, <사수념(死隨念)>, 빨리어로 <마라나-사띠(Maraņa-sati)>라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시신이나 백골을 직접 보면서 그 부정함을 관하는 <부정관(不淨觀)>이나 신체의 장기 등 32부분을 마음속으로 시각화(이미지화)하여 거듭거듭 사띠(새김, 주시, 기억, 마음챙김, 알아차림)하는 <염의관(厭意關)>과는 사띠하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부정관>과 <염의관>이 직접적인 시각인식(관념이미지 포함)을 통해 감각적 대상에 대한 부정한 인식을 심화시켜 결국 감각적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식이라면, <죽음에 대한 명상>은 죽음과 관련된 정형구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우리가 평소에 망각하고 있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주고 생의 절박함을 깨닫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로 인해 수행자는 아무리 짧은 시간일지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생사해탈을 위해 가일층 수행에 매진하게 됩니다. 『위숫디 막가(淸淨道論)』에는 <죽음에 대한 명상> 수행의 이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실천하면 수행자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나 사띠(알아차림)가 생겨나도록 합니다.
생에 대한 탐착을 없애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합니다.
목숨에 대해 애착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게 합니다.
선업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없애주며,
물건을 쌓아두거나 탐닉함으로 인해 생겨난
마음의 더러움과 인색함을 제거해줍니다.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는 인식을 생겨나게 하고
무상하다는 인식과 함께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는 인식을 생겨나게 하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나(자아)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생겨나게 합니다.
죽음을 거듭 생각하는 수행을 하지 않은 이들은
임종의 시간에 순간적으로 갑자기
귀신, 마라, 뱀, 강도, 살인자를 만나
고통을 당하는 이들처럼 놀라 두려움에 떨면서
당황하지만,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행한 이에게는
결코 그러한 일이 발생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차분하게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생에는 설령 닙바나(열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선처(善處)에 태어나게 됩니다.
9. 맺는 말
우리는 종종 <부고>를 받습니다. 조의금 봉투를 하나 챙겨들고 부고장에 적인 장례식장을 찾아갑니다. 향 한 개비 사루고 잔 한 잔 올리고 영정 사진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립니다. 애도를 표하며 유족들을 위로합니다. 친족이나 친구의 경우엔 장지(화장장)까지 쫓아가 몇 시간 만에 한 줌 재가 되어 나오는 육신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잠시 인생무상에 젖어듭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그 죽음은 곧 잊혀 집니다. 빠르면 하룻밤 늦어도 사흘 정도면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사라집니다. 일상은 살아있는 자들의 영역으로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발붙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습니다. 일상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스토리는 이와 같은 보편적 특성에 기반한, 살아있는 자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산 자들의 서사입니다.
산 자들의 무대인 일상의 한켠에 자판기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들이 종종 받는 <부고>는 자판기에서 빠져나오는 종이컵과도 같습니다. 일상 속에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비워지는 즉시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버려지는 1회용 종이컵과도 같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죽음에 대한 그와 같은 1회성 인식을 경계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이면에는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고, 죽음의 순간은 또 다른 삶으로 연결됩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없이는 삶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최근 화석연료 과대사용과 열대우림 파괴로 인해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1회용 컵 대신 개인용 머그컵을 권장하고 있지요. 죽음에 대한 인식은 순간적으로 구겨져 벼려지는 1회용 종이컵이 아닌, 항상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머그컵 같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머그컵처럼 가지고 다니면,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함께 삶에 대한 바른 통찰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고따마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명상>을 수련하도록 당부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승 역시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혹은 곧. 출가 이래 무수히 많은 임종자를 만나 보았습니다. 불려서 가기도 하고 공부를 위해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임종자의 상황과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임종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고 임종자를 도왔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고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마라(죽음)로부터 벗어나려는 죽음이 아니라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이 죽음 또한 소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임종자를 안내하고 유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생노병사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치를 거스르면 괴로움이 증폭되지만
이치를 따라가면 평안에 이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십시오. 일평생
삼보를 공경하고 공양 올리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 올리십시오.
악업도 지으셨겠지만 선업공덕 많이
쌓으셨습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이 생이 끝이 아닙니다.
반드시 좋은 곳에 태어날 것입니다.
죽음은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한 번 꼭 통과하는 문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지나갔고,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 스님도 언젠가는 반드시 혹은 곧
이 문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거사님!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시간, 놓아버려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손아귀 속에 움켜쥔 한 마리 새를
영원한 자유의 하늘로 날려 보낼 시간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이별은 결코 가슴 아픈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나의 딸, 사랑하는 나의 아빠라는 관념, 그리고
무상·고·무아의 지혜를 함께 수행했던 도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당부합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사랑하십시오.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잡은 손 기꺼이
놓을 수 있도록만 사랑하십시오.
거사님!
사랑하는 가족·친지·도반이라는 인연의 끈을
가볍게 내려놓으시고, 당신의 마지막 의식에
집중하십시오. 놓아버림·무주(無住)·무상(無相)·
무아(無我)의 지혜로 어리석은 마음이 일으키고 있는
그 찰거머리 같은 한 생각, 그 ‘아집의 촛불’을
훅 불어 끄십시오. 그리고 들어가십시오.
진리의 세계로! 무주의 세계·무상의 세계·
무아의 세계를 넘어 해탈의 세계로!
불멸 2565(2021). 5.9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빤냐완따 스님의 스승이신 인도 상가라자 라스트라팔 마하테라의 사진.
마하시 사야도의 직계제자로 1960년 당시 쇠락해가던 인도불교를 중흥시킨 존경받는 큰스님입니다. 사진속의 차량행렬은 큰스님의 운구행렬이 부다가야 마하보디 대탑을 돌아 화장장으로 향하는 장면입니다.
아래 사진은 판냐완따 스님의 절친 도반이셨던 효진스님으로 남방가사를 입고 조계종 선방(경문 봉암사 선방)에서 결재를 난 유일한 스님입니다. 입적 직전까지 미얀마에서 수행하시다가 평소 앓던 심장병이 재발하여 긴급히 한국으로 이송하였으나 끝내 입멸하셨습니다.
한국테라와다 불교 소속 경주 마하보디선원의 선원장이셨던 냐나로까 스님의 영정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