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7. 정념(正念, sammā sati, 삼마- 사띠) (20081127)

담마마-마까
2021-07-16
조회수 51

https://youtu.be/qLSX_rquYHQ

2) 정념

오늘은 ‘삼마-사띠(sammā sati)’ 두 번째 부분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지금 프린트물이, ‘담마스쿨’ 한 것이 거의 200페이지가 다 되어가네. ‘팔정도’ 끝나고 나면 뭐 한다고 그랬습니까? ‘오력’한다 그랬어요? 오력까지 하고 나면 아마 한권 분량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번 12월 12일까지는 ‘팔정도’ ‘삼마 사마디’까지 해서 끝냅니다이. 내년에 ‘오력’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삼마-사띠(sammā sati)’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어제 ‘사띠’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주의해야 되는 것들을 얘기를 했습니다. 그중에 두 번째가 뭡니까? 두 번째가 뭐라고 그랬어요? 한주 지났다고 다 까먹어 버렸어요? ‘수용하라!’는 얘기를 했죠! 싸우지도 말고, 배척하려고도 하지 말고, 붙잡으려고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띠’를 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반드시 여러분들은 명심을 해야 될 부분입니다이.

 

오늘은 그 둘째 시간입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 부처님이 이렇게 얘기를 했거든. ‘어느 누구든지 끊임없이 끊어지지 않고 사띠를 일주일만 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른다.’「대념처경」첫 마디에 나오는 말이죠! ‘사띠 일주일만 끊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른다.’ 그런 경험해 본 적 있습니까? 사띠가 끊어지지 않는 것!

 

지금은 여러분들이 대상을 쫒아가죠. 마음이! 조금 지나면 대상이 달라붙습니다. 달라붙는다는 얘기는 뭐냐 하면 내가 일부러 쫒아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항상 일치가 되어나간다 하는 것입니다. 그걸 표현하기를 ‘대상을 쫓아간다, 대상이 달라붙는다’하고 얘기합니다.

 

대상이 달라붙을 정도가 되면 사띠는 간혹은 끊어질지는 몰라도 거의 연속하다시피 합니다. 그렇게 쭉 하다 보면 밤에 잠이 안 와. 잠을 잘려해도 대상이 자꾸 지한테 달라붙는데, 나 좀 알아차려도 하고 달라붙는데 어떻게 잠이 올 거라? 알아차리고 있으면 잠이 안 와요. 그래서 처음에 할 때는 그 강약을 조절하는 법을 모르니까 며칠이고 잠을 못자는 거라. 그런데다가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번뇌를 제거하려는 것은 사띠라고 하는 강한 힘으로 인해서 하기 때문에 온몸에 열이 막 번지는 거라.

 

이걸 붙잡을 수가 없어. 이걸 가라앉혀야만 되는데 처음 수행하고 처음 경험해 보면 이걸 어떻게 다스리는 법을 몰라서 그때 자칫 잘못하면 헷가닥 하기도 하고. 또 아니면 거기서 ‘아, 이게 수행을 잘못하는갑다’ 해가지고 중단을 해버리는 거라. 그럼 인제 사띠는 이어지지 않고 중단이 돼버리죠.

사실은 그때도 계속해서 지속해서 그냥 계속 사띠만 할 것 같으면 그렇게 일주일만 넘어가 버리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거는 여기 있는 스님이 한 얘기가 아니고 부처님이 하신 얘깁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든지 일주일만 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질문)
그렇죠. 나중에 세월이 좀 지나면 이 사띠 강약을 조절할 때 놓아버려야 될 때와 그다음에 대상에 달라붙을 때 그것을 떨어뜨리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사띠가 잘되는데, 처음에 그거 경험할 때는 방법이 없는 거라. 뭐랄까 귀찮은 놈이 떨어지지도 않고 계속 와서 달라붙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마만큼 사띠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고 수행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기 교재를 한번 보십시오.
명칭을 붙여서 그 대상을 확인합니다. 맞습니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도 일어남 사라짐 하고 명칭을 붙이고, 발이 나아갈 때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명칭을 붙인단 말입니다. 엄밀하게 얘기할 때는 이것은 사띠는 아니죠? 사띠는 사띠더라도 이어지는 사띠는 아닙니다. 틀림없습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사띠는, 사띠가 이어진다는 것은 대상이 나에게 달라붙는 경우지 내가 대상에 달라붙는 것은 아니라. 내가 대상에 달라붙는다는 것은 명칭을 통해서 그 대상과 마음을 일치시켜주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일치가 안 되니까 당연히 대상이 나에게 달라붙지도 않는 거고, 그래서 일치시켜주기 위해서 우선 명칭을 붙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이 호흡이라는 대상에다가 일치시켜주기 위해서 명칭을 통해서 일치시켜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때는 사띠가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더라도 우선 달아날려고 하는 마음을 붙잡으려는 수단으로써 명칭을 쓰는 겁니다. 그걸 다라고 생각을 해가지고 항상 명칭을 붙이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진짜 사띠를 못하는 경우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명칭이 떨어질 때하고 떨어지지 않고 붙여야 될 때 하고 분명하게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차라리 명칭을 붙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계속되어 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안 붙이는 것이 좋아요. 걸어갈 때에도 그냥 명칭을 붙이면서 천천히 걷는 것보다 명칭 붙이지 않고 평상시 그냥 자연스럽게 걷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하는 얘기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 붙이는 명칭은 사띠가 아닌 것은 틀림없습니다. 사띠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면 사띠의 포인트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겁니다.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될 때 통상적으로 보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해서 몰입되어 버립니다. 끌려들어가 버린다는 겁니다.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이런 여러 가지 대상 중에서 가장 다스리기 힘들고 또 가장 안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는 것은 그냥 ‘봄, 봄’ 하면서 명칭만 조금 붙이면 가능합니다. 들리는 것도 ‘들림, 들림’ 하면서, 냄새 맡는 것도, 밥 먹을 때 맛보는 것 이런 것들도, 그리고 몸에서 일어나는 감촉들도 그것도 어찌 보면 사띠 하기가 좀 수월한 대상인데 가장 안 되는 게 뭐냐면 생각! 이 생각만 잘 다스리면 앞의 다섯 개는 자동적으로 다스려 나갈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띠의 포인트는 뭐냐 하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사띠하느냐에 따라서 사띠의 방향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탐심(貪心), 집착하려고 하는 것들, 아니면 배척하려고 하는 진심(瞋心), 이런 것들이 일어났을 때 가슴을 한번 보면 어떤 느낌이 들겠어요? 대부분 보면 크게 뭉뚱그려가지고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성질내고 나서 가슴 보면 답답합니다. 집착할 때도 마찬가지로 답답합니다.

명칭을 붙일 필요 없이, 이 느낌을 계속해서 알아차리기만 할 것 같으면 그 답답한 느낌은 서서히 사라져 갑니다. 서서히 감퇴되어 나갑니다. 신기하게 그런 답답한 것들이 완전하게 싹 사라진 것을 알게 됩니다.

아마 그런 경험들을 가끔씩 해 봤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답답함이 있을 때 그 답답함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안 하고, 다른 것을 대상으로 그 답답함을 대부분 메울려고 그러죠? 노래를 부른다든다 아니면 술을 마신다든가 해서 그 답답함을 피해버리는데 피해가지고는 절대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답답한 게 있으면 그 답답한 걸 갖다가 가만히 관찰함으로 인해서, 어차피 그것도 변하는 속성을 지니게 되어 서서히 변하게 돼있습니다. 변하는 모습만 그대로 알아차리면, 자연스럽게 천천히 변하면 천천히 변하는 대로, 빨리 변하면 빨리 변하는 대로, 그대로 그냥 보고만 있을 것 같으면 언젠가는 그것은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것만 자연스럽게 따라만 가줘도 생각의 꼬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이게 우째서 이렇게 생각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꼬리 정도는 잡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띠를 조금 더 연속해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이 마음에 대한 관찰들을 많이 합니다. 가장 쉬운 게 나한테 일어난 탐심(貪心)이나 진심(瞋心)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수행의 대상으로 합니다.

 

조금 더 힘이 생기면 답답함을 보기 전에 뭔가 또 다른 느낌이 또 있습니다. 사띠의 힘이 생기면. 그거는 여러분들에게 숙제를 줄 테니까 답답하기 이전에 어떤 느낌들이 또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띠의 포인트는 마음이 일어난 원인을 먼저 잡는 데에 있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대부분 탐심이나 진심이나 이런 것들이 일어나면 싫어하고 그것을 또 없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작용을 합니다. 그럴 때 그 일어난 느낌을 자꾸 관찰하도록 해 봐야 됩니다. 그래서 편안한 상태에서 경기장 안의 경기를 지켜보는 듯이 그냥 그대로 편하게 지켜보도록 그렇게 자꾸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영화 보러 가면, 영화 스크린 나타나면 영화 어떻게 봅니까? 지나치게 집중 할 것 같으면 영화를 보고 나면 되게 피곤합니다. 그런데 그냥 편안하게 그냥, 어차피 내가 보든 안 보든 영화 스크린은 돌아가는 거니까 편안하게 보고 나면 한결 개운하게 느껴집니다.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꼭 그와 같이 해야 됩니다. 그걸 지나치게 잡으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반드시 진심과 탐심이 같이 결합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것을 갖다가 알 수가 없고 내가 피곤하면 수행은 오래 못 합니다. 그래서 사띠의 정답은 뭐냐면, 어떤 것이 포인트냐면 가장 오래 할 수 있는 게 사띠입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해야 만이 하루 종일 사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빨리 찾아야 됩니다. 요렇게 하니깐 하루 종일 사띠를 해도 안 피곤하고 재미있다. 흥미가  있다! 근데 여기에 와서 한두 시간 천천히 이렇게 하고 나면 힘들고 피곤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띠의 포인트는 바로 그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띠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것인가? 흥미 있을 것인가? 그래서 하루 종일 할 수 있느냐 하는 걸 빨리 감을 잡아야 됩니다. 만약에 그게 안 된다 할 것 같으면 이어지는 것이 중단되고, 중단되고 하더라도 피곤하지 않는 방법을 택해야 됩니다.

그래서 설혹 10분 중에서 한 1분 정도는 연속함이 있고 9분 정도는 놓쳐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덜 피곤할 것 같으면 그 방법을 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그 이어지는 시간은 늘어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과도하게 이 10분 전체를 다 잡으려고 하다 보면 1분도 아니라 1초도 못 잡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사띠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거라. 자연스럽게! 그래서 호흡도 자연스러운 호흡이 되어야 되는 것이고 알아차릴 대상도 내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리게끔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해도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롭게 되는 것들이 사띠의 기본적인 포인트다 하는 것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안 될 때 명칭을 붙이기도 하고 경행하는 것을 조금 더 천천히도 하는 것이구나 하고 판단해야 되는 것이지 그게 전부라고 판단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항상 차분하게 가라앉아가지고 항상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일 것 같으면 반드시 대상은 딱 나한테 와서 달라붙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내가 대상을 찾아가는 거고, 그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가지고 자주 알아차리려고 하는 거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사띠가 자연스럽게 될 때 사띠의 힘은 반드시 커집니다. 그 생각을 하고 하루 종일 노력한다고 생각을 하고 자연스럽게 사띠하다 보면 그 사띠의 힘은 반드시 커진다 하는 것들을 아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사띠가 있는 것과 사띠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있지 않을 것 같으면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사띠만 있어 가지고는 안 되고 사띠가 이어지는 것만 있어도 안 됩니다. 이어지는 것만 있고 사띠가 없을 것 같으면 그냥 물 흐르듯이 아무런 현상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속에는 반드시 사띠가 있어야 되고 그 사띠가 있는 것이 반드시 이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마음속에다가 물어봐야 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뭘 하고 있지? 사띠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리고 그 사띠하고 있는 게 어디에다 두고 사띠를 하고 있느냐는 거라. 밖의 대상에 사띠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이 몸과 마음에다가 사띠하고 있는가?

 

밖의 대상에다가 사띠하고 있을 것 같으면 빨리 몸과 마음으로 돌려야 되는 거고. 밖의 대상을 보고 있다? 내가 여기 다현이 엄마를 보고 있다고 생각될 것 같으면 빨리 마음을 돌리라는 거라. 밖의 대상에 두지 말고 이 눈이라고 하는 것에 대상을 두라는 거라.

 

그래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가? 사띠를 갖다가 어디에 두고 있는가? 안에 두고 있는지? 밖에 두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가? 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반드시 이렇게 자꾸 되물어봐야 만이 사띠가 있게 되고 사띠가 이어질 수 있게끔 됩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자꾸 묻고 또 사띠가 있고, 사띠가 이어지도록 자꾸 노력들을 하도록 하면 언젠가는 ‘아, 사띠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구나’하는 얘기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조금 더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법을 한번 보겠습니다.

대부분 수행처에 가면 기본 코스를 30일 정도 두고 있습니다. 30일 두고 있는 데는 어떻게 수행을 지도하고 있느냐 하면 한 일주일 정도는 기본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첫날에는 ‘무조건 배만 관찰하라’ 해가지고 ‘일어남’, ‘사라짐’만 하라! 대상이 있든 없든 신경 쓰지 말고 그것만을 하라! 경행할 때에도 무조건 ‘왼발’, ‘오른발’만 하라!
그다음 날에는 ‘일어남’, ‘사라짐’ 하다가 아픈 것이 있으면 ‘아픔’도 관찰하라.

그다음, 경행할 때에도 왼발, 오른발 하지 말고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렇게 하라. 또 ‘오른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렇게 하라 그럽니다. 조금씩 양을 늘려줍니다.

 

그러다가 앉아있을 때 ‘일어남’, ‘사라짐’ 하다가 그것이 잘 안될 것 같으면 ‘앉음’을 갖다가 첨가하라. 아니면 ‘닿음’을 첨가하라는 닿음의 포인트를 늘려주고, 경행도 점점 포인트를 늘려줍니다.

그래서 6단계 아니면 12단계로 되는 포인트를 늘려줘서 그것을 갖다가 1주일 정도를 쭉 하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단계별로 서서히 늘려주는 것입니다. 그마만큼 알아차리게 되고 하니까 그렇게 해줍니다. 대부분 보면 되든 안 되든 그렇게 먼저 시킵니다.

 

그러다가 1주일 정도 지나고 나면 그다음에는 뭘 하냐면 16단계 지혜의 단계 훈련을 시킵니다.
‘자, 오늘 내가 이것을 가르쳐 줄 테니까 이것대로 한번 해 봐라!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 이러면서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자, 네가 마음이 있으면 손가락 두 개를 이렇게 붙여 봐라? 붙나? 그것이 어떻게 해서 붙었나? 이 육체적인 몸을 갖다가 마음으로 내가 붙어라 해가지고 가서 이것이 딱 붙었단 말이라. 그게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 주는 거다! 네가 이렇게 한번 해 봐라.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 주는 거니까 여기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한번 자세히 봐 봐라!’ 한 가지씩만 줍니다.

 

그다음에 한참 또 지나서는 하다가 보면 대상이 사라질 때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관찰을 해도 대상을 갖다가 알 수가 없단 말이라. 그때는 틀림없이 어떤 현상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한번 관찰을 해 봐라!

어떤 사람들은 이 16단계를 쭉 가르쳐 줘도 현상을 전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따라 하다 보면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되는 거라. 그러면서 뭔가가 탁 나타나! 그러면 가서 ‘스님, 나 이리이리 했습니다!’ 그러면 ‘아, 잘했다. 잘했다. 맞다, 맞다!’ 그러면서 그다음 또 한개 가르쳐주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단계들을 거쳐 수행을 스승이 없어도 자기 혼자 스스로 할 수 있는데까지 지도해주는데 보통 30일 정도 그렇게 걸립니다. 그러니까 단기 코스 4박5일, 10일 이리 할 것 같으면 절대 그렇게까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짧은 것이 보통 보면 26일 아니면 30일 코스 이렇게 해가지고 합니다.

 

그 속에서 가장 대부분 흥미로운 부분이 뭐냐 하면 여기에서 스님이 적어놓은 ‘행사지(行捨智)’라고 하는 ‘상카루뻭카 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 라고 하는 것. 사띠를 잘한다고 하는 것은 항상 ‘상카루뻭카 냐나’라고 하는 것이, 그런 지혜가 존재해 있는 상태를 얘기를 하는 겁니다.

 

‘상카라(Saṅkhāra)’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이 세상이 구성되어 있는 것들! 어떤 것이든, 그것을 갖다가 보통 이 세계라고 그럽니다. 나도 세계에 속하는 것이고 당신도 세계에 속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세계에 속합니다.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세계는 없습니다. 다 이 세계에 변화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에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생길 때에는 생길 원인이 있어가지고 생기는 것이고 사라질 때에는 사라질 원인이 있어서 사라지게끔 되어있거든. 원인·결과가 연결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게 뭐냐 하면 ‘상카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우리는 ‘의도’라고 그렇게 풀이를 하죠? 다음에 한번 상카라에 대해서 프린트물을 내주겠습니다. 의미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의미는 바로 이 얘기입니다.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항상 원인·결과라는 인과관계 속에서 생겼다가 사라진다! 그것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천천히 생겼다가 천천히 사라지는 게 아니고, 아주 짧은 찰나 찰나에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고 반복한다는 거라. 그게 ‘상카라’라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 ‘상카루뻭카’라고 하는 건 ‘상카라’라고 하는 것을 ‘우뻭카(upekkhā)’로써 아는 지혜! 우뻭카가 뭡니까? ‘평등’이죠! 고요하고 평화롭고 하는 평등입니다! 그런 상카라를 집착하든지 아니면 배척하든지 이렇게 안 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로써 아는 지혜를 갖다가 ‘상카루뻭카 냐나’라고 합니다.


‘사띠’를 뭐라고 그랬습니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대상을 움켜쥐려고도 하지 말고, 싫은 거라고 해서 배척하려고도 하지 말고 해야 만이 사띠가 됩니다. 그래서 사띠를 잘하는 사람은 항상 보면 ‘상카루뻭카 냐나’가 존재를 해 있는 겁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고 아는 지혜가 존재해야 됩니다.


보통 16냐나로 나누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19냐나, 19개로 나누기도 하고 그럽니다. 어쨌거나 16냐나 중에서 ‘상카루뻭카 냐나’가 통상적으로 11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도와 과에 이르기 직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많은 공을 들여야 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사띠만 하면 이 지혜, 이 경지는 그대로 여러분들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사띠를 할 때는 그냥 있는 그대로 자꾸 하라는 거라. 물(뭘) 타지 말고! 그게 사띠의 근본적인 의미이고.

 

프린트물 보면 그 밑에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사실은 비교할 수 있는 수행방법은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보면 테라와다 불교의 두 가지 수행방법에는 ‘사마타 바와나와 위빳사나 바와나 이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두 개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어느 하나를 떼어내 놓고 어느 하나만 한다는 것은 그것은 책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실제 수행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얘기입니다.

 

불교 2500년간을 이어오면서 이 두 가지 수행법을 같이 안 해온 적이 없습니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 쪽에도 보면 ‘왓 우몽’이라는 사원이 있습니다. 거기는 사마타 수행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스님이 있었던 ‘왓 람쁭’이라는 사원이 있는데 거기는 위빳사나 수행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왓 우몽’에 안가고 ‘왓 우몽’의 스님이 이 ‘왓 람쁭’에 안 오는 건 아니라. 서로 왔다 갔다 하거든. 내가 위빳사나 수행처는 아무래도 사람들도 많고 번잡하고 하니까 조용하게 집중력을 키우고 하려면 ‘왓 우몽’에 가서 또 하는 거라. 하다가 또다시 ‘왓 람쁭’으로 돌아오고 이렇게 자꾸 왔다 갔다 해요.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을 갖다가 키워나가는 거라.

집중력도 키워나가고 또 위빳사나의 기본인 사띠도 자꾸 계발해나가고 이렇게 되는 것이지 너는 이것만 하고 또 이 사람은 저것만 해라 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100% 사마타이다, 100% 위빳사나이다 하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책에서는 가능합니다. 순수 위빳사나, 순수 사마타 그것은 책에서는 가능할지는 몰라도 실제 수행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왜 이것을 써 놨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이럽니다. ‘마하시 수행법’이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 ‘마하시 수행법’으로 이렇게 배를 통해서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수행을 하다 보니까 어느 정도 조금 재미가 있거든. 그러다가 경계에 부딪치면 ‘마하시 수행법’이 또 진척이 안 될 때가 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 호소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이거 뭐 잘못됐다!’ 해가지고 ‘내한테 안 맞는가 보다!’ 해서 다른 수행법을 찾는 거라.

그래서 ‘파욱 센터’ 같은 곳에 가가지고 거기는 사마타 수행을 좀 많이 해주는데 거기 가서 사마타 수행을 또 열심히 합니다. 막 이렇게 하다 보면 ‘아, 이게 맞다!’ 그래가지고 ‘마하시 수행센터 이것이 잘못됐다!’ 하고.
또 다른 거 하다 보면 그거는 뭐 경계에 안 부딪치나? 또 경계에 툭 부딪치지! 그러면 인제 다시 또 다른 걸 찾는 거라.

이제는 조금 더 멀리 가서 아무도 잘 모르는 그런 사원에 가서 수행을 또 하고. 하다가 또 수행 잘 안되니까 또 ‘사대수행법’만 하는데 가서 또 그것만 합니다. 안 그러면 또 ‘아나빠나 사띠’라고 하는 순수하게 호흡만 하는 곳이 있는데, ‘아나빠나 사띠’만 하는데 가서 그것만 또 합니다.

 

사실은 이것이 수행방법 중에 다 들어있는 건데 서로 보완관계인 줄은 모르고 이거 하나만 하고, 요거 하나만 하는 거라. 그러고 나서 하다 보면 짬뽕이 되고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줄 몰라가지고 ‘아이고, 스님 이거 어찌 해야 됩니까?’ 그럽니다. 자기가 자꾸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있으면서 ‘우찌 해야 됩니까?’ 하면 그거 우째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수행은 천천히 되는 것이지 급작스럽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수행은 반드시 천천히 하십시오. 그리고 점진적으로 하는 겁니다. 천천히 하고 끝내버리라는 게 아니고 점차적으로 계속 꾸준하게 합니다. ‘수행은 반드시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하는 것이다!’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어떤 방법이라도 이 방법만 쓰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파욱 방법이든, 마하시 방법이든, 아나빠나 사띠이든, 사대관찰법이든 그 스승이 그렇게 가르쳐준다는 그것만 하라는 거라. 다른 것 보지 마라. 결국에는 나중에 뺑뺑 돌다 보면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거라. 전혀 의미가 없는 거라.

하다가 보면, 위빳사나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마타 수행을 통해가지고 집중력을 키우고 사띠의 힘도 길러가는 것이고, 또 사마타를 이렇게 하다 보면 사띠하는 방법 포인트를 잘 잡아나가는 거고 그렇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자꾸 분리하려다 보면 어떻게 되냐면 자꾸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어느 쪽이 조금 강하냐 하는 그 차이는 있습니다. 사마타 부분을 강하게 안 하고 위빳사나 부분을 강하게 해주는 데가 있고 또 사마타를 좀 강하게 해주는 데가 있고 그런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두 개가 다 똑같은 방법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왜? 나중에는 어차피 위빳사나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사마타를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나면 또 위빳사나로써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알든 모르든 간에. 그러니까 위빳사나를 하더라도 어차피 하다가 보면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들이 없으면 위빳사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또 사마타를 할 수밖에 없어. 그럼 위빳사나 그것만 하는 것처럼 하더라도 사마타수행을 또 하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사실은 이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거라. 단지 가르치는 스승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스승이 가르치는 것을 그냥 100% 따라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천천히 한다!’ 생각해야 됩니다. ‘천천히 하고 끊임없이 점진적으로 한다!’ 수행은 그것 이상은 없습니다.

 

100m를 달려간다고 할 것 같으면 100m를 달리고 나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해야 되는 것들이라. 일생 동안 해야 되는 마라톤과 같은 게 수행이지 깨달았다고 해서 수행을 안 하는 것은 아니라. 부처님도 깨닫고 나서 계속 수행을 했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수행을 해야 되는 거라. 내가 깨닫고 안 깨닫고 하는 것은 둘째 문제라. 그러니까 조급하게 마음을 먹으면 안 됩니다.

‘아, 이것을 해봤는데 효과도 없다.’ 시큰둥 해가 있고, 또 다른데 저기 귀 기울여 봤다가 또 저기에다 귀 기울여 봤다가 이러지 마라. 그러는 만큼 시간 소모를 더 하게 되는 것들이라. 그래서 이럴려고 저럴려고 자꾸 하다 보면 번뇌만 키워지게 됩니다.

 

그 번뇌들은 자꾸 내가 제어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가는 겁니다. 번뇌는 절대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본래 모습이 번뇌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내 마음인 걸 어떡하라는 거라?

그 마음 자체를 갖다가 자꾸 제어를 하다 보면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갑니다. 제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자꾸 관찰하라는 거라. 있는 그대로 보려고 자꾸 하라는 거라.


그래서 하루에 적어도 한 시간씩이라도 좌선과 경행을 꾸준하게 해나가는 것이 훨씬 이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데 꼭 여기 붓다의 길따라 선원이 아니라 가까운데 가서 명상을 하고 또 수행을 하고 할 수 있는데 가서 하라는 거라. 그것이 훨씬 이익이지. 괜히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 다 뺏기고 이렇게 하는 것보다 그럴 것 같으면 그리하라는 거라.

그리고 여기 와서는 또 그마만큼의 이익이 있으니까 그것도 하는 거고.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이지 여기 와서만 수행을 하고 다른 곳에서는 수행을 못 하겠다 이렇게 판단을 해서도 안 되는 거라. 알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현재 수행에 진전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지금 아직 알아차림이 부족하구나!’하고 판단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만큼 수행 단계가 이르렀는데 나는 왜 안 됐을까? 다른 사람은 삼매를 체험해 봤다는데 나는 왜 안 될까? 그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초조해하면 할수록 안 됩니다. 수행의 단계라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지혜의 16단계, 그거 수행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사띠만 그냥 제대로 하고 있으면 그 16단계 다 싸줘도 하나도 안 부러워!

 

자, 시간이 다 되어서 정리를 해봅시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수행을 한번 해봅시다.
사띠를 시작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완전히 이완시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의 어딘가가 긴장이 되어 있으면 가만히 마음을 그걸 들여다보도록 해보십시오.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힘을 쭉 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몸이 완전히 이완됩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완전히 이완이 되었으면 천천히 호흡을 들여다보도록 하십시오. 호흡을 하면서 호흡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들여다보도록 한번 해보십시오. 호흡 한번 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마음에다가 두어서 ‘아, 내가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구나!’ 하는 것을 갖다가 알아차리고 호흡과 동시에 이 마음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러려면 처음 수행할 때에는 호흡에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호흡에도 집중하고 알아차리는 마음에도 집중을 하고! 느긋하게 자연스럽게 호흡을 해서 그 호흡하는 이 몸을 갖다가 알아차린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마음을 알아차릴 때에는 그렇게 이 온 마음을 갖다가 대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넓게 시각을 넓히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몸을 알아차릴 때에는 몸 전체를 해 버리면 산만해져 버립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에는 호흡의 하나의 포인트에 대상을 두고 되도록이면 그 대상을 좁혀 나가도록 해보십시오.

 

마음을 알아차릴 때에는 대상을 넓히도록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일어난 마음을 조사하기가 수월해집니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릴 때 일어나는 생각이나 망상들이나 하는 것들을 넓게 마음을 가져서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면 그 원인을 확인하기가 쉬워집니다.

‘아, 이것이 내가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이구나!’ 아니면 ‘나쁜 습관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구나!’ ‘근심걱정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나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서 이런 망상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러면 ‘아, 나에게 이런 나쁜 마음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 다시금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혜가 일어나면 일어난 망상은 사라져버립니다.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면 그 망상은 소멸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똑같은 종류의 망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더라도 한번 경험을 통해서 쉽게 알아차리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또 금방금방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이 망상이라고 하는 오염, 원인의 세력이 점점 더 약해져서 마음에 평온함이 찾아옵니다.

 

이 평온함이 있어야 만이 대상이 나에게 찰싹 달라붙게 됩니다. 그전에는 내가 대상을 찾아갔지만은 이제 대상이 나에게 찰싹 달라붙습니다. 그래야만이 그 평온함으로 인해서 열반으로 향하게 됩니다.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알아차려서 마음을 고요히 한 상태에서 집중하는 사마타를 조금 더 하든지 아니면 대상을 즉각 즉각 알아차리는 위빳사나로 들어가는 것이 순서입니다.

 

또 앉아있을 때에는 그렇게 하고 경행을 하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왼발, 오른발 하고 걷다가도 몸에서 일어나는 지·수·화·풍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힘이 생깁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조금 용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지수화풍을 관찰하는 것을 멈추고,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을 지켜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알아차리는 훈련을 자꾸 번갈아가면서 해줘야 됩니다.

 

몸이 알아차림을 지속해 가면 굉장히 가벼워집니다. 또 사대요소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면서 마음도 평화로워집니다. 그래서 내가 걷고 있지만  걷고 있는 데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구나!’ 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면 갑자기 몸의 느낌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그 느낌이 사라진 것을 알고 있는 마음을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똑같이 관찰을 하고 똑같이 관심을 기울여서 사띠를 이어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중요한 부분,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그런 느낌, 그런 사대요소도 변하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는 마음도 변하고 한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압니다.

그래서 그것이 굉장히 불만족스럽고 두려움으로 다가와집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실체가 없구나!’ 하는 것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를 좀 더 쉽게 내가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감각기관을 통해서 여섯 가지 문을 통해서 알아지는 많은 대상들이 꼭 나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즉각 즉각 튀어나와서 나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그대로 그냥 알아차려만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경행을 할 때에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천천히 하면서 수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현상에 대해서 통찰할 때가 옵니다. 그때에는 반드시 멈춰야 됩니다. 멈춰서 그 상태를 관찰해야 됩니다. 경행을 하다가 발을 들어 올릴 때 그러한 통찰하는 것이 탁 일어나면 들어 올리다가 멈춘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관찰해야 됩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몸에서 일어나는 사대요소를 관찰하고 그 사대요소를 관찰하는 마음을 또 관찰하고. 그렇게 해야 만이 완전하게 통찰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말씀과 부처님 수행법에 대한 의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을 좌선과 경행을 하면서 꾸준하게 자꾸 하도록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삼마-사띠는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는 삼마-사마디 부분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삼마-사마디 부분도 두 번 나눠가지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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