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4. 정업(正業, sammā kammanta, 삼마- 깜만따) (20080904)

담마마-마까
202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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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b-fnAdrKD0

 ‘삼마 깜만타(sammā  kammanta)’ 라고 그렇게 되어있죠? ‘깜마(kamma)’가 뭡니까? ‘업(業)’이죠! 어쨌든 거기에서 파생된 것 같죠? ‘깜만따’라고 그러니까. 업은 뭐를 가지고 쌓습니까? 몸과 입의 행위, 행동으로써 쌓아가는 게 업이죠? 바른 업이 있고, 나쁜 업이 있고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남의 목숨을 해치는 것,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 삿된 음행을 하는 것 이런 것은 몸과 입으로 행하는 나쁜 행위이기 때문에 나쁜 업이 되는 거고, 이와 반대로 사랑을 널리 베푸는 행위, 남에게 널리 베푸는 행위, 그리고 청정한 행동 이런 것들은 바른 행위로써 바른 업을 쌓는 그런 것들입니다. 몸으로 실천하는, 행하는 도덕율이죠?

그래서 몸으로 행하는 것 중에서 그것을 잘 실천해서 불선업을 쌓지 않도록 하고, 선업을 쌓도록 자꾸 하는 것이 정업(正業)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선업을 짓지 않아서 결국에는 해탈의 길에 이르도록 하는 것, 생각이나 이런 것을 끊어버려서,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네 번째 팔정도는 ‘삼마- 깜만따(sammā kammanta), 정업(正業)’ 부분입니다.
보통 이것을 설명하면서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세 가지 비유를 많이 듭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위로 우연하게 까마귀가 날아가다가, 집에 불이 난 것에 불이 붙은 짚이 하나 툭 튀어가지고, 누가 던진 것도 아니고 홀랑 툭 튀어가지고, 까마귀를 맞혀서 까마귀가 새까맣게 타서 죽어버렸습니다. 우연의 일치이죠? 그렇게 되기가 힘들죠? 그런 비유 하나가 있습니다.

 

그다음 하나는 뭐냐 하면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가 꼼짝을 안 하는 거라. 전혀 다른 고장이 없고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배가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거라. 틀림없이 뭔가 죄를 짓고 업을 이번에 받아야 되는 사람이 있다 해가지고 그것을 가려냅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가려내는데, 마침 이 배의 선장이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애첩이 있었는데 애첩을 태우고 배를 항해를 한 거라. 그 애첩을 바다에다 빠뜨리니까 배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잘 가더라는 거라. 지금 당장 그 애첩은 무슨 나쁜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닌데도 그것이 원인이 돼가지고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그다음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상인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서 가다가 밤에 잠을 자야 되니까 동굴 속에서 잠을 잡니다. 멀쩡하던 이 산이, 산에서 큰 돌이 내려와 가지고 그 동굴 입구를 막아버린 거라. 아무리 그 돌을 밀어내려고 해도 안 밀려나는 거라. 그런데 희한하게 일주일 뒤에 돌이 지 스스로 스르륵 열려버리는 겁니다.

이 세 가지를 비유로써 많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참 뜻밖의 일들 같이 보입니다. 지금 현재로 보았을 때는. 그런데 이것도 부처님은 원인 결과가 있다고 그럽니다. 지은 행위가 있기 때문에 지금 그런 결과를 받는다 하는 얘깁니다.

 

물론 그 세 가지에 대한 비유를 부처님이 자세하게 해 놓았습니다.
과거에 누가 개를 너무나 사랑해가지고 개를 기르다가 그 개가 조롱당하고 하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서 밧줄에 돌을 매 갖고 물에다 빠트려버렸는데 그게 과거가 되기도 하고, 애들이 도마뱀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집에 돌아갈 때가 돼서 도마뱀을 조그마한 항아리 속에다 여놔놓고 딱 뚜껑을 닫아놓고 사라졌는데, 그러고 나서 깜빡 잊고 있다가 일주일 뒤에 도마뱀이 생각나서 다시 뚜껑을 열어주는 게 인연이 되기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를 부처님이 얘기해줍니다.

 

이것을 부처님이 설명을 하면서 얘기를 하신 것이 뭐냐 하면 지은 행위에 대한 답, 보답은 결코 도망갈 수가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지은 업(業), 깜만따(kammanta), 행위에 대한 것은 그 어디를 가더라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악행을 저질렀으면 악행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고, 선행을 저질렀으면 선행의 과보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지 그 어디에도 숨길 데가 없다 하는 겁니다. 특히 숨길 데가 없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는 안 들킬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자기 자신에게는 들켜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쁜 행위에 대한 결과는 그 어떤 곳에 태어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질질질질 끌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반드시 나타난다는 겁니다. 죽고 나면 그만이지 하겠지마는 절대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실수를 저지를 수는 있다. 악행을 저지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마음을, 서서히 마음을 갖다가 고쳐나가는 것이 좋다 하는 거라. 지금 행위 하나 실수를 안 저지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안 저지를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나가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얘기한 깜만따, 삼마-깜만따 입니다.

 

그래서 ‘죽이지 마라’ 하는 것이 근본 이유가 아니라 죽이는 것을 안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마음을 항상 자비롭게 쓰면 되는 거라. 마음을 항상 자비롭게 할 것 같으면 당연히 죽이지 않게 되는 거라. 죽이지 않는 것은 꼭 좋은 마음을 쓰지 않더라도 죽이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로운 마음이나 자비로운 생각을 가지는 것은 행위만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마음이 그렇게 바뀌어져 있다는 거라.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먼저 첫 번째 ‘살생하지 마라' 죽이지 마라! 그 의미는 뭐냐면 나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왜?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죽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시골에 동네에 가면 뱀을 많이 봅니다. 애들이 뱀을 볼 거 같으면 둘러서가지고 굉장히 괴롭힙니다. 그 뱀이 죽을 때까지 돌을 던지든지 아니면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콕 찌르든지 굉장히 괴롭힙니다. 부처님께서 가다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처님이“뭐 하고 있느냐?” 하니까 아이들이 “이 뱀이 우리를 물지도 모릅니다. 물리면 내가 큰일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뱀을 죽여야 됩니다.”

그때 부처님이 아이들보고 그럽니다.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느냐? 네가 이 뱀에게 물리지 않기를 바라느냐?” 아이들이 그렇다고 합니다. “네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생명을 괴롭히면 안 된다. 다른 생명을 괴롭히면 네가 갖고 싶어 하는 행복한 것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그 뱀을 죽이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떤 마음을 내야 됩니까? 악한 마음을 내야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내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됩니다. 자기 스스로 행복을 없애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기분 좋고 즐겁고 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없애고 있는 것입니다. 그 뱀을 죽이려고.
행복하려고 하면서 행복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뱀을 죽이는 행위라고 하는 싫은 행위, 행복하고 정반대되는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것을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부처님이 아이들에게 지적한 것입니다. ‘정반대되는 행위들을 하면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뱀을 놔 주어라. 놔줘 버리고나면 오히려 네가 더 행복하다.’ 자기 자신이 행복하게 되고 자기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거라. 살생하지마라 하는 것은.

 

생명은 누구든지 죽기를 바라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어떤 것에 관계하지 않고 그러한 살아있고 싶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다른 것들을 죽이는 행위는 곧 내 자신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죽일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악한 마음들이 나의 행복을 빼앗고 나의 것들을 갖다가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사실을 갖다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든지 모든 존재 중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다른 사람인 자신이 또 가장 소중하다는 거라.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거라. 내 옆에 있는 아이들도 아니고 나의 남편도 아니고 나의 부인도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거라. 남편에게는 또 부인이나 아이들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을 소중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 왜?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자기 자신이 해침을 당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거라. 위험과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어있다는 거라.
‘이 사실을 스스로 빨리 깨달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을 죽이도록 명령하지 않아야 된다.’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잘못 판단하는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죽이는 행위’는 어떤 것이 죽이는 행위라? 죽이는 행위가 성립되려면 맨 처음에 어떻게 됩니까? 살아있는 것이 무엇인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알아야 됩니다. 여기에 만약에, 여러분들한테는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지금 뱀이 있다고 하면 뱀은 현재 살아있는 뱀이라.
그다음 두 번째가 이 뱀이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아는 거라.
그러고 나서 세 번째가 죽이려고 의도를 내야 됩니다. 죽이려고 생각을 해야 되는 거라.
그다음 네 번째가 실제로 죽이려고 행위를 해야 되겠죠? 칼을 가지고 하든지 막대기로 하든지 그런 시도들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는 그런 시도로 인해서 생명체가 딱 죽어버리는 거라. 이것을 우리는 ‘살생’이라고 합니다.

 

이 다섯 개가 두루 갖춰져야 만이 살생으로 간주가 됩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에 해당이 되지 않으면 살생한 것은 아니죠? 살아있는 뱀이 있고 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죽이려는 마음을 냈지만, 그리고 죽이려고 시도도 만약에 했다, 그래서 나무로 뱀을 툭툭 쳤다고 합시다. 그런데 뱀이 죽지 않고 도망을 갔다. 그러면 살생은 아니죠? 살생은 아니지만 무엇에 해당이 됩니까? 괴롭힌 것에 해당은 되겠죠.

 

그런데 시도를 안 했다. 죽이려는 의도는 가졌지만 시도는 안 했다. 그래서 뱀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뱀은 잘 갔다. 무엇에 해당이 됩니까? 나쁜 마음을 가진 것이죠? 나쁜 의도를 가졌으니까. 그런데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고 그것을 살아있다는 것만 아는 것으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죽이려는 의도 자체를 아예 하지를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것에도 해당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살생은 이 다섯 가지가 갖춰져야 죽이는 것이 됩니다.

 

뱀을 죽이는 것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하고 경우는 똑같습니까? 그렇지는 않죠? 뱀을 죽인 사람도 사형을 당하고 사람을 죽인 사람도 사형을 당하고 그런 것은 아니죠? 죽이는 것도 그 대상이 얼마만큼 중요한가, 대상이 얼마만큼 또 유용성이 있는가, 대상이 얼마만큼 또 큰가,

또 죽이려는 내 마음이 얼마만큼 강하게 또 작용을 했는가, 그런 작용들이 얼마만큼 오래 작용을 했는가, 이런 것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뱀은 금방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람이라고 해봅시다. 사람은 금방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거라. 그럼 악한 마음을 더 오래도록 가져야 되고 악한 행위들을 더 오래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뱀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크게 불선업이 될 수가 있겠죠.

 

특히나 만약에 똑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짜 못된 짓을 계속해 왔던 사람이 있고, 또 참 잘 살아왔던 사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들은 어떤 곳에 손가락질 합니까? 잘 살아온 사람을 죽인 경우는 굉장한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성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마 난리가 날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살생을) 범하지 말아야 될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또 아라한을 죽이고, 부처님한테 상처를 주고, 또 잘살아가는 스님들을 이간질시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대역죄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도 죽이는 것이 세 종류에 해당이 됩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아라한을 죽이고 성자들을 죽이는 것,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죄에 해당이 된다는 거라.

 

성자에 못지않게 어머니 아버지가 그마만큼 소중하다는 거라. 왜?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또 이만큼 성장하게 만든 동력이고 또 그런 마음들을 지니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브라흐마짜라위하라, 범천의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인과 마찬가지로서 부모님들도 꼭 그와 같이 대하라’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죽이는 것은 성인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두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것만은 피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 내 자신이 죽기 싫어하고 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사랑할 줄 알 것 같으면 죽이지 말아라! 그래서 다른 사람 다른 생명체를 해꼬지 할려고 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마음을 자꾸자꾸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의 마음이 자꾸 더 고귀하게 되고 그런 것으로 인해서 자기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마음이 자꾸 선량해지고 또 사랑스러운 마음들을 더욱더 가지게 되고 남에게 큰 도움을 주게끔 됩니다.

 

그래서 ‘자비, 자애와 사랑과 아픔을 함께 나눌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다’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멧따(mettā 慈)와, 까루나(karuṇā 悲)가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다.’ 어떤 생명체도 사랑할려고 하고, 어떤 생명체에 대해서도 슬퍼하고 가여워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이 세상을 지탱하게끔 하고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거라.

 

두 번째, 훔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 훔치는 것은 뭡니까? ‘자기중심적’이 되기 때문에 훔치는 겁니다. 남의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면 훔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마음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행위. 그렇기 때문에 훔치지 않으려면 함께 기뻐할 줄 알아야 됩니다. ‘무디따(muditā)’ 하는 것, 함께 기뻐할 줄 알아야 됩니다.

 

도둑처럼 남의 물건을 취하는 것을 ‘훔친다’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친한 사람들끼리는 뭐 그냥 흉허물없이 가져가고 이렇게 하죠? 만약에 공부하는 학생들끼리다. 볼펜을 친구가 없어서 살짝 빌려와가지고 썼다. 그 친구가 나중에 왔을 때 “내가 이 볼펜 좀 잠깐 썼어!” 이렇게 한다고 해가지고 친구 간에 그것이 흉은 안 되죠? 그런데 관계가 나쁠 때는 어떻게 됩니까? 관계가 나쁠 때에는 반드시 응징을 하죠? “너 왜 내거 썼어?” 도둑질했다고 합니다.

친한 사람들끼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 좋은 마음들을 가지면 남의 물건 훔치는 그런 것은 큰 문제로 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마음을 무디따(muditā)로써 같이 더불어서, 나만 기뻐하지 말고 더불어서 기뻐하는 행위들을 자꾸 실천하라. 그것으로 인해서 훔치는 것들은 방지해 나가게 되어있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같이 기뻐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남이 손해 보려는 것을 용인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런 손해 보는 행위들을 내가 스스로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피땀 홀려 모은 것들을 뺏기기를 누구든지 싫어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남이 버린 것에 대해서 함께 기뻐해 줄 줄 알 것 같으면 그것을 훔치려고 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고 상대방하고도 관계가 좋아지기 때문에 부처님은 도둑질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함께 기뻐하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 그렇게 함께 기뻐하려면 내 것도 아낌없이 줄 줄을 알아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질이 성립하는 조건도 아까 살생하는 조건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있고, 그 소유물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그것을 훔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다음에 그것을 직접적으로 훔치는 시도를 하고, 그다음에 그 물건을 훔쳐서 가져오는 경우들입니다.

그 도둑질도 크기와 가치에 따라서, 그리고 그 소유물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또 도둑질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도둑질을 했느냐 그런 것들에 따라서 가치판단이 조금씩 틀려집니다. 그리하더라도 도둑질은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남의 것을 훔칠려고 하는 것입니다. 탐욕의 경향들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선업을 짓는 것을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선업을 짓는 가장 좋은 길은 남에게 베푸는 것, 보시하는 것, 나누는 것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보시 행위를 하고 또 서로서로 나누고 하는 것들을, 부모들에게도 해야 되고 성자들에게도 해야 되고 스님들이나 은인들에게도 해야 되고 수행자들에게도 하고 친구나 친척 또 가족들에게도 다 해야 됩니다.

 

아무리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나누어 준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것 같으면 가족들은 불편해 합니다. 한 푼을 벌어 오더라도 그 힘들게 벌어온 것을 가족들하고 같이 나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가족들은 기뻐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잘 이용을 해서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훔치지 않는 것도 좋지만은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것이 더욱 큰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잘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요즘은 훔치는 것은 금방금방 죄가 되기 때문에, 벌을 받기 때문에 훔치는 것은 잘 안 합니다. 그 대신에 못하는 게 뭐냐 하면 함께 나누는 것들입니다.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방법들을 모릅니다. 100원이 있어도 그 100원을 가지고 가족들 간에 함께 나누고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그 100원의 가치를 못하게끔 하는 행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잘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삿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와 같으냐면 우리 여기 용호동에도 옛날에 나병환자들이 있었죠? 가보면 그냥 막 박박 긁습니다. 가려우니까. 그러면 상처가 덧나가지고 또 더 생기고 더 생기고 합니다. 나병환자들이 그 아픔 때문에 상처를 그냥 자꾸 긁고, 긁다가 못해가지고 그 고통을 없애려고 불로 그 상처를 지지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게 삿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하는 거라. 자기 살을 인두로 지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피하도록 하라 얘기합니다.

 

‘담마빨라’라고 하는 젊은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공부를 시키려면 인도에서는 ‘딱가실라’라고 하는 곳으로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부처님도 그쪽에 가서 공부를 했고, 그 당시에 유명한 사람들이 다 그쪽에 가서 공부를 하고 했는데, 요즘 우리말로 할 것 같으면 가장 교육적인 도시라고 보겠죠?

거기서 공부를 했는데 그 스승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어. 그러니까 배우던 학생들이 다들 슬퍼하거든. 근데 담마빨라 혼자서 안 슬퍼하는 거라. 자기의 스승의 아들이 죽었는데도 안 슬퍼하는 거라. 너 왜 안 슬퍼하느냐고 물으니까 자기 자신은 슬퍼해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라. 자기 가족 중에 일찍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라. 죽음을 본 적이 없다는 거라. 그러면서 “그 죽음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누구든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인데 왜 안타까워하고 울어야 되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스승이 들으니까 기가 차거든. 아무리 자기가 가르친 제자지만 내 아들이 죽었는데 그래도 슬퍼하지도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이상하다 해가지고 담마빨라의 부모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당신 아들이 죽었소.” 그러니까 담마빨라의 부모들은 안 믿는 거라. “거짓말하지 마시오. 우리 아들은 절대 안 죽소.” 그래서 스승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뼈를 가지고 가서 “이것이 죽은 당신 아들이 죽은 뼈요” 라고 하니까 씩 웃으면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거짓말이라는 거라.

여러분들 부모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리는 안 해도 죽었다고 하면 금방 슬퍼하기는 할 겁니다. 그런데 이 담마빨라의 부모는 아니라는 거라. 무엇인가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럴리가 없다는 거라. 우리 가족은 젊은 나이에 죽을 수가 없다는 거라. 젊은 나이에 죽는 사람이 없다는 거라. 왜 그렇게 확신하느냐 하니까 우리 가족들이 아내를 속이는 행위, 남편을 속이는 행위들은 결단코 하지 않았다는 거라. 대대로 내려오면서, 부정한 짓을 안 했다는 거라.

아내를 놔두고 다른 여성과 삿된 행위를 한다든지 남편을 놔두고 다른 남성과 삿된 행위를 한다든지 이런 것이 전혀 없었다는 거라. 속이는 일도 없었고 그런 삿된 행위를 한 적도 없다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우리 가족은 젊었을 때 일찍 안 죽는다는 거라.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담마빨라가 죽은 사람을 본 적도 없었어. 그리고 그런 죽음에 대해서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잘 살다 가셨거든. 그러니까 슬퍼할 이유도 없고 죽게 되면 누구든지 ‘아, 저렇게 죽을 수밖에 없구나…’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때서야 이 스승이 이해를 합니다. ‘아, 삿된 행위를 하지 않으면 이런 이익들이 있구나!’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도 삿된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급작스럽게 일을 당하지 않는 것도 일을 당하지 않는 거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하지 않는 것을 부처님은 정업(正業)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대답)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두 번째 의미의 바른 행위에 대한 것들은 다음 시간에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 간단하게 해버립시다. 정업을 다음 시간에 또 할 수 없으니까.

 

바른 행위의 정업에는 이때까지는 하지 말라는 것들이었거든. 하지 말라는 것들을 조금 더 확대해가지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함께 나누는 마음을 가지고 이런 것들이었는데 부처님

이 말한 이 세 가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한번 판단을 해보겠습니다.

 

어떤 것이 바른 행위이겠습니까?

첫 번째가 알아차리는 겁니다. 통찰력이라는 것. 바른 행위를 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알맞고, 어떤 것이 알맞은 시간이고, 알맞은 사람이고, 알맞은 장소인가는 판단을 해야만이 바른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알아차림으로 할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바른 행위를 할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어떤 것이든 알아차림이 있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헌신하는 것. 경전에 헌신을 나타내는 단어를 쭉 뽑아보니까 굉장히 많습니다. ‘둘라와, 따마와, 딜하빨라까모, 아니낏따 두로, 꿋따라’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쨌든 그 의미는 뭐냐면 확고한 거라. 확고하게 자리잡아가지고 뭘 해야 된다 할 것 같으면 지체하지 않고 미루지 않는 거라. 바로 그냥 해야 되는 것.
알아차림을 해야 된다 하면 지금 바로 해야 되는 거라. 미루지 않는 거라.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이 항상 깨어있어야 되는 거라. 항상 활기찬 상태로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걸 헌신이라고 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헌신하는 것도 꼭 이와 마찬가집니다. 항상 애가 어떻게 됐는가 안 됐는가 항상 깨어있어야 되고, 항상 그걸 갖다가 주의 깊게 바라봐야 되고, 또 뭐가 잘못됐으면 지체하지 않고 바로 하게끔 되는 거라. 그런 마음들을 가져야만이 바른 행위들을 자꾸 연속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 스스로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스스로의 도움. 자기 자신에게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다른 타인에게 도움을 받을려고 하지 말아야 됩니다. 타인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공짜로 뭔가를 한다는 그런 의미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확립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스스로에게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에게 확립이 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런 세 가지를 확립하면 바른 행위들은 저절로 익어지고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감을 가져야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도움을 받으면 나는 반드시 이것을 할 수 있다 하는 자신감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자꾸 노력해서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알아차리도록 자꾸 하라.
그다음에 헌신하라. 확고하게 깨어있도록 하라.
그다음에 스스로에게 도움을 받도록 하라. 스스로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지 마라. 나는 반드시 할 수 있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반드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자꾸 길러주고 확립하면 바른 행위들은 저절로 실천이 되어 나갑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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