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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어(正語, sammā vācā, 삼마- 와-짜-) (20080731)

담마마-마까
2021-07-05
조회수 748

https://youtu.be/8D2xW7kqN50


4. 정어(正語, sammā vācā, 삼마- 와-짜-) (20080731)

 

'삼마- 와-짜-(sammā vācā)' 입니다. '바른말, 정어'라는 그런 뜻인데 바른말을 하고 살아가라는 뜻으로써 팔정도에 들어있습니다.

 

보통은 일반적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자기가 알게 하는 경우도 있고 나쁜 말들을 많이 합니다. 욕 한번 안 해본 사람 있어요? 없죠! 욕이라는 것은 모욕적인 말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애들한테 '어이구, 이 멍청아, 이 얼간아' 하고 얘기할 때 그런 것들은 욕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또 다른 말들이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빈정대는 말이 있죠. 무엇인가를 할 때 자기하고 안 맞는다든지 자기 의견하고 반대되는데 직접적으로 얘기 못할 때 빈정빈정대죠? 그래서 “아이고, 예에 왕자님!” 하든지 뭐 “예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 사람의 상태나 지위보다도 훨씬 높여가지고 부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아까 욕설을 하는 모욕적인 말보다는 악의는 조금 덜하긴 덜한데 그래도 나쁜말은 나쁜말입니다.

 

또 여러분들이 많이 쓰는 것이 뭡니까? 비꼬는 것. 간접적으로 의견을 전달하는 것들이 있죠. 뚱뚱한 사람을 보면 돼지라고 한다든지, 걸어 다니는 항아리라고 한다든지 이렇게 빗대어가지고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통상적으로 그것이 나쁜 말인지를 모르고 쓰는 것들이 이런 부류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라고 하더라도 나쁜 말이 될 수가 있고 좋은 말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말하는 사람이 화가 난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하고 '악의를 가진 상태에서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포함이 될 경우에는 나쁜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멍청아?” 하고 똑같은 말인데도 어떤 경우에는 바른말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어떤 경우에는 윗트로써 많이 쓰죠! 위트로써 많이 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좋은 말이다 해서 만약에 "행복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참 좋은 말입니다. 좋은 말인데도 마음속에서 나쁜 악의를 가지고 한 경우라든지 이런 경우에는 그것은 좋은 말이 아니죠! 마음속으로는 '어서 죽으시오!'하고 바라면서도 시어머니한테 “오래 사십시오!” 이렇게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좋은 말이 될 수가 없는 경우입니다.

 

경전에 그런 게 나옵니다. 아들이 하도 숲에 가서 사냥하는 것을 좋아해서, 이 어머니가 부처님은 분명히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 해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를 않는데, 아들이 워낙 그러니까 아무리 말려도 안 되는 거라. 계속 숲에 가서 사냥을 하거든. 그래서 오늘도 그렇게 가는 아이한테 등에 대놓고 "에이, 그냥 야생에 있는 황소한테 받쳐 혼쭐이나 나라!" 이렇게 하고 얘기를 했거든. 분명히 나쁜 말입니다. 남에게, 남의 생명에게 받쳐서 상해를 입으라고 하는 얘기니 얼마나 나쁜 말이라?

 

그런데 아들이 숲에 들어가서 사냥을 하다가 진짜 야생 황소와 맞닥뜨리게 된 거라. 꼼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어요. 이제 곧 죽을 상황이 되었는데 그때 아들이 퍼뜩 생각을 합니다.

'엄마가 나에게 진짜 야생 황소에게 받쳐가지고 혼쭐이나 나라고 한 말이 진실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나는 받칠 것이고, 엄마가 한 말이 그것이 진실이 아니고 다른 의도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야생 황소는 물러갈 것이다!' 하는 마음을 탁 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진해 오던 황소가 어느 순간 돌아가 버리는 거라.

그 엄마가 그 말을 했을 때에는 어떤 마음으로 했겠어요? '건강하게 잘 남의 생명 해치지 말고 그냥 돌아오라'는 그런 뜻으로써 '황소에게 받쳐 혼쭐이 나라! 그리니까 식겁을 해 봐라 하는 거라. 식겁을 해보긴 해보더라도 죽이지 말고 잘 돌아오라'는 뜻으로써 그렇게 한 말이다 하는 거라.

이렇게 했을 경우에는 이것은 나쁜 말이 아니게 되는 경우입니다.


어머니나 선생님이 아이들을 혼낼 때 가끔씩 혼내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 단어만 봐가지고는 나쁜 말이 될 수 있는데 그 학생들이나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런 악의들도 없고, 또 화가 나있지 않은 상태에서 한 경우라고 할 것 같으면 바른말이 됩니다. 그것은 나쁜 말에는 해당이 되지는 않습니다.

 

일반인들도 그런데 스님들도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에 '빨린다왓차'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신 아라한이었습니다. 이 스님은 사람이 보러오면 첫마디가 뭐라 하냐면 “에이, 나쁜 놈아!” 하는 것이 첫마디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하는 거라.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이 왜 저렇게 나쁜 말을 쓸까?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보니까 부처님이 그럽니다.

과거 수많은 생을 거쳐 오면서 이 말이 그냥 습관이 되어가지고 이 말을 버릴 수가 없다는 거라. 아라한이 되어서도 이것을 버릴 수가 없다는 거라. 그렇지만 악의를 가진다든지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라든지 이런 것은 전혀 없이 사람을 보면 정답게 하는 말이 “에이, 나쁜 놈아!” 이렇게 하게 된다는 거라.

 

그리해도 말하는 사람은 그것이 악의가 없으니까 나쁜 말이 아닌데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아라한이 아닐 경우나 아니면 처음 보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 말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걸 수가 있고 또 알음알이를 일으켜서 나쁘게 받아들일 수는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나쁜 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이런 말들, 조금 전에 얘기했던 것들은 삼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 자기한테는 나쁜 말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모욕을 주는 경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나쁜 말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이냐? 하는 것은,

먼저 아무래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최소한 한명 이상은 있어야 되겠죠.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것은 그렇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나쁜 말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최소한 듣는 사람이 한사람 이상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그 말을 실제로 하는 것. 마음속에서만 품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말로써 하는 경우 하고,

그다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악의를 가지는 것.

악의를 가지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세 가지가 성립이 되면 통상적으로 보면 '나쁜 말이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것을 다 충족 안 시키고도 나쁜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 상대방이 없을 때 내가 상대방을 헐뜯는 나쁜 말을 했을 경우에 그것도 나쁜 말이 되죠! 그래서 직접적인 상대가 없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했을 경우에 나쁜 말이 되기도 합니다.

 

교재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정어라고 하는 것, 올바르게 말하는 것의 반대되는 것이 뭐냐 하면

첫 번째가 무사와다(musavada) 라고 하는 거짓말.

두 번째가 삐수나와짜(pisunavācā)라고 하는 비방하고 중상하고 하는 것들.

세 번째가 파루사와짜(pharusavācā)라고 해서 험한 말을 하는 것.

네 번째가 삼팝빨라빠(samphappalapa)라고 해서 쓸데없는 말, 무의미한 말을 하는 것. 이런 것들입니다. 네 가지인데,

 

첫 번째, 거짓말입니다.

'거짓말하는 것은 나쁘다'하는 것은 압니다. 여러분들이 다. 그렇다고 해서 바른말이라고 해가지고 무조건 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바른말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 경우에는 하지 않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말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아무리 바른 것이라도 입을 다물어라'하고 얘기합니다. 얘기를 할 때는 얘기를 하는 상대방과 장소와 시간을 잘 가려서 말을 해야 되는데, 또 하나 충족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애로써 얘기해야 됩니다. 아무리 바른말이라도 자애로써 얘기하지 않고 악의로써 얘기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말이 아니라 틀린 말, 나쁜 말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빨리어 경전에 그런 게 있습니다. '진실은 항상 영원하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언젠가는 그것이 바르게 알려지게 돼서 그것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덕을 쌓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것들도 물론 잘 갖춰야 되고, 또 유익한 것들도 물론 해야 되겠지만은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써 자신을 확립해야 된다.' 하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런 부분들을 항상 명심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들 뭐 했습니까? 자신이 행한 잘못을 스님께 아니면 도반들께 참회했죠! 그건 뭡니까? 진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이런 잘못을 범했습니다.' 하고 진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서로 절을 하고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할 때도 항상 명심해야 되는 것은 뭐냐면 '자신이 높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이루었다'하고 드러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위압감을 주고 안 좋은 경우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성과를 드러내는 거라든지 이런 것들은 적당한 때에 해야지 그렇지 않을 경우 통상적으로 진실한 말이라 해서 드러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특히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도와 과에 이르는 것들, 자나(jhāna) 선정에 이르는 것들, 닙바나(nibbāna)에 이르는 것들 이러한 것들은 드러낼 수가 없게 됩니다.

드러냈을 경우에 오는 위험들, 또 드러냈는데 그것이 잘못 판단했을 때 오는 위험들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드러낼 수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하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전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른말은 그런 조건들이 충족될 때 바른말이 성립된다 하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든지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말들은 삼가하고 겸손하게 자애를 가지고 말을 하게 될 때 그것은 진실한 말이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애들한테도 “엄마는 옛날에 안 그랬는데 너는 지금 왜 이것밖에 못 하냐?” 그건 뭡니까? 자기를 드러내는 거죠? 그것이 아무리 사실이라도 애는 그 말을 듣고 반감을 가지게 되는거고 그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두 번째, 비방과 중상입니다.

자존심을 입히지 말아라는 거라. 자존심을 입히는 말을 하지 말고,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말을 하고,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하라. 이걸 보통 '융합의 말'이라고 그럽니다. 비방하고 중상하는 말이 아닐 거 같으면 융합의 말, 서로서로 좋게 될 수 있는 말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서먹서먹해진 관계들도 이 말로 인해가지고 친해질 수 있는 그런 말들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누가 두 사람이 싸웠는데 한 사람이 화해를 해줬다 할 거 같으면, 그 화해를 해준 사람이 한 말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한 고마운 행동들, 말들이죠. 그 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간질하는 말을 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오래도록 남죠. 그래서 되도록 남을 비방하고 중상하고 하는 말들을 하지 말고, 서로 화합할 수 있고 또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말들을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세 번째, 험담입니다. 험한 말을 하는 것들.

이것은 여러분들 많이 하죠? '누구 엄마는 뭐 어떻드라' 하면서 그 사람 없는 데서 말하는 것들이 여기에 거의 대부분 포함이 됩니다. 그런다고 다른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그런 말을 안 합니까? 오히려 악순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칭찬을 해주면 나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을 해야 됩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말할 때에는 어떤 말을 해야 됩니까? 부드러운 말이죠! 그래서 "부드러운 말 한마디 참된 공양구요" 이렇게 하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태국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설탕이 굉장히 부드럽고 달콤합니다. "설탕의 부드러움이나 달콤함은 금방 사라져버리는데, 말의 부드러움 말의 달콤함은 오래도록 남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항상 부드러운 말들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로 닫힌 마음을 열기도 하고, 부드럽지 않은 말로 인해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말은 나도 모르게 뼈와 살, 골수 깊숙이 파고 들어가 버리는 작용들을 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남게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때의 생각, 그때의 말들을 생각할 때 미소짓게끔 만들어야지 고통을 가져오게끔 하는 말들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어떤 것이 부드러운 말이냐 하면,

대등한 사람들 같은 연배나 같은 부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박하게 말을 하라고 그럽니다. 소박하게.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소박하게 얘기를 하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나 하급자들에게는 겸손하게 얘기하라. 겸손하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항상 신중하게 얘기하라. 하고 그럽니다. 신중하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은 대부분이 보면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 가지는 특징입니다. 이런 것들을 명심하고 항상 부드러운 말들을 하고 칭찬하는 말들을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 네 번째, 잡담.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부분들입니다.

쓸데없는 말! 앉으면 뭐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시간 다 보내버리고, 나중에는 뭔 얘기를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지어내서 말하기도 하고 이럽니다.

특히 스님 같은 경우에는 혼자 있는 경우에는 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거의 수행하든지 책을 보든지 이렇게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말을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한 경우들이 있는 것 같애요. 와서 얘기를 하면 들어주는데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을 내면 안 되는데, 괜히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데 그것을 중간에서 끊지도 못하니까 들어주긴 들어주는데, '아휴, 이거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을 나는 가지는데, 상대방은 그 말이 끊어질까봐 불안해가지고 뭐든지 말을 자꾸 해야 되는 거라. 그런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차라리 침묵하고 있는 것이 훨씬 이익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2등 할 건데 말을 해가지고 3등 해버리는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무의미한 말은 어떤 것들이 있느냐면 아무 목적 없이 하는 말들!

말하는 목적이 있어야 되는데 말하는 목적이 없이 그냥 하는 것들, 그다음 그 말을 하게 되므로 인해가지고 가져오게 되는 결과, 이것들을 잘 고려를 해봐야 됩니다.

목적 없이 말하는 것들은 보면 대부분 보면 욕구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욕구를 계속 증장시켜 주는 형태를 띠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의미하게 말해서 가져오는 결과들은 뭡니까? 악업을 짓게 됩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듣는 사람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말하는 사람도 그것이 습이 되어 가지고 계속 그런 악업을 짓게끔 됩니다. 오히려 나쁜 습관들을 자꾸 들이게 되는 경우들이 됩니다.

 

듣는 사람들 마음도 유익하게 하고, 또 마음을 증장시킬 수 있는 말을 하는 것들을 유용한 말이라고 합니다.

항상 이익이 있는 말을 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나 부처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들이 이런 유익한, 유용한 말들에 해당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만약에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냥 말을 하지 마라.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이 그런 침묵을 뭐라고 그럽니까? "성스러운 침묵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성스러운 침묵이다!

 

그 밑에 글을 한번 봅시다.

8정도에 정어를 넣어 놓은 이유를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하고.

첫 번째, 거짓말하거나 속이거나 숨기거나 하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 비방을 해서 사이를 갈라놓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한다.

세 번째, 욕이나 엉성한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네 번째, 잡담이나 두서없이 시간을 보내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안 하려고 사람들은 보통 노력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들이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올바른 말투를 기르는 방법에 대한 것을 그 밑에다가 쭉 적어 놓았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본인이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보도록 해야 됩니다. 하루 종일 얘기한 것들을 한번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떤 말을 했는가? 어떤 생각으로 말했는가? 정직하게 한번 자기 자신을 저녁 시간이나 수행하기 전에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대부분이 보면 밑에 적어놓은 분노나 질투나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인해서 많은 말을 했을 겁니다.

 

탐·진·치를 여의어가는 것이 수행이고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오히려 말을 함으로 인해서 부처님 말씀과 반대 방향으로 갔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 거의 대부분일 거라. 그래서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한번 되돌아봐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런 것들이 많다고 할 것 같으면 바꾸려고 먼저 마음을 가져야되는 거고. 바꾸려고 마음을 가지고 나야 만이 말을 할 때 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서 두 번째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말을 할 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일어나는 대로, 자극받은 대로 그냥 말로써 표현을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툭 튀어나오는 말들이든지 아니면 나쁜 말이 내 속마음은 안 그런데 튀어나오는 거라. 속마음이 안 그렇다는 것은 내가 앞에 마음먹은 것들을 뒤에 마음이 바꿨다는 얘기거든. 그런데 앞의 말은 이미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말로써 이미 튀어나와 버렸어. 튀어나와 버리고 나서 마음이 또 바뀌니까 '아, 내가 그런 마음이 아닌데...' 하고 하는 데도 이미 말은 튀어나와 버렸는데 어떡할 거라. 그게 안 되는 거라.

그게 생각에 자극을 받아가지고 말로써 바로 튀어나와 버립니다. 그것을 알아만 차린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것이 튀어나오지 않게끔은 할 수 있다 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항상 말을 할 때 알아차리는 것을 훈련을 자꾸 해야 됩니다.

말을 할 때는 입술이 달싹거리고 귀로써 내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귀로써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도록 해야 됩니다. 어차피 지금 생각을 내가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소리가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 소리를 상대방에게서 들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튀어나온 말은 내 귀에 바로 들립니다.

 

그래서 내 귀에다 마음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귀에다 집중을 할 것 같으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만약에 "내뱉는다"하고 얘기하는데 "내뱉는다" 하고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판단을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귀에다 집중할 것 같으면 "내뱉" 까지만 했는데, 이것을 하면 안 된다고 귀에 들리는 소리를 집중함으로 인해서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내뱉"에서 딱 그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하다가도 "내뱉"하고 끝나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안 하니까 그냥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뱉어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먼저 귀에다가 마음을 집중하도록 해야 됩니다. 귀에 집중하는 것은 엄밀하게 따지만 위빳사나는 아닙니다. 집중력을 키워주는 훈련들입니다.

 

그런 집중력이 키워져야만 그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에다가 집중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입술이 달싹거릴 때 오는 여러 가지 변화들이 있습니다. 입술이 떨린다든지 부드럽다든지 아니면 덥다든지 하는 이런 느낌들. 그런 느낌들도 변해가는 것들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 말을 했을 때 입술이 어떻게 변하는지 또 어떤 말을 했을 때 입술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 변화 상태를 볼 것 같으면 적어도 마음이 말을 하는데 끄달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으로써 말을 하게끔 됩니다.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해지는 것이 뭐냐면 마음속에서 품은 의도들을 먼저 내가 알아차리게 됩니다. 의도들을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것이 나쁜 의도일 것 같으면 당연히 말을 안 하게 되는 것이고, 좋은 의도로써 좋은 말일 것 같으면 그것을 다시 말을 할 때 입술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을 관찰하면 참 좋고 부드러운 느낌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은 더욱더 하게끔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자꾸 늘려가도록 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면 생각하고 알아차림은 동시에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을 할 때는 알아차림을 할 수가 없고 알아차림을 할 때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거라. 적어도 귀나 입이나 가슴을 알아차림으로 인해가지고 생각하는 부분을 현저하게 줄여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말하는 것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중단할 수가 있게 된다는 거라. 그런 것들을 항상 명심을 하도록 해야 되고.

 

두 번째 말을 할 때 명심해야 되는 것은 자비(慈悲)입니다. 멧따(mettā 慈), 까루나(karuṇā 悲)! 아무리 알아차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비로운 말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는 별개인 것 같아도 별개가 아닙니다. 알아차림을 하면 당연히 자비로운 말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알아차림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선 명심을 해야 되는 것은 자비로운 말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우선 우선이라는 거라.

 

이 두 가지를 스님이 지적을 해놓은 겁니다.

이 두 가지는 말투를 바꾸려 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말을 점검할 때에도 필요한 부분입니다.

 

자기 말투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할 때에는 되도록 말을 안 하도록 해보십시오. 침묵하도록 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응시해서 바른 말을 하는 기초를 삼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말이 왜 무서우냐 하면 말이 흉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흉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른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할 수 있고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말들을 해야 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해서 얘기하면, 올바른 말을 자꾸 길들여 나가야 되고, 올바른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림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누누이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에 꼭 하나 명심해야 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듣는 것입니다. "듣는 것"

말하는 것은 잘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듣는 것을 잘 못합니다. 남이 말할 때 거의 집중해서 듣지도 않고 또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듣는 것이다'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들을 때에도 꼭 마찬가지로 알아차림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듣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듣지를 못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은 내 귀를 통해서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귀에 다 마음을 집중하도록 하고 마음으로는 이런 말을 하는 그사람이 '그 사람이 항상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하는 마음을 갖고 '고통스럽지 않기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말을 듣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올바른 말은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비난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지 비난받을 그런 말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올바른 말이냐 하면 이 다섯 가지를 명심하면 됩니다.

첫 번째 바른 시간에 말하고 있는가? 올바른 시간에 말하고 있는가?

시간을 맞춰가지고 적절할 때 얘기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 됩니다.

두 번째, 진실이 담겨져 있는가?

세 번째가, 부드러운 말인가?

네 번째가, 목적에 부합되고 이익되는 말인가?

다섯 번째, 사랑이 담긴 말인가?

이 다섯 가지를 항상 포함할 수 있도록 해서 말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습관을 들여야만이 올바른 말을 자꾸 해나갈 수 있습니다.

 

아침에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 하면, 아침에 눈을 딱 떴다.

그러면 먼저 마음을 그렇게 먹어보십시요.

'아침에 눈을 뜨고 내가 먼저 미소부터 짓는다!' 하고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미소를 먼저 짓는다 하고 마음을 딱 먹고, 그러고 나서 눈을 탁 떠서 보니까 내일 아침 눈을 뜰 때까지 시간이 몇 시간 남아있습니까? 24시간이라는 시간이 남아요. '새로운 24시간이라는 시간이 내 눈앞에 눈을 뜨자 탁 펼쳐져 있다!'고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24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라? 그래서

'그 24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면서 살아가겠다!' 하고 다짐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나서는 그러고 나서 행위들을 해야 되는데, '모든 행위들을 할 때 말하고 행동하고 할 때 항상 모든 살아있는 것을 자비로운 눈으로 보겠다!' 하는 마음을 딱 가집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이 네 가지만 딱 명심을 하면 그날 말하는 것도 조심하게 되고 행동하는 것도 조심하게 됩니다.

첫 번째, 깨자마자 먼저 미소를 짓자!

두 번째가, 나에게 새로운 시간, 24시간이 있다 하고 먼저 받아들여라!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라? 24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것도 경험하지 않고 깨끗한 24시간입니다.

세 번째가, 그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자! 하고 다짐을 하고.

네 번째가, 모든 것들을 자비로운 눈으로 보겠다! 하고 다짐을 하고. 내 자신도 자비로운 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를 명심을 하면 올바른 말을 해 나가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삼마- 와-짜'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시간에 '삼마 깜만따'라 해서 정업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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