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1. 정견(正見, sammā diṭṭhi, 삼마- 딧티) (20080529)

담마마-마까
2021-07-05
조회수 88

https://youtu.be/uOJrS85Kte0

(문답)

말을 할려면 그마만큼 생각을 많이 해야 되거든. 생각을 해야 말을 할 거 아니라. 그러니까 생각을 끊임없이 굴리고 있었단 말이라. 그게 수행을 하니까 전부 번뇌가 되어버리는 거라.

그리고 또 많이 먹어놔 놓으니까, 그것은 쉽게 말해서 열을 계속 발산시키는 거잖아. 열을 발산시키니까 앉으니까 마, 어쨌든 몸이 활동을 해야 되는데 언제 알아차릴 그게 있어? 알아차리는 것은 그냥 조금 알아차리고 나머지는 전부 다 육체적으로 소모하는 데다 가버리고 그러니까 수행이 잘 될 수가 없잖아. 그러니 앉으면 그냥 잘 수밖에 없는 거라.

 

(문답)

그렇지요. 그마만큼 열심히 수행을 해야 되는데, 거의 100%가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다 놓치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아픈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하는 분들도 다 마찬가지라. 마지막 순간에 다 놓치거든. 그렇지 않으려고 할 거 같으면 평소에 그렇게 자꾸 훈련을 해놔야 됩니다. 잠이 오는데 만약에 잠이 오는 것을 갖다가 몰아내가면서 수행하는 힘들이 키워질 것 같으면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고통스럽지 않게,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끊어지는 목숨까지는, 숨은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문답)

독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일반 사람들은 열반을 체험하려는 생각을 안 가집니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대부분 보면 지금 현재 만족을 하든, 만족을 하지 않든, 그것은 둘째 치고 대부분이 열반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진정으로 마음을 기울여서 이생에서 열반을 체험해서 열반에 도달하려고 하는 마음은 없다는 거라.

 

수행을 해가지고 만약에 지금 내가 화내는 것을 잘 못 다스린다고 할 거 같으면 ‘화내는 것을 다스려야지’하는 것은 일으킬 수가 있고, 병이 있으면 ‘이 병을 낫도록 해야지’하는 이런 것들은 생각할지 몰라도 그것이 열반하고 연관을 시켜가지고 열반에 이르겠다 하는 마음은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그것이 크게 차이가 나버리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대부분이 보면 나의 존재를 인정하게 돼버리는 거라. 나의 존재를 인정하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항상 할 것처럼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렇게 바뀌어 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 관념들이 계속 이때까지 심어져왔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되는 관념들을 가지고 또 그렇게 실천해 나가야 되는 열반하고는 점점 더 멀어져 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마만큼 사실은 힘듭니다.

 

(문답)

그것은 정신력의 문제인 것이고. 술에 취하면 몸의 신경계들을 자극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안 취하려고 하더라도 일정 부분은 가능하겠지만 어느 정도 일정 부분을 넘어가고 나면 신경이 마비되거나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안돼지. 그것과는 비교가 조금 다른 것이고. 물론 의지력 면에서는 조금 길러질지 몰라도 그것하고는 좀 다르다고 봐야 된다는 거라.

 

근데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많이 좌우가 되는 거라. 아무리 많이 먹고 하더라도 ‘아, 내가 이 시간 동안에는 졸지 않고 내가 수행을 하겠다.’ 하는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수행을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거라. 또 그렇게 노력을 하게 되고.

 

그런데 그렇지 않고 평상시 하던 대로 그냥 따라가면서 툭 앉아버릴 거 같으면 대부분 그런 힘들이 없어져 버려. 그러니까 당연히 자버리게 되고, 안 그러면 하기 싫어 가지고 빨리 마치고 도망가길 바라게 되는 거고, 그렇게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은 자기가 스스로 좀 조심해야 됩니다.

 

대부분 보면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기독교 같은 경우에는 하느님 있는 걸 믿으라 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거고, 그래서 네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 저세상에 가서 영원히 산다 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믿고, 영원하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믿어라는 거라. 하나님을 ‘나’로 대변하면 딱 그겁니다.

힌두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지 않는 영원불멸한 무엇인가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 하는 거라.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그것을 찾기 위한 공부가 또 힌두교이고. ‘나’라고 하는 지금 내가 행동하고 있는 것은 진짜배기 ‘나’가 아니니까 진짜 ‘나’를 찾는단 말이라. 그래서 그것을 찾아보니까 옛날에 선인들이 그것은 변하지도 않고 불변하는 어떤 실체라는 거라. 영원하다는 거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있고 영원할 것이다 하는 것과, ‘나’가 있고 영원할 것이다 하는 것하고, 힌두교에서 말하는 진짜 ‘나’가 있고 불멸한다는 것, 영원하다는 것하고 똑같은 말이거든. 이것이 왜 그러느냐면 신(神)이라고 하는 개념, 신 중심적인 종교에서는 누구든지 그렇게 사고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것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 쉽게 말하면 불교란 말이라.

 

그래서 불교는 뭐라고 그래요?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그랬습니다. 나를 이렇게 살펴보니까 몸과 마음뿐이고, 몸과 마음도 더 살펴보니까 조건지어진 것뿐이다. 이 몸은 마음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고, 마음은 또 지 혼자서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라. 몸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대상이 있어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불교적인 거라.

그러니까 ‘나’가 있다는 것은 아예 부정해버리는 거라. 이 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림없이 이 몸을 가지고 있단 말이라. 그런데 이 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을 가만히 살펴보니까 조건지어진 것뿐이라는 거라. 그렇게 조건지어진 것이지 실제로 이것이 그대로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것이 부처님이 말하는 ‘무아사상’ 이거든. 그 무아를 가만히 보니까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도 영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은 어떻게 돼요? 우리는 보통 뭐라고 그래? 부처님은 2,550년 전에 열반하셨다고. 쉽게 속되게 얘기할 거 같으면 돌아가셨다는 거라. 돌아가신 분이라는 거라. 신(神)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런데 예수나 신의 개념에서는 항상 상주해야 되는 것이고,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예수일 거 같으면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 부활이라는 논리를 집어넣어서 어쨌든 다시 또 돌아오게끔 만들어야 되는 거라. 불멸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라.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거라. 그것이 어떤 것이든, 신이든 부처님이든 어떤 것이든 영원하지 않다라는 거라. 그 딱 두 개의 사상이거든. 그 사상을 항상 생각을 해야 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이생에서 대부분 보면 ‘나’라고 하는 것들을 대부분은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은 영원하기를 바라게 되는 거고. 그 열반은 거꾸로 뒤집어야 되는 것인데, 그러니까 누구든지 속되게 얘기하면 열반을 바라지 않게 되는 거라. 열반을 원하지 않게 되는 거라.

그러니 얼마만큼 우리가 마음을 내어서, 또 얼마만큼 생각을 잘 흡수해야 만이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느냐는 거라. 안 그러면 못하는 거라. 안 그러면... 대부분이 보면 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알콜 먹고 그거 안 취하려고 정신 차리는 것의 적어도 몇 십 배는 더 정신을 차려야만이 공부를 할 수가 있는 거라.

 

지금 현재 바른 견해(正見)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이.

그것도 마찬가지 바른 견해입니다. 그렇게 가지는 것이 실제적으로는 바른 견해입니다.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라고 하는 ‘정견(正見)입니다. 올바른 이해,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우리는 결혼해 살고 있는데 어찌 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요리요리요리해라.” 또 부처님께 가서 “우리가 10원이 있는데 이 10원을 어떻게 썼으면 좋겠습니까?” 하면 “3원은 요리 쓰고, 3원은 요리 쓰고, 또 2원은 이리 쓰고 이렇게 해라.”하고 가르쳐주고, 그 어떤 것을 물어도 부처님이 이렇게 조목조목 얘기를 해주는 거라. 그런데 그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가르쳐준 공통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행복에 이르는 길’, ‘행복한 길을 위한 길’이지 그걸 배반하면서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우리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습니까?” 남의 것을 빼앗아라 한 적은 없다는 거라. 남의 것을 빼앗으면 당연히 내도 마음이 안 좋은 것이고, 뺏긴 사람도 마음이 안 좋게 되어서 원한심을 가지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남의 것을 빼앗으라고는 얘기하지 않고, 열심히 네가 노력해서 돈을 벌어라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버릴 것인가도 얘기해주는 것이고. 근데 그런 길들, 그렇게 버리는 길을 얘기할 때도 행복하게 버리는 길을 얘기해주는 것이지, 불행하게 버리는 것을 얘기해 주지는 않는다는 거라.

 

불교의 모든 가르침의 공통적인 것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래서 한 말입니다. 그런 것은 기본적인 테마로써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행복해지는 길은 어떤 길이냐는 거라. ‘해탈에 이르는 길’입니다. 해탈의 길이 아닐 거 같으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거라.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봅니다. 정견을 비교할 때 많이 비유를 드는 것이 무엇이냐면 ‘빠띠야’라고 하는 사람의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이 밧지족의 웨살리라고 하는 곳에 갔을 때, 거기는 공화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요즘말로 할 것 같으면 마을회관 같은 그런 곳이 있습니다. 그 마을회관은 통상적으로 보면 지금도 농촌에 가보면 저녁때 사람들이 모이죠? 낮 시간에는 사람들이 일하러 밭에 가고 그러기 때문에 거의 없습니다. 공화제의 공회당이라고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회의가 있을 때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회의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절이 없는 곳에 부처님이 갔을 때에는 이 공회당에 머뭅니다. 공회당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 공회당은 사용을 안 하거든. 그 마을에 어떤 큰일이 있을 때 쓰는데, 그 공회당이 크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법문을 듣기에는 또 그만한 곳이 없는 거라. 그러니까 그곳에 부처님이 대부분 머뭅니다.

그 마을에서 만약에 “부처님, 이번 우기 때에는 3개월 동안 결제를 여기에서 해주십시오.” 하고 얘기할 거 같으면 암묵적으로 ‘이 공회당을 쓰십시오.’ ‘3개월 동안 우리가 여기서 정치를 안 해도, 다른 곳에서 해도 관계가 없으니 3개월간 부처님이 이곳을 편하게 쓰십시오. 그럴 거 같으면 우리가 와서 정치에 대해서 부처님께 물어볼 수도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부처님 법문을 들을 수 있고 수행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쓰십시오.’하고 암묵적으로 얘기를 합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웨살리에 부처님이 머물렀는데 ‘빠띠야’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사람이 성인이다, 아니면 또 저 사람이 성인이다 각각 얘기를 한단 말이라. 그런데 부처님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를 하느냐면 부처님은 ‘마술사’다 라고 한다는 거라. 마술사다. 남을 현혹해가지고 혼을 빼버려 가지고, 막 그냥 멀쩡한 사람을 갖다가 혼을 빼버려 놓으니까, 이 사람이 가서 출가를 해버린다는 거라. 부처님의 제자가 돼버린다는 거라. 그리고 다른 종교에 귀의한 신자들도 마술사니까 휘리릭~~ 어찌 해가지고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그렇게 물어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부처님은 마술사입니까?”

 

대부분 지금 세상의 종교인들 중에 조금 유명세를 많이 타는 사람들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유명해집니까? 말 잘하는 사람? 뭔가 특출 난 재능이 있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도 물론 유명해집니다. 그런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가장 유명해집니다. 쉽게 말하면 그림을 잘 그린다든지 글씨를 잘 쓴다든지, 아니면 가만히 앉아가지고 ‘너는 뭐가 안 좋으니까 뭘 해!’ 이렇게 한다든지 무엇인가 신통력이 있어가지고 딱 뭘 맞춰주는 사람들이 가장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한번 보십시오. 그냥 ‘부처님 말씀이 이러저러 합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이것 따라서 하면 됩니다.’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인기 없어요. 재미없어요. 그러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보면 부처님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저것은 순전히 마술을 부려서 저렇게 하는 것이다’하는 거라. 왜?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에는 그렇게 해야 만이 사람이 모이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부처님도 그럴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인도 당시 때에도 옛날부터 그런 마술들을 많이 부렸습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도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가 안 오면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을 불러서 경을 독송해주십시오, 그래 경을 독송해보니까 비가 오더라. 그래서 뭐 질병들도 몰아내고 가뭄도 피하고 했던 그런 구절들이 경전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사실은 부처님도 그것을 했거든.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니다 하고 얘기하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그런데 그렇게 부처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오죽 했겠느냐는 거라. 대부분이 보면 그것으로 사는 거라. 지금도 가만히 스님들 보면 점을 봐준다든지, 아니면 남들보다 염불을 잘한다든지 뭐 특출 난 것이 없으면 절 유지를 못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부처님도 그럴 것이다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라. 그래서 그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누가 부처님한테 가서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니까 저 사람이 해꼬지 당하도록 해주십시오”하고 부탁을 했다고 칩시다. “그래 그러면 내가 저 사람 해꼬지 당하도록 해줄게” 내가 마술을 부리는 부처님이라고 치면. 그럼 눈에 안 보이는 저 사람에게 해꼬지를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돼겠어요? 내가 마술사니까 저주의 마술을 부려야 되겠지. ‘수리수리 마수리’ 해가지고 ‘저 사람이 저주를 받아라.’하고 내가 해줘야 된단 말이라. 다른 사람들은 못하니까 그렇게 해줘야 되거든.

가끔씩 사극에 보면 그런 것들이 나오데. 디게 저 사람을 미워한단 말이라. 그러니까 마술사한테 가서 저 사람의 인형을 만들어가지고 거기다 칼을 콱 꽂으니까 이 사람이 고마 아파버리는 거라. 그런 내용이 나오던데. 그러니까 그렇게 해줘야 되는 게 사실이라는 거라.

 

그런데 생각을 해봅시다. 예를 들어 짚 인형은, 그리고 내가 마술을 거는 마술 주문은 저 사람과는 별개의 것이거든. 예를 들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해가지고 별개란 말이라. 말은 내가 하는 것이지 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라. 그것이 주문이든 뭐든지 간에. 그럼 만약에 자네가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쓸 거 같으면 어떻게 돼? 내가 아무리 주문을 걸더라도 거기하고는 관계없는 것이 돼버려. 그래서 거기하고 똑같은 짚으로 만든 인형에 그걸 꽂는다고 하더라도 자네가 그것을 신경을 안 써버릴 것 같으면 이것은 관계가 없는 것이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어떻게 하느냐면 ‘아, 누가 나를 저주한다’ 이럴 거 같으면 신경이 쓰이거든. 대부분은. 신경을 쓰니까 바짝 마음을 이쪽으로 쏟아 버리는 거라. 쏟아 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의도하는 대로 당신 마음이 따라와 버리는 거라. 따라와 버리니까 내가 ‘너 아파라’ 해버릴 거 같으면 그것이 꼭 마술이 아니더라도 아파져버리는 거라. 짚에 꽂든 어쩌든 간에 그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실제적으로 보면 거기서 마음을 이쪽에 빼앗기지만 않을 것 같으면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데도 어떤 경우에는 화를 자초해 버리는 것들입니다.

 

그래 부처님이 그 얘기를 비유하는 거라.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의 문제!’ 나는 분명히 마술을 부리지 않았거든. 그냥 일반적인 말을 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음이 홀라당 쫓아와 갖고 보로롱 따라오는 거라. 내가 언제 그 사람 빼앗아가려고 너, 나 따라서 출가하라 하고 얘기한 적이 없다는 거라. 양가집 자제들한테 그것은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이니 다 버리고 출가하시오 하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는 거라. 나는 그냥 일반적인 세상의 진리를 얘기한 것뿐인데 그 사람들이 호로롱 쫓아온 거라. 마음의 문제라는 거라. 마음의 문제. 지극히 마음의 문제라는 거라!

 

(문답)

그리하더라도 이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을 쏟기 때문에 뺏겨버리게 되는 거라. 그것이 없을 거 같으면 실제적으로 보면 관계없는 것이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아무리 좋은 밥상을 차려 놓는다 하더라도 안 먹어버리면 이 밥상은 그 사람을 위해서 차렸지마는 그 사람하고는 관계없는 것이 돼버리는 거라.

내가 아무리 저 사람에게 욕을 한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이 그 당시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소리를 안 들을 거 같으면 그 소리는 그 사람한테 비방이 아예 안 돼버리는 거라. 그럼 어떻게 돼요? 그러면 도로 자기가 가져가 버릴 수밖에 없는 거라. 마음이라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절대 나는 마술을 부리고 한 적은 없다는 거라.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을 어떻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 믿음을 주느냐? 그래서 세상의 이치와 반대가 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을 합니다.

대부분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문답)

전통적으로 믿어오는 것들, 대부분 우리는 그냥 단순하게 받아들여 버립니다. 믿어버립니다. 그렇지요? 대부분 그렇습니다. 안 그러면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TV나 신문에서 이렇게 기사화해서 ‘이런 것이다’ 얘기할 거 같으면 대부분 가감 없이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그냥 진짜라고 생각하지 ‘이것이 이럴까?’하고 의심조차도 잘 안한다는 거라.

하물며 만약에 책으로 이렇게 써 놨다, 책으로 써놨다고 할 것 같으면 대부분 전혀 의심을 안 하는 거라. 그것이 부처님이 말한 경전이다 할 것 같으면 더더구나 의심을 안 하게 되는 거라. 또는 대부분 이렇게 A=B가 되고 B=C가 되고 이렇게 합리적으로 착착착착 얘기할 것 같으면 ‘아, 이것은 합리적인 것이고 도리에 맞은 것이다.’ 해서 받아들이고 믿어버리는 거라. 그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라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바른 견해를 가지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라.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은 그 사람들의 견해이지 당신의 견해가 아니지 않느냐? TV나 책에서 얘기한 것은 그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판단해가지고, 아, 이것이 맞고 이것이 그르다 하고 생각해가지고 얘기를 하고 글로 써놓은 것이지,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아무리 부처님의 얘기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당신이 판단해야 되는 것이지, 그리고 당신이 판단해 가지고 그것이 바른지 그른지를 이해해야 되는 것이지, 그래야만이 그것이 당신에게 바른 견해인지 틀린 견해인지 하는 것이 서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거라. 하물며 스승이 가르친다고 해가지고 스승 말은 무조건 믿을 것도 못된다.’하는 거라.

 

일본에서 얼마 전에 그런 것이 있었지요? 무슨 교주 해가지고 무조건 믿다가 몰살당했잖아. 다 죽어버렸잖아.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도 또 그랬어요. 애들 뭐 어쩌고 해가지고. 그것도 스승의 말을 그냥 100% 믿어서 그렇게 되는 거라. 자기가 그것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은 판단 근거를 갖다가, 이해하는 근거들을 그렇게 잡는다는 거라. 전통적인 것이나 TV나 매스컴으로 인한 것들이나, 아니면 책에서 읽든지, 아니면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이나 존경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가지고, 아니면 논리적으로 논리 정연한 그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그런 것이면 대부분 그냥 받아들여 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그러지는 말아라.” 그러지 말아라 합니다.

 

어떻게 할 것이냐? 저기 산에 연기가 난다. 아까 같으면 대부분 뭐라고 그럽니까? ‘불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을 이해한 사람들은 저것을 ‘불났다’고 얘기를 안 합니다. ‘산에 연기가 피어오릅니다’하고 얘기합니다. 불난 것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틀린 거라? ‘연기가 나니까 당신이 가서 확인해 보시오’하고 얘기를 하게 되는 거라.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불났다고 얘기를 해 버릴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진짜 불난 것으로 판단해버립니다. 그 연기 나는 것이 산불이 나서 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수증기가 나서 연기가 나는 것인지, 그것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모르는 거라.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연기가 나면 연기가 난다고 얘기를 해라.” 네가 확인한 것은 산불이 난 것을 확인한 것이 아니고 연기가 난 것을 확인했다 하는 거라. 그럼 연기가 났다고 해라. ‘판단하고 하는 것들은 반드시 내가 확인한 것들만 가지고 판단을 하라.’ 그것이 기본이라는 거라. 앞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판단을 해선 안 된다는 거라.

 

그리고 두 번째 얘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판단을 하더라도 그것이 바른 판단인지 아니면 그른 판단인지 하는 것을 어떻게 기준을 잡을 것이냐? 그것은 ‘행복해지는가, 아닌가? 행복해지는가, 아닌가.

만약에 욕망이 일어나면 그 욕심으로 인해서 남의 것을 빼앗는다든지 이렇게 되니까 남에게 해꼬지를 주게 되고, 본인도 도움이 안 되고, 아, 그러면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내가 행복하게 되는가, 안 되는가? 자기가 판단하라는 거라. 아, 그러면 욕심부리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안 되고, 이익이 없고, 불행하게 된다. 또 화를 내는 것도 꼭 마찬가지이다. 또 멍청하게 이리 있는 것도 꼭 마찬가지이다. 그럴 것 같으면 그런 것들은 버려버리라는 거라.

왜?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그래도 뭔가 도움을 받고, 내가 나아가도록 뭔가 성장하도록 되어진 거고, 그리 성장하도록 되어서 내가 결국에는 행복해져야 되는 것인데, 이익도 없고 불행하게만 되는 걸 왜 하느냐는 거라. 그럼 그거는 버려버리라는 거라. 그거는.

 

‘로바(lobha)’라고 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대부분 보면 나쁜 짓을 만약에 할 거 같으면 잘 안 잊어버립니다. 대부분이 보면 10년 20년이 가도 잘 안 잊어버립니다. 자신이 착한 일한 것은 대부분 잘 잊어버립니다. 아마 여러분도 경험상으로 그럴 거라.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만약에 똑같은 비중이라고 했을 때 좋은 일 한번 하고 나쁜 일을 한번 하고 했다고 했을 때에는 이것이 똑같은 비중인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나쁜 일 한 비중이 훨씬 커져버립니다.

 

왜? ‘로바’라고 하는 것은 성질 자체가 달라붙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안 잊어버리는 거라. 잘 안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아로바(alobha)를 한번 짓고 로바(lobha)를 한번 짓는다고 하더라도, 아로바는 영향을 많이 못 미치게 되고 로바는 많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나쁜 것을 잊지 않으려는 달라붙는 성격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똑같이 한번 한 번씩 지어도 - + 해서 제로(0)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면 이익도 없고 불행하게 되는 것을 가지고 계속하겠느냐는 거라. 당연히 그것은 버려버리라는 거라.

 

또 나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몸에 독을 분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원한심 한번 가져보십시오. 그것으로 인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해가지고. 나쁜 것이라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독을 분비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그런 것은 버려버리고 그 대신에 그 반대되는 것, 좋은 것들을 행하라. 좋은 것들. 그래서 자애롭게 되고 욕심부리지 않고 또 베풀고, 그리고 어떤 경우든지 자꾸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하고, 그래서 밝게 자꾸 살려고 하고, 이렇게 살아갈 거 같으면 당신은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하는 거라.

 

“스스로 판단해가지고 버려야 될 것은 버려야 되고, 버리지 않고 더욱더 키워야 될 것은 더 키우도록 하라.” 나는 그 얘기밖에는 안 한다는 거라. 그 얘기밖에. ‘빠띠야’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참 재미없는 얘기들인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내 제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무슨 특별하게 재능이 있어가지고 마술을 부려서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런 것을 보면 옛날하고 지금 하고는 환경조건이 굉장히 많이 틀립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순수해가지고 진리의 말이라든지 행복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거 같으면 귀담아 쏙 듣는데. 요즘은 그것을 하면 재미없어, 무조건 언성을 높였다가 낮췄다가 대중 연설을 확~ 이렇게 해야 되고, 비유도 아주 재미있는 것을 해줘야 만이 그것을 듣는다는 거라. 그만큼 사람들이 자극적이 돼버리는 거라. 굉장히 자극적이 되어 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밋밋하게 해가지고는 재미없는 거라.

 

그래도 어떻게 해요? 부처님 말씀이 그런 것을 가지고. 부처님 말씀이 그런 것을 가지고 그렇다고 그것을 거역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듣기 좋은 사탕발림 싸악~ 해가지도 얘기해 줄 수 있느냐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나는 부처님 제자가 아니다 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인 거라. 견해를 세우려고 할 것 같으면, 바른 견해를 세우려고 할 것 같으면 항상 이것을 명심해둬야 합니다. 기본적인 조건이 뭐냐면 ‘내가 이것을 하면 행복한가, 아닌가?’ 하는 것을 기본적인 조건으로 딱 먼저 제시를 해놔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그것이 확립이 안 되면, 그 뒤에 얘기하는 바른 견해라고 하는 ‘삼마 딧티’라고 하는 것들이 성립이 될려고 할 거 같으면, 삼법인에 대한 이해, 사성제에 대한 이해, 연기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로 인해서 바른 견해가 생겨나는데, 거기에 아예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라. 삼법인 얘기하면, 무상 얘기하면 “난 안 무상한데요?” “아, 재미없어!” 합니다. 우선 먼저 듣기부터 싫은 거라.

 

그래서 정견을 확립하려면 여러분들의 가치관부터 먼저 확립을 잘하도록 해야 됩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가?’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해지고, 무엇을 했을 때 불행해지는가?’ 하는 것들을 먼저 잘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걸 뭐라고 했느냐면 나쁜 것들, 나쁜 행위에 대한 것들을 뭐라 했느냐 하면 ‘잡초와 마찬가지이다.’ ‘꾸사’ 라고 했습니다. ‘꾸사!’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룰 때 무엇을 깔고 앉아서 깨달음을 이루었습니까? 그 풀이름이 무엇입니까? ‘꾸사 삐띠야’라 합니다. ‘길상초 그러죠? 쉽게 말하면 길상 잡초라는 뜻입니다. ‘꾸사’라는 뜻입니다.

‘잡초를 깔고 앉아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나쁜 행위는 이렇게 깔고 앉아버렸다’ 하는 거라. 깔고 앉아버려서 못 일어나게 해야 되는 것이지, 한번 보십시오. 잡초를 죽이려면 어떻게 죽입니까? 대부분 보면 잡초가 난 곳에 다른 풀을 베어서 이렇게 덮어놔버리면 이게 죽어버리는 거라. 일부러 제초제 안 뿌려도 돼. 그러면 딱 죽어버리는 거라. 이것이 힘이 발휘하지 못하게끔 만들어버리면 죽어버리는 거라.

 

좌선하고 앉는다는 것은 나쁜 것들을 막아버리고 일어나지 못하게 해서 그것을 죽여 버린다는 거라. 번뇌가 일어나는 것들을 막아야 되는 것이고, 욕망이 일어나고, 화가 일어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하는 것들을 막아서 못 일어나게 만들어야 된다는 거라. 그게 수행이라는 거라.

그것을 부처님이 뭐라고 했느냐면 ‘꾸사(Kusa)다 꾸사.’ 잡초와 같다는 겁니다. 잡초는 반드시 막아서 쓸어버려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꾸사 루나띠’라고 해서 쓸어버리는 것. ‘잡초는 반드시 쓸어버려라.’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 어머니가 약에 쓰려고 아들한테 토끼를 한 마리 잡아오라고 합니다. 토끼 살을 구워서 먹으면 맛있는가 약이 되는가 어쨌는가 그래가지고, 그래 아들이 무심결에 토끼를 잡으러 갔습니다. 요즘 같으면 새총 같은 거를 가지고 갔겠지. 잡으려고 하는데 보니까 토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도저히 못 죽이겠는 거라. 그때 토끼 눈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거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다른 생명을 위해서 이 산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정신이 번쩍 들어가지고 토끼한테 그럽니다. “이 부근에 있지 말고 빨리 산으로 도망가라. 그것이 네가 살 길이다!” 그러면서 놔주고 나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엄마한테 토끼 그렇게 해서 못 잡아왔다. 그러니 요즘 말로 하면 디지게 맞는 거라. 눈앞에 있는 토끼를 그렇게 했다고 하니까 엄마만 그렇겠어? 형제들은 안 그렇겠어? 이놈의 자식이 내가 지금 죽게 생겨가지고 그 토끼고기를 먹어야 사는데 이 엄마를 죽이려고 한다면서 당연히 아들한테 그렇게 했어요. 아들도 마음이 무거운 거라. ‘에구, 그걸 그냥 눈 딱 감고 잡아와가지고 삶아줬으면 엄마가 병이 나을 건데...’

 

그러면 극단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엔 어떻게 하겠어요? 대부분 잡아왔을 겁니다. 다른 생각할 것도 없다. 특히 여름 되니까 미꾸라지 잡아 와서 추어탕 끓여 먹으면 맛있다고 추어탕 끓여 먹고, 오뉴월 되니까 개 뭐 어쩌고.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형태들을 옛날에는 다 지내왔습니다. 여러분들을 누군가가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가지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거 원한 안 품겠습니까?

 

이때 이 아들이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내가 그래도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아직 살아오면서 나쁜 짓은 안 했다는 거라. 나쁜 행위는 안 했다는 거라. 특히나 살아있는 생명을 내가 고의로 잡아 죽인 적은 없다는 거라. 고의로 그런 적은 없다는 거라. 그래도 나는 부처님 제자이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내가 믿고 나는 그렇게 해 왔다는 거라. 어쨌든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러니까 당연히 못 죽였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나는 그 토끼를 못 죽인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거라.

 

단지 엄마가 저렇게 아픈 것, 물론 토끼고기를 먹으면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 말고도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나쁜 행위하지 않고 이렇게 산 이 힘으로 인해서 엄마가 좀 나았으면 좋겠다.’ 딱 나아버립니다. 그 말 듣고.

세상에는 그것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얘기할지 몰라도 그것이 아니라도 충분히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거라. 꼭 고놈을 잡아 죽여서 안 먹어도 얼마든지 영양분을 섭취할 것들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해요? 그냥 한다는 거라. 그냥.

 

바른 견해를 지니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이런 것부터 해야 됩니다. ‘뭐가 좋은 행위이고, 뭐가 나쁜 행위이냐?’ 하는 것을 먼저 분명하게 판단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쁜 행위,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고 행복하게 하지 않는 것, 나 뿐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이익이 안 되고 행복하게 하지 않는 거라고 할 거 같으면 하지마라!

 

그게 확립이 되고 나면 두 번째 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깜마(kamma)’라고 하는 ‘깜마의 법칙’입니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간단하게 하면 그렇습니다. 깜마라는 것은 ‘결과도 없다, 원인도 없다, 또 지은 행위에 대해서 좋은 행위를 지었으면 좋은 결과를 받고 나쁜 행위를 지었으면 나쁜 결과를 받는다. 이런 것조차도 없다’는 이런 생각 자체도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 아닌 것 같죠? 적어도 나는 부처님 말씀 듣고 믿고 하니까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하는 것 같죠? 이것은 분명히 원인이 있다 하고 생각할 것 같고, 내가 지은 행위에 대해서 결과를 받을 것이다 하고 믿을 것 같고, 또 좋은 행위를 지었으면 좋은 결과를 받고 나쁜 행위를 지었으면 나쁜 결과를 받을 것 같죠? 나는 그럴 것이다 하고 믿고 있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부분 보면 반대방향에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나쁜 행위를 지었어도 나쁜 결과를 안 받으려고 그럽니다. 대부분 그렇다는 겁니다. 뭔가 그것은 조그맣게 감춰놔 놓고 좋은 것을 받으려고 그럽니다. 좋은 일 지어놔 놓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고, 그런데 나쁜 행위를 지어놔 놓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라고 그런 결과를 바라지 않는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원인이 있다는 거라. 내가 이마만큼 이런 결과를 받은 것은 그것은 분명히 어떤 원인이 있어서 그렇게 됐는데 그 원인은 안 따지고 다른 원망만 하는 거라. 나를 엄마가 왜 이리 낳아 놓았나? 지가 공부를 안 해가지고 요모양 요꼴이 되어놓고도 지가 그것이 원인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거라. 대부분 그렇다는 거라.

 

깜마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되는데 대부분 그 깜마를 안 받아들인다는 거라. 그래서 두 번째 반드시 바른 견해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깜마(kamma)의 법칙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다음 시간에 더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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