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9.
제2장 초기불교 교학
Ⅰ. 서언
1. 불교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이다.” 고 정의하고 있다.
특히 계시종교에서는 인간은 유한함, 부족함, 더러움 그리고 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극히 높고, 거룩하며 전지전능의 능력으로 온 우주와 생물을 창조하였으며, 인류 역사를 조종하는 신・하느님・절대자에게 믿음과 복종으로 기도를 하여 죄를 사하고 영생과 구원을 얻고자 한다.
이에 비하여 불교는 이러한 종교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보면 일반인들은 당혹스럽기 조차할는지도 모르겠다. 붓다는 “나는 고(苦)와 고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해서만 설한다.”고 선언하며, 단순이 현대 심리학이 목표로 삼는 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행복인 해탈・열반을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함을 삶의 최고의 목표로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종교와는 전혀 방향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1. 불교의 특징
1) 불교는 본체로서의 신, 절대자, 창조자, 조물주 등을 부정한다.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신ㆍ절대자ㆍ창조주 등의 개념은 철학적으로는 본체로서 실재하는 실체적인 존재이다. 철학적으로 본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① 항상성(恒常性),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본체로서의 ‘자아’라는 것을 예를 들어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몸과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면서 죽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변화하지 않는 그 어떤 무엇의 ‘항상체, 상일체’가 있어야만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로서의 ‘자아’가 존재하는 것이다. 붓다 이전의 사상가들은 ‘자아’의 이런 불변설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이며, 본체인 브라흐만(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설로 심화시켰던 것이다.
우리의 몸은 수많은 조건이 결합된 집합체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합체는 한시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기관 하나, 근육 하나, 히 한 톨, 세포 하나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는 일초 동안 30만 개의 세포가 소멸되고, 30만 개의 새로운 세포가 생성된다고 하니 참으로 무상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사정은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음 역시 수많은 작용의 요소들이 조건지워진 집합체이다. 찰나도 마음은 영원성을 지니고 머물러 있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전기불이나 촛불을 보자. 밝기의 상태가 결코 항상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은 전기불이나 촛불은 깜박거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체로서의 항상성, 상일성은 부정된다.
② 유일성이 있어야 한다.
본체가 두 개, 세 개 혹은 여러 개일 수는 없다. 동일 상황에서 여러 개의 본체가 있다면 그 것은 이미 본체가 아니다.
동일 존재에 대하여 조건이 변하더래도 그것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 동일자로서 유일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존재의 자기 동일성은 단지 생성의 연속성에 대한 별칭에 불과하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순간 순간 새로워지며, 찰나 간에 사라지며, 단지 유사한 것으로 대체될 뿐인 수많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이와 같은 작용들이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나 연속되고 있으므로 고정적인 유일성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이름과 형태의 자기 동일이 곧 내적인 실재의 자기 동일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영원한 유일성의 실재를 상정하도록 이끌리지만 그것은 사유작용의 추상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여기 금 한 돈이 있는데 이것을 반지로 만들었다. 얼마 후 이 반지를 녹여서 두드려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런 경우 이 금은 반지에서 목걸이로 형태는 바뀌었지만 금은 동일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반지가 목걸이로 될 때 다른 여러 가지의 환경변수들과 관계되어 반지 때의 그 금과는 다른 조건화된 금이 된다. 반지일 때의 금과 목걸이일 때의 금은 이름과 언어는 동일한 금이나 실제의 양상은 동일 자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는 유일성이 부정됨으로 본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③ 특히 본체가 ‘나(자아)’에 적용될 경우 본체는 주재성(主宰性)을 지녀야 한다.
나의 몸과 마음이 곧 나의 자아라면 나는 나에 대해서 주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서 늘 괴로움을 본다. 그것은 괴로움은 주재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눈(眼)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귀, 코, 혀, 몸, 의지 또한 그와 같다”(상윳따 니까야 권1)
④ 본체는 자기 원인을 지닌다.
본체는 ‘결과’가 ‘원인’을 품고 있다. 어떤 원인적인 존재가 어떤 조건을 만나 어떤 결과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동일자로, 다시 말하면 결과 속에 원인이 이미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는 무엇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는 스스로 처움부터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이었다. 그래서 본체이다.
불교에서는 그런 유일하고, 고정불변하여 영원하며 자기 스스로를 주재하며, 자기 원인을 지닌 동일자로서 본체라 할 만 한 존재는 이 우주에 성립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만 형이상학적인 개념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하면서 실재하는 실체로서의 본체를 부정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종교를 믿는다.’고 말한다. 종교는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를 ‘믿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불교는 ‘믿음’보다는 문제에 대한 ‘앎(이해)’을 주창한다. 문제의 사실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면 그에 답을 얻어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어 자연히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정법(正法)이 있어 정법에 의하여 나는 깨달았다(이해했다, 알았다). 이 법, 진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겠다”
따라서 불교는 붓다를 믿는 그 자체를 지향하는 종교가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이다.
3) 불교는 모든 존재들은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 속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ㆍ절대자ㆍ창조자가 있다면 그가 모든 존재와 법칙을 만든 것이 될 것이다. 타종교 일반에서는 이른바 영원한 실체(형이상학적 본체)라는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자기 충족적이고, 자기(결과)에 선행하는 원인이 없으며,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위로 그 존재들을 창조한다고 한다. 불교는 이러한 생각을 반박한다.
창조자라면 당연히 전능해야 한다. 그런데 창조자가 창조할 것을 ‘결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전능함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창조는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졌던 셈이 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자기 의지에 따라 창조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그는 전능하지 않은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자는 영원한 실체일 수 있을까? 창조하기 전과 창조하고 난 후의 그의 존재는 서로 다르다. 실제로 그는 ‘창조했던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우주 전체를 창조한다는 것은 곧 필연적으로 우주의 모든 원인들이 그의 내면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인과의 법칙의 기초 가운데 하나인 업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모든 원인과 조건이 결합되지 않으면 그 사건은 일어날 수 없으며, 그것들이 결합되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창조자가 결코 창조할 수 없거나 혹은 끊임없이 창조해야만 한다는 의미한다.
2013. 5. 29.
제2장 초기불교 교학
Ⅰ. 서언
1. 불교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이다.” 고 정의하고 있다.
특히 계시종교에서는 인간은 유한함, 부족함, 더러움 그리고 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극히 높고, 거룩하며 전지전능의 능력으로 온 우주와 생물을 창조하였으며, 인류 역사를 조종하는 신・하느님・절대자에게 믿음과 복종으로 기도를 하여 죄를 사하고 영생과 구원을 얻고자 한다.
이에 비하여 불교는 이러한 종교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보면 일반인들은 당혹스럽기 조차할는지도 모르겠다. 붓다는 “나는 고(苦)와 고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해서만 설한다.”고 선언하며, 단순이 현대 심리학이 목표로 삼는 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행복인 해탈・열반을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함을 삶의 최고의 목표로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종교와는 전혀 방향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1. 불교의 특징
1) 불교는 본체로서의 신, 절대자, 창조자, 조물주 등을 부정한다.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신ㆍ절대자ㆍ창조주 등의 개념은 철학적으로는 본체로서 실재하는 실체적인 존재이다. 철학적으로 본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① 항상성(恒常性),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본체로서의 ‘자아’라는 것을 예를 들어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몸과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면서 죽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변화하지 않는 그 어떤 무엇의 ‘항상체, 상일체’가 있어야만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로서의 ‘자아’가 존재하는 것이다. 붓다 이전의 사상가들은 ‘자아’의 이런 불변설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이며, 본체인 브라흐만(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설로 심화시켰던 것이다.
우리의 몸은 수많은 조건이 결합된 집합체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합체는 한시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기관 하나, 근육 하나, 히 한 톨, 세포 하나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는 일초 동안 30만 개의 세포가 소멸되고, 30만 개의 새로운 세포가 생성된다고 하니 참으로 무상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사정은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음 역시 수많은 작용의 요소들이 조건지워진 집합체이다. 찰나도 마음은 영원성을 지니고 머물러 있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전기불이나 촛불을 보자. 밝기의 상태가 결코 항상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은 전기불이나 촛불은 깜박거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체로서의 항상성, 상일성은 부정된다.
② 유일성이 있어야 한다.
본체가 두 개, 세 개 혹은 여러 개일 수는 없다. 동일 상황에서 여러 개의 본체가 있다면 그 것은 이미 본체가 아니다.
동일 존재에 대하여 조건이 변하더래도 그것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 동일자로서 유일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존재의 자기 동일성은 단지 생성의 연속성에 대한 별칭에 불과하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순간 순간 새로워지며, 찰나 간에 사라지며, 단지 유사한 것으로 대체될 뿐인 수많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이와 같은 작용들이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나 연속되고 있으므로 고정적인 유일성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이름과 형태의 자기 동일이 곧 내적인 실재의 자기 동일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영원한 유일성의 실재를 상정하도록 이끌리지만 그것은 사유작용의 추상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여기 금 한 돈이 있는데 이것을 반지로 만들었다. 얼마 후 이 반지를 녹여서 두드려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런 경우 이 금은 반지에서 목걸이로 형태는 바뀌었지만 금은 동일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반지가 목걸이로 될 때 다른 여러 가지의 환경변수들과 관계되어 반지 때의 그 금과는 다른 조건화된 금이 된다. 반지일 때의 금과 목걸이일 때의 금은 이름과 언어는 동일한 금이나 실제의 양상은 동일 자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는 유일성이 부정됨으로 본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③ 특히 본체가 ‘나(자아)’에 적용될 경우 본체는 주재성(主宰性)을 지녀야 한다.
나의 몸과 마음이 곧 나의 자아라면 나는 나에 대해서 주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서 늘 괴로움을 본다. 그것은 괴로움은 주재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눈(眼)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귀, 코, 혀, 몸, 의지 또한 그와 같다”(상윳따 니까야 권1)
④ 본체는 자기 원인을 지닌다.
본체는 ‘결과’가 ‘원인’을 품고 있다. 어떤 원인적인 존재가 어떤 조건을 만나 어떤 결과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동일자로, 다시 말하면 결과 속에 원인이 이미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는 무엇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는 스스로 처움부터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이었다. 그래서 본체이다.
불교에서는 그런 유일하고, 고정불변하여 영원하며 자기 스스로를 주재하며, 자기 원인을 지닌 동일자로서 본체라 할 만 한 존재는 이 우주에 성립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만 형이상학적인 개념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하면서 실재하는 실체로서의 본체를 부정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종교를 믿는다.’고 말한다. 종교는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를 ‘믿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불교는 ‘믿음’보다는 문제에 대한 ‘앎(이해)’을 주창한다. 문제의 사실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면 그에 답을 얻어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어 자연히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정법(正法)이 있어 정법에 의하여 나는 깨달았다(이해했다, 알았다). 이 법, 진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겠다”
따라서 불교는 붓다를 믿는 그 자체를 지향하는 종교가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이다.
3) 불교는 모든 존재들은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 속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ㆍ절대자ㆍ창조자가 있다면 그가 모든 존재와 법칙을 만든 것이 될 것이다. 타종교 일반에서는 이른바 영원한 실체(형이상학적 본체)라는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자기 충족적이고, 자기(결과)에 선행하는 원인이 없으며,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위로 그 존재들을 창조한다고 한다. 불교는 이러한 생각을 반박한다.
창조자라면 당연히 전능해야 한다. 그런데 창조자가 창조할 것을 ‘결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전능함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창조는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졌던 셈이 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자기 의지에 따라 창조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그는 전능하지 않은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자는 영원한 실체일 수 있을까? 창조하기 전과 창조하고 난 후의 그의 존재는 서로 다르다. 실제로 그는 ‘창조했던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우주 전체를 창조한다는 것은 곧 필연적으로 우주의 모든 원인들이 그의 내면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인과의 법칙의 기초 가운데 하나인 업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모든 원인과 조건이 결합되지 않으면 그 사건은 일어날 수 없으며, 그것들이 결합되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창조자가 결코 창조할 수 없거나 혹은 끊임없이 창조해야만 한다는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