뿍꾸사띠 왕은 부처님에게 우빠삼빠다(구족계, 출가하여 비구가 되는 의식)를 행하여 달라고 청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에 필요한 8가지 필수품과 함께 비구들을 파견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왕은 시내로 그 8가지 필수품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황소에게 받혀서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빔비사라 왕은 크게 슬퍼했고 뿍꾸사띠 왕의 시신에 왕실의 명예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뿍꾸사띠 왕은 불환과에 이른 자였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아들 아자따삿뚜의 손에 불행하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부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수다원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어떤 슬픔도 고통도 없이 숨졌습니다. 그는 부처님보다 다섯 살 아래였습니다. 그는 열다섯의 나이로 앙가 마가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52년의 통치 기간 중 부처님과 34년을 교류했습니다.
장부경전의 자나와사바 숫따(야차 자니사경)에 의하면 그는 죽은 후에 짜뚬마하라자 천(사천왕천)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4명의 왕 중의 한명인 웻사와나(다문천) 왕과 함께 했습니다.
(3) 꼬살라 왕국의 빠세나디 왕
서 문
꼬살라 왕국은 앙가 마가다 왕국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부처님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16대국 가운데서 네 번째였습니다. 이곳은 바라나시가 부처님의 보살 시절에 그러했던 것처럼 부처님의 일생동안 유명했습니다. 바라나시는 앙가 마가다와 꼬살라 사이에 위치한 까시의 수도였습니다. 바라나시 근처의 사슴 동산에서 부처님께서 최초의 법문인 초전법륜경을 설하신 후에 바라나시라는 도시는 매우 중요한 곳이 되었습니다.
빨리 경전에는 어떻게 해서 까시가 부처님의 과거 보살이었을 때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시대에까지 분쟁의 근원이 되었나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통치자들은 꼬살라와 앙가 마가다 사이에 끼어 있는 까시의 그 지정학적인 가치로 인해 까시라는 나라에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꼬살라 역시 그 당시 16 강대국 사이에서 번창하며 힘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꼬살라 왕국은 사라유 강에 의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 강은 꼬살라 왕국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마하 꼬살라의 왕실 제사장이었던 바와리야 바라문이 북 꼬살라에서 남 꼬살라로 이주하여 왔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다음에 열거하는 지역(잇차낭갈라, 욱깟타, 에까살라, 오빠사다, 께사뿟따, 짠다라깝빠, 또라나왓투, 단다깝빠, 나가라윈다, 날라까빠나, 날란다, 상까와, 웨나가뿌라, 웰루드와라, 살라, 살라와띠까, 세땁바야)과 강(아찌라와띠, 순다리까)은 꼬살라 왕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까시 꼬살라 주는 길이가 300요자나에 달하고 크고 작은 마을이 80,000개나 있었으며 주민이 157,000가구였습니다. 사왓티의 인구는 7,000만이었습니다. 왕국 전체 인구는 1억 8천만에 이르렀습니다. 까삘라왓투 역시 꼬살라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수도 사왓티에는 157,000가구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당시 인도의 주요 6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도시는 랍띠(아찌라와띠) 강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왓티는 오늘날 사헤트 마헤트로 불리는 곳으로 인도 북쪽의 곤다 지역에서 1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빨리 경전에 의하면 다른 도시나 지역으로부터의 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께따로부터 6요자나, 라자가하로부터 45요자나, 딱까실라로부터 147요자나, 상깟사로부터 30요자나, 숩빠라까로부터 120요자나, 알라위로부터 30요자나, 맛치까산다로부터 30요자나, 꾹꾸따와띠로부터 120요자나, 욱가뿌라로부터 120요자나, 꾸라라가라로부터 120요자나, 수나빠란따로부터 300요자나, 그리고 까삘라왓투로부터 15요자나 떨어져 있습니다. 유명한 안다와나 숲은 사왓티로부터 1가우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을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이 숲을 자주 찾으시곤 하셨습니다. 제따와나 수도원의 바로 뒤에 다른 독립된 명상수행처(드야나가라)가 있었습니다. 또라나왓투라는 마을은 사께따와 사왓티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왓티라는 도시는 부유했고 도시의 남쪽에 아나타삔디까(급고독장자)에 의해 보시된 제따와나(기원정사)와 쾌적한 뿝빠라마 수도원(동원, 녹자모강당)과 빠세나디 꼬살라 왕이 건립한 라자까라마 수도원(왕원정사)이 도시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제따와나 수도원 경내에는 왕이 건립한 살라라가라(송림정사)라는 수행처도 있었습니다. 제따와나에는 또한 세 개의 수행처소가 있었는데 까레리 꾸띠(화림 향실), 꼬삼바 꾸띠(꼬삼비 향실), 그리고 중앙에는 부처님이 주석하신 간다 꾸띠(간다 향실)가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아나타삔디까(급고독장자)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성도하신 후에 이곳저곳에서 20년간 우안거를 지내신 뒤에 부처님께서는 사왓티에서 24년을 계속 머무르셨습니다. 부처님의 반열반(빠리닙바나) 후에 운나로마 사리(미간백호 사리)는 꼬살라로 옮겨졌고 그곳에 안치되었습니다.
꼬살라 왕국의 왕실 가계
빠세나디 꼬살라 왕과 꼬살라 왕비는 마하꼬살라 왕의 아들과 딸이었습니다. 다른 한명의 꼬살라 공주는 빔비사라 왕과 결혼했습니다. 바와리야 바라문과 악기닷따는 마하꼬살라 왕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는 딱까실라 대학의 유명한 디사빠목카 교수에게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빠세나디가 교육을 받기 위해 처음 딱까실라에 도착했을 때 그는 딱까실라 밖에서 하룻밤 거처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마할리 릿차위 왕자와 말라 왕국의 꾸시나라에서 온 반둘라 왕자를 만났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 유명한 교수에게로 가서 각각 다른 예술과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교육을 마친 후에는 그들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귀국 후에 빠세나디 꼬살라 왕자는 아버지 앞에서 그의 실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하꼬살라 왕은 아들의 실력에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 꼬살라 왕자를 위해 왕관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숫따니빠따(경집)에 의하면 빠세나디 꼬살라는 마하꼬살라가 죽은 후에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마하꼬살라 왕이 죽은 후에 왕자는 훈련을 바와리야 바라문에게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결혼선물로서 그를 왕실의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는 마가다의 왕인 빔비사라의 누이와 결혼했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의 누이이며 세니야 빔비라사의 왕비인 데위 꼬살라는 남편의 짐승처럼 비참한 종말 후에 슬픔에 쌓인 채 죽었습니다. 선견율비바사 까티나품 주석에 의하면 꼬살라의 왕은 밧다왁기야 테라라고 불리는 남자 형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매부와 누이가 죽은 후에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아자따삿뚜 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마하꼬살라가 결혼선물로 누이 데위 꼬살라에게 준 까시 마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까시는 앙가 마가다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자따삿뚜 왕은 마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꼬살라 왕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앙가 마가다와 꼬살라 사이에는 몇 번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빠세나디 꼬살라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빠세나디 왕이 도망쳐 화원에 이르렀을 때는 혼자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한 소녀를 만났는데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화원의 처녀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사원에 오래도록 머무실 때, 한 번은 빠세나디 꼬살라가 부처님께서 많은 스님들과 더불어 아나타삔디까와 위사카란 큰 불자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 왕 역시 부처님과 500명의 제자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는 석가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하도록 까삘라왓투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석가 족은 자신들의 가문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석가 족은 국가 위원회에서 이 일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나가문다라는 하녀와의 사이에 낳은 마하나마 석가족의 딸인 와사바캇띠야를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마하나마는 부처님의 삼촌이었습니다. 빠세나디 왕은 와사바캇띠야를 왕비 중의 한 사람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왕비들 중에는 깐나깟탈라 경에서 언급한 두 자매 소마와 사꿀라가 있었으며, 다른 왕비인 웁비리는 장로니 게송 주석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와사바캇띠야의 간청에 의해 빠세나디 왕은 어린 아들 위두다바를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열여섯이 되었을 때, 위두다바는 어머니가 노예처녀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위두다바 왕자는 아버지를 속이고 노예처녀를 보낸 까삘라왓투의 석가족에게 복수할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던 그는 디가 까라야나 대신의 도움으로 아버지 꼬살라 빠세나디를 배반하고 흰 우산을 쓴 채 스스로 꼬살라의 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장 군대를 이끌고 까삘라왓투의 많은 석가종족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 일은 부처님의 반열반 2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뿍꾸사띠 왕은 부처님에게 우빠삼빠다(구족계, 출가하여 비구가 되는 의식)를 행하여 달라고 청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에 필요한 8가지 필수품과 함께 비구들을 파견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왕은 시내로 그 8가지 필수품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황소에게 받혀서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빔비사라 왕은 크게 슬퍼했고 뿍꾸사띠 왕의 시신에 왕실의 명예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뿍꾸사띠 왕은 불환과에 이른 자였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아들 아자따삿뚜의 손에 불행하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부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수다원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어떤 슬픔도 고통도 없이 숨졌습니다. 그는 부처님보다 다섯 살 아래였습니다. 그는 열다섯의 나이로 앙가 마가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52년의 통치 기간 중 부처님과 34년을 교류했습니다.
장부경전의 자나와사바 숫따(야차 자니사경)에 의하면 그는 죽은 후에 짜뚬마하라자 천(사천왕천)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4명의 왕 중의 한명인 웻사와나(다문천) 왕과 함께 했습니다.
(3) 꼬살라 왕국의 빠세나디 왕
서 문
꼬살라 왕국은 앙가 마가다 왕국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부처님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16대국 가운데서 네 번째였습니다. 이곳은 바라나시가 부처님의 보살 시절에 그러했던 것처럼 부처님의 일생동안 유명했습니다. 바라나시는 앙가 마가다와 꼬살라 사이에 위치한 까시의 수도였습니다. 바라나시 근처의 사슴 동산에서 부처님께서 최초의 법문인 초전법륜경을 설하신 후에 바라나시라는 도시는 매우 중요한 곳이 되었습니다.
빨리 경전에는 어떻게 해서 까시가 부처님의 과거 보살이었을 때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시대에까지 분쟁의 근원이 되었나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통치자들은 꼬살라와 앙가 마가다 사이에 끼어 있는 까시의 그 지정학적인 가치로 인해 까시라는 나라에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꼬살라 역시 그 당시 16 강대국 사이에서 번창하며 힘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꼬살라 왕국은 사라유 강에 의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 강은 꼬살라 왕국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마하 꼬살라의 왕실 제사장이었던 바와리야 바라문이 북 꼬살라에서 남 꼬살라로 이주하여 왔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다음에 열거하는 지역(잇차낭갈라, 욱깟타, 에까살라, 오빠사다, 께사뿟따, 짠다라깝빠, 또라나왓투, 단다깝빠, 나가라윈다, 날라까빠나, 날란다, 상까와, 웨나가뿌라, 웰루드와라, 살라, 살라와띠까, 세땁바야)과 강(아찌라와띠, 순다리까)은 꼬살라 왕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까시 꼬살라 주는 길이가 300요자나에 달하고 크고 작은 마을이 80,000개나 있었으며 주민이 157,000가구였습니다. 사왓티의 인구는 7,000만이었습니다. 왕국 전체 인구는 1억 8천만에 이르렀습니다. 까삘라왓투 역시 꼬살라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수도 사왓티에는 157,000가구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당시 인도의 주요 6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도시는 랍띠(아찌라와띠) 강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왓티는 오늘날 사헤트 마헤트로 불리는 곳으로 인도 북쪽의 곤다 지역에서 1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빨리 경전에 의하면 다른 도시나 지역으로부터의 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께따로부터 6요자나, 라자가하로부터 45요자나, 딱까실라로부터 147요자나, 상깟사로부터 30요자나, 숩빠라까로부터 120요자나, 알라위로부터 30요자나, 맛치까산다로부터 30요자나, 꾹꾸따와띠로부터 120요자나, 욱가뿌라로부터 120요자나, 꾸라라가라로부터 120요자나, 수나빠란따로부터 300요자나, 그리고 까삘라왓투로부터 15요자나 떨어져 있습니다. 유명한 안다와나 숲은 사왓티로부터 1가우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을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이 숲을 자주 찾으시곤 하셨습니다. 제따와나 수도원의 바로 뒤에 다른 독립된 명상수행처(드야나가라)가 있었습니다. 또라나왓투라는 마을은 사께따와 사왓티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왓티라는 도시는 부유했고 도시의 남쪽에 아나타삔디까(급고독장자)에 의해 보시된 제따와나(기원정사)와 쾌적한 뿝빠라마 수도원(동원, 녹자모강당)과 빠세나디 꼬살라 왕이 건립한 라자까라마 수도원(왕원정사)이 도시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제따와나 수도원 경내에는 왕이 건립한 살라라가라(송림정사)라는 수행처도 있었습니다. 제따와나에는 또한 세 개의 수행처소가 있었는데 까레리 꾸띠(화림 향실), 꼬삼바 꾸띠(꼬삼비 향실), 그리고 중앙에는 부처님이 주석하신 간다 꾸띠(간다 향실)가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아나타삔디까(급고독장자)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성도하신 후에 이곳저곳에서 20년간 우안거를 지내신 뒤에 부처님께서는 사왓티에서 24년을 계속 머무르셨습니다. 부처님의 반열반(빠리닙바나) 후에 운나로마 사리(미간백호 사리)는 꼬살라로 옮겨졌고 그곳에 안치되었습니다.
꼬살라 왕국의 왕실 가계
빠세나디 꼬살라 왕과 꼬살라 왕비는 마하꼬살라 왕의 아들과 딸이었습니다. 다른 한명의 꼬살라 공주는 빔비사라 왕과 결혼했습니다. 바와리야 바라문과 악기닷따는 마하꼬살라 왕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는 딱까실라 대학의 유명한 디사빠목카 교수에게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빠세나디가 교육을 받기 위해 처음 딱까실라에 도착했을 때 그는 딱까실라 밖에서 하룻밤 거처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마할리 릿차위 왕자와 말라 왕국의 꾸시나라에서 온 반둘라 왕자를 만났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 유명한 교수에게로 가서 각각 다른 예술과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교육을 마친 후에는 그들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귀국 후에 빠세나디 꼬살라 왕자는 아버지 앞에서 그의 실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하꼬살라 왕은 아들의 실력에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 꼬살라 왕자를 위해 왕관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숫따니빠따(경집)에 의하면 빠세나디 꼬살라는 마하꼬살라가 죽은 후에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마하꼬살라 왕이 죽은 후에 왕자는 훈련을 바와리야 바라문에게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결혼선물로서 그를 왕실의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는 마가다의 왕인 빔비사라의 누이와 결혼했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의 누이이며 세니야 빔비라사의 왕비인 데위 꼬살라는 남편의 짐승처럼 비참한 종말 후에 슬픔에 쌓인 채 죽었습니다. 선견율비바사 까티나품 주석에 의하면 꼬살라의 왕은 밧다왁기야 테라라고 불리는 남자 형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매부와 누이가 죽은 후에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아자따삿뚜 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마하꼬살라가 결혼선물로 누이 데위 꼬살라에게 준 까시 마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까시는 앙가 마가다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자따삿뚜 왕은 마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꼬살라 왕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앙가 마가다와 꼬살라 사이에는 몇 번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빠세나디 꼬살라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빠세나디 왕이 도망쳐 화원에 이르렀을 때는 혼자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한 소녀를 만났는데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화원의 처녀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사원에 오래도록 머무실 때, 한 번은 빠세나디 꼬살라가 부처님께서 많은 스님들과 더불어 아나타삔디까와 위사카란 큰 불자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 왕 역시 부처님과 500명의 제자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는 석가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하도록 까삘라왓투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석가 족은 자신들의 가문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석가 족은 국가 위원회에서 이 일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나가문다라는 하녀와의 사이에 낳은 마하나마 석가족의 딸인 와사바캇띠야를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마하나마는 부처님의 삼촌이었습니다. 빠세나디 왕은 와사바캇띠야를 왕비 중의 한 사람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왕비들 중에는 깐나깟탈라 경에서 언급한 두 자매 소마와 사꿀라가 있었으며, 다른 왕비인 웁비리는 장로니 게송 주석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와사바캇띠야의 간청에 의해 빠세나디 왕은 어린 아들 위두다바를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열여섯이 되었을 때, 위두다바는 어머니가 노예처녀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위두다바 왕자는 아버지를 속이고 노예처녀를 보낸 까삘라왓투의 석가족에게 복수할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던 그는 디가 까라야나 대신의 도움으로 아버지 꼬살라 빠세나디를 배반하고 흰 우산을 쓴 채 스스로 꼬살라의 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장 군대를 이끌고 까삘라왓투의 많은 석가종족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 일은 부처님의 반열반 2년 전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