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친척들
수니다, 왓사까라 바라문들, 그리고 꼴리야는 빔비사라 왕의 주요 대신들이었습니다. 위사카는 빔비사라와 함께 부처님을 뵈러 간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 때 부처님은 처음으로 라자가하에 왔었는데, 바로 그때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위사카는 불환과에 도달했습니다. 지와까는 궁의 주치의였습니다. 수마나 말라까라는 정원사로서 그의 임무는 자스민 꽃의 화환을 매일 왕에게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소나꼴리위사는 빔비사라 왕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딱까실라국의 뿌꾸사띠 왕, 웃제나국의 짠다빳조따 왕, 꼬살라 왕들과 훌륭한 우정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었지만 로루와(신다 국)의 띳사 왕도 그의 친구였습니다. 한번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수결이 들어간 그림과 황금 잎 위에 쓴 대념처경을 띳사 왕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한 때 꿈바고사까 가문은 역병으로 알려진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꿈바고사까는 아들로 하여금 집에서 떠나는 것은 물론이고 왕국을 떠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 말에 순종하여 아들은 나라를 떠나서 2년 후에 라자가하로 되돌아 왔습니다. 상속 유산인 4억 금화에 대한 권리는 고사하고 그는 당장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빔비사라 왕이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필시 이 남자는 부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언어에 정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말투를 통해서 분명히 구별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그가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늘 값싼 옷만 걸치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소문을 해 본 결과 그가 실제로 부자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왕은 그가 금화를 되찾도록 해 주었고 또한 그 당연한 결과로 딸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셋티 자격(장자, 자산가)도 부여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백성의 복지에 대하여 매우 특별했습니다. 그는 국민의 근심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또한 백성들의 기쁨에도 함께 하곤 했습니다. 백성들 역시 왕과 그런 친근한 사이가 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얏티와나에서 쉬고 계실 때 처음으로 친구인 위사카 부인과 함께 부처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는 당시에 수다원의 단계에 이른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가 부처님의 법문과 강론의 결과로 불환과에 이른 후에 그는 성적 욕망(까마)을 버렸기 때문에 아내 담마딘나가 자신의 어머니의 자리를 이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담마딘나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내인 담마딘나가 출가하려는 원을 전해들은 왕은 웰루와나(죽림정사)에 있는 부처님을 방문하도록 금으로 된 가마를 내주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나라에는 왕 자신보다 훨씬 더 부자인 사람이 다섯 사람 있었습니다. 그들은 ①조띠야 장자 ②자띨라 장자 ③멘다까 장자 ④뿐나까 장자 ⑤까까왈리야 장자였습니다. 꼬살라 왕과 빔비사라 왕이 서로의 누이들과 결혼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매우 두터운 우정이 있었습니다. 마침 꼬살라 왕국에는 부자 가문이 없었던지라 꼬살라 왕은 빔비사라 왕에게 부자 가문을 하나 영구히 거주하기 위해 자신의 왕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빔비사라 왕은 대신들과 상의한 끝에 부자 가문을 이주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마침내 멘다까 장자의 아들인 다난자야 장자를 꼬살라에 정착하도록 보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마가다 왕국에는 많은 부자 가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조띠야 장자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부자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빔비사라 왕은 어느 날 아자따삿뚜 왕자와 함께 조띠야 장자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아자따삿뚜 왕자는 내가 왕이 되면 자신의 아버지는 나무로 지은 집에 살고 있는데 조띠야 장자가 보석으로 장식된 저택에 사는 것을 못하게 하리라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불제자가 되다
왕위를 계승한지 16년이 되던 해 그의 나이는 서른 하나였습니다. 고행자 싯닷따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왕을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부처님은 6년의 고행 끝에 서른다섯의 나이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최초의 법문(담마짝까)을 하신 후에 부처님은 세 명의 형제들을 만났는데, 우루웰라 깟사빠는 500명의 무리를 거느렸고, 난디 깟사빠는 300명의 무리를 거느렸고, 가야 깟사빠는 200명의 무리를 각각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그들 모두가 불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을 가야시사 언덕으로 데리고 가서 아디따빠리야야 숫따(불에 관한 법문 경)을 설법했습니다. 이 법을 듣고 그들 모두가 아라한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부처님을 따라 라자가하로 갔습니다.
얏티와나 숲의 정원지기로부터 부처님의 도착 사실을 들은 빔비사라 왕은 앙가 마가다국의 12만 브라만들과 함께 부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 때 부처님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마하나라다 자따까에 대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들 중 11,000명이 수다원에 이르렀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율장의 마하왁가(대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점심공양 초대를 한 후에 수도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부처님은 왕의 초대를 받고 점심 공양을 하신 후에 왕이 부처님에게 웰루와나(죽림정사) 숲을 보시한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일로 땅이 진동하는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밤 빔비사라 왕은 귀신의 무시무시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 아침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부처님에게로 갔습니다. 부처님은 그 유령들은 왕이 쌓은 공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으로 울부짖는 것이라고 왕에게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은 나아가 왕에게 말씀하시길, 귀신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왕이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한 보시로 인해 쌓은 공덕을 그들에게 회향해준다면 그들은 평화를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보시를 했고 그 공덕을 그 귀신들에게도 회향했습니다.
한번은 부처님이 유명한 의사 지와까로부터 약 처방을 좀 원했습니다. 그 의사는 부처님이 연꽃 냄새를 세 번 맡도록 했습니다. 그 후에 부처님은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약을 먹은 후의 첫째 날 부처님은 마하목갈라나 장로가 외부에서 가져 온 공양을 드셨습니다. 소나꼴리위사 장자의 아들 집에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음식은 매우 달콤한 냄새가 났으며 그 향기가 수도원 전체에 퍼졌습니다. 그 때 빔비사라 왕도 마침 그 곳에 있었습니다. 왕은 그 음식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왕이 그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신 부처님은 왕에게 조금 나누어 주었습니다. 음식을 먹은 후에 왕은 몹시 놀랐습니습니다. 후에 빔비사라 왕은 그 음식이 소나 장자의 집에서 보내 온 것을 알고 그를 만나 보기를 원했습니다.
믿음과 헌신
빔비사라 왕이 새로운 종교와 친숙해진 후에 끝없는 신심과 부처님에 대한 헌신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가 영원히 확립되도록 여러 가지 계획을 맡아 실행했습니다. 왕은 개인적으로 한 달에 엿새 동안 우포사타를 지켰습니다. 왕의 이러한 고무적인 행동들이 국민들 사이에 강한 영향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부처님이 우기 동안의 수행을 규칙으로 만든 것은 빔비사라 왕의 요청에 의해서였습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그의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때 웨살리에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과의 처음 상면에서 수다원도를 얻은 웨살리의 릿차위족들은 마할리 릿차위를 빔비사라 왕에게 보내서 그를 통하여 부처님을 웨살리에 모시고 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마할리 릿차위는 여러 가지 선물을 가지고 빔비사라 왕에게 가서 그의 앞에 릿차위 사람들의 희망을 풀어 놓았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직접 부처님에게 가서 요청하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마할리는 독자적으로 부처님에게 가서 웨살리 릿차위족들의 요청을 전했습니다. 부처님은 그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웨살리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의 웨살리 여정에 특별한 배려를 했습니다. 갠지스 강 둑으로 뻗어 있는 5요자나나 되는 긴 길을 청소했고 길을 따라서 수도원과 휴게소를 만들었습니다. 부처님이 갠지스 강 둑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두 척의 아름답게 장식된 배가 차양막(우산)을 매단 채 항해 준비를 마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자리를 하자 빔비사라 왕 자신이 목까지 오는 물로 걸어 들어가 부처님을 배웅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곳에서 부처님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웨살리에 2주일 동안 머문 후에 부처님이 돌아오시자 빔비사라 왕은 다시 물이 목까지 올 때까지 걸어 들어 가 부처님을 영접했습니다.
친구와 친척들
수니다, 왓사까라 바라문들, 그리고 꼴리야는 빔비사라 왕의 주요 대신들이었습니다. 위사카는 빔비사라와 함께 부처님을 뵈러 간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 때 부처님은 처음으로 라자가하에 왔었는데, 바로 그때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위사카는 불환과에 도달했습니다. 지와까는 궁의 주치의였습니다. 수마나 말라까라는 정원사로서 그의 임무는 자스민 꽃의 화환을 매일 왕에게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소나꼴리위사는 빔비사라 왕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딱까실라국의 뿌꾸사띠 왕, 웃제나국의 짠다빳조따 왕, 꼬살라 왕들과 훌륭한 우정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었지만 로루와(신다 국)의 띳사 왕도 그의 친구였습니다. 한번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수결이 들어간 그림과 황금 잎 위에 쓴 대념처경을 띳사 왕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한 때 꿈바고사까 가문은 역병으로 알려진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꿈바고사까는 아들로 하여금 집에서 떠나는 것은 물론이고 왕국을 떠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 말에 순종하여 아들은 나라를 떠나서 2년 후에 라자가하로 되돌아 왔습니다. 상속 유산인 4억 금화에 대한 권리는 고사하고 그는 당장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빔비사라 왕이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필시 이 남자는 부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언어에 정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말투를 통해서 분명히 구별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그가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늘 값싼 옷만 걸치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소문을 해 본 결과 그가 실제로 부자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왕은 그가 금화를 되찾도록 해 주었고 또한 그 당연한 결과로 딸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셋티 자격(장자, 자산가)도 부여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백성의 복지에 대하여 매우 특별했습니다. 그는 국민의 근심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또한 백성들의 기쁨에도 함께 하곤 했습니다. 백성들 역시 왕과 그런 친근한 사이가 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얏티와나에서 쉬고 계실 때 처음으로 친구인 위사카 부인과 함께 부처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는 당시에 수다원의 단계에 이른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가 부처님의 법문과 강론의 결과로 불환과에 이른 후에 그는 성적 욕망(까마)을 버렸기 때문에 아내 담마딘나가 자신의 어머니의 자리를 이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담마딘나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내인 담마딘나가 출가하려는 원을 전해들은 왕은 웰루와나(죽림정사)에 있는 부처님을 방문하도록 금으로 된 가마를 내주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나라에는 왕 자신보다 훨씬 더 부자인 사람이 다섯 사람 있었습니다. 그들은 ①조띠야 장자 ②자띨라 장자 ③멘다까 장자 ④뿐나까 장자 ⑤까까왈리야 장자였습니다. 꼬살라 왕과 빔비사라 왕이 서로의 누이들과 결혼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매우 두터운 우정이 있었습니다. 마침 꼬살라 왕국에는 부자 가문이 없었던지라 꼬살라 왕은 빔비사라 왕에게 부자 가문을 하나 영구히 거주하기 위해 자신의 왕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빔비사라 왕은 대신들과 상의한 끝에 부자 가문을 이주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마침내 멘다까 장자의 아들인 다난자야 장자를 꼬살라에 정착하도록 보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마가다 왕국에는 많은 부자 가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조띠야 장자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부자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빔비사라 왕은 어느 날 아자따삿뚜 왕자와 함께 조띠야 장자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아자따삿뚜 왕자는 내가 왕이 되면 자신의 아버지는 나무로 지은 집에 살고 있는데 조띠야 장자가 보석으로 장식된 저택에 사는 것을 못하게 하리라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불제자가 되다
왕위를 계승한지 16년이 되던 해 그의 나이는 서른 하나였습니다. 고행자 싯닷따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왕을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부처님은 6년의 고행 끝에 서른다섯의 나이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최초의 법문(담마짝까)을 하신 후에 부처님은 세 명의 형제들을 만났는데, 우루웰라 깟사빠는 500명의 무리를 거느렸고, 난디 깟사빠는 300명의 무리를 거느렸고, 가야 깟사빠는 200명의 무리를 각각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그들 모두가 불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을 가야시사 언덕으로 데리고 가서 아디따빠리야야 숫따(불에 관한 법문 경)을 설법했습니다. 이 법을 듣고 그들 모두가 아라한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부처님을 따라 라자가하로 갔습니다.
얏티와나 숲의 정원지기로부터 부처님의 도착 사실을 들은 빔비사라 왕은 앙가 마가다국의 12만 브라만들과 함께 부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 때 부처님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마하나라다 자따까에 대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들 중 11,000명이 수다원에 이르렀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율장의 마하왁가(대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점심공양 초대를 한 후에 수도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부처님은 왕의 초대를 받고 점심 공양을 하신 후에 왕이 부처님에게 웰루와나(죽림정사) 숲을 보시한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일로 땅이 진동하는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밤 빔비사라 왕은 귀신의 무시무시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 아침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부처님에게로 갔습니다. 부처님은 그 유령들은 왕이 쌓은 공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으로 울부짖는 것이라고 왕에게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은 나아가 왕에게 말씀하시길, 귀신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왕이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한 보시로 인해 쌓은 공덕을 그들에게 회향해준다면 그들은 평화를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보시를 했고 그 공덕을 그 귀신들에게도 회향했습니다.
한번은 부처님이 유명한 의사 지와까로부터 약 처방을 좀 원했습니다. 그 의사는 부처님이 연꽃 냄새를 세 번 맡도록 했습니다. 그 후에 부처님은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약을 먹은 후의 첫째 날 부처님은 마하목갈라나 장로가 외부에서 가져 온 공양을 드셨습니다. 소나꼴리위사 장자의 아들 집에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음식은 매우 달콤한 냄새가 났으며 그 향기가 수도원 전체에 퍼졌습니다. 그 때 빔비사라 왕도 마침 그 곳에 있었습니다. 왕은 그 음식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왕이 그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신 부처님은 왕에게 조금 나누어 주었습니다. 음식을 먹은 후에 왕은 몹시 놀랐습니습니다. 후에 빔비사라 왕은 그 음식이 소나 장자의 집에서 보내 온 것을 알고 그를 만나 보기를 원했습니다.
믿음과 헌신
빔비사라 왕이 새로운 종교와 친숙해진 후에 끝없는 신심과 부처님에 대한 헌신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가 영원히 확립되도록 여러 가지 계획을 맡아 실행했습니다. 왕은 개인적으로 한 달에 엿새 동안 우포사타를 지켰습니다. 왕의 이러한 고무적인 행동들이 국민들 사이에 강한 영향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부처님이 우기 동안의 수행을 규칙으로 만든 것은 빔비사라 왕의 요청에 의해서였습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그의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때 웨살리에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과의 처음 상면에서 수다원도를 얻은 웨살리의 릿차위족들은 마할리 릿차위를 빔비사라 왕에게 보내서 그를 통하여 부처님을 웨살리에 모시고 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마할리 릿차위는 여러 가지 선물을 가지고 빔비사라 왕에게 가서 그의 앞에 릿차위 사람들의 희망을 풀어 놓았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직접 부처님에게 가서 요청하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마할리는 독자적으로 부처님에게 가서 웨살리 릿차위족들의 요청을 전했습니다. 부처님은 그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웨살리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의 웨살리 여정에 특별한 배려를 했습니다. 갠지스 강 둑으로 뻗어 있는 5요자나나 되는 긴 길을 청소했고 길을 따라서 수도원과 휴게소를 만들었습니다. 부처님이 갠지스 강 둑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두 척의 아름답게 장식된 배가 차양막(우산)을 매단 채 항해 준비를 마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자리를 하자 빔비사라 왕 자신이 목까지 오는 물로 걸어 들어가 부처님을 배웅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곳에서 부처님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웨살리에 2주일 동안 머문 후에 부처님이 돌아오시자 빔비사라 왕은 다시 물이 목까지 올 때까지 걸어 들어 가 부처님을 영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