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테라와다불교사(8)/이사장 빤냐와로스님

관리자
2021-04-21
조회수 756


작성일 : 13-10-04 23:23 



이 장에서는 까삘라왓투 국의 숫도다나 왕, 라자가하 국의 빔비사라 왕,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 왕, 웨살리 국의 마할리 왕 그리고 꼬삼비 국의 우데나 왕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까삘라왓뚜의 숫도다나 왕


빨리어 삼장 어느 곳에서도 까삘라왓뚜(카빌라성)라는 이름이 부처님 시대의 인도 16대국과 6대 도시에 대한 것만큼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카빌라성이 석가족의 수도이며 가장 중요한 도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서론


다음은 숫따니빠따(경집)의 삼마빠립바자니야 숫따(정보행경)의 주해서와 장부 경전의 암밧타 숫따에 나와 있는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설명입니다.   


석가 왕조의 기원


옥까까 왕은 석가 왕국의 시조였습니다. 그가 말을 하면 불같은 것이 입에서 나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욱까로 불렸으며, 후에 옥까까로 곡해되었습니다.  


먼 옛날 마하삼마따왕에게는 로자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와라로자가 로자의 아들이며 그는 다시 깔르야나라는 아들을 두었습니다. 와라깔르야나가 깔르야나의 아들입니다. 만다따는 와라깔르야나의 아들이고 만다따는 우뽀사타라는 아들을 두었습니다. 짜라는 우뽀사타의 아들이며, 짜라 역시 우빠짜라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의 아들이 마카데와이며 그는 많은 아들, 손자 그리고 증손들을 두었습니다. 옥까까 왕조는 겨우 3대만 살아남았습니다. 옥까까 왕조의 세 번째 왕은 다섯 명의 왕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①밧따 ②찌따ㅡ ③잔뚜 ④잘리니 ⑤위사카가 그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첫 번째 왕비가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 ①옥까무카 ②까라깐두 ③핫티니카 ④까시니뿌라가 그들이며, 그 이외에 다섯 명의 딸들을 두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쁘리야 ②수쁘리야 ③아난다 ④위지따 ⑤위지따세나.  


후에 옥까까 왕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했으며 잔뚜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왕비에게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말하라고 했습니다. 왕비는 다음에 말을 하겠노라고 왕에게 답했습니다. 어느 날 왕비는 왕에게 아들인 잔뚜에게 왕위를 물려주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왕은 왕비의 요구에 몹시 화가 났지만, 왕비는 왕에게 사랑의 기쁨을 주는 자였습니다. 그 때 옥까까 왕은 네 명의 아들에게 자신이 한 약속으로 인해 어떻게 올가미가 되었는지를 알려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자들을 나라에서 추방하며, 그가 죽은 후에 돌아와서 왕위를 계승하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여덟 명의 대신과 많은 사람들을 추방되는 네 명의 아들을 따라가도록 명령했습니다.  


부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옥까무카와 그의 세 형제는 마치 그들이 잘못이라도 범한 것처럼 부왕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떠날 때는 다섯 명의 누이들도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누이들은 부왕으로부터 오빠들을 따라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왕자를 따라 나섰던 수많은 사람들은 부왕이 죽은 후에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뒤따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매일매일 계속 불어났습니다. 왕자들은 계속 늘어나는 추종자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할 우려가 있음을 알고 그와 같은 폭력을 모른 척 지나가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을 결정하여 인도의 잠부디빠라는 숲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결심을 하자 그들은 북쪽의 히말라야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바로 그 때에 부유한 바라문 가문 출신인 보살 까삘라가 히말라야 산 기슭의 한 아름다운 호수 근처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물학과 지질학의 전문가였습니다. 근처의 호수는 남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었습니다. 그 일대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가 들끓어 감히 그 누구도 두려움에 정착하여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왕국을 세울 것인가를 물색하던 왕자들은 보살인 까삘라 성자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 왕자들을 동정하는 성자는 자신의 수행처 근방에 자리를 잡도록 권했습니다. 이 땅은 매우 비옥해서 누구든지 여기에 자리를 잡는 사람은 번성하고 부유하고 강해진다는 것이 조언의 이유였습니다. 왕자들은 이 은둔지는 성자의 수행처임을 이야기하자, 성자는 자신은 작은 오두막 하나면 되며, 자신의 이름을 따서 왕국의 이름을 지어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왕자들은 성자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까삘라왓투 왕국과 그 국명의 기원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그곳에서 수행하며 살던 대신들은 ‘왕자들이 부왕과 함께 살았다면 화려한 생활을 누렸을 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도와서 행복하게 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웃 나라의 카스트와 사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신들은 왕자들이 누이들과 혼인하여 후손을 얻는 것이, 모르는 민족과 혼인 동맹을 맺는 것보다는 현명한 처사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어머니의 지위를 가장 나이 많은 누이 쁘리야에게 주었고 각각의 왕자들은 나머지 네 명의 누이들과 결혼했습니다. 옥까까 왕은 이 새로운 소식을 듣고는 그들이 반드시 그렇게 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 그들은 진실로 석가족의 후손들이다!(Sakyā Vatabho Kumārāti 사끄야- 와따보- 꾸마-라-띠). 이것이 사끄야(석가) 왕조의 기원을 뜻합니다.  


꼴리야 왕조의 기원


어느새 시간이 흘러 네 왕자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이 많은 공주인 쁘리야는 나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육체는 꼴리야 꽃처럼 보였습니다. 왕자들은 나병환자와 매일 식사를 함께 하게 되면 그들 역시 병에 걸릴지 모른다고 생각이 들자 그들은 사냥을 가는 체 하면서 그녀를 숲 속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 땅 속 동굴을 파서 많은 양의 음식과 물을 넣어 주며 그녀를 동굴에 집어넣고 위에서 흙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그 때 바라나시의 왕 라마 역시 나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카스트의 무희들에게조차 자신이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그는 숲속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태자에게 왕관을 물려주고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라마는 숲에서 구할 수 있는 과일과 다른 먹을 것으로 식이요법을 하여 나병을 고쳤습니다. 그의 안색은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건강하고 생기가 돌아 보였습니다. 어느 날 숲속을 거닐다가 그는 속이 빈 나무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듬은 뒤 창문을 내어 그것을 자신의 집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불을 피우면서 밤을 꼬박 새워 불침번을 서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어느 쪽에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아침에 그리로 가서 사냥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냥해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나병 환자의 냄새를 맡고 쁘리야 공주의 동굴을 덮고 있는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동굴 입구에 놓여 있던 판자가 뜯겨 나가려 하자 그녀는 두려움에 소리를 쳤습니다. 나무 안에 있던 라마 왕은 여자의 비명을 듣고 사람일거라 생각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안에 누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여자였습니다. 왕은 여자가 무슨 카스트에 속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옥까까 왕의 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이 그녀에게 밖으로 나올 것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나갈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왜 그런지를 묻자 자신은 나병을 앓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공주가 캇띠야(왕족) 계급이기 때문에 나타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 또한 캇띠야(왕족)계급이며 왕이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녀를 동굴에서 구해내어 최상의 음식과 과일로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병이 다 나은 쁘리야 공주는 후에 바라나시의 왕 라마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열여섯 번이나 쌍둥이를 낳았으며 아이들은 왕의 수업을 받으면서 자라났습니다.  


하루는 바라나시 출신의 한 남자가 왕을 보고는 즉시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왕에게 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 남자에게 자신의 나라 사정을 모두 얘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서른 두 명의 왕자들이 숲에서 돌아왔습니다. 또한 왕으로부터 이야기를 다 들은 남자는 바라나시로 돌아가 왕위에 올라 있는 왕의 아들에게 아버지에 관해 모든 것을 들려주었습니다. 아들은 숲을 찾아와 아버지인 라마에게 왕국으로 돌아가 다시 왕국을 다스려 주길 바랐습니다. 라마 왕은 자신은 숲에 사는 게 좋으며 이곳에 계속 머물러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부탁을 거절하며 정녕 원한다면 나무를 베어서 마을을 세워 달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나무를 베어서 마을을 세워 아버지의 희망대로 해 주었습니다.  


꼴라나무를 베어서 마을을 만들었고 숲에는 호랑이 길이 있었으므로, 꼴라 마을과 호랑이 길의 사람들로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꼴리야 왕조가 탄생되었습니다.  


하루는 쁘리야 왕비가 아들들에게 카빌라성의 석가족이 모계 쪽 삼촌들이 된다고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석가족 공주들이 목욕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그 얘기를 들은 후에 왕자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석가족 공주들과 실제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석가족과 꼴리야족 사이의 결혼 동맹은 부처님 시대까지 별다른 파기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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