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깜만냐따 (kāya ca citta kammaññatā): 몸과 마음의 적응성 (20061201)

담마마-마까
2021-08-16
조회수 633

오늘은 깜만냐따(kammaññatā) 부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적응성' 이라고 스님이 풀이를 해놨는데 '변화하는 가능성'입니다. 변화가능성을 깜만냐따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설명을 자세하게 해놔 가지고 그렇게 많이 부가 설명할 부분은 없습니다.

칼을 만들 때 쇠를 한 덩어리를 가지고 바로 칼을 만들지는 않죠? 몇 번의 담금질을 하고 내리치고 그러고 나서 다시 길다랗게 늘어난 쇠를 다시 반으로 접어서 다시 또 담금질을 하고 또다시 그것을 반으로 접고 해서 수만 갈래를 접어서 담금질을 해서 한 자루의 칼을 만들어 갑니다. 만약에 그렇게 될 때 그 철이 너무 단단해져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접을 때 분질러져 버리겠죠. 그리고 만약에 그 철 안에 다른 불순물들이 많을 것 같으면 담금질이 잘 안 될겁니다. 또 너무 가열을 해가지고 물렁물렁해지면 담금질 자체가 또 안 될 거라. 적당하게 가열하고 적당하게 담금질을 하기 때문에 몇 만겁을 착착 포개놓는다고 하더라도 아주 얇은 하나의 검이 돼나갑니다.

 

경에서는 금을 비유를 해놨습니다. 금 주조물을 만들어 넣은 상태, 주물에다가 금을 붓기 위해서는 적당하게 녹여야 됩니다. 녹였을 때 그 주물에 맞게끔 금이 변화되는 상태, 이런 것들을 빨리어 경전에서 깜만냐따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이쪽 주물에서는 이렇게 변해지고, 또 저쪽 다른 주물에서는 요렇게 변해지고 하는 변화해가는 가능성들 이런 것들을 쉽게 얘기하면 깜만냐따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지를 만들 때는 반지가 돼나가는 것이고, 또 목걸이를 만들 때는 목걸이가 돼나가는 것, 그것을 보통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해나가집니까? 황희정승 마냥 누가 와서 이게 맞습니까? 하면 음 그래 그거 맞다. 또 저게 맞습니까 하면 음 그래 그것도 맞다. 그래 이것저것 다 맞다하는 너도 맞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은 돼 나가지는가 하는 겁니다. 엄격하게 얘기하면 이 깜만냐따 라는 것은 그거하고는 좀 차이가 납니다.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돼나가는 그런 것들입니다. 이것이 바른 것이고 이것을 해야 될 것이다 하면 내가 ‘아, 그렇군요’ 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돼나가고 그렇게 시작을 해버리게 된다는 그런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깜만냐따는 번뇌라는 장애의 적수다 하는 부분을 여놨습니다. 까마찬다(kāma-chanda) 하고, 브야빠다(byāpāda) 하고, 또 하나 더 추가하면 마나(māna)라는 자만심 이런 것들이 적수다. 적수라는 얘기는 적수 반대되는 개념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을 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 그것을 크게 다섯 가지로 얘기합니다. 이런 장애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되는 것들, 마음의 적응성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날 때 누가 옆에서 “너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났다” 얘기를 하더라도 그 말이 안 들리게 될 때 이런 것은 마음에 견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반응을 일으켜서 바뀌어나가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결국 깜만냐따가 지금 없다는 얘기입니다.

또 내가 화가 많이 일어났을 때 “너 지금 화내고 있어. 화내지 마” 해도 그렇게 돼나가지 않고 계속 화가 더 일어난다든지, 그 말이 오히려 촉진제가 돼가지고 화가 더 일어난다든지 이럴 때는 이런 깜만냐따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다섯 가지 장애들은 보통 보면 이런 깜만냐따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지는 현상들이다 라고 보면 됩니다. 다섯 가지 장애라고 하는 것은 아꾸살라(akusala) 입니다. 꾸살라(kusala)를 짓기 위해서는 삿다(saddhā)가 필요하다고 그럽니다. 그 삿다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이 깜만냐따다 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마음집중입니다. 마음집중 할 줄 모르면 위빳사나 지혜를 얻기가 힘이 듭니다.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집중이 없더라도 위빳사나 지혜는 일어나집니다. 한국인의 특성상 이 마음집중이 없으면 위빳사나 지혜를 얻기 힘든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마음집중이 있어야 만이 곧 지혜가 생겨나는 행태들을 띤다는 겁니다.

 

마음집중이란 것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근데 이 마음집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면 면밀하게 마음을 챙기는 사띠가 있어야 만이 지속적으로 마음집중을 할 수가 있어집니다. 면밀하게 알아차리는 마음집중이라는 사띠를 지니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대상을 놓치지 않고 그 대상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선 대상에 계속 마음을 챙겨야 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노력, 위리야(vīriya)가 있어야 만이 사띠가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위리야(vīriya)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있어야 만이 노력을 하게 됩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들, 그리고 이 수행법으로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믿음들, 그런 강하고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만이 노력을 할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확신을 가지지 않고 믿지 못하는데 누가 노력을 할려고 하겠느냐는 거라. 그렇진 않다는 거라. 이렇게 연결 작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마디가 없더라도 순수 위빳사나, 순수 위빳사나의 방법으로 한번 봅시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기서 스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또 어떨 때는 ‘아이고, 부처님’ 하면서 부처님에 대한 회상을 하기도 합니다. 법에 대해서 회상을 하든지. 그런 다른 작용들로 인해서 마음이 깨어있게 됩니다.

저번에 네 가지 성인의 경지에서 법수행과 신수행에 대한 얘기를 아마 했을 겁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들도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스님 법문을 듣는 것은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수행을 하고 또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이 법문을 듣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법수행이든지 신수행이든지 이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노력하려는 마음들을 냅니다. ‘아, 내가 빨리 공부해야지’ 그런 마음들, 위리야로 인해가지고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을 지속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사띠가 있으면 마음집중하는 사마디(samādhi)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때의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순수 위빳사나에서의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찰나삼매를 얘기합니다이. 깊이 들어가는 삼매(appanā samādhi)나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카니까 사마디(khanika samādhi)라 해서 찰나, 찰나찰나 일어나는 삼매들입니다. 대상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그런 상태를 얘기합니다, 이 찰나삼매로 인해서 마음에서는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를 해나갑니다. 마음의 청정이라 그러죠. 찟다 위숫디(citta visuddhi).

 

그전에는 마음에 아꾸살라도 있고 여러 가지 생각들도 일어나고 하는데 지금은 대상에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나가기 때문에, 마음에서는 그 순간순간에는 청정한 마음을 계속 유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므로 해서 이 찰나삼매로 인해서 마음이 청정해지고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깊은 사마디가 없어도 이렇게 순수 위빳사나로도 이렇게 변해나갑니다.

그리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 하더라도 믿음(saddhā)을 바탕으로 노력(vīriya)이 있게 돼있습니다.

또 노력을 바탕으로 마음챙김(sati)이 있게 되고,

마음챙김을 바탕으로 마음집중(samādhi)이 있게 되고,

마음집중을 바탕으로 위빳사나 지혜(paññā)가 열리는 것으로 돼있습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될 다섯 가지 덕목이라 그럽니다. 오근(五根, pañca indriya)이라 그러죠. 오근은 사마타를 곁들인 위빳사나 수행을 하더라도 계발이 돼나가고, 순수 위빳사나 수행을 하더라도 계발이 돼나가게 돼있습니다.

 

근데 맨 처음 믿음을 낸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움직여야 만이 믿음을 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인해서든 마음이 움직여야 됩니다. 내가 게을러져 있을 거 같으면 ‘아이고, 내가 게을러져 있구나. 게으르지 말고 하루빨리 원활하게 알아차려야지’하는 마음을 낸다든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해서 마음을 변화시켜야 만이 내가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기존에 있는 것 가지고 바꾸어나가지를 못한다는 얘깁니다.

그럴 것 같으면 마음을 변화시켜야 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깜만냐따가 있어야 만이 삿다(saddhā)가 계발된다고 하는 것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전제조건이냐? 꾸살라가 전제조건입니다. 꾸살라가 전제조건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자칫 믿음을 내는 것이 잘못된 믿음을 낼 수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보시를 했다. 마음을 내기는 냈는데 잘못 냈기 때문에, 내가 얼마 냈기 때문에 얼마를 받아야 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됩니다. 또 남이 한 보시에 대해서 ‘그거 뭐 별거 아닌데’ 하는 그런 아만을, 나라고 하는 착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아만, 착각 그리고 욕심을 끊도록 하기 위한 것이 뭐냐 하면 이 깜만냐따 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이 깜만냐따는 번뇌라고 하는 장애 감각적인 욕망과 화내는 것과 자만심이라고 하는 것의 적수다 하는 것이 그래서 그런 적수다 하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든 계행을 지키든 수행을 하든 이런 것에는 반드시 깜만냐따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보시와 지계는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내가 남에게 베풀고 싶다고 베풀어지는 것도 아니고, 계율을 지키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경계에 부딪쳤을 때, 아니면 대상을 만났을 때 그걸 할 수가 있습니다. 보시 지계, 다음에 수행입니다.

 

수행은 어떻느냐? 수행은 때가 없죠! 수행은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한 다음에 한다든지, 적당한 때가 있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항상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뭐라 그랬느냐 하면은 “마음의 정화를 위한 유일한 길은 사띠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띠빳타나 할 때의 사띠라고 하는 것이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늘 모인 여러분들은 이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들을 예리하게 지니고 강하게 길러야 만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 사띠다 하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띠가 있지 않으면 어떤 것도 바르게 사물을 판단할 수가 없고 또 다른 것들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위빳사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띠입니다. 알아차림입니다. 위빳사나라는 건 어떤 걸 얘기합니까? 생겨나면 생겨난 대로 즉시 알아차리는 것을 얘기합니다. 생겨난 것을 생겨났을 때 생겨난 것을 바로 본다는 의밉니다. ‘부땅 부따또 빳사띠(bhūtaṁ bhūtato passati)’ 그럽니다. 생겨난 것을 생겨났을 때 바르게 관찰한다 하는 의밉니다. 그런 것이 바로 위빳사나 입니다.

이 위빳사나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 어떤 것이든 일어나는 대로 그 순간에 마음챙겨서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을 얘기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어떻게 합니까? 대상을 일부러 만듭니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대상입니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대상이죠!

대상을 일부러 만드는 것들은 뭐라 그럽니까? 대상을 일부러 만들어서 하는 수행, 사마타 수행이죠! 그래서 아까 처음에 사마타 수행으로 인해서 위빳사나로 들어가는 것하고, 순수하게 위빳사나로 들어가는 것을 스님이 분간해서 얘기했던 겁니다.

 

실제로 대상이 생기는 순간순간에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위빳사나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의해야 될 것들은 뭡니까? 우선 말을 하지마라. 수행할 때는 말하지 마라. 아무리 법담이 좋다고 하더라도 법담도 늘어나버리면 이 다섯 가지에 휩싸여 버립니다. 감각적인 욕망들이나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운다든지 하는 것들이 일어나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말을 되도록 하지 마라. 수행자들은 보통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5분 동안 얘기하는 것이 하루 동안 위빳사나 수행한 것을 다 까먹어버린다고 얘기합니다. 그 정도로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해 합니다.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뭡니까? 천천히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이만큼의 높이까지 올라가지 않은 상태에서는 천천히 해서 일어나는 현상들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말고 중단됨이 없이 끊임없이 알아차릴려는 마음들을 가지려고 하는 수밖에 없다 하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수행을 하는데 가장 필요한 부분이고 먼저 생각을 해야 될 부분입니다.

 

자, 그러면 그런 수행인데 대부분 사람들이, 여러분들도 그렇죠. 오늘 금요일이니까 수행하러 온다 해서, 맨 처음 여기 와서 경행하고 좌선하고 이렇게 쭉 해나갑니다. 근데 목요일이나 아니면 일요일날 탁발 온다 할 것 같으면 와가지고 보통 어떻게 합니까? 법당에 와서 수행하고 앉아있는 사람 잘 없죠? 뭐 여러 가지 챙겨쌌고 이렇게 합니다. 근데 수행하는 시간은 금요일 요때 따로 딱 정해져 있고, 평상시 때는 스님이 목요일이나 일요일날 수행에 대한 법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수행에 대한 법문일 뿐이지 실제적인 나하고는 관계없는 내가 하지 않는 수행이다 해서 금요일날만 여기 와서 수행을 하는 행태들을 띠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조금 더 빨리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으로는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이 생각입니다. 여러분들도 몸이 안 움직여지더라도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여집니다. 또 몸이 움직여지더라도 마음은 또 끊임없이 움직여지게 돼있습니다. 몸이 많이 움직이겠습니까, 마음이 많이 움직이겠습니까? 당연히 마음이 많이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그럼 알아차릴 대상으로 맨 처음 주안점을 잡아야되는 것이 생각입니다. 일어나는 생각 생각들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거의 전 시간을 수행으로 연결시킬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맨 먼저 생각을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물론 열 개 중에 한두 개 겨우 알아차렸다 할 때들이 많을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생각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먼저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수행을 조금 더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뭐냐 하면 일상적인 알아차림입니다. 밥을 먹을 때라든지 걸어갈 때라든지 잠자리에 들 때라든지 일어날 때라든지 양치질할 때라든지 모든 일상생활들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아까 스님이 맨 처음 얘기했습니다. 움직이는 몸의 동작보다도 마음이 더 많이 일어나진다고. 그러면 당연히 맨 처음 생각을 알아차림 대상으로써 잡아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이 일상적인 행동들, 일상적인 동작들을 자꾸 알아차려 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여러분들 금요일날 와서 하는 좌선 그다음에 경행.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것은 중요성이 이와 마찬가집니다. 근데 금요일날 와서 좌선하는 것만이 위빳사나 수행한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하는 얘기입니다.

 

수행은 일어나는 대상을 그 즉시 순간순간 마음챙김 하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생각입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행동들이라. 생각과 일상적인 행동들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위빳사나가 이만큼 향상되어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이 자리에 와서 좌선하고 경행하고 하는 것들도 조금 더 순조롭게 돼나간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수행에 자꾸 진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수행대상을 자꾸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수행대상이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자, 그다음 봅시다. 교재를 보십시오.

‘도덕적 행위의 계발, 평온과 삼매의 계발, 통찰지의 계발, 베풂의 계발 등 꾸살라의 깜만냐따는 필요하다’고 그렇게 적어놨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정·혜, 보시, 이런 것들은 보통 선한 일들이라고 그럽니다. 꾸살라(kusala)라고 그럽니다. 근데 그 꾸살라에는 깜만냐따가 다 필요하다. 근데 그걸 알면서도 꾸살라가 안 일어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쉽게 얘기를 해봅시다. 여기 ‘베풂’이 있으니까, 목요일날 스님들께 탁발공양을 올리는 날이다 일요일하고. 목요일하고 일요일 하고 내가 빼먹지 않고 가서 스님들께 탁발공양 베풀려고 하는데 장애 요인이 뭡니까? 집안에서 무슨 문제가 있다든지, 아니면 남편이 또는 부인이 싫어한다든지 이런 외부적인 조건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안 그러면 집안에 무슨 문제가 일어난다든지 하는 생활조건들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게 꾸살라인 것은 아는데 꾸살라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은 왜 그런가? 그거는 엄밀하게 따지면 그 꾸살라의 좋은 점을 모르기 때문에, 꾸살라를 쌓을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꾸살라가 안 쌓이는 겁니다. 남의 생활조건이나 집안의 문제라든지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꾸살라의 이익을 알 거 같으면 당연히 쌓을려고 하겠죠.

근데 그 꾸살라의 이익들을 갖다가 어디서 구할 것이냐?

꾸살라를 행하기 좋은 조건들이 있습니다. 수레에는 보면 네 바퀴가 있습니다. 부처님도 그것을 네 바퀴에다 비유를 해놨습니다. 네 바퀴가 두루두루 굴러가도록 그렇게 만들어라 했습니다.

맨 처음이 뭐냐 하면 부처님 법 자꾸 듣는 것. 꾸살라가 안 쌓이는 건 뭐냐 하면 꾸살라가 좋다는 걸 증명을 못했기 때문에, 그게 좋은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자꾸 들어라는 거라. 부처님 법을 갖다가. 그것이 하나의 수레바퀴가 돼나간다는 거라.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좋은 도반을 만들어라. 아, 이게 참 좋다는 걸 알고 나쁜 방향으로 빠지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빠질 수 있게 하는 좋은 도반을 만들어라 하는 거라. 그거 두 개만 하더라도 우선은 굴러가진다는 거라. 똑바로 안 가지더라도.

 

그다음에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려 나가는 것.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차릴 것 같으면 거기에서 반드시 마음에서 행복감이나 충만감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가 하는 말들이나 행위들이나 생각들에 대해서 알아차려라. 그것이 세 번째 수레바퀴입니다.

네 번째는 뭐냐 하면 과거의 공덕이 쌓인 것들. 그럼 미래에도 그런 공덕이 쌓일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현재 쌓을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이렇게 하는 것이 꾸살라를 쌓는, 꾸살라를 자꾸 일어나게끔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좋은 일들이 안 일어나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꾸살라에는 반드시 깜만냐따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의 변화, 몸의 변화, 생각을 자꾸 바꾸어야 됩니다. 좋은 쪽으로 바꾸어나가지 않으면 그것은 꾸살라를 쌓을 수 없다 하는 거라.

 

자, 그 밑에 부분 봅시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일념집중 수행 중에 멧따 바와나를 계발하고 싶다고 할 때 깜만냐따, 정신적 적응성이 없으면 그거는 성공하기 어렵다. 악의가 있을 때 적응성 대신에 엄격이 있음을 알아야 된다.

멧따바와나(metta bhāvanā). 멧따는 어떻게 방출합니까? ‘평안하기를’ ‘행복하기를’ ‘평화롭기를’ ‘고통이 없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멧따죠. 누구에게 먼저 합니까? 자기 자신에게 먼저 합니다. 자기 자신이 충만되고 나서 다른 대상을 향해서 멧따를 보냅니다.

 

다른 대상이라고 했을 때 청정도론에 보면 피해야 될 다섯 가지 대상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첫 번째가 뭐냐, 사랑하는 사람한테 멧따를 방출하는 것. 그거는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멧따를 방출했을 때 들뜨게 됩니다. 불안정해지게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중립적인 사람에게 멧따를 방출하지 말아라. 그거는 왜 그렇습니까? 별 반응이 없거든. 그러니까 내 스스로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는 싫어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멧따를 방출하지 말라. 왜? 나쁜 마음을 먹으니까. 그 사람에게 멧따를 방출하는 것이 아니고 악의를 품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이성 간에,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멧따를 방출하지 말라. 왜 그래? 그 이성을 보면서 감각적인 욕망에 빠지거든.

마지막 다섯 번째는 죽은 사람. 죽은 내 어머니 죽은 내 아버지. 이미 다른 세상에 있죠. 그래서 멧따를 아무리 방출해도 집중이 잘 안 돼. 그래서 이게 진짜 맞는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는 거라.

이 다섯 가지는 처음 멧따 바와나(metta bhāvanā)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야 될 부분입니다. 조금 전에 스님이 다섯 가지를 얘기할 때 다섯 가지 장애를 다 얘기했습니다. 멧따 바와나를 하면 다섯 가지 장애를 완전하게 소멸은 못 시키더라도 잠재울 수는 있다는 거라. 그렇죠?

 

그래서 맨 처음에 멧따를 방출할 때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하고 나서 그다음에 해야 될 대상은 보통 스승님이나 아니면 살아있는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하라. 그래서 한 오 분 정도 그 대상에게 멧따를 방출합니다.

안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근데 그런 대상을 자꾸 바꾸면 안 되고 한 서너 번 정도 바꿔서 멧따를 방출해보면 자기가 맞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맞는 대상이라는 것은 다섯 가지 장애가 안 일어나는 대상을 얘기하는 겁니다이. 그런 대상에게 약 삼십 분이나 한 시간 정도 끊임없이 멧따를 방출하도록 하라.

 

그래도 잘 안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만약에 존경하는 스승님이 있다. 그 스승님에게 멧따를 방출하려고 하는데 잘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 스승님의 이런 점은 좋고, 하는 좋은 점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해보라는 거라. 그렇게 해서 멧따를 방출하라. 그리고 그 스승님이 당연히 내가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듯이, 나도 그 스승님도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하는 마음을 자꾸 가져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대상의 좋은점을 자꾸 생각하고 대상이 행복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자꾸 가지므로 해서 멧따 방출이 용이하게 돼나갑니다.

 

(스리랑카 위사카 스님 예문 중략)

멧따 바와나의 힘이라는 것은 그마만큼 큰 것입니다. 나뿐 아니라 모든 대상들이 평화로워지고 모든 대상들의 다섯 가지 장애들을 눌러주는 효과들을 가져오게 된다는 거라. 근데 만약에 위빳사나를 해서 다섯 가지 장애를 소멸을 해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당연히 그 스님은 떠날 수 있었겠죠. 멧따 바와나의 한계라는 것은 억제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완전히 제거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천신들은 그 스님이 떠나고 나면 다시 싸울 것을 염려하게 돼있다는 거라.

 

근데 여기 밑에 보면 ‘위빳사나 수행은 다섯 가지 장애의 소멸을 가져오게 한다. 나마와 루빠의 바른 이해로 나라는 환상에서 깨어나 조건지어졌다는 현실을 깨달을 때 마음의 깜만냐따가 있게 된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아까 멧따 바와나를 죽은 자에게 하지 말라는 것은 의심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 의심을 제거하는 방법은 뭡니까? 끊임없는 관찰입니다. 끊임없는 관찰만 있으면 의심은 안 일어납니다. 대상에 끊임없이 관찰하는 마음만 있을 거 같으면 그게 뭡니까? 위짜라(vicāra)입니다. 그렇죠? 또 중립적인 사람에게 멧따 바와나를 하지 마라는 것은 내가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기 때문입니다. 나태와 게으름을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은 뭡니까?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 위딱까(vitakka)입니다.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 삐띠(pīti), 수카(sukha), 사마디(samādhi) 이런 것으로 인해서 다섯 가지 장애들은 완전하게 없애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여기에 ‘위빳사나 수행은 다섯 가지 장애의 소멸을 가져오게 한다.’라고 돼 있다고 했습니다. 위빳사나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항상 깨어있어서 대상을 놓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다섯 가지 장애는 소멸돼버립니다. 일시적으로 눌러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할려면 기본적인 조건이 뭡니까? 나마와 루빠 입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그런 조건지어진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그런 현실을 깨닫지 못하면 엄밀하게 따지면 마음의 깜만냐따는 없게 된다는 겁니다. 마음이 조건 따라서 적응해 나가는 것들.

 

자, 다시 한번 더 요약을 해봅시다.

깜만냐따라는 것은 적응성을 얘기합니다. 변화가능성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적절하게 순응해 나가는 상태. 내가 지금 수행해야 될 때는 수행에 대해서 적절하게 마음이 순응해 나가고 몸도 순응해나가고. 내가 지금 보시를 해야 될 때는 꾸살라가 존재하는 하에서 몸과 마음이 적절하게 순응해 나가는 것.

그러니까 움직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것을 한다는 목적이 있을 때 그 목적에 대해서 몸과 마음이 움직여 주는 것. 이런 것들을 깜만냐따 라고 얘기합니다.

보통 유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柔)하다고 그러죠? 아까 얘기했던 황희정승 같은 사람을 유하다고 그럽니다. 그런 유연성에다가 이런 적응성이 곁들여진 것들을 갖다가 깜만냐따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 네 그렇네요”하고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끔 이런 것이라면 나는 이렇게 한다 하고 일을 처리해 나가는 상태. 이런 것들을 깜만냐따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청정심소(sobhana-cetasika) 중에서 열넷, 열다섯 번째를 하고 있습니다. 청정심소는 전체가 스물다섯 가집니다.

근데 꾸살라를 행할 때 항상 존재하는 것들(sobhana-sādhārana-cetasika)은 열아홉 가집니다. 지금 스님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이런 열아홉 가지 범주에 다 포함이 되는 것들입니다. 결국 그런 공통적으로 항상 존재해 있는 것, 마음에 청정한 마음을 가졌을 경우에 공통적으로 존재해 있다는 것은 뭡니까? 청정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뭡니까? 내가 행복하고 평화롭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역으로 얘기해서 내가 행복하고 평화롭기 위해서는 이런 열아홉 가지 요소들을 계발시켜나가야 된다 하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소바나 쩨따시까를 계발하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스님이 몸과 마음에 대한 적응성 깜만냐따를 얘기를 하면 스스로 잘 받아들여서 그걸 계발시키는 방법들을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빠군냐따(pāguññatā) 부분을 마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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