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라후따/무두따 (kāya ca citta lahutā / mudutā): 가벼움/부드러움 (20061117)

담마마-마까
2021-08-16
조회수 728

홈페이지에 도솔님이 ‘인연(윤회)에 대해서 법회 시간에 좀 해주십시요’ 그랬는데 아, 인연 그거는 업과 윤회에 대해서 얘기할 때, 업에 대해서 얘기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분이 윤회 부분입니다. 그때 같이 듣도록 하고, 간단하게 얘기할게요.

 

인연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일어난 것은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은 원인이 있어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원인-결과라고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인연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 외에 누구도 과거 전생의 인연들을 모른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인연을 알려고 하지 말고, 이게 내 인연일까, 아닐까 괜한 걱정하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그렇게 돼 있습니까? 그거는 내가 안 막을라 해도 인연이 있으면 오게 돼있는 것이고 잡지 말라 해도 갈 사람은 가게 돼있는 거고 그게 인연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마음의 질병입니다. 마음에 병이 들지 마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얘기는, 탐·진·치라는 것에 병만 안 들 것 같으면 오고감에 걸림이 없습니다. 꼭 B형간염 예방접종을 맞아 놓으면 B형간염으로 인해서 오는 바이러스들 그런 것들이 아무리 들어오더라도 적어도 B형간염으로 인해서 암으로 변질돼서 또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순차적인 일들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바이러스를 만들지 마라라는 겁니다. 그런 질병들을 만들지 마라라는 뜻으로써 해석을 하시면 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탐·진·치다 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집착을 하지 않고 할 것 같으면 인연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안 써도 될 정도가 될 겁니다.

업과 윤회 부분에 대해서 얘기할 때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해줄 겁니다. 아마 윤회 부분이 분량이 많아가지고 적어도 한 삼사 회 넘어는 해야 되기 때문에 그때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자, 저번 시간에 빳삿디 부분 하다가 샛길로 샜죠? 빳삿디 얘기하면서 소따빤나(수다원)에서 위찌낏차(의심)가 근절이 돼나가고 아나가미(아나함)에서 까마찬다(감각적인 욕망)가 약해지고 브야빠다(악의)하고 꾹꿋짜(근심걱정)도 근절되고, 그리고 아라한일 때 티나·밋다(나태와 게으름) 부분하고 웃닷짜(들뜸) 부분하고 사라진다는 얘길 하고, 그런 다섯 가지 장애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네 가지 성인의 길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얘기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것을 오상분결, 오하분결을 중심으로 해서 아마 설명을 했을 겁니다.

대체적인 네 가지 성인의 단계에 대한 것은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거라고 봅니다. 그 얘기가 빳삿디 부분에서 나왔을 겁니다. 빳삿디라는 것은 뭐라고 번역이 돼 있습니까? 고요함이라고 돼 있죠. 차분함, 고요함 그런 뜻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차가워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어쨌든 이 빳삿디는 어디에 포함되는 겁니까? 소바나 쩨따시까(청정심소)에 포함되는 거죠. 왜 소바나 쩨따시까에 포함되는 겁니까? 이 빳삿디라는 마음심소의 결과로 인해가지고 행복으로 이끌고 닙바나로 이끌기 때문에 소바나 제따시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소바나 쩨따시까라고 하는 것은 닙바나로 인도를 해주게끔 돼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번 시간에 예를 들었던 장애들 근심·걱정들, 들뜸들, 의심들, 감각적인 욕망들, 악의들 이런 다섯 가지 장애들을 부수고 고요하게 하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바나 쩨따시까가 열반으로 인도한다, 닙바나로 인도한다 하는 얘기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빳삿디도 평화로움과 차분함을 가져오기 때문에 소바나라고 한다 하고 얘길 했습니다.

 

그래서 빳삿디 쩨따시까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살펴야 됩니다. 내가 고요함에 잘 드는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빳사디의 반댓말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예. 웃닷짜 하고 꾹꿋짜 라고 했죠? 그럼 내가 들뜸이 있는가, 근심·걱정들이 있는가? 마음을 잘 관찰을 해가지고 그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에 알아차림이 있어서 결국에는 빳삿디가 일어날 것이고, 만약에 들뜸과 근심·걱정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에 장애요인을 가져오겠죠? 그걸 빨리 몰아내야 되겠죠?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관찰을 하면 들뜸이나 근심·걱정들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것들이 결국은 빳삿디가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냥 아비담마적으로 “빳삿디 하면 고요함” 이라고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고요함이 아름다운 요소구나 하는 이해를 할 것 같으면 수행하는 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수행을 해나가는데 자신에게 빳삿디의 요소가 없는 것이 관찰되어나가면 그 반대요소인 근심·걱정과 산만함, 들뜸 같은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먼저 관찰해서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사띠로써 그 상황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 반대되는 요소들은 옆으로 비껴나가 버립니다.

‘근심·걱정이나 산만함이 참으로 고통을 초래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그 장애들을 하루빨리 완전하게 부수어버리고 나아가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게 하므로 인해서 빳삿디가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게 되는 것을 여러분들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빳삿디 라고 하는, 평화와 차분함이라고 하는 그런 요솝니다. 항상 수행해나가는데 이런 요소들은 계발을 시켜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거기까지 아마 스님이 설명을 했을 겁니다.

 

그다음에 오늘은 라후따(lahutā)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자, 프린트물 한번 보십시오. 라후따(lahutā)는 뭐라고 표현해놨습니까?

라후따(lahutā) : 가벼움. 라후(lahu)-가벼움, 따(tā)-상태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몸의 가벼움 하면 키로(kg) 수가 적게 나가는 사람, 맞습니까? 몸무게 좀 가벼운 사람은 마음도 가볍고 그렇습니까? 그렇진 않습니까?


몸과 마음의 가벼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보다는 ‘대상을 얼마나 빨리 알아차리는가’에 있습니다. 수행대상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게 돼있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죠? 일어났으면 멈추는 것이 있고 또 사라지는 것이 있고, 이 세 가지 과정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집니다. 이 과정들이 얼마나 빨리 진행되는가를 가지고 라후따가 계발됐는가 안 됐는가를 표시를 합니다.

그래서 그 교재에 보면 라후따는 티나-밋다(thīna-middha, 해태와 혼침)의 적이다 하고 얘기를 해놨습니다. 티나-밋다는 뭡니까? 나태와 게으름, 해태 혼침 그렇게 해놨습니다. 티나-밋다의 적이다 해놓았습니다.

 

근데 보통 라후따는 관찰하기가 조금 수월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무상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관찰하면 라후따는 금방 드러나 집니다. 그렇죠? 호흡만 하나 관찰해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관찰을 잘 해나가다 보면 똑같은 일어남이 없고 똑같은 사라짐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돼 있다는 것을 또한 압니다. 그렇게 관찰만 해나가다 보면 몸과 마음은 자연스럽게 나태와 게으름에서 벗어나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떨 때 수행이 잘 돼나갈 때 보면 마음이 붕붕붕붕 뜨는 듯이 느껴질 때도 있고, 또 실제적으로 몸이 자기 마음대로 기쁨에 겨워서 춤을 추게 될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것은 라후따가 계발됐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입니다.

 

수행하는 데는 나태와 게으름이라는 무거움의 요소보다는 가벼움의 요소가 있어야 만이 수행대상에 적절하게 관찰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또한 선한 일을 할 때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경우들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생겨서 했을 때하고의 마음의 차이는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하기 싫을 때 억지로 선업을 했을 때 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뒤끝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근데 기쁜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나면 그 일이 끝나고 나더라도 참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나태와 게으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찰나 간에 이러한 현상들을 볼 수 있어야 만이 수행을 한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이. 그래서 어떤 꾸살라나 수행하는 것이 라후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하는 이유가 그런 것들입니다.

 

가끔 그런 경우들을 경험하는 적이 있을 겁니다. 앉아서 수행하다 보면 실제로 몸이 붕붕붕붕 뜨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을 수가 있을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라후따 하고 민첩함이 결합이 됐을 때는 실제적으로 몸이 붕붕붕붕 뜹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붕붕붕붕 뜨듯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수행이 잘 되어나갈 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그런 기회가 헛되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많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여러 가지들, 그런데 그거 하나를 갖다가 딱 마음을 먹고 알아차릴 때는 가장 빨리 가벼워진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 수 있습니다. 라후따 요소들이.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좀 몸이 많이 피곤해가지고 몸이 좀 힘이 들 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수행을 삼십 분이라도 진짜 열심히 한번 해보십시오. 삼십 분 탁 끝나고 나면 마음이 그렇게 밝아질 수 없습니다. 가벼워질 수 없습니다. 또한 잠이 많이 부족할 때 자야지 하는 생각만 일으키지 말고 내가 한번 수행을 해 봐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 수행을 잠깐이라도 십 분이라도 한번 해보십시오. 탁 끝나고 나면 잠을 몇 시간 잔 듯이 그냥 개운한 걸 느낄 수가 있을 겁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가벼웁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의 가벼움으로 인해서 몸의 가벼움이 따라와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끔씩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막 싫은 것들이 있으면 억지로 했을 때 짜증이 많이 날 때, 이럴 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잠시 잠깐이라도 손을 펴고 오므리고 하는 이거 하나만 관찰하겠다고 마음을 딱 먹어버리면, 그거 딱 하고 나면 개운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바로 라후따 입니다. 가장 관찰하기 쉬운 부분들이니까 여러분들도 꼭 그렇게 한번 체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병들려고 할 때, 감기, 무슨 바이러스 이런 거 올려고 할 때 그때 한번 관찰해보십시오.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라후따구나 하는 걸 금방 관찰해냅니다.

라후(lahu)-라고 하는 가벼움의 요소에 따(tā)-라고 하는 상태, 가벼움의 상태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갖다가 조금 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

가장 경험하기 쉬울 때가 그런 힘든 나태와 게으름이 일어나려고 한다든지 이럴 때 그것을 몰아내주기 위한 요소들이 라후따 요소들입니다. 그럴 때 관찰하기가 쉬워진다는 의밉니다. 특히 그런 힘든 과정들에서 수행하겠다는 마음의 반작용으로써 더 많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는 금방 라후따를 관찰하기가 쉬워집니다.

 

조금 빨리 해나가겠습니다이. 무두따(mudutā) 부분 한번 보십시오.

무두따(mudutā) 부분 하겠습니다. 이 부분도 여러분들이 좀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부드러움이라고 돼 있죠? 어떤 게 부드러운 겁니까? 부드러움이란 상대를 잘 이해해주는 것, 유연성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누가 뭔 얘기하면 “그래서 뭐?” “그래서 어쩌라고” 얘기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거는 반대되는 현상들이죠?

무두(mudu)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표현할 때 이 표현들을 가끔씩 씁니다. 부드럽다 하는 그런 표현들을 쓸 때. 여기도 스님이, ‘시하가 부처님을 방문했을 때, 다른 견해에 대해서 질문하는 경에서 무두따를 이해할 수 있다’하고 책에 얘기를 해놨습니다. 그렇죠? 시하(Sīha)는 장군입니다. 마하왁가(대품)에 이 경이 나옵니다.

 

릿차비족에 시하 장군이 있었는데 이 장군은 지금의 자이나교, 자이나교 니간타의 제자였습니다. 이 릿차비 종족은 부처님으로 인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그런 종족들입니다. 릿차비 종족들은 모였다 그러면 사람들끼리 부처님에 대한 칭송들을 계속 하거든. 그러니까 아무리 니간타 수행자들이라 하더라도 그 소리는 항상 듣게 돼있는 거라. 그래서 그 소리만 들리면 부처님에 대해서 자꾸 비방을 하는 거라. 부처님은 운명론자다, 아니면 단명론자다, 무슨 논자다 이렇게 자꾸 비방을 하는 거라.

근데 이 시하 장군이 하루는 그 소리를 듣고 니간타한테 가서 “오늘 부처님한테 좀 가볼랍니다” 하니까 니간타가 그럽니다. “거기 뭐하러 갈려고 그러느냐? 그 단명론자의 말을 들어서 뭐 할 거냐?” 그러니까 그냥 그런 갑다 하고 넘어가고. 또 시간이 지나서 릿차비족이 여러 가지로 부처님에 대해서 칭송을 하니까 또 용기내가지고 “가보겠습니다” 하니까 또 그 교주가 “부처님은 단멸론자다 그런 교리를 설명하는 사람한테 가서 뭐할 거냐?” 이렇게 얘기합니다. 또 한 번 그 소리를 들을 때 “부처님은 운명론자다” 얘기합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하다가도 계속 릿차비족의 그런 얘기를 듣고 마음이 동해 갖고 ‘아, 이번에는 니간타님이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나는 가겠다’ 하고 인제 부처님한테 갔습니다.

 

가가지고 부처님한테 무릎 꿇고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을 보고 이렇게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그럽니다. 그래 맞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어떤 얘기를 하냐면, 부처님은 무작용론자라고 얘기를 하는데 부처님은 무작용론자 맞습니까? 그래 맞다. 왜 무작용론자라고 하는지 아느냐? 악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 몸으로든 입으로든 뜻으로든 악행을 멈추라는 의미에서 무작용론자다. 하지 마라 하는 거라.

또 작용론자다 얘기하는데 그거는 뭡니까? 좋은 일을 하는데 힘쓰라. 그런 거는 힘써서 자꾸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행하라고 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것들을 작용해라 해서 작용론자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를 얘기합니다.

왜 단멸론자라고 얘길하는데, 탐진치라고 하는 삼독을 끊어버려야 되는 것이니까 나는 단멸론자다 이런 식으로 부처님이 쭉 얘길 합니다. 여덟 가지에 대해서 얘길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이 시하 장군이 ‘아, 참 부처님이 대단한 분이구나’ 다른 사람 같으면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데?” 이렇게 할낀데 그렇게 얘기 안 하고 이것도 맞고 요것도 맞고 이렇게 쭉 다 얘길합니다.

 

그게 유연성이라. 그러면서 결정적인 얘기를 뭐라고 했느냐면, 이 시하 장군이 이제부터 나는 니간타 안 할랍니다. 부처님 제자 할랍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그러지 말아라. 니가 이때까지 그래도 니간타를 먹여살렸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다시 심사숙고 해라. 해가지고 만약에 니가 꼭 내 제자가 될려고 하더라도 다른 수행자들이 오거든 따뜻하게 공양을 대접하도록 하여라. 하고 부드럽게 얘기합니다.

거기서 이 시하 장군이 완전하게 마음이 돌아서서 법을 들을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밑에 보면 ‘시하가 바른 견해를 가져가지고 바른 담마를 들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점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성제에 대해서 직접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양 올리는 것 도덕적인 행위를 해나가는 것들로 인해 천상의 즐거움을 누린다 하는 그런 것들을 차례대로 설하고 나서 마음이 깨끗해질 때 사성제에 대한 것들을 설명을 해서 이 시하 장군이 수다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게 바로 부처님의 유연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 다른 경전에 유연성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누가 당신을 욕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누군가가 여기 마야님에게 욕을 했다. 나는 전혀 그게 아닌데도 막 그렇다고 욕을 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요? “그래서 뭐?” 이렇게 하겠지? 그게 유연성이 없는 단계입니다.

부처님도 그런 얘기 많이 들었거든요. 얼마나 모함들을 많이 당했습니까? 그런데도 부처님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대로 다 받아들이고 차려놓은 밥상을 내가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침을 하늘 위로 뱉었을 때 그 침은 어디로 가는가? 그렇게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악행을 저지르고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상대방이, 욕을 하고 하는 사람이 저지르는 겁니다. 그 몫은 그 사람이 받는 것이지 내가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러면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악행을 저지르든지 사실이 아닌 얘기로 비난하든지 욕설을 하든지 그거는 그 사람의 몫으로 두어라.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유연성을 발휘해서 부드럽게 대하고 그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같이 막 삿대질하고 해버리면 일을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또 경전에서 얘기하는 것이 한계라는 것은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참고 여기를 넘으면 참지 않겠다 하는 그런 한계는 없습니다. 그런 한계를 짓지 마라 하는 겁니다. 부드럽게 순응해야 됩니다. 순응하고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걸 놓지 못하기 때문에 한계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대로 순응하고 다시 놓아버리고 또 순응하고 다시 놓아버리고 하는 이것이 바로 유연성이다 하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알아차려서 사라지는 상태를 보라는 뜻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갈대가 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도 바람 부는 대로 갈대는 휘날립니다. 그렇지만 꺽이진 않죠? 바람 부는 대로 맡겨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부러지지 않고 적응하면서 잘 놓아 보내는 이런 특성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무두따의 특성입니다.

 

이런 특성이 약한 사람은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마나(māna)라고 하는 아만심이 강한 사람들은 행복감이 오래도록 가지 않고 깊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또한 닙바나로 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소바나 쩨따시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무수하게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여러분들 마음 중에 몇 퍼센트의 무두따 요소가 있습니까? 한번 측정해 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의 지금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알아차리는 것은 그마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격랑에 휩쓸려버립니다. 어떤 경우든 탐·진·치라고 하는 격랑에 휩쓸려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휩쓸려 들어가더라도 자꾸 알아차려서 자꾸 되돌려 놓는 것이 인간으로서 태어난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알겠습니까?

 

내 마음에 어떤 쩨따시까(心所, cetasika)가 있다.

어떤어떤 소바나 쩨따시까(淸淨心所 sobhana-cetasika)가 있다.

어떤어떤 아꾸살라 쩨따시까가(不善心所 akusala-cetasika) 있다. 이런 걸 아는 것보다 하나라도 자꾸 알아차려서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는 적어도 무두따-항상 부드러워야 됩니다. 그리고 항상 빳삿디-고요함을 유지해야 됩니다. 부드럽고 고요함만 유지하더라도 큰 무리 없이 꾸살라와 바와나(bhāvanā, 수행)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자가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깜만냐따, 몸과 마음의 적응성에 대한 것을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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