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 까야 짜 찟따 빳삿디 (kāya ca citta passaddhi) : 몸과 마음의 고요함 (20060901)

담마마-마까
2021-08-11
조회수 970

지금 청정심소(sobhana-cetasika) 부분 하고 있습니다.

청정심소 여덟 번째부터 열아홉 번째 까지는 쌍으로써 이루어져 있습니다. 몸(까야)과 마음(찟따)으로써 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찟따(citta), 까야(kāya)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 없죠? 가장 기본적인 거니까 그거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건데, 여기서 찟따는 문제가 안되는데 까야가 문제가 됩니다. 쩨따시까(cetasika)를 하는데 까야가 필요하냐, 까야(kāya)는 물질적인 거죠. 그렇죠?

 

쩨따시까(cetasika)는 정신적인 요소인데, 물질적인 부분인 까야가 왜 필요하느냐? 쩨따시까에 물질적인 부분이 포함이 되느냐 논란이 많은 것이 바로 이 8번부터 19번까지의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까야(kāya)를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서 설명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달라져버립니다.

청정도론이나 지금 한국에 나와 있는 서적들에는 수상행(受想行)을 까야(kāya)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냥 까야가 아니고 나마까야(nāma-kāya)라고 하는 것으로 나마루빠(nāma-rūpa) 할 때 그 나마(nāma)를 까야(kāya) 부분이다 라고 그리합니다. 보통 그게 주류를 이뤄나가고 있는 행태입니다. 그러니까 스님 입장에서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두 가지를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왜 그런가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밖에 지금 비가 오고 있거든요. 비를 안 맞을려고 계단을 타고 뛰어와서 보궁에 탁 들어왔단 말입니다. 당연히 보궁 안으로 들어오게 되니까 비는 안 맞게 되거든. 근데 어쨌든 몸은 헐레벌떡 하고 있는 상태란 말입니다. 근데 탁 들어오고 나서 부처님을 보니까 몸이야 헐레벌떡 하든지 말든지 간에 부처님 볼 때 마음은 고요하고 차분해지는 걸 느낀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몸을 관찰해보면 아직은 몸이 헐레벌떡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뭐냐 하면 뭐 그렇게 해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들어왔는데 몸이 헐레벌떡하는 게 여기 들어와서 있으니까 비도 안 맞게 되고 조용하니 편안하게 가라앉아버리거든. 가라앉아버리니까 조금 전까지는 부처님을 봐도 큰 감흥을 못 느끼는데, 이 부처님을 보니까 부처님한테 광명이 있는 것처럼 보여진단 말이라. 이런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럼 부처님이 이걸 두 부분으로 나눠놨을까? 다른 거는 두 부분으로 안 나눠놓았단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 조금 전에 스님이 설명을 했습니다.

몸하고 관계없이 마음만으로도 얼마든지 고요함이나 차분함이나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라. 또 마음이 어쩌든 간에 몸 자체는 스스로 이렇게 만들어내 나갈 수 있다는 거라. 이렇게 해서 몸과 마음을 분리를 해 놓았습니다. 그게 일반적인 파트에서 까야하고 나마 부분입니다.

 

그런데 아비담마에서는 까야(kāya) 부분을 수상행(受想行)이라고 얘기하고 있거든. 마음(識)은 어떻게 됩니까? 수상행식(受想行識), 여기서는 식(識)부분이죠. 식이 스스로 뭘 만들어나갑니까? 만들어 나가지 못합니까? 만들어 나갑니까? 못 만들어 나가죠! 어차피 수상행이 있어야 식이 존재를 하게 돼있는데, 이걸 통틀어서 찟따라고 하게 되면 문제는 간단해져버립니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나마하고 루빠 식으로 구분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까야빳삿디와 찟따빳삿디로 구분할 필요가 없게 돼버립니다.

칠각지에도 빳삿디가 나옵니다. 거기에서는 이렇게 두 가지로 분리를 안 해놨습니다. 하나만 해놨습니다. 그냥 빳삿디 라고 돼있습니다.

 

근데 여기(아비담마)에서는 쩨따시까에서 왜 이렇게 분류를 해놨을까? 뭔가 틀림없이 까야빳삿디가 스스로 작용하는 게 있기 때문에 분리를 해 놨을 거 아니라. 찟따빳삿디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걸 스님이 얘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까야 부분을 수상행으로 받아들이든 아니면 그냥 까야로 받아들이든 그건 여러분들 몫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어느 것이 맞는지 체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띠까(ṭīkā 복주서) 부분에는 이것이 맞다, 또 저쪽 띠까(ṭīkā 복주서) 부분에서는 저것이 맞다 이렇게 분분들 합니다. 분분들 하기 때문에 그건 인제 여러분들 몫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이게 맞는가 저것이 맞는가 체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이!

 

빳삿디는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평온, 고요함 그런 뜻이죠? 책에 나와 있는 대로 더울 때 시원한 방에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 몸이 시원해지기 때문에 몸으로 인해서 느낌도 시원해지고 결국에는 마음도 시원해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시원해지니까 아, 내가 시원하게 되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찟따빳삿디 까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통칭해서 까야빳삿디(kāya ppassaddhi), 찟따빳삿디(citta ppassaddhi) 라고 얘기합니다. 그건 평온한 상탭니다.

 

몸은 스스로 고요해질 수 있습니까? 마음이 없어도 몸은 스스로 고요해지게 돼있습니다. 잠잘 때 생각을 해봅시다. 또 내가 삼매에 들 때 생각을 해봅시다. 관계없이 내 몸은 고요해질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에어컨 튼 방에 탁 들어왔을 때 조금 있다 내가 시원하다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에 느껴집니까? 몸이 먼저 시원해졌기 때문에 마음으로 그걸 받아들이게 됩니다. 몸은 지 혼자 스스로 시원해질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외부적인 영향들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그래서 몸은 찟따와 관계없이 이 까야만으로도 시원해지게 돼있는 겁니다. 평온함도 꼭 마찬가지라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찟따빳삿디가 스스로 존재할 수 있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몸의 고요함에 달라붙는 심소의 웃닷짜(uddhacca, 들뜸)를 진정시킨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건 두 가지를 분리해 놓은 겁니다이. 앞에서 몸의 고요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몸 자체만 얘기하는 겁니다. 심소 부분이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까야 부분입니다. 몸이 먼저 시원하게 돼있으니까 아, 내가 시원하다는 느낌으로 인해서 마음으로 전달돼서 그걸 완전하게 시원하다고 마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상태까지 되는 것, 인식하기 전의 단계까지가 먼저 심소의 웃닷짜(빳삿디)입니다. 이것도 똑 마찬가지로 까야빳삿디 부분이 되는 거죠. 웃닷짜가 아니고 심소의 빳삿디 부분으로 되는 겁니다. 그거는 앞에 부분의 진짜 몸으로써의 까야고, 뒤에 부분은 심소 부분의 까야 부분이 됩니다. 그로 인해가지고 마음으로써의 빳삿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산란함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산란함입니다. 마음의 산란함을 진정시켜주는 역할들을 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마음의 산란함을 진정시켜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얼른 이해가 안 갑니까? 이해가 갑니까?

 

(수행자 질문)

보통 까야를 갖다가 수상행으로 봤을 때는 앞에 부분, 전자가 빠져버리게 되는 거죠. 안 그러면 뭉뚱그려서 같은 행태로써 취급을 당해버리게 되는 거고. 어차피 여기서 다루는 건 쩨따시카 부분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몸으로써의 평온함이라든가 시원함 이런 것은 배제돼버리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자, 그래서 이 소바나 쩨따시카(sobhana-cetasika)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소바나 쩨따시카는 뭘 가져와 집니까? 아꾸살라(akusala)를 가져와 집니까, 꾸살라(kusala)를 가져와 집니까? 꾸살라 찟따를 일으키는 거죠. 이게 소바나(sobhana)냐 아니냐 하는 것은 꾸살라냐 아꾸살라냐 하는 것으로 판단들을 해나가게 돼있는 겁니다. 근데 여기서는 두 개의 상태, 그것이 심소하고 마음이든 아니면 몸과 마음이든 이런 두 개의 상태가 둑카(dukkha)를 진정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하고 얘기합니다. 왜? 소바나이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고요한 상태에서 어떤 일을 행해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다나(dāna)를 하든 실라(sīla)를 하든 바와나(bhāvanā)를 하든 어떤 형식이든 그렇게 해나갈 거 같으면 거기에는 선한 마음만 존재를 해나가게 되는 것이지 불선한 마음은 존재를 하지 않게끔 돼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어떻게 됩니까?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고 하는 마음들이나 아니면 짜증나고 또 의심하는 마음들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근데 내 마음이 이걸 행하고 있는데 자꾸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럽다. 둑카(dukkha)로써 현상 현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 자체에 대한 불만족이나 그걸 둑카로 보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이!

그냥 고통스러운 것, 이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은 선한 찟따가 일어나고 있지는 않고 있다는 거라. 나쁜 마음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걸 불만족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빳삿디를 하고 있다, 마음이 고요하고 또 심소가 고요한 상태가 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게 뭡니까? 꾸살라(kusala)죠! 꾸살라 찟따가 일어나게끔 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에서는 꾸살라 찟따가 일어나게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둑카라고 하는 것은 진정시키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만족 스러운 거나 고통스러운 것들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내 마음은 이미 빳삿디가 안 되어있다 라는 거죠. 마찬가지로 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 밑에 보면 예를 들어가지고 나와 있습니다. 애착을 가지고 뭔가를 노력할 때 침착성이 없으며 그리고 또 빳삿디가 있을 수 없다. 그렇죠? 뭔가 움켜쥘려고 하고 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집착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빳삿디가 있을 수 없다하는 겁니다.

그리고 설혹 내가 빳삿디가 돼있는 상태에서 꾸살라 찟따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꾸살라 찟따가 항상 존재해 있는 것은 아니죠? 바로 떨어져 나가버리고 또 다른 꾸살라 찟따가 일어나든지 안 그러면 아꾸살라 찟따가 일어나든지 이렇게 돼나갑니다.

근데 알아차림이 강하지 못할 거 같으면 거의 대부분은 꾸살라 찟따가 일어나고 나면 그다음에 일어나지는 게 아꾸살라 찟따 라는 거라. 거의 반대 경향으로 이렇게 나아가집니다. 그래서 그걸 갖다가 방어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이 빳삿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거 같으면 수행해 나가는 데는 상당한 도움을 가지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러서 청정심소((淸淨心所 sobhana-cetasika) 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빳삿디를 계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고요함’ 하면 사람들이 먼저 ‘자나(jhāna)’를 떠올립니다. 그렇죠? 근데 어떻게 됩니까? 선정에 있을 때는 빳삿디가 됩니다. 깨어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빳삿디가 있습니까?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근데 어쨌든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아무리 높은 선정을 닦고 그 속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나왔을 때는 번뇌에 물들게 돼있는 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걸 근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가장 쉬운 선정의 다섯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에깍가따 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죠. 자, 그러면 한번 봅시다. 우리가 크게 말하면 거친 번뇌가 다섯 가지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맨 처음 수행하다 보면 이 다섯 가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다섯 가지를 다 제거해버리면 결국 아라한이 됩니다. 그 다섯 가지가 뭡니까?

티나-밋다(나태와 게으름), 위찌낏차(의심), 브야빠다(악의), 웃닷짜-꾹꾸짜(들뜸- 근심걱정), 까마찬다(감각적인 욕망)

그러면 이거하고 선정의 다섯 가지 요소하고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내가 만약에 위딱까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뭐가 조금 엷겠습니까? 뭐를 툭 집어가지고 관찰하는 능력이 있다. 위딱까가 작동을 할 때는 티나-밋다는 없어져 버립니다. 지금 얘기하는 거는 완전히 제거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이.

 

그다음 위짜라가 있을 때는, 그걸 지속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있으면 의심이 없어집니다. 당연히 내가 이거 관찰하기 바빠 죽겠는데 마음은 요거 관찰하고 있는데 언제 의심을 해?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만 돼나가도 ‘이게 맞는가, 저게 맞는가’ 딴 생각 품지 않고 의심하지 않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삐띠가 있을 때는 브야빠다가 엷어집니다. 기쁨이 넘쳐가지고 있는데 악한 마음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 기쁨은 어떻게 됩니까? 수상행 중에서 어디에 포함됩니까? 단편적으로 예를 들어봅시다. 웨다나칸다(수온)입니다.

그다음에 수카는 어디에 수카 이겠습니까? 수카는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에 젖어가지고, 어떻게 보면 자칫 착각하면 열반 같이 이렇게 느껴지는 그런 상태입니다. 상카라 입니다. 상카라 칸다(상온)에 속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들뜸이나 의심하는 부분이 없어집니다.

 

여기서 보면 빳삿디가 계발되면 뭐가 줄어든다고 했습니까? 웃닷짜(들뜸)가 떨어져나가게 돼있습니다.

웃닷짜는 사성인 중에서 언제 떨어져 나가게 돼있습니까? 아라한이 됐을 때에만 완전하게 근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웃닷짜는 다시 일어나게끔 돼있습니다. 빳삿디를 아무리 계발시킨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웃닷짜를 완전하게 떨어뜨리지 못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언제든지 악한 마음들을 낼 수가 있게끔 돼있다는 겁니다.

선정-자나에서는 이렇게 한계가 있게 됩니다. 다른 도리가 없는 거라. 언제든지 살아나올 수 있게 되는 거라. 이 다섯 가지가 떨어져나가는 부분은 여기까지만 합시다이.

선정수행에서는 언제든지 내가 다시 악한 마음을 품을 수가 있고, 또 웃닷짜는 다시 일어나게끔 돼있다는 겁니다.

 

근데 선정하고 위빳사나는 뭐가 다른 겁니까?

선정은 마음의 평온, 마음의 고요함, 자나(jhāna)를 계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근데 선정을 아무리 계발해도 언제든지 웃닷짜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 위빳사나 하고는 뭐가 다른 거라? 조금 전에 얘기한 바로 그 부분입니다. ‘아, 이게 틀렸구나!’ 선정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거라. 견해를 바로 가지게 되는 거라. 항상 바른 견해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이것(선정수행)은 내가 목표로 해야 될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번뇌를 완전하게 소멸하는 쪽으로 나아가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게 사마타하고 위빳사나의 차이점이 바로 그겁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어떤 거 할 겁니까?

그럼 위빳사나 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위빳사나에서도 똑 마찬가지로 빳삿디가 일어나집니다. 그래서 그 밑에 부분에 뭐라고 적어놨습니까?

‘일상생활에서 공덕행이나 담마의 가르침을 상기할 때 우리는 고요함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꼭 자나(선정)가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어제 스님들한테 탁발했는데 그렇게 기쁠 수 없거든. 그것만 생각해도 얼마든지 빳삿디가 일어나집니다. 그리고 스님 법문 이번에 한 번 들어가지고 다음에 한 번 더 듣고 싶다 해가지고 인터넷 들어가서 한 번 더 들어보면 또 그런 게 일어나집니다. 그 순간에는 틀림없이 웃닷짜가 없습니다. 빳삿디가 일어나집니다. 그렇게 해도 얼마든지 계발되어 나간다는 거라. 꼭 자나만 가지고 할 이유도 없이, 그렇죠? 그런데 밑에 한번 보십시오.

 

‘바른 관찰로써 알아차림이 있을 때 나마와 루빠를 이해하게 되고 그 순간에 고요해진다.’ 이해하겠습니까? 가장 기초적인 것은 나마와 루빠 부분입니다.

이것이 나마이고 이것이 루빠구나 하는 걸 갖다가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이해를 하게 되고 그 순간에 반드시 빳삿디가 일어나게끔 돼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에라도! 일어남 사라짐 하나 순간에도 얼마든지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라!

우리는 항상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행동들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이 위빳사나 수행일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밑에 부분 봅시다.

‘아라한의 마음은 고요하다. 아라한의 말도 고요하다. 아라한의 행위도 고요하다. 아라한은 진실로 담마를 깨달았기에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났고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동요함이 없다.’ 항상 빳삿디의 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깨달음에 이르고 나니까, 선정 부분에서는 빳삿디가 있다가 깨어나면 빳삿디가 사라질 수 있지만, 아라한의 상태에서는 계속 지속적으로 있게 됩니다. 말과 행동과 마음 전체를 다 통틀어가지고.

당연히 우리가 따라가야 될 부분이고, 또 그렇게 만들어나가야 될 부분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마만큼 이 위빳사나 수행이 그마만큼 중요한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이 수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라후따(lahutā) 부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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