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아로바(alobha) 까지 했습니다. 오늘은 아도사 부분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도사(adosa)가 뭡니까? 도사(dosa)는 여러분들이 잘 알죠? 성내는 것. 성내는 건 뭐 때문에 성나는 겁니까? 싫어하고 배척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내는 거죠.
싫어하고 배척한다는 건 뭡니까? 상대방이나 다른 외부의 대상들이 나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얘기거든. 혐오감을 주는 것은 내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참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근데 그렇지 않고 싫어하는 것이 없는 상태, 혐오감이 없는 상태는 알아차리기 참 힘이 들죠? 그걸 아도사(adosa)라고 그럽니다. 싫어함이 없는 상태, 또 성냄이 없는 상태 이런 것들을 아도사라고 그렇게 합니다.
불쾌한 감정들을 우리는 보통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런 감각이 일어나는 자체를 배척할려고, 멀리할려고들 많이 합니다. 근데 그 반대로 불쾌하지 않은 감정은 좋은 감정이겠죠. 좋은 마음들.
친구들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람을 만났을 때 기분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기분 좋은 친구들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 사람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 거 없죠? 기분 좋은 친구들은 편안하게 만나지고 항상 사랑하는 눈빛으로 봐지고 그렇게 됩니다.
결국 아도사의 특징은 멀리 배척할려고 하는 것, 원한심을 가지고 멀리 배척할려고 하는 그런 것들을 떨쳐버릴려는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전에는 뭐라 하느냐면 향이 다 타고나면 위에 머리는 딸깍 꼬부라지죠. 그런 ‘향과 같다’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청명한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은 참 원만하게 보이거든요. 뜨겁다라든지 차갑다라든지 그런 느낌보다는 원만하다는 그런 느낌들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보통 아도사를 비유할 때 ‘향처럼 마음속에 있는 번뇌․고뇌를 떨쳐버리는 상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보름달을 보는 것과 같은 마음의 상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기능과 특징을 가지고 있고, 번뇌를 파괴하는 상태라는 그런 걸 아도사라고 얘기합니다.
만약에 내가 누굴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같이 있으면 어떻게 돼? ‘아, 이거 어떻게 빨리 안가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빨리 벗어날 방법이 없나 하고 고민하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초조해집니다. 말을 하지도 못하고 다른 모션을 취하지도 못하고 초조해진다는 거라. 그런 상태는 도사가 있는 상태라는 거라. 도사가 있으면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 도사가 있는데 안 가면 어떻게 돼요? 스트레스 받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거라. 그로 인해서 마음은 근심 고뇌가 있고 고민하게 되고 초조해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마음은 열을 받게 돼있다는 거라. 그러면 아도사는 반대작용이라 열을 내려주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아도사는 물과 같다고 도사는 불과 같다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어쨌든 아무리 도사가 있더라도 마음에서 화상을 입지 않도록 해야됩니다이.
도사와 아도사는 자꾸 습관화되다 보면 우리의 기질적인 특질들을 결정지으기도 합니다. 주름살이 많고 흰머리가 빨리 나고 그런 사람들은 유전적인 요인들도 있습니다. 근데 후천적인 걸 얘기합니다이. 그런 사람들은 보통 보면 도사가 많습니다. 유전적인 부분들도 많지만 보통 후천적인 걸 얘기합니다. 도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늙음의 원인이 되고, 아도사가 많으면 젊음의 원인이 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앗타살리니에 보면 이렇게 풀이를 해놨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친구는 생기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주변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도 도사가 많은가 아도사가 많은가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누가, 친구가 자기한테 미워하고 싫어하는 말이나 감정들이나 행동들을 자꾸 하는 사람들 주변에 있겠어?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말을 해주는 사람의 주변에 있으려 하겠어? 그래서 아도사가 친구의 생산에 원인이 된다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런 좋은 감정들, 사랑을 통해서 친구는 얻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아도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멧따(metta)라고 돼있죠. 경전에! 또 칸띠(khanti)-인내라고 하는 것도 아도사에 포함됩니다.
이 멧따 라는 건 살아있는 존재들을 향해서 표현하는 아도사의 한 형태입니다. 그다음 인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외부적인, 외관적인 아도사의 형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꼭 아도사가 멧따 라고는 못합니다. 그럴 거 같으면 쩨따시까 부분에 두 개를 분리해 놓을 필요가 없겠죠. 멧따 부분은 그때 가서 자세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인내(khanti)가 아도사를 경작하는 기회가 됩니다. 싫어하는 감정, 싫어하는 느낌들이 일어날 때 그 속에는 인내라고 하는 것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싫어하는 감각을 일으켰다는 것은 인내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남방불교권에서는 스님들이 출가를 하면 보통 일 년에 한 번씩 두탕가를 행하도록 돼있습니다. 혹시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바리때 그림표시를 해놔 놓고 그 위에다 둥근 원형으로 볼 같은 것들을 갖다가 해놓고 플랭카드를 요렇게 해놓은 게 있을 겁니다. 글자 모르는 사람들도 아마 두탕가 하는 거는 공통된 그림입니다. 그래놔 놓고 날짜하고 장소들을 표시해 놓은 게 있을 겁니다. 아마 여행할 때 자세히 보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봤을 겁니다.
어쨌든 결제가 끝나고 나면 해제 기간에는 반드시 두탕가(dhutaṅga)를 한 번씩 들어가도록 권장을 합니다. 의무적인 것은 아닌데 거의 대부분 특별한 이유가 없을 거 같으면 다들 합니다. 자기가 선택해서 하도록 하죠. 어쨌든 그런데 가보면 노지에서 합니다. 그냥 가사 입은 거하고 해서 가사 세 벌하고 바리때 하나만 하고, 스님들이 앉는 아사나라 해가지고 천조각 하나만 가지고 일주일이나 보름 자기가 기간을 정해서 수행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여기서 수행을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지붕이 있는 데도 모기들이 들어와서 방해를 합니다. 그래서 가끔씩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아이고, 이놈의 모기만 좀 없으면 내가 좀 수행하겠는데’, ‘아이고, 이놈의 모기만 없으면 내가 깨달음에 이르겠는데’, 모기가 없으면 또 다른 요인은 없을 것 같아요? 또 생깁니다. 두려움과 공포, 또 그런 요인들이 없으면 또 다른 요인들이 생겨나고 자꾸 그렇게 생겨납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것만 없으면 내가 뭘 하겠네’ 하는 거는 공부 안 하겠다 하는 얘기와 꼭 마찬가집니다.
어쨌든 스님들이 두탕가를 하다 보니까 온갖 재난들은 다 만나게 됩니다.
공동묘지 같은 데서 혼자 수행을 해보십시오. 공포라는 것들이 섬짓섬짓 다가와지기도 합니다. 노지에 있으니까 벌레들이나 해충들의 위협들은 계속 와집니다. 그렇다고 스님이 그걸 잡아 죽이지도 못하는 거고, 주위를 아무리 청결하게 유지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위험들이 들끓게 돼있다는 거라. 그걸 한차례씩 겪게 돼있는데, 그때 인제 스님도 그런 걸 겪으면서 부처님이 인내로 인해서 아도사를 경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걸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런 것들을 그런 조건일 때 내가 인내를 통해서 그걸 길러나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주변에도 여러분들한테 안 좋은 조건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럴 때 내가 아도사를 증진시키는 기회구나 하고 생각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번뇌를 제거하고 고뇌를 제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인내력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인내로 인해서 열반을 체험한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앉아있으면 불쾌한 감정들, 또 오래도록 앉아있으면 아픈 느낌들, 싫어하는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집니다. ‘아, 내가 아도사를 기를 수 있는 기회구나’하고 판단해야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진짜 악조건일 때, 스님도 진짜 시간이 없어서 빠듯빠듯 할 때 이럴 때 공부하는 것이 참맛이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럴 때 공부를 조금 더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바랍니다.
앉아가지고 수행을 하다 보면 다리가 아픈 통증들이, 아픈 감각들이 나타나집니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서 감각을 느낄 때 두 개의 감각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아니죠?
하나를 느낍니다.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하나를 내가 느끼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느껴지는 걸 보통 뭐라 그럽니까?
보통 위빠까(vipaka)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가 드러나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외부적으로 드러나진 형태’를 위빠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위빠까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픈 느낌, 즐거운 느낌 이런 것들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받아야 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위빠까(vipaka)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마음이 달라붙는 겁니다. 아꾸살라 찟따(akusala citta, 불선심)냐 안 그러면 꾸살라 찟따(kusala citta, 선심)냐 결정하는 순간들입니다. 좋은 마음을 일으킬 거 같으면 꾸살라 찟따로 넘어갈 거고, 안 그러면 불쾌한 감정을 일으킬 거 같으면 아꾸살라 찟따로 넘어가는 겁니다.
여기서 내가 도사가 될 것이냐 아도사가 될 것이냐가 결정난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런 위빠까들이, 아픈 느낌들이나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날 거 같으면 어떻게 하면 아도사 쪽으로 향하게 해가지고 마음을 수행으로 연관을 시켜나가겠습니까?
사띠(sati)입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알아차림 이상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현명하게 판단을 해서 현명한 사띠를 계발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리석게 사띠 없이 그 감정을 통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찟따(citta, 마음)가 달라져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분들은 인내를 통해서 아도사를 자꾸 기르도록 해야 됩니다.
뭔가 이익이 있으면 빨리 길러지겠죠? 아, 이렇게 하니까 나에게 이런 이익이 있구나 하는 경험을 통해서 그런 이익들을 자꾸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런 인내의 이익이 있는 걸 알 거 같으면 틀림없이 도사보다는 아도사 쪽으로 마음이 향하고 그쪽으로 더욱더 기울어지게 되어있는 겁니다.
싫은 것들에 대해서 사띠를 계발할 때, 아도사 쪽으로 행하도록 할려고 하고 이익이 있는 쪽으로 향하도록 할려면 빠른 방법들은 뭐냐면 나마와 루빠(nāma-rūpa)를 구분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거는 물질적인 것이고 이거는 비물질적인 것이구나 하는 걸 자꾸자꾸 구분을 하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새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마음은 아도사 쪽으로 향하게 돼있습니다.
그마만큼 인내(khanti)가 아도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돼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루 빨리 계발을 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멧따(metta), 이 멧따도 아도사의 하나의 다른 문입니다. 멧따는 여러분들이 잘 알죠. 사랑․자애의 마음을 방출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보통 수행하기 전에 멧따 바와나를 하고 수행하기도 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좀 많이 가르치는 스승들은 반드시 이 멧따를 먼저 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또 위빳사나 수행을 가르치는 분들 중에서도 한 반 정도는 그럴 겁니다. 이 멧따의 중요성을 항상 역설을 합니다. 그것이 주가 되면 안 되겠지만 그것이 하나의 방편으로써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합니다.
멧따가 성공했는지 안 했는지 판단 기준은 어떻게 합니까? 마음에 악의가 있는가 없는가. 내가 이 사람한테 멧따를 방출했단 말이라. ‘이 사람이 행복하기를’ ‘이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하면서 멧따를 방출했는데, 하고 나서 이 사람을 바라봤는데 이 사람을 보는 내 마음이 사랑의 마음으로,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 찼을 거 같으면 좋은데, 내가 멧따를 방출했는데 이 사람을 봐도 똑같다 아니면 ‘아이고, 인간아’ 하는 생각이 들거면 이건 악의에 차 있다는 건데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멧따를 방출 안 하고 악의를 방출한 그런 상태가 되는 거라. 아도사를 증진시키는 방법으로써 멧따나 칸띠(khanti, 인내)를 쓴다는 그런 뜻입니다.
근데 멧따의 가까운 적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애정입니다. 그래서 멧따를 방출할 때 멧따가 무르익기 전에는 절대 이성,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방출하지 말아라하는 게 뭐냐면 가장 가까운 적이 이 이기적인 애정입니다.
태국에서도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멧따바와나를 하라 하니까 뭣 모르고 합니다. 절에 와서 수행하다가 자기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기 부인이거든. 집에 있는 자기 부인에게 멧따를 보냅니다. 이게 자꾸 계발이 되니까 그 부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캐치가 되는 거라.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인데도 이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누구하고 만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이 훤하게 들어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부인이 좋은 짓만 하고 있으면 몰라도 나쁜 생각을 할 수도 있단 말이라. 그럼 마 성이 버럭버럭 나갖고 인제 당장 집에 가야되는 거라. 가가지고 “니가 이랬지” 하면 부인이 깜짝 놀래거든. 그래가지고는 다시 절에 와가지고 자기는 멧따 바와나를 한다고 똑같은 짓을 또 하는 거라.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내가 신통력이 생겼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지가 뭘 잘못한다고 생각은 안 하고 신통력이 생겼다고 막 자랑하고 다니고 아만심이 생기고.
그러다가 하루는 멧따를 보내다가, 태국의 꾸띠들은 방(천장)이 낮습니다. 멧따를 막 방출하면서 갑니다 자기 부인한테. 그러다가 거기에 머리를 팡 찧었는 거라. 팡 찧어가지고 피가 줄줄줄줄 흐르고 그때사 정신이 번쩍 들어가지고 아픈 감각을 느낍니다. ‘아, 이건 내가 멧따 바와나를 하면서 멧따를 하는 게 아니고 이기적인 애정에 푹 파묻혀 있었구나’ 여러분들도 그렇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피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뭐라 하느냐면 ‘가외시타 뻬마’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 멧따를 갖다가. 송아지에 대해서 어미소가 가지는 애정, 암소가 가지는 애정을 갖다가 얘기를 합니다. 혹시 소를 자세히 관찰한 사람들은 봤는지 몰라도 어떤 경우든 암소는 송아지를 품에서 떼지를 않습니다. 상당히 지근거리에 두든지 안 그러면 가랑이 사이에 송아지를 둡니다. 아무리 자기보다 큰 짐승이 오더라도 자기가 죽을지언정 송아지를 지켜냅니다. 어떤 면에서는 참 숭고한 사랑이고 또 희생적인 사랑이지만 멧따의 성향으로 봤을 때는 그것은 이기적인 애정이라고 그럽니다.
진짜 멧따를 잘 방출할 경우에는 경전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죽일려고 했을 때 내가 칼을 들어서 그 사람을 죽이질 않고 멧따를 방출하라. 설혹 상대방이 자기 화를 못이기고 자기를 죽이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 상태 이런 것은 멧따를 방출하는 것이 된다. 근데 이기적인 애정은 멧따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가외시타 뻬마’라고 얘길 합니다.
(우데나왕 이야기 예문 중략)
사무량심 브라흐마짜라 위하라라 해가지고, 사범주라고 하는 범천들이 머무는 네 가지 거주처가 있습니다. 자비희사 멧따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 이 네 가지를 사범주라 그럽니다. 이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āra) 사범주에 항상 머물렀다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마만큼 멧따가 아도사를 증진시키는데 참 많이 유용하다 하는 사실입니다.
멧따 게송이 있습니다.
삽베 삿따 아웨라 혼뚜 Sabbe sattā averā hontu
삽베 삿따 아바야빳자 혼뚜 Sabbe sattā abyāpajjhā hontu
삽베 삿따 아니가 혼뚜 Sabbe sattā anīghā hontu
삽베 삿다 수키앗따낭 빠리하란뚜 Sabbe sattā sukhī attānam pariharantu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를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신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좋은 상태가 되기를
모든 존재가 번영하여 그들 모두 오래도록 살아가면서 행복이 가득하기를
수행할 때, 수행하기 직전에 멧따 바와나 할 때 이 게송을 합니다. 이 게송은 여러분들이 항상 기억을 해놨다가, 멧따 바와나가 사마타 자나(samatha jhāna)를 증진시킬 때는 탁월한 효과들을 가져오는 그런 것들이니까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다나(dāna)를 하면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다 행복합니다. 멧따를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 멧따를 방출하는 나(자신)나 멧따를 받는 대상이나 다 행복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항상 가지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멧따와 인내가 있으면 마음의 평화가 항상 깃들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만큼 평화로운가, 그건 일반적인 평화로움이 아닙니다. 대상에 직면했을 때 평화로운가에 따라서 내가 아도사가 무르익었다 아니다 하는 것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조심해야 될 것은 뭐냐면 사람들은 친구가 없으면 보통 고독해 합니다. ‘멧따를 방출할 대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데 그건 참 잘못된 관념입니다. 궁극적인 실재에서는 친구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타난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있는 것은 찟따(citta)와 쩨따시까(cetasika)와 나마(nāma) 루빠(rūpa) 라고 하는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여 가지고 닙바나(nibbāna)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뭐라 합니까? 루빠와 찟따와 쩨따시까와 닙바나 이 네 가지를 다루는 것뿐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지금 고독하고 혼자다 하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십시오. 그럴 경우에는 내가 더욱더 인내하고 멧따를 계발시키면 틀림없이 주변에 친구들은 모이고 좋은 사람들은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그런 것들도,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대상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을 통해서 이런 아도사를 기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따뜨라맛잣땃따 - 중립성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저번에 아로바(alobha) 까지 했습니다. 오늘은 아도사 부분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도사(adosa)가 뭡니까? 도사(dosa)는 여러분들이 잘 알죠? 성내는 것. 성내는 건 뭐 때문에 성나는 겁니까? 싫어하고 배척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내는 거죠.
싫어하고 배척한다는 건 뭡니까? 상대방이나 다른 외부의 대상들이 나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얘기거든. 혐오감을 주는 것은 내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참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근데 그렇지 않고 싫어하는 것이 없는 상태, 혐오감이 없는 상태는 알아차리기 참 힘이 들죠? 그걸 아도사(adosa)라고 그럽니다. 싫어함이 없는 상태, 또 성냄이 없는 상태 이런 것들을 아도사라고 그렇게 합니다.
불쾌한 감정들을 우리는 보통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런 감각이 일어나는 자체를 배척할려고, 멀리할려고들 많이 합니다. 근데 그 반대로 불쾌하지 않은 감정은 좋은 감정이겠죠. 좋은 마음들.
친구들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람을 만났을 때 기분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기분 좋은 친구들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 사람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 거 없죠? 기분 좋은 친구들은 편안하게 만나지고 항상 사랑하는 눈빛으로 봐지고 그렇게 됩니다.
결국 아도사의 특징은 멀리 배척할려고 하는 것, 원한심을 가지고 멀리 배척할려고 하는 그런 것들을 떨쳐버릴려는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전에는 뭐라 하느냐면 향이 다 타고나면 위에 머리는 딸깍 꼬부라지죠. 그런 ‘향과 같다’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청명한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은 참 원만하게 보이거든요. 뜨겁다라든지 차갑다라든지 그런 느낌보다는 원만하다는 그런 느낌들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보통 아도사를 비유할 때 ‘향처럼 마음속에 있는 번뇌․고뇌를 떨쳐버리는 상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보름달을 보는 것과 같은 마음의 상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기능과 특징을 가지고 있고, 번뇌를 파괴하는 상태라는 그런 걸 아도사라고 얘기합니다.
만약에 내가 누굴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같이 있으면 어떻게 돼? ‘아, 이거 어떻게 빨리 안가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빨리 벗어날 방법이 없나 하고 고민하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초조해집니다. 말을 하지도 못하고 다른 모션을 취하지도 못하고 초조해진다는 거라. 그런 상태는 도사가 있는 상태라는 거라. 도사가 있으면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 도사가 있는데 안 가면 어떻게 돼요? 스트레스 받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거라. 그로 인해서 마음은 근심 고뇌가 있고 고민하게 되고 초조해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마음은 열을 받게 돼있다는 거라. 그러면 아도사는 반대작용이라 열을 내려주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아도사는 물과 같다고 도사는 불과 같다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어쨌든 아무리 도사가 있더라도 마음에서 화상을 입지 않도록 해야됩니다이.
도사와 아도사는 자꾸 습관화되다 보면 우리의 기질적인 특질들을 결정지으기도 합니다. 주름살이 많고 흰머리가 빨리 나고 그런 사람들은 유전적인 요인들도 있습니다. 근데 후천적인 걸 얘기합니다이. 그런 사람들은 보통 보면 도사가 많습니다. 유전적인 부분들도 많지만 보통 후천적인 걸 얘기합니다. 도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늙음의 원인이 되고, 아도사가 많으면 젊음의 원인이 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앗타살리니에 보면 이렇게 풀이를 해놨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친구는 생기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주변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도 도사가 많은가 아도사가 많은가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누가, 친구가 자기한테 미워하고 싫어하는 말이나 감정들이나 행동들을 자꾸 하는 사람들 주변에 있겠어?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말을 해주는 사람의 주변에 있으려 하겠어? 그래서 아도사가 친구의 생산에 원인이 된다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런 좋은 감정들, 사랑을 통해서 친구는 얻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아도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멧따(metta)라고 돼있죠. 경전에! 또 칸띠(khanti)-인내라고 하는 것도 아도사에 포함됩니다.
이 멧따 라는 건 살아있는 존재들을 향해서 표현하는 아도사의 한 형태입니다. 그다음 인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외부적인, 외관적인 아도사의 형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꼭 아도사가 멧따 라고는 못합니다. 그럴 거 같으면 쩨따시까 부분에 두 개를 분리해 놓을 필요가 없겠죠. 멧따 부분은 그때 가서 자세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인내(khanti)가 아도사를 경작하는 기회가 됩니다. 싫어하는 감정, 싫어하는 느낌들이 일어날 때 그 속에는 인내라고 하는 것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싫어하는 감각을 일으켰다는 것은 인내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남방불교권에서는 스님들이 출가를 하면 보통 일 년에 한 번씩 두탕가를 행하도록 돼있습니다. 혹시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바리때 그림표시를 해놔 놓고 그 위에다 둥근 원형으로 볼 같은 것들을 갖다가 해놓고 플랭카드를 요렇게 해놓은 게 있을 겁니다. 글자 모르는 사람들도 아마 두탕가 하는 거는 공통된 그림입니다. 그래놔 놓고 날짜하고 장소들을 표시해 놓은 게 있을 겁니다. 아마 여행할 때 자세히 보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봤을 겁니다.
어쨌든 결제가 끝나고 나면 해제 기간에는 반드시 두탕가(dhutaṅga)를 한 번씩 들어가도록 권장을 합니다. 의무적인 것은 아닌데 거의 대부분 특별한 이유가 없을 거 같으면 다들 합니다. 자기가 선택해서 하도록 하죠. 어쨌든 그런데 가보면 노지에서 합니다. 그냥 가사 입은 거하고 해서 가사 세 벌하고 바리때 하나만 하고, 스님들이 앉는 아사나라 해가지고 천조각 하나만 가지고 일주일이나 보름 자기가 기간을 정해서 수행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여기서 수행을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지붕이 있는 데도 모기들이 들어와서 방해를 합니다. 그래서 가끔씩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아이고, 이놈의 모기만 좀 없으면 내가 좀 수행하겠는데’, ‘아이고, 이놈의 모기만 없으면 내가 깨달음에 이르겠는데’, 모기가 없으면 또 다른 요인은 없을 것 같아요? 또 생깁니다. 두려움과 공포, 또 그런 요인들이 없으면 또 다른 요인들이 생겨나고 자꾸 그렇게 생겨납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것만 없으면 내가 뭘 하겠네’ 하는 거는 공부 안 하겠다 하는 얘기와 꼭 마찬가집니다.
어쨌든 스님들이 두탕가를 하다 보니까 온갖 재난들은 다 만나게 됩니다.
공동묘지 같은 데서 혼자 수행을 해보십시오. 공포라는 것들이 섬짓섬짓 다가와지기도 합니다. 노지에 있으니까 벌레들이나 해충들의 위협들은 계속 와집니다. 그렇다고 스님이 그걸 잡아 죽이지도 못하는 거고, 주위를 아무리 청결하게 유지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위험들이 들끓게 돼있다는 거라. 그걸 한차례씩 겪게 돼있는데, 그때 인제 스님도 그런 걸 겪으면서 부처님이 인내로 인해서 아도사를 경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걸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런 것들을 그런 조건일 때 내가 인내를 통해서 그걸 길러나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주변에도 여러분들한테 안 좋은 조건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럴 때 내가 아도사를 증진시키는 기회구나 하고 생각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번뇌를 제거하고 고뇌를 제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인내력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인내로 인해서 열반을 체험한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앉아있으면 불쾌한 감정들, 또 오래도록 앉아있으면 아픈 느낌들, 싫어하는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집니다. ‘아, 내가 아도사를 기를 수 있는 기회구나’하고 판단해야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진짜 악조건일 때, 스님도 진짜 시간이 없어서 빠듯빠듯 할 때 이럴 때 공부하는 것이 참맛이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럴 때 공부를 조금 더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바랍니다.
앉아가지고 수행을 하다 보면 다리가 아픈 통증들이, 아픈 감각들이 나타나집니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서 감각을 느낄 때 두 개의 감각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아니죠?
하나를 느낍니다.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하나를 내가 느끼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느껴지는 걸 보통 뭐라 그럽니까?
보통 위빠까(vipaka)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가 드러나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외부적으로 드러나진 형태’를 위빠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위빠까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픈 느낌, 즐거운 느낌 이런 것들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받아야 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위빠까(vipaka)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마음이 달라붙는 겁니다. 아꾸살라 찟따(akusala citta, 불선심)냐 안 그러면 꾸살라 찟따(kusala citta, 선심)냐 결정하는 순간들입니다. 좋은 마음을 일으킬 거 같으면 꾸살라 찟따로 넘어갈 거고, 안 그러면 불쾌한 감정을 일으킬 거 같으면 아꾸살라 찟따로 넘어가는 겁니다.
여기서 내가 도사가 될 것이냐 아도사가 될 것이냐가 결정난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런 위빠까들이, 아픈 느낌들이나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날 거 같으면 어떻게 하면 아도사 쪽으로 향하게 해가지고 마음을 수행으로 연관을 시켜나가겠습니까?
사띠(sati)입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알아차림 이상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현명하게 판단을 해서 현명한 사띠를 계발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리석게 사띠 없이 그 감정을 통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찟따(citta, 마음)가 달라져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분들은 인내를 통해서 아도사를 자꾸 기르도록 해야 됩니다.
뭔가 이익이 있으면 빨리 길러지겠죠? 아, 이렇게 하니까 나에게 이런 이익이 있구나 하는 경험을 통해서 그런 이익들을 자꾸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런 인내의 이익이 있는 걸 알 거 같으면 틀림없이 도사보다는 아도사 쪽으로 마음이 향하고 그쪽으로 더욱더 기울어지게 되어있는 겁니다.
싫은 것들에 대해서 사띠를 계발할 때, 아도사 쪽으로 행하도록 할려고 하고 이익이 있는 쪽으로 향하도록 할려면 빠른 방법들은 뭐냐면 나마와 루빠(nāma-rūpa)를 구분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거는 물질적인 것이고 이거는 비물질적인 것이구나 하는 걸 자꾸자꾸 구분을 하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새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마음은 아도사 쪽으로 향하게 돼있습니다.
그마만큼 인내(khanti)가 아도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돼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루 빨리 계발을 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멧따(metta), 이 멧따도 아도사의 하나의 다른 문입니다. 멧따는 여러분들이 잘 알죠. 사랑․자애의 마음을 방출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보통 수행하기 전에 멧따 바와나를 하고 수행하기도 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좀 많이 가르치는 스승들은 반드시 이 멧따를 먼저 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또 위빳사나 수행을 가르치는 분들 중에서도 한 반 정도는 그럴 겁니다. 이 멧따의 중요성을 항상 역설을 합니다. 그것이 주가 되면 안 되겠지만 그것이 하나의 방편으로써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합니다.
멧따가 성공했는지 안 했는지 판단 기준은 어떻게 합니까? 마음에 악의가 있는가 없는가. 내가 이 사람한테 멧따를 방출했단 말이라. ‘이 사람이 행복하기를’ ‘이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하면서 멧따를 방출했는데, 하고 나서 이 사람을 바라봤는데 이 사람을 보는 내 마음이 사랑의 마음으로,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 찼을 거 같으면 좋은데, 내가 멧따를 방출했는데 이 사람을 봐도 똑같다 아니면 ‘아이고, 인간아’ 하는 생각이 들거면 이건 악의에 차 있다는 건데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멧따를 방출 안 하고 악의를 방출한 그런 상태가 되는 거라. 아도사를 증진시키는 방법으로써 멧따나 칸띠(khanti, 인내)를 쓴다는 그런 뜻입니다.
근데 멧따의 가까운 적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애정입니다. 그래서 멧따를 방출할 때 멧따가 무르익기 전에는 절대 이성,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방출하지 말아라하는 게 뭐냐면 가장 가까운 적이 이 이기적인 애정입니다.
태국에서도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멧따바와나를 하라 하니까 뭣 모르고 합니다. 절에 와서 수행하다가 자기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기 부인이거든. 집에 있는 자기 부인에게 멧따를 보냅니다. 이게 자꾸 계발이 되니까 그 부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캐치가 되는 거라.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인데도 이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누구하고 만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이 훤하게 들어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부인이 좋은 짓만 하고 있으면 몰라도 나쁜 생각을 할 수도 있단 말이라. 그럼 마 성이 버럭버럭 나갖고 인제 당장 집에 가야되는 거라. 가가지고 “니가 이랬지” 하면 부인이 깜짝 놀래거든. 그래가지고는 다시 절에 와가지고 자기는 멧따 바와나를 한다고 똑같은 짓을 또 하는 거라.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내가 신통력이 생겼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지가 뭘 잘못한다고 생각은 안 하고 신통력이 생겼다고 막 자랑하고 다니고 아만심이 생기고.
그러다가 하루는 멧따를 보내다가, 태국의 꾸띠들은 방(천장)이 낮습니다. 멧따를 막 방출하면서 갑니다 자기 부인한테. 그러다가 거기에 머리를 팡 찧었는 거라. 팡 찧어가지고 피가 줄줄줄줄 흐르고 그때사 정신이 번쩍 들어가지고 아픈 감각을 느낍니다. ‘아, 이건 내가 멧따 바와나를 하면서 멧따를 하는 게 아니고 이기적인 애정에 푹 파묻혀 있었구나’ 여러분들도 그렇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피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뭐라 하느냐면 ‘가외시타 뻬마’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 멧따를 갖다가. 송아지에 대해서 어미소가 가지는 애정, 암소가 가지는 애정을 갖다가 얘기를 합니다. 혹시 소를 자세히 관찰한 사람들은 봤는지 몰라도 어떤 경우든 암소는 송아지를 품에서 떼지를 않습니다. 상당히 지근거리에 두든지 안 그러면 가랑이 사이에 송아지를 둡니다. 아무리 자기보다 큰 짐승이 오더라도 자기가 죽을지언정 송아지를 지켜냅니다. 어떤 면에서는 참 숭고한 사랑이고 또 희생적인 사랑이지만 멧따의 성향으로 봤을 때는 그것은 이기적인 애정이라고 그럽니다.
진짜 멧따를 잘 방출할 경우에는 경전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죽일려고 했을 때 내가 칼을 들어서 그 사람을 죽이질 않고 멧따를 방출하라. 설혹 상대방이 자기 화를 못이기고 자기를 죽이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 상태 이런 것은 멧따를 방출하는 것이 된다. 근데 이기적인 애정은 멧따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가외시타 뻬마’라고 얘길 합니다.
(우데나왕 이야기 예문 중략)
사무량심 브라흐마짜라 위하라라 해가지고, 사범주라고 하는 범천들이 머무는 네 가지 거주처가 있습니다. 자비희사 멧따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 이 네 가지를 사범주라 그럽니다. 이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āra) 사범주에 항상 머물렀다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마만큼 멧따가 아도사를 증진시키는데 참 많이 유용하다 하는 사실입니다.
멧따 게송이 있습니다.
삽베 삿따 아웨라 혼뚜 Sabbe sattā averā hontu
삽베 삿따 아바야빳자 혼뚜 Sabbe sattā abyāpajjhā hontu
삽베 삿따 아니가 혼뚜 Sabbe sattā anīghā hontu
삽베 삿다 수키앗따낭 빠리하란뚜 Sabbe sattā sukhī attānam pariharantu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를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신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좋은 상태가 되기를
모든 존재가 번영하여 그들 모두 오래도록 살아가면서 행복이 가득하기를
수행할 때, 수행하기 직전에 멧따 바와나 할 때 이 게송을 합니다. 이 게송은 여러분들이 항상 기억을 해놨다가, 멧따 바와나가 사마타 자나(samatha jhāna)를 증진시킬 때는 탁월한 효과들을 가져오는 그런 것들이니까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다나(dāna)를 하면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다 행복합니다. 멧따를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 멧따를 방출하는 나(자신)나 멧따를 받는 대상이나 다 행복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항상 가지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멧따와 인내가 있으면 마음의 평화가 항상 깃들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만큼 평화로운가, 그건 일반적인 평화로움이 아닙니다. 대상에 직면했을 때 평화로운가에 따라서 내가 아도사가 무르익었다 아니다 하는 것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조심해야 될 것은 뭐냐면 사람들은 친구가 없으면 보통 고독해 합니다. ‘멧따를 방출할 대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데 그건 참 잘못된 관념입니다. 궁극적인 실재에서는 친구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타난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있는 것은 찟따(citta)와 쩨따시까(cetasika)와 나마(nāma) 루빠(rūpa) 라고 하는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여 가지고 닙바나(nibbāna)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뭐라 합니까? 루빠와 찟따와 쩨따시까와 닙바나 이 네 가지를 다루는 것뿐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지금 고독하고 혼자다 하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십시오. 그럴 경우에는 내가 더욱더 인내하고 멧따를 계발시키면 틀림없이 주변에 친구들은 모이고 좋은 사람들은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그런 것들도,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대상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을 통해서 이런 아도사를 기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따뜨라맛잣땃따 - 중립성에 대해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