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회(saṁsāra) (20161202)
1. 윤회 사상은 범부들이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인가?
2. 윤회는 무기(無記)인가?
3. 우리는 왜 윤회하는가?
4.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5. 무엇이 윤회하는가?
6. 윤회에서의 죽음과 삶
7. 마음의 흐름
8. 존재(바와)의 법칙
6. 윤회에서의 죽음과 삶
밀란다왕문경에 등불의 비유는 업만으로도 윤회가 가능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업은 윤회의 원인이며, 윤회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업에 의한 윤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윤회라는 설정도 세속적인 삶에 집착하지 않고 12연기라는 인과의 바른 이치를 깨닫게 하는 데 근본 취지가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죽음 후 존재의 유무가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인간이 세속적 욕망을 극복하는데 있습니다. 즉, 윤회는 사후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인간이 축소된 윤회를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여 모든 조건이 끊어진 해탈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그럼 이제 죽음과 삶을 연기론적 관점에서 윤회를 말해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보통, 「죽음」에 대해 금기시하여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을 극력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자기 주변에서 죽음의 광경을 접하면 사람들의 마음에는 대부분 깊은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참 정력적으로 살아온 이 사람이,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맛난 것도 먹지 못하고 숨도 끊어져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구나! 왜 사는 건가! 전에는 기쁨이나 애정으로 눈이 빛났는데, 지금은 이렇게 눈을 닫고 모든 움직임을 잃어 버렸구나!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 있는가! 죽으면 모든 것을 완전히 빼앗아가 버리는데!!」이렇게 한탄하면서 잠시나마 죽음에 대해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실은 보통 사람들이 접촉하려고 하지 않는 「죽음」의 문제는 인생의 수수께끼인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푸는 열쇠인 것입니다.
만약 「죽음」을 이해할 수가 있으면, 사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넓은 시점에서 보면 「죽음」과 「삶」은 긴 윤회의 일부입니다. 만약 하나의 과정(죽음)을 이해할 수가 있으면, 다른 한편의 과정(삶)도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동시에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런 옛 구절이 있습니다.
“죽음이 방문하면, 왕궁도 왕관도 썩어 버린다.
너덜너덜 기운 초가집도 가래도 똑같이 썩어 버린다.
임금님의 죽음도 백성의 죽음도 아무 차이가 없구나.”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위대한 평등주의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죽음을 깊게 자각해 나가면, 삶에 대한 자세는 어떻게 변해가는 것일까요?
죽음을 의식하면 쾌락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중심성이 부수어져 나갑니다. 실수투성이의 가치관은 조화롭고 건전한 사고로 변화하고,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던 산만한 마음은 명확한 방향을 설정하여 침착성 있는 강한 정신으로 변해갑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죽음에 대해 관찰하는 수행(maraṇānussati bhāvanā)을 강력하게 권유하셨습니다. 청정도론에서 「죽음」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전통적인 수행 대상 중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수행은 알아차림(sati)과 두려움 혹은 긴박감(saṁvega), 그리고 이해력(ñāna)을 가지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수행을 실천하고 싶은 사람은 어느 일정한 시간을 정하지 않고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항상 「죽음이 언제든지 찾아온다.」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죽음을 깊게 고찰하는 것은, 「죽음에 대해 깊이 관찰하는 수행자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주의 깊고, 욕구에 빠져 즐거움을 얻으려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을 갈망할 것도 없고, 나쁜 행위를 피해 여러 가지 집착으로부터도 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때라도 무상을 지각할 수가 있어 존재의 본질인 허무함과 자신이나 영혼이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는 진리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죽음의 순간에는, 조금도 무서워할 것이 없어져, 평상심을 가지고 의식을 확실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 현세에서 열반에 이를 수 없다하여도, 신체가 무너진 후에는 행복한 차원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나날의 생활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는 것에의 공포나 무서움을 제거해 줍니다. 더구나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는 믿음이 강하게 일어나 침착하게 그 상황에 직면할 수가 있습니다. 죽을 것을 생각하여 낙담하거나 정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언제 죽음이 와도 좋은 것 같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부처님은 증지부 경전에서 「수행자여, 여기에서 지금 마라나-눗사띠 바-와나-를 성장시켜 한층 더 성숙시키면 궁극적인 열반에 이르기 위한 큰 결과와 큰 공덕을 얻을 수 있느니라. 죽음이나 늙음이나 질병과 같은 보편적인 괴로움을 관찰하는 것은 수행을 통해 최종적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긴 도정에 있어서 명확하고 알기 쉬운 출발점을 만들어 주느니라.」
연로한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을 목격하고 우아한 궁전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싯닷타 왕자는 아내와 아이, 집과 나라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포기하고 「생로병사」를 해결하는 길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존재의 괴로움을 모두 극복하고 위없이 행복한 열반에 이르러 붓다로서 영광에 빛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합니다. 죽음이란 화제가 나오면 얼굴 돌려 쫓아버리고 싶어지는 혐오감이 생깁니다. 그것은 무지(avijjā)에 의지한 인간의 번뇌, 공포, 갈애, 자기애착 등이 원인입니다. 이 「죽음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는 마음은,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받는 것을 싫어하는 환자의 심경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불교적으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음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바보의 낙원에서 사는 것이다. 게을리 하는 일 없이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는 자가 현자다.」라고 부처님이 밝히셨습니다.
지금까지 「죽음을 숙고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라는 것을 살폈습니다.
더 죽음의 고찰을 계속해보면,
우선 「생명은 왜 죽는지, 죽음의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것을 생리학자에게 물어보면, 「신체의 기능이 정지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왜 신체의 기능이 정지하는가?」라고 물어 보면, 「심장의 고동이 정지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병은 만약 그 진행을 저지하지 않으면 신체의 장기나 각각의 부분을 악화시키고 조금씩 변형시켜 이윽고 파괴합니다. 그래서 신체 중에 혈액을 순환시키고 있는 심장에 과도한 부담을 주어 버립니다. 이와 같은 결론으로 심장이 정지하는 것은 병이 원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병이 드는가?」라고 물어 보면, 「신체의 기능에 이상이 일어나거나 불규칙한 생활을 하거나 또 사고를 당하거나 하는 탓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것들이 원인으로 신체의 일부나 건강을 해쳐 병이 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신체에 병원균이 들어가거나 생활이 불규칙하게 되거나 사고를 당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거기까지는 모릅니다.」라고 말합니다. 생리학자는 이 단계에 있어 우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문제가 생리학의 영역을 넘어버려 인간 도덕적 행위의 영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2명의 사람이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한사람은 저항력이 강한데 죽어버리고, 다른 한명은 저항력이 약한데 살아났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또, 3명이 미끄러지기 쉬운 복도를 걷고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쳐 죽었습니다. 또 한사람은 미끄러져 작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다른 한명은 미끄러지지도 않았습니다. 3명 모두 같은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신체만을 연구하고 있는 생리학자나, 인간의 심리만을 연구하고 있는 심리학자로부터는 만족스런 대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생리학이나 심리학의 범위를 넘어 탐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차이를 납득이 가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이 불교에 있어서의 「업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연기의 법칙” 이나, “행위와 결과의 법칙” 이라고도 불립니다.
「생명은 업을 소유하고, 업을 모태로 태어나, 업에 단단하게 묶이고, 업에 의존해, 선악의 업을 만들어, 그것을 상속한다.」-증지부 경전
업의 법칙이란 「행위에는 반드시 거기에 상당하는 결과가 있다.」라는 질서로, 어떤 지배자나 신이 이 법칙을 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에 의해 성립되는 것입니다. 사과 열매가 나무로부터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신이나 외부의 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인력이나 열매의 중력이 원인입니다. 자연계에도 이렇게 일정한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행위에도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 또는 행위와 결과의 법칙이 필연적으로 있습니다. 이 법칙은 외부의 독단적인 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행위가 있는 결과를 낳는다」라고 하는 보편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이것도 근거 없는 외부의 힘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성장하여 이윽고 시드는 것과 같이 어떤 법칙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연히’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현상은 그 이전에 스스로가 이룬 행위나 조건의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을 모를 때에 ‘우연’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인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죽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외부의 존재가 개개의 업을 형성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스스로의 행위와 결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뿌린 씨앗은 스스로 거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업는 ‘과거’라고 하는 밀폐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은 아니고, 짓는 행위 따라 지금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인과 법칙에 의해 성립되어 순간순간 업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모든 것이 과거의 행위의 결과만은 아닙니다. 지금의 순간도 또 미래의 원인과 조건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좋은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지금이라는 때를 현명하게 사용하셔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피하려는 분노나 어리석은 마음들이 우리 미래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관찰하는 것은 법에 따르는 것을 도와줍니다. 법을 지켜는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또 죽음이 닥치더라도 안정하고 그 현상에 직면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의심하는 일 없이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힘쓰게 됩니다.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확실히 법으로 지켜질 수 있습니다.
업의 법칙에서 죽음을 보았으니 이제는 상카-라의 법칙에서 죽음을 살펴보겠습니다.
Saṅ이라는 말은 「서로, 동시에, 정리하며」, khā란 말은 「구성한다, 조립한다.」라는 의미로, 이 2개의 말을 맞추면 「동시에 짜 합쳐져 형성되었다」나 「서로 모여 구성되었다」라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여러 가지가 모여져서 성립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큰 것도, 작은 것도, 거대한 산도, 작은 종도, 태양도, 달도, 모래의 입자도, 모든 것은 많은 다른 요소가 결합되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하거나, 늘 불변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대상’이 원인입니다. 본다, 듣는다, 냄새맡는다, 맛본다, 접촉한다, 생각하는 것, 이 감각이 「모든 것에는 실체가 있다」라고 하는 잘못한 견해를 낳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과학자들도 이 ‘감각대상’이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것은 단순한 개념이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건 지어진 현상, 즉 상카-라에 대한 나가세나 존자의 말이 있습니다. 「변속기, 타이어, 엔진 등의 부품이 모여 ‘차’라는 이름이 일어납니다. 차는 부분의 집합에 붙여진 명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뿔뿔이 흩어지게 해체하거나 분석하는 것으로 「차는 몇 개의 부분이 모여 형성된 것이고,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밀란다왕문경에서 존자는 대왕에게 납득시켰던 것입니다.
똑같이 「사람」이나 「 나」라고 하는 것도 실제로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단순한 이름이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다만 계속하여 변화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상카-라는 물질(rūpa)만이 아니고, 마음(nāma)에도 해당됩니다. 마음도 이 몸과 같이 형성된 것입니다.
7. 마음의 흐름
지금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에 슬픔이 일어나고, 또 다음 순간에 의무감과 같은 것이, 그리고 다음 순간에 미움‥‥‥ 등과 같이, 끊임없이 다른 마음이 빈틈없이 잇달아 연결되어 일어나고 사라져 갑니다. 이러한 「연속적인 흐름」을 총칭해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도 일어나고, 머물고, 소멸한다고 하는 3단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어에서는 uppāda(웁빠-다), thiti(티띠), bhaṅga(방가)라고 합니다.
지금의 마음이 일어나 소멸하자마자, 다음의 순간에 다른 마음이 일어나 소멸합니다. 이렇게 어지러울 정도로 끊어지는 일 없이 생멸하는 연속성을 보면서 우리는 마치 「마음」이라고 불리는 실체가 존재할 것 같은 착각을 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연속적인 흐름이 있는 것뿐이지, 고정된 영속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급속한 마음의 연쇄작용은 자주 강의 흐름에 비유됩니다. 시시각각 흐르고 있는 강물은 마치 「강」이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날 아침에도 강을 건너고, 그 날 저녁에도 다시 같은 강을 건넜다고 합시다. 저녁에 건넌 강은 아침에 건넌 강과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혹은 「아침의 강」과「저녁의 강」이라고 하는 2개의 강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만약 낮에도 그 강을 건넜다고 하면 「낮의 강」이라고 하는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순간 마다 강물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럼, 「강」이라고 하는 실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강가나 강바닥에 있습니까? 결국, 「이것이 강이다」라고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는 실체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강」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물의 흐름에 붙여진 단순한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도 강의 흐름과 같이, 일순간이라도 멈추는 일 없이 계속 변화하는 흐름을 말합니다. 곧바로 지나가 버리는 흐름의 어느 순간을 취해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영원한 마음이다」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분노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이 분노는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까? 잠시 후에 ‘자애의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이 자애의 마음도 영원한 것이라면, 서로 대립하는 2개의 마음이 동시에 실재한다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탐구해 나가면 「마음」이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고 하는 결론이 스스로에게 생깁니다. 이와 같이 마음도 맹렬한 속도로 잇달아 생멸하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흐름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차도, 강도, 신체도, 마음도,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성립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힘으로 독립해 존재하는 것, 영원한 것, 변화하지 않는 것, 영혼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신체」란 계속 변화하는 여러 요소의 집합에 붙여진 이름이며, 똑같이 「마음」도 그 생멸 변화의 연속성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신체의 집합체인 「인간」이라고 하는 것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이름만의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차가 움직인다」든지 「사람이 걷는다」라고 하는 경우도 다만 적당한 말을 이용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움직인다」든지 「걷는다」라고 하는 행위만이 있습니다.
그럼 조금 더 마음의 흐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인식과정(vīthi citta : 위-티 찟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각각의 인식과정에 따라서 마음에는 여러 개의 찰라적인 마음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연속들이 일어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의식의 단계에서는,
1. 다섯 감각의 문을 향해 주의기울임[五門轉向, pañncadvāra-āvajjana 빤짜드와- 라 아-왓자나]
2. 다섯 갈래의 의식[五識, pañca-vaññāṇa 빤짜 완냐-나]
3. 받아들임[領收, sampaṭicchana 삼빠띳차나]
4. 조사[推度, santīraṇa 산띠-라나]
5. 결정(決定, voṭṭhapana 옷타빠나)
6. 순간적인 생각의 속행[速行, javana 자와나]
7. 경험의 등록[彼所緣, tadārammaṇa 따다-람마나]
(안·이·비·설·신) 다섯 감각의 문 중 어느 쪽으로 대상의 이미지가 나타나면 잠재의식인 바왕가(有分)가 깨어나서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맛고 느끼는 의식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다섯 감각 문을 향해 주의 기울이는 의식을 자극하여 마음이 대상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여 다섯 감각 문에 나타난 대상의 이미지는 각각의 다섯 갈래 의식에 의해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즉시 받아들이는 의식에 의해 이미지를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인 다음에 조사하는 의식이 넘겨받아 조사한 다음, 결정의식이 무엇인지 결정합니다. 결정의식이 판정을 내리자마자 다음에 전개되는 자와나가 찰라간에 이어지면서 좋아하고 싫어함이 생겨납니다. 그 다음 찰라간에 경험을 등록하는 의식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대상에 따라 마음이 연속하는 인식과정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확립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면밀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리면 감각대상의 궁극적 실체가 드러납니다. 즉 다섯 갈래의 의식에 비친 대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즉 보는 주체와 보여진 대상이라는 마음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궁극적 실재를 체험할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8. 존재(바와)의 법칙
「영원하고 불멸한 것은 없다. 항상 변화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무상의 법칙이며, 「끊임없이 다른 무엇으로 되어 간다.」라고 하는 것이 존재(bhava)의 법칙입니다. 변화하는 것에는 무상의 성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다음의 것이 되어 가는 과정, 즉 생성의 과정(그 과정이 길든 짧든) 또한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되어가는 것 이외는 그 무엇도 없다.’ 라는 것을 존재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계속 끝없이 생성되는 것은 모든 존재의 특성입니다. 식물의 싹은 큰 나무가 되고, 어떠한 일도 시작된 순간에 다음 상태가 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바다에서 물결이 흔들리는 모습을 관찰해 봅시다. 한 물결은 다음의 물결로 용해되어 갑니다. 한 물결이 다음의 물결이 되어 갑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도 다음 상태로 계속 생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싹이 터서 꽃으로 성장할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관찰할 수 있다면, 지금 순간의 싹과 다음 순간의 싹, 또 그 다음 순간의 싹 상태에 무슨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눈앞에서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과정은 어느 상태로부터 다음 상태로 매우 완만하게 변해갑니다. 이것을 「바와(有, 존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에 1번씩만 싹을 관찰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변화」라든지 「생성되어 간다.」라고 하지 않고, 「싹」이든지 「꽃」이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10년간 쉬지 않고 아기를 계속 본다면, 그 아기의 어떤 변화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오전 10시에 태어난 아기는 11시, 12시에도 똑같이 보여 버립니다. 어느 순간에도 차이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상태로부터 다음 상태로 조금씩 변합니다. 계속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 이것을 「바와」라고 합니다.
그런데 1개월에 1번씩만 아기를 본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변화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변화」나 「생성되어 간다.」라고 하지 않고, 「아기」라든지 「사내 아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시간의 경과에 대해 관찰해 봅시다. 학자는 시간을 현재시제·과거 시제·미래 시제로 구분하고 있지만, 그처럼 실제의 시간을 현재·과거·미래로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 철학에 의하면 「시간은 일련의 과정이며, 한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사라져 간다. 그처럼 해서 연속성이 성립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부터 현재, 미래부터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에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재다」라고 말해도 그것은 곧바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 말을 모두 다 끝내기 전에 벌써 과거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은 계속 생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법칙이며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능의 연속성」을 잘못 이해할 때에 모든 것을 「변화」나 「생성되어 간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파악해 버립니다.
생물학자에 의하면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는 7년마다 바뀐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순간순간 바뀐다고 보고 있습니다. 같은 상태의 신체는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체란 몇 종류의 원소가 순간 마다 태어나서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체내에서는 끊임없이 죽음과 재생이 반복해지고 있습니다. 즉 살아 있는 동안 순간순간 「죽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의미로 생명의 수명은 지극히 짧다. 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 밖에 존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확히 차바퀴와 같은 것이다. 차바퀴가 회전할 때 한 점만이 지면과 접촉한다. 그것과 같이 생명의 수명도 그저 찰나의 순간 밖에 존속하지 않는다. 찰나가 소멸했을 때 생명은 소멸했다고 말해지는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존재의 어느 순간을 봐도 죽음과 재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어느 특정한 죽음(현재 생의 마지막 죽음)만을 무서워하는가? 무수한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데 어째서 한 순간의 사건 만을 걱정하는 것인가?
그것은 「순간마다의 죽음」을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임종 시의 죽음만을 무서워합니다. 실제 임종 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차례차례로 일어나고 있는 죽음의 그저 한 토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성되는 과정은 현재의 생존만큼 머물지 않습니다. 의식의 연속성이 있는 한, 다음의 생존에서도 무언가로 생성되어 계속해 갑니다. 죽는 순간의 식(cuti citta)으로부터 새로운 생존의 결생식(paṭisandhi viññāna)이 태어납니다. 어느 하나의 식이 다음의 식을 낳는 생성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갑니다. 다만 각각의 식이 나타나는 장소가 변화합니다. 이때 인과의 연속성이 거리에 의해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사는 것」이란 취하는 것(집착, 우빠-다-나)과 생성되는 것(有, 존재, 바와)의 과정이며, 「죽는 것」이란 취한 것이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집착은 살아있는 사람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집착이 토대가 되어 「有」가 생깁니다.
그럼 집착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갈증이 있는 곳에 집착이 있습니다. 갈애(tanhā)-욕망, 소망, 생존욕구, 충동-에 의해 집착이 일어납니다. 갈애가 가져오는 업의 에너지는 화재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 불타 잇달아 무엇인가를 추구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갈애 그 자체를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즉 갈애는 그것 자신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한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요구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체가 죽는 순간에는 예기치 못한 갈애의 에너지, 업의 잔상이 새로운 연료를 파악해 새로운 물체를 획득합니다. 이렇게 해 「집착」과 「유」의 끝없는 흐름이 회전해 나갑니다. 이것이 「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극도로 무서워하고 있는 죽음(현재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은 단순한 다음의 생존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의 신체는 몹시 쇠약합니다. 의지의 힘도 약해져 죽는 순간에는 사고를 선택하는 힘은 이미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승에서의 행위나 과거의 생에서의 행위 중에서 강렬하게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중대한 사건의 기억이 죽어가는 사람의 의식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납니다. 떠올라 오는 그 사고에 저항하는 힘은 이제 없습니다.
이 사고를 죽음직전의 촉진력(maraṇāsaññā javana)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소멸한 뒤에 현재 유(바와)의 마지막인 죽음의식(cuti-citta)이 생깁니다. 죽음직전의 촉진력에는 3종류가 있어 그 중 하나가 나타납니다.
우선 첫 번째는 스스로 쌓아 온 여러 가지 업 가운데, 특히 인상이 강한 「 행위」에 대한 사고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업(kamma)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과거의 행위 가운데 강렬하고 인상적인 행위를 했을 때의 「상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금고에서 돈을 훔쳤던 적이 있는 경우 그 금고가 나타나거나 합니다. 이것을 업의 표상(kamma nimitta)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스스로의 과거 행위의 결과로서 지금부터 다시 태어나는 장소를 나타내는 「조짐」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자비심 깊은 일을 실천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올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태어날 곳의 표상(gati nimitta, 정취상)이라고 하여 다음에 전생하는 장소를 나타내는 징조를 말합니다.
죽음의 전조로서 알려진 이러한 사고 대상은 자기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 3종류 중 어느 쪽으로 한 가지가 지극히 강력하고 선명하게 임종순간에 있는 사람의 의식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죽음의식이 생깁니다. 죽기 직전의 사고는 그것이 다음 세상의 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막 잠들기 직전의 사고가 눈을 떴을 때의 최초의 사고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외부적인 힘에 의해 사고의 대상이 결정될 수는 없습니다. 신의 뜻은 없습니다.
이 죽음직전의 마음은 다음 세상의 생을 결정한다고 하는 의미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선이든 악이든 지극히 무거운 행위를 했을 경우,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마음이 됩니다. 이것을 무거운 업(garuka kamma)이라고 합니다.
또 일상적으로 반복해서 행해진 행위가 마지막 마음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몇 번이나 생각나던 사고가 임종 시에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업을 습관적인 업(āciṇṇa kamma, bahula kamma)이라고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스님에게 가사를 보시하거나, 곁에서 경전을 독송하는 것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 죽는 동안에 행해지는 업을 죽음직전의 업, 가까운 업(āsanna kamma)라고 합니다.
그러나 덕 높은 스님이 경을 독송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는 사람의 마음에 지금까지의 버릇으로 나쁜 생각이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반복되어진 악행의 기억이 의식에 밀어닥쳐 옵니다. 그 경우에 그것이 죽음직전(임종)의 마음이 됩니다. 또 이것과 반대로도 일어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좋은 행위를 쌓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임종의 순간에 나쁜 생각이 떠올라 버리는 경우입니다. 이 때 습관이 되어 있던 좋은 업이 의식에 나타나고 있는 나쁜 업을 저지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꼬살라국 빠세나디왕의 부인 말리까 왕비에게 일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리까 왕비는 살아가는 동안 줄곧 좋은 행위를 행하였지만 죽음의 순간에 살아오면서 행한 딱 한 번의 악행에 대한 후회의 생각이 마음에 나타나 버렸습니다. 그 결과 지옥으로 다시 태어나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7일간으로 끝났습니다. 좋은 업의 영향에 의해 지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번째 종류의 업은 앞에 말한 3가지 종류의 업이 없을 때에 나타납니다. 무한한 과거생 동안 쌓여 온 업 중의 어느 하나가 임종시에 나타납니다. 이것을 쌓아둔 업(kaṭattā kamma)이라고 합니다.
그 나타난 사고 대상을 연고로 하여 법칙대로 다른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을 죽음직전 인식의 속행과정(maraṇāsaññā javana vīthi)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인식 또는 의식 작용을 맡는 속행심은 많은 경우 7회 연속해 생기지만, 임종 시에는 5회 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여기서 죽는 사람은 죽음의 징조를 완전하게 이해합니다. 이 직후에 속행심이 취한 대상을 연속해서 다시 취하여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이 나타나 죽음의 징조가 확인됩니다. 이것이 2찰나 생겨났다가 소멸합니다. 그 다음에 사심이 생기고 그리고 죽습니다. 이것이 이승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다음 세상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벌써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조건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모가 되는 남성과 여성이 있고, 태아가 발생하는 조건으로서 마음(식)의 요소는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이 결생식이 얻을 수 있어야 할 처지(예를 들어 모친의 태내)에 나타납니다. 이것들 3개의 요소가 결합하자마자, 모태에서 「생」이 시작됩니다. 결생식이 생길 때 시간의 격차는 없고, 또 의식의 흐름이 끊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즉 사심이 소멸한 직후에게만 다른 장소에서 결생식이 생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생으로부터 다음 세상의 생으로 유전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심마저도 유전하지 않습니다. 직전의 마음이 다음의 마음을 발생시키기 위한 영향을 주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탄생의 순간에는 모태로부터 분리해 개별의 존재가 되어 외계와 접촉합니다. 외계와 접촉하는 것에 의해 유분심(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흐름으로부터, 로심(표면적 의식)의 흐름으로 대신합니다. 이것보다 앞은 잇달아 갈애에 대해서 작동되어 다시 행동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해서 갈애에 내몰리어 인생이 회전해 나갑니다.
그런데 윤회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으로 죽음을 대하는 접근법이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존재하고 싶다고 하는 갈애에 휘몰려 생으로부터 생으로 윤회하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납득할 수가 있다면, 현재의 생도, 다음 세상의 생도, 그 후에 계속되는 생도, 단순한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과 비교하여 죽는 것을 슬퍼할 이유는 없습니다. 생과 죽음은 같은 과정의 요소입니다. 「생」은 집착, 또는 존재욕구의 흐름이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한 것에 있어서의 단순한 변화입니다.
윤회의 법칙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 윤회 세계 가운데에서는 생에 의해 죽음이, 죽음에 의해 생이 일으켜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 불안감으로 부들부들 떨 일이 없습니다. 생은 죽음이며, 죽음은 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윤회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살 수가 있으면 죽는 것은 지금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재생하기 위한 큰 조건이 됩니다. 이와 같이 죽음의 견해가 바뀌어 집니다.
올바르게 죽음을 보는 사람에게는 이미 불안이나 공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것은 견해로 정해집니다. 예를 들어 집에 현관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현관은 입구입니까? 출구입니까? 도로 쪽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입구이며, 집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출구가 됩니다. 다만 다른 각도로부터 보았을 뿐인 것입니다.
실제 생·사란 끊임없는 욕망의 2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인가 생인가 그것은 견해에 의하지만, 우리는 그 어느 한쪽의 면 밖에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을 보는 사람에게는 생이 보이지 않고, 생을 보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생과 죽음을 서로 서로 관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대등하게 보지 않습니다.
「죽음에 의해 생이 있고, 생에 의해 죽음이 있다」라고, 생·죽음의 2가지가 밀접하게 연속하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한편(죽음) 없이 한편(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바라고 있습니다. 즉, 살아 아프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고.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생에 집착 하는 것은 결국 죽음에도 집착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의 특징은 집착(취)이며, 그 필연적 결과가 윤회의 법칙에 근거해 죽는 것입니다.
만약 죽음으로부터 피하고 싶다면, 사는 것으로부터도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윤회의 과정을 완전하게 바꾸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매달려 취하려고 하는 갈애를 끊는 것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는데 있어서의 다양한 일에 집착 하면 일시적인 만족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애착한 것은 반드시 없어져 사라져 갑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진리인 윤회의 법칙과 함께 무상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기쁨의 대상은 슬픔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 세상에 있어서의 기쁨은 괴로움을 위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애착으로부터 생기는 기쁨은 이별이라고 하는 슬픔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것은 괴로운 일이 아닙니까? 마음을 뛰게 한 환락의 다음날에는 혐오를 안아 그것을 버립니다. 또는 낙담으로 가라앉습니다. 진절머리 나지 않습니까?
마음이 마치 풋볼과 같이 여기저기에 휙 던져지는 것을 어디까지 방치할 겁니까? 집착으로부터 멀어져, 보다 충만하고 침착하게, 안전하게, 지혜를 가지고 살 수는 없나요?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병으로도 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견해는 확실히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의 법칙과 윤회의 법칙이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법칙을 이해하는 것으로 공포나 슬픔은 희망이나 기쁨으로 바뀌어 갑니다. 냉정하게 인생을 응시하고 온화하게 평안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는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고, 편하게,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 윤회(saṁsāra) (20161202)
1. 윤회 사상은 범부들이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인가?
2. 윤회는 무기(無記)인가?
3. 우리는 왜 윤회하는가?
4.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5. 무엇이 윤회하는가?
6. 윤회에서의 죽음과 삶
7. 마음의 흐름
8. 존재(바와)의 법칙
6. 윤회에서의 죽음과 삶
밀란다왕문경에 등불의 비유는 업만으로도 윤회가 가능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업은 윤회의 원인이며, 윤회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업에 의한 윤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윤회라는 설정도 세속적인 삶에 집착하지 않고 12연기라는 인과의 바른 이치를 깨닫게 하는 데 근본 취지가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죽음 후 존재의 유무가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인간이 세속적 욕망을 극복하는데 있습니다. 즉, 윤회는 사후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인간이 축소된 윤회를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여 모든 조건이 끊어진 해탈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그럼 이제 죽음과 삶을 연기론적 관점에서 윤회를 말해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보통, 「죽음」에 대해 금기시하여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을 극력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자기 주변에서 죽음의 광경을 접하면 사람들의 마음에는 대부분 깊은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참 정력적으로 살아온 이 사람이,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맛난 것도 먹지 못하고 숨도 끊어져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구나! 왜 사는 건가! 전에는 기쁨이나 애정으로 눈이 빛났는데, 지금은 이렇게 눈을 닫고 모든 움직임을 잃어 버렸구나!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 있는가! 죽으면 모든 것을 완전히 빼앗아가 버리는데!!」이렇게 한탄하면서 잠시나마 죽음에 대해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실은 보통 사람들이 접촉하려고 하지 않는 「죽음」의 문제는 인생의 수수께끼인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푸는 열쇠인 것입니다.
만약 「죽음」을 이해할 수가 있으면, 사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넓은 시점에서 보면 「죽음」과 「삶」은 긴 윤회의 일부입니다. 만약 하나의 과정(죽음)을 이해할 수가 있으면, 다른 한편의 과정(삶)도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동시에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런 옛 구절이 있습니다.
“죽음이 방문하면, 왕궁도 왕관도 썩어 버린다.
너덜너덜 기운 초가집도 가래도 똑같이 썩어 버린다.
임금님의 죽음도 백성의 죽음도 아무 차이가 없구나.”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위대한 평등주의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죽음을 깊게 자각해 나가면, 삶에 대한 자세는 어떻게 변해가는 것일까요?
죽음을 의식하면 쾌락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중심성이 부수어져 나갑니다. 실수투성이의 가치관은 조화롭고 건전한 사고로 변화하고,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던 산만한 마음은 명확한 방향을 설정하여 침착성 있는 강한 정신으로 변해갑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죽음에 대해 관찰하는 수행(maraṇānussati bhāvanā)을 강력하게 권유하셨습니다. 청정도론에서 「죽음」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전통적인 수행 대상 중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수행은 알아차림(sati)과 두려움 혹은 긴박감(saṁvega), 그리고 이해력(ñāna)을 가지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수행을 실천하고 싶은 사람은 어느 일정한 시간을 정하지 않고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항상 「죽음이 언제든지 찾아온다.」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죽음을 깊게 고찰하는 것은, 「죽음에 대해 깊이 관찰하는 수행자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주의 깊고, 욕구에 빠져 즐거움을 얻으려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을 갈망할 것도 없고, 나쁜 행위를 피해 여러 가지 집착으로부터도 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때라도 무상을 지각할 수가 있어 존재의 본질인 허무함과 자신이나 영혼이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는 진리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죽음의 순간에는, 조금도 무서워할 것이 없어져, 평상심을 가지고 의식을 확실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 현세에서 열반에 이를 수 없다하여도, 신체가 무너진 후에는 행복한 차원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나날의 생활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는 것에의 공포나 무서움을 제거해 줍니다. 더구나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는 믿음이 강하게 일어나 침착하게 그 상황에 직면할 수가 있습니다. 죽을 것을 생각하여 낙담하거나 정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언제 죽음이 와도 좋은 것 같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부처님은 증지부 경전에서 「수행자여, 여기에서 지금 마라나-눗사띠 바-와나-를 성장시켜 한층 더 성숙시키면 궁극적인 열반에 이르기 위한 큰 결과와 큰 공덕을 얻을 수 있느니라. 죽음이나 늙음이나 질병과 같은 보편적인 괴로움을 관찰하는 것은 수행을 통해 최종적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긴 도정에 있어서 명확하고 알기 쉬운 출발점을 만들어 주느니라.」
연로한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을 목격하고 우아한 궁전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싯닷타 왕자는 아내와 아이, 집과 나라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포기하고 「생로병사」를 해결하는 길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존재의 괴로움을 모두 극복하고 위없이 행복한 열반에 이르러 붓다로서 영광에 빛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합니다. 죽음이란 화제가 나오면 얼굴 돌려 쫓아버리고 싶어지는 혐오감이 생깁니다. 그것은 무지(avijjā)에 의지한 인간의 번뇌, 공포, 갈애, 자기애착 등이 원인입니다. 이 「죽음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는 마음은,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받는 것을 싫어하는 환자의 심경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불교적으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음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바보의 낙원에서 사는 것이다. 게을리 하는 일 없이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는 자가 현자다.」라고 부처님이 밝히셨습니다.
지금까지 「죽음을 숙고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라는 것을 살폈습니다.
더 죽음의 고찰을 계속해보면,
우선 「생명은 왜 죽는지, 죽음의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것을 생리학자에게 물어보면, 「신체의 기능이 정지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왜 신체의 기능이 정지하는가?」라고 물어 보면, 「심장의 고동이 정지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병은 만약 그 진행을 저지하지 않으면 신체의 장기나 각각의 부분을 악화시키고 조금씩 변형시켜 이윽고 파괴합니다. 그래서 신체 중에 혈액을 순환시키고 있는 심장에 과도한 부담을 주어 버립니다. 이와 같은 결론으로 심장이 정지하는 것은 병이 원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병이 드는가?」라고 물어 보면, 「신체의 기능에 이상이 일어나거나 불규칙한 생활을 하거나 또 사고를 당하거나 하는 탓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것들이 원인으로 신체의 일부나 건강을 해쳐 병이 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신체에 병원균이 들어가거나 생활이 불규칙하게 되거나 사고를 당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거기까지는 모릅니다.」라고 말합니다. 생리학자는 이 단계에 있어 우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문제가 생리학의 영역을 넘어버려 인간 도덕적 행위의 영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2명의 사람이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한사람은 저항력이 강한데 죽어버리고, 다른 한명은 저항력이 약한데 살아났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또, 3명이 미끄러지기 쉬운 복도를 걷고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쳐 죽었습니다. 또 한사람은 미끄러져 작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다른 한명은 미끄러지지도 않았습니다. 3명 모두 같은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신체만을 연구하고 있는 생리학자나, 인간의 심리만을 연구하고 있는 심리학자로부터는 만족스런 대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생리학이나 심리학의 범위를 넘어 탐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차이를 납득이 가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이 불교에 있어서의 「업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연기의 법칙” 이나, “행위와 결과의 법칙” 이라고도 불립니다.
「생명은 업을 소유하고, 업을 모태로 태어나, 업에 단단하게 묶이고, 업에 의존해, 선악의 업을 만들어, 그것을 상속한다.」-증지부 경전
업의 법칙이란 「행위에는 반드시 거기에 상당하는 결과가 있다.」라는 질서로, 어떤 지배자나 신이 이 법칙을 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에 의해 성립되는 것입니다. 사과 열매가 나무로부터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신이나 외부의 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인력이나 열매의 중력이 원인입니다. 자연계에도 이렇게 일정한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행위에도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 또는 행위와 결과의 법칙이 필연적으로 있습니다. 이 법칙은 외부의 독단적인 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행위가 있는 결과를 낳는다」라고 하는 보편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이것도 근거 없는 외부의 힘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성장하여 이윽고 시드는 것과 같이 어떤 법칙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연히’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현상은 그 이전에 스스로가 이룬 행위나 조건의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을 모를 때에 ‘우연’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인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죽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외부의 존재가 개개의 업을 형성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스스로의 행위와 결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뿌린 씨앗은 스스로 거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업는 ‘과거’라고 하는 밀폐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은 아니고, 짓는 행위 따라 지금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인과 법칙에 의해 성립되어 순간순간 업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모든 것이 과거의 행위의 결과만은 아닙니다. 지금의 순간도 또 미래의 원인과 조건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좋은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지금이라는 때를 현명하게 사용하셔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피하려는 분노나 어리석은 마음들이 우리 미래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관찰하는 것은 법에 따르는 것을 도와줍니다. 법을 지켜는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또 죽음이 닥치더라도 안정하고 그 현상에 직면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의심하는 일 없이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힘쓰게 됩니다.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확실히 법으로 지켜질 수 있습니다.
업의 법칙에서 죽음을 보았으니 이제는 상카-라의 법칙에서 죽음을 살펴보겠습니다.
Saṅ이라는 말은 「서로, 동시에, 정리하며」, khā란 말은 「구성한다, 조립한다.」라는 의미로, 이 2개의 말을 맞추면 「동시에 짜 합쳐져 형성되었다」나 「서로 모여 구성되었다」라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여러 가지가 모여져서 성립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큰 것도, 작은 것도, 거대한 산도, 작은 종도, 태양도, 달도, 모래의 입자도, 모든 것은 많은 다른 요소가 결합되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하거나, 늘 불변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대상’이 원인입니다. 본다, 듣는다, 냄새맡는다, 맛본다, 접촉한다, 생각하는 것, 이 감각이 「모든 것에는 실체가 있다」라고 하는 잘못한 견해를 낳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과학자들도 이 ‘감각대상’이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것은 단순한 개념이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건 지어진 현상, 즉 상카-라에 대한 나가세나 존자의 말이 있습니다. 「변속기, 타이어, 엔진 등의 부품이 모여 ‘차’라는 이름이 일어납니다. 차는 부분의 집합에 붙여진 명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뿔뿔이 흩어지게 해체하거나 분석하는 것으로 「차는 몇 개의 부분이 모여 형성된 것이고,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밀란다왕문경에서 존자는 대왕에게 납득시켰던 것입니다.
똑같이 「사람」이나 「 나」라고 하는 것도 실제로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단순한 이름이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다만 계속하여 변화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상카-라는 물질(rūpa)만이 아니고, 마음(nāma)에도 해당됩니다. 마음도 이 몸과 같이 형성된 것입니다.
7. 마음의 흐름
지금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에 슬픔이 일어나고, 또 다음 순간에 의무감과 같은 것이, 그리고 다음 순간에 미움‥‥‥ 등과 같이, 끊임없이 다른 마음이 빈틈없이 잇달아 연결되어 일어나고 사라져 갑니다. 이러한 「연속적인 흐름」을 총칭해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도 일어나고, 머물고, 소멸한다고 하는 3단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어에서는 uppāda(웁빠-다), thiti(티띠), bhaṅga(방가)라고 합니다.
지금의 마음이 일어나 소멸하자마자, 다음의 순간에 다른 마음이 일어나 소멸합니다. 이렇게 어지러울 정도로 끊어지는 일 없이 생멸하는 연속성을 보면서 우리는 마치 「마음」이라고 불리는 실체가 존재할 것 같은 착각을 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연속적인 흐름이 있는 것뿐이지, 고정된 영속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급속한 마음의 연쇄작용은 자주 강의 흐름에 비유됩니다. 시시각각 흐르고 있는 강물은 마치 「강」이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날 아침에도 강을 건너고, 그 날 저녁에도 다시 같은 강을 건넜다고 합시다. 저녁에 건넌 강은 아침에 건넌 강과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혹은 「아침의 강」과「저녁의 강」이라고 하는 2개의 강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만약 낮에도 그 강을 건넜다고 하면 「낮의 강」이라고 하는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순간 마다 강물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럼, 「강」이라고 하는 실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강가나 강바닥에 있습니까? 결국, 「이것이 강이다」라고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는 실체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강」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물의 흐름에 붙여진 단순한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도 강의 흐름과 같이, 일순간이라도 멈추는 일 없이 계속 변화하는 흐름을 말합니다. 곧바로 지나가 버리는 흐름의 어느 순간을 취해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영원한 마음이다」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분노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이 분노는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까? 잠시 후에 ‘자애의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이 자애의 마음도 영원한 것이라면, 서로 대립하는 2개의 마음이 동시에 실재한다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탐구해 나가면 「마음」이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고 하는 결론이 스스로에게 생깁니다. 이와 같이 마음도 맹렬한 속도로 잇달아 생멸하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흐름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차도, 강도, 신체도, 마음도,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성립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힘으로 독립해 존재하는 것, 영원한 것, 변화하지 않는 것, 영혼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신체」란 계속 변화하는 여러 요소의 집합에 붙여진 이름이며, 똑같이 「마음」도 그 생멸 변화의 연속성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신체의 집합체인 「인간」이라고 하는 것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이름만의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차가 움직인다」든지 「사람이 걷는다」라고 하는 경우도 다만 적당한 말을 이용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움직인다」든지 「걷는다」라고 하는 행위만이 있습니다.
그럼 조금 더 마음의 흐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인식과정(vīthi citta : 위-티 찟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각각의 인식과정에 따라서 마음에는 여러 개의 찰라적인 마음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연속들이 일어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의식의 단계에서는,
1. 다섯 감각의 문을 향해 주의기울임[五門轉向, pañncadvāra-āvajjana 빤짜드와- 라 아-왓자나]
2. 다섯 갈래의 의식[五識, pañca-vaññāṇa 빤짜 완냐-나]
3. 받아들임[領收, sampaṭicchana 삼빠띳차나]
4. 조사[推度, santīraṇa 산띠-라나]
5. 결정(決定, voṭṭhapana 옷타빠나)
6. 순간적인 생각의 속행[速行, javana 자와나]
7. 경험의 등록[彼所緣, tadārammaṇa 따다-람마나]
(안·이·비·설·신) 다섯 감각의 문 중 어느 쪽으로 대상의 이미지가 나타나면 잠재의식인 바왕가(有分)가 깨어나서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맛고 느끼는 의식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다섯 감각 문을 향해 주의 기울이는 의식을 자극하여 마음이 대상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여 다섯 감각 문에 나타난 대상의 이미지는 각각의 다섯 갈래 의식에 의해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즉시 받아들이는 의식에 의해 이미지를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인 다음에 조사하는 의식이 넘겨받아 조사한 다음, 결정의식이 무엇인지 결정합니다. 결정의식이 판정을 내리자마자 다음에 전개되는 자와나가 찰라간에 이어지면서 좋아하고 싫어함이 생겨납니다. 그 다음 찰라간에 경험을 등록하는 의식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대상에 따라 마음이 연속하는 인식과정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확립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면밀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리면 감각대상의 궁극적 실체가 드러납니다. 즉 다섯 갈래의 의식에 비친 대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즉 보는 주체와 보여진 대상이라는 마음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궁극적 실재를 체험할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8. 존재(바와)의 법칙
「영원하고 불멸한 것은 없다. 항상 변화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무상의 법칙이며, 「끊임없이 다른 무엇으로 되어 간다.」라고 하는 것이 존재(bhava)의 법칙입니다. 변화하는 것에는 무상의 성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다음의 것이 되어 가는 과정, 즉 생성의 과정(그 과정이 길든 짧든) 또한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되어가는 것 이외는 그 무엇도 없다.’ 라는 것을 존재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계속 끝없이 생성되는 것은 모든 존재의 특성입니다. 식물의 싹은 큰 나무가 되고, 어떠한 일도 시작된 순간에 다음 상태가 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바다에서 물결이 흔들리는 모습을 관찰해 봅시다. 한 물결은 다음의 물결로 용해되어 갑니다. 한 물결이 다음의 물결이 되어 갑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도 다음 상태로 계속 생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싹이 터서 꽃으로 성장할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관찰할 수 있다면, 지금 순간의 싹과 다음 순간의 싹, 또 그 다음 순간의 싹 상태에 무슨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눈앞에서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과정은 어느 상태로부터 다음 상태로 매우 완만하게 변해갑니다. 이것을 「바와(有, 존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에 1번씩만 싹을 관찰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변화」라든지 「생성되어 간다.」라고 하지 않고, 「싹」이든지 「꽃」이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10년간 쉬지 않고 아기를 계속 본다면, 그 아기의 어떤 변화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오전 10시에 태어난 아기는 11시, 12시에도 똑같이 보여 버립니다. 어느 순간에도 차이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상태로부터 다음 상태로 조금씩 변합니다. 계속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 이것을 「바와」라고 합니다.
그런데 1개월에 1번씩만 아기를 본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변화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변화」나 「생성되어 간다.」라고 하지 않고, 「아기」라든지 「사내 아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시간의 경과에 대해 관찰해 봅시다. 학자는 시간을 현재시제·과거 시제·미래 시제로 구분하고 있지만, 그처럼 실제의 시간을 현재·과거·미래로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 철학에 의하면 「시간은 일련의 과정이며, 한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사라져 간다. 그처럼 해서 연속성이 성립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부터 현재, 미래부터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에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재다」라고 말해도 그것은 곧바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 말을 모두 다 끝내기 전에 벌써 과거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은 계속 생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법칙이며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능의 연속성」을 잘못 이해할 때에 모든 것을 「변화」나 「생성되어 간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파악해 버립니다.
생물학자에 의하면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는 7년마다 바뀐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순간순간 바뀐다고 보고 있습니다. 같은 상태의 신체는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체란 몇 종류의 원소가 순간 마다 태어나서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체내에서는 끊임없이 죽음과 재생이 반복해지고 있습니다. 즉 살아 있는 동안 순간순간 「죽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의미로 생명의 수명은 지극히 짧다. 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 밖에 존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확히 차바퀴와 같은 것이다. 차바퀴가 회전할 때 한 점만이 지면과 접촉한다. 그것과 같이 생명의 수명도 그저 찰나의 순간 밖에 존속하지 않는다. 찰나가 소멸했을 때 생명은 소멸했다고 말해지는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존재의 어느 순간을 봐도 죽음과 재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어느 특정한 죽음(현재 생의 마지막 죽음)만을 무서워하는가? 무수한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데 어째서 한 순간의 사건 만을 걱정하는 것인가?
그것은 「순간마다의 죽음」을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임종 시의 죽음만을 무서워합니다. 실제 임종 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차례차례로 일어나고 있는 죽음의 그저 한 토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성되는 과정은 현재의 생존만큼 머물지 않습니다. 의식의 연속성이 있는 한, 다음의 생존에서도 무언가로 생성되어 계속해 갑니다. 죽는 순간의 식(cuti citta)으로부터 새로운 생존의 결생식(paṭisandhi viññāna)이 태어납니다. 어느 하나의 식이 다음의 식을 낳는 생성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갑니다. 다만 각각의 식이 나타나는 장소가 변화합니다. 이때 인과의 연속성이 거리에 의해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사는 것」이란 취하는 것(집착, 우빠-다-나)과 생성되는 것(有, 존재, 바와)의 과정이며, 「죽는 것」이란 취한 것이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집착은 살아있는 사람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집착이 토대가 되어 「有」가 생깁니다.
그럼 집착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갈증이 있는 곳에 집착이 있습니다. 갈애(tanhā)-욕망, 소망, 생존욕구, 충동-에 의해 집착이 일어납니다. 갈애가 가져오는 업의 에너지는 화재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 불타 잇달아 무엇인가를 추구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갈애 그 자체를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즉 갈애는 그것 자신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한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요구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체가 죽는 순간에는 예기치 못한 갈애의 에너지, 업의 잔상이 새로운 연료를 파악해 새로운 물체를 획득합니다. 이렇게 해 「집착」과 「유」의 끝없는 흐름이 회전해 나갑니다. 이것이 「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극도로 무서워하고 있는 죽음(현재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은 단순한 다음의 생존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의 신체는 몹시 쇠약합니다. 의지의 힘도 약해져 죽는 순간에는 사고를 선택하는 힘은 이미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승에서의 행위나 과거의 생에서의 행위 중에서 강렬하게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중대한 사건의 기억이 죽어가는 사람의 의식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납니다. 떠올라 오는 그 사고에 저항하는 힘은 이제 없습니다.
이 사고를 죽음직전의 촉진력(maraṇāsaññā javana)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소멸한 뒤에 현재 유(바와)의 마지막인 죽음의식(cuti-citta)이 생깁니다. 죽음직전의 촉진력에는 3종류가 있어 그 중 하나가 나타납니다.
우선 첫 번째는 스스로 쌓아 온 여러 가지 업 가운데, 특히 인상이 강한 「 행위」에 대한 사고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업(kamma)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과거의 행위 가운데 강렬하고 인상적인 행위를 했을 때의 「상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금고에서 돈을 훔쳤던 적이 있는 경우 그 금고가 나타나거나 합니다. 이것을 업의 표상(kamma nimitta)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스스로의 과거 행위의 결과로서 지금부터 다시 태어나는 장소를 나타내는 「조짐」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자비심 깊은 일을 실천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올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태어날 곳의 표상(gati nimitta, 정취상)이라고 하여 다음에 전생하는 장소를 나타내는 징조를 말합니다.
죽음의 전조로서 알려진 이러한 사고 대상은 자기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 3종류 중 어느 쪽으로 한 가지가 지극히 강력하고 선명하게 임종순간에 있는 사람의 의식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죽음의식이 생깁니다. 죽기 직전의 사고는 그것이 다음 세상의 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막 잠들기 직전의 사고가 눈을 떴을 때의 최초의 사고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외부적인 힘에 의해 사고의 대상이 결정될 수는 없습니다. 신의 뜻은 없습니다.
이 죽음직전의 마음은 다음 세상의 생을 결정한다고 하는 의미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선이든 악이든 지극히 무거운 행위를 했을 경우,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마음이 됩니다. 이것을 무거운 업(garuka kamma)이라고 합니다.
또 일상적으로 반복해서 행해진 행위가 마지막 마음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몇 번이나 생각나던 사고가 임종 시에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업을 습관적인 업(āciṇṇa kamma, bahula kamma)이라고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스님에게 가사를 보시하거나, 곁에서 경전을 독송하는 것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 죽는 동안에 행해지는 업을 죽음직전의 업, 가까운 업(āsanna kamma)라고 합니다.
그러나 덕 높은 스님이 경을 독송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는 사람의 마음에 지금까지의 버릇으로 나쁜 생각이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반복되어진 악행의 기억이 의식에 밀어닥쳐 옵니다. 그 경우에 그것이 죽음직전(임종)의 마음이 됩니다. 또 이것과 반대로도 일어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좋은 행위를 쌓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임종의 순간에 나쁜 생각이 떠올라 버리는 경우입니다. 이 때 습관이 되어 있던 좋은 업이 의식에 나타나고 있는 나쁜 업을 저지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꼬살라국 빠세나디왕의 부인 말리까 왕비에게 일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리까 왕비는 살아가는 동안 줄곧 좋은 행위를 행하였지만 죽음의 순간에 살아오면서 행한 딱 한 번의 악행에 대한 후회의 생각이 마음에 나타나 버렸습니다. 그 결과 지옥으로 다시 태어나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7일간으로 끝났습니다. 좋은 업의 영향에 의해 지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번째 종류의 업은 앞에 말한 3가지 종류의 업이 없을 때에 나타납니다. 무한한 과거생 동안 쌓여 온 업 중의 어느 하나가 임종시에 나타납니다. 이것을 쌓아둔 업(kaṭattā kamma)이라고 합니다.
그 나타난 사고 대상을 연고로 하여 법칙대로 다른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을 죽음직전 인식의 속행과정(maraṇāsaññā javana vīthi)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인식 또는 의식 작용을 맡는 속행심은 많은 경우 7회 연속해 생기지만, 임종 시에는 5회 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여기서 죽는 사람은 죽음의 징조를 완전하게 이해합니다. 이 직후에 속행심이 취한 대상을 연속해서 다시 취하여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이 나타나 죽음의 징조가 확인됩니다. 이것이 2찰나 생겨났다가 소멸합니다. 그 다음에 사심이 생기고 그리고 죽습니다. 이것이 이승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다음 세상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벌써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조건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모가 되는 남성과 여성이 있고, 태아가 발생하는 조건으로서 마음(식)의 요소는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이 결생식이 얻을 수 있어야 할 처지(예를 들어 모친의 태내)에 나타납니다. 이것들 3개의 요소가 결합하자마자, 모태에서 「생」이 시작됩니다. 결생식이 생길 때 시간의 격차는 없고, 또 의식의 흐름이 끊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즉 사심이 소멸한 직후에게만 다른 장소에서 결생식이 생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생으로부터 다음 세상의 생으로 유전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심마저도 유전하지 않습니다. 직전의 마음이 다음의 마음을 발생시키기 위한 영향을 주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탄생의 순간에는 모태로부터 분리해 개별의 존재가 되어 외계와 접촉합니다. 외계와 접촉하는 것에 의해 유분심(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흐름으로부터, 로심(표면적 의식)의 흐름으로 대신합니다. 이것보다 앞은 잇달아 갈애에 대해서 작동되어 다시 행동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해서 갈애에 내몰리어 인생이 회전해 나갑니다.
그런데 윤회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으로 죽음을 대하는 접근법이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존재하고 싶다고 하는 갈애에 휘몰려 생으로부터 생으로 윤회하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납득할 수가 있다면, 현재의 생도, 다음 세상의 생도, 그 후에 계속되는 생도, 단순한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과 비교하여 죽는 것을 슬퍼할 이유는 없습니다. 생과 죽음은 같은 과정의 요소입니다. 「생」은 집착, 또는 존재욕구의 흐름이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한 것에 있어서의 단순한 변화입니다.
윤회의 법칙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 윤회 세계 가운데에서는 생에 의해 죽음이, 죽음에 의해 생이 일으켜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 불안감으로 부들부들 떨 일이 없습니다. 생은 죽음이며, 죽음은 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윤회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살 수가 있으면 죽는 것은 지금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재생하기 위한 큰 조건이 됩니다. 이와 같이 죽음의 견해가 바뀌어 집니다.
올바르게 죽음을 보는 사람에게는 이미 불안이나 공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것은 견해로 정해집니다. 예를 들어 집에 현관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현관은 입구입니까? 출구입니까? 도로 쪽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입구이며, 집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출구가 됩니다. 다만 다른 각도로부터 보았을 뿐인 것입니다.
실제 생·사란 끊임없는 욕망의 2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인가 생인가 그것은 견해에 의하지만, 우리는 그 어느 한쪽의 면 밖에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을 보는 사람에게는 생이 보이지 않고, 생을 보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생과 죽음을 서로 서로 관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대등하게 보지 않습니다.
「죽음에 의해 생이 있고, 생에 의해 죽음이 있다」라고, 생·죽음의 2가지가 밀접하게 연속하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한편(죽음) 없이 한편(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바라고 있습니다. 즉, 살아 아프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고.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생에 집착 하는 것은 결국 죽음에도 집착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의 특징은 집착(취)이며, 그 필연적 결과가 윤회의 법칙에 근거해 죽는 것입니다.
만약 죽음으로부터 피하고 싶다면, 사는 것으로부터도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윤회의 과정을 완전하게 바꾸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매달려 취하려고 하는 갈애를 끊는 것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는데 있어서의 다양한 일에 집착 하면 일시적인 만족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애착한 것은 반드시 없어져 사라져 갑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진리인 윤회의 법칙과 함께 무상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기쁨의 대상은 슬픔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 세상에 있어서의 기쁨은 괴로움을 위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애착으로부터 생기는 기쁨은 이별이라고 하는 슬픔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것은 괴로운 일이 아닙니까? 마음을 뛰게 한 환락의 다음날에는 혐오를 안아 그것을 버립니다. 또는 낙담으로 가라앉습니다. 진절머리 나지 않습니까?
마음이 마치 풋볼과 같이 여기저기에 휙 던져지는 것을 어디까지 방치할 겁니까? 집착으로부터 멀어져, 보다 충만하고 침착하게, 안전하게, 지혜를 가지고 살 수는 없나요?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병으로도 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견해는 확실히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의 법칙과 윤회의 법칙이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법칙을 이해하는 것으로 공포나 슬픔은 희망이나 기쁨으로 바뀌어 갑니다. 냉정하게 인생을 응시하고 온화하게 평안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는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고, 편하게,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