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회(saṁsāra) (20161202)
1. 윤회 사상은 범부들이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인가?
2. 윤회는 무기(無記)인가?
3. 우리는 왜 윤회하는가?
4.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5. 무엇이 윤회하는가?
6. 윤회에서의 죽음과 삶
7. 마음의 흐름
8. 존재(바와)의 법칙
「윤회」는 ❶Sanskrit어로 「saṁsāra(상사-라)」인데 ❷「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부터 인도에선 ❸「세상」혹은 「세계」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saṁsāra(상사-라)를
「다시 태어남」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불교에선 saṁsāra(상사-라)를 「미혹의 세계」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 「피안(열반)」에 대한 「차안」, 즉, 번뇌에 지배된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즉, ❹ 인도(베다 (인도의 성전))사상에서는 「윤회=다시 태어남, 해탈=불생」
❺ 불교 사상에서는 「윤회=차안(번뇌의 세계), 해탈=번뇌로부터 자유로움」이라 한다. (「불교어 대사전」 「윤회」부분 발췌).
이번 주제는 윤회인데 앞의 해석 부분에 대한 잘ˈ잘못을 지적해 가면서 주제를 풀어나갈 것입니다.
❶ Sanskrit는 BC 4세기경 문법서를 쓴 Panini가 만든 것으로 「인공말」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학문에 사용하는 표준어가 된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철학자나 종교가가 반드시 Sanskrit어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종교 중에서 Sanskrit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Upanishad뿐입니다.
힌두교가 주류가 되고 나서 대승 불교도가 억지로 경전을 Sanskrit화했습니다. 그것은 AC 1세기부터의 일입니다. 자이나교, 여러 아지와까교, 불교 등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 Sanskrit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특히 불교적으로는 부처님이 Sanskrit어로 생각한 것도, 말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❷ 불교의 경우:(saṁsāra(상사-라))
Sanskrit어에서 「흐르는, 샌다」라고 하는 의미로 Srav, Pali어에서는 sava라고 하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번뇌에 사용하는 āsava라고 하는 용어가 이것입니다.
saṁsāra(상사-라)의 경우 sandhāvati(산다-와띠)라는 말과 의미 맞댐을 합니다.
sandhāvati(산다-와띠)는 돌아다니는, 목적 없이 걷는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또한 saṁsarati(상사라띠)도 같은 의미가 됩니다. 「흐른다」라고 하는 물질에 사용하는 의미가 바뀌어 「생물」과 관계되는 말이 됩니다. 생물은 흐르지 않고, 의지로 움직입니다.
Sanskrit어의 의미가 어떻던, 불교는 흐른다는 의미로 상사-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❸ 「피안, 차안」은 또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Pali어의 경전에서는 idha, para ; iha loka, para loka ; idha, peccā ; idha,
hura ; asmiṁ loke, pare hi ca 등 많은 말이 있습니다. 올바르게 번역할 때는, 「차안 피안」이 아니라, 「이 세상, 저 세상」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됩니다.
이 세상은 지금 살아 있는 세계입니다. 감각을 지닌 세상입니다. 이승의 경우는 의미가 뚜렷합니다.
저 세상은 사후의 일입니다. 사후는 이 세상과 달리 어떠한 상태인지 잘 모릅니다. 저 세상의 의미가 정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세상은 천국이다. 극락정토이다. 또는 저 세상은 천상과 지옥이라고 하는 설명입니다. 그것은 「영원불멸」이라는 세계를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에서도 수명이 정해져 있듯이, 저 세상에서도 수명은 정해져 있다. 저 세상의 수명이 다하면 또다시 죽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또 다른 세상이 있다. 따라서 저 세상은 무수한 태어남과 죽음으로 회전하게 된다.」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❹ 인도사상에서 저 세상은 무한하다, 영원하다, 라고 말하지만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일생 죄를 범하지 않고 생활해도 「신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니까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선에서도 악에서도 그것에 적당한 결과를 내야 한다고 불교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세상」의 이야기는 윤회전생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립니다.
「어떠한 현상도 적당한 결과를 내고 사라진다.」라고 하는 것은 인과 법칙의 논리입니다. 불교의 세계에서 「저 세상」으로 무수한 생사의 회전이라고 하는 의미로 「윤회」의 개념은 논리적입니다. 이 「윤회」라고 말하는 무의미한 것, 또한 둑카(괴로움)인 회전을 끊으려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❺ 차안은 윤회인가?
차안 피안의 개념은 불교적이라고 하는 것보다 중국적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극락정토, 불성 등은 불교적인 종교 관념이 아닙니다. 즉, 순수한 불교적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불교적 사고는 「육도윤회」입니다. 추석마다, 백중 때마다 돌아오는 조상님의 이야기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사고를 배제한 문화적인 습관에 기인한 축제와 같이 크리스트교도의 부활제, 할로윈 축제처럼 이해해야 합니다.
즉 윤회(sansāra)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고, 해탈하지 않은 생명의 삶입니다. 둑카의 계속입니다.
1. 윤회 사상은 범부들이 알 수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인가?
영원불멸하는 영혼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가듯이 윤회하는 것이라고 하면, 분명하게 형이상학적입니다. 미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의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불변하는 영혼의 윤회라는 사상은 분명 형이상학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불교의 윤회사상을 살펴봅시다.
과거는 역사이므로, 무엇인가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과거니까 기억이 첫 번째의 증거입니다. 「내가」몇 년, 몇 월, 며칠에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언제 결혼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입니다.
실체로서 변하지 않는 「나」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잊은 것도 생각해 냅니다.
그렇다면, 명확하게 과거를 생각해 낸다면 어떻겠습니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 한밤중에 삼매의 힘으로 과거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윤회 사상은 그 지혜의 결과입니다.
부처님의 삼매체험을 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한 부처님의 직계제자나 지금의 수행자등이 경험한 삼매를 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처님이 경험한 것을 우리들도 경험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기억력, 생각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닦아, 완전하게 한다면, 생명이 윤회하는 것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하는 사람도 같은 능력을 기르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부처인 나밖에 모른다. 너희들이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면 형이상학이겠죠. 그러면 경험하여 믿을 길이 없어집니다. 막연히 믿을 수밖에 없어서 광신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위빳사나-수행을 실천하면 누구라도 간단하게 추측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과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삼매의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불교사상은 조사 확인되는 것들입니다.
2. 윤회는 무기(無記)인가?
「무기」는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사고를 말할 때 씁니다.
형이상학적 사고에 부처님이 「무기」(avyākata : 아브야-까따, 대답하지 않음)한 것은
「무의미함, 근거 없는 얘기(appāṭihīrakathā : 압빠-띠히-라까타-)」이기에 그러하셨습니다.
윤회가 무기가 되려면 「신체와 영혼은 동일한 것입니까? 또는 별개의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질문은 「신체는 실체로서 존재한다, 영원불멸의 영혼도 실체로서 존재한다」라고 하는 전제로 묻는 것입니다.
「동일하지 않으면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이 2개의 물음에 「그렇다」고 말해도, 「아니오」라고 말해도 실체를 인정하게 됩니다. 묻는 자가 처음부터 고정 관념을 가지고 의문을 해결하고 싶은 것이기에 「바보같은」질문이라고 합니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은 짧습니까? 깁니까?」 하고 물으면 비교할 대상 없이 물은 것이기에 대답할 수 없기에 「무기」입니다. 무기의 의미는 대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인도의 모든 종교가가 화제로 하고 있던 10 종류의 질문이 있는데, 그 문제에 부처님이 「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대답할 수 없지만, 「무기」는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으로 성립됩니다. 그런데 이 10 무기 속에 윤회의 의문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명확하게 대답하셨다는 것이죠.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어느 바라문이 목욕으로 영혼을 정화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후에 브라흐마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바라서, 매일 아침 일출의 순간에 목욕하면서「목욕으로 영혼은 정화한다. 죄는 사라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을 형이상학적인 사고라고 합니다.
그때 아침에 물 길러온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던 여자 아이가 이것을 보고 「추운 아침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거기에 그 바라문은 가슴을 펴며 대답했습니다. 「목욕으로 영혼은 정화한다. 죄는 사라진다. 이렇게 매일 행하면 사후에 브라흐마의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라고.
여자 아이는 「그렇다면 선생님, 이 강에 살고 있는 개구리, 물뱀, 작은 물고기들이 선생님보다 먼저, 사후에 브라흐마의 세계로 다시 태어났던지, 더 높은 천상세계에 태어났겠네요...」
논리에 진 바라문이 그녀로부터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방법을 듣고 목욕하는 습관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주를 믿으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는 사고는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형이상학적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의 윤회 사상은 형이상학적이지도 않고, 대답할 수 없는 무기도 아닙니다.
윤회하는 것을 알면 아무렇게나 생활할 수도 없고 수행을 뒷전으로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짧은 인생을 두 번 다시없는 기회로 알고 힘써야 합니다.
3. 우리는 왜 윤회하는가?
우리가 여러 생을 반복하며 윤회하여 이 세상으로 태어나는 것은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을 좋아하기」때문인가? 아니면 알콜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처럼 또다시 알콜이나 마약에 손을 대는 것과 같은가?
이 세상에 남기는 것이 너무 많아 미련이 남기에 몇 번이나 똑같이 반복하여 윤회해도 싫증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이 세상을 좋아하는 집착이 남겨져 있다고 해야겠죠.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은 강제적으로 고칠 방법이 있겠지만, 윤회를 멈추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누구나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나쁜 상황이고 괴로워 참을 수 없다고 해도 허무하게 죽는 것보다 살아나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올림픽 경기를 봅시다. 경기에 나올 때는 메달을 딸 거라고 생각할 것인데, 현실은 등외로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조금 더 노력할걸! 하며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4년 후에 다시 경기에 나오려고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이쯤에서 멈추고 단념하자」고 하면 화를 냅니다. 원하는 것이 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하면 또 다르게 살아가는 길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모든 것은 멈추지 않습니다. 물질의 흐름, 변화의 흐름이 멈추지 않습니다. 나이를 여기서 멈추고 싶다고 생각해도, 몸은 쉬지 않고 변화해 나이를 먹어 버립니다. 일시적인 하나의 현상은 순간에 소멸하지만, 소멸하는 현상은 다음의 순간적인 현상을 낳고 소멸합니다. 죽음은 생으로 변환되고, 생은 죽음으로 변환됩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마음도, 물질도 사이클을 이루어 순환합니다.
마음을 봅시다. 하나의 생각을 끝마치면 마음이 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각이 끼어들면 낡은 생각은 사라집니다. 또 다른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물질이든, 마음이든, 모든 것은 멈춤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상」이라고 하는 논리입니다. 결국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고,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도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사물은 멈추는 일 없이 생멸이라고 하는 변화를 계속 합니다. 개인이 그것은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변화는 계속됩니다.
다시 태어나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모두 평등하게 태어나고 변합니다.
마음에는 욕구가 있고, 갈애로부터 집착이 있기 때문에 계속 생멸을 거듭합니다. 괴로워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에 의해 그 흐름을 멈출 수가 있습니다.
「화냄, 미움, 고민, 질투, 욕구」등 생각의 흐름도 알아차림이라는 조그마한 실천으로 일시적으로나마 멈추면, 우리는 즐거워하고, 편안해하고, 행복해합니다.
마치 마음에서 불타고 있던 불이 꺼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경험이 겹겹이 쌓이면 마음의 흐름의 완전한 멈춤만이 최상의 평온함이라고 납득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는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며, 그래서 지금 자유와 행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은 이 사실에서 예외이기를 바랍니다. 엄연히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자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자아 그 자체로 남아 있으려면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그런데 우리의 몸과 마음, 즉 나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어떤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에 자아가 없다는 것은 논쟁할 수 없는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아개념에 사로잡혀 가장 소중한 것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없는 실체에 대한 욕망)에 의해 고통 받고 윤회하는 줄 알면서도.
이 무지는 지금 이곳에서 저곳에서 끊임없는 삶과 죽음의 고통스런 순환을 되풀이 합니다. 이 무지가 알아차림 수행으로 지혜에 의해 대치되어 열반을 실현할 때 윤회의 과정은 끝납니다.
다시 또 어리석은 사람은 다시 태어남을 찾네.
다시 또 태어남이 오면서 죽음이 가까워지네.
다시 또 인간은 우리를 무덤으로 데려가네.
-- 상응부 경전 --
4.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윤회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이 생사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수행자이며, 세 가지 번뇌 즉 말과 몸의 행위로 표현된 거친 번뇌와, 마음속에 피어나 있는 번뇌, 그리고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기회만 있으면 바로 마음의 표면에 드러나는 잠재된 번뇌를 계․정․혜 삼학으로 제거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왜 이런 번뇌들을 없애야 하는가? 이 번뇌들을 제거했을 때 어떤 이익이 있는가?
이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번뇌 때문에 위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번뇌[漏, āsava] 때문에 인간은 해를 입고 있습니다. 번뇌가 있는 사람의 마음은 불타는 상태와 같습니다. 번뇌가 거듭 생겨나는 것은 불타고 있는 마음에 자꾸 연료를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 탐욕(lobha)이 생겨 점점 커지게 되면, 이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감각적 쾌락만을 탐닉하다가 결국 자신마저 해치게 됩니다. 탐욕이 생기면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때가 묻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워 보려고 기를 쓰면 그 일을 성공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수가 허다합니다. 그의 안중에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탐욕에 의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그는 곧 화를 냅니다.
성냄(dosa)이라는 번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남에 대해서 자비심이 없어서 남이 잘 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탐욕과 성냄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일어나면 결국 이 번뇌들은 그 자신을 태우고 말 것입니다. 탐욕과 성냄이 자리 잡게 되면 무지(moha)가 더욱 더 커져서 이 세 가지 번뇌[三毒心]로 인해 그의 마음은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번뇌가 점점 커지면 행동하고 말하고 마음 쓰는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행위[三業]에서 자제력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 즉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삿된 음행을 저지를 것이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나쁜 말, 즉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될 것이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인 탐욕과 악의와 사견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열 가지 악한 행위를 저지르다가 죽게 되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삿된 견해[斷滅論] 때문에 이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런 악행의 과보로 죽은 후에는 삼악도(三惡道:지옥․아귀․축생)에 떨어져서 많은 괴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그 씨 안에 있는 잠재된 싹이 피어나는 것과 같이 악행의 씨는 괴로움이라는 싹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이 번뇌들은 이번 생에서 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나쁜 과보를 가져오게 되어 수많은 문제와 괴로움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번뇌 때문에 저지른 악행으로 이러한 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또 번뇌 때문에 현재의 삶과 다음 생의 삶에서 괴로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이 번뇌를 완전하게, 영원히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번뇌를 없애 버리면 평온과 행복을 얻습니다.
번뇌를 없애는 방법은 다름 아닌 바로 계․정․혜 삼학입니다.
나무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독이 들어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이 나무는 적절한 조건하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독이 들어 있는 열매를 먹는다면 큰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나무가 점점 많아지고 무성해져서 열매를 많이 맺으면 맺을수록 점점 해가 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번뇌라는 씨를 뿌리면 독성 있는 악행이라는 열매가 열리게 되고 그 때문
에
이 생사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번뇌라는 씨앗이 있으면 독이 들어 있어서 괴로울 수밖에 없는 끝없는 생존이 거듭되어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나무를 심고 가꾸느냐에 따라 어떤 열매를 거두는가가 결정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의 씨를 심고 가꾸면 맛있고 유익한 열매가 열릴 것이고, 독이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의 씨를 심고 가꾼다면 맛없고 해로운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번뇌가 자라나면 반드시 해로운 열매를 맺게 되니 이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윤회의 굴레(vaṭṭa)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세 가지 윤회의 굴레란
첫째, 번뇌의 굴레(kilesa-vaṭṭa)
둘째, 업의 굴레(kamma-vaṭṭa)
셋째, 과보의 굴레(vipakka-vaṭṭa)입니다.
번뇌의 굴레란 무명(無明, avijjā), 갈애(渴愛, taṇhā), 집착(upādāna)을 말합니다.
업의 굴레란 바른 행위[善業, kusala kamma]와 나쁜 행위[惡業, akusala kamma]를 말합니다.
과보의 굴레란 업에 의해 맺어지는 결과를 말합니다.
먼저 번뇌의 굴레에서 무명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無知)이고 다른 하나는 삿된 견해(邪見)입니다.
눈에 백내장이 생기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무명에 의해 가려져 있으면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과 몸(nāma-rūpa)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은 지독한 백내장에 걸린 사람이나 장님처럼 전혀 앞을 못 볼 것이며(무지의 상태), 마음과 몸에 대해 조금 알고 있더라도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모르는 사람은 역시 백내장에 걸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흐릿하게 보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사견에 빠져 있는 상태).
부처님께서는 특히 감각적인 쾌락은 아주 위험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속의 범부들은 이 감각적 쾌락이 진정한 즐거움이고, 이외에 달리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쾌락의 대상이 보이거나 들리면 그것을 즐거워하여, 그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쾌락을 얻으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감각적 쾌락에 탐닉해서 빠져드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치명적이어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꿀이 가득 담긴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의 뚜껑이 조금 열려 있어 꿀이 약간 밖으로 흘러나와 있습니다. 이 꿀을 맛본 개미는 꿀맛에 취해서 병위로 기어 올라가 꿀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꿀을 한참 먹다보니 어느새 개미의 몸은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꿀 속에 빠져 버립니다. 달콤한 꿀맛만을 즐기다가 그만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꿀 속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꿀에 대한 지나친 탐닉에 빠졌기 때문에 개미는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보통 우리들이 좋아하고 또 얻으려고 애를 쓰는 감각적 쾌락은 바로 이 꿀과 같이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입니다.
무명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진정한 즐거움으로 여겨, 그 속에 빠져들어서는 나오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감각적 쾌락에만 빠지다 보면 만족을 얻지 못해서 점점 더 강한 쾌락을 찾게 됩니다. 만족을 모르는 쾌락에의 탐닉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스스로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5. 무엇이 윤회하는가?
《알라야라-마- 빅카웨- 빠자- 알라야라따- 알라야사무디따-, 가- 따타-가떼-나 아날라예- 담메-데-시야마-네- 숫수-야띠 소-땅 오-다하띠 안냐- 찟땅 우빳타-뻬-띠.》-- 앙굿따라 나까야 2권 128번--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래가 감각적 쾌락이 없는 담마(윤회를 거스르는 담마)를 설하면, 귀를 기울여 듣고 앎을 위해서 마음을 확립시킨다.”
이것을 해심밀경에서 번역한 것을 보자.
“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알라야를 좋아하고 알라야에 물들어 있고 알라야에 탐닉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이라는 <알라야>라는 일반적인 서술어가 변형되어 사용됨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 불교 때부터 일부에서 막연히 윤회의 주체로 간주되기 쉬웠던 식(識)이라는 개념을 후대로 내려오면서 간답바⟶中有로 구체화되었다가 결국에는 <알라야식, 아뢰야식>으로 한정되는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집착과 관련이 있는 <알라야>의 의미에 착안하여,
후대로 내려오면서 윤회의 주체와 관련된 의미를 <알라야>에 부여한 듯합니다.
즉 <알라야>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이란 개념에서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의 의미로 바뀌면서 잠재한 어떤 것, 저장하는 장소, 집착이 쌓인 곳이라는 의미로 변질되어 갑니다. 인간은 존재의 무상함에서 오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주체를 상정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윤회하는 주체자를 전제하려고 합니다.
불교 내부에서도 일부 수행자에 의해 윤회의 주체로서 제일 먼저 고려된 것은 식(識)이었습니다. 식이나 심(心)을 윤회의 주체로 고려하게 된 것은 그것이 육체 또는 개체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로 무상합니다. 의식 또한 변화하는 무상한 것으로서 다른 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유지되고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주하는 주체자가 되지 못합니다.
부파불교 당시 여러 부파는 불멸하는 자아라 할 만한 유사한 윤회의 주체를 상정했습니다. 유부의 실유 사상과 중유설, 독자부의 뿌드갈라, 경량부의 일미온, 화지부의 窮生死蘊, 대중부의 근본식 등, 나름대로의 이론을 내놓으며 무언가 주체적 지속이 가능한 정신적 주체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인도 전통사상에서는 불멸하는 윤회의 주체가 있어 그 주체가 본질은 변하지 않고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그들은 내면의 실체인 아트만과 외면의 실체인 브라흐만과의 동일성의 인식으로서 '절대적인 아'를 추구하여 해탈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아트만을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보아 부정하였지만 윤회는 받아들였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오직 '무아'와 '윤회'의 양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토대에 두고 '무아'와 '윤회'를 설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오히려, "만일 불변, 불멸의 실체적 자아인 아트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생멸이 없게 된다. 생멸이 없는 것은 윤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윤회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합니다.
불교에서는 주체자 없이 업을 통해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이 주장이 성립됨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불교 특유의 윤회설이 형성된 것입니다.
초기불교는 무아 윤회를 12연기와 의식의 연속 그리고 업 이론과 오취온 등을 통하여 설명하였는데, 사람들은 윤회의 원인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실제하는 것을 당연히 요구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유가행파의 유식설은 알라야식을 내세워 무아설을 계승하며 출발합니다.
유식설의 핵심 개념인 알라야식은 찰나적으로 상속하는 습기일 뿐, 불변, 불멸하는 본체는 아닙니다. 이런 찰나적인 것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의식의 연속적인 흐름, 즉 상속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같은 본체가 없더라도 알라야식이라는 습기만으로 윤회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알라야식은 종자라는 실체적인 개념을 적용하여 비유적으로 설명하면서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윤회의 주체로서 대체됩니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종자로 표현하고 종자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것도 그것이 결국 무아로 귀결된다는 전제 아래서만 용납됩니다.
허나 이것들이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언어적 구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개념이나 관념을 고정된 대상으로 집착하게 된다면, 이미 그것들은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라야식에 개입된 유아적 관념이나 개념도 무아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편적 구상으로서만 용납됩니다.
사실상 불교 사상의 무아관은 절대적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반대일 뿐이지, 상대적인 자아를 부정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무아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고, 반면에 윤회는 그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무아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고, 윤회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로 인해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범부중생이 이해하고 구사하는 방식으로 무아의 진실을 전달한 것이 윤회설입니다.
그러므로 무아설과 윤회설은 일맥상통하며 양립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윤회는 형이상학적인 불변하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속적인 관념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을 야기하면서 살아갑니다. 즉, 아트만이라는 불변하는 존재 자체를 거의 맹목적인 고정 관념으로 사고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은 주체자가 없는 윤회를 믿으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지은 행위, 즉 업의 전환을 통해 자기 해방이 가능함을 자각하게 하려는 데 불교 윤회설의 의의가 있습니다.
윤회는 허망한 자아 그 자체가 윤회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는 주체자는 없고 다만 오취온의 허망한 자아의식이 다른 요소들과 조건 지워져 '업'이라는 흐름에 의해 연속의 과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다음장에 계속됩니다.
* 윤회(saṁsāra) (20161202)
1. 윤회 사상은 범부들이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인가?
2. 윤회는 무기(無記)인가?
3. 우리는 왜 윤회하는가?
4.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5. 무엇이 윤회하는가?
6. 윤회에서의 죽음과 삶
7. 마음의 흐름
8. 존재(바와)의 법칙
「윤회」는 ❶Sanskrit어로 「saṁsāra(상사-라)」인데 ❷「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부터 인도에선 ❸「세상」혹은 「세계」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saṁsāra(상사-라)를
「다시 태어남」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불교에선 saṁsāra(상사-라)를 「미혹의 세계」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 「피안(열반)」에 대한 「차안」, 즉, 번뇌에 지배된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즉, ❹ 인도(베다 (인도의 성전))사상에서는 「윤회=다시 태어남, 해탈=불생」
❺ 불교 사상에서는 「윤회=차안(번뇌의 세계), 해탈=번뇌로부터 자유로움」이라 한다. (「불교어 대사전」 「윤회」부분 발췌).
이번 주제는 윤회인데 앞의 해석 부분에 대한 잘ˈ잘못을 지적해 가면서 주제를 풀어나갈 것입니다.
❶ Sanskrit는 BC 4세기경 문법서를 쓴 Panini가 만든 것으로 「인공말」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학문에 사용하는 표준어가 된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철학자나 종교가가 반드시 Sanskrit어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종교 중에서 Sanskrit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Upanishad뿐입니다.
힌두교가 주류가 되고 나서 대승 불교도가 억지로 경전을 Sanskrit화했습니다. 그것은 AC 1세기부터의 일입니다. 자이나교, 여러 아지와까교, 불교 등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 Sanskrit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특히 불교적으로는 부처님이 Sanskrit어로 생각한 것도, 말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❷ 불교의 경우:(saṁsāra(상사-라))
Sanskrit어에서 「흐르는, 샌다」라고 하는 의미로 Srav, Pali어에서는 sava라고 하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번뇌에 사용하는 āsava라고 하는 용어가 이것입니다.
saṁsāra(상사-라)의 경우 sandhāvati(산다-와띠)라는 말과 의미 맞댐을 합니다.
sandhāvati(산다-와띠)는 돌아다니는, 목적 없이 걷는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또한 saṁsarati(상사라띠)도 같은 의미가 됩니다. 「흐른다」라고 하는 물질에 사용하는 의미가 바뀌어 「생물」과 관계되는 말이 됩니다. 생물은 흐르지 않고, 의지로 움직입니다.
Sanskrit어의 의미가 어떻던, 불교는 흐른다는 의미로 상사-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❸ 「피안, 차안」은 또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Pali어의 경전에서는 idha, para ; iha loka, para loka ; idha, peccā ; idha,
hura ; asmiṁ loke, pare hi ca 등 많은 말이 있습니다. 올바르게 번역할 때는, 「차안 피안」이 아니라, 「이 세상, 저 세상」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됩니다.
이 세상은 지금 살아 있는 세계입니다. 감각을 지닌 세상입니다. 이승의 경우는 의미가 뚜렷합니다.
저 세상은 사후의 일입니다. 사후는 이 세상과 달리 어떠한 상태인지 잘 모릅니다. 저 세상의 의미가 정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세상은 천국이다. 극락정토이다. 또는 저 세상은 천상과 지옥이라고 하는 설명입니다. 그것은 「영원불멸」이라는 세계를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에서도 수명이 정해져 있듯이, 저 세상에서도 수명은 정해져 있다. 저 세상의 수명이 다하면 또다시 죽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또 다른 세상이 있다. 따라서 저 세상은 무수한 태어남과 죽음으로 회전하게 된다.」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❹ 인도사상에서 저 세상은 무한하다, 영원하다, 라고 말하지만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일생 죄를 범하지 않고 생활해도 「신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니까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선에서도 악에서도 그것에 적당한 결과를 내야 한다고 불교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세상」의 이야기는 윤회전생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립니다.
「어떠한 현상도 적당한 결과를 내고 사라진다.」라고 하는 것은 인과 법칙의 논리입니다. 불교의 세계에서 「저 세상」으로 무수한 생사의 회전이라고 하는 의미로 「윤회」의 개념은 논리적입니다. 이 「윤회」라고 말하는 무의미한 것, 또한 둑카(괴로움)인 회전을 끊으려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❺ 차안은 윤회인가?
차안 피안의 개념은 불교적이라고 하는 것보다 중국적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극락정토, 불성 등은 불교적인 종교 관념이 아닙니다. 즉, 순수한 불교적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불교적 사고는 「육도윤회」입니다. 추석마다, 백중 때마다 돌아오는 조상님의 이야기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사고를 배제한 문화적인 습관에 기인한 축제와 같이 크리스트교도의 부활제, 할로윈 축제처럼 이해해야 합니다.
즉 윤회(sansāra)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고, 해탈하지 않은 생명의 삶입니다. 둑카의 계속입니다.
1. 윤회 사상은 범부들이 알 수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인가?
영원불멸하는 영혼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가듯이 윤회하는 것이라고 하면, 분명하게 형이상학적입니다. 미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의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불변하는 영혼의 윤회라는 사상은 분명 형이상학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불교의 윤회사상을 살펴봅시다.
과거는 역사이므로, 무엇인가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과거니까 기억이 첫 번째의 증거입니다. 「내가」몇 년, 몇 월, 며칠에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언제 결혼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입니다.
실체로서 변하지 않는 「나」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잊은 것도 생각해 냅니다.
그렇다면, 명확하게 과거를 생각해 낸다면 어떻겠습니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 한밤중에 삼매의 힘으로 과거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윤회 사상은 그 지혜의 결과입니다.
부처님의 삼매체험을 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한 부처님의 직계제자나 지금의 수행자등이 경험한 삼매를 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처님이 경험한 것을 우리들도 경험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기억력, 생각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닦아, 완전하게 한다면, 생명이 윤회하는 것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하는 사람도 같은 능력을 기르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부처인 나밖에 모른다. 너희들이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면 형이상학이겠죠. 그러면 경험하여 믿을 길이 없어집니다. 막연히 믿을 수밖에 없어서 광신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위빳사나-수행을 실천하면 누구라도 간단하게 추측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과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삼매의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불교사상은 조사 확인되는 것들입니다.
2. 윤회는 무기(無記)인가?
「무기」는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사고를 말할 때 씁니다.
형이상학적 사고에 부처님이 「무기」(avyākata : 아브야-까따, 대답하지 않음)한 것은
「무의미함, 근거 없는 얘기(appāṭihīrakathā : 압빠-띠히-라까타-)」이기에 그러하셨습니다.
윤회가 무기가 되려면 「신체와 영혼은 동일한 것입니까? 또는 별개의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질문은 「신체는 실체로서 존재한다, 영원불멸의 영혼도 실체로서 존재한다」라고 하는 전제로 묻는 것입니다.
「동일하지 않으면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이 2개의 물음에 「그렇다」고 말해도, 「아니오」라고 말해도 실체를 인정하게 됩니다. 묻는 자가 처음부터 고정 관념을 가지고 의문을 해결하고 싶은 것이기에 「바보같은」질문이라고 합니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은 짧습니까? 깁니까?」 하고 물으면 비교할 대상 없이 물은 것이기에 대답할 수 없기에 「무기」입니다. 무기의 의미는 대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인도의 모든 종교가가 화제로 하고 있던 10 종류의 질문이 있는데, 그 문제에 부처님이 「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대답할 수 없지만, 「무기」는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으로 성립됩니다. 그런데 이 10 무기 속에 윤회의 의문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명확하게 대답하셨다는 것이죠.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어느 바라문이 목욕으로 영혼을 정화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후에 브라흐마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바라서, 매일 아침 일출의 순간에 목욕하면서「목욕으로 영혼은 정화한다. 죄는 사라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을 형이상학적인 사고라고 합니다.
그때 아침에 물 길러온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던 여자 아이가 이것을 보고 「추운 아침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거기에 그 바라문은 가슴을 펴며 대답했습니다. 「목욕으로 영혼은 정화한다. 죄는 사라진다. 이렇게 매일 행하면 사후에 브라흐마의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라고.
여자 아이는 「그렇다면 선생님, 이 강에 살고 있는 개구리, 물뱀, 작은 물고기들이 선생님보다 먼저, 사후에 브라흐마의 세계로 다시 태어났던지, 더 높은 천상세계에 태어났겠네요...」
논리에 진 바라문이 그녀로부터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방법을 듣고 목욕하는 습관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주를 믿으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는 사고는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형이상학적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의 윤회 사상은 형이상학적이지도 않고, 대답할 수 없는 무기도 아닙니다.
윤회하는 것을 알면 아무렇게나 생활할 수도 없고 수행을 뒷전으로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짧은 인생을 두 번 다시없는 기회로 알고 힘써야 합니다.
3. 우리는 왜 윤회하는가?
우리가 여러 생을 반복하며 윤회하여 이 세상으로 태어나는 것은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을 좋아하기」때문인가? 아니면 알콜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처럼 또다시 알콜이나 마약에 손을 대는 것과 같은가?
이 세상에 남기는 것이 너무 많아 미련이 남기에 몇 번이나 똑같이 반복하여 윤회해도 싫증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이 세상을 좋아하는 집착이 남겨져 있다고 해야겠죠.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은 강제적으로 고칠 방법이 있겠지만, 윤회를 멈추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누구나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나쁜 상황이고 괴로워 참을 수 없다고 해도 허무하게 죽는 것보다 살아나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올림픽 경기를 봅시다. 경기에 나올 때는 메달을 딸 거라고 생각할 것인데, 현실은 등외로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조금 더 노력할걸! 하며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4년 후에 다시 경기에 나오려고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이쯤에서 멈추고 단념하자」고 하면 화를 냅니다. 원하는 것이 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하면 또 다르게 살아가는 길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모든 것은 멈추지 않습니다. 물질의 흐름, 변화의 흐름이 멈추지 않습니다. 나이를 여기서 멈추고 싶다고 생각해도, 몸은 쉬지 않고 변화해 나이를 먹어 버립니다. 일시적인 하나의 현상은 순간에 소멸하지만, 소멸하는 현상은 다음의 순간적인 현상을 낳고 소멸합니다. 죽음은 생으로 변환되고, 생은 죽음으로 변환됩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마음도, 물질도 사이클을 이루어 순환합니다.
마음을 봅시다. 하나의 생각을 끝마치면 마음이 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각이 끼어들면 낡은 생각은 사라집니다. 또 다른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물질이든, 마음이든, 모든 것은 멈춤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상」이라고 하는 논리입니다. 결국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고,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도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사물은 멈추는 일 없이 생멸이라고 하는 변화를 계속 합니다. 개인이 그것은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변화는 계속됩니다.
다시 태어나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모두 평등하게 태어나고 변합니다.
마음에는 욕구가 있고, 갈애로부터 집착이 있기 때문에 계속 생멸을 거듭합니다. 괴로워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에 의해 그 흐름을 멈출 수가 있습니다.
「화냄, 미움, 고민, 질투, 욕구」등 생각의 흐름도 알아차림이라는 조그마한 실천으로 일시적으로나마 멈추면, 우리는 즐거워하고, 편안해하고, 행복해합니다.
마치 마음에서 불타고 있던 불이 꺼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경험이 겹겹이 쌓이면 마음의 흐름의 완전한 멈춤만이 최상의 평온함이라고 납득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는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며, 그래서 지금 자유와 행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은 이 사실에서 예외이기를 바랍니다. 엄연히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자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자아 그 자체로 남아 있으려면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그런데 우리의 몸과 마음, 즉 나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어떤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에 자아가 없다는 것은 논쟁할 수 없는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아개념에 사로잡혀 가장 소중한 것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없는 실체에 대한 욕망)에 의해 고통 받고 윤회하는 줄 알면서도.
이 무지는 지금 이곳에서 저곳에서 끊임없는 삶과 죽음의 고통스런 순환을 되풀이 합니다. 이 무지가 알아차림 수행으로 지혜에 의해 대치되어 열반을 실현할 때 윤회의 과정은 끝납니다.
다시 또 어리석은 사람은 다시 태어남을 찾네.
다시 또 태어남이 오면서 죽음이 가까워지네.
다시 또 인간은 우리를 무덤으로 데려가네.
-- 상응부 경전 --
4.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윤회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이 생사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수행자이며, 세 가지 번뇌 즉 말과 몸의 행위로 표현된 거친 번뇌와, 마음속에 피어나 있는 번뇌, 그리고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기회만 있으면 바로 마음의 표면에 드러나는 잠재된 번뇌를 계․정․혜 삼학으로 제거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왜 이런 번뇌들을 없애야 하는가? 이 번뇌들을 제거했을 때 어떤 이익이 있는가?
이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번뇌 때문에 위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번뇌[漏, āsava] 때문에 인간은 해를 입고 있습니다. 번뇌가 있는 사람의 마음은 불타는 상태와 같습니다. 번뇌가 거듭 생겨나는 것은 불타고 있는 마음에 자꾸 연료를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 탐욕(lobha)이 생겨 점점 커지게 되면, 이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감각적 쾌락만을 탐닉하다가 결국 자신마저 해치게 됩니다. 탐욕이 생기면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때가 묻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워 보려고 기를 쓰면 그 일을 성공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수가 허다합니다. 그의 안중에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탐욕에 의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그는 곧 화를 냅니다.
성냄(dosa)이라는 번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남에 대해서 자비심이 없어서 남이 잘 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탐욕과 성냄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일어나면 결국 이 번뇌들은 그 자신을 태우고 말 것입니다. 탐욕과 성냄이 자리 잡게 되면 무지(moha)가 더욱 더 커져서 이 세 가지 번뇌[三毒心]로 인해 그의 마음은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번뇌가 점점 커지면 행동하고 말하고 마음 쓰는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행위[三業]에서 자제력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 즉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삿된 음행을 저지를 것이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나쁜 말, 즉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될 것이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인 탐욕과 악의와 사견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열 가지 악한 행위를 저지르다가 죽게 되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삿된 견해[斷滅論] 때문에 이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런 악행의 과보로 죽은 후에는 삼악도(三惡道:지옥․아귀․축생)에 떨어져서 많은 괴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그 씨 안에 있는 잠재된 싹이 피어나는 것과 같이 악행의 씨는 괴로움이라는 싹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이 번뇌들은 이번 생에서 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나쁜 과보를 가져오게 되어 수많은 문제와 괴로움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번뇌 때문에 저지른 악행으로 이러한 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또 번뇌 때문에 현재의 삶과 다음 생의 삶에서 괴로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이 번뇌를 완전하게, 영원히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번뇌를 없애 버리면 평온과 행복을 얻습니다.
번뇌를 없애는 방법은 다름 아닌 바로 계․정․혜 삼학입니다.
나무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독이 들어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이 나무는 적절한 조건하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독이 들어 있는 열매를 먹는다면 큰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나무가 점점 많아지고 무성해져서 열매를 많이 맺으면 맺을수록 점점 해가 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번뇌라는 씨를 뿌리면 독성 있는 악행이라는 열매가 열리게 되고 그 때문
에
이 생사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번뇌라는 씨앗이 있으면 독이 들어 있어서 괴로울 수밖에 없는 끝없는 생존이 거듭되어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나무를 심고 가꾸느냐에 따라 어떤 열매를 거두는가가 결정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의 씨를 심고 가꾸면 맛있고 유익한 열매가 열릴 것이고, 독이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의 씨를 심고 가꾼다면 맛없고 해로운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번뇌가 자라나면 반드시 해로운 열매를 맺게 되니 이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윤회의 굴레(vaṭṭa)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세 가지 윤회의 굴레란
첫째, 번뇌의 굴레(kilesa-vaṭṭa)
둘째, 업의 굴레(kamma-vaṭṭa)
셋째, 과보의 굴레(vipakka-vaṭṭa)입니다.
번뇌의 굴레란 무명(無明, avijjā), 갈애(渴愛, taṇhā), 집착(upādāna)을 말합니다.
업의 굴레란 바른 행위[善業, kusala kamma]와 나쁜 행위[惡業, akusala kamma]를 말합니다.
과보의 굴레란 업에 의해 맺어지는 결과를 말합니다.
먼저 번뇌의 굴레에서 무명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無知)이고 다른 하나는 삿된 견해(邪見)입니다.
눈에 백내장이 생기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무명에 의해 가려져 있으면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과 몸(nāma-rūpa)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은 지독한 백내장에 걸린 사람이나 장님처럼 전혀 앞을 못 볼 것이며(무지의 상태), 마음과 몸에 대해 조금 알고 있더라도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모르는 사람은 역시 백내장에 걸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흐릿하게 보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사견에 빠져 있는 상태).
부처님께서는 특히 감각적인 쾌락은 아주 위험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속의 범부들은 이 감각적 쾌락이 진정한 즐거움이고, 이외에 달리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쾌락의 대상이 보이거나 들리면 그것을 즐거워하여, 그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쾌락을 얻으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감각적 쾌락에 탐닉해서 빠져드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치명적이어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꿀이 가득 담긴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의 뚜껑이 조금 열려 있어 꿀이 약간 밖으로 흘러나와 있습니다. 이 꿀을 맛본 개미는 꿀맛에 취해서 병위로 기어 올라가 꿀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꿀을 한참 먹다보니 어느새 개미의 몸은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꿀 속에 빠져 버립니다. 달콤한 꿀맛만을 즐기다가 그만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꿀 속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꿀에 대한 지나친 탐닉에 빠졌기 때문에 개미는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보통 우리들이 좋아하고 또 얻으려고 애를 쓰는 감각적 쾌락은 바로 이 꿀과 같이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입니다.
무명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진정한 즐거움으로 여겨, 그 속에 빠져들어서는 나오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감각적 쾌락에만 빠지다 보면 만족을 얻지 못해서 점점 더 강한 쾌락을 찾게 됩니다. 만족을 모르는 쾌락에의 탐닉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스스로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5. 무엇이 윤회하는가?
《알라야라-마- 빅카웨- 빠자- 알라야라따- 알라야사무디따-, 가- 따타-가떼-나 아날라예- 담메-데-시야마-네- 숫수-야띠 소-땅 오-다하띠 안냐- 찟땅 우빳타-뻬-띠.》-- 앙굿따라 나까야 2권 128번--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래가 감각적 쾌락이 없는 담마(윤회를 거스르는 담마)를 설하면, 귀를 기울여 듣고 앎을 위해서 마음을 확립시킨다.”
이것을 해심밀경에서 번역한 것을 보자.
“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알라야를 좋아하고 알라야에 물들어 있고 알라야에 탐닉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이라는 <알라야>라는 일반적인 서술어가 변형되어 사용됨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 불교 때부터 일부에서 막연히 윤회의 주체로 간주되기 쉬웠던 식(識)이라는 개념을 후대로 내려오면서 간답바⟶中有로 구체화되었다가 결국에는 <알라야식, 아뢰야식>으로 한정되는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집착과 관련이 있는 <알라야>의 의미에 착안하여,
후대로 내려오면서 윤회의 주체와 관련된 의미를 <알라야>에 부여한 듯합니다.
즉 <알라야>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이란 개념에서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의 의미로 바뀌면서 잠재한 어떤 것, 저장하는 장소, 집착이 쌓인 곳이라는 의미로 변질되어 갑니다. 인간은 존재의 무상함에서 오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주체를 상정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윤회하는 주체자를 전제하려고 합니다.
불교 내부에서도 일부 수행자에 의해 윤회의 주체로서 제일 먼저 고려된 것은 식(識)이었습니다. 식이나 심(心)을 윤회의 주체로 고려하게 된 것은 그것이 육체 또는 개체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로 무상합니다. 의식 또한 변화하는 무상한 것으로서 다른 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유지되고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주하는 주체자가 되지 못합니다.
부파불교 당시 여러 부파는 불멸하는 자아라 할 만한 유사한 윤회의 주체를 상정했습니다. 유부의 실유 사상과 중유설, 독자부의 뿌드갈라, 경량부의 일미온, 화지부의 窮生死蘊, 대중부의 근본식 등, 나름대로의 이론을 내놓으며 무언가 주체적 지속이 가능한 정신적 주체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인도 전통사상에서는 불멸하는 윤회의 주체가 있어 그 주체가 본질은 변하지 않고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그들은 내면의 실체인 아트만과 외면의 실체인 브라흐만과의 동일성의 인식으로서 '절대적인 아'를 추구하여 해탈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아트만을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보아 부정하였지만 윤회는 받아들였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오직 '무아'와 '윤회'의 양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토대에 두고 '무아'와 '윤회'를 설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오히려, "만일 불변, 불멸의 실체적 자아인 아트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생멸이 없게 된다. 생멸이 없는 것은 윤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윤회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합니다.
불교에서는 주체자 없이 업을 통해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이 주장이 성립됨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불교 특유의 윤회설이 형성된 것입니다.
초기불교는 무아 윤회를 12연기와 의식의 연속 그리고 업 이론과 오취온 등을 통하여 설명하였는데, 사람들은 윤회의 원인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실제하는 것을 당연히 요구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유가행파의 유식설은 알라야식을 내세워 무아설을 계승하며 출발합니다.
유식설의 핵심 개념인 알라야식은 찰나적으로 상속하는 습기일 뿐, 불변, 불멸하는 본체는 아닙니다. 이런 찰나적인 것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의식의 연속적인 흐름, 즉 상속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같은 본체가 없더라도 알라야식이라는 습기만으로 윤회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알라야식은 종자라는 실체적인 개념을 적용하여 비유적으로 설명하면서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윤회의 주체로서 대체됩니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종자로 표현하고 종자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것도 그것이 결국 무아로 귀결된다는 전제 아래서만 용납됩니다.
허나 이것들이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언어적 구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개념이나 관념을 고정된 대상으로 집착하게 된다면, 이미 그것들은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라야식에 개입된 유아적 관념이나 개념도 무아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편적 구상으로서만 용납됩니다.
사실상 불교 사상의 무아관은 절대적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반대일 뿐이지, 상대적인 자아를 부정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무아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고, 반면에 윤회는 그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무아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고, 윤회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로 인해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범부중생이 이해하고 구사하는 방식으로 무아의 진실을 전달한 것이 윤회설입니다.
그러므로 무아설과 윤회설은 일맥상통하며 양립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윤회는 형이상학적인 불변하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속적인 관념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을 야기하면서 살아갑니다. 즉, 아트만이라는 불변하는 존재 자체를 거의 맹목적인 고정 관념으로 사고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은 주체자가 없는 윤회를 믿으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지은 행위, 즉 업의 전환을 통해 자기 해방이 가능함을 자각하게 하려는 데 불교 윤회설의 의의가 있습니다.
윤회는 허망한 자아 그 자체가 윤회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는 주체자는 없고 다만 오취온의 허망한 자아의식이 다른 요소들과 조건 지워져 '업'이라는 흐름에 의해 연속의 과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다음장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