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열반》에 대하여/ 이사장 빤냐완따 스님(교단밴드 연재 마지막 법문)

관리자
2021-05-12
조회수 2330


1.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열반(닙바나)의 실현> 입니다.

물질과 정신의 결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탐욕의 절멸·성냄의 괴멸·어리석음의 완전소멸이라는 열반의 경지를 <팔정도(八正道)수행>을 통해 부처님께서 몸소 증명해 보임으로써 드디어 우리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길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지능·신분·장애·빈부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예외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팔정도(8가지 바르게 닦는 법)를 수행하면, 사성제(4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깨달아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즉 고통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진리를 깨달아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법을 실천함으로써 마침내 궁극의 해탈·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정신적인 10가지의 결박, (중생들을 욕계나 색계에 얽어 묶어서 해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10가지 번뇌)

즉,

 1. 오온이 자아라는 그릇된 견해

2. 계율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계율형식에 집착하는 것

3. 법(삼보, 인과, 연기법)에 대한 의심

4. 감각적 욕망세계(욕계)에서의 탐욕

5. 성냄과 분노와 적개심

6. 감각적 욕망은 벗어났으나 색계, 즉 순수물질의 세계와 그 느낌에 대한 집착

7. 순수물질세계에 대한 집착은 벗어났으나 순수정신세계나 그와같은 인식에 대한 집착

8. 아만, 교만, 위축감, 열등감

9. 들뜸과 불안한 심리상태

10. 진리(사성제)에 대한 무지(어리석음)

 

등의 10가지의 결박을 모두 끊고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 이른 분을 아라한(아라한뜨)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뒤

선인들이 머무는 사슴동산에서 처음 다섯 제자들을 교화하시니 비로소 세상에는 부처님을 포함한 6아라한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60아라한, 80아라한, 1250아라한 ·····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아라한 중에는 1급 시각장애를 지닌 짝꾸빨라 스님,

바보라고 놀림 받던 쭐라 빤타까 스님,

그리고 7살 상낏짜 사마네라 등

5명의 어린 사미승도 있었습니다.

 

설령 여러분들이 아직 그와 같은 성자는 아닐지라도 경전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서 법을 하나하나 이해해 나갈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일상의 수행을 통해

꾸준히 그 가르침을 실천해 나간다면 누구나 실질적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성인의 과위에 들어 마침내 구경의 해탈·열반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2. 스님, 열반이 무엇인가요?

 

하루는 어느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스님, 열반이 무엇인가요?

불교에서는 부처님도 열반에 드셨다 하고 큰스님도 돌아가시면 열반하셨다고 하는데 죽음을 단지 불교용어로 열반이라고 하는 건가요?

 

육신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한 상태 호흡과 맥박이 완전히 멈춘 상태를 죽음이라 하지요.

열반은 그와 같은 물리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열반은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의 실천목표입니다.

<불교 = 열반사상>이라 할 만큼 열반을 이해하면 불교의 핵심을 아는 것입니다.

 

열반의 원음은 <닙바나> 입니다.

‘불어서 끈 상태’ 라는 뜻입니다.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3가지의 번뇌의 불이 모두 꺼진 상태,

불붙을 조건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열반>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가령 수행자가 깊은 삼매(집중)에 들어 멸진정(滅盡定)이라는 궁극의 선정상태가 되면 번뇌의 완전한 소멸과 함께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정신과 육체의 기능이 멈추기도 하는데 그러한 멈춤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 의미는


임종의 순간 모든 존재에게 다음 몸을 받아 태어나려는 재생의식(再生意識)이 작동합니다.

이생과 다음 생을 이어주기 때문에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라고 합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업에 따라 재생연결식과 함께 다음 생이 결정됩니다.

이것이 6도(천상·인간·수라·축생·아귀·지옥)윤회의 원리입니다.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남아있는 한 모든 존재는 6도의 세계를 윤회하게 됩니다.

이러한 윤회계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것,

다시는 태어남이 없는 것을 일컬어 <열반>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머무실 때 이미 열반을 성취하셨고, 인도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서 마침내 다시는 다음생의 몸을 받지 않는, 오온의 윤회를 영원히 끝내버린,

대열반에 드셨습니다.

 

“생사(生死)의 고된 여행은 끝났다.

슬픔과 오온의 현상으로부터 해탈하여

모든 얽매임을 다 파괴해버린 여래에게

이제 더 이상의 괴로움은 없다.”

 

 

3. 초기경전에 나타난 열반

 

사리뿟따여,

열반! 열반! 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도반이여,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을 ‘열반’ 이라고 합니다.

<열반에 관한 질문 경>(SN38:1)

 

비구들이여,

다음과 같은 세계가 있느니라.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달도 없고, 태양도 없는 그런 세계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르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느니라.

 

그것은

의지할 바를 여의고,

윤전하는 생을 여의고, 대상을 여의느니라.

이것을 일러 괴로움의 종식(열반)이라 하느니라.

『굿따까 니까야』

<우다나>‘빠딸리가마 품’①

 

비구들이여,

의존하는 자에게는 떨림이 있고,

의존하지 않는 자에게는 떨림이 없느니라.

떨림이 없으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기울어짐이 없느니라.

기울어짐이 없으면, 오고 감이 없고,

오고 감이 없으면, 나고 죽음이 없느니라.

나고 죽음이 없으면,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중간 세상도 없느니라.

이것을 일러 괴로움의 종식(열반)이라 하느니라.

『굿따까 니까야』

<우다나>‘빠딸리가마 품’④

 

한때 부처님께서 사와띠성의 제따와나 수도원에 머무실 적에 유행자 밧차곳따에게 열반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밧차곳따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른다면, 그대는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알겠는가?

 

네, 세존이시여, 제 앞에 불이 타오른다면

제 앞에 불이 타오른다고 알 것입니다.

 

밧차곳따여,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르는가?

라고 묻는다면, 밧차곳따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 불은 섶과 나무라는 때감을 조건으로

해서 타오릅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밧차곳따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대는

그대 앞에 불이 꺼졌다 라고 알겠는가?

 

네, 세존이시여, 제 앞에 불이 꺼졌다면

제 앞에 불이 꺼졌다 라고 알 것입니다.

 

밧차곳따여, 그대 앞에 불이 꺼졌다면

그 불은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의

어느 방행으로 간 것이냐고 묻는다면

밧차곳따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그 불은 섶과 나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르고, 그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때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이 없으므로 꺼져버립니다.

 

그렇다. 밧차곳따여,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물질[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써

여래(열반)을 묘사하지만 여래(열반)에겐 이미

그 물질[느낌, 지각, 형성, 의식]은 끊어졌나니,

여래(열반)는 물질[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뿌리를 끊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되느니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 경>(MN72)

 

 

4. ‘갈애의 멸진’이 열반이다.

 

세존이시여,

사람들이 ‘중생, 중생’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중생입니까?

 

라다여,

물질[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한

욕구, 탐욕, 즐김, 갈애가 있나니, 거기에

붙고 거기에 달라붙는다고 해서 중생이라 하느니라.

라다여, 예를 들면

사내아이들이나 여자아이들이

모래성을 쌓으면서 노는 것과 같느니라.

그들이 모래성에 대해서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욕구를 여의지 못하고 애정을 여의지 못하고

갈증을 여의지 못하고 열기를 여의지 못하고

갈애를 여의지 못하는 한 그들은

모래성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으로 장난을 치고

귀하게 여기고 내 것으로 삼느니라.

 

라다여, 그러나

사내아이들이나 여자아이들이

모래성에 대해서 탐욕을 여의고

욕구를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기를 여의고

갈애를 여의면 그들은 모래성을

손이나 발로 뭉개버리고 흩어버리고

부숴버리고 놀이를 끝내버리느니라.

라다여, 그와 같이 그대들도

물질[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뭉개버리고

흩어버리고 부숴버리고 놀이를 끝내버리고

갈애의 멸진을 위해서 도를 닦아라. 라다여,

<갈애의 멸진>이 바로 ‘열반’이니라.

<중생 경>(SN23:2)

 

 

5. <2가지> 열반의 세계

 

비구들이여, 2가지 열반의 세계가 있느니라. 즉

<유여(有餘)열반계>와 <무여(無餘)열반계>이니라.

 

비구들이여,

<유여(有餘)열반계>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아라한인 비구가 있느니라.

그는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이루었고,

해야 할 일을 마쳤고, 짐을 내려놓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였고, 존재의 결박을 끊었고,

올바른 궁극의 앎으로 해탈하였느니라.

그에게는 5가지 감각기관이 아직 존재하고,

사라지지 않았음으로, 그는 쾌와 불쾌를 경험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지만 그의 탐욕은 부서지고,

성냄은 부서지고, 어리석음 또한 부서졌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을 <유여(有餘)열반계>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무여(無餘)열반계>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아라한인 비구가 있다.

그는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이루었고,

해야 할 일을 마쳤고, 짐을 내려놓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였고, 존재의 결박을 끊었고,

올바른 궁극의 앎으로 해탈하였다.

비구들이여, 그에게 모든 느껴진 것은

환희의 대상이 아닌 청량한 것이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을 <무여(無餘)열반계>라 하느니라.

<열반의 요소 경>(Itivuttaka·2)

 

 

6. 열반은 ‘최상의 행복’이다

 

마간디야여, 나는 일찍이 재가에서 살 때에 5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대상을 갖추고 구족하여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생성이나 소멸이나 유혹이나 위험이나 여읨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타는 듯한 고뇌를 버려서 감각적 쾌락의 갈증을 버리고 안으로 마음의 고요를 성취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떠나면, 천상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므로 그 보다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간다야여, 무릇 수행자나 성직자로서 갈증 없이 안으로 마음의 고요를 성취했거나 성취하고 있거나 장차 성취할 자라면 누구든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생성이나 소멸이나 유혹이나 위험이나 여읨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타는 듯한 고뇌를 버려서 갈증 없이 안으로 마음의 고요를 성취했거나 성취하고 있거나 성취할 것입니다......

 

“병 없음이 최고의 이익이며,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네.

8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은

불사(不死)에 이르는 길이라네.”

<마간디아의 경>(MN75)

 

세존께서 대열반에 드시자 대열반과 함께 두려움과 공포의 전율을 일으키는 큰 지진이 있었으며 천둥번개가 내리쳤습니다. 세존께서 대열반에 드시자 대열반과 함께 사함빠띠 범천은 이런 게송을 읊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결국 몸을 내려놓는구나.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스승

힘을 갖추셨고 바르게 깨달으신 여래

이 분 이와 같이 완전한 열반에 드시는구나.

 

세존께서 대열반에 드시자 대열반과 함께 신들의 왕인 삭까 천왕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습니다.

 

“형성되어진 것은 실로 무상하나니 (諸行無常)

이것이 생멸의 법칙! (是生滅法)

생기고 사라짐이 멈출 때 (生滅滅以)

그 적멸(열반)이야말로 진정한 행복! (寂滅爲樂)”

<완전한 열반 경>(DN16)

 

 

7. 열반에 도움이 되는 도닦음

 

사리뿟따여, 그러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닦음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그것은 바로

8가지 구성요소 된 성스러운 도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닦음입니다.

<열반에 관한 질문 경>(SN38:1)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열반의 실현을 돕는 도닦음에 대해 설하리라.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눈은 항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그러면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관찰하는 것은

바른 관찰인가, 그른 관찰인가?”

“그른 관찰입니다.”

·········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 염오하고, 형색에 대해서 염오하고,

눈의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눈의 감각접촉에 대서도 염오하고,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느니라.

·········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서 해탈하게 되느니라.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고,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알게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보는 것이

열반의 실현을 돕는 도닦음이니라.”

<열반에 도움이 됨 경>(SN35:150)

 

 

8. 오온을 ‘죽음의 마왕’으로 보라!

 

한때 부처님께서 사와띠성의 제따와나 수도원에 머무실 적에 라다 존자가 부처님께 예를 갖추어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아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들이 ‘마라, 마라’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마라(마왕, 죽음)입니까?

 

라다여, 물질[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 있을 때

마라가 있고, 죽이는 자가 있고, 죽임을 당하는 자가

있느니라. 라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는

물질[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마라로 보고

죽이는 자라 보고, 죽임을 당하는 자라 보고,

병이라 보고, 종기라 보고, 쇠화살이라 보고,

통증이라 보고, 지긋지긋한 통증이라고 봐야 하느니라. 이렇게 보는 자들은 바르게 보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그런데

바르게 보는 것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라다여, 바르게 보는 것은 싫어함을 위함이니라”

“세존이시여, 그러면 싫어함는 무엇을 위함입니까?”

“라다여, 싫어함은 탐욕의 빛바램을 위함이니라.”

“세존이시여, 탐욕의 빛바램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라다여, 탐욕의 빛바램은 해탈을 위함이니라.”

“세존이시여, 해탈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라다여, 해탈은 열반을 위함이니라.”

“세존이시여, 열반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라다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 벼렸구나.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라다여,

청정범행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청정범행은 <열반>을 궁극으로 하고

청정범행은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니라.”

<마라 경>(SN23:1)

 

 

9. 열반은 스스로 증득해 알 수 있다.

 

한때 자눗소니 바라문이 세존을 찾아뵙고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고따마 붓다시여, <열반>은 스스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고따마 붓다시여, 얼마만큼 <열반>은 스스로 보아서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되고, 지혜로운 자들이 각자 알아서 하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욕망(성냄, 어리석음)에 물들고, 욕망(성냄,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정신이 빠진 자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함으로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게 되느니라. 욕망(성냄, 어리석음)을 버렸을 때 그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느니라. 바라문이여, 이렇게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되고, 지혜로운 자들이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니라.

 

바라문이여, 그는 욕망이 남김없이 다한 것을 경험하고 성냄이 남김없이 다한 것을 경험하고 어리석음이 남김없이 다한 것을 경험하느니라. 그러므로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되고, 지혜로운 자들이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니라.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붓다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붓다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길을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고따마 붓다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붓다님께 귀의하옵고, 담마와 비구상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귀의하옵니다.

<열반 경>(AN3:55)

 

 

10. 불안한 잠, 완전한 잠

 

《불안한 잠》

 

월출산 너머 외할머니 산소엔

금잔디가 자라고 금잔디 밑엔

흰눈썹 흰머리가 조금씩은 덧자라서

삼베올 사이사이 뚫고 나올 때

나무뿌리는 빨판 뻗어

외할머니의 젖을 물고

이제 방금 분열 종료한 세포들

미생물들이 떼 몰려와서

어디론가 데불고 간 다음

거기,

또 한 분의 외할머니가 길을 잃고

한 덩이 혼불 되어 밤새도록

우리들의 창가를 떠돈다면

사실 ‘완전한 잠’이란 이 우주엔 없다.

 

<시집『스님,어디로 가세요?』

(1992, 가을) 중에서>

 

《완전한 잠》

 

부처님께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아침인사를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밤새

편히 주무셨사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여의어서

맑고 편안하게 빈 마음이 된 자,

생멸이 없는 도를 바르게 알아

<열반>의 경지에 이른 자라야만이

길이 ‘완전한 잠’을 이룰 수 있느니라.”

 

<수닷따 경>(SN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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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서 한국테라와다불교 밴드 법문 연재를 일단락 하겠습니다. 교단 소속 스님들의 다양한 감로법문이 올려 질 수 있도록 의논하겠습니다.

지난 5월 6일자 법문 말미에 잠시 언급했듯이, 현재 교단 스님들의 법문이 매우 귀한 편이니 녹취든 영상이든 글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확보 되는대로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직접 올려주시거나 <마하나마 고문>님 또는 <꾸살리 총무>님을 통해 올리셔도 좋겠습니다)

 

테라와다불교가 이 땅에 깊고 넓게 뿌리내릴 수 있기를 염원하며 


불멸 2565(2021). 5.13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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