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빠낀나까 쩨따시까(pakiṇṇaka-cetasika) 부분입니다. 잡심소라고 풀이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공통적인 심소는 여러분들이 설혹 모른다 해도 어차피 일어나지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중요도를 따질 것 같으면 그것보다도 오히려 이 잡심소가 수행에서는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의 공통되는 심소와 이 잡심소의 차이점은 뭡니까? 일어나기도 하고 안 일어나기도 하거든요. 근데 어쨌든 둘 다 동타심소란 말입니다. 나쁜 심소에서도 일어나고 좋은 심소에서도 일어나진단 말입니다. 근데 이 잡심소 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수행에서 가장 많이 들먹여지는 문제고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을 좋은 심소 쪽으로 수행에서 연결을 시키면 빨리 결과를 얻고 그렇지 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립니다.
그래서 이 잡심소라고 하는 것은 ‘좋은 심소와 함께 하면 선심소가 되고, 나쁜 심소와 함께 하면 악심소가 되는 동타심소입니다.’
맨 처음에 듣는 게 이 위딱까(vitakka) 부분입니다. 위딱까는 조금 있다 설명하겠지만 물질에 얽매여가지고 돈 버는 방법만 자꾸 생각한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로바(lobha), 탐욕하고 연결돼있는 거죠? 사업하는 분들은 틀림없을 겁니다. 뭐하면 돈이 눈에 보인다고 그래. 그런 쪽으로만 연결될 것 같으면, 그런 쪽만 자꾸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걸 뭐라 그래요? 까마 위딱까(kāma vitakka)라고 그럽니다.
근데 그것보다는 여러분들 같이 불재일날, 뭐 안되면 팔계지키고 이럴려고 열심히 절에 찾아오고, 또 수행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하고, 또 안 그러면 넘어가가지고 출가할려고 하고, 탐욕의 위험을 알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꾸 노력을 하고 그런 생각을 갖다가 많이 가지는 그런 것은 뭐라 그럽니까? 넥캄마 위딱까(nekkhamma vitakka)라 그러죠? 조금 전에는 까마 위딱까였는데 이번에는 넥캄마 위딱까 정반대가 돼버리는 거죠.
똑같은 위딱까 인데 어떤 경우에는 선심소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불선심소가 돼버리게 됩니다. 또 막 나쁜 악의를 가져가지고 누구를 죽이고 싶다든지, 어떤 걸 때려뿌시고 싶다든지 이런 것들은 뭡니까? 도사(dosa)에 근거를 하는 거죠?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건 뭡니까? 그걸 브야빠다(byāpāda) 위딱까 라고 그럽니다.
근데 그렇지 않고 멧따(metta)-자애를 자꾸 방출할려고 하는 걸 뭐라 그럽니까? 브야빠다 하고 반대죠? 아브야빠다(abyāpāda) 위딱까 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굴 학대한다든지 죽일려 한다든지 해롭게 할려고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 이런 걸 위힝사(vihiṁsā) 위딱까 라고 그럽니다. 반대되는 건 뭡니까? 아힝사(ahiṁsā)죠? 아위힝사(avihiṁsā)라 해서 까루나(karuṇā) 라고 하는 동정과 연민의 정을 자꾸 계발할려고 하고 이런 것들입니다.
이렇게 맨 처음에 시작하는 위딱까든 그 뒤에 이루어지는 것들이든 자칫 잘못하면 나쁜 심소와 결합을 해버리고, 그걸 바르게 쓸 거 같으면 선심소와 결합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릇된 잡심소는 버려버리고 바른 잡심소를 일으켜야 만이 지혜를 증가시키고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끔 한다 하는 겁니다.
어쨌든 이렇게 악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선으로 갈 것이냐 하고 결정하는 것은 뭡니까? 뭔가가 결정해야 내가 선이 됐든 악이 됐든 내가 간단 말이라. 그걸 갖다가 아디목카(adhimokkha)라 그럽니다.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거라. 아디목카도 똑같이 여기 잡심소에 들어갑니다.
그다음에 위리야(vīrya) 노력이라는 것, 위리야라고 하는 것의 이익은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살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일 많이 일어나고 잘된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것도 없죠?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위리야가 있는 사람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하고 부처님이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 위리야도 똑 마찬가집니다. 좋은 방향으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나쁜 방향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삐띠(pīti)라고 하는 것, 기쁨이나 만족하는 감정이죠? 어쨌든 이 기쁨도 나중에는 수행에서는 큰 장애로써 작용합니다.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닙바나를 체험하고 싶을 때, 또는 자비를 널리 베풀려고 할 때, 좋은 행위를 하기를 원하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뭡니까? 찬다(chanda)의 영역에 속하죠. 원함, 바램이라는 것으로 찬다의 영역에 속합니다.
어쨌든 이런 여섯 가지가 잡심소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지만 마음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죠? 멧따가 여러분들 마음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죠? 위딱까가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죠? 찬다가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일어날 때도 있고 안 일어날 때도 있다 하는 거라. 그래서 잡심소와 마음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심소들 하고의 차이점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공통되는 심소 보다는 오히려 이 잡심소를 잘 활용을 해야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중요한 역할들을 하는 것이 이 잡심소 부분입니다.
첫째 되는 부분인 위딱까 부분을 한번 봅시다. ‘vitakka (위딱까 尋): 겨냥, 생각, 논리’
스님이 풀이해놓기는 ‘겨냥’이라고 해놨습니다. 상깝빠(saṅkappa)라는 것을 보통 겨냥이라고 표현을 하죠? 수행에서는 상깝빠 하고 위딱까 하고는 거의 같은 기능으로써 작용을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 위딱까를 표현해 놓을 때 ‘일으킨 생각’, 보통 ‘생각’ 이런 식으로 합니다. ‘생각’도 적합한 용업니다. 그다음에 논리적인, 논리정연하게 한다고 할 때 그 ‘논리’라는 개념들을 씁니다.
스님은 가장 그래도 우리말에 적합한 게, 특히나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단어는, 위딱까의 개념은 ‘겨냥’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래도 그것이 완전하게 위딱까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되도록 위딱까, 위짜라라고 하는 개념은 그냥 그대로 써주는 것이 좋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맨 처음에 위딱까는 ‘인식 대상을 마음에 싣는 기능. 동시에 마음의 추론을 담당함.’ 그렇게 적어놨습니다.
밤이 되면 보통 잠을 자죠? 근데 생각할 것이 많아가지고 생각이 많으면 잠이 옵니까? 잠 안 오죠? 아무리 피곤해도 몸이 피곤하든 마음이 피곤하든 해도 생각이 많으면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제발 스님, 나 좀 잠 좀 자고 싶은데 제발 잠 좀 재워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생각 안 하면 잠이 옵니다. 생각을 하니까 잠이 안 오는 거라. 그런 거를 뭐라 그럽니까? 바로 위딱까의 기능이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위딱까 라는 기능이 마음을 계속 새로운 대상에게 보내주기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생각을 굴린다고 그러죠? 생각을 열심히 굴러가게 해주는 것 그것이 위딱까 입니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이 향하도록 대상에 보내주는 기능 그것이 위딱까 입니다. 근데 그 대상이 자꾸자꾸 늘어나죠. 그러니까 그 대상 대상마다 계속적으로 보내주는 것들이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생각을 자꾸 굴린다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위딱까의 기능입니다.
근데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보통 뭔가 결론이 나죠? ‘아, 그렇구나’ 하고 선명하게 뭔가 탁 압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결론이 나게 되면 잠이 오게 됩니다. 위딱까가 계속적으로 기능을 안 하죠. 또는 선명해질 것 같으면 그 환희로 인해서 아주 깨끗해지고 맑아지죠? 그때도 위딱까는 기능하지 않습니다.
매우 선명하게 됐을 때는 위딱까는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초선에서만 드러나지는 것이 위딱까, 위짜라다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계속적으로 설명해나가면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이 이해가 돼나갈 겁니다.
그래서 보통 수행에서는 위딱까 하고, 위짜라 하고 같이 얘기들을 합니다. 마음을 대상에 보내주는 것이 위딱까인 것이고, 대상에 보내주는 것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 위짜라 입니다.
보통 종을 치면 종 울림이 ‘우우우우웅’ 하고 일어납니다. 처음에 종을 땅 쳤을 때는 그 소리가 둔탁합니다. 그런데 뒤에 울림은 여러분들 듣기에도 좋게 미세하게 울립니다. 그래서 위딱까, 위짜라는 종을 치는 것과 종의 소리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종을 처음에 딱 쳤을 때가 위딱까에 해당되고, 그 종소리가 쭈우욱 울리는 것이 위짜라에 해당이 됩니다.
새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크게 날개짓을 확 해가지고 올라갑니다. 근데 올라가면 어떻게 합니까? 하늘로 올라가고 나면 날개짓을 안 합니다. 저절로 씨익 가집니다. 처음에 날개짓을 크게 할 때 이런 것을 위딱까 라고 하고, 그리하지 않아도 살금살금 나아가지는 것이 위짜라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수행에서는 위딱까와 위짜라를 동시에 써주기도 합니다.
이 위딱까는 대상에 바르게 겨냥을 해줄 수 있어야 되는 거죠?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뭔가 하는 것을 갖다가 헤아려줄 줄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마음에 가져오게 하고 마음에 떠올려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위딱까 라는 개념을 갖다가 상깝빠(sankappa), 딱까(takka), 압빠나(appaṇā), 아비니로빠나(abhiniropana) 이런 용어들 하고 거의 같은 용어로써 아비담마에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위딱까는 그런 뜻이다 하는 걸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밑에 한 번 더 봅시다.
‘눈에 무엇인가 보이는 대상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순간 「보였다」라고 하는 실감을 만들어 내는 안식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무엇이 보였는가는 모릅니다. 다음 순간에 「꽃이다」 「의자다」와 같이 본 대상을 인식합니다.’
처음에 보여졌을 때 하고 그것이 완전하게 인식했을 때 하고의 사이에 ‘요게 뭔가’ 하고 처리해줄 수 있는 기본적인 기능이 있다는 거라. 그 기본적인 기능이 뭐냐 하면 위딱까 라는 거라.
자,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이. 대상, 그리고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앞에 있는 대상과 눈이 접촉하죠? 접촉을 해가지고 탁 봤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본 느낌이 탁 떠오르죠? 그러면 느끼고 나서 우리는 보통 ‘아, 이게 뭐다’하는 걸 지각을 하죠? 이 지각한 것에 대해서 ‘아, 이게 뭐지’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위딱까 입니다. 생각하고 나선 완전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인식한 것에 대해서 좋은 경험들이 있을 것 같으면 좋은 방향으로 넘어가지고 나쁜 방향이면 나쁘게 넘어가집니다. 망상쪽으로 흘러가버리고.
그래서 대상과 마음이 만나는 것이 촉이 되고, 그 촉-팟사(phassa)로 인해서 웨다나(vedanā)-느낌이 일어나집니다. 스님이 무수하게 얘기했던 부분입니다이. 그 느낌으로 인해서 산냐(sañña)-지각하는 것들, 산자나띠(sañjānāti)-지각하는 것들이 일어나지고, 지각으로 인해서 생각이 일어나지고, 이게 위딱까 입니다.
그 위딱까로 인해가지고 그다음에 발전하는 게 뭡니까? 망상 빠빤짜(papañca)라고 하는 망상 쪽으로 흐르는 것인가, 아니면 대상 쪽으로 흐를 것인가 하고 구분을 짓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망상을 일으키기 직전의 상태가 위딱까 라고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위딱까가 좋은 경우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고, 나쁜 경우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위딱까를 버리라고 나와 있는 경전도 있고, 어떨 때는 위딱까를 계발해라 하고 얘길 하는 경전도 있습니다.
근데 아까 위딱까가 까마 위딱까, 브야빠다 위딱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똑같은 위딱까입니다. 나쁜 방향의 위딱까지만. 근데 이런 욕망이라든지 분노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사유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어떤 대상에 몰입한다든지, 내가 흥미를 일으키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흥미를 일으켜야 만이 그 대상에 몰입을 하고 뭐 분노를 일으키든 욕망을 일으키든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관심과 흥미를 일으키게끔 할려면 어떻
게 해야 됩니까? 마음이 약간 들뜨지 않으면, 마음에 약간 파동이 있지 않을 거 같으면 흥미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위딱까라 하더라도, 바른 방향의 위딱까라 하더라도 그런 미세한 떨림이 없을 거 같으면 그건 위딱까가 될 수가 없는 거라.
그럼 다른 방향으로 얘기하면 수행에서 내가 대상에 완전하게 밀착해가지고 아무런 경계도 없이 평온한 상태가 된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건 이미 위딱까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그러면 대상에 그냥 일치되어 가지고 나아가기 때문에 그건 이미 자나(jhāna)쪽으로 빠져버린 거라.
이 위딱까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제일선정(第一禪定)에서 일어나지는 것이다. 약간의 떨림이 있어야지 만이, 그게 나쁜 방향으로 넘어가버리면 욕망이나 악의나 이런 방향으로 넘어가지지만, 바른 방향으로 넘어가버릴 것 같으면 수행에 얼마든지 좋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삼매에 들려고 노력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 노력을 할 거 같으면 이 위딱까, 위짜라를 계발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은 어떤 면에서는, 특히나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위딱까, 위짜라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을 버려버리는 상태에서는 이미 이선정(二禪定) 이상으로 넘어가버립니다. 물론 아라한에 이르는 방법은 후자의 방법으로 이르는 길도 있습니다.
보통 아라한에 이르는 방법이 네 가지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를 크게 구분하면 후자의 방법과 전자의 방법이 있습니다. 순수 위빳사나를 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있고, 사마타 수행을 결부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나눠가지고 서로 조합해가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어쨌든 크게 두 가진데 순수 위빳사나를 하는 여러분들이 할 거 같으면 틀림없이 위딱까, 위짜라로써 깨달음에 이르도록 만들어나가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게 전통적인 위빳사나 수행방법입니다. 그래서 얼마만큼 이 위딱까, 위짜라가 중요한지 다시금 알아야 됩니다.
자, 위딱까(vitakka)의 위(vi)는 ‘명확하게, 세세하게’ 라는 의미이고 딱까(takka)는 ‘생각, 사색, 논리’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의미로써의 위딱까는 ‘추론’이라는 뜻입니다. 추리해서 생각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근데 수행에서의 이 위딱까의 의미는 ‘바른
겨냥’ 삼마상깝빠(sammā-saṅkappa)의 의미를 가리킵니다. 그래야만이 이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일어난다는 연기의 법에 근거한 바른 이해가 생겨나집니다. 그래서 그런 사성제와 연기의 법을 따라가지고 일어나게끔 하는 것도 이 위딱까 입니다.
‘대상을 마음에 싣는다’ 하고 주석서에서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꽃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벌이 이 꽃을 봤단 말입니다. 그러면 꽃을 향해서 날아가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이 꽃에 있는 꽃술을 탁 따먹습니다. 따먹고 나서 그 벌은 어떻게 합니까? 그 주위를 윙윙윙윙 이러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따먹죠. 벌이 꽃을 향해서 날아가는 것 이것을 수행에서는 바른 겨냥이라고 그럽니다. 대상이 여기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그 대상을 향해서 날아가는 것 이게 바른 겨냥입니다. 위딱까의 의미가 바로 이 ‘바른 겨냥’의 의미로써 쓰여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그걸 바르게 겨냥 하고 나서 지속적으로 그걸 먹게 되는 거를 ‘위짜라(vicāra)’ 라고 그럽니다. 그렇게 벌에다가 비유를 해놓기도 합니다.
위딱까라고 하는 기능이 일반적인 논리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죠?
‘눈을 떠서 무엇인가를 본 순간, 「붉은 장미꽃이다」라고 인식해 버립니다. 「붉은 장미꽃이다!」라고 하는 말은 이렇게 인식하고 나서 그 후에 덧붙일 수 있습니다. 이른바 「말」을 하기 이전에, 논리적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라고 스님이 적어 놨습니다.
생각을 한다고 해봅시다. 어떤 특정한 생각. ‘이게 뭐지’ 하고 한국에서 잘하는 화두를 해도 됩니다. 어떤 대상에 사무치게 빠져든다고 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 대상과 일치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워져 버립니다. 대상과 딱 직면해 있기 때문에, 대상을 딱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때도 화두 들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때는 화두 들고 있는 사람 없습니다. 아니면 특정한 어떤 생각, 그거 들고 있는 경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대상과 직면해가지고 일체가 되어 있을 때는 그걸 안 들고 있습니다. 그 속에 그냥 묻혀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는 특정한 생각, 아니면 특정한 언어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수행에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대상에 마음을 딱 일치시켜 가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순일하게 쭉 해나갈 때, 명확하게 탁 일치가 될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명칭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명칭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 거 혹시 경험해본 적 있습니까? 이렇게 명칭이 떨어져 나가버린 상태에 있는 경우에는 이미 대상에 몰입돼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선정(二禪定) 이라고 하는 것이 그와 마찬가집니다.
위딱까와 위짜라가 존재를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명칭을 가지고 대상에 끊임없이 일치시켜주고, 일치시켜주고 하는 노력들을 해나가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는 특히 한국불교 하시는 분들이나 이런 분들 보면 대상에 몰입을 할 거 같으면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냥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고통이라든지 이런 느낌조차도 없습니다. 근데 이것이 고통이구나 하는 걸 모를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더 발전해질 수 없습니다. 수행에서 고(苦)를 알아야 집(集)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멸(滅) 도(道)로 넘어가지는 건데 고(苦) 자체를 모른다는 거라. 삼매의 위험성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히려 이 위딱까를 알기에는 더 수월한 상태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여덟 살 때 잠부디따 잠부나무 아래에서 했던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하고 뒤에 회상을 합니다. 그때 했던 게 뭡니까?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여덟 살 때 한 것입니다. 뒤에 많은 노력을 추가해서 많은 노력을 해봤지만 결국에는 그것은 선정으로 가는 길이었지 깨달음하고는 관계없는 길이었다 하고 그걸 뒤늦게 육 년 후에 발견한 겁니다.
그러고 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한 것이 뭐였습니까? 여덟 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밭매는 경작하는데 가서 나무 아래 앉아서 했던 호흡 그거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대상을 알아차려나가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부처님은 제일선정(第一禪定)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분입니다. 여덟 살 때 했던 것들을 여러분들이 못할 수 있겠습니까? 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마하 삿자까라고 하는 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경작하시던 밭고랑 염부수나무 아래에 앉아서 욕망으로부터 떠나고, 유익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떠나 위딱까와 위짜라를 지닌 채 넥캄마-떠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문 적이 있던바 바로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었다’고 부처님이 회상하면서 한 경전 구절입니다.
그게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거라.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떠난 것, 그것을 떠나서 대상에 마음을 일치시켜주는 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됐다.
자, 그래서 ‘이 기본적인 논리를 간단하게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고 적어놨습니다.
오늘도 신발 벗고 왔죠? 자기 신발 어떻게 벗고 왔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봐요? 어떻게 벗었어요? 지금 어떻게 벗었는지 기억하는 사람? 왼발부터 벗었는지 오른발부터 벗었는지 기억하는 사람? (대답)
오른발부터 먼저 벗었어요? 오른발 벗고 나서 왼발 벗고 올라왔어요? 분명하게 기억합니까? 그럼 위딱까를 했구먼.
다른 사람? 기억 못 하는 사람은? 어찌 벗었는지 모르는 사람?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봐. 다 그냥 왼발부터 벗었는지 오른발부터 먼저 벗었는지 모르죠? (대답)
그럼 거기는 무슨 발부터 먼저 벗었어요? (대답) 왜 오른발부터 먼저 벗었습니까? 습관적인 겁니까? 그거는 틀린 얘기입니다. 오른발부터 벗은 이유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위딱까 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수 있을 거 같으면 ‘왜 내가 오른발부터 벗었지’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보십시오. 그러면 위딱까가 드러나 집니다. 이번에는 오른발부터 먼저 벗었다, 다음에는 왼발부터 먼저 벗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걸음을 뗄 때 오른발부터 먼저 뗄 때가 있고, 왼발부터 먼저 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 발이 먼저 떼지는가? 하는 거라. 그 동작에서.
바로 그게 원인입니다. 그 원인을 알 것 같으면 위딱까를 알 수 있습니다. 위딱까라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습관적으로 했다는 것은, 그거는 무의식적으로 했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걸 먼저 벗었습니다.
(질문)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음에서 먼저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절대 오른발부터 먼저 벗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먼저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오른발부터 먼저 내려지는 겁니다. 그 마음에서 먼저 명령을 탁 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위딱까 입니다.
어쨌든 마음을 대상으로 향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위딱까 라는 것이. 그래서 그 대상이 드러나도록 해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먼저 여러분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들을 유심히 살펴볼 것 같으면 틀림없이 위딱까를 발견해나갈 수 있습니다.
자, 수행에서 한번 봅시다. 해보십시오.
앉아서 ‘일어남’ ‘사라짐’ 한번 해보십시오. 자, 편안하게 하고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해보십시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대상과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관찰하는 마음이 딱 맞아떨어지도록 겨냥하고 조준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것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수행은 절대 해나갈 수 없습니다.
맞아떨어지지 않아도 수행은 할 수는 있습니다. 근데 그것은 대상 하고는 관계없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근데 움직이는 대상과 관찰하는 마음이 딱 맞게 떨어질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바르게 대상을 겨냥을 해야 됩니다. 그 겨냥하는 것이 뭡니까? 위딱까 입니다.
겨냥을 하고 나면 뭐 합니까? 마음이 거기에 가 있도록 밀어줘야 됩니다. 그걸 노력하는 힘이라고 그럽니다. 위리야(vīriya)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 대상에 끊임없이 밀착하게 만들어주는 것. 겨냥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겨냥하고 조준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
수행은 사실은 이 두 가지로써 처음엔 다 시작을 합니다. 상깝빠(saṅkappa) 하고 위리야(vīriya) 라고 하는 것 두 가지만이 처음에는 다 시작하는 단계에서 있게 돼 있습니다. 이것만 열심히 노력할 것 같으면 수행은 처음엔 다 시작해 나갑니다.
그래서 수행은 뭐라 그럽니까? 대상을 벗어나면 자꾸 끄잡아 들이라고 그러죠? 끄잡아 들이라는 건 뭡니까? 그마만큼 노력을 하고 대상을 바르게 겨냥하라는 얘깁니다. 겨냥하고 노력하고 하는 것만 지속적으로 계속하라는 겁니다. 일반적인 사고하고는 다르죠?
지식적인 생각은 이게 아닙니다. 이거는 직접적으로 행해나가는 것들이라.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관찰하는 대상을 바르게 겨냥하여서 마음을 대상에 맞추는 것, 이것이 위딱까 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위딱까하고 위리야가 있고 나서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지속적으로 되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마음이 그 대상위에 계속적으로 지탱해주도록 하는 것 이것이 위짜라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위짜라가 있을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속적으로 겨냥하고 힘을 쏟아야만이 지탱해나갑니다. 그래서 위딱까와 위리야가 없을 것 같으면 위짜라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상에 지탱을 해주게 되면 정확하게 대상에 마음이 일치하게 됩니다. 일치하게 되어서 일치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퍼뜩 기쁨(pīti)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 내가 참 수행 잘했구나’ 하고 만족하게 되고 또 행복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고요하게 대상에 마음에 모여져 있고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에깍가따. 이것이 초선(初禪)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초선에서는 위딱까- 대상에 바르게 겨냥을 하고, 그 겨냥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지탱되게 하는 위짜라가 있게 되고, 위딱까 위짜라가 있어져서 바르게 내가 대상과 마음이 일치됐다는 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있고, 그 기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감들이 있고, 그래서 마음이 대상에 고요하게 탁 가라앉았다는 에깍가따- 심경일성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가 초선에서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끊임없이 대상에 마음을 겨냥시키는 알아차림, 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이 맞아떨어지도록 겨냥해주는 것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위딱까 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을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을 알지 못하면, 대상에 바르게 겨냥하지 못하면 그건 알아차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명확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겨냥을 해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훈련들을 갖다가 계속 해줄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은 자연스럽게 민첩하고 활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게을러지고 나태해지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방어해나갑니다. 나쁜 방향으로 욕망이나 악의나 이런 것들로 넘어갈려고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바른 방향으로 넘어와 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내가 이 위딱까를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망상으로 빠질 것이냐, 아니면 바른 겨냥 바른 대상과 일치시켜줘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할 것이냐 하는 것이 판가름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과 대상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이 위딱까다 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딱까와 밀어주는 힘이 있어져서, 마음이 관찰대상에 모아져서,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것, 이 위짜라가 있으면 당연히 카니까 사마디(khaṇika-samādhi) 찰나 삼매가 생겨납니다. 찰나 삼매가 생겨나야지 만이 기쁨이 일어나집니다.
여러분들 수행해나갈 때 어떻게 됩니까?
이런 관찰하는 마음이 넓게 퍼져나가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자꾸 모아줘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대상도 단순화시켜서 나가야 되고 관찰하는 포인트도 한 점으로 자꾸 모아줘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거기서 카니까 사마디가 생겨납니다. 이 카니까 사마디-찰나 삼매로 인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수행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위딱까 부분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위짜라 부분 하면서 위딱까와 위짜라를 같이 연결해나가는 방법을 얘기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굉장히 위딱까 위짜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이. 잘 들어서 이해를 하도록 하십시오.
오늘은 빠낀나까 쩨따시까(pakiṇṇaka-cetasika) 부분입니다. 잡심소라고 풀이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공통적인 심소는 여러분들이 설혹 모른다 해도 어차피 일어나지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중요도를 따질 것 같으면 그것보다도 오히려 이 잡심소가 수행에서는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의 공통되는 심소와 이 잡심소의 차이점은 뭡니까? 일어나기도 하고 안 일어나기도 하거든요. 근데 어쨌든 둘 다 동타심소란 말입니다. 나쁜 심소에서도 일어나고 좋은 심소에서도 일어나진단 말입니다. 근데 이 잡심소 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수행에서 가장 많이 들먹여지는 문제고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을 좋은 심소 쪽으로 수행에서 연결을 시키면 빨리 결과를 얻고 그렇지 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립니다.
그래서 이 잡심소라고 하는 것은 ‘좋은 심소와 함께 하면 선심소가 되고, 나쁜 심소와 함께 하면 악심소가 되는 동타심소입니다.’
맨 처음에 듣는 게 이 위딱까(vitakka) 부분입니다. 위딱까는 조금 있다 설명하겠지만 물질에 얽매여가지고 돈 버는 방법만 자꾸 생각한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로바(lobha), 탐욕하고 연결돼있는 거죠? 사업하는 분들은 틀림없을 겁니다. 뭐하면 돈이 눈에 보인다고 그래. 그런 쪽으로만 연결될 것 같으면, 그런 쪽만 자꾸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걸 뭐라 그래요? 까마 위딱까(kāma vitakka)라고 그럽니다.
근데 그것보다는 여러분들 같이 불재일날, 뭐 안되면 팔계지키고 이럴려고 열심히 절에 찾아오고, 또 수행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하고, 또 안 그러면 넘어가가지고 출가할려고 하고, 탐욕의 위험을 알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꾸 노력을 하고 그런 생각을 갖다가 많이 가지는 그런 것은 뭐라 그럽니까? 넥캄마 위딱까(nekkhamma vitakka)라 그러죠? 조금 전에는 까마 위딱까였는데 이번에는 넥캄마 위딱까 정반대가 돼버리는 거죠.
똑같은 위딱까 인데 어떤 경우에는 선심소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불선심소가 돼버리게 됩니다. 또 막 나쁜 악의를 가져가지고 누구를 죽이고 싶다든지, 어떤 걸 때려뿌시고 싶다든지 이런 것들은 뭡니까? 도사(dosa)에 근거를 하는 거죠?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건 뭡니까? 그걸 브야빠다(byāpāda) 위딱까 라고 그럽니다.
근데 그렇지 않고 멧따(metta)-자애를 자꾸 방출할려고 하는 걸 뭐라 그럽니까? 브야빠다 하고 반대죠? 아브야빠다(abyāpāda) 위딱까 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굴 학대한다든지 죽일려 한다든지 해롭게 할려고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 이런 걸 위힝사(vihiṁsā) 위딱까 라고 그럽니다. 반대되는 건 뭡니까? 아힝사(ahiṁsā)죠? 아위힝사(avihiṁsā)라 해서 까루나(karuṇā) 라고 하는 동정과 연민의 정을 자꾸 계발할려고 하고 이런 것들입니다.
이렇게 맨 처음에 시작하는 위딱까든 그 뒤에 이루어지는 것들이든 자칫 잘못하면 나쁜 심소와 결합을 해버리고, 그걸 바르게 쓸 거 같으면 선심소와 결합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릇된 잡심소는 버려버리고 바른 잡심소를 일으켜야 만이 지혜를 증가시키고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끔 한다 하는 겁니다.
어쨌든 이렇게 악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선으로 갈 것이냐 하고 결정하는 것은 뭡니까? 뭔가가 결정해야 내가 선이 됐든 악이 됐든 내가 간단 말이라. 그걸 갖다가 아디목카(adhimokkha)라 그럽니다.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거라. 아디목카도 똑같이 여기 잡심소에 들어갑니다.
그다음에 위리야(vīrya) 노력이라는 것, 위리야라고 하는 것의 이익은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살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일 많이 일어나고 잘된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것도 없죠?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위리야가 있는 사람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하고 부처님이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 위리야도 똑 마찬가집니다. 좋은 방향으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나쁜 방향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삐띠(pīti)라고 하는 것, 기쁨이나 만족하는 감정이죠? 어쨌든 이 기쁨도 나중에는 수행에서는 큰 장애로써 작용합니다.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닙바나를 체험하고 싶을 때, 또는 자비를 널리 베풀려고 할 때, 좋은 행위를 하기를 원하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뭡니까? 찬다(chanda)의 영역에 속하죠. 원함, 바램이라는 것으로 찬다의 영역에 속합니다.
어쨌든 이런 여섯 가지가 잡심소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지만 마음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죠? 멧따가 여러분들 마음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죠? 위딱까가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죠? 찬다가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일어날 때도 있고 안 일어날 때도 있다 하는 거라. 그래서 잡심소와 마음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심소들 하고의 차이점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공통되는 심소 보다는 오히려 이 잡심소를 잘 활용을 해야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중요한 역할들을 하는 것이 이 잡심소 부분입니다.
첫째 되는 부분인 위딱까 부분을 한번 봅시다. ‘vitakka (위딱까 尋): 겨냥, 생각, 논리’
스님이 풀이해놓기는 ‘겨냥’이라고 해놨습니다. 상깝빠(saṅkappa)라는 것을 보통 겨냥이라고 표현을 하죠? 수행에서는 상깝빠 하고 위딱까 하고는 거의 같은 기능으로써 작용을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 위딱까를 표현해 놓을 때 ‘일으킨 생각’, 보통 ‘생각’ 이런 식으로 합니다. ‘생각’도 적합한 용업니다. 그다음에 논리적인, 논리정연하게 한다고 할 때 그 ‘논리’라는 개념들을 씁니다.
스님은 가장 그래도 우리말에 적합한 게, 특히나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단어는, 위딱까의 개념은 ‘겨냥’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래도 그것이 완전하게 위딱까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되도록 위딱까, 위짜라라고 하는 개념은 그냥 그대로 써주는 것이 좋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맨 처음에 위딱까는 ‘인식 대상을 마음에 싣는 기능. 동시에 마음의 추론을 담당함.’ 그렇게 적어놨습니다.
밤이 되면 보통 잠을 자죠? 근데 생각할 것이 많아가지고 생각이 많으면 잠이 옵니까? 잠 안 오죠? 아무리 피곤해도 몸이 피곤하든 마음이 피곤하든 해도 생각이 많으면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제발 스님, 나 좀 잠 좀 자고 싶은데 제발 잠 좀 재워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생각 안 하면 잠이 옵니다. 생각을 하니까 잠이 안 오는 거라. 그런 거를 뭐라 그럽니까? 바로 위딱까의 기능이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위딱까 라는 기능이 마음을 계속 새로운 대상에게 보내주기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생각을 굴린다고 그러죠? 생각을 열심히 굴러가게 해주는 것 그것이 위딱까 입니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이 향하도록 대상에 보내주는 기능 그것이 위딱까 입니다. 근데 그 대상이 자꾸자꾸 늘어나죠. 그러니까 그 대상 대상마다 계속적으로 보내주는 것들이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생각을 자꾸 굴린다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위딱까의 기능입니다.
근데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보통 뭔가 결론이 나죠? ‘아, 그렇구나’ 하고 선명하게 뭔가 탁 압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결론이 나게 되면 잠이 오게 됩니다. 위딱까가 계속적으로 기능을 안 하죠. 또는 선명해질 것 같으면 그 환희로 인해서 아주 깨끗해지고 맑아지죠? 그때도 위딱까는 기능하지 않습니다.
매우 선명하게 됐을 때는 위딱까는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초선에서만 드러나지는 것이 위딱까, 위짜라다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계속적으로 설명해나가면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이 이해가 돼나갈 겁니다.
그래서 보통 수행에서는 위딱까 하고, 위짜라 하고 같이 얘기들을 합니다. 마음을 대상에 보내주는 것이 위딱까인 것이고, 대상에 보내주는 것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 위짜라 입니다.
보통 종을 치면 종 울림이 ‘우우우우웅’ 하고 일어납니다. 처음에 종을 땅 쳤을 때는 그 소리가 둔탁합니다. 그런데 뒤에 울림은 여러분들 듣기에도 좋게 미세하게 울립니다. 그래서 위딱까, 위짜라는 종을 치는 것과 종의 소리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종을 처음에 딱 쳤을 때가 위딱까에 해당되고, 그 종소리가 쭈우욱 울리는 것이 위짜라에 해당이 됩니다.
새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크게 날개짓을 확 해가지고 올라갑니다. 근데 올라가면 어떻게 합니까? 하늘로 올라가고 나면 날개짓을 안 합니다. 저절로 씨익 가집니다. 처음에 날개짓을 크게 할 때 이런 것을 위딱까 라고 하고, 그리하지 않아도 살금살금 나아가지는 것이 위짜라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수행에서는 위딱까와 위짜라를 동시에 써주기도 합니다.
이 위딱까는 대상에 바르게 겨냥을 해줄 수 있어야 되는 거죠?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뭔가 하는 것을 갖다가 헤아려줄 줄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마음에 가져오게 하고 마음에 떠올려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위딱까 라는 개념을 갖다가 상깝빠(sankappa), 딱까(takka), 압빠나(appaṇā), 아비니로빠나(abhiniropana) 이런 용어들 하고 거의 같은 용어로써 아비담마에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위딱까는 그런 뜻이다 하는 걸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밑에 한 번 더 봅시다.
‘눈에 무엇인가 보이는 대상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순간 「보였다」라고 하는 실감을 만들어 내는 안식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무엇이 보였는가는 모릅니다. 다음 순간에 「꽃이다」 「의자다」와 같이 본 대상을 인식합니다.’
처음에 보여졌을 때 하고 그것이 완전하게 인식했을 때 하고의 사이에 ‘요게 뭔가’ 하고 처리해줄 수 있는 기본적인 기능이 있다는 거라. 그 기본적인 기능이 뭐냐 하면 위딱까 라는 거라.
자,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이. 대상, 그리고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앞에 있는 대상과 눈이 접촉하죠? 접촉을 해가지고 탁 봤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본 느낌이 탁 떠오르죠? 그러면 느끼고 나서 우리는 보통 ‘아, 이게 뭐다’하는 걸 지각을 하죠? 이 지각한 것에 대해서 ‘아, 이게 뭐지’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위딱까 입니다. 생각하고 나선 완전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인식한 것에 대해서 좋은 경험들이 있을 것 같으면 좋은 방향으로 넘어가지고 나쁜 방향이면 나쁘게 넘어가집니다. 망상쪽으로 흘러가버리고.
그래서 대상과 마음이 만나는 것이 촉이 되고, 그 촉-팟사(phassa)로 인해서 웨다나(vedanā)-느낌이 일어나집니다. 스님이 무수하게 얘기했던 부분입니다이. 그 느낌으로 인해서 산냐(sañña)-지각하는 것들, 산자나띠(sañjānāti)-지각하는 것들이 일어나지고, 지각으로 인해서 생각이 일어나지고, 이게 위딱까 입니다.
그 위딱까로 인해가지고 그다음에 발전하는 게 뭡니까? 망상 빠빤짜(papañca)라고 하는 망상 쪽으로 흐르는 것인가, 아니면 대상 쪽으로 흐를 것인가 하고 구분을 짓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망상을 일으키기 직전의 상태가 위딱까 라고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위딱까가 좋은 경우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고, 나쁜 경우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위딱까를 버리라고 나와 있는 경전도 있고, 어떨 때는 위딱까를 계발해라 하고 얘길 하는 경전도 있습니다.
근데 아까 위딱까가 까마 위딱까, 브야빠다 위딱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똑같은 위딱까입니다. 나쁜 방향의 위딱까지만. 근데 이런 욕망이라든지 분노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사유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어떤 대상에 몰입한다든지, 내가 흥미를 일으키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흥미를 일으켜야 만이 그 대상에 몰입을 하고 뭐 분노를 일으키든 욕망을 일으키든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관심과 흥미를 일으키게끔 할려면 어떻
게 해야 됩니까? 마음이 약간 들뜨지 않으면, 마음에 약간 파동이 있지 않을 거 같으면 흥미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위딱까라 하더라도, 바른 방향의 위딱까라 하더라도 그런 미세한 떨림이 없을 거 같으면 그건 위딱까가 될 수가 없는 거라.
그럼 다른 방향으로 얘기하면 수행에서 내가 대상에 완전하게 밀착해가지고 아무런 경계도 없이 평온한 상태가 된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건 이미 위딱까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그러면 대상에 그냥 일치되어 가지고 나아가기 때문에 그건 이미 자나(jhāna)쪽으로 빠져버린 거라.
이 위딱까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제일선정(第一禪定)에서 일어나지는 것이다. 약간의 떨림이 있어야지 만이, 그게 나쁜 방향으로 넘어가버리면 욕망이나 악의나 이런 방향으로 넘어가지지만, 바른 방향으로 넘어가버릴 것 같으면 수행에 얼마든지 좋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삼매에 들려고 노력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 노력을 할 거 같으면 이 위딱까, 위짜라를 계발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은 어떤 면에서는, 특히나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위딱까, 위짜라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을 버려버리는 상태에서는 이미 이선정(二禪定) 이상으로 넘어가버립니다. 물론 아라한에 이르는 방법은 후자의 방법으로 이르는 길도 있습니다.
보통 아라한에 이르는 방법이 네 가지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를 크게 구분하면 후자의 방법과 전자의 방법이 있습니다. 순수 위빳사나를 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있고, 사마타 수행을 결부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나눠가지고 서로 조합해가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어쨌든 크게 두 가진데 순수 위빳사나를 하는 여러분들이 할 거 같으면 틀림없이 위딱까, 위짜라로써 깨달음에 이르도록 만들어나가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게 전통적인 위빳사나 수행방법입니다. 그래서 얼마만큼 이 위딱까, 위짜라가 중요한지 다시금 알아야 됩니다.
자, 위딱까(vitakka)의 위(vi)는 ‘명확하게, 세세하게’ 라는 의미이고 딱까(takka)는 ‘생각, 사색, 논리’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의미로써의 위딱까는 ‘추론’이라는 뜻입니다. 추리해서 생각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근데 수행에서의 이 위딱까의 의미는 ‘바른
겨냥’ 삼마상깝빠(sammā-saṅkappa)의 의미를 가리킵니다. 그래야만이 이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일어난다는 연기의 법에 근거한 바른 이해가 생겨나집니다. 그래서 그런 사성제와 연기의 법을 따라가지고 일어나게끔 하는 것도 이 위딱까 입니다.
‘대상을 마음에 싣는다’ 하고 주석서에서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꽃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벌이 이 꽃을 봤단 말입니다. 그러면 꽃을 향해서 날아가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이 꽃에 있는 꽃술을 탁 따먹습니다. 따먹고 나서 그 벌은 어떻게 합니까? 그 주위를 윙윙윙윙 이러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따먹죠. 벌이 꽃을 향해서 날아가는 것 이것을 수행에서는 바른 겨냥이라고 그럽니다. 대상이 여기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그 대상을 향해서 날아가는 것 이게 바른 겨냥입니다. 위딱까의 의미가 바로 이 ‘바른 겨냥’의 의미로써 쓰여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그걸 바르게 겨냥 하고 나서 지속적으로 그걸 먹게 되는 거를 ‘위짜라(vicāra)’ 라고 그럽니다. 그렇게 벌에다가 비유를 해놓기도 합니다.
위딱까라고 하는 기능이 일반적인 논리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죠?
‘눈을 떠서 무엇인가를 본 순간, 「붉은 장미꽃이다」라고 인식해 버립니다. 「붉은 장미꽃이다!」라고 하는 말은 이렇게 인식하고 나서 그 후에 덧붙일 수 있습니다. 이른바 「말」을 하기 이전에, 논리적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라고 스님이 적어 놨습니다.
생각을 한다고 해봅시다. 어떤 특정한 생각. ‘이게 뭐지’ 하고 한국에서 잘하는 화두를 해도 됩니다. 어떤 대상에 사무치게 빠져든다고 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 대상과 일치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워져 버립니다. 대상과 딱 직면해 있기 때문에, 대상을 딱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때도 화두 들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때는 화두 들고 있는 사람 없습니다. 아니면 특정한 어떤 생각, 그거 들고 있는 경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대상과 직면해가지고 일체가 되어 있을 때는 그걸 안 들고 있습니다. 그 속에 그냥 묻혀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는 특정한 생각, 아니면 특정한 언어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수행에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대상에 마음을 딱 일치시켜 가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순일하게 쭉 해나갈 때, 명확하게 탁 일치가 될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명칭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명칭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 거 혹시 경험해본 적 있습니까? 이렇게 명칭이 떨어져 나가버린 상태에 있는 경우에는 이미 대상에 몰입돼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선정(二禪定) 이라고 하는 것이 그와 마찬가집니다.
위딱까와 위짜라가 존재를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명칭을 가지고 대상에 끊임없이 일치시켜주고, 일치시켜주고 하는 노력들을 해나가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는 특히 한국불교 하시는 분들이나 이런 분들 보면 대상에 몰입을 할 거 같으면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냥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고통이라든지 이런 느낌조차도 없습니다. 근데 이것이 고통이구나 하는 걸 모를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더 발전해질 수 없습니다. 수행에서 고(苦)를 알아야 집(集)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멸(滅) 도(道)로 넘어가지는 건데 고(苦) 자체를 모른다는 거라. 삼매의 위험성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히려 이 위딱까를 알기에는 더 수월한 상태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여덟 살 때 잠부디따 잠부나무 아래에서 했던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하고 뒤에 회상을 합니다. 그때 했던 게 뭡니까?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여덟 살 때 한 것입니다. 뒤에 많은 노력을 추가해서 많은 노력을 해봤지만 결국에는 그것은 선정으로 가는 길이었지 깨달음하고는 관계없는 길이었다 하고 그걸 뒤늦게 육 년 후에 발견한 겁니다.
그러고 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한 것이 뭐였습니까? 여덟 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밭매는 경작하는데 가서 나무 아래 앉아서 했던 호흡 그거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대상을 알아차려나가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부처님은 제일선정(第一禪定)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분입니다. 여덟 살 때 했던 것들을 여러분들이 못할 수 있겠습니까? 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마하 삿자까라고 하는 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경작하시던 밭고랑 염부수나무 아래에 앉아서 욕망으로부터 떠나고, 유익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떠나 위딱까와 위짜라를 지닌 채 넥캄마-떠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문 적이 있던바 바로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었다’고 부처님이 회상하면서 한 경전 구절입니다.
그게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거라.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떠난 것, 그것을 떠나서 대상에 마음을 일치시켜주는 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됐다.
자, 그래서 ‘이 기본적인 논리를 간단하게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고 적어놨습니다.
오늘도 신발 벗고 왔죠? 자기 신발 어떻게 벗고 왔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봐요? 어떻게 벗었어요? 지금 어떻게 벗었는지 기억하는 사람? 왼발부터 벗었는지 오른발부터 벗었는지 기억하는 사람? (대답)
오른발부터 먼저 벗었어요? 오른발 벗고 나서 왼발 벗고 올라왔어요? 분명하게 기억합니까? 그럼 위딱까를 했구먼.
다른 사람? 기억 못 하는 사람은? 어찌 벗었는지 모르는 사람?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봐. 다 그냥 왼발부터 벗었는지 오른발부터 먼저 벗었는지 모르죠? (대답)
그럼 거기는 무슨 발부터 먼저 벗었어요? (대답) 왜 오른발부터 먼저 벗었습니까? 습관적인 겁니까? 그거는 틀린 얘기입니다. 오른발부터 벗은 이유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위딱까 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수 있을 거 같으면 ‘왜 내가 오른발부터 벗었지’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보십시오. 그러면 위딱까가 드러나 집니다. 이번에는 오른발부터 먼저 벗었다, 다음에는 왼발부터 먼저 벗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걸음을 뗄 때 오른발부터 먼저 뗄 때가 있고, 왼발부터 먼저 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 발이 먼저 떼지는가? 하는 거라. 그 동작에서.
바로 그게 원인입니다. 그 원인을 알 것 같으면 위딱까를 알 수 있습니다. 위딱까라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습관적으로 했다는 것은, 그거는 무의식적으로 했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걸 먼저 벗었습니다.
(질문)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음에서 먼저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절대 오른발부터 먼저 벗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먼저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오른발부터 먼저 내려지는 겁니다. 그 마음에서 먼저 명령을 탁 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위딱까 입니다.
어쨌든 마음을 대상으로 향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위딱까 라는 것이. 그래서 그 대상이 드러나도록 해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먼저 여러분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들을 유심히 살펴볼 것 같으면 틀림없이 위딱까를 발견해나갈 수 있습니다.
자, 수행에서 한번 봅시다. 해보십시오.
앉아서 ‘일어남’ ‘사라짐’ 한번 해보십시오. 자, 편안하게 하고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해보십시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대상과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관찰하는 마음이 딱 맞아떨어지도록 겨냥하고 조준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것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수행은 절대 해나갈 수 없습니다.
맞아떨어지지 않아도 수행은 할 수는 있습니다. 근데 그것은 대상 하고는 관계없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근데 움직이는 대상과 관찰하는 마음이 딱 맞게 떨어질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바르게 대상을 겨냥을 해야 됩니다. 그 겨냥하는 것이 뭡니까? 위딱까 입니다.
겨냥을 하고 나면 뭐 합니까? 마음이 거기에 가 있도록 밀어줘야 됩니다. 그걸 노력하는 힘이라고 그럽니다. 위리야(vīriya)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 대상에 끊임없이 밀착하게 만들어주는 것. 겨냥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겨냥하고 조준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
수행은 사실은 이 두 가지로써 처음엔 다 시작을 합니다. 상깝빠(saṅkappa) 하고 위리야(vīriya) 라고 하는 것 두 가지만이 처음에는 다 시작하는 단계에서 있게 돼 있습니다. 이것만 열심히 노력할 것 같으면 수행은 처음엔 다 시작해 나갑니다.
그래서 수행은 뭐라 그럽니까? 대상을 벗어나면 자꾸 끄잡아 들이라고 그러죠? 끄잡아 들이라는 건 뭡니까? 그마만큼 노력을 하고 대상을 바르게 겨냥하라는 얘깁니다. 겨냥하고 노력하고 하는 것만 지속적으로 계속하라는 겁니다. 일반적인 사고하고는 다르죠?
지식적인 생각은 이게 아닙니다. 이거는 직접적으로 행해나가는 것들이라.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관찰하는 대상을 바르게 겨냥하여서 마음을 대상에 맞추는 것, 이것이 위딱까 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위딱까하고 위리야가 있고 나서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지속적으로 되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마음이 그 대상위에 계속적으로 지탱해주도록 하는 것 이것이 위짜라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위짜라가 있을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속적으로 겨냥하고 힘을 쏟아야만이 지탱해나갑니다. 그래서 위딱까와 위리야가 없을 것 같으면 위짜라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상에 지탱을 해주게 되면 정확하게 대상에 마음이 일치하게 됩니다. 일치하게 되어서 일치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퍼뜩 기쁨(pīti)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 내가 참 수행 잘했구나’ 하고 만족하게 되고 또 행복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고요하게 대상에 마음에 모여져 있고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에깍가따. 이것이 초선(初禪)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초선에서는 위딱까- 대상에 바르게 겨냥을 하고, 그 겨냥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지탱되게 하는 위짜라가 있게 되고, 위딱까 위짜라가 있어져서 바르게 내가 대상과 마음이 일치됐다는 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있고, 그 기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감들이 있고, 그래서 마음이 대상에 고요하게 탁 가라앉았다는 에깍가따- 심경일성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가 초선에서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끊임없이 대상에 마음을 겨냥시키는 알아차림, 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이 맞아떨어지도록 겨냥해주는 것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위딱까 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을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을 알지 못하면, 대상에 바르게 겨냥하지 못하면 그건 알아차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명확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겨냥을 해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훈련들을 갖다가 계속 해줄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은 자연스럽게 민첩하고 활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게을러지고 나태해지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방어해나갑니다. 나쁜 방향으로 욕망이나 악의나 이런 것들로 넘어갈려고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바른 방향으로 넘어와 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내가 이 위딱까를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망상으로 빠질 것이냐, 아니면 바른 겨냥 바른 대상과 일치시켜줘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할 것이냐 하는 것이 판가름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과 대상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이 위딱까다 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딱까와 밀어주는 힘이 있어져서, 마음이 관찰대상에 모아져서,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것, 이 위짜라가 있으면 당연히 카니까 사마디(khaṇika-samādhi) 찰나 삼매가 생겨납니다. 찰나 삼매가 생겨나야지 만이 기쁨이 일어나집니다.
여러분들 수행해나갈 때 어떻게 됩니까?
이런 관찰하는 마음이 넓게 퍼져나가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자꾸 모아줘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대상도 단순화시켜서 나가야 되고 관찰하는 포인트도 한 점으로 자꾸 모아줘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거기서 카니까 사마디가 생겨납니다. 이 카니까 사마디-찰나 삼매로 인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수행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위딱까 부분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위짜라 부분 하면서 위딱까와 위짜라를 같이 연결해나가는 방법을 얘기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굉장히 위딱까 위짜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이. 잘 들어서 이해를 하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