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착'에 대하여 》3/5
[ 3 ]
세상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욕구나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감을 느낄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또는 불쾌하거나 불안감 없이 즐겁고 여유로울 때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러한 상태를 원합니다. 한 순간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평생 세세생생 원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누구나 한결같이 이와같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서부터 물질적 풍요, 사회적 명성, 건강한 장수, 자손창성을 위해 <이리 부딛치고 저리 휘둘리면서 귀밑머리가 희끗해질 때가지> 고군분투하며 참으로 열심히들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유년기ㆍ청소년기ㆍ청년기를 거치면서 함께했던 동무들ㆍ학우들ㆍ선생님들, 집떠나 3년 가까이 동고동락했던 병영전우들. 출가 이후 수행한답시고 세계 곳곳을 떠돌면서 만났던 무수한 사람들. 그 가운데는 잠깐 스친 인연도 많았지만 오랜 인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세상(세간) 사람들 가운데 온전한 행복을 향유하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사람들,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온갖 고민ㆍ고뇌에 빠져있던 사람들, 못 먹어서 걱정이고 너무 잘 먹어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그 사람들, 온갖 근심걱정 속에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그때 그 사람들, 때론 기뻐하고 때론 슬퍼하였고, 때론 환희하고 때론 절망하면서 그들 모두는 늙고 병들고 죽어갔습니다. 그들에게 만남ㆍ만족의 기쁨은 잠시였지만 <이별의 아픔ㆍ 두고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ㆍ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실로 큰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들 모두는 회한의 임종을 맞이했고 또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출가 이후 많은 불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가운데 온전한 행복ㆍ온전한 평안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승도 마찬가지고요. 내노라하는 부자ㆍ기업의 대표ㆍ유명 정치인 ㆍ법조인은 물론 정신과 의사까지도 온갖 고민ㆍ번민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나마 출가자들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만족할 줄 아는 지족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재가자들에 비해 번민이 훨씬 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과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크고 작은 번민에 시달립니다. 설령 도과를 성취했더라도 완전한 도과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불가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출가자는 모름지기
계를 잘 지키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탁발을 매일 실천하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가르침을 배우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신통력을 얻은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불환과(不還果, 4단계 성인의 과위 중 3번째 단계)를
얻은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아라한과(阿羅漢果, 4단계 성인의 과위 마지막 단계)를
얻은 뒤라야 안심할 수 있다."
왜, 불환과에 이르렀는대도 안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일까요? 불환과에 이른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함에 대한 갈애>는 제거되었지만, 아직 <아만심>(我慢心)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만심이 남아 있으면 <스스로 자만하여 자신보다 낮은 세계의 존재를 낮게 보고 경멸하는 교만심>을 내게 됩니다. 아만심은 감각이나 존재함에 대한 <갈애>는 아니지만 자아(에고)에 기반한 미세한 <갈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만심이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이 흔들려 온전한 선정에 들 수 없습니다. 번뇌가 아직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아라한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와같은 아만ㆍ흔들림ㆍ무명이 완전히 제거되어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이 세상은 마음에 의해 이끌려가고 마음에 의해 지배당한다" 하셨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선도하고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무명(無明)으로 덮혀 있고, <갈애>로 들끓고 있기 때문에 고통이 생겨난다" 하셨습니다. 내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입니다. 슬플 때 '이제 그만 슬퍼해야지' 하면 슬픔이 사라집니까? 즐거울 때 '계속 즐거워해야지' 하면 계속 즐거울 수 있습니까? 슬픔과 즐거움은 조건이 바뀌면 사라집니다. 온데간데 없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세상일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이 자기 마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하는 일입니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어야 자신의 마음을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다룰 있는 분은 오직 아라한 뿐입니다. 그만큼 마음을 다루는 것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극복(정복)하는 것이 그 얼마나 힘든 일이었으면 "전쟁터에 홀로 나가 백만 대군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했겠습니까?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은 물리적인 것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 마음에서 비롯된 고통입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몸은 병들지라도 마음은 병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하는 일을 매순간 놓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면 마음은 병들지 않습니다. 마음의 성품을 꿰뚫어 알고 꿰뚫어 보아서 마음의 성품을 온전히 이해하면 마음의 병은 온전히 치유됩니다. 마음이 괴롭습니까? 그것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 자체에는 본래 질병의 성품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마음의 참성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마음이 바르게 작동하지 않고 오작동하여 <마음의 병>을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은 세상사람 누구나 예외없이 앓고 있는 정신적 질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 행동하고 쓸데없이 욕심부리고 화를 냅니다. 어떤 사람을 한번 증오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죽고 없는대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증오합니다. 임종의 순간에도 증오심을 내려놓지 못한 채 괴로운 죽음을 자초합니다. 즉 대상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갈애>하고 <집착>하고 <취착>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건강하지 못한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불건전한 마음상태입니다. 불건전한 마음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은, 곧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그와같은 불건전한 마음상태를 질병이라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잘못된 인식입니다. 잘못된 인식이 대상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갈애>하고 <집착>하고 <취착>하게 합니다. 이로인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갈애>를 끊지 못하면 <갈애>가 또 <갈애>를 낳아서 괴로움이 증폭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한 우울증ㆍ조울증ㆍ공항장애ㆍ정신분열(조현병)ㆍ분노조절장애ㆍ마약중독과 같은 약물중독이나 감정조절 장애만을 정신적 질병으로 간주하여 신경계 약물을 복용하거나 정신과 상담을 통해 치료합니다.
사실 이와같은 정신적 병리현상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심리현상이 아니라 세상사람 누구나 예외없이 조금씩은 겪고 있는 정신적 질환입니다. 가령 명절 때 자손들이 오랜만에 모였다가 썰물처럼 다 떠나고 나면 대부분의 노부모님들은 며칠동안 우울증을 앓습니다. 만날 때는 반가워서 얼싸안았다가도 헤어질 땐 아쉬운 마음에 눈물까지 흘립니다. 감정이 하루에도 열두번이 아니라 시도때도없이 변덕부릴 때가 있지 않던가요? 또는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의도하지도 않은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죽끓듯 했던 적은 없었던가요? 중독이 어디 마약중독 뿐인가요? 무수히 많은 세상사람들이 건강에 해롭다는 술과 담배는 왜 그토록 마시고 피워대는 것일까요?
<마음의 병>은 자신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거나 <지금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 알아차림하지 못할 때 생겨납니다. 감각대상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아는 마음>을 일치시켜 관(觀)하지 못하면, 마음은 욕망이 시키는대로ㆍ본능적으로ㆍ반사적으로 이리 이끌리고 저리 휘둘리면서 건강하지 못한 불건전한 심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마음의 병>에 걸린 것이지요. 마음이 괴롭습니까? 매사가 불만족습럽습니까? 그것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신 분을 <붓다>라고 합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모든 존재들이 겪고 있는 고통(괴로움, 불만족)의 본질을 온전히 꿰뚫어 보고 온전히 깨달으셨습니다. 즉, 일체중생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질병의 실체를 바르게 알고, 질병이 생겨나는 원인을 바르게 알고, 질병이 소멸하는 것을 바르게 알고, 질병의 소멸에 이르는 법을 바르게 완전하게 깨달아 <붓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고따마 부처님을 일컬어 법왕(法王, 진리의 왕)ㆍ<의왕>(醫王, 치유의 왕)이라고도 합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잠 못 이루는 <마음의 병>이 난무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질병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법왕이시며 의왕이신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진리를 실천수행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육체적 질병도 견뎌낼 수 있고, 그 어떤 정신적 질환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
천박한 <갈애>와
세상에 대한 집착에 정복된 자,
그의 슬픔은 늘어만 간다네.
비 맞은 비라나 풀처럼.
하지만 세상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이 천박한 <갈애>를 극복한 자,
그에게서 슬픔이 떨어져 나간다네.
연잎 위에서 물방울이 굴러 떨어지듯이.
뿌리가 튼튼해서 상하지 않으면,
나무가 잘려도 다시 자라듯,
잠재된 <갈애>가 제거되지 않으면,
이 고통은 거듭해서 생겨난다네.
쾌락을 향해 흐르는
36가지 [갈애]의 세찬 흐름,
탐욕에 집착하는 생각들의 급류가
그릇된 견해를 가진 자를 휩쓸어 간다네.
탐욕에 빠진 자들은 [갈애] 흐름을 따라간다네.
거미가 스스로 만든 거미줄을 따라가듯.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을 끊어버리고 나아간다네.
바라는 바 없이, 모든 고통을 버리고서.
과거도 내려놓고, 미래도 현재도 내려놓아라.
존재의 저 언덕을 건너서.
일체에서 벗어난 마음을 가진 그대는
다시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으리.
생각이 혼란스러운 사람,
욕망이 가득하고, 쾌락을 쫓는 사람,
그 사람에게 <갈애>는 더더욱 자라나고,
실로 단단한 족쇄를 만든다네.
궁극에 도달했고, 두려움이 없으며,
<갈애>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은 존재의 화살을 부숴버렸다네.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몸이라네.
<갈애>가 없고, 집착이 없으며,
경전의 언어에 숙달되어 음절들의
결합과 순서를 잘 이해하는 사람,
그는 참으로 마지막 몸을 가진 사람,
큰 지혜를 가진 위대한 사람이라 불린다네.
나는 일체를 이겨냈고, 일체를 안다네.
어떤 것에도 더럽혀지지 않았고,
일체를 버렸으며, <갈애>의 부숨으로 해탈했다네.
스스로 완전히 깨달았으니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랴.
모든 보시 가운데는 법보시가 으뜸이고
모든 맛 가운데는 법의 맛이 으뜸이며
모든 기쁨 가운데는 법의 즐거움이 최고라네.
<갈애>의 부숨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을 극복한다네.
《Dhammapada》'Taṇhā-vagga'
<법구경> '갈애 품' 중에서
※
불멸 2568. 4.12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
《 '애착'에 대하여 》3/5
[ 3 ]
세상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욕구나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감을 느낄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또는 불쾌하거나 불안감 없이 즐겁고 여유로울 때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러한 상태를 원합니다. 한 순간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평생 세세생생 원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누구나 한결같이 이와같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서부터 물질적 풍요, 사회적 명성, 건강한 장수, 자손창성을 위해 <이리 부딛치고 저리 휘둘리면서 귀밑머리가 희끗해질 때가지> 고군분투하며 참으로 열심히들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유년기ㆍ청소년기ㆍ청년기를 거치면서 함께했던 동무들ㆍ학우들ㆍ선생님들, 집떠나 3년 가까이 동고동락했던 병영전우들. 출가 이후 수행한답시고 세계 곳곳을 떠돌면서 만났던 무수한 사람들. 그 가운데는 잠깐 스친 인연도 많았지만 오랜 인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세상(세간) 사람들 가운데 온전한 행복을 향유하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사람들,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온갖 고민ㆍ고뇌에 빠져있던 사람들, 못 먹어서 걱정이고 너무 잘 먹어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그 사람들, 온갖 근심걱정 속에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그때 그 사람들, 때론 기뻐하고 때론 슬퍼하였고, 때론 환희하고 때론 절망하면서 그들 모두는 늙고 병들고 죽어갔습니다. 그들에게 만남ㆍ만족의 기쁨은 잠시였지만 <이별의 아픔ㆍ 두고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ㆍ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실로 큰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들 모두는 회한의 임종을 맞이했고 또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출가 이후 많은 불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가운데 온전한 행복ㆍ온전한 평안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승도 마찬가지고요. 내노라하는 부자ㆍ기업의 대표ㆍ유명 정치인 ㆍ법조인은 물론 정신과 의사까지도 온갖 고민ㆍ번민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나마 출가자들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만족할 줄 아는 지족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재가자들에 비해 번민이 훨씬 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과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크고 작은 번민에 시달립니다. 설령 도과를 성취했더라도 완전한 도과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불가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출가자는 모름지기
계를 잘 지키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탁발을 매일 실천하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가르침을 배우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신통력을 얻은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불환과(不還果, 4단계 성인의 과위 중 3번째 단계)를
얻은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된다.
아라한과(阿羅漢果, 4단계 성인의 과위 마지막 단계)를
얻은 뒤라야 안심할 수 있다."
왜, 불환과에 이르렀는대도 안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일까요? 불환과에 이른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함에 대한 갈애>는 제거되었지만, 아직 <아만심>(我慢心)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만심이 남아 있으면 <스스로 자만하여 자신보다 낮은 세계의 존재를 낮게 보고 경멸하는 교만심>을 내게 됩니다. 아만심은 감각이나 존재함에 대한 <갈애>는 아니지만 자아(에고)에 기반한 미세한 <갈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만심이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이 흔들려 온전한 선정에 들 수 없습니다. 번뇌가 아직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아라한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와같은 아만ㆍ흔들림ㆍ무명이 완전히 제거되어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이 세상은 마음에 의해 이끌려가고 마음에 의해 지배당한다" 하셨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선도하고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무명(無明)으로 덮혀 있고, <갈애>로 들끓고 있기 때문에 고통이 생겨난다" 하셨습니다. 내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입니다. 슬플 때 '이제 그만 슬퍼해야지' 하면 슬픔이 사라집니까? 즐거울 때 '계속 즐거워해야지' 하면 계속 즐거울 수 있습니까? 슬픔과 즐거움은 조건이 바뀌면 사라집니다. 온데간데 없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세상일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이 자기 마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하는 일입니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어야 자신의 마음을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다룰 있는 분은 오직 아라한 뿐입니다. 그만큼 마음을 다루는 것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극복(정복)하는 것이 그 얼마나 힘든 일이었으면 "전쟁터에 홀로 나가 백만 대군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했겠습니까?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은 물리적인 것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 마음에서 비롯된 고통입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몸은 병들지라도 마음은 병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하는 일을 매순간 놓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면 마음은 병들지 않습니다. 마음의 성품을 꿰뚫어 알고 꿰뚫어 보아서 마음의 성품을 온전히 이해하면 마음의 병은 온전히 치유됩니다. 마음이 괴롭습니까? 그것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 자체에는 본래 질병의 성품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마음의 참성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마음이 바르게 작동하지 않고 오작동하여 <마음의 병>을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은 세상사람 누구나 예외없이 앓고 있는 정신적 질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 행동하고 쓸데없이 욕심부리고 화를 냅니다. 어떤 사람을 한번 증오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죽고 없는대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증오합니다. 임종의 순간에도 증오심을 내려놓지 못한 채 괴로운 죽음을 자초합니다. 즉 대상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갈애>하고 <집착>하고 <취착>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건강하지 못한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불건전한 마음상태입니다. 불건전한 마음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은, 곧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그와같은 불건전한 마음상태를 질병이라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잘못된 인식입니다. 잘못된 인식이 대상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갈애>하고 <집착>하고 <취착>하게 합니다. 이로인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갈애>를 끊지 못하면 <갈애>가 또 <갈애>를 낳아서 괴로움이 증폭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한 우울증ㆍ조울증ㆍ공항장애ㆍ정신분열(조현병)ㆍ분노조절장애ㆍ마약중독과 같은 약물중독이나 감정조절 장애만을 정신적 질병으로 간주하여 신경계 약물을 복용하거나 정신과 상담을 통해 치료합니다.
사실 이와같은 정신적 병리현상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심리현상이 아니라 세상사람 누구나 예외없이 조금씩은 겪고 있는 정신적 질환입니다. 가령 명절 때 자손들이 오랜만에 모였다가 썰물처럼 다 떠나고 나면 대부분의 노부모님들은 며칠동안 우울증을 앓습니다. 만날 때는 반가워서 얼싸안았다가도 헤어질 땐 아쉬운 마음에 눈물까지 흘립니다. 감정이 하루에도 열두번이 아니라 시도때도없이 변덕부릴 때가 있지 않던가요? 또는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의도하지도 않은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죽끓듯 했던 적은 없었던가요? 중독이 어디 마약중독 뿐인가요? 무수히 많은 세상사람들이 건강에 해롭다는 술과 담배는 왜 그토록 마시고 피워대는 것일까요?
<마음의 병>은 자신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거나 <지금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 알아차림하지 못할 때 생겨납니다. 감각대상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아는 마음>을 일치시켜 관(觀)하지 못하면, 마음은 욕망이 시키는대로ㆍ본능적으로ㆍ반사적으로 이리 이끌리고 저리 휘둘리면서 건강하지 못한 불건전한 심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마음의 병>에 걸린 것이지요. 마음이 괴롭습니까? 매사가 불만족습럽습니까? 그것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신 분을 <붓다>라고 합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모든 존재들이 겪고 있는 고통(괴로움, 불만족)의 본질을 온전히 꿰뚫어 보고 온전히 깨달으셨습니다. 즉, 일체중생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질병의 실체를 바르게 알고, 질병이 생겨나는 원인을 바르게 알고, 질병이 소멸하는 것을 바르게 알고, 질병의 소멸에 이르는 법을 바르게 완전하게 깨달아 <붓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고따마 부처님을 일컬어 법왕(法王, 진리의 왕)ㆍ<의왕>(醫王, 치유의 왕)이라고도 합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잠 못 이루는 <마음의 병>이 난무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질병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법왕이시며 의왕이신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진리를 실천수행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육체적 질병도 견뎌낼 수 있고, 그 어떤 정신적 질환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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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한 <갈애>와
세상에 대한 집착에 정복된 자,
그의 슬픔은 늘어만 간다네.
비 맞은 비라나 풀처럼.
하지만 세상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이 천박한 <갈애>를 극복한 자,
그에게서 슬픔이 떨어져 나간다네.
연잎 위에서 물방울이 굴러 떨어지듯이.
뿌리가 튼튼해서 상하지 않으면,
나무가 잘려도 다시 자라듯,
잠재된 <갈애>가 제거되지 않으면,
이 고통은 거듭해서 생겨난다네.
쾌락을 향해 흐르는
36가지 [갈애]의 세찬 흐름,
탐욕에 집착하는 생각들의 급류가
그릇된 견해를 가진 자를 휩쓸어 간다네.
탐욕에 빠진 자들은 [갈애] 흐름을 따라간다네.
거미가 스스로 만든 거미줄을 따라가듯.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을 끊어버리고 나아간다네.
바라는 바 없이, 모든 고통을 버리고서.
과거도 내려놓고, 미래도 현재도 내려놓아라.
존재의 저 언덕을 건너서.
일체에서 벗어난 마음을 가진 그대는
다시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으리.
생각이 혼란스러운 사람,
욕망이 가득하고, 쾌락을 쫓는 사람,
그 사람에게 <갈애>는 더더욱 자라나고,
실로 단단한 족쇄를 만든다네.
궁극에 도달했고, 두려움이 없으며,
<갈애>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은 존재의 화살을 부숴버렸다네.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몸이라네.
<갈애>가 없고, 집착이 없으며,
경전의 언어에 숙달되어 음절들의
결합과 순서를 잘 이해하는 사람,
그는 참으로 마지막 몸을 가진 사람,
큰 지혜를 가진 위대한 사람이라 불린다네.
나는 일체를 이겨냈고, 일체를 안다네.
어떤 것에도 더럽혀지지 않았고,
일체를 버렸으며, <갈애>의 부숨으로 해탈했다네.
스스로 완전히 깨달았으니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랴.
모든 보시 가운데는 법보시가 으뜸이고
모든 맛 가운데는 법의 맛이 으뜸이며
모든 기쁨 가운데는 법의 즐거움이 최고라네.
<갈애>의 부숨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을 극복한다네.
《Dhammapada》'Taṇhā-vagga'
<법구경> '갈애 품' 중에서
※
불멸 2568. 4.12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