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착'에 대하여 》1/5
[ 1 ]
요즘 이 승의 주요 관심사는 고통(불만족)의 근원인 <갈애>(渴愛, Taṇhā)ㆍ<집착>(執着, Upaya)ㆍ<취착>(取着, Upādāna)>에 대한 추적ㆍ관찰ㆍ사유입니다. 그 찰거머리 같은 <애착>을 심도있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봄으로써 그 실체를 다시한번 파악하여, 그 사슬을 길이 끊어내는 일입니다. 안으로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추적 관찰하고, 밖으로는 고민상담자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인간의 심연에 달라붙어 있는 <애착>이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가를 다시한번 조명해보는 일입니다.
출가 이래 지금까지 오취온(집착의 5가지 다발ㆍ무더기, 즉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수행을 통해 고통(불만족)의 심연을 끊임없이 들여다보았고, 그로 말미암아 그토록 들끓던 젊은날의 마음이 기나긴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평정에 이르렀다고 확신했었습니다. 2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보았다, 분명히 이해했다, 완전하진 않지만 거친 번뇌ㆍ미세한 번뇌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확신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온이 작동하는 순간 <갈애> <집착> <취착>은 본능적으로 생겨납니다. 6문(門)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갈애>가 생겨납니다. 대상의 무상한 성품을 철두철미하게 관(觀)하지 못하면 <갈애>는 <갈애>를 낳고, 그 <갈애>는 또다시 <갈애>를 낳아서 대상을 <취착>하게 만듭니다. <갈애>는 대개 <취착>으로 나아가지만, 대상을 취하여 집착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리석은 마음은 대상의 참성품이 어떤 것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대상(뱀)을 사랑스러운 것으로 착각하여 끊임없이 갈구하게 됩니다. <취착>으로 말미암아 맹독이 온몸에 퍼지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이 고통인 줄 잘 알지 못합니다. 괴로워요, 힘들어요, 죽고 싶어요 하면서도 대상을 놓지 못한 채 갈구하며 집착합니다. <갈애>하고 <취착>하면서 세세생생 생사윤회의 어두운 밤길을 헤매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콤한 행복이 고통인 줄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어떤 희열도 행복도 심지어는 극도의 평온마저도 그 이면엔 고통이 도사리고 있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행복감이나 극도의 평온이 왜 고통이 될까요? 행복과 평온의 무상한 성품을 잘 알지 못한 채 <갈애>하고 <취착>하기 때문입니다.
윤회하는 이 중생계에 완전한 행복ㆍ완전한 평온은 없습니다. 행복과 평온은 조건따라 생겨났다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는 하나의 무상한 심리현상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은 불안한 행복과 불온전한 평온에 탐닉되어 <갈애>하고 <취착>하면서 고통을 겪습니다. [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6처(六處) -> 접촉(接觸) -> 감수(感受) -> 갈애(渴愛) -> 취착(取着) -> 유(有, 존재) -> 생(生, 태어남) -> 노, 사, 우, 비, 고, 뇌(老, 死, 憂, 悲, 苦, 惱) ]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싯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얼마나 갈구하고 집착했으면 그토록 사랑하던 이가 지금 내 곁에서 내 손을 붙잡고 있는데도 그리울 수 있을까요? 사랑스러운 대상을 만나면 사랑에 대한 갈증은 더욱더 깊어져서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소유하고 싶고 더 사무치도록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이 욕망의 다른 이름이 바로 <갈애>(갈증)요, <취착>(집착)입니다.
<갈애>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6근(眼耳鼻舌身意)을 통해 감각되어진 대상에 대한 <취착>은 더욱더 고착되어 <괴로움>(생노병사우비고뇌)으로 이어집니다. <갈애>가 그 얼마나 강렬하고 <취착>이 그 얼마나 고착되어 있으면 <님의 말소리에 귀가 먹고> <님의 얼굴에 눈이 멀겠습니까>? <갈애>가 그 얼마나 강렬하고 <취착>이 그 얼마나 고착되어 있으면 시각이 상실되고 청각이 망가지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일까요?
신체적 결핍 가운데 시각ㆍ청각의 장애만큼 큰 결핍은 없을 것입니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는 선천성인 경우가 많지만, 성장하면서 고열을 앓은 경우 시각이나 청각이 손상되기도 합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극도의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시각이나 청각이 일부 손상 혹은 완전 상실되는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의 말미에서는 이 승이 상담자를 접하면서 실제로 경험했던 그와 관련된 사례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꽃은 이 중생계에서 좋은 감각대상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요즘 이곳에는 겨울 혹한을 견뎌낸 홍매화 한 그루가 첫 개화를 시작했습니다. 꽃을 바라볼 때 그 꽃을 무심히 바라보면 꽃을 탐닉하게 됩니다. 시각이 홍매화와 접촉하는 순간 시각접촉이 일어났음을 알아채지 못하면 그 꽃에 대한 <갈애>가 들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그 꽃의 향기와 자태에 심취하면서 <취착>하게 됩니다. 좋은 감각대상을 만나면 대상을 고운 감각으로 감수하면서 그 감각에 대해 본능적으로 <갈애>하고 <취착>하게 됩니다.
행복은 언제나 <결피=배고픔=갈애=갈증>을 동반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밑빠진 물항아리 같아서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울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득 채웠지만 채워진 순간 허기를 느끼게 됩니다.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결핍의 불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갈증과 집착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눈으로 보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꽃을 꺽게 됩니다. 꽃을 꺾는 순간 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꽃을 꺾지 마십시오. 바라봄의 탐닉에도 빠지지 마십시오. 그 어떤 동요도 없이 초연한 마음으로 시각접촉하고 있음만을 알아차림하십시오. 만일 <갈애>가 일어났다면 <갈애>가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취착>하고 있으면 <취착>하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합니다. 항상하지 않습니다. <갈애>도 <취착>도 조건따라 생겨난 마음의 현상일 뿐입니다. 조건따라 생겨난 마음은 조건이 바뀌면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와같은 무상성을 관(觀)하지 못하면 본능적으로 <갈애>하고 <취착>하게 됩니다. <갈애>하고 <취착>하 순간 고통이 발생합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갈애>와 <취착>을 고통의 주원인으로 보셨습니다. <무명(無明, Avijjā)>을 고통의 근본원인으로, <정신적 형성(行, Sankhārā)>을 고통의 동력원으로 보셨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감각적 욕망으로 점철된 세속적 삶의 방식과 자신을 혼독하게 학대하는 수행방식을 버리고, 멀리 둥게스와리(코끼리산, 전정각산)가 바라다보이는 보리수 아래에 앉으시어 중생들이 고통 속에서 나고 죽는 <오온의 윤회>, 즉 <십이연기>를 발생하는 순서와 소멸하는 순서대로 관찰하시고는 동이 틀 무렵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깨달음의 감흥을 다음과 같이 읊으셨습니다.
"수많은 생 윤회하면서
얻은 것 없이 여기저기 헤매었다.
집 짓는 자를 찾는동안 거듭되는 생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갈애)여!
나는 그대를 보았노라. 그대 다시는 집 짓지 못하리라.
그대의 모든 갈비뼈 부러졌고,
서까래는 형성작용에서 떠나버렸다.
마음은 이미 형성작용에서 벗어나 버렸고,
<갈애>의 종말에 이르렀다."
[Khuddaka-Nikaya]《Dhammapada》
(법구경) 153-154번송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고타마 붓다께서는 천리길을 마다 않고 걷고 또 걸으시어 다섯 수행자들이 머무는 바라나시 사슴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셨습니다. 법의 수레에는 <갈애>의 종말에 이르는 법,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는 법, 구경의 해탈ㆍ열반에 이르는 법, 생사윤회의 고단한 여정을 길이 종식시킬 수 있는 법이 실려 있었습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추구해서는 안 되는
<2가지 극단>이 있느니라. 무엇이 2가지인가?
한 극단은 <감각적 쾌락에 몰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열등하고 저속하고 세속적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유익함이 없으며,
또 한 극단은 <고행에 몰두하는 것>으로서 이것 또한
고통스럽고 성스럽지 못하고 유익함이 없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런 양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가 올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이 <중도>는
법의 눈을 갖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평온한 앎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닙바나로 인도하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여래가 올바르고 완전히 깨달은,
법의 눈을 갖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평온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닙바나로 인도하는 <중도>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8가지 도로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활수단,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이니라.
비구들이여, 이런 것이 여래가 올바르고 완전히 깨달은
중도로서, 법의 눈을 갖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평온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닙바나로 인도하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이와 같느니라.
태어남이 괴로움이요, 늙음이 괴로움이요, 병듦이 괴로움이요,
죽음이 괴로움이요,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또한 괴로움이요,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요, 요약컨데
<오온(五蘊)에 대한 <취착> 자체가 괴로움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제 <괴로움의 원인의 성스러운 진리>는 다음과 같느니라.
그것은 <갈애>로 인해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쾌락과 탐욕을 쫒아가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니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함에 대한 갈애>, <비존재(허무)에 대한 갈애>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진리>는 이와 같느니라.
그것은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이며, 버리고, 놓아버리고,
해방되어서, <취착함이 없는 것>이니라."
[S56:11]《Dhammacakkapavattana Sutta》
(전법륜경) 중에서
위에 인용된 경구 가운데 끝에서 두 번째 단락을 보면, 고따마 붓다께서는 <갈애>에 대한 특성을 3가지로 통찰하셨습니다. 빨리어 원문과 함께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갈애>(Taṇhā)는 습관적으로 새롭게 다시(puna) 태어남을 만드는 것(bhavika)이고(1), 즐김과 기뻐함(nandī)과 탐욕(rāga)이 함께하는(sahagta) 것이며(2), 태어나는 어느 곳이든 곳곳(tatra-tatra)에서 즐기고 기뻐하는(abhinandinī)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습관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 어디서 그 어떠한 재생의 몸을 받더라도 즐기고 기뻐한다는 뜻으로서, 설령 그곳이 악처(惡處)일지라도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김과 기뻐함과 탐욕이 함께한다는 것은 만족을 모른 채 끊임없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갈애> 속에는 그와같은 성향이 깊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그 뿌리를 잘라내지 못하면 괴로움은 지속적으로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깊게 뿌리박힌 <갈애>의 잠재성을 어떻게 잘라낼 수 있을까요?
※
불멸 2568. 3. 30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
《 '애착'에 대하여 》1/5
[ 1 ]
요즘 이 승의 주요 관심사는 고통(불만족)의 근원인 <갈애>(渴愛, Taṇhā)ㆍ<집착>(執着, Upaya)ㆍ<취착>(取着, Upādāna)>에 대한 추적ㆍ관찰ㆍ사유입니다. 그 찰거머리 같은 <애착>을 심도있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봄으로써 그 실체를 다시한번 파악하여, 그 사슬을 길이 끊어내는 일입니다. 안으로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추적 관찰하고, 밖으로는 고민상담자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인간의 심연에 달라붙어 있는 <애착>이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가를 다시한번 조명해보는 일입니다.
출가 이래 지금까지 오취온(집착의 5가지 다발ㆍ무더기, 즉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수행을 통해 고통(불만족)의 심연을 끊임없이 들여다보았고, 그로 말미암아 그토록 들끓던 젊은날의 마음이 기나긴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평정에 이르렀다고 확신했었습니다. 2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보았다, 분명히 이해했다, 완전하진 않지만 거친 번뇌ㆍ미세한 번뇌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확신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온이 작동하는 순간 <갈애> <집착> <취착>은 본능적으로 생겨납니다. 6문(門)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갈애>가 생겨납니다. 대상의 무상한 성품을 철두철미하게 관(觀)하지 못하면 <갈애>는 <갈애>를 낳고, 그 <갈애>는 또다시 <갈애>를 낳아서 대상을 <취착>하게 만듭니다. <갈애>는 대개 <취착>으로 나아가지만, 대상을 취하여 집착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리석은 마음은 대상의 참성품이 어떤 것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대상(뱀)을 사랑스러운 것으로 착각하여 끊임없이 갈구하게 됩니다. <취착>으로 말미암아 맹독이 온몸에 퍼지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이 고통인 줄 잘 알지 못합니다. 괴로워요, 힘들어요, 죽고 싶어요 하면서도 대상을 놓지 못한 채 갈구하며 집착합니다. <갈애>하고 <취착>하면서 세세생생 생사윤회의 어두운 밤길을 헤매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콤한 행복이 고통인 줄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어떤 희열도 행복도 심지어는 극도의 평온마저도 그 이면엔 고통이 도사리고 있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행복감이나 극도의 평온이 왜 고통이 될까요? 행복과 평온의 무상한 성품을 잘 알지 못한 채 <갈애>하고 <취착>하기 때문입니다.
윤회하는 이 중생계에 완전한 행복ㆍ완전한 평온은 없습니다. 행복과 평온은 조건따라 생겨났다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는 하나의 무상한 심리현상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은 불안한 행복과 불온전한 평온에 탐닉되어 <갈애>하고 <취착>하면서 고통을 겪습니다. [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6처(六處) -> 접촉(接觸) -> 감수(感受) -> 갈애(渴愛) -> 취착(取着) -> 유(有, 존재) -> 생(生, 태어남) -> 노, 사, 우, 비, 고, 뇌(老, 死, 憂, 悲, 苦, 惱) ]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싯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얼마나 갈구하고 집착했으면 그토록 사랑하던 이가 지금 내 곁에서 내 손을 붙잡고 있는데도 그리울 수 있을까요? 사랑스러운 대상을 만나면 사랑에 대한 갈증은 더욱더 깊어져서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소유하고 싶고 더 사무치도록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이 욕망의 다른 이름이 바로 <갈애>(갈증)요, <취착>(집착)입니다.
<갈애>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6근(眼耳鼻舌身意)을 통해 감각되어진 대상에 대한 <취착>은 더욱더 고착되어 <괴로움>(생노병사우비고뇌)으로 이어집니다. <갈애>가 그 얼마나 강렬하고 <취착>이 그 얼마나 고착되어 있으면 <님의 말소리에 귀가 먹고> <님의 얼굴에 눈이 멀겠습니까>? <갈애>가 그 얼마나 강렬하고 <취착>이 그 얼마나 고착되어 있으면 시각이 상실되고 청각이 망가지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일까요?
신체적 결핍 가운데 시각ㆍ청각의 장애만큼 큰 결핍은 없을 것입니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는 선천성인 경우가 많지만, 성장하면서 고열을 앓은 경우 시각이나 청각이 손상되기도 합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극도의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시각이나 청각이 일부 손상 혹은 완전 상실되는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의 말미에서는 이 승이 상담자를 접하면서 실제로 경험했던 그와 관련된 사례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꽃은 이 중생계에서 좋은 감각대상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요즘 이곳에는 겨울 혹한을 견뎌낸 홍매화 한 그루가 첫 개화를 시작했습니다. 꽃을 바라볼 때 그 꽃을 무심히 바라보면 꽃을 탐닉하게 됩니다. 시각이 홍매화와 접촉하는 순간 시각접촉이 일어났음을 알아채지 못하면 그 꽃에 대한 <갈애>가 들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그 꽃의 향기와 자태에 심취하면서 <취착>하게 됩니다. 좋은 감각대상을 만나면 대상을 고운 감각으로 감수하면서 그 감각에 대해 본능적으로 <갈애>하고 <취착>하게 됩니다.
행복은 언제나 <결피=배고픔=갈애=갈증>을 동반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밑빠진 물항아리 같아서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울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득 채웠지만 채워진 순간 허기를 느끼게 됩니다.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결핍의 불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갈증과 집착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눈으로 보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꽃을 꺽게 됩니다. 꽃을 꺾는 순간 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꽃을 꺾지 마십시오. 바라봄의 탐닉에도 빠지지 마십시오. 그 어떤 동요도 없이 초연한 마음으로 시각접촉하고 있음만을 알아차림하십시오. 만일 <갈애>가 일어났다면 <갈애>가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취착>하고 있으면 <취착>하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합니다. 항상하지 않습니다. <갈애>도 <취착>도 조건따라 생겨난 마음의 현상일 뿐입니다. 조건따라 생겨난 마음은 조건이 바뀌면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와같은 무상성을 관(觀)하지 못하면 본능적으로 <갈애>하고 <취착>하게 됩니다. <갈애>하고 <취착>하 순간 고통이 발생합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갈애>와 <취착>을 고통의 주원인으로 보셨습니다. <무명(無明, Avijjā)>을 고통의 근본원인으로, <정신적 형성(行, Sankhārā)>을 고통의 동력원으로 보셨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감각적 욕망으로 점철된 세속적 삶의 방식과 자신을 혼독하게 학대하는 수행방식을 버리고, 멀리 둥게스와리(코끼리산, 전정각산)가 바라다보이는 보리수 아래에 앉으시어 중생들이 고통 속에서 나고 죽는 <오온의 윤회>, 즉 <십이연기>를 발생하는 순서와 소멸하는 순서대로 관찰하시고는 동이 틀 무렵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깨달음의 감흥을 다음과 같이 읊으셨습니다.
"수많은 생 윤회하면서
얻은 것 없이 여기저기 헤매었다.
집 짓는 자를 찾는동안 거듭되는 생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갈애)여!
나는 그대를 보았노라. 그대 다시는 집 짓지 못하리라.
그대의 모든 갈비뼈 부러졌고,
서까래는 형성작용에서 떠나버렸다.
마음은 이미 형성작용에서 벗어나 버렸고,
<갈애>의 종말에 이르렀다."
[Khuddaka-Nikaya]《Dhammapada》
(법구경) 153-154번송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고타마 붓다께서는 천리길을 마다 않고 걷고 또 걸으시어 다섯 수행자들이 머무는 바라나시 사슴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셨습니다. 법의 수레에는 <갈애>의 종말에 이르는 법,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는 법, 구경의 해탈ㆍ열반에 이르는 법, 생사윤회의 고단한 여정을 길이 종식시킬 수 있는 법이 실려 있었습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추구해서는 안 되는
<2가지 극단>이 있느니라. 무엇이 2가지인가?
한 극단은 <감각적 쾌락에 몰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열등하고 저속하고 세속적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유익함이 없으며,
또 한 극단은 <고행에 몰두하는 것>으로서 이것 또한
고통스럽고 성스럽지 못하고 유익함이 없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런 양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가 올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이 <중도>는
법의 눈을 갖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평온한 앎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닙바나로 인도하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여래가 올바르고 완전히 깨달은,
법의 눈을 갖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평온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닙바나로 인도하는 <중도>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8가지 도로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활수단,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이니라.
비구들이여, 이런 것이 여래가 올바르고 완전히 깨달은
중도로서, 법의 눈을 갖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평온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닙바나로 인도하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이와 같느니라.
태어남이 괴로움이요, 늙음이 괴로움이요, 병듦이 괴로움이요,
죽음이 괴로움이요,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또한 괴로움이요,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요, 요약컨데
<오온(五蘊)에 대한 <취착> 자체가 괴로움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제 <괴로움의 원인의 성스러운 진리>는 다음과 같느니라.
그것은 <갈애>로 인해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쾌락과 탐욕을 쫒아가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니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함에 대한 갈애>, <비존재(허무)에 대한 갈애>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진리>는 이와 같느니라.
그것은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이며, 버리고, 놓아버리고,
해방되어서, <취착함이 없는 것>이니라."
[S56:11]《Dhammacakkapavattana Sutta》
(전법륜경) 중에서
위에 인용된 경구 가운데 끝에서 두 번째 단락을 보면, 고따마 붓다께서는 <갈애>에 대한 특성을 3가지로 통찰하셨습니다. 빨리어 원문과 함께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갈애>(Taṇhā)는 습관적으로 새롭게 다시(puna) 태어남을 만드는 것(bhavika)이고(1), 즐김과 기뻐함(nandī)과 탐욕(rāga)이 함께하는(sahagta) 것이며(2), 태어나는 어느 곳이든 곳곳(tatra-tatra)에서 즐기고 기뻐하는(abhinandinī)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습관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 어디서 그 어떠한 재생의 몸을 받더라도 즐기고 기뻐한다는 뜻으로서, 설령 그곳이 악처(惡處)일지라도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김과 기뻐함과 탐욕이 함께한다는 것은 만족을 모른 채 끊임없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갈애> 속에는 그와같은 성향이 깊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그 뿌리를 잘라내지 못하면 괴로움은 지속적으로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깊게 뿌리박힌 <갈애>의 잠재성을 어떻게 잘라낼 수 있을까요?
※
불멸 2568. 3. 30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